[기관지 인터뷰] 강요배 화가
 글쓴이 : 4.3평화재단
작성일 : 2018-11-02 10:49   조회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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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화가 강요배


학력

198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 석사

197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경력

2008년 제주4·3연구소 이사장

2007년 제12대 민족미술인협회 회장

2003()민족미술인협회 제주지회장

1996년 제주민예총 지회장

1994년 탐라미술인협회 대표

1980~1991현실과 발언동인

 

수상

2015년 제27회 이중섭 미술상

199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예술상

 

 

◈ 유년 시절은 막 쟁기질이 끝난 밭과 같아서 밟으면 그 자국이 깊게 패인다고 하던데요, 그 때의 추억이나 경험이 예술가로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저는 바다에서 50m 정도 떨어진 삼양 1동 서흘개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검은 모래사장과 선창가가 있고, 바닷물이 빠지면 갯가가 드러났죠. 어린 시절에 간식거리로 깅이(바닷게)도 잡아먹고, 해초도 뜯고, 여름에는 물속에서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새카맣게 타서 눈만 반짝반짝이며 돌아다니는 거죠. 여기서 8살 때까지 살면서 바닷가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원래 우리 집은 원당봉 동남쪽 원당마을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불타버리고 사라져버린 마을인데, 4·3때 집을 버리고 신촌으로 피난을 가면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된 것이죠. 다시 돌아올 때 원당마을로 가지 않고 삼양 1동 바닷가에 정착한 이유가 4·3과 연관되어 있어요. 4·3사건이 없었다면 오름 소년이 되었을 텐데.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어떤 해변의 감각이 몸에 들어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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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4·3을 겪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에 4·3에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국민학교 1학년이 됐을 때 지금 삼양 2, 초등학교 바로 옆집으로 다시 이사를 왔습니다. 전기도 없었고, 라디오나 신문을 보기 어려울 때이니까 밤이면 등불을 사이에 두고 주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가끔 어머니가 불이 와랑와랑 허당 확~ 봉홧불이 오르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허멍 와닥딱 와닥딱했져. 신촌에 피신행 이시난 한 겨울에, 신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다 모이랜 행, 총을 탁 걸어놓고, 쏘잰 허는디 누군가가 중단을 시켜 겨우 살아났져.”


이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될 쯤에도 누구네 집에 십격(습격) 들었져!”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도둑이 들었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동네 어른들은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좀 길면 폭도 같이 하고 다니지 말라.”고 핀잔을 줬어요. 옛날 얘기죠. 아마 4·3을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일생 생활에서 간간히 들은 말들이 어렴풋하게 어릴 적 기억에 스며들어 있는 거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이렇게 잠복되어 있었던 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작품 주제로 드러나게 되는 거 아닌가. 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내면에 깊이 가라앉았던 기억이 중대한 문제로 부상하는 그런때가 있는 것 같네요.

 

이질적 문화가 겹치는 곳에서 창의적인 것이 발화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70년대 정치적 격변기에 미술대학에 진학하며 고향을 떠나 낯선 문화를 접하셨을텐데요, 예술 창작에 대한 포부 그리고 4·3 연작 동백꽃 지다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청년기 초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것도 일종의 회피로 4·3의 후유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나 인식, 철학적인 고민에 주로 집중을 했습니다. 예술 자체보다도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어떻게 내 인생에서 성취할 것인가서적을 찾으며 독학하는 그런 특이한 미술지망생이었죠. 20대는 그런 철학적 고민의 시기였습니다.

 

30대에 접어들어서 미술동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회, 역사, 정치 등과 관련된 토론들을 많이 했습니다. 현대미술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정치는 어떻게 변해왔으며, 근현대사가 어떻게 전개 됐는지 자연히 공부하게 됐습니다. 사회학적 사고를 갖게 되면서 역사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거의 7~8년 집중적으로 트레이닝 했습니다. 서른일곱 살쯤 되니까 제주4·3의 역사도 보이기 시작했죠.

 

아까 얘기했던 어릴 적 기억들과 이미지들이 떠오르는데, 너무 방대하고 어렵기때문에 작업을 미뤄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위장 절제수술을 하면서 몸에 힘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어려워졌을 때 , 내가 지금 능력은 없지만 한번 해봐야 되겠다, 이러다가 오래못 살면 이 작업을 언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개월 동안 4·3 관련 서적들을 다 끌어 모아 밑줄을 치고 중요한 사건을 노트에 정리해가며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사건의 줄거리를 파악한 후 장면들을 점찍어 백 장면 정도를 잡았습니다. 그 중에 50점으로 일단 1차 정리를 해서 그려낸 것이 동백꽃 지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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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예술 철학으로 추구하던 가치가 4·3을 표현하는 시선에 녹아 있겠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공부한 4·3을 소재로 삼아서 강요배 나름의 보고물을 만든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개인이 해석한 얘기지 전체를 위한 공식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공적인 표현이 아니고 자기표현이거든요 결국. 자기가 탐구한 만큼 결과물을 내는 것이니까요. 저는 모든 예술가들이 가능하면 그런 태도를 견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4·3과 관련 된 더 새롭고 웅대한 작품들이 탄생해야죠.

 

제주4·3으로 도민들이 탄압받고 억압받으며 아무 말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탄압받고 억압받았다고 모두 함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것이지 않습니까. 셀프 리스펙트(자존감)라는 것. 제주4·3은 제주도민과 제주사회의 자존감 회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울분만 쌓이고, 겁에 질려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다고 해서 자존감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예술가로서 그것을 말하고 드러내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제 스스로 제주4·3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 같습니다. 20대 때고민하고 공부했던 진선미의 가치를 삶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동백꽃 지다작품을 창작하면서 예술과 삶에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첫 전시의 반향은 어땠는지요.

 

동백꽃 지다를 제주도로 가져오면서. 굉장히 긴장이 됐습니다. 저에게는 진짜로 검증받는것과 다름없었으니까요. 제주도에서 4·3을 체험하신 분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제가 4·3의 지점들을 정확히 짚었다고 할 수는 없어요. 4·3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느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크게 수정안해도 될 정도였기에 안도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주4·3을 공부하며 사건들을 텍스트로 접하면서, 상상력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 내용도 심오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은 사건이라고 해도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는 연습과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사실 눈물도 많이 났습니다. 이것은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체험이라 할까요. ‘동백꽃 지다작업을 하면서 경험하게 됐죠. 4·3을 이해하려면 상당히 넓은 마음으로 접근해야지그렇지 않으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불가사의한 점이 있죠.

 

제주4·3과 제주도민의 역사는 우리가 흔들리거나, 졸렬해질 때나, 나약해질 때,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됩니다. 마음을 넓혀서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말하는 것 같아요. 아주상당한, 그리고 대단한 치유의 원천이 되고, 선택한 방향에 확신을 갖고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든든한 힘의 원천이 됩니다.

 

4·3 70주년을 맞아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되어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가슴에 동백배지를 달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드세요?

 

4·3의 상징을 동백꽃으로 하자! 누군가 결정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여기저기 동백꽃을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 같은데사실은 처음에 제가 동백꽃을 보여주긴 했죠. 거기에는 작고하신 오성찬 선생님께서 정리한 채록집이 모태가 됐습니다. 이 책에는 1988여성중앙11월 호에 기록된 김인생 할머니의 증언이 정리 돼 있었습니다. “붉게 핀 동백꽃을 바라보거나 한라산 꼭대기에 쌓인 흰 눈을 쳐다 보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 모습 속에 숨겨진 피의 역사가 떠오르곤 한다. 흰 눈위에 동백꽃보다 더 붉게 뿌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아니 벌써 잊었다고생각이 드는, 54년 산 내 인생과 우리 집안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할머니의 그 표현! 원래 동백꽃의 오리지널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제가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4·3으로 탄압을 받고 말하지 못 할 때는 동백꽃이 졌는데, 우리가 4·3을 드러내고 제주도민의 자존감으로서 탄압에 저항했던 역사를 말하게 되면서 오히려 동백꽃이 피어 나고 있구나. 동백꽃이 예쁘잖아요? ‘동백꽃 지다가 아니라 동백꽃 피다로 바뀌어져 갔으면 합니다. 제주도민이 탄압에 함구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켜냈다는 것이잖아요. 그것이 지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당당히 싸워야 한다, 당하지만은 않고 일어섰다는 것. 그런 부분들이 제주도민과 제주사회의 자존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2년에 귀향해 계속 작업하고 계신데요, 선생님 작품 속에서 제주의 매력을 찾는다면요?

 

저는 제주의 바다와 오름을 보며 성장했고, 운명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변의 감각이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귀향하게 된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몸의 기억이었으니까요. 바다에서 자라난 사람들, 특히 저의 경우 서울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주도에 정착한지도 26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귀덕화사라고 부릅니다. 여기가 삼양이랑 비슷합니다.

 

꽉 막힌 제주시내권과 어느 만치 떨어져 있고, 그렇다고 깊은 산으로 가고 싶지는 않고 바다도 가깝잖아요. 여기 이만큼이 딱 좋습니다. 작품을 구상할 때 제주의 매력을 찾는다면 지질시대로부터 시작해서 역사적인 것, 생태학적인 것, 진화의 자연사까지 종합적으로 시공간 축이 딱 맞아 떨어져 융합 돼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는 입체적인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각각의 사물들과 역사들이 레이어()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층들이 켜켜이 쌓여 현재의 거친 질감을 만들고 있어서 시간적 사색을 하기에 상당히 좋은 곳이죠. 육지의 어떤 도시들과 다른 느낌을 주죠.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시공복합체인 셈입니다.

 

국내외 적으로 4·3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이 늘고 있어요. 젊은 미술가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잘난 척하기 딱 좋은 대목인데요. 이제는 1단계가 지나갔습니다. 4·3에 대한 연구, 조사, 알림, 설명부분들은 어느 정도 다 나와 있습니다. 다음 단계는 4·3이라는 역사적 사실보다도 예술성에 더 중점을 두고 예술적으로 탁월한 성취가 돼야 합니다. 그렇게 돼야 예술도 살고 4·3도 살아요. 그런데 4·3의 역사적 사실에만 강조점을 두면 계속 1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예술성도 떨어지고 중복 설명을 반복하는 자기 복제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1단계의 첫 번째 과제는 비교적 쉬운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단계는 굉장히 어려운 단계예요. 상당히 어려운 과제죠 그것이.4·3 그 자체에 함몰되지 말고, 밖으로 향해 작가 개인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길 바랍니다. 4·3을 구심점으로 놓고 자꾸 들여다보고만 있으면 질리는 거예요. 그것을 어떤 자양분으로 삼고 꽃을 만들면 거기서 4·3이 새로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탐미협도 지금까지 잘 해왔습니다.

 

25년 동안 4·3을 미술로서 다뤄왔다는 것은 대단한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이구요.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무덤 옆에서 슬퍼만 하고, 4·3예술이나 미술을 통해 제사만 지내고 있을 것입니까.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면 지금의 진정한 4·3정신에 또 상치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처음, 초심으로 돌아가 돌파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신진 작가들이 심도 있게 토론하고 연구하길바랍니다.

 

선생님이 추구하고 계신 작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갈 길이 아직도 멀었지만, 또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 될 때이죠. 오는 525일 학고재갤러리에서 ()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2주일 동안 전시하고, 다시 622일부터는 메멘토, 동백을 전시합니다. 이 전시는 동백꽃 지다이후의 작업들을 포함한 전시입니다. 이번 개인전 타이틀이 ()을 찾아서인데요. 제가 이번 전시를 통해 미술판에 새롭게 제기해 보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도 중요한 무엇인가만 잡아내고 요약하는 것들이 많잖아요. 단순화되고 압축된 에센스, 핵심 같은 것. 그것을 제가 ()’이라고 말하는데,이해를 넘어서 한꺼번에 포착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일례를 든다면 기억이라는 것은 사건의 요약인 상으로서만 강렬하게 남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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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0주년이 되면서 <4·3 정명>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졌는데요, 과연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말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정명의 문제는 엄청난 고민과 노력,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해방(liberation), 그 다음에 탄압(oppression), 그 다음에 저항(resistance), 그 다음에 학살(massacre), 그리고 소생(revival). 또 그 다음 단계는 개화(blooming)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4·3이 결실을 맺어야 하는데 지금이 나머지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죠. 누군가는 더 오랜 기간이 지나가야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4·3에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이후에 연좌제 등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지금 남북문제, 동아시아의 문제, 세계평화의 문제가 다 깊숙하고 심오하게 연결 돼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나눠서 4·3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왜 꼭 한마디 말로 정리를 해야 되나요? 한마디 말로서 풀었을 때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들도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연구자, 학자, 운동가, 공공기관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토론하고, 자유롭고 더 깊게, 더 심오한 뜻을 연구해야 할 중요한문제입니다.

 

4·3 70주년을 맞으며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

 

4·3을 예술로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품격입니다. 4·3을 어떤 각도로 접근했는지작품에서 다 드러나니까요. 너무 의식화 되면 설득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개인의 예술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 내면에서 뭔가 정곡을 찌르는 감동을 주게 되고 미래를 살아가는 에너지와 지침이 되는 것이예요. 저도 내일 모레면 칠순이 되어갑니다.

 

지금 4·3을 경험한 분들은 다 노년층이고, 조금 더 지나면 제주4·3은 후손들의 4·3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후손들에게 이 4·3의 경험과 역사가 미래를 맞이 하고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4·3에 대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예술 하는 사람,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사업을 하는 사람, 모두 달라지죠. 아주 대단한 거예요. 제주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