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상
작품집
제23회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
시
산 문
그 림
만 화
2
발간사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는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전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시, 산문, 만화 부문에 대한 공모를 실시해, 4·3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인류보편의
가치인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알려 온 청소년 교육 사업입니다. <학생 4·3문예대회>는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지난 2015년부터 제주도내 초·중·고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제주4·3평화공원 및 4·3평화기념관 곳곳에서 백일장 형식의 대회로
진행 해왔습니다.
이 두 교육사업을 통해 청소년들은 4·3의 역사를 공감할 수 있는 정의·화해·치유의
이야기, 그리고 4·3이 남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투영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기량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재작년부터 이어진 코로나 19의 위기로 그동안 성황을 이뤄왔던 <학생 4·3
문예대회>를 개최하지 못해 학생들의 예술활동 기회를 지속적으로 마련하고자 <전국
청소년 4·3문예공모>와 통합·운영하게 되었습니다.
3
고희범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제23회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는 지난 4월 1일부터 9월 26일까지 초등 ▲시 ▲
산문 ▲그림 부문, 중·고등 ▲시 ▲산문 ▲만화 부문으로 공모를 진행해 국내 초·중·
고등학교 102곳에서 479명이 참여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표현이나 형식에만 치중하기보다는 내용과
진정성을 담으려는 흔적이 돋보였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시·산문·그림·만화 부문에 순수한 창작열을 쏟아주신 모든 참가자들과 수상자
여러분에게 축하의 마음을 보내며 좋은 작품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22. 12.
CONTENTS
시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비 오던 날│백록초등학교 6학년 허유진
동백령│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이건영
사월애│제주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정지윤
돌담│백록초등학교 6학년 최송원
똑똑 거기 누구있어요?│제주여자중학교 3학년 안주은
묻지도 듣지도 못한 진실│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정충만
다랑쉬굴│신창초등학교 6학년 김지우
4·3을 알게된 오늘은│신창초등학교 6학년 이지성
멈춰진 할머니의 달력│서귀포여자중학교 1학년 강민서
마을 사람들│귀일중학교 3학년 김수현
다랑쉬굴에서의 숨바꼭질│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권지원
날개깃│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김예린
벚꽃의 위로│백록초등학교 5학년 임단
오빠│백록초등학교 6학년 백루비나
할머니의 눈물│하원초등학교 4학년 김시운
우리 고장 숨겨진 것들│신창초등학교 6학년 토빈다라브랜든
피어올라라│제주중앙여자중학교 1학년 권은주
가슴에서 피어나는 4월의 동백꽃│아라중학교 2학년 김지원
누군가의 이야기│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이지수
남쪽 마을│남주고등학교 3학년 조형석
김춘자│제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김진
모닥불│제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송진협
조화(造花)│서귀포고등학교 3학년 김명건
우리의 노래│제주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고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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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산문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TO. 별이 된 너에게│남광초등학교 5학년 현은서
붉은 소리│제주여자중학교 2학년 김서현
폭도면접│오현고등학교 3학년 양권우
온 동네가 환하게 빛나던 그날│삼성초등학교 5학년 김세민
파도의 목소리│귀일중학교 3학년 김지수
1948년 겨울, 노형리 정존마을│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류하진
나의 마음을 울린 박물관│남광초등학교 5학년 고예리
슬픈 꽃 아름다운 꽃│화성 도이초등학교 6학년 유시윤
할머니의 립스틱│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2학년 이유림
산화(散花) │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박종호
베트남에서 4·3을 만나다│안양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오지윤
4·3평화공원에 다녀와서│삼양초등학교 4학년 박유담
5학년 1반과 함께하는 현장체험학습(4·3현장체험학습)
│
남광초등학교 5학년
김효원
슬픈 기억의 섬│대구월서초등학교 5학년 이지수
제주도의 아픈 기억 4·3│인화초등학교 6학년 현지예
제주, 화해와 용서의 섬│서울배화여자중학교 3학년 오채현
자유의 노래│노형중학교 3학년 고정운
4·3의 영웅들에 대하여│한라중학교 1학년 오지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한소민
동백꽃 필 무렵│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손예원
숨바꼭질│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윤이정
색이 바랜 제주의 기억│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 10학년 김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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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그림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동백꽃 속의 기억│재릉초등학교 5학년 김지아
씻을 수 없는 과거│제주서초등학교 6학년 양효빈
1948 4·3은 가장 아픈 역사│아라초등학교 5학년 양서원
레드 아일랜드│남광초등학교 5학년 정윤서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신제주초등학교 2학년 김주하
4·3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아라초등학교 3학년 김호범
동백꽃 요정들과 함께 자유로워진 무명천 할머니
│
아라초등학교 3학년
양희주
꽃들과 함께│강정초등학교 3학년 오아린
동백꽃이 떨어지던 날│아라초등학교 4학년 현소은
이곳은 우리 모두가 지켜낸 푸른섬 제주도입니다
│
신제주초등학교 4학년
김서윤
제주도의 슬픈기억 4·3 사건│아라초등학교 4학년 박설아
4·3에 꽃│보성초등학교 5학년 박교린
마지막 사진│재릉초등학교 6학년 김가온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어요│제주서초등학교 6학년 오주연
4·3 상처에서 희망으로│보성초등학교 5학년 이재환
4·3 진아영 할머니│서울대곡초등학교 5학년 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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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초 등 학 교
만화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거울에 비친 동백꽃│신성여자중학교 3학년 유혜원
누명│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김동현
4·3을 기억합니다│신성여자중학교 3학년 서민아
남은 이들에겐│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박현영
사라진 마을│제주서중학교 2학년 주연서
다솜이의 아픔│조천중학교 3학년 장유경
새순과 흐르는 소망│제주여자고등학교 2학년 김영아
동백│신성여자고등학교 1학년 장윤실
할머니의 그리움으로 가득한 오늘, 4월 3일│한라중학교 1학년 정재훈
일기장속 할머니의 그날│제주서중학교 1학년 고민서
가려진 진실 속 고통의 시간│표선중학교 1학년 박세정
쌀문│저청중학교 3학년 박소은
한송이 붉은 동백│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진우
그'날'│제주서중학교 2학년 정성초
지루한 일상│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정선민
동백꽃│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1학년 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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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중·고등학교
시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비 오던 날
동백령
사월애
돌담
똑똑 거기 누구있어요?
묻지도 듣지도 못한 진실
다랑쉬굴
4·3을 알게된 오늘은
멈춰진 할머니의 달력
마을 사람들
다랑쉬굴에서의 숨바꼭질
날개깃
벚꽃의 위로
오빠
할머니의 눈물
우리 고장 숨겨진 것들
피어올라라
가슴에서 피어나는 4월의 동백꽃
누군가의 이야기
남쪽 마을
김춘자
모닥불
조화(
造花)
우리의 노래
1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비 오던 날
밖을 봐신디 비가 왐서
나는 서답한거 젖을거 닮아
재게 서답 거드러 감신디
아시가 쫄래쫄래 따라오멍
누나누나 하멍 따라 오는게 강생이 닮아 궵다.
서답 걷으멍 이야기하고 있어신디
허연 동방애에 툭하며 뻘건 피가 번져신디
내 마슴도 툭하며 떨어져가멍 아시도 툭하며 뒈싸져시난 나에게 남은건엇다.
비오는 날 후 부터는 ‘누나 누나’ 하는 강생이 닮은 아시는 바렐수 엇다.
백록초등학교 6학년 허유진
대상
11
시 부문
동백령
엄동설한이 끝나고
따뜻한 구십춘광이 온단다
헌데 춥긴 추운지라
어멍 아방은 우리를 뎁히려고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운다
동승은 좋은지
넬도 피우자고 그런다
그래
내일 장작은
너고
나고
우리다
누굴 뎁히려는지도 모른 채
불탄 재가 되어
봄의 꽃샘추위가 되어
헤메는 동백령이 되었다
헤메는 동백령이 되었다
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이건영
대상
1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사월애
死月哀
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나는 너의 피를 닦아주었다.
이 섬 안의 끝숨과
이 숨 안의 비명은
아득한 봄날을 꽃놀이*로 채웠다.
해진 무명천 아래로 삼킨 해지는 날들이 있었다.
어린 날의 총성과 울부짖음이 귓가에 어린 날들이 있었다.
사라진 마을과 불탄 굴 속, 그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과 삶이 있었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겨도 끝끝내 돌아오는 이들이 있다.
그들 모두를 가만가만 불러보다 기어이 섬을 둘러싼 바다와 눈 밑을 맞대었다.
아릿하게도 보이는 것 모두 붉을 따름이었다.
수십 년 세월 밑, 쓰라림이 흉터로 바뀌었다.
흉터의 색 또한 붉을 따름이었다.
마치 동백처럼.
*꽃놀이: 제주 전통 장례 의식
제주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정지윤
대상
13
시 부문
최우수상
돌담
돌담아 돌담아
물어도 물어도 답을 안해주는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다 보고 있었니?다 듣고 있었니?
돌담아 돌담아
무엇을 보았니?
다 알고 있니?다 보았니?
4월3일만은 쓰러지지 말고 서있어주렴.
바람이 불어도 바다가 몰려와도
계속 쓰러지지 말아주렴.
그날 불던 바람도 그날의 빛도
모두 지금처럼 있어주렴
백록초등학교 6학년 최송원
1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똑똑 거기 누구 있어요?
4월 3일
제주 관덕정 앞
‘똑똑 거기 누구 있어요?’
‘...’
위령탑과 각명비 앞
‘똑똑 거기 누구 있어요?’
‘...’
행방불명인 표석 앞
‘똑똑 거기 누구 있어요?’
‘...’
분명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74년 전 오늘이 잊혀지지 않는 듯
아직도 불안과 공포에 떨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작은 동백들
어느 날 꽃송이채로
툭 떨어져버린
그들의 삶은
내 마음을 붉게 물들인다
제주의 아픔을 기억하는
그들의 눈물은
빨갛게
더 빠알갛게
제주를 채운다
제주여자중학교 3학년 안주은
최우수상
15
시 부문
묻지도 듣지도 못한 진실
한국국제학교 10학년 정충만
제주에는이 속슴허영 지내는 시께가 있쪄.
고인의 명복을 빌멍 곱닥허게 보내주는 의식이주게
시뻘겅헌 거짓으로
슬프고 아픈 진실의 눈물이 흘러도
속슴허영 지내야하는 시께가 있주게
속슴허라,
묻지도 듣지도 말아산다.
속슴허라,
때로는이 골기 싫은 진실도 하영 있쪄.
대맹이 없는 몸둥아리도 이섰고,
몸둥아리 없는 대맹이도 하영 이서났주.
영혼이 없는 육체로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
아멩해도 문 저짝더래 쪼그라졍 앉아실거라
속슴허영 앉아실거라게,
경헌디이 이제는 영이라도 고라살거 닮아.
여기 슬픈 진실이 이서났젠
바당 핏물로 물들이멍
아무 이유어시 죽어나간 소름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할 것 닮댄
명심허영 고라주라이.
최우수상
1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다랑쉬굴
들어가지 말아요
나올 구멍 없는 그 곳으로
숨막히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말아요
길고 어두웠던 시간으로
가두었던 시간으로.
당신은
어서 나와 참았던 숨 편히 쉬고
우리는
돌아가지 말자고 약속해요.
신창초등학교 6학년 김지우
우수상
17
시 부문
4
·3을 알게 된 오늘은
신창초등학교 6학년 이지성
까마귀
오름 위로
동굴 속으로
날아가네
새까만 옷 입고 있어
상처,
피묻은 것
보이지 않지만
오늘도
까-악
까-악
까먹지 말라
까-악
까-악
까먹지 말라
이제는 다르게 들리네
이제는 다르게 보이네
우수상
1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멈춰진 할머니의 달력
서귀포여자중학교 1학년 강민서
매일 매일이 지나도 매년 매년이 지나도
우리 할머니의 방 달력은
매일매일 1948년 4월 3일이다.
멈춰진 그날의 달력.
4월 3일 빨간 글씨로 쓰여 진
오라방 가신 날.
매일 같은 시각 술 한 잔 올리시며
슬피 우시며 하시는 말
나 하나 살리젠 나 대신 간 우리 오라방
미안허우다 미안허우다
다시랑 좋은 세상에 태어납써!
몰래 흐느껴 우시는 할머니의 슬픈 곡소리가
내 마음도 울게 한다.
할머니를 안아드리는 일 밖엔...
나를 안으시며 힘겹게 다시 웃으시는 우리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의 방은 4월 3일!
매일 매일 아픈 4·3이다.
더는 아픈 4·3을 안고 사시지 않게
할머니의 달력이 변했으면 정말 좋겠다.
나와 우리 모두가 4·3을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이니
이젠 위로와 치유의 삶을 사셨으면 정말 좋겠다.
꼭 그려셨으면 좋겠다.
우수상
19
시 부문
마을 사람들
귀일중학교 3학년 김수현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 대신 남긴
하나 걸친 정낭은 어떠한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정낭만 걸친 채,
홀연히 사라졌다.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자리에는
생기 없이 붉은 동백꽃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우수상
2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다랑쉬굴에서의 숨바꼭질
한국국제학교 10학년 권지원
칼바람에 바들바들 떨며 엄마 손을 꼭 잡고 들어갔던 다랑쉬굴
무서워하는 나에게 엄마가 나즈막히 했던 말
‘덕선아, 우리 지금 숨바꼭질 하는거야, 꼭꼭 숨어라'
도대체 어떤 숨바꼭질이길래 이렇게 추운데 달려와 이 자그마한 동굴에 숨어야하는 것일까요
탕! 며칠동안 숨어있다가 오랜만에 들리는 큰소리
그 순간에 소리를 지를 뻔 한 내 입을 막아버린 엄마의 손,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진 다랑쉬굴안
도대체 어떤 숨바꼭질이길래 이렇게 소리도 못내며 숨어야하는 것일까요
며칠동안 지슬 하나 먹은 나의 뱃속이 내는 꼬르륵 소리
그런데 잘 들어보니 배고픈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닌듯 합니다
‘엄마, 배고파요'
도대체 어떤 숨바꼭질이길래 이렇게 배고픔도 참고 숨어야하는 것일까요
화가 난듯 다랑쉬굴 안으로 소리치는 남자 몇명의 목소리
그리고 바들바들 떨고있는 엄마와 다른 사람들
갑자기 연기 냄새가 나고 목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
도대체 어떤 숨바꼭질이길래 이렇게 숨을 못 쉴 때까지 숨어야하는 것일까요
우수상
21
시 부문
날개깃
한국국제학교 10학년 김예린
저기 가는 저 갈매기야 날개를 쉬려거든
그 물 위에는 내려앉지 말아다오
내 누이동생들 던져진 자리이니
바닷속 무덤에 볕들 수 있게
그 물 위에는 내려앉지 말아다오
저기 가는 저 할미새야 날개를 쉬려거든
그 나무 위에 앉아 노래를 불러다오
내 학우들 총 맞아 죽은 터이니
억울한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게
그 나무 위에 앉아 노래를 불러다오
저기 가는 저 비행기야 날개를 쉬려거든
이 섬의 아픔을 침묵하지 말아다오
수많은 사람들 죄없이 죽어나간 곳이니
더이상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게
이 섬의 아픔을 침묵하지 말아다오
우수상
2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벚꽃의 위로
백록초등학교 5학년 임단
바람은 여전히 쌀쌀해서
봄이 온 줄 모르다가
먼저 피었다 떨어진 동백꽃 위에
어느새 하늘 가득 벚꽃이 피었다
4월에 내리는 따뜻한 눈처럼
내 마음도 봄으로 가득 찬다
한겨울 버텨낸 동백꽃이
그 옛날 서러웠던 4월을 견뎠다면
떨어진 동백 위에 날리는 벚꽃은
따뜻한 위로가 되어
나비처럼 덮어준다
장려상
23
시 부문
오빠
백록초등학교 6학년 백루비나
"오빠 잠시만 어디 갔다올게"
"아무 데도 나가지 마!"
비가 내리는 어느날,
내 손에 손편지를 쥐고
문 밖으로 떠나는 오빠.
손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 가는데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네.
오빠가 손수 만들어준 잠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비명 섞인 총소리가 들려오고,
난 그만 털썩 쓰러져 버렸네.
미처 다 읽지 못한,
오빠를 만나면 그제서야 읽으려고 한
손편지가 붉게 물들어갔고
편지의 마지막 줄에 써 있는 말
'사랑하고 고마웠어'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바다처럼 차가운 물방울이
내 눈 밑에 흘러내려 갔네.
동백꽃이 시들어 힘없이 떨어지는 것처럼
나 역시 동백꽃이 되어 쓰러졌네.
오빠..오빠..
장려상
2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할머니의 눈물
하원초등학교 4학년 김시운
할머니는 바다를 가면 가끔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한다.
“할머니 왜 바다에 가면 울어?”
내가 그렇게 말하면 할머니는 나에게 말한다.
크면 다 알게 돼.
할머니가 그렇게 말한 건 크면서 크면서 알게 됐다.
그러면 가끔 나도 눈물이 난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냐 말이다.
나도 이제 할머니가 왜 우는지 알 것 같다.
나는 4·3을 기억할 때 마다
나는 할머니처럼 운다.
장려상
25
시 부문
우리 고장 숨겨진 것들
신창초등학교 6학년 토빈다라브랜든
구멍 숭숭
뚫린 돌 가득한 것만큼이나
사람들
마음에도 구멍이 많이 나 있지
그 돌들
여기저기 쌓인 것만큼이나
사람들
마음에도 아픔이 많이 쌓여있지
땅속 깊이
맑은 물 흐르는 것만큼이나
사람들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4월의 캄캄한 기억이 흐르고 있지
하지만 이제
구멍 난 돌들
손을 잡고 담을 쌓아
바람을 이겨내고
지하수는 흘러 흘러
용천수로 뿜어지면
바다는 그것을 조용히 품어주지
장려상
2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피어올라라
제주중앙여자중학교 1학년 권은주
피어올라라
피어오르리라
붉은 하늘에 퍼지는 울림의 손짓
피어올라라
피어오르리라
끊어지는 마음속 하나의 불빛
피어올라라
피어오르리라
조그만 동굴 속 돌들의 기억
피어올라라
피어오르리라
동백꽃 나무 하나 그곳에 피어오르리라
장려상
27
시 부문
가슴에서 피어나는 4월의 동백꽃
아라중학교 2학년 김지원
찬란한 봄날
빛나는 섬안에
유채꽃이 피고 동백꽃도 피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 꽃이 피는 4월이 오면
내 할머니의 슬프고도 잔인했던 기억도 피었다.
74년전 빛나던 섬은
피빛으로 물든 섬이 되었고
그렇게 봄날은 멈췄다.
유채꽃은 짓밟히고 동백꽃은 꺾였다.
유난히도 아름다웠던 바다와 오름은
붉은 바다 붉은 오름이 되었고
한라산 구석구석 숨어있던 동굴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너무나도 잔인했던 긴 세월
동백꽃은 눈물에 지고 가슴으로 피어났다.
유채꽃은 아픔에 지고 슬픔으로 피어났다.
이제 돌담에 피어난 동백꽃에게
넓은 들판에 유채꽃에게
제주의 산과오름, 저 끝 넓은 바다에게도
큰 소리내어 이야기 해줘야지.
제주에도 따뜻한 봄이 왔다고.
너희들과 함께 하며 기억하겠다고.
내 할머니 속슴해가며 살아 오셨던 긴 세월동안
아팠던 몸과 마음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장려상
2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누군가의 이야기
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이지수
한밤중에
탁탁탁 뛰어가는 소리
신발 한 쪽이 벗겨진 채
뛰어가고 있는
누군가
하지만 결국
군인에게 잡혀
어디론가 사라진다
가족들이
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할아버지
누군가의 형과 누나
그리고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장려상
29
시 부문
남쪽 마을
남주고등학교 3학년 조형석
나고 자란 우리 마을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남쪽엔 푸른 바다가, 북쪽엔 우뚝 솟은 한라산이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어느 날, ‘탕’하고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숨겼습니다
미처 숨지 못한 이웃집 친구가 쓰러졌습니다
지난밤 먹을거리를 나누어주셨던 아주머니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또다시, ‘탕’하고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나고 자란 마을을 뒤로 하고 무작정 달려야 했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마을이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추워도 떨지 못했고 아파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말라갔지만 숨죽인 채 흘리는 뜨거운 눈물만은 마르질 않았습니다
행복했던 우리 마을이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기 푸른 바다와 우뚝 솟은 저 한라산 꼭대기가
남쪽인지 북쪽인지 이젠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왜 도망쳐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겠습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권리로 우리의 행복을 앗아가는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그 이유를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누군가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장려상
3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김춘자
제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김진
제주에서 태어나
하르방이 지어준 이름 갖고
부모가 지어진 밥을 먹고
나의 고향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앞 집 아랫 집
하나 둘 사라지고
우리 집도 사라졌네
돌아갈 곳도 없이
서성거리는.
시간 흐른 뒤 내 이름 남아
누군가에게 기억될까.
장려상
31
시 부문
모닥불
제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송진협
바람이 세차게 불고 물살이 거센 날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 서서히 꺼져간다.
작은 불씨 천천히 스러지며
크고 작은 빛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동굴 속에 들어가 빛조각 모으며
불씨를 만드네
바위 틈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오고
마음의 온기 타올라 우리 마음을 채우네
장려상
3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조화(造花)
서귀포고등학교 3학년 김명건
한 발자국 내딛어 이르는 어느 먼 과거의 들판에는 나무 한 그루가 이름없이 서 있습니다.
오래전에 꽃피우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그 까닭도 잊어버렸습니다.
새순이 얼어가던 어느 비정한 계절을 기억합니다. 꽃망울이 시들어가는 시린 바람을 기억합니다.
나무는 겨울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나무가 꽃피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세상의 나무가 오직 그뿐이라면, 나는 오직 겨울만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시사철 앙상한 가지에는 나뭇잎 하
나 걸쳐있지 않았습니다. 한여름에도 마른가지를 드리워 추운 그림자를 내리는 나무의 모습을 보는 일은 너무
도 괴로웠습니다. 나무가 한기에 몸서리칠 때야 나는 한여름의 햇살이 그토록 시린 줄 알았습니다. 나무는 기
억 속의 겨울에 머물렀습니다. 나무를 보는 나도 나무가 보여주는 겨울에 있었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온 핏줄
이 얼음으로 가득 찬 듯이 몸과 마음이 너무 시려 차마 끝까지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보고있는 우리보다 나
무가 더 아플 것이란 생각에 심장이 미어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헐벗은 가지에 조화(
造花)를 달아주었습니다.
비록 거짓될지언정, 무엇보다 진실된 온기일지어니
누구도 그 나무의 꽃을 꺾어 차디찬 총포를 장식하지 말고,
함부로 그 나무의 꽃을 뜯어 위선의 가면을 꾸미지도 마십시오.
조화(
造花)의 온기에 얼어붙은 꽃망울 풀리는 날
비로소 우리는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될 테지요.
그날이 오는 동안, 저는 바라보겠습니다.
이제는 햇살에 떨지않는 저 이름없는 나무를
장려상
33
시 부문
우리의 노래
제주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고민지
제주의 봄날
언젠가 일기장 한 편에 그런 말을 적었다
이 섬의 봄은 피는 꽃보다 지는 낙엽이 더 많다고
제주의 바다
사람들의 기억이 떠내려간 바다는 짜디짰고
그 파도는 차가운 소음으로 육지에 되돌아왔다
제주의 사월
속솜하라는 말이 돌담을 따라 쉴 새 없이 메아리쳤다
그는 달싹거리는 그의 입을 숨 쉴 틈 하나 없이 막았다
여기까지가 당신이 아는
그리고 내가 아는
제주의 봄과 바다와 사월의 이야기
이제 우리 나무의 뿌리를 다시 세우고
날카로운 파도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
주저앉던 날들의 이야기로 노래를 짓자
봄에 나리는 낙엽처럼 불릴 기억을
차가운 소음으로 기억될 나날을
용서할 수 있어도 잊을 수는 없도록
그들의 이야기와 이 섬의 노랫말이
바다의 선잠처럼 쉬이 꺼질 불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우리가 손을 맞잡는다면 영원한 겨울도 이겨낼 수 있기에
또 다시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기억을 우리에게 들려주려는지
시린 봄을 함께 이겨낼 어떠한 용기를 쥐어주려는지
장려상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시 부문 심사평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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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 시 부문 응모작은 초등 152편, 중등 44편, 고등 59
편, 총 255편이다. 제주4·3사건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되
새기는 이번 행사에 많은 학생이 참여하여 열기를 더한 것은 그 나름대로 뜻이 깊다.
공모 주제가 제한적이어서 응모자가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기 어려웠지만, 주어진
틀 안에서 제주4·3의 문제를 숙고하여, 그것을 시라는 양식으로 표현해내려는 고심이
많은 응모작에 드러나서 반가웠다. 반면 4·3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연을 시적 상황으
로 즉각 대응시키는 유형의 시가 어느덧 거의 ‘전형’이 되어가는 것은 반갑지 않은 현
상이다. 구체적인 지명에 얽힌 일화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평화와 인권을 구두선
(口頭禪)으로 내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시는 표어와는 다른 것이다.
제주4·3이라는 질료를 어떻게 시라는 형식에 잘 종속시킬 수 있을지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더 고민해야 한다. 4·3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희미
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 역사적 비극을 양식화하는 과정을 통과해 봄으로써 우리는 우
리가 그 비극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4·3의 기억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 윤리의
문제는 미학의 문제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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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에서는 「비 오던 날」(대상)과 「돌담」(최우수상)이 돋보였다. 대상작은 빨래터
에서의 비극적 사건을 다룬다. 일종의 증언을 시로 옮긴 것인데 제주 방언을 활용함으
로써 그 진실성을 높인 점이 좋다. 최우수작은 제주의 대표적 이미지인 ‘돌담’에 말을
거는 상상력을 높이 살 만하다.
중등부에서는 「동백령」(대상)과 「똑똑 거기 누구 있어요?」(최우수상)가 눈에 띄었
다. 대상작은 산으로 들어간 가족이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비극적 상황을 모닥불이 가
장 아름다운 순간과 겹쳐 놓은 것으로 그 상상력이나 언어의 운용이 괄목할 만하다. 최
우수작은 그에 비해 다소 서툴지만, 관덕정이나 각명비 등 사적에 말을 걸면서 중학생
다운 순수성을 보인 점이 좋다.
고등부에서는 「사월애」(대상)와 「묻지도 듣지도 못한 진실」(최우수상)을 뽑았다. 대
상작은 제주에서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진중한 어조로 말한다. 특히 제3연에서 사
건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있었다”를 연달아 쓴 것이 좋다. 제목의 잔재주나 마지
막의 직유보다 그 반복이 오히려 좋은 것이다. 최우수작은 제주 방언에 묻은 한스러움
의 한 갈피를 보여주는데, 방언의 활용이 득이 된 면도 있고 한계가 된 면도 있다.
심사위원
허영선, 홍경희, 장이지
산문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TO. 별이 된 너에게
붉은 소리
폭도면접
온 동네가 환하게 빛나던 그날
파도의 목소리
1948년 겨울, 노형리 정존마을
나의 마음을 울린 박물관
슬픈 꽃 아름다운 꽃
할머니의 립스틱
산화(散花)
베트남에서 4·3을 만나다
4·3평화공원에 다녀와서
5학년 1반과 함께하는 현장체험학습(4·3현장체험학습)
슬픈 기억의 섬
제주도의 아픈 기억 4·3
제주, 화해와 용서의 섬
자유의 노래
4·3의 영웅들에 대하여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
동백꽃 필 무렵
숨바꼭질
색이 바랜 제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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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안녕? 나는 너의 고향 제주에 사는 은서라고 해.
너는 지금 밤하늘을 빛내주는 별이 되었을 거야. 그렇지? 너를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어. 어린 나이에 동굴
에 숨어서 그 암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울 수조차 없는 하루하루를 무서움에 떨었을 너에게 희망조차 생각할 수 없었
을 너에게 잠시나마 무서움을 잊고 내가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고단했을 너에게 내 어깨를 빌려주었을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네가 느꼈을 공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에 너와 마
주하여 너의 아픔을 느껴봤어.
나는 최근에 학교에서 4·3평화공원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갔어.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어. 이게 진짜 몇 년 만에 가는
현장체험학습인지 모르겠거든! 비록 이번에 가는 곳이 내가 이전에 많이 갔던 곳이라지만 친구들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놀 생각에 나는 입이 귀에 걸렸어.
하지만 비가 나를 질투하나 봐. 그날 여우비가 조금씩 내리는 거 있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도시락에 반
찬이 뭐냐고 물어보는 것이 내 소풍 갈 때의 버릇이지만, 그날은 달랐어. 엄마에게 일어나자마자 비가 오냐고 물어보았
지. 물어보는 동시에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베란다로 달려가 보았지. 엄마가 키우는 식물에 이슬이 보
슬보슬 맺혀 있더라고 내 머리 위로도 이슬이 맺혔지. 나는 그 자리에서 울 것 같았어.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니. 5학년
전체가 도시락을 급식실에서 먹는 상상을 하니까 실망감이 밀려왔어. 왜 하필 소풍 날에 비가 오는 것인지. 운동회 때
도 비가 왔었는데 이번에도 비가 또 오다니..
그래도 학교에 오니까 빗방울이 많이 줄어들었어. 나는 버스를 언제 타나 궁금하기도 했지. 우리 반이 탈 버스인 줄
알았는데 다른 반이 탈 버스인 것을 알았을 때는 내 기대가 팡! 터져버린 것 같았어. 다행히 화가 났던 마음이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즐겁게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어. 버스에 타니 친구들이 신나서 들뜬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져 떠드는 소리
가 들렸어. 어른들은 그것을 단순히 ‘떠든다’라고 말하겠지만, 이건 떠드는 게 아니고 우리가 너무 신이 나서 저절로 표
현되는 벅찬 마음의 소리야. 그렇게 떠들고 놀다 보니 벌써 이 곳에 도착했어!
도착했을 때 시간은 아홉시 반이었어. 나는 모둠 친구들을 모이게 했어. 그날은 내가 현장체험학습 모둠장이었는데,
친구들을 잘 인솔해야 했거든. 나는 모둠 친구들과 미션지를 펼쳐들고 미션지에 나온 장소나 모형을 찾으러 다녔어. 나
는 혹시 몰라서 제주4·3평화공원의 지도를 찍어 놓았지. 나는 야외 미션을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았어. 4·3 때문
TO. 별이 된 너에게
남광초등학교 5학년 현은서
대상
39
산문 부문
에 돌아가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 그중에 너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괜히 슬퍼졌어. 내가 언덕에 올라가서 4·3
희생자들 이름이 적혀있는 비석을 보았어. 세상에! 이럴 수가! 너도 아마 직접 보면 놀랄 거야. 그 언덕을 한 바퀴 돌아
야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을 다 볼 수가 있었어. 내가 둘러보니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분도 있었어. 나는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 경건한 마음을 담아 묵념을 했지. 희생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어. 나는 우리 큰할아버지 이
름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너무 많아서 결국은 찾지 못했지. 찾지는 못했지만 나는 큰할아버지와 너와 그분들께 감
사해야 될 것 같아. 많은 분들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지를 말이야.
나는 야외를 둘러보다가 행방불명 된 분들의 비석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어. 조금 전에 둘러본 그 비석 말고 또 있
었다는 사실에 나는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되었지. 나는 그곳에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친구가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는 꼭 묵념을 해야 된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들어가기 전에 이제는 아파하지 말고 편안하기를 묵념했어. 멀리서 보아
도 비석이 정말 많았어. 나는 비석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가 안 되었어. 행방불명 된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나는 입
을 다물 수가 없었어. 이러다가 내입이 땅에 닿을 정도로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나는 점점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어. 도대체 왜 제주 사람들을 이토록 많이 죽여야만 했던 거지? 나는 의문이 들
면서 화도 나고 슬프기도 했어. 한마디로 내 머리는 정리가 안 된 사물함 같았지.
나는 이번에는 어떤 동상을 보았어. 그 동상은 미로 같은 돌담 안에 있었는데 돌담 안에는 눈 위에 한 여자가 아기를
안으며 웅크리고 있었어. 나는 그 여자가 아기의 엄마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렸지. 그 여자는 아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나는 죽어도 너만은 살아야 해.’라고 말이야. 나는 순간 ‘그 여자가 우리 엄마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니까 단숨에 눈시울이 붉어졌어. 나는 상상만 해도 울 것 같은데 저 아기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그 아기였으면 나
는 억울하고 분통했을 거야. 언덕 위에는 안개가 자욱했어. 나는 순간 무서웠어. 나는 안개만 봐도 무서데 당시 제주 사
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엄마가 잠깐 집에 없어도 무서운데 엄마를 잃은 제주 아이들과 너는 얼마나 무서웠을
까. 나는 총과 칼만 봐도 무서운데 총에 죽어가는 제주 사람들과 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네가 그 많은 무서움들
을 견뎌낸 것이 참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해. 너도 그렇지?
나는 그다음 실내로 들어갔어. 그때는 열시 반이었지. 실내로 들어가자 에어컨 공기가 온몸을 휘감으며 퍼졌어. 그
러자 기분이 좋았지. 밖에는 습도가 높아서 몸이 축축하고 찝찝했거든. 우리 모둠은 실내 미션을 실행하기 위해 재빠르
게 이동했어. 실내로 이동하고 동굴로 들어갔는데 동굴은 깜깜하고 춥고 무서웠어. 여기가 진짜 동굴이라면? 너와 제
주 사람들은 여기서 어떻게 몇 날 며칠을 견딘 걸까? 나는 어두운 걸 싫어해. 밤만 되면 화장실도 혼자 제대로 못 가 거든.
제주 사람들과 너는 이런 어둡고 축축하고 깜깜한 곳에서 지냈다니. 내가 그런 가벼운 어두움에 무서워했던 것이 부끄
러워졌어.
영상 중에 미국 촬영 반이 찍은 영상을 모아 둔 영상을 보면서 앞으로 군인들이 무서워질 것 같았어. 군인들이 제트
기를 타고 제주로 내려와서 다짜고짜 칼을 들이대고 총을 쏘아대는 모습을 보자 나는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인지 이해가
4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안 되었어. 제주 사람들이 우는 모습도 있었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가슴이 먹
먹해졌어. 그리고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모든 곳이 다 학살 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가 재미있게 뛰어놀았던 곳들
이 너에게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무서운 곳이었다는 것을 알았어. 너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어. 고통스럽고 무서웠을 그 마음을 말이야.
나는 거의 마지막 전시관에 들어가서 천장을 둘러보았어. 나는 그곳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눈에 불을 켜고 다 읽어
보았어. 나는 화가 나서 결국은 발을 구르고 말았어. 저게 말이 돼? 군인들의 대장이 한시라도 사람을 안 죽이면 못 살
것 같다고 제주사람들 아무나 골라서 죽이기도 했다고 하였고, 남자인 경우에는 눈가리개를 씌우고 머리에 동그라미
를 그리고 나서 군인들이 총 쏘는 연습을 하였고, 여자나 임산부인 경우에는 발가벗기고 나무에 매단 다음 대검으로 찌
른다고 했어. 저게 사람이야? 정말 나는 참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소리 질러버렸지.
영상관에서 4·3에 관련된 영상을 보았어. 첫 번째 영상에는 전에도 정말 많이 본 ‘별이 된 아이들아’라는 샌드 애니
메이션이야. 그 영상은 네 얘기로 잔뜩이었어. 모래의 모양이 바뀌는 부분에서 너와 주변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이나
두려움 등을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어. 두 번째 영상에는 4·3이 시작된 연도와 자세한 이야기가 등장해. 나는 그 영
상을 보고 4·3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었어. 네가 그런 고통을 받았을 생각을 하니까 참 속상했어. 잘 참고 견뎌 냈을
너에게 이제는 그곳에서만큼은 별이 되어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어. 너의 미소가 별이 되어 빛나는 순간 나의 마음도 너
를 위해 끝없이 빛날 거야.
우리는 영상까지 다 보고 밖으로 나왔어. 그때는 낮 열두 시였어. 밖에는 비가 그치고 약간의 바람이 살랑살랑 내 볼
을 스치며 불었어. 저편에서 5학년 반 선생님들께서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어. 나는 한줄기의 희망이 보였지. 급식실에
서 도시락을 안 먹어도 된다는 그 생각 말이야. 나는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더라고. 나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점심
은 4·3평화공원에서 먹기로 했어!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춤을 출 뻔했지 뭐야. 나는 우리 반 여자아이들과 먹기로 했
어. 여러 명의 돗자리가 모여 큰 자리가 마련되었어. 우리는 그 자리에 둥글게 둘러앉아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기 시
작했어. 모두의 도시락은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한 마디로 행복 그 자체였어.
나는 돈가스 김밥과 제육 김밥, 그리고 소시지를 가져왔어. 아이들은 내 김밥을 보고 뭐냐고 물어보았지. 나는 내가
먼저 먹고는 ‘이건 제육이고 저건 돈가스가 들어있는 김밥이야.’라고 설명하며 친구들에게 먹어보라고 했어. 친구들은
모두 김밥에 감탄한 표정으로 너무 맛있다고 했어.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먹고 싶다면서 내 김밥을 먹기 시작했지. 그
결과, 내 김밥은 순식간에 모두 매진되었어! 친구들의 도시락을 둘러보니 어떤 애들은 김치볶음밥을 싸오고, 초밥, 슈
크림 빵, 베이컨 말이, 닭다리, 치킨 너깃, 망고 등등으로 맛있는 것을 잔뜩 싸왔어. 나는 ‘초밥이라니 말도 안 돼!’라고 생
각하며 마저 도시락을 먹었지. 나는 친구들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도시락을 먹었어. 점심을 먹다보니 이렇게 맛있는 도
시락을 너와 같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돗자리에 누워 파란 하늘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꽃향기 맡
으며 너와 손을 맞잡고 잠시나마 눈을 감고 단잠을 재워주고 싶어.
점심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한 시까지 자유 시간을 주셨어. 나는 친구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서 그
시간을 신나게 즐겼지. 게임을 하면서 생각해보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는 너도 많이 해봤을 것 같아. 옛날부
터 있었던 놀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너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지? 벌써 한 시가 되어 우리는 버스에 다시 올라탔어. 처음 버스를 탈 때와 같은 시끌벅
적한 소리가 났지. 나는 실감이 되었어. 내가 지금 버스에 탔다는 것과 집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나는 버스가 출
발하자 버스 창밖을 보았어. 버스 창 너머에는 알 수 없는 풀들과 꽃들이 보이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이제 우리 동네에
다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어. 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몸이 오징어처럼 흐물흐
물 거렸어. 오늘은 내가 다녀온 현장체험 학습 중 가장 최고의 현장체험학습이었어.
너와 만날 수도 있었던 게 나의 가장 큰 행운이었어. 나는 너를 알기 전에는 만화와 영상을 보면서 ‘어, 그랬구나.’라
고 생각하고 1,2학년 때에도 이곳을 2번이나 왔지만 그냥 소풍이라서 마냥 좋아했던 것 밖에 생각이 안 나. 지금 생각
하면 너무 부끄러워. 이곳을 다녀옴으로써 4·3이라는 사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
든 것들이 너무 소중해서 오늘 나의 경험들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도 그곳에서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고, 제주에서 못 펼쳤던 꿈을 그곳에서만큼은 맘껏 펼쳤으면 해. 나는 너에
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얘기밖에는 다른 할 말은 지금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 같아. 나의 큰 할아버지도 4·3사건의 희생
자 셔. 혹시 그곳에서 우리 큰 할아버지를 만났니? 우리 아빠 고향 가시리에서는 그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이 많았다고 했어. 그래서 가시리에는 음력 11월 22일에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많다고 했어. 우리는 매년 그날이
되면 큰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4·3에 희생된 분들에게 추모를 해.
이렇게 우리 집에도 큰할아버지께서 희생되셔서 4·3사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거 같아. 너도 남아있는 가족이
너를 위해 추모하며 너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을 거야. 누군가 너의 흔적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기쁜 일이
라 생각해.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 중에는 4·3사건과 같은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4·3사건을 자세히 들여
다보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받아내야 하며 그 희생에 다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들은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지켜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게.
영원히 너와 모든 4·3사건의 희생자 모두를 기억하고 잊지 않을 거야.
그동안 힘들었을 너에게 조금이나마 그곳에서 편해지기를 빌게.
언젠가 마주 보는 친구별이 되어 너와 함께 너의 꿈을 응원해 줄게. - 안녕, 나의 친구 별! -
2022년 6월 27일
월요일
너를 영원히 기억하는 은서가
4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붉은 소리
내 나이 여든하나 아직도 못 지운,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이 내 꿈에서 날 괴롭혀옵니다. 이 나이 먹고 아직도 꿈
에 허우적대며 숨 못 쉬는 내가 한심해 보이면서도 나 자신이 안타깝습니다. 70여 년 내 곁에 누가 살았는지 죽었는
지도 모르던 그 날에 어린 내가 무슨 고생을 했을지 내 손주들보다 어렸던 그때의 내가 겪은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내 몸의 주홍글씨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70여 년 전 그날 유난이 밤이 깊고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오르던 때에 우리 집 돌담 너머로 가시던 어머니. 그때 내가
말렸어야 했나요? 그저 물질하러 가신다던 우리 어머니 해지기 전엔 들어오신다던 어머니를 기다리며 동생을 재우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살랑 부는 바람에 눈이 감겨 잠시 눈 붙이니 해는
온데간데없고 내가 기다리던 어머니도 없습니다. 어딜 가신 겁니까? 어디에 계세요? 어머니? 허공에 외치던 어머니를
찾던 소리가 바람에 실려 귀에 들어가길 소원하였지만, 어머니가 들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오다가 길을 잘못
갔기를 그저 다른 집 어머니들과 함께 계시기를 그날 빛 때문에 잘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길 빌던 어느 날 드디어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며칠 전 산에 가신 아버지와 오라버니 얼굴
빛이 어둡습니다. 동생과 저를 불러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눈에서 점점 멀어지는 우리 집과 마당에 동백나무, 이
제 막 순이 올라왔는데 그 꽃을 보기도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데려 산을 탑니다. 낙엽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산길
에 부스럭거리며 나와 동생은 손을 꼭 잡고 올라갔습니다. 어디를 가는지 대체 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아버지
뒤를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는 동안 나는 이 밤하늘을 오늘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아 눈에 담으며 갔습니다. 어머니
와 함께 마루에 앉아 보던 별들이 보였습니다. 가장 밝은 별은 내 별이었습니다. 항상 같은 곳에 있어 찾기 쉬웠습니
다. 별을 보며 한참을 걸어온 곳은 당최 알 수 없는 산속 깊은 곳, 아버지는 돌과 나뭇잎으로 가려놓았던 구멍을 보
여줍니다. 그러곤 따라오라며 배를 바닥에 붙이고 머리가 끼일 것만 같은 작은 구멍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영문도 모른 체 그 좁고 습한 구멍에 들어간 나는 그 안을 보고 눈물이 셀 것만 같았습니다. 허리를 펴지도 못하는
작은 공간에 우리 가족뿐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갑갑한지 울음을 터뜨려 버렸고 어른
들은 서둘러 동생을 달래고 우리가 들어온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제주여자중학교 2학년 김서현
대상
43
산문 부문
어른들은 절대 이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밤마다 조용히 구멍 밖으로 나
갔다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실 때는 가끔 감자나 고구마 같은 먹을거리를 가져왔지요. 아침과 밤에 어른들이 마을에
할 일을 하고 돌아오면 서로 얼굴을 쓱 보고 돌아왔는지 확인만 할 뿐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
산 것이 돌아오지 못하면 죽은 것이 이들만의 신호였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매일 보던 하늘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늘을 보며 일하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는데 이젠 고개만 들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하늘은 더 이상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발
걸음 소리는 집에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투박한 발걸음, 일하고 오신 아버지의 묵직한 발걸음, 학교에서 돌아온 오
라버니의 가벼운 발걸음뿐이었지만 이 작은 구멍에 들어온 뒤 들은 발걸음은 그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낙엽이 부
스러지는 소리 뭔가 성에 차지 않은듯한 소리 듣기만 해도 숨이 가빠졌습니다. 우리말고 다른 이가 이 안으로 올까 봐,
모두 함께 잡혀 갈까 봐. 이 안에서 두려움에만 빠져 있다 보니 집으로 돌아가 하늘을 보고 동백나무 구경하며 어머
니를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 구멍에 처음 들어올 때보다 조금은 추워졌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 동백꽃은 지금쯤 꽃을 피웠겠지요? 얇은
천 여러 개를 꽁꽁 싸매고 구석에 앉아있었습니다. 위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눈을 밟는 소리는
아녔습니다. 마치 커다란 동백꽃 하나가 통째로 떨어지는 듯한 울리면서도 붉은 소리. 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고 한
3개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끝났습니다. 그날 밤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제 구멍에서 나오라 하시고 다른 곳으
로 우릴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옮겨 다니며 숨어지냈죠. 얼마 안 가 이 악몽이 끝날 것이라고 우리 가족은 생각했습
니다.
지금도 저는 우리 집 현관에 들려오는 발소리가 두렵습니다. 이제 끝난 걸 알면서도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밖을 내다봅니다. 혼자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러 사람의 믿음은 하나의 힘이 되나 봅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날 것이라 믿은 사람은 제 가족뿐이 아니었기에 제가 이 편한 저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그 붉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어머니 어디 계세요?
어머니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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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폭도 면접
그토록 꿈꾸었던 직장으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직장으로 향한다. 길을 걷다가 총소리같
은 폭죽 터지는 소리에 놀랐지만, 겨우 이런 소리에 내 자존심 굽힐세라 폭죽 터지는 소리가 커질수록 직장 입구까지
냅다 뛰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면접실에 있었고, 세 명의 양복차림을 한 면접관들이 있었다. “용택씨. 살면서 후
회했던 적은 없었습니까?” 오른쪽에 있던 중년의 면접관이 물었다. “살면서 후회했던 적은 있었습니다. 어렸을적에
제가 평소에 살고있던 고향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말이죠. 다만 저는 오히려 고향보다는 이곳에서 더 많은걸 경험할
수 있고, 특히 독립하면서 사는 방법을 스스로 익히며 살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 제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면접이 잘 풀릴것같아 잠깐 자세를 풀려던 찰나에 왼쪽에 있던 안경을 쓴
마른 면접관이 입을 여는 것을 보고 자세를 다시 곧게 폈다. “그렇다면 용택씨. 당신의 부모님이 대한민국 정부에 반
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무거운 공기가 면접실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나는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정부에 반하는 운동을 하려던 적이 없고, 그저 무언가를 잡고 있었
던 풍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언제 있었던 폭동입니까?” 마른 면접관이 두팔을 모으고 나를 두눈으로 찌뿌리면서 입
을 연다 “당신, 21년전, 1948년 4월 3일에 있었던 폭동사건 모르십니까? 그쪽 사람이라면 잘 알텐데요?” “그때 제
가 기억나는건 불타는 마을의 기억밖에 없습니다. 제 부모님이 무슨짓을 저지른건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택씨. 당신이 그런 기억을 갖고 계신다면 당신의 부모님은 폭도가 맞다! 이런거 아닙니까?”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
만 늘어놓는 면접관에게 점차 화가 나다못해서 쓰러지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면접관들이 저 짜
증나는 면접관을 말리지 않는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건가? 아니, 내
가 아직 한 살배기 어린 아이였던 시절까지 말하는게 요즘 면접의 방식인가? 생각과 생각의 회로가 얽히고 얽혀지
는 와중에 중앙에 있던 면접관이 입을 연다 “용택씨. 그럼 화제를 바꿔보죠. 만약 당신의 부모님이 폭도라는 사실을
알고 지원을 했다면, 대체 어떤 동기로 입사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빼뺴 마른 면접관보다 질문의 강도가 약해
져서 막혔던 숨이 겨우 빠졌다. 내 부모님이 왜 폭도가 된건지 묻고 싶어졌지만 끝내 회사 면접이였기에 마지못해 그
질문에 먼저 답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제 부모님이 폭도라는 사실을 알고도 지원을 했다면, 저는 그 과거를 발
판삼아 발전할수 있도록, 이 회사에 일하면서 회사 임원들과 같이 소통하고, 눈에 먼지가 들어가도 설령 그게 경쟁회
사의 압박일지라도 이 회사가 이끄는 미래를 위해 일하고자 지원했습니다. 뼈아픈 과거를 딛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
오현고등학교 3학년 양권우
대상
45
산문 부문
라. 이것이 제 지원하고자 하는 동기입니다.” 잠시동안의 적막과 적막속에서 딱딱하게 울려퍼지는 타자기 소리는 내
마음을 뚫으려하는 폭죽 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이 면접을 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위해 온것일까, 내 과거를 시험하는
자리에 기어이 내 발로 들어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왜 폭도의 자식이 된것인
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비고사의 과목으로 나왔던 한국사에서도 조선에도 있었던 연좌제는 현재 폐지되고 없다고 밝
히고 있었는데, 결국 이것도 연좌제의 일종인가 라는 착각이 들었고, 어느새 내 발목에는 4·3이라고 굵게 적힌 무게
추가 날 한없이 추락시키고 있었다. 내 의자는 어느새 전기의자가 되어있었고, 면접관들의 타자기 소리는 전기의자
의 전류를 흘러보내는 장치나 다름없었다. 시계도 없는 면접실에서 타자기 소리가 오래 울릴수록, 내 의자로 가해지
는 전류는 더더욱 많아진다. 그런 전류가 흐르는 이런 의자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그래. 이건 고문이다. 면접이 아니
라 고문이라고. 내 어렸을적 그 불타는 섬에서 부모님이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과 함께 동굴속에서 감자나 먹고 있던
시절을, 그리고 군인들이 우리가 사는 동굴에 폭탄을 던졌던 그 끔찍한 기억을, 내가 알고 있던 그 모든 사람들이 불
타죽는 그런 광경을 다시한번 상기하려고 날 이 지옥같은 면접실에 불러온거다. 내가 그 동굴에서 어렸던 청춘의 시
절을 얼마나 버렸을지 저 면접관들은 과연 알까? 이런 불공평한 면접이 언제까지 이어지는걸까? 차라리 내가 폭도
라고하고 감옥에나 갇히는꼴이 더 나았을까.. 오랜 적막을 깨고 중앙에 있던 면접관이 입을 열었다. “용택씨는 이제
면접실에서 퇴실하셔도 좋습니다. 합격이 된다면 그때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
다.” 드디어 이 지옥같은 면접실에서 벗어나게 되는구나. 이제 더 이상 타자기 소리는 안들어도 된다. 복잡했던 마음
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 면접실 문만 나서면 나는 자유다. 하지만 왜이리 찜찜할까? 내가 뭘 물어보려고 했던거지? 그
러다가 타자기 소리에 묻혔던 질문이 떠올린다. 그리고는 날 괴롭히듯 질문을 던진 왼쪽 면접관을 바라본다. 여전히
히죽대는 그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면접관님. 그런 질문을 왜 던지신 겁니까?” “네?” “제 부모님이 폭동에 참여했다
는 근거가 뭡니까?” “그야 서류에 적혀져 있으니...” “....면접의 존재 유무는 서로 대면하며 만나, 그 동기를 밝혀내는
데에 포커스를 갖추고 있습니다. 제 부모님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서류에 작성하여 물어봤다면 그에 대한 근거가 있
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건지 면접관은 히죽거리는 입속의 이빨을 기
어이 내밀고야 만다 “지금 울려퍼지는 폭죽소리에도 저는 총소리같이 들려서 하루하루가 괴로웠습니다.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온 것은 오로지 이 회사가 줄수 있는 미래, 즉 이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게됨으로서 모두를 위한 컴퓨터나
전기 이런거를 배급하는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고시에 매진하고 지냈습니다. 그래야 저 폭죽소리가 제 미래의
성취를 응원하는 목소리처럼 들리니까요. 만에 하나 제가 폭도였다면 지금쯤 면접실이 아니라 고문실에서 영원한 취
조를 당하고있겠죠. 그렇다면 저는 왜 지금 면접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중앙에 있던 당신과 오른쪽에 있던 당신
은 왜 여태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겁니까?” 이런 말을 해도 면접관들은 결국 듣지 못할거라 여기며 박차고 나왔다.
얼마 후, 나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의 거대한 산은 불타는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
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울렸던 그 폭죽소리는 면접실을 떠나고 나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4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온 동네가 환하게 빛나던 그날
“그날은...
그날은 가로등도 하나 없는 시골 캄캄한 밤길이 밝아졌어.
그날은 밤이 되면 항상 마당 옆 모퉁이에 있어 엄마 손잡고 가던 무서운 화장실 길도 밝아졌어.
그래서 그날은 화장실을 맘편히 갈 수 있었지.
그날은 늘 어둡던 세상이 밝게 빛나 마법처럼 신기했어.
그래서 엄마가 어렸을 적엔 그날이 참 좋았어. 무섭지가 않았으니... 어때 참 신기하지?
그런데 말이야, 엄마가 크고 나서야 그날은 좋은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날에 제사를 지내느라 밤늦게까지 불을 밝혀 놓아서 온 세상이 밝게 빛나는 거였어.
그날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담겨있는 눈물이 가득 찬 날이었어. 제주도의 아픈 역사가 담긴 날이었어.”
엄마께서 들려주시던 제주 4·3사건과 관련된 엄마의 어릴적 생각이었다.
예전에 나는 4·3 평화공원에 가족과 간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께서 무언가에 대해 말씀을 나
누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비석이 여러 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비석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그리고 엄마의 말씀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잘 박히지 않았다. 내가 많이 어리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4·3사건 때 돌아가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었다. 그 이름 중에는 우리 큰할아버지의 성함도 있었다.
큰할아버지께서 4·3사건 피해자여서 그런지 엄마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종종 4·3사건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
셨다.
그것이 이유인지 4·3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게 느껴졌다.
제주도 조천읍 선흘리는 중산간 지역이라 그 마을 사람들은 해안 지역으로 내려가 살아야 했다. 그런데 마을을 떠
나기 싫은 사람들이 선흘리에 있는 곶자왈이라는 곳에 숨어지내다 경찰에게 들켜버렸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
이 죽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았던 내용이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선흘리에 사셨는데 외할아버지의 큰형인 큰할아버지께서 어쩌면 그날 돌아가셨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삼성초등학교 5학년 김세민
최우수상
47
산문 부문
내가 자라고, 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부터 4·3사건이란 것을 자주 접하게 되고 나서야 엄마께
서 들려주시던 제주 4·3사건에 관련된 얘기들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과연 4·3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왜 그렇게 작은 동네에서 수많은 제사를 사람들이 지내야 했는가?
나는 조금씩 호기심이라는 새싹을 키워냈다.
그리고 그 호기심 새싹은 점점 더 커져 나는 큰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 호기심들로 인해 4·3사건에 관한 역사책들을 찾아보면서 비로소 관심이라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그 많고 많은
호기심들이 계속해서 쌓여 꽃을 피운 나는 가슴에 관심이라는 꽃을 한가득 안고 내 나름대로 4·3사건에 관해 알아갔다.
나는 엄마의 얘기도 조금씩 들으며 4·3사건에 관해 점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관심들이 쌓여 드디어 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내가 4·3사건을 잊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리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이란 열매이다.
책 내용 중 제주 4·3 사건 때 짓지도 않은 죄를 근거도 없이 지었다고 판결받은 제주도민들의 후손들이 제주 법원에
가서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재판에서 많은 제주 도민들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참
인상 깊었다. 짓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사는 내내 죄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그때 당시에 제주도민들
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안간다. 그래도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으니 다행이다.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쌓아가며 열매를 키워나갔다.
그 열매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의 지식과 나의 관심도 커져 갔다.
나는 제주 4·3사건에 대해 아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제주도민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이 땅에 살고 있다면 알고 기리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아픔일지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으로 이어져 내려온 아픔 그리고 우리 대한
민국의 아픔, 제주 4·3사건. 알고, 기리고 앞으로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왜 제주 4·3사건 하면 동백꽃이 떠오를까?
동백꽃은 꽃이 떨어질 때 한잎 한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그모습이 그
때 수많은 희생자와 비슷해 보여 동백꽃에 비유해서 4·3사건 하면 동백꽃이 상징이 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동백꽃이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생긴다. 슬픈 모습 뒤에 그래도 새로운 열매가 생겨나는 것처럼 나도 그냥 슬픈 역사
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사건의 피해자이지만, 그래도 슬픔과 분노의 암흑속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사건을 디딤돌로 하여 다시는 이런 슬픈 사건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엄마가 어렸을 적 느꼈던 환
하게 밝은 그날이 아니라 새롭게 우리가 만들어가는 평화로운 밝은 그날이 되도록 우리는 그 열매를 키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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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파도의 목소리
내가, 부모님이 살아왔던 때부터, 아니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이나 떨어진 먼 과거부터. 아마 이 화산섬
에는 차갑고 거친 파도가 고요하게 몰려왔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 파도에 휩쓸린 과거에 숨을 죽였고 몸을 웅크렸었다.
난 그 말할 수 없었던 영겁의 세월이 이곳에서 숨을 트이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다. 이 글은 아득히 멀어 보였으나 결국
한 발자국 앞에 있었던 과거를 알려준 한 ‘목소리’에 대해 담은 감상문이다.
어른들은 내가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4·3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시간을 지나 내가 4·3사건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시절 한여름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본 폭력적인, 야만적인 그 모든 것이. 그러나 그럼에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4·3사건은 이토록 아팠구나’. 멀리서 그리고 몇십 년 떨어진 미래에서 잡음이 들려오는 목소
리와 총소리 그리고 흑백의 화면으로 4·3의 참상을 보고 있는 나조차 가슴이 아플 만큼이나 생생했다. 그들의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영상을 멈추어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찡그린 얼굴, 슬픔에 찬 얼굴, 그리고 생기가 돌지만 죽은 엄마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 그중엔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도 있었고, 부모님과 비슷한 나잇대의 사람들도 있었으
며, 할머니가 생각나는 노인의 형상도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일이 없었더라면, 이 일이 존재하지 않
았었더라면. 이들은 평범하게 거칠지만 모든 것을 내어주던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학교에 가서 글공부를 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장을 담그고, 그렇게 평범하고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단 한 번의 총성, 집에 드리워진 불길이 컵 안
의 물을 덜컥 쏟아버린 듯, 이제 더 이상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듯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번쩍 든 정신으로
또다시 생각했다. 절대 잊어버리지 말자. 이 땅에서, 내가 밟고 있는 이곳에서. 아이들이 평범하게 글공부를 하고, 집에
선 따뜻한 밥 짓는 냄새가 올라오는 이곳에선, 채 오래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4·3사건
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먼저 그들에게 우선시 주어졌어야 하는 것은 평화임이 틀림없었다. 평화를 지키려면 폭력이라는
야만적인 수단이 없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건 4·3사건의 시발점인 3·1 발포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경찰이 한 아이를 말발굽으로 채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신속히 사과하였다면 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도민들의 반발에 총탄을 발사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은 결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총알과 총, 그 한 번의 폭력적인
행동이 4·3사건이라는 결과를 낳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잘못된 신념은 몇 년 동안이나 총과 칼로 이루어
귀일중학교 3학년 김지수
최우수상
49
산문 부문
졌다. 하지만 그날로 시작하여, 무고하게 휘말린 사람들의 꿈은 누가 헤아려 주었을까. 억울하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차가운 땅속에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는 도대체 누가 위로해 주었던 걸까. 난 그들의 작고 소중했던 꿈과 영혼
들이 바닷가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의 소리를 느꼈다. 제주도의 파도는 아주 슬프기도 하고, 가끔씩 안정되기도 하며, 화가 나보이
기도 했다. 사람이 숨 쉬는 소리, 그것이 제주도의 바닷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파도의 목소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언어이다. 난 이 사건을 오래 기억하며, 후대에 전해주면서 파도에 담긴 그들의 목소리를 위로해 주고 싶다.
슬픈 소리는 사건에 가족을 잃은 누군가의 목소리, 화가 나는 거친 소리는 입을 닫아버린 과거의 국가에 속으로 울부짖
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안정되는 소리는 4·3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웃음 짓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그리
고 그것을 잊지 않아 위로해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파도도 결코 억울하지 않도록.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
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하는 영원의 과제임을 알리고 싶다.
그리고 소리를 담은 파도는 해류를 따라 매일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은 또한 4·3과도 닮아있다. 4·3 당시 제주도
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 고통스러운 세월을 벗어나기 위해 타지로 갈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 계셨다. 나도 어딘가로 떠날
때 무척이나 두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소중한 것들을 놓고 갈 수밖에 없음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4·3평화공원의 전시실에 발을 들였을 때, 그곳에서 보게 된 건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재일 한국인 분들 중에는
유독 제주도 태생이시거나, 제주도민의 자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사연, 그리고 4·3사건이라
는 모두의 사연이 파도처럼 일본이라는 타지로 흘러간 것을 알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타지에서는 얼마나 더 아팠을
까. 소중한 가족들을 데리고 타지로 향하는 크고 무거운 발걸음이 다시금 마음을 쿵쿵 울린다. 말이 통하지 않던 곳에
서 기억하는 모든 것을 숨긴 채로 살아가야 했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은 파도는 다른 곳으로 흐르다 결국 다시 그 자리
로 돌아온다. 그것은 일본을 거쳐, 다시 제주와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4·3의 진실이다.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람들, 우리
가 기억해야 하는 해류. 난 그 해류를 다시, 또다시 들여다본다. 다시 기억해야 하므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므로. 그
리고 그런 내 앞엔 또다시 파도가 있다. 커다랗고 묵직한 파도다. 그것은 내가 들었던 희미한 소리보다 훨씬 생생했다.
그렇다. 나는 중학교 1학년, 4·3사건의 피해자 할머니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정말 기뻤다. 누군가에게서 직접
그 당시의 진실을 듣는다는 건, 다시 한 번 4·3을 되짚어보고 기억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나 할머니의 목소리에선 훨씬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그날의 증언,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
고 난 내가 들었던 할머니의 말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3사건에 불이익을 받은 제주도민. 학
교가 불태워져 공부를 하지 못했던 꿈 많은 아이들. 그리고 내가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그 시절의 제
주도 사람들. 아스라이 사라진 그 누군가의 작은 꿈. 그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면서 또 한 번, 그리고 이 글을 쓰려고 다
시 인터뷰 영상을 보았을 때, 분명 그날 모두가 화해를 하였다면.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서로 잘 지내려 배려했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그들의 사과가 4·3희생자분들에게 더 빨리 전할 수 있었더라면 부드러운 파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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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리가 우리들에게 하루빨리 다가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일어나는 전쟁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을까.
나는 또다시 바다 앞을 걷는다. 이번엔 부모님과 함께다. 도란도란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각자 무언가를 생각하며
걷고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퇴적되어 굴레를 따라 쌓인 역사와 사건들, 파도가 치는 바
다에서 누군가가 소리 내는 꿈들이다. 바닷가에서 활짝 웃는 아이의 머릿속에서도 언젠가 자리 잡을 이 푸르고 아름다
운 파도의 소리를 생각한다.
누군가 말했다. 이 평화는 사람들의 피와 살으로 이루어졌다고. 그것은 내게 이 평화는 전쟁과 폭력이 없이는 만들
어질 수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평화는 누구나 이룰 수 있다. 나처럼, 나와 같은
사람처럼. 이 파도 한 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모두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간다면, 분명 이 세상에는 평화
가 자리할 것을 굳게 믿는다.
난 계단을 타고 내려가 모래를 한 줌 잡아 파도에 작게 흩뿌린다. 따라 내려온 엄마는 그 행동에 의문을 가지며 내게
묻는다.
‘뭐하맨?’
나는 무음으로 답을 한다.
이제 이 사건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멀리멀리 보내려고. 이제 우리는 ‘파도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고. ‘앞으로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을 해류에 담아 또 다른 바다의 목소리로 보낸다. 평화는 잊어버리거나 무시한
다면 쉽게 사라지는 존재이다. 지구촌에서 또다시 벌어지는 내전과 전쟁같은 상황도 역시 평화를 잊어버린 사람들의
과오다. 이제 더 이상 파도의 목소리를 잊지 말자.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역사를 무시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중한 사람
들을 위해서. 단란한 가정을 위해서, 또한 아이들과 우리들과 나의 꿈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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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1948년 겨울, 노형리 정존마을
그날 아침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건 폭풍 전야의 신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19일인데도 제가 아닌 9
번이 수학 문제를 푼 것은 아마 그날 제 모든 운을 다 거기다가 썼던 것 같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매번 하시던 대로 19
번 보고 나와서 풀라고 했더라면, 남았던 운이 그날 제 동생을 살려주지 않았을까요. 만약 운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저보다 더 어리고 똑똑한 영석이 대신 제가 먼저 발각되지 않았을까요. 그럼 어쩌면, 만약 그날 아침 하늘이 우중충했
더라면, 그래서 저에게 조금의 운이 더 주어졌더라면, 저도 탈출하고 영석이도 살 수 있었지 않을까요. 저 달리기 하나
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그날 우리 어멍이 밥을 깜빡하고 안 챙겨준 것도 어쩌면 얼른 집에 가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점심 전에 집에
갔더라면 그 다음날에는 재로 변해버린 우리 집, 영석이의 장난감들, 내 일기, 그리고 제 여덟 번째 생일 때 받은 나무
팽이까지 모두 한 번쯤은 더 만져보고, 읽어보고, 가지고 놀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때 한 번만 더 자세히 보았더라면
지금처럼 누가 희뿌연 안개를 뿌려놓은 마냥 흐릿해져서 형체만 기억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그날 이전의 집을 생
각하려고 해도 결국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맹렬한 붉은색이 온 기억을 덮어 두통이 찾아오고, 결국 겉옷 안주머니에
있는 약을 찾게 됩니다. 약도 많이 먹으면 익숙해져서 효과를 못 본다는데, 왜 이놈의 두통은 계속 와도 적응이 안 되는
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날 점심때 구슬치기를 하던 학우들이 다섯에서 둘로 준 것도 당장 도망칠 준비를 하라는 경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루아침에 셋이나 없어졌을까,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은 백 번이고 제 잘못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멍에게 그
얘기를 해줬으면 어멍은 그 이유를 알고 미리 짐을 쌌을 겁니다. 또 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지 못한 것도 한이 됩니다.
그때 우리가 인사를 했더라면 조금 더 나은 작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사람을 떠나보
내는 것은 세 번은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가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 늦게 알아버렸습니다. 그때 어멍에
게도 잘 가라는 인사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날 저녁 나팔소리를 듣자마자 뛰쳐나갔어야 했습니다. 그 학살극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날카로운 비명소리로 시
작을 알렸습니다. 짐승의 절규에 가까웠던 비명을 들은 어멍은 숨을 빠르게 몰아쉬더니 옷이 담겨있던 바구니를 바닥
에 붓고서는 지슬을 담기 시작하셨습니다. 영신아, 영석이 챙겨라. 굴까지 뛰어갈 수 있지? 그냥 그때 어멍, 아방은요?
아방은 어딨어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 대신 죽도록 뛰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어멍이 밖에서 들리는 천둥
한국국제학교 10학년 류하진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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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소리 비슷한 굉음에 울던 저를 달래느라 우리는 불길이 마을 중심부까지 들어서서야 출발했습니다. 어멍은 결국 바구
니를 내려놓고서는 제 손을 잡고 붉게 물든 바닥과 검게 퍼지는 연기 반대편으로 달렸습니다. 원체 몸이 안 좋던 영석
이는 기침을 연거푸 해댔습니다. 어멍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면서도, 목에서 칼칼한 피 맛이 나고도 한참을 더 뛰어
오름을 중턱에 다다라서야 멈추셨습니다.
그날 저는 배고프다고 하면 안 됐습니다. 한참을 뛰고 나니 찾아온 것은 군인들이 아닌 허기였고, 저는 어멍에게 배
고프다며 칭얼거렸습니다. 영석이까지 합세하여 칭얼거리자 어멍은 잠깐만 기다리라며 우리를 큰 바위 뒤에 놓고 가
셨습니다. 배고픔과 추위에 취해 어멍에게 조심히 잘 갔다 오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큰 바
위라고 해봤자 열두 살 남짓인 어린 남자아이 한 명과 아홉 살짜리 아기 한 명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어야 겨우 안 보일
만한 크기였지만, 우리는 그 바위 뒤에서 어멍을 기다렸습니다. 추위 때문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영석이를 꼭
껴안고 주변에 있는 나뭇잎을 끌어다가 덮은 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말을 끊임없이 걸었습니다. 영석아, 형이
랑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멍 올 거야. 응, 어멍이 뭐 가지고 올까? 나는 감저 먹고 싶은데… 감자는 없을 것 같고, 아마
이 밤에 찾을 수 있는 건 산딸기 아닐까? 붉으니까 잘 보일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걸다가 저는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평생을 해가 지면 바로 자던 저로써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잠에서 깬 건 영석이 어멍을 부를 때였습니다. 동이 틀 무렵 검은 인영이 저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영
석이는 다 비틀어 말라버린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영석은 제가 말릴 새도 없이 어멍을 부르며 바위 앞
으로 뛰쳐나갔습니다.
탕.
저는 영석이를 말렸어야 했습니다. 영석이 뛰쳐나가려는 걸 온몸으로 붙잡았어야 했고, 어멍을 부르는 영석의 입에
흙이라도 넣어서 조용히 시켜야 했고, 또 뛰쳐나가는 건 영석이 아닌 저였어야 합니다. 영석이 뛰쳐나가자마자 하나인
줄 알았던 검은 인영은 하나에서 둘, 또 둘에서 셋으로 퍼졌고 이내 흰색 솜 옷을 입은 영석이를 향해 그 무서운 총구를
겨눴습니다.
영석은 제가 있는 쪽을 흘끔 보더니 이내 제가 있던 바위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탕. 타당. 탕. 흰색
솜 옷을 입은 영석은 해가 제 위치를 찾아갈 때마다, 매 순간마다 더 잘 보였습니다. 영석은 토끼 같았습니다. 사냥꾼에
게 쫓기는 흰토끼 같았습니다. 탕. 타당. 탕. 이내 하나의 총알이 영석의 다리를 스쳤고, 영석이의 하얗던 옷은 붉게 물
들었습니다. 뛰지 못하는 토끼는 사냥꾼에게 금세 잡힙니다. 영석이는 다친 토끼였습니다. 군인들은 쓰러진 영석을 보
고서는 총알이 아깝다는 둥 구시렁댔습니다. 그러고서는 영석에게 가족들이 어딨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고요한 새
벽 공기는 영석의 말을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어멍은 먹을 걸 찾으러 내려갔고, 아방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 어디에도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저는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고 소매를 입안에 욱여넣었습니다. 숨이 안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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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져 콧물이 줄줄 흐르고 목이 메 왔지만 차마 뺄 수가 없었습니다. 바지가 축축한 느낌이 들며 순간적으로 따뜻해졌습니
다.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영석의 대답이 맘에 안 드는지 영석을 그 딱딱한 군화로 뻥 차더니 이내 산 위
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저는 영석에게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다시 본 영석은 차가웠습니다. 분명 따뜻했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영석은 저를 알아본 건지 희
미한 미소를 지으며 어멍을 불렀습니다. 영석아, 안된다. 저는 제 옷을 벗어 영석을 덮어주었습니다. 또 학교에서 가르
쳐 준대로 피가 난 곳을 있는 힘껏 묶었습니다. 살 수 있을 거야. 살릴 거야. 하지만 항상 책이 좋다며 밖에도 안 나가서
말갛고 물렁물렁하던 영석이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고서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제 세상이 갑자기 까매졌습니다.
듣기로는 기절해있던 저를 옆집 만수 할아버지가 찾아서 임시 굴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 뒤로 저는 아방과 다시 만났
습니다. 아방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저희를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마을이 불타 있어서 죽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제가 행동 중 무엇이 영석의 죽음으로 이끌었는지, 또 어멍은 어딘가에서 살아가
고 있는지. 어멍이 죽었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살아있다고 믿는 게 더 마음이 편해서 이러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
고 왜 군인들은 아홉 살짜리 영석을 총도 쏘고 발로 찼는지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영석이 무엇을 잘못해서 총을 맞은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석은 죽었고, 어멍은 사라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저는 여전히 붉은 괴물
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꿈을 꾸고 영석이 어멍을 부르는 소리가 매번 들리는 것 같으며 그럴 때마다 두통이 몰려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이 망할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어스름한 새벽, 차가운 바람이 불
어올 때면, 저는 그때를 여전히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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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나의 마음을 울린 박물관
~4·3 박물관 관장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6월 21일에 4·3박물관을 다녀온 남광초등학교 5학년 2반 고예리 입니다.
머릿속에서 잊고 살았던 4·3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분명 박물관을 향해 가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는 설레기만 하였는데,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물소리가 들리는
동굴과 백비를 보고 생각이 바로 바뀌었습니다.
실내체험관에 미션을 수행 하면서 4·3사건이 “참 큰일이구나! 내가 왜 이 사건을 여태껏 잘 몰랐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4·3희생자들의 재현된 시신들과 해골들을 바라보는데, 너무 진짜 같아서 무서운 마음이 들었고 또한 너무
도 처참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박물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션을 수행하는 도중에 유치장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략 1평 정도가 되는 공간에 35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다가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 이유도, 아무 잘못
도 없이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못해 쓰라렸습니다.
거기에 영상체험실에서의 4·3 관련 영상은 눈물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하여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뚝뚝 흘렸으니까요.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 즉, 빨갱이 섬이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 죄도 없는 제주도민을 빨갱이들이라고 하
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잘못되어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4·3박물관을 방문 하고서야 이해가 시작되었습니
다.
영상을 보고 난 후 야외전시관에서 문주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주 안에 있는 3만 개의 제주석이 4·3희생자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4·3희생자들의 묘가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 있는 정말 많은 묘를 보는 순간 울컥하여 몇 초 동안 움직일 수
가 없었습니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송함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묘 앞에 전시 되어있는 조형물을 보며 이 조형물에게 나만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광초등학교 5학년 고예리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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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이 조형물의 이름을 “어딘가로 끌려가는 4·3희생자들”이라고 마음속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서로 기
대어서 걸어는 가는데, 일그러진 표정 탓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또 다른 조형물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조형물이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꽉 껴안아, 아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물겨웠습니다.
그 여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한다. 넌 꼭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4·3사건을 떠올리면 “동백꽃이 왜 상징이 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4·3희생자들의 영혼들을 붉은 동백꽃으로 나타낸 것이고, 동백꽃의 꽃말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이번 방문을 통하
여 알게 되었습니다.
4·3박물관을 둘러본 후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으면서 4·3사건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박물관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4·3사건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도, 대화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4·3박물관을 다녀온 후에 4·3사건과 제주도민 약 3만 명의 4·3희생자들의 처참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
슴 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이라면 제주의 4·3사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하며,
절대 잊어선 안되는 중요한 사건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4·3사건과 4·3박물관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덕분에 4·3사건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2년 7월 18일
남광초등학교 5-2 고예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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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슬픈 꽃 아름다운 꽃
지난 2월, 우리 가족은 오동도로 여행을 갔다. 오동도는 전라남도 여수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전라남도는
우리가 사는 경기도 화성에서 꽤나 멀기에 차가 막힐 수도 있어 새벽 6시 30분 즈음 집에서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우
리는 끝말잇기를 했다. 동생이 ‘도토리’로 시작하였다. 계속 끝말잇기를 이어가던 중 엄마께서는 ‘운동’이라 이야기하
셨다. 다음 차례는 나였는데 동으로 시작하는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단어가 없어 쩔쩔매고 있을 때 아빠께선
나에게 힌트를 주셨다. “우리 오늘 오동도로 여행 가는 거잖아. 왜 거기로 가지?” 문득 떠올랐다. 여행 가기 일주일 전,
엄마께서는 이맘때 오동도에 아름다운 ‘동백꽃’이 많이 피어 오동도로 놀러간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큰 소리로 외쳤
다, “동백꽃!”
오랜 시간을 달려서 우리 가족은 여수에 도착하였다. 차가 좀 막혔기에 2시가 되어 횟집으로 가 맛난 점심을 먹었
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시는 엄마께서 말씀하시길 여수는 바다가 많아 회가 유명하고, 맛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둠회를 시켰다. 회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시는 아빠께서 말씀하셨다. “동
백꽃은 아름답고도 슬픈 꽃이란다.” 사실 난 그런 아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데 슬프다니? 아름다운데
슬플 수가 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아빠는 한 마디를 더하셨다. “동백꽃은 제주도에도 많이 피잖아.”의
말과 함께 아빠의 지루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아빠가 말을 꺼내신 주제는 제주4·3사건이었다. 4·3사건을 말씀해주시기 전, 아빠는 동백꽃의 슬픈 전설을 이야기
해 주셨다. 오동도에 한 부부가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고기잡이를 하러 간 사이,
집에 도둑이 든 것이다. 도둑이 아내를 해치려 할 때 아내는 절벽으로 도망쳐서 투신 자살을 하고 순결을 지켰다. 뒤늦
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를 묻어주었다. 얼마 후, 남편은 아내가 잘 잠들어 있는지 궁금하여
무덤에 가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었다. 이 꽃이 바로 동백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이 전설이 제주4·3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4·3사건은 1948년 제주도인 대학살이다. 이 아름다운 동백꽃이 왜 제주4·3사건의 상징꽃이 되었을까. 꽤 오
랫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했다. 오래 고민 한 결과 알아냈다. 슬프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 아름다운 동백꽃의
전설처럼 슬프기 때문에 상징 꽃이 된 것이다. 이제야 아빠께서 동백꽃을 아름답고도 슬픈 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
를 알아냈다.
도이초등학교 6학년 유시윤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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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동백꽃은 집단을 이루고 자라는 속성이 있다. 제주 사건 때도 집단으로 학살당하였
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사건이다. 아무 죄 없는 제주도 사람들을 이유 없이 죽인 것이다.
현재도 사건 피해자의 자손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빠의 말씀을 듣다 보니 점심을 다 먹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오동도로 바로 향했다. 오동도로 들어갈 때는 주차
장에 차를 주차자고 만들어져있는 길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걸어 들어가 도착한 오동도는 정말 아름다웠다. 붉은 동백
꽃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빨갛게 피어나고 있었다.
동백꽃을 보면서 4·3사건 때 그 분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희생자는 어른뿐 아니라 임
산부, 노약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희생당했다. 나와 같은 초등학생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죽어가야만
했을까! 무려 3만 명이다. 그때 학살 당하신 분들은 하늘나라에 잘 가실 수 있었을까. 지금 어디에서 그 억울한 것을 하
소연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매년 4월 3일만 되면 제주도 각 마을에서는 제사를 지낸다. 그날은 거의
제주도의 제삿날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는 이만큼 슬픈 땅이다. 하지만 더 이상 슬픈 땅이 되면 안 된다. 슬픔을 딛고 일어나 아름다운 땅이 되어야
한다. 전 국민이 이 사건을 기억하기 때문에 더 이상 슬픈 땅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
백꽃이 처음에는 슬프게 태어났지만 이제는 오동도의 동백꽃처럼 아름다운 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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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할머니의 립스틱
제주의 4월은 아름답다.
벚꽃이 만개하여 앙상했던 나무를 가득 덮고, 바람을 따라 나풀거리는 꽃비가 흩날린다.
생명이 움튼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벚꽃은 피어나고 꽃비가 되어 내리고 거리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로 가득 차오른다.
나의 이야기는 작년 가을, 주말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 좀 읽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얇디 얇은 동화책 한 권을 꺼내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읽으라시니 읽기야 하겠지만 빨리 읽고 끝내 버려야 내 사생활도 즐길 수 있음이니 양심 쬐끔 던져버리고 책을 펼
쳤다.
밭에 숨어있다가 군인들이 쏜 총이 턱을 관통해서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가리고 다니셨던 ‘무명천 할머니’의 이야기.
이 책을 얼마나 여러 번 읽었던가? 딱 3분 컷! 책을 덮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어라! 뭐야! 너 엄마 말 못 들었어? 책 읽으라고 했잖아.”
“당연히 읽었죠.” 나는 엄마를 향해 동화책을 펼쳐보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은 뻔하다.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차례다. ‘까짓거 마사지 받는셈 쳐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유림아, 엄마
랑 데이트 가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엄마가 말씀하신다.
푸른 바다를 보며 한 시간을 달려간 곳은 선인장 군락이 펼쳐진 월령리 바닷가 마을이었다.
포구에 차를 세우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들어간 곳.
그곳은 바로 진아영 할머니의 삶터였다.
2004년 9월 8일 진아영 할머니는 이 세상에 피붙이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셨다.
하지만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할머니의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되어 집을 수리하고, 지금의 삶터를 조성하고
가꾸었다고 한다.
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2학년 이유림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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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4·3의 트라우마로 아무리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자물쇠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셨다던 할머니.자물쇠로 꼭꼭 걸어
잠겨있던 할머니의 집과 방은 이제 1년 내내 열려있다.
우리 엄마는 용감한 사람 같다. 주인도 없는 집 문을 거리낌도 없이 열더니 나더러 빨리 들어오라며 손짓하신다. 사
실 나는 마음이 이상했다.
책 속에서 보았던 할머니의 웅크린 모습과 고통스러웠을 삶을 떠올리니 더욱 용기가 나지 않아 문틈 사이로 얼굴만
내밀어 삶터를 쭈욱 훑어 보았다.
그 곳엔 나 보다 훨씬 어린 동생들이 접은 종이꽃, 편지들이 놓여 있었고,
진아영 할머니의 집에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쓰시던 물건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용기를 내어 신발을 벗고, 할머니의 삶을 알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냄비와 같은 조리도구 옛날 모기향, 주민등록증, 무명천과 실 그리고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 주었을 파스와 약들....
할머니의 유품을 보던 나는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내 외마디 비명의 이유는 바로 립스틱이었다. 할머니의 유품에 립스틱이 있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보니 어둡고 진한 빛이었지만 분명 사용한 흔적이 있는 립스틱이었다.
진아영할머니의 턱과 입을 가렸던 무명천 때문에 우리는 할머니의 얼굴을 다 보지 못했다.
평생 그 누구와도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던 할머니였다. 그래서 나는 감히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
얀 무명천으로 덮혀 있는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만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혼자 당신을 만날 때 그 립스틱을 발랐었나 보다.
그렇다.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할머니는 여인이었다. 아름답고 싶었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오롯이 혼자일 때만 바
르고 이내 지웠을 할머니의 립스틱을 보며 4·3은 한 여인의 소박한 꿈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나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나는 엄마와 함께 다시 할머니 댁을 찾았다.
고운 립스틱을 할머니께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생전 그렇게 바르고 싶었던 고운 립스틱, 하늘나라에서라도 바를 수 있기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행복할 수 있
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할머니 영단에 붉은 립스틱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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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그리고 이렇게 썼다.
『무명천 할머니, 모로기 할머니, 진아영 할머니.
당신은 제주의 아픈 얼굴이 아니라 소녀이자 한 사람의 여성이셨네요,
할머니를 생각하며 립스틱을 올립니다. 아픔 없는 곳에서 어여쁜 소녀의 삶을 사시기를 빌어요.』
할머니의 삶터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할머니 알아.’하고 떠들어 댔을 것이다.
‘4·3은 아픈 제주의 역사지.’하며 아는체 했을 것이다.
하지만 2021년 다시 만난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그 사람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오롯이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말
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74년 전, 벚꽃이 만개한 아름다운 4월에 어느 날 피비가 흩날렸음을......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제주의 곳곳이 사실은 74년 총소리와 울음소리로 넘쳐났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뒤덮은 꽃이 봄을 알리듯 화해와 상생의 꽃으로 뒤덮이기를... 그리하여 평화를 알리는 4월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내년 9월 8일 할머니가 식게 먹으래 오는 그 날에는 제가 올린 저 립스틱을 곱게 바르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토
록 원했던 평범한 여인의 삶을 이제라도 느껴보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이 글을 맺는다.
61
산문 부문
산화(散花)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얼마나 자 버린 걸까. 조금 어지러운 채로 일어나, 거실로 가 찬 물을 들이켰다. 그래
도 정신이 들지 않아, 세면대로 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거울 속에 있는 건, 이미 늙어가고 있을 뿐인 50대의 한
남자다. 정신이 조금 든 나는, 소파에 앉아, 흐르는 라디오 소리를 잠깐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서 내가 이루어 온 것들, 잃어버린 것들의 소용돌이 속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창 밖에 서있는 매화나무에서 천천히
꽃잎이 떨어진다. 4월의 한복판에 눈처럼 내리는 저 꽃을, 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래. 그때였던가. 30년 쯤 전. 아
마 그 섬이였을 것이다. 1948년의 그 섬…
그 섬을 생각하자, 다시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 점점 기억 속에서 흐려지나 싶더니, 다시금 선명하게, 그
목소리, 그 콧등, 그 눈동자…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이름이 뭐였던가. 그 아이의 이름… 맞다. 그 이름은 연희. 시간이
흘러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죽는 날까지 안고 갈 그 이름이, 다시 나를 격렬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1948년, 나는 군인 생활을 시작한지 6달이 채 되지 않은 신참이였다. 휘몰아치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인이
였다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또한,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난 명령에만 충실한다.”
군인이 된 순간부터, 나는 항상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았다. 내려진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해 보이는 일이, 군인
으로써 최고의 가치라 믿어 의심지 않았다.
그 날도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한 마을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악마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내가 수행해야 될 임무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그저 병정에 지나지 않았
던 것이다. 토벌 명령을 받는다면 토벌, 진압 명령이 내려오면 진압, 그저 양 손과 발이 묶인 채, 조종당하는 목각 인형.
그것이 그 시절의 나였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 나는, 나는 내가 하고 있던 일에 왜인지 모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거대한 파도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그 무엇인지 모를 책임감과 의무감이, 젋
은 나의 가슴을 어째서인지 뛰게 했다.
한국국제학교 10학년 박종호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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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그 마을은 20가구 내외가 살고 있는, 산속의 작은 마을이였다. 임무 수행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가는 곳에는,
붉은 비가 내렸다. 그 마을도, 물론 예외는 없었다. 마지막 목표가 처리된 후, 선임들은 먼저 복귀했다. 나에게 맡겨진
마지막 임무는 그 마을을 태워 없애버리는, 일명 뒤처리 작업이였다. 나는 피비린내 나는 손을 개울에 대충 씻어낸 후,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진동하는 피 냄새와 흩날리는 매화꽃이, 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빨리 태워버리고 돌아가야지,
아무 감정 없이 생각하고 있던 참이였다. 마을 뒷산 쪽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고작 해야 20살 쯤으로 보이는 여
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졸도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그 자리에서 처리
했어야만 했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새하얀 피부와 어딘가 슬퍼 보이는 그 표정, 부드러운 머리칼… 그때
의 나는 그녀에게 순간 빠져버린 채, 숨통을 끊어 놓는 일 따위는 잊었던 것이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녀를 업은 채 걸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버려진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그녀를 눕히고,
군복을 덮어 주고,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이 떠졌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실수를 그새야 알아차렸다. 부대로 복귀해야만 한다. 지
금 돌아간다 해도 처벌은 피할 수 없을 테지만, 한순이라도 빨리…
“가시는 겁니까?”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마른 들판에서 홀로 피어난 한 송이
꽃만 같은 그 모습.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지만, 왜인지,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돌아가셔 봤자, 변절한 것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겁니다. 이미 늦은 건 아니신지요.”
부드럽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그 목소리에, 나는 잠깐 주저했다. 냉정을 찾아야 한다. 입을 열었다.
“군인은 부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목숨을 살려 준 걸 고맙게 여겨라.”
“그 마을을 없애 버리신 것도, 명령에 따르신 것인지요.”
“그렇다.”
“그렇다면 그 운명도, 참을 수 없이 슬픈 운명이겠군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 표정도 없었어요. 피의 강물을 흐르게
하던 때도, 제가 살던 그 오두막에, 불을 붙여 버리셨을 때도…”
“네가 살던 집이였나?”
“그렇습니다. 저는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단지 그 마을 사람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 거둬 주신 것, 그뿐입니다.”
“안타깝군. 하지만 그것도 시대의 뜻, 너도 나도 그 뜻이 이뤄지기 위해 사용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가라.”
“그럴 겁니다. 그래야겠죠. 하지만 시대의 바람만으로 한명 한명의 촛불이 꺼져가는 것, 그 또한 저에게는 모순적으
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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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무슨 말이 하고 싶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입니다. 진심으로 시대의 뜻에 따라, 이렇게 살아 나가시는 건가요? 그저 자신을 속이고, 살
아남기 위한 발버둥으로, 명령에 따르시는 건 아니신지요.”
나는 어딘가 강하게 얻어맞은 듯 한 느낌으로 다시 멍해졌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윽고 그녀는 다
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더, 이곳에 있어 주십시오. 저는 이제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힌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제가, 저도 밉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도, 별 수가 없지 아니한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민에 빠졌다. 남의 앞에서 이 정도로 평정심을 잃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그 당시, 나의 생각의
흐름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인생을 평생 바꿔버릴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가지 않겠다. 하지만 언제든, 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라.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낡은 가마솥에 불을 때워, 음식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무언가 익숙
하고 따뜻한 기분이 느껴져 왔다. 그래, 어머니의 모습이던가.
“감자를 조금 쪄 왔습니다. 별 건 없지만, 드시지요.”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물을 조금 떠 왔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도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 천천히, 물은
한 모금 마셨다.
“이름이 무엇인가?”
“연희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연희라. 그렇군. 어째서 그 마을에 혼자 살게 되었지?”
“부모님은 5년 전,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계속해 떠돌다가, 그 마을 사람들이 절 받아 주신 건 뿐입니다.”
“그런가. 기구한 운명이군. 나도 부모형제 없이 자라왔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는 10살 때 돌아가셨다.
내가 갈 곳 따위는 없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군대인 건가요.”
“그렇다. 몇달 전 입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기 있더구나. 내 운명도, 너의 운명도, 참 기구하기 짝이 없구
나…”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여태까지 몇 명의 목숨을 빼앗으신 건가요.”
“12. 모두 명령이였다. 하지만, 너의 살던 마을에서는, 직접 빼앗은 목숨은 없다.”
그녀는 왜인지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다시 말없이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가 계속해서 내 안에 맴돌았다. 처음으로,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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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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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을 따랐던 나 자신이, 비참할 정도로 부끄럽게 느껴져 왔다. 밤은 깊어만 가고, 풀벌레 소리는 잔잔한데, 저 밑에 어딘
가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까. 그들의 목숨을 빼앗은 자들도, 또한 나처럼 명령에 충실한 자들이겠지. 생
각에 잠겨 있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무시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가 어느새, 내 뒤쪽에 앉아 있었다.
“잠이 오질 않는구나. 너야말로 자거라. 시간이 늦었다.”
“원해서 한 일이 아니시겠죠?”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지?”
“낮에 했던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빼앗은 12명의 목숨. 사실은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것이겠죠. 아무런 의심 없이
명령만 따르는 일에는, 크나큰 허점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당신이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요.”
내가 머리속에 가지고 있던 모든 말들을, 그녀가 목소리로 꺼내 주었다. 어느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후회하고 계신가요?”
“...미안하구나"
“저에게 죄송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12명의 영혼은, 아마 당신이 떠나는 날까지 당신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을 겁니다. 시간은 돌릴 수 없으니까요. 늦지 않게 주무십시요.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은 달이 아름답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들어갔다. 나는 아주 오랬동안, 그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날들이, 몇주고 계속됬다. 가끔씩 그녀는 산나물 따위를 캐 오곤 했다. 나는 그녀가 없는 동안, 불을 때우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에는 조용히,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내온 인생의 이야기. 나의 인생의 이야기.
지금 돌이켜 보면, 매일 밤 그녀와의 이야기는 나의 사과의 말로 끝났었던 것 같다. 날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도 조금
씩은 열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미소를, 조금씩은 볼 수 있게 됬다. 우리 서로는 그동안 한번도 말로 꺼낸 적 없는,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들을 꺼내가며, 그렇게 살아 있었다. 그날 밤도 그녀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그날따라, 그녀의 표정을 읽는 일이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 한, 그러나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미소,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있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나는 물었다.
“저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을 악마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밤 저와 이야기하던 당신은, 갈 길을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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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었던, 힘없는 인간일 뿐이였습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저도 처음
으로 제 모든 것을 보이고, 솔직해 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불행을 안겨 준 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당신
으로 인해 갈 곳 없던 저의 삶에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조금씩,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를 만나고, 내가 해 왔던 일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들이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
그곳은 군대 따위가 아니였어. 바로 너의 곁이다. 나와 함께 도망가자. 내가 그동안 지어 온 죄들을, 너에게만이라도 속
죄할 길을 찾고 싶다. 너 하나만은, 내가 끝까지 지켜 내고 싶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모든 걸 나누며 동이 틀 때까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 안았다.
그로부터 며칠 지났을까. 아마 5월 중순쯤 됬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잠깐 쉬고 있던 때, 잊고 있던 소리가 들려왔다.
군화 소리. 순식간에 그 집은, 군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 새끼. 잘도 숨어 있었군.”
“둘러싸!”
도망가야 한다. 절대 잡혀서는 안된다. 이렇게 깨지게 둘 수는 없다. 나는 어찌 되던 상관없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
만은,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킨다. 그녀의 손을 잡고,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숲 속을 달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따돌렸다고 생각할 때 쯤, 누군가에게 등을 걷어차여 쓰러졌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 군복이군. 변절자인가?”
“아니다. 임무 수행중이였을 뿐이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훗, 그런가. 여자는 뭐지? 빨갱이인가?”
“아니다. 이 여자는 그저…”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다리를 걷어차여 다시 쓰러졌다. 그가 말했다.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상부에는 임수 수행 중 조난당했던 일로 해 주지. 그 빨갱이 여자를, 직접 처리해라.” 그리
고 그는, 나에게 권총 한자루를 던지듯 건냈다. 나는 모든 것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도망가야 한다. 아니, 그녀만이라도
구해야 한다. 제발, 제발…
그 순간, 그녀가 외쳤다.
“죽이십시오. 제가 바로 당신이 쫒던 그 벌갱이가 맞습니다. 이제 도망갈 곳도 없으니, 남은 한은 없습니다.”
나는 그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 버렸다. 그녀는 양 팔로 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내 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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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더이상 바라는 건 없습니다. 살아주세요.”
그리고는 총구를 손으로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고는, 이미 힘이 빠져 버린 내 손을 잡아, 방아쇠를 당겼다.
지는 꽃잎처럼, 그녀는 천천히 비틀거리더니 이내 털썩 쓰러졌다. 나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남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분명 많은 사람을 상처입혀 왔어요. 그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요. 물론 당신은 나도 상처입혔
어요.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차갑게 식어버린 군인으로써의 당신… 따뜻한 피가 흐르는 또 다른 당신은, 나에게 처
음이자 마지막 행복을 안겨 주었어요.”
그녀는 힘겨운 듯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한번 가누고, 그녀는 계속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나에게 불가능했던 몫 만큼, 살아주세요. 따뜻한 당신으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맑게 차있는 눈동자로 천천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게 그녀는, 피를 흘려가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식어가는 몸 위로, 매화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쌓여갔다.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운 어느 날. 집 안에서는 라디오의 음성이 흐르고, 창 밖에서는 선선한 4월의 바람이 계속해서
불었다. 날리는 매화 꽃잎들 사이, 어딘가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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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베트남에서 4
·3을 만나다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이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 시골 마을이 있었다. 마을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 시골 마을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
는 부양해야 할 부모와 가족이 있었고,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찾고자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올라갔다.
사건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어디선가 나타난 군인들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
어진 일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의 학살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며, 가족과 재산을 잃었다. 남자는 도시에
서 전화 한 통으로 상황을 전해들어야만 했다. 너희 어머니께서 병원에 계시고, 네 형제는 죽었어. 남자가 병원에 도착
해서 마주한 것은 온몸에 중상을 입은 어머니와 가족의 시체였다.
이것이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지 감이 잡히는가? 난 당신이 이 사건이 제주4·3사건이라고 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
다. 하지만 이번에는 빗나가버린 오답이다. 이건 베트남에서 일어난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
던 한국군이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자연스러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얘는 왜 다루라는 제주4·3사건은 안 다루고 갑자기 베트남
얘기를 해? 심지어 한국이 잘못한 일을? 너무 당황할 것 없다. 추리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사건은 연결되어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설령 대한민국에서 비행기로 5시간 거리에 있는 동남아 국가 베트남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지난 5년간 베트남에서 살아왔다. 당시 난 친구들과 함께 미술 자율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한 영상을 만들었다. 그 당시 선생님께서 제공해주신 인터뷰 자료가 있었는데, 저 이야기는
인터뷰를 진행하였던 베트남 노인의 이야기다. 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주4·3사건을 떠올렸다. 고로 이 글에서는
이 두 사건 간의 관련성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제주4·3항쟁은 남한만을 위한 선거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의 저항이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남한만의
단일 선거가 아닌, 통일된 남북의 지도자였다. 제주도민은 분노했고, 그들의 외침은 제주도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들
을 막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주도 학살을 자행했던 명목은 공산주의자 척살이다. 당시의 군대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를 주축으로 하여 구
성되고 훈련받았다. 거기에 소위 말하는 깡패단인 서북청년회와 협업하여 제주도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끔찍한 날들이었다. 제주도의 흙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아, 내가 그 시절을 겪은 적은 없지만,
안양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오지윤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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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분명 지긋지긋한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내가 진동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총에 맞았다. 그들은 칼에 찔려 죽었고, 두들겨
맞아 죽었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에 따르면, 나이가 어리든 많든 마을 주
민들을 세워놓고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 살해했다고 하니, 실제로 그들의 행위가 단순한 학살에 불과했다는 것을 뒷받
침해주고 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 비극은 이후 베트남에서도 반복되었다. 잘 훈련된 군대는 1968년까지 유지되었고, 베트남의 Phong Nhi 마을,
Phong Nhat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 비슷한 학살은 그후로도 거듭해서 반복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시위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도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참고로 내 옛 선생님께서는 대학생 시절 광주 민주화 항쟁에 참여하셨
다고 하는데, 당시의 참상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신다.
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 내가 해야 할 말은 딱 두 가지뿐이다. 첫째, 우리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
이다. 군대는 폭력을 물려주었고, 이 가학적 행위는 몇 번이나 되물림되었다. 부정적인 것을 물려주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끊어지지 않을뿐더러, 세뇌와도 같은 기질을 보이기 때문에 물려받는 이들이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폭력
을 배운 군대는 또다시 새로운 세대에게 폭력을 물려주었다. 그들에게 그런 폭력은 당연한 일이었다. 군대는 공산주의
자를 말살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빨갱이들의 논리였고, 없애야 하는 해충에 불과
했을 것이다. 1948년 제주, 1968년 베트남, 1980년 광주 학살은 모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빨갱이 척살, 공산주의
자의 뿌리 뽑기라는 명목.
제주 학살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언급되지 않았다. 제주의 진실을 알리고 퍼뜨리려던 사람들은 핍박을 받았고, 그
학살은 사회에 은폐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역사 교과서에서까지도 가르쳐지고 있다. 이것이야말
로 방법이다.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되면 끊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의무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직면하고, 반성해
야 한다. 현재는 대한민국이 베트남 학살 건을 거짓이라며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법
으로 사과해야 한다.
둘째, 국가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뉘며, 갈등이 심심찮게 일어
난다. 국가의 분단이 계속된다면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라는 명분으로써 계속 싸울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그 결과
가 무엇인지 배웠다. 사람들은 불행했고, 어느 쪽 할 것 없이 많은 것을 잃었으며,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서로를
배척하려는 마음가짐을 버리고, 서로를 이해하며 화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제주 항쟁은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바랐던 남북 공통 선거는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
다. 오히려 지금, 남북관계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오히려 통일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간간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평화 통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를 이끌어낼 의무가 있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통일국가의 꿈을 위해 희생된 제주도민들을 배상하는 최선의 길인 동시에, 미래 세대에게 벌어질지도 모르는 더 많은
폭력과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69
산문 부문
4
·3평화공원에 다녀와서
우리 가족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환경에 반해 제주도가 좋아 제주도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남기고 싶어 3월 1일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제주도의 멋진 곳을 돌아다니며 제주도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이번주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주4·3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제주도로 이사를 온 이후에는 뉴스나 책에서 제주도라는 말만 나와도 관심을 갖고 보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4·3사건이 무엇일까? 뉴스에서 며칠째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난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
는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한게 많아졌다. 4·3사건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나를 위해 이번주는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
하기로 했다.
4·3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가는길에 벚꽂이 활짝 피어 있어서 너무 예뻤다. 꽃눈이 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레였다. 우리가 방문한 4월 2
일은 4·3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있어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 보
니 커다란 동백꽃 모형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달려가 재미있는 포즈를 취하고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했다. 우
리 가족은 신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구부터 왠지 떠들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조금 엄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조심스러웠다.
전시관에는 4·3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잘 전시되어 있었지만, 글을 읽어도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서 아빠가 설명을 해주셨다.
희생된 어린 아이의 사진을 봤을땐 정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는건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
도 아는 사실인데... 그시절 어른들은 왜 몰랐을까? 그리고 거짓말은 언젠가는 들통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시절 어른들은 왜 진실을 감추고 희생자들을 만들었을까?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턱을 잃은채 사신 무명천 할머니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제주도로 오면서 할머니랑 헤어지게 되어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데, 무명천 할머니를 보니 서울에 계신 할머니
삼양초등학교 4학년 박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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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나이가 드셔서 이가 하나 빠지신것도 엄청 불편해하셨는데, 무명천 할머니는
턱이 없으니 얼마나 더 불편하셨을까? 턱이 없는데 음식은 어떻게 드셨을까? 지금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
처럼 천을 하고 다녔으니 여름엔 얼마나 더우셨을까? 마음이 너무 아팠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곳을 끝으로 전시회장을 나왔다.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동백꽃을 보았을 때 신나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백꽃은 시들지 않는 꽃으로 4·3사건의 희생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시회
장에서 사진으로 본 많은 희생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4·3사건에 대해 알고나니, 지금 아름다운 환경을 자랑하는 제주도를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은 4·3사건의 희생자 덕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4·3사건은 슬픈 역사지만 잊지 않고 마음에 기억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진실이 왜곡되어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
도록 이 세상에 거짓말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71
산문 부문
5학년 1반과 함께하는 현장 체험학습(4·3 현장 체험학습)
오랜만에 현장 체험학습을 갔다. 2년 만에 간 현장 체험학습이어서 더 설레었다. 예보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조금 흐리긴 했지만 그래도 비가 안 와서 다행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현장 체험학습 가는 목적을 설명해주셨다.
가는 목적은 ‘제주의 역사와 4·3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8시 50분에 버스를 타고 4·3 평화공원으로 출발했다. 너무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에 엄청 일찍 도착한
것 같았다.
우리반과 함께 2반이 실내 전시관 미션을 먼저 수행하기로 했다. 우리 모둠은 같이 모여 다니며 전시관 내에 있
는 자료들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미션을 풀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미션은 13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관
심 있던 미션은 [미션 2]였다. [미션 2]의 주제는 ‘사람들이 꿈꾸던 나라의 모습을 찾아서 빠진 문장 완성하기’였는
데 ③번과 ⑤번이 빈칸이었다.
미션2)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라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던 나라의 모습을 찾아서 빠진 문장을 완성해 보세요.
우리 모둠은 팀워크를 발휘하여 찾았다. ③번은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이고 ⑤번은 ‘학
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이다.
우리는 사회시간에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 배웠는데 그 시대에는 이러한 기본권조
차도 보장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내가 지금 시대에서 평등하게 배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미션을 수행하면서 출구로 갔다. 출구에는 4·3 피해자들의 얼굴 사진이 벽과 천장에 가득 붙여져 있어서 슬프고
무서웠다. 다시 1반과 2반은 모여서 4·3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첫 번째 영상은 ‘별이 된 아이들아’이다. 이 영상은 4·3공원에 올 때마다 계속 봤던 영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
은 ‘우리의 역사 4·3’이었다. 두 영상을 시청하면서 그때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낀 것 같다. 옆에서 장난꾸러기 남자친구
들이 훌쩍훌쩍 우는 모습을 보니 ‘앗... 저 친구들까지 눈물을 글썽이다니?’ 나도 사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
남광초등학교 5학년 김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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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4·3사건으로 제주도민 30만 명 중 3만 명이 피해를 당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당시 제주 사람 중에 자기 가족
이나 사촌 중의 한 명이라도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설명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 반 친구들도 코로나에 걸려서 3~4월에 5명이나 못 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코로나가 아닌 억울한 죽음이었다
면 나는 어떻게 학교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 내가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10년, 20년이 지나도 억울
한 죽음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해마다 봄이 되면 따뜻한 봄이 아닌 가슴 아프고 슬픈 봄을 맞이할 것 같다.
우리는 영상을 다 보고 야외 미션을 하러 갔다. 야외 미션에도 찾기 어려운 미션들이 많았다. 또 야외 미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미션은 [미션 3]이었다.
우리 가족 중 4·3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은 5명이다. 당시 사셨던 주소를 이용해 찾았다. [의귀리] - 김○○...
찾으니 너무 신기했고 또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가족에서 다섯 분이나 4·3으로 인해 돌아가셨다니···’
우리는 가랑비가 와서 절물자연휴양림을 가지 못하고, 4·3평화공원에서 배려해 주셔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절물자연휴양림은 못 가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하니 다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음에도 5학년
1반과 좋은 추억 만들면서 현장 체험학습을 가고 싶다. 그리고, 4·3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4·3 역
사에 관심이 생겨서 집으로 돌아가서 더 찾아보게 되었다. 할아버지께도 4·3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미션으로 모두 찾
았다고 말씀드렸다.
4·3 명예 교사이신 우리 할아버지는 나에게 4·3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4·3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번 현장 체험학습은 아주 뜻깊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때 얼마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았을지 생각하니 너무 속상하고, 이 글을 쓰
는데도 눈물이 나와요. 제가 할아버지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저도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4·3평화공원도 매년 할아버지 따라가서 그때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 해 드리고 싶어요.’
73
산문 부문
슬픈 기억의 섬
작년 여름방학에 나는 2.28 학생글짓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역사공부는 무척 지루할거라고 예상했는데
하다보니 몰랐던 내용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에 푹빠졌다. 2.28 민주화운동은 내가 사는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고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에도 방문해서 궁금한것들을 더 알아보았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방학에는 제주4·3사건에 관해서 글짓기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제주4·3사건은 우선 네이버를 검색해서 조
사를 해보니 기간도 길고 당시에 제주는 인권이 무참히 짓밟힌 완전 생지옥이었다. 제주도에도 4·3평화기념관이
있다고 하는데 멀어서 당장은 가보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다. 어머니께 물어보니 아직은 내가 어려서 같은 민족끼
리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설명해줘도 이해하기 어려울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어두운 역사의 진실에 대
해 알아가는 부담감도 컸다. 한국사에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왕들의 업적, 일어난 사건들이 연대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근현대사는 내용도 적고 내가 모르는 의거, 항쟁들이 많았다. 공부할수록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아픈 역사가 왜 이렇게 많은지 화가 났다. 또 우리에게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가 왜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깨
달았다. 우리가 떠올리는 제주도는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섬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이처럼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
었다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평화롭기만 할것 같은 제주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져 1947년부터 1953
년까지 7년 넘게 이어지며 무고하게 희생된 시민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 낮에는 국군과 경찰들이 마을
을 장악하고 밤에는 인민군들이 마을에서 약탈을 저질렀다고 한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 나라에서 주민들
이 겪었을 고난과 공포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불태우고 때리고 고문하며 인권이 사라진 곳에서 가족과
위태로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을 사람들이 불쌍하다.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정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이유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한지....어린아이들은 무슨죄가 있다고 함
부로 죽이는지.. 나는 아무리 이념이 중요하더라도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생명존중교육
시간에 선생님께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주4·3사건의 사망자
는 무려 3만명이라는데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게 믿을수가 없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선량한 주민
들을 정치에 이용해서 궁지에 몰아 학살한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배우는데
더 노력할 것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는 고
립된 섬에서 두려움과 고통으로 살다간 이름모를 희생자분들 덕분이다. 제주도에 이런 역사적 아픔이 있는줄 몰랐
대구월서초등학교 5학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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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배워서 사람들에게 잘 전달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사건이지만 관
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번 제주여행 갔을 때 바다가 예뻐서
차를 세운 곳에서 물질하시던 해녀분들이 물밖으로 참았던 숨을 가쁘게 내쉬며 내는 휘파람 소리를 들은적이 있다.
어머니께서 제주방언인 숨비소리라고 알려주셨다. 너무 예쁜 이름이었다. 4·3과 숨비소리는 참 닮았다. 그 당시 제
주도민들의 삶은 거친 바다 밑에서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고 끈질기게 버텨야만 했던 해녀들의 모습 같다. 4·3
의 비극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호이~호이~ 고단한 한숨이 담긴 소리가 폭력에 숨죽여 지내야만 했던 사람들의 울
음 소리처럼 들린다. 그들의 작은외침을 잊지 않을것이다. 모른척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에 슬픈 기억이 있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동안 놀기 위해서만 제주도에 갔던것이 미안하다. 내년 봄에는 가족과 함께 제주4·3평화기념관
을 방문해서 역사의 발자취와 상처의 흔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살기 위해 땅속 동굴로 들어갔지만 무참하게 죽임
을 당한 불쌍한 사람들이 머물렀던 다랑쉬굴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 최대 피해마을인 북촌리도 가보고 싶다. 그리고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인 어린이가 다쳐 성난 군중들이 분노했다던 관덕정도 들러봐
야겠다. 그날의 비명과 총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바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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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제주도의 아픈 기억 4
·3
다른 지역도 아픈 기억이 있듯이 아름다운 제주도도 아픈 기억이 있다. 4월 3일은 모두가 아픈 날로 기억하는 날이
다. 바로 제주4·3사건이 일어났던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대회를 나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주도에 사는 난 4·3을
모르는 아이였을 것이다. 알긴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그냥 제주도에서 4월 3일에 가슴 아팠던 일이 일어났구나.
정도밖에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초등학생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주4·3의 아픔을 알리고자 한다.
먼저 4·3에 대해 조사를 하는데 경찰에게 화가 좀 났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 기념으로 관덕정에 사람들
이 모였는데 거기서 기마 경관이 어린아이를 치고 갔다. 그런데 경찰이 사과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면서 일어나게
된 일이다.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진상규명을 요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
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
민이 희생당했다.
4·3사건의 전개 과정 중 유혈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할 기회는 있었다. 전국에서 5.10 선거를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5.10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무장대와의 평화 협상이 성사된 것이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인해 협상이 파기되었고 이때부
터 군경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대대적인 강경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1949년 3
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 는 방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00여 명이 총
살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 소로 보내졌다. 기나긴 수난의 세월을 보낸 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
면 개방되면서 길었던 4·3사건은 끝이 났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 진압 과정에서 2만5천~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경찰은 우리나
라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가졌다. 근데 경찰들이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것도 3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말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경찰에게 묻고 싶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일 때
죄책감이 하나도 안 들었는지 말이다. 제주도는 그 당시 빨갱이 섬이라고 불렸다. 빨갱이의 뜻을 잘 모른 나는 어머니
인화초등학교 6학년 현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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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빨갱이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엄마는 빨갱이가 좋은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불
렀다고 한다. 그런데 제주도민을 빨갱이라고 불렀다니 한마디로 제주도가 공산주의 지역이라고 불렸던 것이 아닌가.
제주도가 어느 지역보다 민주주의 정신이 뛰어난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제주도민이 원한 건 단지 남북한 단일 선거였다.
그런데 그 선거를 공산주의를 몰아간 것은 우리나라의 크나큰 수치이다. 근데 그런 제주도를 빨갱이라고 불렀다니 제
주도민으로서 정말 너무 슬펐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것이 인권이다. 법에도 나와 있듯이 인권은 중요
한 것이다. 근데 경찰이 사람의 인권을 짓밟아 버리다니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어떻게 같은 민족에게 총
을 겨누면서 죽일 수가 있는가! 4·3사건으로 인해 희생하신 분들은 아마 자신의 인권을 중요시여 겨 주기를 바라는 마
음과 하루빨리 한 민족의 완전한 자유와 한반도의 통일이 빨리 찾아오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민주주
의를 지향했을 것이다. 그들은 좌파, 우파 그런 걸 원한 게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과 한반도의 번영을 원했다. 친구들도
4·3을 잘 모른다. 난 목표가 생겼다. 바로 난 이제부터 내 옆자리부터 시작해 앞뒤 자리 친구들 우리 반 친구들 전체 아니,
전 세계에 이 4·3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를 다 말해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 제주4·3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알면 더욱더 좋겠다. 4·3을 의미하는 꽃은 동백꽃이다. 동백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란
뜻이다. 4·3피해자분들은 언젠가 제주도가 아름다운 지역으로 변하지 않을까 언젠가 다시 가족을 만나지 않을까. 라
는 기다림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언젠간 북한과 우리나라가 통일하길 바란다. 4·3희생자는 약 1만 2천여
명이다. 그중 10세 이하가 708명이 사망하였고 73명의 어린아이가 행방불명 되었다. 6학년이 된 나도 아 직까지 엄마
랑 같이 자는데 나보다 더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무섭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을지 정말 상상도 안 된다. 아직도 몇몇
분들의 시신을 못 찾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시신을 찾으셔서 마음 한구석에 있는 슬픔과 아픔을 덜어내셨으면 좋겠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4·3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제주4·3 같은 캠페인을 열어 4·3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 토론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도 뜻깊은 시간이 되고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보람 있는 일이 된다. 또한 4·3사건을 아는 사람도 더 많아진
다. 그럼 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찾으셨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아픔이 더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는 국민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한다. 만약 나라가 국민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독재 정치를 하게 된
다. 그럼 그 나라의 국민은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독재 정치는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지 않을 수
도 있다. 또한 독재 정치는 평화를 깨는 주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독재 정치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제
주4·3에 대해 알아보고 내 생각을 토대로 얘기를 해보았다. 다시는 제주4·3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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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제주, 화해와 용서의 섬
우리 가족은 여행을 좋아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은 어렵게 되었지만,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저는 꼭 다시 가
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제주도입니다. 제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기념이라도 하듯 제주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주는 제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해외여행을 벌써 몇 번이나 갔다 온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비
행기도 처음 타 봤고 제주 방문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제주는 제가 꿈에 그리던 것처럼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돌하르방이 반겨주는 제주공항부터 몰디브나 지중해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협재 해변의 에메랄드
색 바다, 장엄하고 당당한 한라산과 세계적 용암동굴인 만장굴까지,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제주에서 보낸 날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아
름다운 섬 제주에 제가 지금껏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이 아름
다운 섬 제주에 이토록 아픈 역사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제주가 무고한 양민들의 눈물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섬이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저는 공모전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4·3수형생존자 7인의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소
제목을 가진 <늑인(勒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 속의 일곱 분은 모두 제주 사람들로 4·3사건이 일어났던
1948년에 제주에 살았으며 그때 모두 억울한 옥살이를 하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4·3사건이라 부르는 1948
년 봄의 제주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과연 제주에는 얼마나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잠들어 계신
걸까요? 저는 책을 통해 당시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계셨던 일곱 분이 겪었던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은 찢어지고 아팠습니다. 저는 일곱 분의 가슴 아픈 이야기 중, 당시 농업학교 학생이었던 부
원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특히 아프게 와 닿았습니다. 4·3사건이 발생한 지 74년이 흐른 2022년에, 이제야 역사
의 진실에 눈 뜬 어느 중학생이 할아버지의 아픔과 억울함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부원휴 할아버지께서 저의 이
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원휴 할아버지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일곱 분의 사연 중 저는 당시 학생이던 할아버지의 글이 가장 인상
적이었습니다. 공부밖에 모르던 꿈많은 학생이었던 할아버지께서 교복을 입은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서울 배화여자중학교 3학년 오채현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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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겪으신 얘기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이었습니다. 막내로 곱게 자랐던 할아버지께서 아무 잘못도 없이 끌려가
폭력과 고문으로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셨다고 하니 마치 옆에서 지켜보듯 저 또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저도 이러
한데 할아버지께선 얼마나 힘들고 억울하셨을까요. 하소연할 곳조차 하나 없이 얼마나 당황하고 막막하셨나요. 재
판다운 재판 한번 못 받아보시고 ‘국가 내란죄’를 적용하여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셨을 땐
또 얼마나 절망하며 세월을 보내셨을까요. 제가 본 제주는 푸르고 아름답기만 했는데 그 속에 할아버지의 눈물과
설움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저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4·3 때 겪었던 일도, 그로 인해 평생 멍에를
안고 산 자신의 문제도 물론이지만, ‘일본인도 아닌 같은 동족에 의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제일 억울한 비극
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억울함이 부디 풀리고 용서되길
바랍니다. 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 편안해지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늘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부원휴 할아버지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저는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한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자료들을 살펴보니
다행히 2000년에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어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제주민의 대량 희생
은 국가 공권력을 남용한 데 따른 결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2006년엔 대통령께서 직접 추념식에 참가하여 정부
를 대표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등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을 통한 화해의 장이 마련되었으며, 제주4·3사건은
과거의 갈등을 극복하고 역사의 상처를 교훈 삼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정부는 특별법에 의해 2008년 3월 28일 평화·인권기념공원인 ‘제주4·3평화공원’을 개관하였습니다. 그해
10월 16일에는 ‘4·3평화재단’을 설립하여 유족 복지 및 4·3평화정신을 계승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화해와
상생의 공동체 정신을 실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4·3사건은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선 그렇게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고 잠깐 설명
으로 넘어갑니다. 그저 1948년 제주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좌익 세력이 무장 봉기하여 이를 토벌하
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만 적혀 있습니다. 이번에 4·3사건을 공부해보니 그렇게 넘어가서
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 더 깊이 있고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
래는 없다’는 말, 저는 이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떤가요? 4·3사건이 일어났
던 1948년 제주와 얼마나 다른 걸까요? 대한민국은 그때와 비교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발전과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부분 역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며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고 상처 주었던 지난 과거가 오늘날도 비슷한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로 나뉘어 늘 다투기만 하는 모습이 제 눈엔 그 옛날 4·3사건 때와 겹쳐지며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날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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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을 거울삼아 서로 협력하고 평화와 상생의 길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조만간 아름다운 섬 제주를 꼭 다시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4·3평화공원’을 방문하겠습니다. 평
화기념관에 들러 당시 양민들의 피신처였던 ‘역사의 동굴’,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기에 비문이 새겨지지 않고 누워
있는 ‘4·3백비’, 그리고 4·3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있는 추모의 공간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부원휴 할
아버지를 만나길 희망합니다. 그곳이 더 이상 눈물과 희생, 억울함이 아닌 화해와 용서가 가득한 곳이었으면 좋겠
습니다. 그곳에 방문한 저를 할아버지께서 포근히 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 제주가 아픔의
기억을 치유하고 이젠 화해와 용서의 섬으로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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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자유의 노래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뒤숭숭한 느낌이 든 그날이었다. 학교에 다녀온 사이에 사라진 그의 흔적이 집 안 공기를
에워싸고 있었다. 방구석에 웅크려있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에 눈치가 없던 내가 봐도 커다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평소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곱디고운 그녀의 피부는 눈물이 말라붙어 바짝 건조해져 있었고,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칼
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빗질도 할 수 없을 듯한데 그 끝에 기다란 비녀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나는 눈물이 고
인 채로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듯 작아진 그녀의 등을 감싸고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 일어납서….”
나는 작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어린 나를 향해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도를 바꾸어 미소 짓
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그녀가 숨기려 했던 모든 것을 보았다. 간신히 끌어 올리는 것이 역력한 그녀의 무거운 입꼬
리는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푹 내려앉을 것 같았다. 누가 따왔는지, 발치에는 붉게 터진 볼레 열매가 수십 개 굴러다녔다.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내가 쥐어준 은빛 비녀를 잡고 있던 그녀의 펼친 손바닥에는 분노와 공포를 보여주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녀의 비녀를 좋아했다. 하얀 피부의 그녀와 어울려서였을까 늘 머리에 꽂혀있는 은비녀를 등
뒤에 업혀있을 때면 그녀의 머리에서 스윽 빼내어 손에 쥐고는 놓지 않았다. 그녀의 포근한 향기와 반짝거리는 은빛이
담긴 그것을 쥐고 있으면, 나는 어느새 스르르 잠들었다.
할아버지와 삼촌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져 갈 때 즈음 이런 일이 일어나, 나는 그가 없는 하루하루
에 금세 적응할까봐 두려웠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낯선 이들에 의해 그가 동쪽의 월정리 해변으로 끌려갔다는 사
실은,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나의 귀로 며칠 사이에 들어왔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월정리 해변의 모습을 상
상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허공에 그의 얼굴을 그리다 수업 시간을 다 보내버릴 때도 있었다. 모범생이었던 내가 가끔
집중하지 않다가 눈이 마주쳐도 선생님은 지청구 대신 아무 말 없이 항상 위로의 눈빛을 보내주셨다. 그러다가도 눈을
돌려 교실 안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빈자리를 볼 때면, 선생님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학교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냉큼 집으로 달려갔다.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그녀까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그 잠깐 사이에도 오만 걱정을 하며 뛰었다. 바람을 가로지르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주저하지 않
노형중학교 3학년 고정운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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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고 뛰었다. 계속 뛰었다. 그저 그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만을 바라며 뛰었다.
그날도 아이들은 칠판 가득한 판서 내용을 노트에 베끼는 데 여념이 없는데 나는 어김없이 초록색 칠판을 배경으로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문득 삭막했던 교실 뒤에서 한 가락의 노래가 들려왔다.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는 아
무 설명도 없이 어리둥절한 우리들의 눈을 마주치셨다. 그리고 비어있는 의자들은 조금 더, 오래 쳐다보셨다. 어색한
목소리로 노래는 이어졌다.
“자—유가 아니거든 죽음—을 달라”
학생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운 그날, 나는 그 노래를 집에 가서 그녀에게도 들려주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밥을 먹다가도,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곧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누군가의 법에 노래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노래를 부른 것이 죄인가, 자유를 원한 것이
죄인가. 그 노래를 부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죽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하루에서 유일한,
게다가 아주 작은 우리의 외침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언젠가 누군가 먼저 불러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날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서북청년단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집에 들이닥
쳐 애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끌고 갔다. 공터에 일자로 세워진 우리는 뒤에서 나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움찔하며 점점
가까워져 가는 총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탕, 탕, 탕, 탕!”
그녀는 내 손에 그 은빛 막대기를 쥐어주더니 나를 치마폭에 숨겼다. 그러고는 얼른 나를 감싸 안고 내 귀에 자유의
노래를 속삭였다.
“자—유가 아니거든—.”
“탕!…….”
그녀의 몸이 쓰러지면서 눌려 쥐고있던 은비녀가 나를 쿡 찔렀다. 펼친 나의 손바닥에는 언젠가의 그녀 손바닥처럼
분노와 공포의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푸른 월정리 바다가 나에게는 붉은색으로 보인다. 울어멍 은빛이 머리칼에 스며들었을 때, 울아방 던져진 찬 바닷
물이 닿았을 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진정한 제주의 향기와 바닷바람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떼본다.
마지막까지도 당당하게 자유를 외치지 못한 우리를 떠올리며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는 떨리지만, 여전히 손바닥에 남
아 있는 빨간 자국이 욱신거리지만, 처음으로 커다란 소리의 외침이 제주 바다에 울려 퍼진다.
“자—유가 아니거든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거든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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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영웅들에 대하여
최근에 개봉한 한산을 보러 가기 전에 미리 예습하기 위해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장군님이 그 안에서 고뇌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고, 동시에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 땅에
서 있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구나, 우리를 위해서 저런 많은 희생이 있었구나 등. 나는 영화를 보면서 영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 지켜야 한다, 사람들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주
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거기 있는 선원들도 모두 영웅 아닌가?
나는 계속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답은 이것이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다. 당장 당신도 영웅이 될 수 있다. 그저 상기한 마음가짐과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있으
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이 제주도의 영웅들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물론 제주도에는 이미
알려진 수많은 영웅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4·3 영어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이 곳의 영웅들의 대해서 많이
알아갔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노력했는데 우리도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먼저, 4·3이란 무엇일까?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혹시나 만약에 4·3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의 설명을 하고 싶다. 4·3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이 사건의 발단은 3.1절 발포사건이다. 3.1절 기념행사에 아이가 말에 차여서 죽은 것으로 인해 주민들이 분노해서
쫓아가자 폭도로 오인해 민간인을 발포한 사건이다. 제주도민은 사과를 원했고, 이는 총파업시위로 이어졌다. 그
러나 미군정은 그저 제주도민들을 좌파로 몰고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자 남조선노동당은 무장 봉기를 시작하고 그
것으로 인해서 무장충돌이 시작된다. 여기부터가 앞으로 있을 비극의 시발점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쯤
에서 평화협상을 통해 학살을 막을 수 있을 뻔했지만 군대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제주도민들은 선거를 거부한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그 유명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초
토화 작전에서 4·3 해자의 대다수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사건이 무엇인지는 이쯤이면 충분할 듯하니,
한라중학교 1학년 오지후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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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이만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자.
첫 번째 영웅은 많이들 알고 있을 김익렬이다. 그는 그 당시에 9연대장이었으며 그 당시에 살육이 계속되는 잔
혹한 시대에 그 살육을 멈추려던 그야말로 ‘영웅’이다. 상기한대로 그는 김달삼과의 협상을 시도해 문제를 해결하
려 했다. 그는 4월 28일에 구억리국민학교에서 김달삼과 협상을 벌였으며 서로는 실제로 휴전에 동의했다. 안타
깝게도 이후,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며 살육을 완벽히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우리는 결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시도할 수 있었던 가장 평화로운 행동을 취했고, 결국엔 연대장으로서 공격을 할 수도 있었음
에도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만약에-그럴 일은 없겠지만-그가 실패했다면서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시당해야 마땅
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결과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만
약 그가 총구를 민간인한테 돌렸으면? 위에 행동을 했음에도 그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이익을 감안하면서도 사람을 살리려 한 영웅이다. 사람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 모두 그분을 기억해
야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영웅은 바로 문형순이다. 그는 당시에 경찰서장이었으며 그 또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직접 나섰던 사람
이다. 그 당시에 제주도는 산의 간 사람들과 접촉이 있으면 바로 총살당하는 피와 광기에 찬 섬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빛은 있었다. 그 당시에 하모 리의 주민들이 거의 몰살당할 형편이었는데, 문형순은 마을의 대표와 접
촉해 사람들이 자수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자수할 때는 자수서를 그 당시 공무원과 마을 주민들과 입
을 맞춰놔서 100여명의 주민들이 별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다른 일
화도 있다. 1950년에 계엄군이 총살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자 “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답하며 총상을 집행하지
않은 일화도 있다. 이것 또한 그가 사람을 살리려 노력한 일 중 하나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재치를 발휘해 사람을 구한 영웅이다. 두 영웅은 서로 정 반대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려 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정부 쪽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 생각을 해보면
정부 쪽 사람이 토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살리려 한다는 건 꽤나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도 한다. 만약 문제
가 되면 정부차원에서 조치가 내려질 테고 그러면 끔찍할 경우 총살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다하지 않고
사람을 구하려 했다.
이 두 사람은 영웅이다. 잊혀져서는 안 된다. 김익렬 연대장은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문형순
경찰서장은 기지를 발휘해 사람을 구하려 했다. 두 영웅사이에 더 우위를 따질 수는 없다. 상술했듯이 영웅은 누군
가를 지켜내려 하고 살리려 한 사람이다. 둘 다 사람을 살리려 노력했듯이, 우리 또한 누군가를 살리려 노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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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은 안 될까? 당장 내가 다니고 있는 중학교만 봐도 서로를 죽이겠다는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
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도 서로를 혐오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세상 또한 이상해졌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고 아베 전 총리는 암살당했다. 거기다 1
년 전에는 아프간 사태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은 피를 보면서 싸우지만, 나는 최근에 위에 소식을 접하면
서 여러 고민을 해 봤었다. 어째서 이 세상은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걸까? 이런 면을 보면 인류는 과거에 비해서 발
전한지 못 한 것 같기도 하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 죽이고 싸우는 것이 원시인들과 다를 게 어디 있는가? 어째서 현
재에는 대화를 할 생각이 없을까? 대화는 평화에 제일 가까운 지름길이다. 우리는 그저 소통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
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평화의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그저 소통을 통해 언젠가는 이 세상이 전
쟁 없고 4·3사건 때처럼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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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문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
내가 무의식에서 깨어난 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멀
리서 보이는 백록담을 바라보면 어느새 눈앞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네 살배기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
는지 넓디넓은 벌판 중간마다 세워져 있는 비석들을 놀이로 삼아 술래잡기를 하며 보냈다. 뛰다가 넘어져 옷에 흙
이 잔뜩 묻어도 마냥 좋은 듯 실실 웃었다. “꺄르륵 꺄르륵” 한껏 신이 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지만은 않았다.
한편, 가장 안쪽에서는 어른들이 아침 준비를 위해 모여있었다.
“아니 준희 아방, 아침 댓바람부터 어데 가멘마씨?”
아주머니는 큰 바구니를 들고 어디로 가고 있던 아저씨를 불러 세우셨다.
“준희 어멍, 밥상에 짓을 지슬 호끔만 더 이서도 얼마나 좋으크니?”
하지만 아주머니는 지슬은 충분하다며 밥상 앞으로 이웃들을 부르셨다.
“아덜, 똘 몽케지 마랑 혼저 오라게.”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우르르 몰려왔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지저분한 바지를 털어주었고 아이들은 혼이 났
지만 배고픈 마음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보였다. 곧 주변은 시끌벅적한 말들로 채워졌고 눈앞에는 아이들
의 입 속에서 나온 밥 풀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더러워.”
내 말을 들어서인지, 옆에서 신이 나게 떠들며 밥을 먹던 준희가 내게 배고프지 않냐며 말을 걸어왔다. 사실 나
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다 하나 같이 들떠있고 신이 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말하기 귀찮은 나머지 “기여 기여!”
라고 대충 말하고 넘겼다.
밥을 먹고 난 후, 나는 어멍에게 등 떠밀려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이 준희에게 상처가 됐을
까 마음이 쓰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술래잡기를 하였고, 아이들의 비해 큰 나의 몸집은 비석 뒤에 숨어
한국국제학교 10학년 한소민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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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도 소용이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술래잡기는 끝이 났지만 아이들은 전혀 지칠 줄을 몰랐다. 아이들이 잠에
들 수 있도록 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는 것이 고됐는지 내 형편없는 노래 실력에도 하나씩 잠에 들었다.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준희는 내 옆에서 끝까지 잠에 들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고 잤을 텐데
아침에 했던 말들이 나를 붙잡았다.
“다들 곯아 떨어졌는데 너는 왜 아직까지 안 자?”
괜히 미안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그냥요.” 라는 말과 함께 준희까지 피슈슈 잠이 들었다.
드디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분명 아이들이 내 옆에 있었지만 괜스레 마음이 공허해졌다.
“왜 이렇게 항상 마음이 공허하게 느껴질까?”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 혼자 고립될 때면 머릿속에서 생각하곤 하였다. 오늘따라 괜스레 더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이 잠에 들고 어른들이 일을 하러 나가실 때면 혼자 남아 들판 위를 걸어가곤 하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항상 뭔지 모를 기분을 안겨주곤 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해안선 앞에 있는 바다도 가보고 싶고 한
라산도 올라가 보고 싶었다.
“바다 바람은 내가 매일 맞는 산들바람과는 또 다를까? 한라산은 올라갈 수는 있는데 내려올 수는 있을까?”
하지만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자 무서운 일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평범한 일상
들이 평범해 보이지 않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 내 눈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은 내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항상 웃음기로 채워져 있던 아이들의 웃
음이 왜 나에게는 다르게 느껴질까? 아이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어른들이 돌아오셨다. 다들 두 손에 한가득 무언가를 힘겹게 들고 오셨다. 어른들 발걸
음 소리에 아이들은 하나 같이 부모님 품으로 뛰어들었다. 돌아오신 어머니께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냐고 물었다.
87
산문 부문
”내일이 4월 3일인데 까먹어시냐?”
어머니는 광주리 가득 들어있는 것들을 가르치시며 내일 있을 제사에 쓰일 음식들이라고 하셨다. 한 번도 제사
를 치른 기억이 없어 의문이었지만 아이들과 반나절을 뛰어놀고 난 후의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잠에 들어버렸다.
어머니의 말대로 아침부터 사람들은 제사 준비에 몸이 부족할 정도로 바빠 보였다. 어째서인지 어제까지만 해
도 뛰어다니지 못해 안달이던 아이들조차 가만히 부모님 품에 안겨있었다. 순간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하나,
둘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놀이터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었고, 거기에는 희미하지만 또박또
박 이름들이 적혀져있었다. 하지만 비석 밑에는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았다.
비석들을 하나 하나 둘러 보니 부모님의 이름, 아이들의 이름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이름도 보였다.
그제서야 나는 나의 공허함의 이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내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은 차마 누리지 못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뛰어다닌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모두 돌려
받지 못한 시간들과 억울함에 사무쳐 이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 곳을 떠나 너무나도 바뀌어 버린 제주와 제주도 어딘가에 있을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것은 아닌지
기억 속에 남아있던 제주와 달리 평화롭게 변한 모습에 내 눈은 또 다시 깊이 젖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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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동백꽃 필 무렵
어김없이 내 생일은 돌아왔다. 내가 버려진 날, 동백꽃 필 무렵, 수녀님께선 생일을 맞아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라
고 하셨다. 매년 돌아오는 이 편지 쓰는 시간이 난 너무 싫다. 사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런 편지 따위가 아니라 내 부
모님의 행방이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엄마 아빠를 찾는 것 뿐인데… 수녀님은 내
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절대 알려주지 않으신다.
미래의 동백이에게
안녕 동백아, 거긴 좀 살만 하니? 열여덟 생일을 맞아 이렇게 또다시 편지를 쓰게 됐네. 난 지금 하루빨리 우
리 부모님을 찾아 이곳을 떠날 궁리를 하는 중이야. 아마 그때쯤엔 내 계획이 성공했겠지? 그리고 또래 친구들
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을거야. 이 섬도 얼른 떠나야지. 이렇게 다짐하니까 정말 할 수 있을것만 같아. 꼭
알아낼게. 대체 1948년 4월 3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65년 4월 3일
동백이가
어느 날, 나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날짜도 1931년으로 되어 있는 순 엉터리 편지였다.
동백이에게
안녕, 네 편지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1941년에 살고 있는 동백이란다.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편지를 열어봤네. 네 딱한 사정 잘 들었어. 꼭 부모님을 찾길 바랄게. 그런데 정말 신기하지 않니?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온 네 편지는 너와 같은 이름, 같은 나이인 또다른 동백이에게 전달되었다는게. 아, 그리고 섬이
라면 제주도를 말하는거니? 나도 제주도에 살고 있는데.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종종 편지를 주고받자. 네가 못
한국국제학교 10학년 손예원
장려상
89
산문 부문
믿을까봐 거리에 떨어져 있던 총알을 동봉했어. 지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고,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
니까 너무 놀라진 마.
1941년 11월 15일
동백이가
말도 안 돼. 어떻게 미래로 보낸 편지가 과거, 그것도 몇십년 전으로 갈 수가 있지? 아니 그보다, 나는 과거의 동백이
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고,
동백이는 과거에서 부모님을 찾는 것을 도와준다면 서로에게 이득인 셈이다. 어쩌면 이 편지는 반드시 나에게 전달되
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동백이에게
안녕 동백아, 편지 잘 받았어. 사실 어떻게 내 편지가 과거로 갈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래, 이
것도 인연이니 우리 친해지자. 그래서 말인데…제안할 게 한 가지 있어. 나는 너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줄 테니 너는 그곳에서 우리 부모님을 찾는 걸 도와주는거야. 어때, 솔깃하지 않니? 참고로, 일본의 식민지는
1945년에 끝날거야.그리고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고 불리게 된단다.
1965년 4월 25일
동백이가
편지를 보내고 생각을 해보니, 나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는 거라곤 아빠의 이름이 김두진
이고, 오라리에서 외모로 유명했다는 것 뿐이다. 사실 이것도 수녀님을 겨우 졸라 얻어낸 정보다.
동백이에게
정말이야? 정말 조선이 독립을 한다는 거지? 나만 알고 있기 아까운 사실인걸. 아 참, 난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
었고 곧 결혼을 해야 한단다. 빨리 결혼을 하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예쁜 아이를 볼 생각에 설레기도 해. 네 제안
받아들일게.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그리고 네 부모님을 찾는 일도 기꺼이 도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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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943년 8월 1일
동백이에게
아무래도 동백이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훨씬 빨리 가는 것 같다. 여기서의 2주가 동백이에겐 2년이다. 1948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한다.
동백이에게
동백아 안녕, 아무래도 네 시간과 내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아, 이제 언니라고 불러야 하나? 우리
아빠는 오라리에 사는 김두진이고, 얼굴이 잘생겼대. 사실인진 나도 몰라. 겨우겨우 얻어낸 정보가 이거 하나
뿐이라…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두르자.
1965년 5월 12일
동백이가
얼마 뒤, 또다른 편지가 도착했다.
동백이에게
안녕, 네 편지를 받고 오라리에서 김두진이라는 사람을 찾았어. 동네에서 성격 좋고 얼굴 잘생기기로 유명
해서 금방 알아봤어.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만나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아. 가까이에서 계속 지켜보며
일이 생기면 알려줄게. 너는 요즘 별 일 없는거지?
1944년 12월 2일
동백이가
나는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91
산문 부문
동백이에게
안녕, 우리 아빠를 찾았다니 참 다행이다. 언니는 요즘 별 일 없지? 이 편지가 갈 때쯤이면 언니는 이십대의
중반을 보내고 있겠네. 나는 아직 열여덟에 머물러 있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다. 난 요즘 너무 궁금해. 무엇이
우리를 이어지게 만들었을까? 언니도 그런 생각 해 봤어? 아무튼, 아빠에 관한 정보가 있으면 꼭 다시 편지해.
1965년 5월 24일
동백이가
이 뒤로 동백이의 편지 답장은 점점 늦어갔고, 어느새부턴 나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세상이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편지를 안하는 건 너무하다. 아직 엄마를 찾지도 못했는데. 마지막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동백이에게
안녕,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편지를 하네. 독립 이후 많은게 달라졌어. 네 아빠는 아직 곁에 두고 잘 지켜보
는 중이란다. 우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 힘들땐 위로하고 서로 응원해주는 사이야. 그보다 요즘 세상은 너
무 무서워. 일본에선 풀려났지만 우리 제주도민들은 미국의 탄압을 받고 있단다. 또 편지할게.
1946년 12월 24일
동백이가
나는 이대로 영영 부모님을 찾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서러움에 눈물이 계속 나왔다. 수녀님은 그런 내게 다가오며
구겨진 편지 한장과 말라 비틀어진 동백꽃 한 송이를 건네주셨다. 내가 버려진 날 나와 같이 온 것들이라고 하셨다.
“네가 찾고있던 마지막 편지란다.”
나는 더 묻지도 않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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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사랑하는 내 딸 동백이에게
동백아 안녕, 이게 아마 나의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구나. 네 아빠 김두진과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
전하게 되었고, 우리는 너를 가졌단다.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폭력과 학살이 난무하는 끔찍한 나날들의 연
속이야. 너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널 안전한 곳에 두고 떠나야 했어. 네가 전에 물어봤었지? 무엇이 이렇게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를 이어줬냐고. 지금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너
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너와 나를 이어준 거야. 그러니 잊지 마. 우리는 늘 너를 사랑할 거고, 너를 버린 게
아니라는걸.
1948년 4월 3일
동백이에게
93
산문 부문
숨바꼭질
“짐 촐리라. 어서라!”
아버지는 동굴을 발견했다면서 내게 가족들에게 빨리 짐을 싸라고 재촉하신다. 나와 내 동생은 아버지의 뒤만 쫒으
며 손을 꼭 잡고 어두운 산속을 헤쳐나갔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간 곳 에는 좁은 동굴 하나가 있었다. 어머
니는 나에게 지슬을 하나 쥐어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 보였다. 내가 어머니는 먹지 않
으시냐고 물었더니 배가 부르시다고 했다. 어렸던 나는 어머니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겁지겁 지슬을 먹고 잠이 들
었다. 그날부터 그 동굴은 우리의 집이 되었다.
어느덧 한겨울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 찾아오고,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 사는 마을주민들은 추
위와 어둠의 공포에서 하루하루 그들의 존재를 감추며 은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토벌대의 눈을피해 자신들의 삶의 터
전인 산중턱 작은 마을을 두고 산아래에 위치한 동굴로 피신해 있었던것이다. 현무암 투성이라 농사를 짓기 힘든 척박
한 제주땅에서 가난하지만 경작을하며 살아가고있던 마을주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동굴에서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었다. 사실상 동굴을 찾는
것도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대부분은 갈곳 없이 방황하다가 군인에게 들켜 사살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
리 가족이 동굴에 멀쩡히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주의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주민들은 집에서 급하게 가지고온 지슬을 나워 먹으며 추위에 떨고 있을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넌 저쪽 가서 찾아봐.”
발소리가 여럿 들리더니 이내 점점 우리쪽으로 소리가 가까워졌다. 토벌대가 선흘리 마을을 덮치러갔다가 모두 사
라진 주민들을 찾아 나선것이다. 마치 목숨이 걸린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조용해지고 내
심장소리만 크게 울렸다.
“제발…”
나는 먹던음식을 손에쥔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
한국국제학교 10학년 윤이정
장려상
9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퍼졌다. 경식이네 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는 내 심장소리는 커녕 아이의 울음소리
만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겨우 두살박이 되어보이는 아이는 춥고 힘든 동굴 생활로인하여 감기와 고열로 힘들
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경식이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극진한 간호를 하면서 동
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많이 힘들었는지 하필이면 토벌대가 지나가는 그때 울기 시작한것
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저 울음소리가 한시 빨리 멈추기를 기도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적어도 오랫동안 달
래주어야만 울음소리를 내지 않을텐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울음이 멈추기도 전에 우리 가족이 사살을 당할 것이다. 아
이의 울음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아이의 입을 막아 소리를 줄이는 것이었다. 보다 못하신 마을 어르신이 아이
의 울음소리를 멈추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마을 주민들도 속삭이듯 경식엄마에게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엄마도 토벌대가 주민들을 발견하는순간 모두
죽음을 당할거라는걸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입을 막아 울음 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쓴다.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나간다. 직접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소리로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엄청난 공포 속에서 세
상의 잔인함은 여러가지 감각을 통해 나에게 다가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경식 엄마가 막고있는 덕
분에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토벌대는 동굴의 입구 이곳저곳을 총부리로 툭툭 치면서 돌아다니며 어딘가에 숨어 있
는게 분명 하다는 대화를 하며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계속되며 아이의 울음소리를 겨우 겨우
경식 엄마가 손으로 막고 있던순간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주민들의 걱정도 같이 멈추려는 순간, 경식엄마는
아이를 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이의 숨통이 경식엄마의 손에 의해서 끊긴 것이었다. 아이는 축 늘어져 아무런 저항
이 없어 보인다. 옆에 앉아있던 경식이도 놀란눈으로 엄마와 아이를 번갈아가며 보며 경직되어있다.
밖에서는 토벌대가 이곳을 떠나려 하는 분위기였다. 토벌대는 결국에는 서성거리며 주민들 수색을 하다가 이내 포
기하고 발걸음을 옮겼다.아마 날도 어둡고 칼바람이 춥고 하니 금방 포기한것으로 보인다.
“가시냐…?”
들키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인 일이지만 동굴 안 분위기는 싸늘했다. 토벌대의 발걸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간
이 흘렀고, 그제서야 경식엄마와 주민들은 아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하려다 결국 엄마의 손에 아이가 질식사를 하게된 비극적인 일이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슴 한켠에서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또 다른 복합적인 감정들이 들끓었다. 경식엄마는 결국 아이를 안고 울다 쓰러졌고,
마을 사람들은 경식 엄마를 안전한 곳에서 쉬게했다. 결국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
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 된 목숨이니 누굴 탓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직 어린 경식이도 이 비극적인상황을 인지한듯 아이를 안고 쓰러진 엄마옆에서 울기 시작한다.
95
산문 부문
그날밤 주민들은 모두 무사했고, 토벌대로부터 안전한 곳에서 잘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모두가 처참하고 슬픈 현실
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평생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영혼은 이미 몇번의 죽음을 당한것처럼
피폐해져있었고, 나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70년이 흘렀고, 제주4·3사건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는 커녕 땅속으로 묻혀져 그대로 없던 일이 되어버릴
것 만 같았다. 나는 우리의 아픔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흘리 동굴입구에서 증언을하면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다.
이미 많은 제주인들은 군인들에 의해서 죽었고, 몇몇 생존자들은 이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채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다
가 결국 끝나지 않은 숨바꼭질 같이 찝찝한 결과를 초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겪고 느껴온 제주의 아픔을 최
대한 널리 퍼뜨리는 것이었다.
“동굴 속 생활은 힘드셨을 것 같아요…” 기자의 걱정되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온다.
나는 그동안에 말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전부 다 토해내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았다. 동굴 안의 모습은 어렸을 때부
터 변함없이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모습은 이렇게나 변해버렸는데 말이다. 촬영이끝난후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아들딸과 손주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들만은 전쟁이나 폭력없이 행복한 인생을 살길 기도
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70년이 지나서야 이 처참한 숨바꼭질을 마치려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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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색이 바랜 제주의 기억
“누나, 이거 좀 봐요.” 동생이 말했다. 바삐 옷을 개고 있는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얘기했다.
“뭔데 그래.”
“내가 그린 그림.”
그래도 눈길을 주지 않자 서운한 표정을 하며 보채는 동생이었다. 한 번 상대해 주면 조용해질까 싶은 마음에 나는
동생이 들고 있는 그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주 잘 그렸네.”
닳은 크레파스 몇 개로 동생은 삐뚤빼뚤한 우리 가족을 그렸다. 활짝 웃고 있는 엄마, 아빠, 나, 수철이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넓게 펼쳐진 푸른 제주도 바다가 있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었다.
“너 도시락 챙기는 거 까먹지 말고." 내가 얘기했다. 뒤에서 동생이 양말 신는 소리에 이어 가방이 닫히는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버릇처럼 나오는 잔소리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부터는 당연하
다시피 학교에도 안 가고 집안 일만 해왔다. 그래서인지 수철이 엄마라도 된 마냥 자질구레한 말들을 늘어놓는 게 나는
익숙해져 버렸다.
“학교 다녀올게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동생이 총총 걸어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여느 날처럼 동생을
다시 볼 줄 알고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다. 몇 시간 후 집을 돌아다니다 마루 한가운데 놓여있는 동생의 도시락을 발
견했다.
“아이, 내가 까먹지 말라고 얘기했는데도…”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동생이 수업을 하고 있을 북촌 국민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예쁜 벚꽃을 피운 나무 몇 그루를 지나던 찰나 친구 정희를 보았다. 저 멀리서 급히 뛰어오는 데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희야!”
“수진아, 얼른 피해!” 내 팔을 잡아끄는 정희였다.
“무슨 일이야?”
“학교에 군인들이 있어. 마을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불러내는 거 봤다고!"
한국국제학교 10학년 김세린
장려상
97
산문 부문
누군가에게 묵직한 돌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비명소리가 울렸고 타는 냄새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이 불에 타고 있었다.
“수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나는 학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하는 소리가 내 심장인지, 발걸음인지,
두려움에서 우러나온 상상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정희의 외침은 내 시야에 힐끔힐끔 보
였다 사라지는 벚꽃들처럼 까마득해져 갔다.
국민학교에 도착하기 전에 날카로운 총소리를 먼저 들었다. 그 발포에 놀라서 굳어버린 나를 뒤에서 누군가가 거칠
게 당겼다. 나를 쫓아온 정희였다.
“수진아, 위험하다고 했잖아!”
“수철이가...”
말을 마치기 전에 또 여러 발의 총알이 발사 되었다. ‘수철이면…수철이가 맞았으면 어쩌지...’
정희는 학교 옆 골목길, 수풀로 그나마 가려진 지점으로 나를 끌고 갔다. 거기서 나는 국민학교의 운동장을 지켜보
았다. 무장한 토벌대가 있었고 삼백여 명의 주민들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그중 불행하게도 몇 명은 낯이 익었다. 옆
집 할아버지, 성함은 모르지만 얼굴은 잘 아는 마을 사람들, 나와 친하게 지냈던 아저씨,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 수철이
의 친한 친구 영호…….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작은 체구의 내 동생….
나는 눈을 의심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학교 뒤 돌밭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동생의 뒷모습이 너무 슬프고, 또 너
무 명백했다. 끌려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다. 나는 번뜩 동생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어나려
는 나를 정희가 자꾸 붙잡았다. 놓으라고 소리쳐도, 정희는 내 옷자락과 함께 묻힐 것처럼 굴었다. 무수히 이어지는 총
소리 하나하나에 동생의 얼굴이 겹쳐서 보였다. 나는 혹여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끔찍하게 기억될까 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시점에서 나는 동생의 시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검게 물든 너븐숭이 위에서,
동생이 곤히 자는 것처럼 보여 원통스러웠다. 흔들면 언제나 그래왔듯 똘망똘망한 눈을 비비며 깨어날 것 같았다. 그때
동생의 손에 꼭 쥔 종이 뭉치가 보였다. 꾸깃꾸깃한 것을 조심스레 펼쳐보니 동생이 아침에 자랑했던 우리 가족 그림이
었다. 제주도의 파랗고 고왔던 바다가 피 때문에 색이 바래 추한 갈색이 되었다.
맑고 깨끗했던 제주의 바다도, 화창한 햇빛이 들어 난화했던 너븐숭이도,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우리 가족도 더 이
상 그렇지 못했다. 모두 그림 속 바다처럼 색이 바래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고있는 이 섬을 다시는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색깔들 곳곳에서 숨진 동생의 마지막 모습, 가차 없이 불길에 휩싸였던 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비명과 통곡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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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산문 부문 심사평
심사평
제주 4·3은 한 지역만의 역사적 상흔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청소년 4·3문예
공모>는 한국사와 세계사의 한 고통스러운 페이지를 우리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글로써
오래오래 기억하고 성찰하여 평화와 인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값진 행사라
고 볼 수 있다. 특수한 역사적 사건을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나아가게 하는 데 문
학만큼 큰 힘을 지닌 것은 없다.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의미
를 찾고 새로운 평화의 미래를 그려보게 하는 일은 그래서 더없이 귀중하다.
이번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 심사를 통해서 청소년들의 진지한 시선과 깊은 마음
을 느낄 수 있어 기쁘고 행복했다. 때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작품들 사이에서 수상
작을 골라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또한 우리 청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한 과
정이라는 점에서 고마운 일이었다.
초등부 대상작인 「TO. 별이 된 너에게」는 편지 형식의 글로 시선을 끌었다. 4·3평화
공원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후기로 쓰인 글이었다. 소재는 매우 평이한 것이었지만, 4·3
평화공원의 체험 후기를, 특히 영상관의 샌드 애니메이션 관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4·3 희생자에게 보내는 마음의 편지로 써내려 갔다. 문장이나 글 전체적인 완성도나 비
유와 수사에서 다른 초등학생들과 비교해 괄목할 만한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상대
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글 수준과 많은 분량 탓에 대상 선정에서 다소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린이의 시선에서 동심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4·3을 성찰했
다는 점에서 이 글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중등부 대상작인 「붉은 소리」는 “여든하나” 노인의 목소리로 4·3의 체험을 생생하
게, 그리고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치 노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이
인물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아름다운 문장 속에 펼쳐냈다. 응모작의 문학적 성취가 돋보
99
였다는 점에서 대상작으로 선정하였다. 다만, 4·3의 기억이 정서적 고통 차원에서 확장
될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이나 의미 부여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등부에서는 소설 형식으로 4·3의 체험을 그린 응모작들이 아주 많았다. 우리 청소
년들이 소설 장르 창작에 큰 장벽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
부분의 작품들이 동굴 피난 체험을 포함한 장면들로 구성되는 등 비슷비슷한 소재가 많
았다.
이 점에서, 고등부 대상작인 「폭도 면접」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창의적인 소재로 4·3
을 성찰했다는 측면이 돋보였다. 일종의 엽편소설 형식인 이 응모작은 어느 청년의 직
장 면접 장면을 그린다. 일인칭 서술자인 주인공 ‘용택’은 면접관에게서 “당신의 부모
님이 대한민국 정부에 반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듣는다. 그는 연좌제에 가까운 억압적 시선에 의해 어느덧 “폭도의 자식”이 되었다. 몇
몇 대목과 문장들은 다듬어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새로운 시선으로 4·3을 성찰하고 특히 ‘4·3 이후’ 우리 사회가 강요했던 고통을 새롭게
보려고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주인공의 부모에 관한 서술이 더 보완된다면, 현재보다
더 완성도 높은 소설 작품이 될 것이다.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에 열띤 마음으로 응모하여 4·3과
평화, 인권을 성찰하고 상상한 여러 청소년들을 격려한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오늘보
다 더 아름다운 평화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심사위원
노대원, 한희정, 허유미
그림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초 등 학 교
동백꽃 속의 기억
씻을 수 없는 과거
1948 4·3은 가장 아픈 역사
레드 아일랜드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4·3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동백꽃 요정들과 함께 자유로워진 무명천 할머니
꽃들과 함께
동백꽃이 떨어지던 날
이곳은 우리 모두가 지켜낸 푸른섬 제주도입니다
제주도의 슬픈기억 4·3 사건
4·3에 꽃
마지막 사진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어요
4·3 상처에서 희망으로
4·3 진아영 할머니
103
그림 부문
동백꽃 속의 기억
재릉초등학교 5학년 김지아
대상
10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씻을 수 없는 과거
제주서초등학교 6학년 양효빈
최우수상
105
만화 부문
1948 4
·3은 가장 아픈 역사
아라초등학교 5학년 양서원
우수상
10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레드 아일랜드
남광초등학교 5학년 정윤서
우수상
107
만화 부문
4
·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신제주초등학교 2학년 김주하
우수상
10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4
·3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아라초등학교 3학년 김호범
우수상
109
만화 부문
동백꽃 요정들과 함께 자유로워진 무명천 할머니
아라초등학교 3학년 양희주
장려상
11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꽃들과 함께
강정초등학교 3학년 오아린
장려상
111
만화 부문
동백꽃이 떨어지던 날
아라초등학교 4학년 현소은
장려상
11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이곳은 우리 모두가 지켜낸 푸른섬 제주도입니다
신제주초등학교 4학년 김서윤
장려상
113
만화 부문
제주도의 슬픈기억 4
·3 사건
아라초등학교 4학년 박설아
장려상
11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4
·3에 꽃
보성초등학교 5학년 박교린
장려상
115
만화 부문
마지막 사진
재릉초등학교 6학년 김가온
장려상
11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어요
제주서초등학교 6학년 오주연
장려상
117
만화 부문
4
·3 상처에서 희망으로
보성초등학교 5학년 이재환
장려상
11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4
·3 진아영 할머니
서울대곡초등학교 5학년 박태수
장려상
12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그림 부문 심사평
심사평
제23회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전은 전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4·3과 평화 인권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공모하였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거창한 문구만이 아니더라도, 4·3은 과거의 불행했던 결코 잊어서도, 일을 수
도 없는 역사입니다. 본 공모전에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접수되었습니다. 주제
와 관련하여 매우 구체적인 상황을 표현하여 학생들이 4·3에 관한 높은 관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표현이나 형식에만 치중하기보다는
내용과 진정성을 담으려는 흔적이 돋보였습니다.
출품한 작품을 보면서 4·3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증조부모님과 조부
님, 백부님까지 모두 네 분이 돌아가셨으니, 작고하신 노모는 틈만 나면 생생한 그 날
의 일을 얘기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4·3’이라는 트라우마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런 까닭에 감상자가 아닌 유가족의 입장에서 작품을 살펴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작
품이 더 진심일까?’, ‘어떤 작품이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까?’라는 측면에서 유심
히 살펴보았습니다. 올해 출품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진심이 가득하였습니다. 학교에
서 배웠을 내용에 더해서 직접 체험했던 얘기와 할머님께 들은 사연 등 매우 구체적이
고 참신한 내용과 수채화 기법이나 색연필 외에도 다양한 재료를 융합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김지아 학생(재릉초등학교 5학년)의 ‘동
백 꽃 속의 기억’은 4·3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회색으로 표현하면서도 동백꽃을 형
상화하여 현대적인 조형성이 두드러졌으며, 양효빈 학생(제주서초등학교 6학년)의
‘씻을 수 없는 과거’는 만화의 형식으로 거친 표현이었지만 매우 구체적인 사실성을
바탕으로 강렬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과거의 시점은 회색으로, 현재의 시
점은 색채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인 색채의 조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121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행사를 진행한 운영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학
생들의 작품에서 때로는 참신하고, 때로는 재미있으며, 결국에는 감동으로 다가왔
습니다. 이는 본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차기 공모
전에는 더욱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확산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다만, 다
소 아쉬웠던 점은 첫째, 출품작품 수에 비하여 입상자 수를 조정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출품 수의 20% 정도는 입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모전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공모 개요를 보면 미술에서 만화와 그림 영역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뒤쪽의 심사 및 시상계획을 자세히 보아야 그림부문은 초등이라
고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초등 그림 영역에 다수의 만화 작품이 등장하
였습니다. 모호한 영역을 보다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출품한 모든 작품들이 형식과 내용면에서 수준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정해진
입상자 수를 고려하다보니 아쉽게 탈락한 작품들에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입상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구체적인 사실 인식, 창의·융합적인 형식,
그리고 과거의 아픔을 넘어 화해와 상생의 의미를 담아낸다면 더욱 성장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번에 출품한 모든 학생들에게 4·3유가족의 입장에서 그리고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4·3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심사위원
김영화, 오건일
만화
부문
대
상
최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거울에 비친 동백꽃
누명
4·3을 기억합니다
남은 이들에겐
사라진 마을
다솜이의 아픔
새순과 흐르는 소망
동백
할머니의 그리움으로 가득한 오늘, 4월3일
일기장속 할머니의 그날
가려진 진실 속 고통의 시간
쌀문
한송이 붉은 동백
그‘날’
지루한 일상
동백꽃
중·고등학교
12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거울에 비친 동백꽃
신성여자중학교 3학년 유혜원
대상
125
만화 부문
12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27
만화 부문
12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29
만화 부문
13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31
만화 부문
13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33
만화 부문
13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35
만화 부문
13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37
만화 부문
13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39
만화 부문
14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41
만화 부문
14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43
만화 부문
14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45
만화 부문
14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47
만화 부문
14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49
만화 부문
15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51
만화 부문
15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53
만화 부문
15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55
만화 부문
15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57
만화 부문
15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59
만화 부문
16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61
만화 부문
16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63
만화 부문
16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누명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김동현
대상
165
만화 부문
16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67
만화 부문
16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4
·3을 기억합니다
신성여자중학교 3학년 서민아
최우수상
169
만화 부문
17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71
만화 부문
17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73
만화 부문
17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75
만화 부문
남은 이들에겐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박현영
최우수상
17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사라진 마을
제주서중학교 2학년 주연서
우수상
177
만화 부문
다솜이의 아픔
조천중학교 3학년 장유경
우수상
17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새순과 흐르는 소망
제주여자고등학교 2학년 김영아
우수상
179
만화 부문
18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81
만화 부문
18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83
만화 부문
18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동백
신성여자고등학교 1학년 장윤실
우수상
185
만화 부문
할머니의 그리움으로 가득한 오늘, 4월3일
한라중학교 1학년 정재훈
장려상
18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일기장속 할머니의 그날
제주서중학교 1학년 고민서
장려상
187
만화 부문
가려진 진실 속 고통의 시간
표선중학교 1학년 박세정
장려상
18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쌀문
저청중학교 3학년 박소은
장려상
189
만화 부문
19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91
만화 부문
192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93
만화 부문
194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195
만화 부문
196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한송이 붉은 동백
제주중앙중학교 2학년 진우
장려상
197
만화 부문
그
‘날’
제주서중학교 2학년 정성초
장려상
198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입상작품집
지루한 일상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2학년 정선민
장려상
199
만화 부문
동백꽃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1학년 한유진
장려상
200
제23회
전국청소년4·3문예공모
만화 부문 심사평
심사평
중등부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주제적정성, 창의성 그리고 표현성이 뛰어났다. 특
히 유행하는 만화의 획일적 그림스타일이 아닌 각 학생이 본인이 창조한 캐릭터와
서사를 스스로 다른 재료를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그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높
게 평가한다. 4·3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작품을 통해 많이 보인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만화(칸의 예술)와 한 장면을 그린 일러스트와의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만화가 어렵다면 한 장에 담은 그림과 글을 두 칸이나 네 칸으로 표현
하는 것을 시도해 보길 바란다. 시대의 아픔을 표현함에 있어 재료의 다양성 또한 한
번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 흑백으로 그렸을 때와 컬러의 차이점. 연필로 그렸을 때와
크레용이나 수채화로 그렸을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년엔 좀 더 내
용과 형식이 잘 어우러지는 작품을 만나길 기대한다.
고등부의 작품은 만화적인 연출이 돋보였다. 수상작들은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완성도도 꽤 높았다. 4·3피해자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의 역사임을 전달하는 메시지도 울림이 있었다. 앞으로 취미든 직업적이든 만화 작
업을 계속 해나가면 좋겠다.
201
아쉬운 건 고등부 응모작이 많지 않았다. 내년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응모해 다양
한 작품을 접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아깝게 수상을 하지 못한 학생들은 낙심하지
말고 내년에 응모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
이번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4·3역사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한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
한 성과다. 4·3항쟁은 제주도민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우리 모두의 역사다. 국
가 폭력에 의해 3만이 넘는 도민이 학살 당한 슬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자주
독립과 통일된 세상을 위해 싸웠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번 공모작의 많
은 작품에서 말했듯이 잊지 말고 기억하자.
심사위원
김금숙, 김홍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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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0일
발 행
2022년 12월 16일
발행처 제주4·3평화재단
63313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
제주4·3평화기념관 4층
전화 064-723-4306 전송 064-723-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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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작
디자인신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미길 82(오라삼동)
전화 064-746-5030
비매품
입상
작품집
제23회
전국청소년
4·3문예공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