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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마을 4‧3 피해실태

1948년 10월 17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은 본격적으로 초토화작전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이외의 지점은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전부가 해당되었다. 중산간마을에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폭도배로 인정해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포고문에서 밝혔다.

1948년 11월 중순경 대규모의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 당시 총 82개의 중산간마을 중 주민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은 35개로, 표선면 가시리는 주민 희생이 많은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표선면 가시리 마을 주민들이 희생됐던 대표적인 집단학살은 표선리 버들못집단학살과 표선백사장 집단학살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는 표선면 가시리를 급습했다. 이날 희생된 30여 명의 성별과 나이는 당시의 처참함을 대변해 준다.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집에 남았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집집마다 불에 탔고, 자연마을인 가름종서물은 폐허가 되어 사라져버린 마을이 되었다.

11월 22일 가시리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은 연고를 찾아 표선리나 토산리로 이주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겁에 질려 선뜻 내려가지 못한 채 폐허가 된 마을 주변과 들녘을 헤매다 토벌대의 수색전에 총살당했다.

이번에 표선면 가시리 마을에서 발견된 총 3구의 유해도 가시리 소개 와중에 토굴과 움막에 임시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의해 1948년 12월 21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가시리 수색이 있던 그날인 12월 21일. 경찰은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 생활을 하던 가시리 주민들에게 갑작스럽게 집결 명령을 내리고,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이후 경찰들은 호적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사람들과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그 현장에 없는 사람들을 분류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는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따로 선별했다.

경찰은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주민들 90여 명을 표선리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다음날인 12월 22일 표선리 버들못’(현 표선변전소 옆 밭)에서 모두 집단 총살당했다.

4·3위원회에 신고된 버들못 희생자는 87명, 미신고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총 92명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여성 희생자가 44명(48.0%)으로 희생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참혹성을 말해주고 있다.

1949년 2월 1일에는 토벌대가 표선국민학교에 수용 중이던 가시리 소개민들을 또다시 집결시킨 뒤 주민들을 분류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표선면사무소 창고로 연행된 후, 표선백사장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이날 가시리 주민 41명이 학살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10살 미만의 어린아이와 여성, 50~60대 민간인들이었다.

가시리 마을을 비롯해 많은 마을 주민들은 이른바 대살이라는 학살을 당한 것이다. 군경토벌대는 즉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소개 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청년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나이 든 부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자녀 등 주로 노약자들이 총살됐는데, 주민들은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대살(代殺)이라고 불렀다.

4·3 당시 가시리 마을은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해 총 421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제주도에서 노형리(538명), 북촌리(446명)에 이어 세 번째로 주민 학살이 가장 많았던 마을로 꼽힌다.

<출처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98~400쪽, 2003.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198쪽~213쪽,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