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송시헌 오현고등학교 2학년-첫발.hwp
오현고등학교 2학년 송시헌
첫 발
거칠게 휘어잡은 깃대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 듬성듬성 보이는 우리의 국기는 떠들썩한 기념식 분위기와 맞물려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길가에 있던 조그마한 이발소 앞에 쪼그려 앉아 한 경관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가 맞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긴가민가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봉사와 질서’라는 표장이 달린 제복 윗도리를 여미어 벨트를 조인 채 검은 반원형 제모를 눌러쓴 그 남자는 어렸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남겼으나, 넙데데한 얼굴에 박혀 있는 언뜻 보면 서글퍼 보일만큼 축 처진 눈꼬리나 입가로 미루어보면 거의 틀림없었다. 드디어 내가 맹렬히 째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그 제복 탓에 군중들 사이로는 섞이지 못하고 간혹 기마경찰이 지나는 그 주위만을 겉돌았다. 나는 멀어져가는 경관이 그임을 확신하고 얼굴이라도 내비칠까 했으나 나랏일 중에 감히 나 같은 소시민이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아서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저 얼굴은 어릴 적 내 친구를 자연스레 떠오르게 만들 만큼 판박이였다. 나는 조용히 품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자 담배개비가 타들어가며 나오는 하얀 연기에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벌써 십 년은 족히 지난 기억이지만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젖니도 다 갈지 못했던 시절, 마을을 쏘다니며 밭에서 서리를 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던 나는 그 녀석과 꽤 악명을 날렸다. 내가 행동대장으로 나서서 순진한 아이들을 유치한 장난에 부려먹고 있노라면 이 친구는 어느새 내게 붙어서 거들어주고는 했다. 가끔 물건을 슬쩍할 때는 망을 봐주겠다고 일대를 돌고 오거나, 부모에게 야단을 맞을 적엔 어릴 때는 다 이러면서 크는 거라는 둥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들로 나를 어설프게나마 변호해주는 웃긴 녀석이었다. 그는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함께 했지만, 중학교 이후부터 만나는 날이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놈이 경찰이 다 되다니, 역시 인간사는 종잡을 수가 없군.”
쓰디쓴 담배연기와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악행이란 악행은 도맡아 했을 그가 품행이 방정해야할 경관이 되었다는 건 어지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멍하니 옆을 돌아보자 인파에서 벗어난 어린 아이가 도랑을 넘나들며 뛰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지 두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일제에서 부역한 경찰들이 남아있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가두시위에 속해있는 걸 바라보며 매캐하지만 곧 상쾌해지는 연기의 맛을 음미했다. 그리곤 경관이 향하고 있는 경찰이 진을 치고 있을 행렬의 너머를 내다보며 자연을 내뿜었다. 삼월이라 아직은 쌀쌀하기도 하건만 사람들은 북국민학교를 지나서 쉴 새 없이 걸어갔다. 개미떼와도 같은 그 광경을 감상하는 나는 고작 서서히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담배 한 개비를 아쉬워했다. 바람이 불자 담뱃재가 우수수 떨어져서 흙바닥 위에 흩어졌다. 잿더미 속에는 아직 다 타지 못하고 붉은 불빛을 내는 것도 있었다. 나는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내버리고 밟아서 짓이겼다. 마침 도랑을 넘나드는 그 아이가 내 곁을 지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아이가 쫄래쫄래 행진을 뒤따르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다섯 여섯의 나이를 먹은 걸로 보이던 그 어린아이는 갑자기 튀어나온 기마경찰에게 차여 나가떨어졌다. 아이는 비틀대며 일어나려다가 힘이 부쳤는지 주저앉아서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말에게 얻어맞은 가슴팍을 문지르며 서럽게 흐느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성이 튀어나와서 그 아이를 급히 끌어안았다. 나와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함께 말 위에 올라탄 그 남자를 규탄했으나 그는 아무 대꾸 없이 지 갈 길만 꿋꿋이 갔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널브러져있는 돌멩이를 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돌팔매를 맞은 말은 화들짝 놀라서 움찔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로 달렸고, 그 뻔뻔함에 분개한 군중도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일념 하에 똘똘 뭉치고서는 경찰서로 향했다. 나는 오늘 무심코 보게 된 그 경관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이 무언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분명 사람들이 죽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아이 하나가 조금 다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가슴이 위압감에 서서히 조여 오는 아픔으로 사무쳤다. 유래를 알 수 없는 공포로 두근대는 심장이 경찰서로 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 경관에게 가야만 했다. 어쩌면 뜻밖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불안감을 부추긴 것일 수도 있었고, 엉겁결에 인사를 건넬 시기를 놓친 것에 이제 와서야 뒤늦게 후회가 솟아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봤자 잠깐의 별것 아닌 소요사태에 불과했다. 필시 경찰 일동이 사과를 하던가 해서 좋게 끝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요즘 남조선로동당이나 그런 쪽 정세가 심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정도야 넘어갈 성싶었다. 나는 불안한 속마음을 억누르며 행렬에 섞여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간다며 욕지거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모퉁이를 돌자 곧바로 경찰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돌연 행진이 멈추면서 엉겁결에 앞서 가던 내 또래의 청년과 부딪히고 말았다. 어느덧 앞줄에 있는 이들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들을 일제히 땅에 떨궜다. 나는 의아해하며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나 워낙 체구가 작았기에 유일하게 눈에 띈 것은 덩치 큰 남자들의 뒤통수였다. 나는 무리를 헤치며 앞줄로 나아갔다. 마침내 마주한 것은 총구를 우리에게 겨누고 당장 죽일 듯 노려보는 경찰들의 살의였다. 설진한 경찰들 사이에서 소총을 들이민 그 경관이 여전히 낯이 익기는 아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상황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얼떨결에 한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총구에서 불꽃이 팍 튀어나오며 곧이어 폭음이 울려 퍼졌다. 내 배때기를 꿰뚫은 탄환이 사정없이 내장을 관통하여 뒷사람에게 날아들었다. 이어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총탄은 내게 두 번, 세 번을 날아들어 몸뚱이를 한낱 혈관이 지나는 고깃덩이로 만들며 뼈를 분쇄했다. 나는 선혈을 내뿜으며 쓰러졌다. 경관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 얼굴을 경악으로 일그러뜨렸다. 잇따르는 총성이 멎자 내게 달려들며 외쳤다.
“왜 네가 폭도 놈들이랑 한패인거냐!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