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시 부문 당선작> 변희수 - 맑고 흰죽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
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7회 당선작 - 눈 살 때1)의 일
김 병 심
사월 볕 간잔지런한 색달리 천서동. 중문리 섯단마을로 도시락 싸고 오솔길 걷
기. 늦여름 삼경에 내리던 동광 삼밧구석의 비거스렁이. 세 살 때 이른 아침 덜 깬
잠에 보았던 안덕면 상천리 비지남흘 뒤뜰의 애기 동백꽃, 동경에서 공부하고 온
옆집 오빠가 들려준 데미안이 씽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남원면 한남
리 빌레가름. 갓 따낸 첫물 든 옥수수의 냄새를 맡았던 신흥리의 물도왓. 친정집에
서 쌔근거리면서 자는 아가의 나비잠, 던덕모루. 예쁜 누이에게 서툴게 고백하던 아
홉밧 웃뜨르 삼촌.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살았을 것 같은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어
머니가 끓여주던 된장국을 이방인인 그이가 끓여주던 한경면 조수리 근처. 매화차
의 아리다는 맛을 사내의 순정이라고 가르쳐준 한경면 금악리 웃동네. 옛집에서 바
라보던 남쪽 보리밭의 눈 내리는 돌담을 가졌던 성산면 고성리의 줴영밧. 명월리
빌레못으로 들어가는 순례자의 땀범벅이 된 큰아들. 해산하고 몸조리도 못 하고 물
질하러 간 아내를 묻은 화북리 곤을동. 친어머니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마저 내 가
슴에 묻어야만 했던 애월읍 봉성, 어도리. 이른 아침 골목길의 소테우리가 어러렁~
메아리만 남긴 애월면 어음리 동돌궤기. 지슬 껍데기 먹고 보리 볶아 먹던 누이가
탈 나서 돌담 하나 못 넘던 애월면 소길리 원동. 고성리 웃가름에 있던 외가의 초
가집에서 먹던 감자. 동광 무등이왓 큰 넓궤 가까이 부지갱이꽃으로 소똥 말똥 헤
집으며 밥 짓던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깨어진 쪽박이란 뜻인 함박동,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던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소설가.
초여름 당신과 손잡고 바라보던 가파도와 마라도, 알뜨르까지의 밤배. 지금까지“폭
삭 속아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잃어버린 마을.
1) 제주의 어른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써 '눈이 맑을 때' 즉 '정신이 맑을 때'라는 뜻이 담겨있다.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작- 취우翠雨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
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
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붙이 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 밤 한 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5회 당선작- 검정고무신
박용우
어린 동생이 끌려가던, 길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눈물로 던진, 길이었다
여기다, 여기다 하며 두려움이 떨어뜨린, 길이었다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까마귀도 총소리에 숨죽인, 길이었다
섯알오름에서 노을이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이었다
땅 밑에서 고구마가 굵어지고
땅 위에서 고구마 꽃이 자주 빛 울음을 터뜨리는, 길이었다
누이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초경을 앓던, 길이었다
동생에서 누이에게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상모리(上慕里) 불타는 골목마다 비린내를 몰고 가는, 길이었다
제4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부문 당선작-로프
김 산
공중의 바람은 한시도 그대로 머무는 법이 없다
붙들린 기억 저편으로 얽매이고 달아났다 이내,
방치하고 짓무른 거리의 흙 알갱이들을 토해냈다
13년간 복직을 위해 뛰어다닌 관절염은
헛기침 소리에도 소울음을 게워냈고
욕설처럼 들이밀던 탄원서는 침묵의 목도장만
시뻘건 일수를 찍어댔다
끝까지 몰려본 사람은 안다
눈 덮인 산기슭에 놓인 덫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길로 쏜살같이 뚫고 나가는 산짐승은 안다
배낭에 생수 몇 통을 聖水처럼 짊어진 조성옥 씨는
지상 50미터 철강회사 굴뚝 위로 올라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징검돌처럼 한 생 한 생 밟을 때마다
죽지 위로 날개가 파닥거렸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금을 긋는 법이 없다
땅은 땅이면서 하늘은 하늘 그대로를 담고 있다
굴뚝의 몸뚱어리가 후끈 달궈진 쇠근육처럼
매일같이 조여왔다, 휘어졌다
장미보다 들국을 좋아하는 눈이 파란 아내, 코넬리아는
배낭에 울음을 담고 로프를 묶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배낭이 출렁이며 경계를 넘을 때
그는 순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동여매고 산 한 올의 가닥은 무엇이었을까
백만 원 남짓의 서정적인 급료와
선술집에서나 통할 법한 철강 대기업의 명함 한 장
아니다 결코, 그건 아니다
웃자란 수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공중의 바람이
지난날, 그가 배포했던 굴뚝 아래 뒷굽들의
처우개선 유인물처럼 세상의 길가 구석구석까지
낮게 낮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쌩쌩하다
제3회 문학상 당선작 - 무명천 할머니 / 최은묵
할머니 얼굴에는 동굴이 있죠. 동굴은
쇠약한 바람의 입
고장 난 피리처럼 구멍에서 침식된 총소리가 쏟아져요
해풍이 불 때면
바람의 말을 새로 배우느라
밤새 빈병 소리를 내던 할머니
바닷물이 턱에 머물다 가면
정낭 올리듯
동굴 입구를 무명천으로 감싸야만 했어요
저 흰 천은 누굴 위한 비석인지
얼굴에 백비 동여맨 채 바다를 읽는
무명천 할머니
파도가 절벽을 적시듯 침을 흘려요
침은 닦지 못한 비명
숱한 어둠이 동굴에 터를 잡을 때마다
남몰래 뜰에 나와 달빛을 채워 넣었죠
수명을 다한 빛이 녹슬고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 진물처럼 떨어지면
새 무명천 꺼내 빗장을 걸던 할머니, 혼자 떠나요
바람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동굴 벽 짚고 떠나요
이제 동굴은 메워지고 피리소리는 멈추겠지요
잃어버린 턱을 채우려는 듯
월령리(月令里) 백년초가 바람의 말 속삭이면
할머니, 무명천 벗고 가시처럼 다녀가겠죠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북촌리의 봄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
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
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 서우봉[출처]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대상 (2014년)|작성자 서봉교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당선작 - 곤을동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 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