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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_ 강광보

4·3의 연좌(緣坐) 

수상한 섬, 수상한 사람들의 이야기

동백다담

탐라미술인협회의 기억 투쟁사

세대전승 4321 - 함께한 발걸음 우리의 목소리

- 손 끝에 머문 4·3 / 문자에서 감각으로, 4·3을 기억하다

- 목소리로 전한 기억, 아카펠라로 만난 제주4·3

- 국내외 대학생 4·3평화캠프 참여에 대한 소감

김찬우

김연주

박세정

최태이

로리 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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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가을호   Vol.60

『4·3과 평화』는 제주4·3평화재단이 계간으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로 

4·3의 역사와 진실을 알리는 도내 유일의 홍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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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집단 트라우마

그 오래된

미래

글 정찬영 광주트라우마센터 운영위원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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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2일 일요일 저녁에 방영된 MBC 스트레이트에는, 21살 대학생 이 
모씨의 인터뷰 내용이 나온다. “그냥 뭔 짓을 했어도 끝은 보고 가야지, 계엄 하
나 때렸다고 ‘너 내려가라’ 이거는 좀 아닌 거 같아요.” 이 대학생은 계엄이 무
엇이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사에서 내
려진 비상계엄은 열두 번이다. 대부분 비상계엄의 집행과정에서 불법적인 민
간인 학살이나 탄압이 일어났고, 반헌법적인 국회 해산이나 정치활동 금지 조
치, 쿠데타에 이용되었다. 대한민국 첫 번째 계엄령은 제주4·3을 진압하기 위
해 포고되었다.

나는 12·3 계엄 직후, 5·18 국가폭력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접
했다. 4·3 생존자와 유가족, 제주도민 중에서도 12·3 계엄으로 힘들어했을 분
들이 많았으리라 짐작한다. 4·3이나 5·18의 고통은 국가폭력에 의한 집단 트라
우마다. 12·3 계엄 정국에서 나타난 파시즘 현상도 일제강점기, 4·3과 여순, 한
국전쟁, 4·19, 5·16쿠데타, 5·18 등 국가폭력과 독재에 의한 집단 트라우마의 
유산에 상당 부분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집단 트라우마는 한 집단 혹은 여러 집단의 안전 경험을 산산이 조각내는 한 
사건 또는 일련의 사건이다. 집단에 가해진 트라우마의 충격과 울분은 감정이
입을 하는 모든 집단 구성원에게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 사건을 직접 마주치지 않은 집단 구성원이라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일어난 트라우마 사건을 접하고 감정 이입하
여 트라우마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대리 트라우마 혹은 2차 트라우마라고 한
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은 트라우마 사건을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사
건’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집단 트라우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외상 경험과 그 영향으로 나타나는 당사자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심리
적 영향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집단 트라우마는 집단 구성원에게 대리 
트라우마, 산 자의 죄책감, 무력감, 울분, 비난 프레임, 트라우마가 영원하다고 
느껴짐, 불신, 과잉 경계, 수치심, 회피, 세대 간 전이 같은 다양한 현상들을 야
기하고 상호작용한다. 

집단 트라우마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 의미 체계, 관계를 붕괴시키기도 하고 

집단에 공유되면서 집단의 서사와 문화, 정신을 변화시키고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 집단 트라우마는 사회적 유대감을 약화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연대와 

회복력을 증진시키기도 한다. 집단 트라우마 파급 효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트라우마의 최초 사건이 일어난 집단이나 공동체를 넘어 더 넓은 사
회로 확산된다. 세대를 넘어 개인과 집단에 정서와 심리, 사회문화적 파
급을 남기고, 집단 정체성과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글 정찬영 광주트라우마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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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은 트라우마의 가해자가 국가권력이라는 맥
락 속에서 체계적인 장기간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국
가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는 가해 권력이 유지되는 한 
국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면에서 다른 
집단 트라우마들과 다르다. 전체 사회에 광범위한 트
라우마와 사회적인 혼란을 초래하는데도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국가는 가해를 부정하고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정책과 법률, 관행을 제도화해서 사회적 
해결과 치유를 어렵게 만든다. 피해자를 인정하고 명
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권력의 위상에 손상을 주기 때
문에 국가는 부인주의 태도를 지속한다. 일제 식민지 
통치와 강제 징용, 성노예, 관동대학살에서부터 제주
4·3과 여수순천 사건, 한국전쟁 양민 학살, 5·18 국가
폭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해자의 부인주의가 있었
다. 이런 부인주의는 생존자와 유가족은 물론이고 공
감하는 시민들의 고통까지 가중시켰다.

제주4·3에서도 집단학살, 고문, 성폭행을 비롯한 무
자비한 국가폭력 가해가 있고 난 뒤, 장기간의 진실 
은폐와 왜곡, 연좌제, 차별, 감시, 낙인이 뒤를 이었다. 
4·3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은 빨갱이 낙인과 보복 공
포로 50년 이상 침묵하고 살았다. 그들의 세대 구성
을 간략히 살펴보자. 4·3 당시 청·장년층 혹은 어린

이였던 세대는 1920~40년대 생이다. 이들 중에는 재
경험, 회피, 과각성과 같은 강도 높은 트라우마의 정
서 패턴에 압도된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빨
갱이 낙인과 연좌제 공포로 만성적 불안과 경계심, 불
신, 분열 등으로 공동체는 심각하게 손상 받았다. 군
인과 경찰,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도 컸다. 말
하면 잡혀간다는 강요된 자기 검열로 침묵을 유지했
다. 침묵 속에서 공포와 불신의 정서가 가족 내에 무
겁게 지속되었고, 이면에는 죄책감과 분노가 지속되
었다. 가족과도 4·3 얘기나 정치 대화를 피했다. 학업
과 취업, 이동에 제약이 있었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해서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었다. 강력한 트라
우마는 부모가 자녀와 안전한 애착을 형성하는 데 어
려움을 겪게 만든다. 이것은 다음 세대의 정신건강과 
대인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만성 질환이나 조
기 사망과 같은 신체 건강 문제를 낳는다. 

자녀나 조카 세대인 1950~60년대 생은 4·3에 관한 
침묵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이유를 모르는 모호
하고 무거운 불안감을 경험했다. 가족이나 마을 공동
체에 비어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트라우마의 세대 간 
전이로 위기 시 과각성되기도 하고 의심 많은 성향을 
띄었다. 이들은 권위나 국가에 대해 불신을 나타내거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진행하는 증언치유 프로그램 '마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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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과도하게 순응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는 참여를 
기피했고, 일부는 저항의 정서를 보이기도 했다. 학업
과 취업의 차별은 지속되었고 연좌제의 잔재로 결혼
과 인맥에서 배제되었다. 4·3은 여전히 금기 주제였
다. 손주 세대인 1970~80년대 생은 부모나 조부모의 
정서에 영향을 받았다. 청소년기까지 사건을 거의 모
르거나 폭동이나 반란 같은 왜곡된 사실로만 접하다
가 대개 대학 시절 이후 진실을 접하면서 정체성 혼
란과 분노, 배신감을 경험했다. 진상규명이나 4·3 기
념 운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이전 세대보다 높아졌다. 
2000년대 이후 4·3 진상조사, 대통령 사과 등으로 피
해자 가족이라는 정체성이 재정립된다. 진실화해위원
회 등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조부모 세대의 증언을 접
했다. 

 19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기억을 
재구성하며 성장한 세대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감
정 유산은 약하지만 윗세대로부터 정서적인 전이의 
영향은 받았다. 역사 정의와 지역 정체성이 결합된 시
민 감수성이 강해진다. SNS와 디지털 자료 등을 통
해 4·3을 학습하고 재해석했다. 기념관과 추모제, 문
화 활동과 시민교육에 참여하고 이로부터 영향받았
다. 다큐, 영화, 전시, 온라인 기록이 매개가 되는 공적 

기억 네트워크를 접하며 서사적 전이를 경
험했고 국제 인권 담론과 연결되었다. 4·3 
관련 의례·기념·예술을 통한 상징과 의미
의 재해석을 통해 지속적인 문화적 전이를 
경험하고 있다. 제주의 지역 공동체는 이
렇게 세대마다 다른 맥락 속에서 서로 다
른 정서와 내러티브(narrative)를 형성했
다. 침묵, 왜곡, 단절, 재구성의 과정을 거
쳐왔다. 트라우마 전문가 버셀 반 데어 콜
크는 집단 트라우마의 회복을 위해서는 집
단 기반 안정화와 연결감이 필수 요소라고 
했다. 집단 트라우마 전문가 토마스 후벨
은 집단적 상처를 ‘공감적 공간ʼ에서 회복
해야 한다고 했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
가 있었지만 여전히 한편에서는 반공과 폭도 담론으
로 4·3을 왜곡하고 있다. 역사 왜곡을 차단하는 법률
을 제정하고 교육 과정에 사실 기반의 서술을 의무화
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가해 사실에 대
한 국가와 군인, 경찰 조직 차원의 명확한 책임 인정
이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집단 서사의 회
복이 필요하다. 말해지지 않은 채 전승되는 집단 트라
우마는 가족과 공동체에 파괴적이다. 침묵은 해체되
어야 한다. 공개 증언, 구술사 채록, 마을 단위 스토리
텔링과 같은 다중 서사와 공적 기억 공간 확장이 필
요하다. 추모공원과 기념관, 유적지 보존 외에도 마을 
단위 기억의 공간을 조성하는 등 생활 속 기억 공간이 
필요하다. 남아공, 르완다, 북아일랜드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피해자와 유족, 목격자, 군인, 경찰, 우익 
청년단, 후손들의 이야기까지 포괄하는 다층적 기억 
구조를 만드는 것이 회복과 화해의 기반이 될 것이다.

제주4·3은 마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람들 간의 불
신을 남겼다. 밀고와 강제 징발, 정치 갈등으로 지역 
공동체의 결속, 즉 사회적 자본은 크게 손상당하였다.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 출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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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자본에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공동체 내부 구
성원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 간의 강한 유대, 즉 결속
형 유대가 있고 NGO 활동이나 단체, 지역 간 혹은 종
교 간 협력 네트워크인 교량형 유대가 있으며 시민과 
정부 혹은 주민과 공공기관과 같이 수직적 권력구조
와의 연결형 유대가 있다. 사회적 자본에 관한 연구들
은 사회 내의 신뢰망 재건이 집단 트라우마와 PTSD
의 장기화를 막는 핵심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연구 결
과들은 한국이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강한 편이지만 
교량형과 연결형 사회적 자본이 취약하다고 말해주
고 있다. 집단 트라우마로 사회적 자본이 크게 손상
된 제주 지역사회의 사회적 자본을 강화할 때도 충분
히 참고할 점이다. 제주 지역사회에는 국가가 지원하
는 사회적 자본 회복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세대, 마
을 간 대화 촉진 워크숍, 학교-마을 연계 수업과 같은 
연결형, 교량형 유대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이 도움이 
될 것이다. 4·3의 이야기가 비극의 역사로 끝나지 않
고 민주주의와 평화교육의 토대로 자리 잡을 때 그 상
처가 미래지향적인 기억과 연대로 전환될 것이다. 

이를 위해 집단 증언 치료가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기억을 안전한 환경에서 서
사화하고 청중이 공감적 목격자가 되는 집단 증언 치
료는 트라우마의 절차기억을 통합적인 의미기억으로 
전환시킨다. 연극, 사진, 회화, 음악 등의 문화 예술적 
접근도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외상을 표현하고 공유
하는 강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 

의료진, 교사, 경찰, 공무원과 일반 시민들이 4·3 트라
우마 특성을 이해하고 집단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교
육을 받거나 시민 정서지능을 높이는 집단 프로그램
을 경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생존자나 직계 
유족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심리·사회적 피해나 
2세대, 3세대, 4세대의 트라우마 세대 간 전이를 집단 
트라우마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집
단 트라우마 속에서 일어난 PTSD, 우울증, 알코올 의
존, 신체화 장애 등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평생 의료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외국의 국가폭력 집단 트라
우마 사례들과 연계하여 집단 트라우마 국제 포럼과 
같은 연대는 사회적 자본과 담론 등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제주4·3 제77주년 증언본풀이마당 스물네번째

[그리움에 보내는 여든살 아이들의 편지] ⓒ제주4·3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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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와 가해, 침묵과 관련한 감정은 정직하게 공유되어야 한다. 억압된 
감정들을 세밀하게 언어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공포, 무기력, 분노, 수
치심, 박탈감과 같은 정서를 인식하고 표현 능력이나 조절 능력을 향상시
키는 감정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자기감정을 타
인에게 전가하거나 깊은 이해 없이 분열하는 공동체의 문제를 줄일 수 있
다. 이처럼 트라우마 유산을 회피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공공으로 감정
을 다룰 수 있는 여러 공간과 통로가 필요하다. 트라우마 공감 기반 시민
교육이나 갈등 공론장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의 집단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는 현재 치유를 담당하는 기관이나 당사자 단체와 구성원들, 언론, 
지방자치단체, 지역사회 전체의 노력이 물론 중요하다.

거기에, 가장 필요해 보이지만 빠져있는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현
재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의 직원들은 내담자 관리와 각종 프로그램, 
매년 돌아오는 시기적 과제와 행정 업무만도 소화해 내기 정신없어 보인
다. 치료 프로그램들이 열심히 이뤄지고 있지만 개별화되고 분절화된 치
료에만 머무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지금과 같이 국가의 적극적인 기술적 
자문이나 조직적인 지원 없는 소수의 직원만으로는 집단 트라우마의 사
회적 치유와 사회적 자본 강화의 시너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폭력 트
라우마의 치료적 접근은 생존자 개인에 대한 증상 위주의 구체화된 치료
나 사례관리의 통계적 실적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생존자와 유가족
뿐만 아니라 2, 3세대와 지역사회 공동체 전반의 집단 트라우마 회복과 
국가 차원의 담론 회복을 국가적 스케일을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이끌
어야 한다. 

국가는 구체적인 치료들이 부실하거나 분절화되지 않고 사회적 치유와 
조화되도록 조율하고 조직하는 기능을 지속해야 한다. 치유 기관의 치료
가 집단기억과 사회적 담론의 통합, 시민교육과 감정 민주주의를 빌드업
해가는 데까지 이어지도록 통합적인 컨트롤 타워를 세워야 한다. 우리에
게는 4·3과 5·18을 비롯한 국가폭력과 재난 참사에 의한 집단 트라우마
에 정신보건 접근에서부터 사회적 담론, 법과 행정, 교육, 기록, 문화예술, 
지역사회와 4·3과 관련된 국가적인 사회적 자본에 이르기까지 각계 민관
의 사회적 자원을 통합적으로 조직하고 조율하고 지원하는 전문성 있는 
국가부처가 필요하다.

국가폭력

트라우마의

치료적 접근은

생존자 개인에 대한

증상 위주의

구체화된 치료나

사례관리의

통계적 실적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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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해결,

특집

국무회의 ⓒ대통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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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으로
나가는 길

글 고부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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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관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2025년 5월 22일 제
주도 제주시 동문로터리 유세에서, 

“4·3 학살에 대해 빠른 시간에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
하고 책임을 엄중하게 물었더라면 광주 5·18 학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4·3에 대해 책임을 묻지 못했기 때
문에 결국 광주 5·18 학살이 벌어진 것입니다.

(중략)

5·18 학살의 경우 미흡하지만 관련자들이 잠시라도 구
속이 되고, 사면되기는 했지만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2024년 12월 3일 밤에 계엄군 일선 지휘관과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의회에 난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
상을 일부나마 규명하고 일부나마 책임을 물은 역사
가 결국 12월 3일에 계엄을 막았던 것입니다.

(중략)

국가 폭력 범죄,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국민의 생명, 자
유, 인권을 침해하는 그런 범죄에 대해서는 영구적으
로 공소시효를 배제해서 그 행위자는 살아있는 한 반
드시 형사처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서 민사 손해배상 시효도 제한하지 않고 국가 폭력 범
죄자가 재산을 물려준 범위 내에서는 그 후손들조차
도 끝까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약속을 여
러 차례 드리고 당내에서 결국은 설득해서 이 법을 통
과시켰는데, 대통령 권한대행체제에서 거부당했습니
다. 우리는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될 
때까지 반드시 합니다. 거부권을 저한테 주시면 국회
에서 이 법이 통과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거부 안 하고 
사인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제주4·3평화공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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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위와 같은 역사관을 바탕으로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에 최
선을 다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 이행방안

국정기획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
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착수하였다. 국정
기획위원회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
쟁 전후 과거사와 인권침해사건 등 약 18,808건
의 진실규명, 제주4·3사건 희생자 보상금 지급, 
여순·노근리·거창 사건 정부지원 추모사업 실시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
다. 하지만 2025년 5월 26일 제2기 진실화해위
원회의 조사활동 종료로 총 2,166건의 사건 조
사가 중지되고 여순사건과 노근리 사건 등 한국
전쟁 전후 과거사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과거사 문제로 인한 희생
자와 유족의 상처를 실질적으로 치유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국정기획위원회는  향후  미결된  과거사의 
진실규명과 보상 등의 실질적인 피해회복 논의 등 후
속조치를 통하여 국민 통합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구
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과거사 문제
의 해결을 위한 세부 과제내용을 마련하였다.

여수·순천 10·29사건의 신속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국정기획위원회는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조속한 진
상규명과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함으
로써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2026년 10월 5일까지인 여수·
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의 조사기한 내에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 심사
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이와 별도로 추가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과제 발굴을 제안하였다. 위원회의 조사기한 
내에 희생자·유족 심사를 완료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
위원회 활성화 및 개별심사·일괄심사를 병행하는 심
사방식의 다양화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또한 희생자 유해발굴 및 유전자 감식사업의 추진, 희
생자 의료지원금·생활지원금의 지급, 여수·순천 사건 
전국화 홍보를 지원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외에도 희
생자·유족들이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를 이
용할 수 있도록 하거나 별도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등
의 방법으로 희생자·유족 대상 트라우마 치유사업을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노근리 사건의 차질없는 명예회복

국정기획위원회는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및 유족의 명
예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지원을 통해 인권신장과 국
민화합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매년 6-7월의 노근리 사건 추념식 개최 및 유족
회 지원, 노근리 평화공원 관리운영 지원, 노근리 평화
상 시상·백일장 대회 홍보 등의 명예회복 조치를 지속
이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76주년 여수

·순천 10·19사건 보성군 합동 위령제 ⓒ보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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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기획위원회는 이외에도 피해자 트라우마 치유사
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치유사업 추진방안
으로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을  이용하게  하
거나 거주지와 치유센터간의 원거리를 감안하여 경비 
보조 방안을 검토해야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기반 마련

국정기획위원회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 희생
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여, 인류
의  보편적  인권신장과  국민통합을  선도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국정기획위원회는 이 사건이 100여 년 전 일본에서 발
생한 것이며, 대다수 유족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사건 현장에서의 
사실조사를 위해 일본 정부와 민간의 협조가 필요하
므로, 원활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근거
를 마련할 것을 제안하였다. 다른 한편, 국정기획위원
회는 진상규명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자료수집 및 분
석, 학계 등 전문가 네트워크 구축, 외교부를 통한 대
일협업 기반 마련을 제안하였다.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조사·발굴과 희생자 및 유족 지원

국정기획위원회는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조사·
발굴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희생자 추모·유족 위로
를 통해 과거사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여 사회적 연대
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국정기
획위원회는 전문기관을 통해 체계적으로 강제동원 희
생자의 유해를 조사·발굴하고, 최신 기술을 활용한 과
학적 검사로 신원확인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국정기획위원회는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한 새로
운 방식을 통해 유해봉환의 어려움을 극복할 것을 제

안하였다. 국정기획위원회는 구체적 방안으로 전문성
있는 국제인권단체를 통한 현지 국가와의 협력체계를 
구축할 것과 해외 종교단체를 통한 민간주도의 유해
봉환을 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미국 DPAA(국
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과 협력하여 유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방안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국정기획위원회는 국외 추모조형물 추가건
립, 강제동원 희생자 위패관 관리 등의 기존 추도사업
을 확대할 것과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 내 자료관 
조성을 추진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국정기획위원회
는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조사·발굴의 경우 봉환 
조건 협의, 유해조사를 위한 자료 공유, 추모 조형물 건
립 부지 확보 등에서 일본·러시아·중국 등 관련국 정
부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만큼 외교부의 적극적 노력
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제주4·3 관련 공약 이행방안

제주4·3기념사업회의 정책 제안

제주4·3 단체와 제주시민단체 등 52개 단체가 참여하
고 있는 제주4·3기념사업회는 2025년 4월 21일 제21
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4·3 왜곡과 폄훼에 대한 처벌 
근거를 담은 4·3특별법 개정 등 4·3 분야 정책을 선정, 
대선 공약으로 채택해 줄 것을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
에게  공개적으로  요청하였다.  제주4·3기념사업회는 
4·3특별법 개정을 통한 4·3 왜곡 및 폄훼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 신설, 4·3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에 따른 4·3 
아카이브 기록관 설립,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에 
대한 국비 지원 확대 등을 대선 정책 과제로 제안했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의 수용현황

(1) 4·3 왜곡에 대한 처벌 조항 신설
현행 4·3특별법상 유족 등에 대한 명예훼손 방지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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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있었
고, 이에 따라 제주4·3기념사업회는 4·3 왜곡에 대한 
처벌 조항이 신설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4·3 
왜곡에 대한 처벌 조항 신설에 대해서는 이미 국회에 
4·3특별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제도개선사항으로 
별도의 예산상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조만간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2) 제주4·3아카이브기록관 건립
제주4·3기념사업회는 4·3의 역사와 가치를 미래세대
에 전승하기 위해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할 필요
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단순한 보존을 넘어 기록물의 
다양한 활용을 위해 공공 아카이브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제주4·3아카이브기록관 건립을 제
안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제주4·3기념사업회와  인
식을 같이하여 4·3의 명예회복과 세계화를 통해 평화
의 섬 제주를 만들겠다는 의지하에 제주4·3 아카이브
기록관 건립은 국정과제로 선정하였다. 

(3)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의 국비지원확대
2025년 7월 23일 국립국가트라우마치유센터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
하여 운영비 전액의 국가 부담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는  국가기관임에도  제주
도가  운영비의  50%를  부담하고  있어  국립시설로서
의 성격과 어긋나고, 국가폭력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개정법률은 부대의견을 
통해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의 기관운영비는 전
액 국비로 부담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국정기획위원회가 세운 과거사에 대한 대통령 공약의 
이행계획을 바탕으로 이재명 정부는 제주4·3과 과거
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다시는 
국민이 맡긴 총칼로 국민을 죽이는 일이 없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한다. 

제1회 조선인 유골봉환 남북공동사업 '긴 아리랑' 안치식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제주4

·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제77주년 4·3희생자추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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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과 거름

역사 정의와

평화를 향한

김정기 제주4·3연구소 제11대 이사장 
전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중앙위원
전 제주교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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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현역에서 은퇴하니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
아졌어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손주들이 오면 
같이 시간을 보내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평
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우리집이 제주시 
외곽이라 자주 나가지는 않지만, 4·3관련 행
사들이 있으면 웬만하면 나가서 보려고 해요. 
그리고 서울대졸업자 모임이 있어 그곳에 나
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선친은 제주 출신이지만 선생님은 대전에서 태어

나신 것으로 압니다. 제주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아버지가 1930년대에 출륙을 하셨어요. 그래
서 저는 1944년 대전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
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당시 대전에 약 20
가족 정도 제주도 사람들이 있어서 모임을 하
며 형제처럼 지냈죠. 그 기억이 많이 나는데 
그게 제주도의 괸당문화더라고요.  또 할머니
가 계셔서 할머니와 지내며 제주도의 풍속을 
좀 익혔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는 4·3에 대
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제주 4·3을 처음 접하던 그때를 아직도 잊지 못

하신다고요?

대학원에 간 이후에야 4·3을 알게 된 거죠. 원
래 서울대학교 상대 무역학과를 다녔는데 적

성에 안 맞아 졸업 후 군대를 갔다 와서 다시 문리대 
역사학과에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동기가 
조교로 있어서 제주도 학생이 입학하면 알려주라고 
했더니 연락이 왔어요. 제주도에서 온 학생이 입학했
다고 그래서 만났는데 강창일(전 국회의원/주일대사)
이었어요. 중국집에 데려가서 술을 잔뜩 먹으며 이야
기를 나누는데 4·3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거예요.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놀라서 믿어지지가 않았죠. 집에 가
서 아버지에게 왜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지 않았냐고 
항의를 했더니 4·3으로 인한 불이익이 내게 생길까봐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70년대 초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이 있던 때라 무서
웠던 시절이죠. 친구들하고 말하다가 북한 얘기를 하
면 어디서 들었는지, 그 이튿날 형사들이 나오고 그랬
으니까요. 대학교에 형사들이 진을 치고, 전담 형사가 
있을 정도였죠. 나중에는 전담 형사하고 학생들하고 
술을 같이 먹기도 했어요. 그래서 4·3 얘기는 공개적
으로 못했죠. 

그때만 해도 4·3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었어요. 그래
도 나보다 8살 아래였던 강창일은 제주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제사협’이란 모임에서 정윤형 선배와 고희
범 등과 교류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난 강창
일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제주도 소
식을 조금씩 알게 된 거죠. 4·3때가 되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김정기 선생님은 역사학자로 서원대학교와 제주교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평소 재야 시민단체 활동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역사문제연구소장 등

을 맡아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들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함께했다. 특히 제주

4·3특별법 제정이후 발족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최근 다시 제

주4·3연구소 이사장으로 복귀하여 제주4·3의 역사정의를 세우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편집자주

김정기 제주4·3연구소 제11대 이사장 
전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중앙위원
전 제주교육대학교 총장

대담·정리 조미영 제주4·3평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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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다른 제주도 친구들은 4·3에 대해서 몰라
요. 철저하게 함구하고 지내는 듯 했어요. 나는 강창
일을 만난 덕분에 알게 된 것이예요. 난 제주도 사람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어정쩡한 상태였는데 강
창일의 소개로 당시 활동하던 친구들을 만나서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지나서 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제주4·3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나오기 시작
하더라고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인상 깊은 활동들이 많았습니다.

제주4·3중앙위원 인원 구성이 총리를 위원장으로 해
서 국무위원 7명이 당연직이었고, 13명의 민간위원
을 위촉했어요. 그런데 명단이 대단해요. 이돈명 변호
사, 강만길 상지대 총장님,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 회
장, 신용하 서울대 교수,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등 이
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을 배치했어요. 당
시 정부에는 대통령 산하 위원회가 몇 십 개가 있는데 
우리 위원회에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분
들을 모셔온 덕분에 위엄이 높았어요. 나도 그때 당시 
서원대 총장직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강창일 의원이 
“형님이 제주도 사람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 달라!”
고 해서 맡았었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위원들마다 역할이 잘 분배되
었던 것 같아요. 대한매일 주필을 했던 김삼웅씨는 전
라도 완도 출신으로,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어 
중앙정부와의 가교역할을 했어요. 또 기자출신이라 
요약 정리하는 것을 잘 해서 지역의 민원을 듣고 정리
하는 역할을 했고, 박창욱 유족회장과 임문철 신부가 
제주의 사정을 알리고 대변하여 설명을 하면 신용하 
교수와 서중석 교수가 해박한 역사적 지식으로 뒷받
침을 해 줬어요. 특히 임문철 신부는 육지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4·3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
하면 배석한 사람들이 절로 끄덕이게 설득력이 있었
어요. 
박재승 변협회장은 법적인 사항을 조언해 주시고 특
히 4·3당시 군법회의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며 국방
장관에게 호통을 치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돈명 변호사, 강만길 총장님 등은 앉아계시
기만 해도 권위가 있어서 분위기를 제압할 수 있었죠. 
위원들 중에는 중립적이거나 군경을 대변하러 온 분
들이 계셨는데 이돈명 변호사가 오히려 말씀을 않고  
빙긋이 웃으며 앉아계시면 도리어 그 분들이 눈치를 
보는 거예요. 소위 좌파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반박하기가 멋쩍게 되어 버리는 거
죠. 그래서 나는 이것을 ‘침묵의 웅변’이라고 표현합
니다. 그런데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을 할 때는 임명과 
면직에 대한 사항을 규정에 넣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정기 이사장(우)과 조미영 이사(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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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이런 규정이 없어서 20년 동안 위원을 했습니
다. 아마 의도적 실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덕분
에 제주4·3에 대한 여러 결정들을 해 나가는데 안정
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점곤 장군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간부후보
생으로 일본 육군에 근무했던 분인데 박정희 대통령
이 이분 밑에 있었습니다. 이분이 말하길 육해공군으
로부터 제주도는 격리가 되어 있어서 이 지역에서 한
라산에 오른 몇 명의 무장대(남로당)가, 육지를 적화
한다는 거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로당 
지령을 받아서 했다는 게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에요. 
나중에 이 사람 책을 찾아보니까 책에 그렇게 썼더라
고요. 그때 당시 제주도의 물질적인 능력이나 제주도
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산사람들이 육지를 쳐들
어가서 뭐 한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며, 북한 중
앙 지령설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사 소위로 중국 북쪽에 
토벌을 나갔을 때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일개 소대
를 끌고 토끼몰이 식으로 싹쓸이 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주도에

서 이렇게 토벌을 한 거잖아요. 우리나라에 있는 군인
하고 경찰이 자기가 일본 육사로 중국 북쪽 지역에 가
서 토벌할 때와 그 현상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겁
니다. 위원회 회의에서 그런 말을 하니까 회의에 참여
했던 군인, 경찰 쪽 사람들이 아무 말을 할 수 없게 되
어 버린 거죠. 그런데 이 분은 얼마 안 가서 위원을 그
만 둬 버렸어요. 그래도 그 분이 이런 올바른 의견을 
냈었다는 것은 꼭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발간된 당시만 해도

4·3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

을 듯 합니다.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2003년에 발간되는데 이 
역시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당시 위원장이 고건 총리 
때였는데 (2003년 3월 29일 제7차 회의) 보고서가 심
의 의결되는 과정에 6개월이 연장되어 추가 심의를 
받기로 한 것입니다. 4·3위령제에 맞춰 최종 통과를 
바라고 있었던 제주도민들 입장에서는 서운함에 질
타가 나왔어요. 4·3위령제에 고건 총리 오지 말라며 
책임론까지 들먹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이유가 있
었던 겁니다. 

김정기 이사장의 서재

제주에서 부인과 노후를 보내는 김정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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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작성기획단에서 보고서를 쓰
는데 그때 단장이 박원순 변호사였어요. 조사가 다 끝
나고 회의를 끝냈는데 고건 총리가 박원순씨를 부르
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저와 김삼
웅씨가 같이 고건 총리를 만나러 갔죠. 총리께서 술 
한 잔을 하시고 말씀하시길, 자기가 이 보고서를 검토
하기 위해서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일요일까지 통
독을 했는데 그걸 보고 너무 놀랐다는 겁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냐고? 이게 사실이면 이 일을 내 일처
럼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
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막 시작되고 국방장관 인
선이 2월에야 있었던 때라 아직 기강이 잡히지 않았
던 모양입니다. 군대 내부에서 군인 장성이나 경찰들

이 나서서 공동으로 반대 운동을 하려는 움직임이 감
지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6개월을 연기시켜 시
간을 벌고 그 사이에 내부를 좀 단속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료를 추가하고 새로운 증언자 등을 보
충한다는 핑계로 6개월 여를 보내고 2003년 10월 15
일(제8차 회의)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확
정되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 2003년 10월 31일 노무
현 대통령이 제주도에 와서 사과를 했잖아요. 그때 중
앙위원이라 그 장소에 갔어요. 가보니 유족들이 많이 
와서 앞자리에 앉아있었어요. 저나 임문철 신부 등 중
앙위원들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뒷자리에
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대통령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1. 행자부, 국방부 장관 등이 참석한 4·3위원회 현판식 (2000.8.28)
2. 이한동 총리가 주재한 4·3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 (2000.8.28) 
3. 제주4·3평화공원 조성 자문위원회 11차 회의
 (200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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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
는 대통령으로써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
과 제주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
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
가 명복을 빕니다.”

대통령께서 이 같은 말씀을 끝내고 절을 하자 이곳저
곳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나도 울컥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교일로 열심히 하지는 못했지
만 중앙위원으로 이름을 올려 활동했다는 게 뿌듯했
습니다. 당시 대통령 정무 수석이 유인태씨였는데 행
사장 로비에서 마주쳤어요. 아는 사이라 손을 붙잡고 
수고했다고 전했어요. 그 분들이 제주도 사람들 잊지 
않고 대통령께서 제주도에 오시니 여기부터 찾아 이
런 자리를 마련하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성향에 따라 4·3의 성과 또한 다른 양상을 보입니

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4·3 성

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진보 정권 때는 4·3에 대해서는 뭐라도 도움이 되면 
도와주려고 애썼다는 겁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제

주4·3특별법을 제정하였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진상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연구 조사 
사업에 많은 지원을 해 줬어요. 그 결과 유적지 발굴
과 유해 발굴 사업  등의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반공시대로 완전
히 돌아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조금씩 4·3을 무시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적극적인 지원의 움직임이 사그라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선거 등의 영향을 생각해서 
그저 현상유지만 하는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내 비유로 치자면 환자로 진단을 해놓고 처방은 적당
히 하면서 살려내지만 살려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
게 내버지도 않은 상태라고 할까요. 그래도 박근혜 정
부시절 추념일 지정은 좀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같은 
진영에서 추념일을 지정하는 것보다 보수 정권일 때 
지정을 하면 저변이 넓어지고 정당성도 더 강화되는 
효과가 있으니까 이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데 긍정
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2004년 제주4·3연구소 4대 이사장으로 활동하신 후 11년 

만에, 2025년 제11대 이사장을 다시 역임하고 계시는데, 

제주4·3연구소의 과제 또한 많은 변화가 있을 듯 합니다.

국가원수로 처음 4·3희생자위령제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 (200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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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4·3특별법이 막 제정되고 2003년 4·3진상조
사 보고서가 나오던 시점이라 새로운 4·3에 대한 조
사 연구가 강화되고 유족 신고 등이 아주 활발하게 거
론될 때였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제주도의 시민단체
와 유족 등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큰 다툼이 없었어
요. 광주에서는 유족들끼리의 갈등이 상당했거든요. 
둘의 차이가 뭐냐 보니까 보상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
었어요. 일단은 진실규명을 먼저 하자고 해서 진상조
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관련 자료와 증언채록 등의 사
업들을 하는데 몰두했던 것이 유효했다고 봅니다.
물론 광주 5·18도 잘 되었지만, 제주4·3이 훌륭하게 
과거사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보
상도 이루어지고, 불법재판에 대한 재심도 이루어지
면서 많은 부분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지금까지 지속해 왔던 4·3경험자들의 이야기를 정리 
조사하는 것은 계속 해야 되고, 두 번째 4·3유적과 관
련된 현장 조사도 지속이 돼야 합니다. 그 토대로 평
화 교육을 활성화시켜야 되는데 특히 평화 교육과 연
구를 위해 4·3교사들과 연구자들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4·3에 대한 전문 교사와 연구자들을 확보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는 4·3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은 민주화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민주화와 근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진 드문 나
라입니다. 근대화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민
주화는 어려운 거예요.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 한 사람들처럼 인정해 줘야 한다고 봐요. 

제주도도 육지 못지않게 민주화 운동이 상당히 발전
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주도 자체에서 제주도 학생
들과 제주 시민들이 민주화의 맥을 같이 했다고 봅니
다. 조직 간의 큰 불협화음 없이 진상조사를 하고 보
상까지 받는 절차를 이뤘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경험
들을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범한 역사가 없어요. 그다
음에 식민지를 했던 역사가 없어요. 지금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등은 아프
리카나 아시아 등에 식민지 만들고 착취해서 근대화
를 이루고 이후 민주화가 되었던 나라들이거든요. 반
면 우리는 다른 민족을 침략해 본 경험도 없이 근대에 

제주4·3연구소 개소식 및 독후감 발표회 (1989.5.10.)

제주4·3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 (201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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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 우리 힘으로 민주화를 일으킨 나라예요. 
4·3의 극복은 그런 면에서 의의가 있고 그래서 4·3
연구소나 평화재단은 앞으로 제3세계들 중 주변국으
로 부터 침해를 당하는 국가들에게 고난 극복의 경험
을 이식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험을 수출하
는 것이죠. 책을 만들든지 전문가를 만들든지 해 가지
고, 진정한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
이 있다고 봅니다.
제국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 대한민국의 자율적
인 쟁취운동을 세계화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
는 우리 연구소나 평화재단이 물론 지금 하는 것도 중
요하지만 세계화를 바라보고 그 세계화 작업을 시작
해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만 할 게 아니
라 제3세계에 이식시킬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제주대
학도 4·3을 전공한 교수가 제자들을 배출하는 일들이 
이뤄져야 된다고 봐요. 

이력을 보면 서원대 총장과 역사문제연구소장, 동학농민

혁명기념사업회 등 우리나라에서 굵직굵직한 역사의 발

자취와 함께 하셨는데 이런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

인지 궁금합니다.

그런 활동을 하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줄어서 책을 많

이 못 썼어요. 근데 내가 제일 열심히 한 게 청주에서 
시민운동 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제주도에 오게 됐지
요. 아마, 학생 때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지 못한 부채
의식이 있어서 전교조가 뜰 때부터 같이 시작하면서 
농민운동, 노동자 운동을 하게 됐는데 토요일 일요일 
날 데모를 할 때 나 같은 교수는 물론 노동자 농민들
이 꼭 오는 거예요. 난 전교조 할 때라 열심히 나가니
까 이게 소문이 나서 노동자 농민들도 연대 투쟁을 할 
때 전교조 지지하는 교수님 중에 대표로 꼭 오라고 하
면 내가 가고 했어요. 왜냐하면 충북대학교에 괜찮은 
교수들이 있었는데, 그 교수들 집이 다 서울이라 주말
이면 청주에 없어요. 나는 청주에 사니까 사람들이 와
서 좀 참석해 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가면 하루가 
날아가 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시민운동이 
돼버린 겁니다. 

내가 다니던 서원대는 원래 청주여자사범대학인데 
사립학교였어요. 그런데 재단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 퇴진 운동을 벌이며 교수
들과 교직원들이 나를 교수협의회장으로 만들어 놨
다가 재단 사태로 총장이 사표를 내서 공석이 되어 버
리니까 교수협의회장이었던 내가 총장이 된 겁니다. 

제주4·3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 (2019.5.10)

제주4·3연구소 제주4·3 제53주년 학술대회

 '폭력의 역사는 청산될 수 있는가? 과거 청산의 사례와 4·3'

왼쪽부터 현기영, 김정기, 김석범, 추미애, 장정언, 양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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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이 된 후에 보니까 학교에 대지는 있는데 건물이 
없어요. 그래서 주변에 지인들이 있어서 그 분들의 도
움을 받고 지역 건설업체 중에 충북지역에서 존경받
는 운동권 출신이 하는 업체가 있었는데 보아하니 재
료나 이런 것을 장난치지 않고 딴딴하게 잘 하니까 하
도급을 그 사람에게 맡겼었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겁니
다. 그 건설업체 사장이 충청 리뷰라고 하는 주간지
의 대주주였는데 그 신문에서 청주지역 검찰이 기소
는 많이 하는데 기소율이 제일 낮다는 비판적 기사를 
실으면서 미운 털이 박힌 거죠. 그래서 신문사는 물론 
대주주가 운영하는 건설업체까지 마구 조사를 하다

가 우리 학교와 수의 계약한 것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검찰이 프레임을 만든 게 지역의 신문
사 사장과 대학총장의 부패 카르텔로 몰아갔어
요. 그러자 지역신문들은 검찰이 흘린 자료들을 
받아 적는데 급급하다보니 마치 이게 사실인 것
처럼 되는 거죠. 

다행히 충청북도와 청주시 45개의 시민, 농민, 
노동자 단체가 총궐기해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를 비판하며 대변해 주었습니다. 또한 한겨레
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보도되어 전
국적인 이슈가 되어 검찰들이 뜨끔하게 되었죠. 
그게 2002년 11월입니다. 나중에 대법원에서 무
죄가 나왔지만, 이미 학교는 엉망이 되어버렸어
요. 입시를 불과 1~2 개월 남겨 놓지 않는 시점
에 총장을 구속해 버렸으니 입시진행이 원활했
겠어요? 학부모 입장에서도 비리가 있는 학교
인 것처럼 보이는 대학에 자신들의 자식을 보내
고 싶지 않겠죠. 입시율도 낮아지고 학교 내부
는 뒤숭숭해져버렸죠. 내 개인적으로도 감옥에 
잡범처럼 끌려 들어가 7~8명의 사람들과 한 방
에 지내게 하고 사회적으로도 마치 부패한 사람
처럼 몰아가버려 지역사회에서 생매장 당하게 
했죠. 돈 먹은 사람처럼 의혹보도를 했던 것은 
대서특필되었지만, 내가 최종 대법원에서 무죄
를 받았다는 것은 알지 못해요. 동네에서도 나

를 힐끔힐끔 보며 부패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하는 겁
니다.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며 상처를 많이 받아서 제주로 오게 된 겁니다.  

그 사건 없었으면 편안하게 청주에서 지냈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제주도 오니까 너무 좋아요. 소문 때문
에 여길 왔는데, 오히려 그런 얘기 한 사람들이 고마
워요. 안 그랬으면 제주도에 와서 정착할거라 생각 못
했을 겁니다. 제주도가 좋은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좋
은 줄은 몰랐거든요. 제주도에 와서 교육대학교 총장
을 하며 제주대학교와 통합과정을 거치는 과정에 조

제15회 심산상 사상식 (2002. 5. 29)

제주교육대학 총장 정년퇴임 기념 (2009.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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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부침은 있었지만 통합되어 새로운 경쟁력을 갖
게 되었다고 봅니다.

제주4·3 기록물이 202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

재가 되었는데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참 기쁜 소식이죠.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오고 20여 
년이 지나 그 자료들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니까요. 
4·3당시의 자료뿐만이 아니라 그 험난한 역사를 이겨
난 과정들에 대한 기록들까지 인정받은 것이라 이 부
분을 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4·3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상조사 보고
서 작성 당시 수석전문위원이었던 양조훈씨, 김종민, 
박찬식 전문위원 그리고 장윤식, 김은희, 조정희씨 등 
조사요원 그리고 4·3연구소에서 활동을 했었던 김창
후, 조미영, 오화선 등 그리고 많은 예술인과 시민사
회 단체들의 소리 없는 노력들이 맺은 결과라는 걸 잊
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파리
에 갈 때 이런 사람들이 같이 갔어야 했는데 안 보이
더라고요. 다행히 현기영 선생님이 함께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 경험들을 수출해서 
평화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지
금도 세계에서는 수많은 제노사이드가 발생하고 있
어요. 특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관심을 가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4·3을 통해 제노사이들
의 경험을 했었고 이를 극복하여 평화와 인권을 이야
기하는 마당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제노사이드가 자
행되고 있어요. 연대와 구호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누군가가 도움을 줬듯이 우리도 그
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지구 공동체에 평화가 싹 
틀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지난 2024년 12월 3일을 ‘윤가통령(尹哥統
領)’의 사흘짜리 비상계엄 작난(作亂) 혹은 장난으로

으로 부릅니다.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자 역사에 무지
함을 드러내며 연설 때마다 자유를 입에 달고 살았지
만 자유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오독했던 반자유(反自
由)의 극치였습니다. 만에 하나 그 계엄이 성공했더라
도 사흘을 못 넘겼을 것으로 봅니다. 전국에서 동시다
발로 타도 항쟁이 용솟음 쳤을 것인데 그 선두에 광주
와 제주도민들이 앞장서며 나섰을 것입니다.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그리 쉽게 무너
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마무리는 지난 제주4·3 70주년에 한겨레신문에 기고
한 내용으로 하겠습니다. 그 엄혹했던 시절 30세 어
멍이 할망이 되어 피 토해낸 육성을 들어 봅시다. 

“그때 총이 펑하난 딸을 업은 채로 난 쓰러졌수다. 그
때 아들이 엄마! 하고 달려드난 총이 아들에게 갔수
다. 저거 안 죽었네 하며 펑펑 총을 쏘난 10살 아들은 
심장이 다 나완 난 등어리에 맞은 총알이 옆구리로 나
오난 딸아이도 다리에 총에 맞안. 그때 사람들이 사람
이 아니었수다.” 

이 끝 문장에 번쩍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
상에 대한 갈망! 절망의 피마당에서 틔워낸 민주주의 
빛으로 승화시킨 인권의 토대가 그 어멍이 꿈꿨던 제
주도민의 염원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0살이 되어 희미해진 저의 기억
력의 한계를 매끄럽게 채워준 제주4·3연구소의 김창
후 소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두서없는 말
을 솜씨 있게 정리해준 조미영 선생님과 사진자료를 
잘 찾아 챙겨 준 송지은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 부족한 인터뷰를 끈기 있게 읽어주신 독자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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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잇다

부계혈통주의가 남긴

불일치 기록

구전된 기억

불일치 감각

돌봄의 부재

지위의 공백

아득한 세월

아버지의

    딸로

        살고 싶어요

글  김상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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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해결의 문턱과 딸들의 등장

2021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기존 14조의 조문 목록이 31조로 대폭 확
대되었다. 희생자와 유족의 피해회복과 더욱 폭넓은 영역에서의 제
도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한 조항들이 신설된 것이다. 전부 개정된 특
별법은 희생자와 유족의 ‘70여 년 간의 한을 푸는’, ‘완전한 해결’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위자료(현 보
상금)’ 조항이다. 처음으로 특별법 내에 등장한 이 단어는 진상규명
과 명예회복을 잇는 그 다음 단계의 의미있는 해결 절차로 주목받았
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를 비롯해 각계에서 특별법 전부 개정을 환
영했다. 정부에서는 곧바로 배·보상 기준과 방법에 대한 연구용역에 
착수하는 등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제도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제도적 해결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던 시기, 또 다른 난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가족관계 불일치’ 문제다. 가족관계 불일치란, 희생
자의 법적 가족관계가 실제 가족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
한다. 가족관계 불일치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주로 4·3 당시 
출생신고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희생자의 자녀가 희생된 친부
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녀로 등록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들은 희
생된 아버지의 형제나 심지어 할아버지의 자녀로 등록되어 법적으로
는 삼촌 또는 형제 관계가 되기도 했다. 드물게는 홀로 남은 어머니가 
재가하며 새아버지의 호적에 편입되면서 실제 아버지와는 법적 관계
가 단절된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러한 가족관계 불일치 문제가 특정 성별에 편
중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본격적으로 정부 용역 조사가 시작되
기 전, 2021년 제주4·3 희생자유족회는 예비 조사를 통해 조사대상 
78건 중 희생자의 딸이 76.9%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2022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진행한 제주4·3사건 가족관
계 불일치 실태조사에서도 자신과 희생자의 가족관계 불일치를 신고
한 친생자 사례 208건 중 158명, 즉 75%가 희생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4·3 희생자의 딸이 유독 가족관계 불일치 사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KBS제주에서 방영된 양호근 감독의 제주4·3 특집 휴먼다큐

<숙자>의 영상 장면이며, 전체 영상은 유튜브 채널 ‘사쩜삼도’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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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혈통중심주의가 남긴 ‘불일치’ 기록

가족관계 불일치 현상은 흔히 아버지의 사망과 4·3의 
혼란이 맞물려 발생했다고 이해된다. 알려진 바처럼, 
4·3 희생자의 대다수는 가정에서 ‘호주’였던 젊은 남
성(아버지)이었고, 또한 4·3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에서 이탈되고 면사무소가 불에 타는 등의 이
유로 가계 기록이 누락되거나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왜 하필이면 딸들이 주
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
기 어렵다. 

이 현상은 4·3과 아버지의 사망뿐만 아니라, 한국과 
제주 사회의 부계중심주의와 그 안에서의 딸의 지위

가 어떠한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딸들은 말 그대로 
“딸이기 때문에” 희생자인 아버지와의 법적 가족관계
를 확보하지 못했다. 딸은 부계중심주의적 가족제도에
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오랫동안 한국과 제주 사회에서는 아버
지와 아들, 즉 남성을 통한 부계 혈통의 계승과 유지를 
중요시해왔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
정을 받고 폐지된 호주제는 이러한 관념을 잘 보여준
다. 호주제는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는 부계계승제
도, 남편의 혈족으로 아내를 종속시키는 부처제 결혼
제도로 구성된다. 이는 전적으로 남성에 의해, 남성이 
남성을 계승하는 실천만이 가족의 연속성을 담보한다
고 보는 것이다. 부계중심주의적 가족제도는 가족 내 

사실과 다른 가족 관계로

제주4·3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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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지위를 공고하게 하면서 여성, 특히 딸이라는 
가족 구성원의 자격과 권한을 박탈해왔다. 이 때문에 
아들의 경우, 결혼과 함께 아버지를 계승하고 새로운 
가족을 대표하는 호주권을 갖게 되지만 딸의 경우에
는  흔히  쓰이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처럼  결혼과  함
께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벗어나 남편의 혈족 구성원
이 됨으로써 원가족에서의 자격과 권한, 연결성을 상
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딸들은 가족
의 정당한 계승자로 상징적으로 간주되지 못하고, 동
시에 가족 내 물질적 자원을 승계하고 상속받는 권리
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제되곤 한다. 
4·3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과정
에서 많은 딸들이 희생자의 피해 경
험을 정당하게 상속할 가족 구성원
이 되지 못한 까닭은 이러한 부계중
심주의와  딸의  불완전한  성원권이 
4·3의 혼란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딸들의 기억과 4·3의 가족사

아버지와  법적  가족관계가  불일치
한다는 점은 4·3의 결과로 죽음을 
맞은 희생자의 가족으로서 겪는 부

당한 일이다. 딸들은 불일치된 가족관계
로 인해 4·3 희생자인 아버지의 유족이 
되지 못했고, 추모권을 비롯하여 아버지
의 유족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부계중심주의가  공고한  제
주 사회에서 딸로 살아가는 삶의 일면일 
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희생자의 딸들
은 ‘딸이었기에’ 가족에 관한 권리박탈 외
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차별과 배제를 겪
어왔다. 

가족관계 불일치 상황에 처한 딸들은 대
부분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정
도로 어린 나이에 4·3과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기
억을 갖고 있기 보다는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전해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법적 아버지
가 실제 아버지의 역할을 대체해주지는 않았다. 법적
으로 기록된 아버지는 희생자의 딸들에게 물질적, 상
징적 자원을 분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
하거나 돌봄을 제공하거나, 친밀성을 형성하지도 않았
다. 딸들의 법적 아버지는 단지 가족관계기록에 이들
의 존재를 명시해줌으로써 법적 시민권을 가질 수 있
게 해주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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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4·3 이후 가족 내에 남편이 부재하게 되면서 살아남은 어머니는 딸과 함께 생존
을 궁리해야만 했다. 부계중심의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제주의 가족과 마을에서 남편
이 사망한, 게다가 사망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없는 여성은 안정적으로 살
아갈 수 없었다. 4·3 이후 ‘딸의 어머니’는 친정 마을로 이주하거나 생존 전략으로 재
가를 선택했다. 4·3으로 ‘홀어멍’이 된 어머니가 재가를 선택한 경우에도, 딸들은 어
머니와 모녀 관계를 유지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이와 애순이 엄
마처럼, 같이 살지 않더라도 이들은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딸의 가족관계가 법적
으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 부계 구성원(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등)에 속하게 
되면서 딸과 어머니의 가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가족관계 불일치 
현상이 주로 아버지와 딸의 법적 기록 불일치만을 문제 현상으로 여기지만 이들은 많
은 경우 어머니와의 기록 역시 불일치된 채로 살아온 것이다.

이처럼 딸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재구성된 4·3의 가족사는 법적으로 기록된 가족관
계 그 이상의 살아낸 경험을 보여주었다. 딸에게 4·3의 가족사는 어머니 혹은 할머니
에게서 구전된 기억과 어렴풋한 불일치 감각, 돌봄의 부재와 지위의 공백 등 여러 매
개를 통해 부분적으로 구성되었다. 단지 기록이 일치되지 않을 뿐 딸들은 아득한 세월
을 희생자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살아왔다. 특별법 개정을 통해 ‘가족관계 불일치’라
는 곤경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아버지와의 가족관계를 스스
로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완전한 해결 너머

한편 가족관계 불일치 문제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인식된 문제로 2007년 개정된 특
별법에서 4·3 사건의 여파로 ‘호적 등재가 누락되거나 호적에 기재된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호적 내용을 정정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항이 마련된 바 있다. 그러나 2020
년 전까지도 특별법의 관련 조항을 통해 가족관계를 정정한 사례는 거의 알려진 바 없
었다. 그 이유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면 그간 유족들에게는 가족관계를 둘러싼 법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살아남은 가족들과 삶을 재건하는 것이 더욱 절실했을 것
이다. 희생자와의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행정적 절차를 밟는 것 자체가 사회적 낙인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4·3 이후의 가족 공동체의 안정을 해
치는 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상금은 그 지급(보상금 상속) 대상으
로 희생자의 법적 가족을 지목하면서 희생자의 법적 가족관계를 둘러싼 문제를 전면
에 부상시켰다. 그리고 많은 유족들은 단지 4·3에 대한 국가의 금전적 배상의 의미로
서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지게 되는 권리와 존엄성을 확인받는 
상징적 의미로 보상금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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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법적 기록 및 법적 기록을 기반으로 하는 ‘완전한’ 해결 담론 너머, 여
성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4·3 이후’를 그려보았다. 4·3의 흔적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4·3특별법 전부 개정은 의미있는 진전이
지만 법적 해결의 문턱에서 등장한 이 딸들의 경험과 기억은 4·3이 법적·행정적 
절차를 통해 완전히 봉합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보상을 위해 이들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낸 시간을 법적 가족관
계의 정정과 보상금 상속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살아온 이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해결 담론이 포괄하는 것 이상으로 4·3
의 여파가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 어떻게 상속되는지 그리고 제주에서 딸로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러한 담론과 함께 4·3과 여성을 둘러싼 여성주의적 논의가 확
장되어야 할 것이다.

4·3행방불명인 묘역(제77주년 4·3희생자추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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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연좌(緣坐)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광보 (제주시 화북동, 1941년 생)

4·3의 증언

수상한 섬,
수상한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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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 4·3 당시 피바람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목숨을 부지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일본행을 택한 도민들이 많았다. 1980년대

까지도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밀항이 잦았다. 

18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바다 건너 삶의 터전을 일궜던 강광보 어르신(1941년 생)

도 마찬가지였다. 친척의 도움을 받아 단속을 피해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산 그는 원한다

면 일본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비교적 경제 상황이 나았던 일본에서 계속 머물 수 있었지만, 언젠간 내 고향 푸른 섬 

제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그는 일본 생활을 접었고 귀향을 택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은 곧 절망으로 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제주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독재 정권의 표적이 됐다. 만들어진 간첩

이 된 그는 수형 생활을 했고 가정은 붕괴됐다. 4·3으로 덧씌워진 붉은 색을 씻어내고 

이제는 푸른 줄로 알았던 섬은 새빨갛다 못해 아주 검붉었다. 

남은 건 없었다. 그는 트라우마 때문에 가지고 있던 과거 사진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대신 간첩조작사건과 같은 국가 폭력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집터에 ‘수상

한 집’을 지었다. 내 나라, 내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수상한 사람이 된 그의 기록이 

담긴 공간이다.

4·3으로 붉은색이 덧씌워진 제주도민들은 이후에도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됐

다. 강광보 어르신을 비롯한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이 이 경우다. 어르신은 딱히 

바라는 건 없지만 훗날 사람들이 과거에 이런 억울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수상한집 광보네

(제주시 도련3길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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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주의소리 김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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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에 못 나가게 했던 어머니,
지붕에 숨어 산 아버지

태어난 곳은 잃어버린 마을, 화북 곤을동입니다. 초등
학교 1학년 때 4·3이 일어났는데 젊은 사람이 동네에 
있으면 무조건 잡아다가 죽였던 시절이었죠. 어릴 때 
기억으로 초가집에는 천장과 지붕 사이 공간이 있었
는데 아버지는 거기 숨어 살았어요. 낮에는 올라가 있
고 밤이 돼서야 내려와 식사하셨죠. 어머니는 친구들
이 불러도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그때는 몰
랐는데 당시 어린 애들이 놀면 군경들이 찾아와 아버
지나 삼촌이 있냐고 물어봤대요. 어린애들은 솔직하
니까 집에 남자 어른이 있다고 하면 그길로 집에 데려

가 어른들을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걸 알았던 겁니다. 아버지 형제들
은 첫째, 둘째, 막내 아버지가 모두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면했습니다. 고비
는 있었죠.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예비검속에 아버지가 잡혀간 겁니다. 호적을 보면 
형제가 4명인데 3명 밖에 없으니, 나머지가 산에 올라간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거
죠. 죽을 수도 있었던 때 할머니는 일본에서 자식들이 보낸 편지를 들고 구장을 찾아갔
어요. 구장은 지금의 동장인데 할머니는 억울하게 잡혀간 아들을 풀어달라고 했고 다
행히 결백이 증명되면서 아버지는 돌아오실 수 있었어요. 편지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수도 있었죠. 

제주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수상한 섬 이야기' ⓒ제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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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 학살한 4·3,
증오가 바탕이 된 조총련行

고등학교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밀항으로 일본에 갔어
요. 오사카에 있는 둘째 아버지 도움을 받게 됐는데 그 
집에 가보니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어요. 처음 보는 얼
굴이라 태평양 전쟁 당시 징용돼 돌아가신 첫째 아버
지 영정 사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김일성이었죠. 
반공교육을 받았으니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몰랐
어요.  둘째  아버지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에 가담하고 있었고 저는 둘째 아버지가 한국에 무슨 
원한이 있길래 북한을 좋아하게 됐나 싶었습니다. 그 
집에 살면서 북조선에 가면 집도 주고 직장도 준다며 
사상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둘째 아버지네 아들인 사
촌형은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학교를 나왔고 둘째 
딸은 스스로 북한에 들어갔죠. 그래도 전 돈을 벌러 일
본에 간 거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둘째 아버지네 가족은 사상에 물든 게 아니었어
요. 둘째 어머니 형제들이 4·3때 다 돌아가셨던 게 큰 
이유였던 겁니다. 남동생 4명 중 2명이 죽었고 살아남
은 둘째 어머니와 동생만 일본으로 겨우 도망친 거였

죠. 그 원한이 있었던 겁니다. 둘째 어머니는 한국을 두
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살 곳이 아니라고 
했어요. 4·3때 무참하게 동네 사람들이 죽고 친척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죽을 뻔하다 도망갔으니, 나
라에 대한 원망과 원한이 있었던 겁니다. 일본에서 조
총련에 가담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물들어
서 가담한 게 아니었어요. 4·3 당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집들을 불태운 이승만 정권을 피해 목숨을 부
지하려 일본으로 도망쳐 온 원한이 있었던 거예요. 또 
당시 김일성이 학교나 사무소를 지어주는 등 조총련
을 많이 도와줬어요. 70년대까지 북한이 잘 살았으니 
일본 교포들이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빨갱이 물 들었네”

고향 땅 내딛는 순간 시작된 조작

1971년 일본에서 제주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 
3명을 낳았어요. 영주권이 없어 아이들은 정식 학교

과거 수상한집 운영 당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거울에 쓴 글자 '훔쳐보지마'.

이 공간은 강광보 어르신이 조사를 받던 조사실을

복원해둔 곳으로 글자에는 거울 너머 있는

국가폭력 가해자들에게 보내는 분노가 담겼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골목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강광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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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갈 수 없었고 민단 건국학교를 다녔죠. 그런데 일
본 경찰이 학생들마다 조사를 해서 밀입국자를 찾아
냈고 저도 결국 붙잡혔죠. 조사받는 과정에서 일본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요. 기반도 닦은 데다 법적으로 15년 이상 거주하면 추
방을 못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기에 가족들
을 설득해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조총련 출신 둘째아
버지가 있으니 위험하겠다고 생각해 영사관에 북한과 
관계없다는 내용의 자술서도 제출했어요. 그렇게 영사
관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듣고 제주로 들어왔죠. 1979

년 7월쯤 왔는데 그때 공항에 내리니 가족들은 다 나
갔는데 저만 붙잡혔습니다. 당시 박정희 시절인데 중
앙정보부에서 3명이 와서 저를 붙잡아갔습니다. 나가
는 길에 일본에서 얼마나 살았느냐며 팔꿈치로 가슴
팍을 ‘퍽’ 하고 때리더니 빨갱이 물이 들었다고 했습니
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 생각했죠. 어디론가 끌려가서 
속옷만 빼고 다 벗은 다음 엉덩이를 수도 없이 맞았어
요. 그러다 옷을 입히더니 조사를 했습니다. 영사관에 
제출했던 자술서와 진술을 대조하더니 한 3일쯤 지났
을 때 조사관들이 밖에 가족들이 와 있으니 이제 가보
라고 했습니다. 다 확인했다며 일본에서 친척이나 친

1. 1986년 2월 27일 제주지방법원 구속영장.

   당시 집행장소에는 국군 제508 보안부대,

   즉 한라기업사로 나온다.

2. 1986년 3월 26일 제주지방검찰청 공소장

3. 1986년 5월 29일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 1심 판결문.

   강광보 어르신은 1심에서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에 처해졌다. 

4. 제주지방법원 공판 기록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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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이 오면 며칠을 살았는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솔
직히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끝이구나 했죠.

다시 끌려간 고문실과 박정희 10·26 사태

중앙정보부 조사를 마친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였나 집
에  혼자  있는데  제주경찰서에서  정보과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간단하게 조사할 게 있으니 와달라고 하더
군요. 그때 집이 신산모루(일도2동) 쪽이었고 경찰서
는 목관아였죠. 경찰서에 도착하니 뜬금없이 18년 동
안 일본에 잘 살았는데 왜 왔냐고, 일본 친척들이 다 

빨갱이인데 무슨 계략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물
었습니다. 또 중앙정보부에서 3일 만에 나온 것도 뇌
물을 준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 부모님
께 보낸 돈은 어느새 공작금이 돼 있었습니다. 8월 말
에 들어가서 한 2개월쯤 조사를 받고 고문도 당했습니
다. 진술서를 원하는 대로 쓰지 않으면 찢어버리고 고
문을 가했죠. 둘째와 셋째가 4년 터울인데 4년 동안 이
북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기가 없었던 것 아니
냐는 추궁도 했습니다. 오금에 막대기를 넣고 무릎을 
꿇도록 한 뒤 짓이겨 누르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
는 고문을 당했죠. 그러던 중 10·26 사태가 터졌어요. 

수상한 집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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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들이 보는 신문을 살짝 엿봤는데 박정희가 죽
었다는 사실이 대문짝만하게 나와서 보이더군요. 다
음날부터 수사관들이 갑자기 조사를 안 하고 일본에
서 있었던 일화들만 물어보더니 곧이어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래도 한 3년은 수사관들로부터 감시를 
받았습니다. 

‘다녀오면 산송장’ 한라기업사,
완벽한 간첩이 되다

7년이 지난 1986년 어느 날 갑자기 보안부대에서 사
람이 오더니 일본에 오래 살았으니 그 내용으로 진술
서만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한 달쯤 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들이닥쳐 자술서에 
보충할 게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죠. 그래서 간 곳이 한
라기업사라고 불리는 보안부대 건물이었는데 저를 지
하실로 데려가더군요. 계장이 오더니 여기가 어떤 곳
인지 아느냐고, 여기는 일단 들어오면 벙어리도 말하
게끔 하고, 살아서 와도 죽어서 나갈 수 있는 인간 도살
장이라고 합디다. 그렇게 겁을 주더니 7년 전 경찰 조
사 서류를 전부 가져와 그때 허위 자백했던 내용을 인
정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허위자백 내용은 일본에서 산 
18년간 같은 시간, 장소에서 매일 같이 조총련 간부 교
육을 받았다는 등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
죠. 또 제주에 들어와 곳곳에서 사람들을 포섭해 북한
을 찬양했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허위로 자백한 내용
이니 인정하지 않았고, 또 잘못이 없으니 경찰이 풀어
준 것이라고 항변하니 그길로 구둣발이 날아왔습니다. 
말대꾸하지 말라며 엄청나게 고문했습니다.

하루는 조사를 받다가 허위 자백 문서에 지장 찍기를 
거부했는데 갑자기 군의관 2명이 들어오더니 제 몸 상
태를 확인했습니다. 별 이상이 없다고 하더니 팬티만 
입힌 채로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더라고요. 그러더니 
전기를 흘려보냈죠. 까무러치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다시 인정하라고 한 뒤 말을 안 들으면 또 

전기를 흘리고 그랬습니다. 한번은 일어나보니까 엄
지에 인주가 묻어 있었어요. 내가 찍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건가 보니 정신을 잃은 사이 서류에 멋대로 
지장을 찍은 겁니다. 그래서 법정에 서게 됐고 7년 형
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로 갔죠. 거기도 제주 출신들
이 열 명 정도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 일본 
관련 조총련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1991년 5월 가석방이 됐어요. 

모든 것을 앗아간 독재 정권,
남은 건 간첩 꼬리표 뿐

가석방 될 때 가족들에게 연락이 갔는데 아무도 찾아
오진 않았죠.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도 안 왔습니다. 일
본에서 귀국할 때 반대를 무릅쓰고 모두 데려왔는데 
오자마자 제가 구속되고 경제적으로 살기 힘들어지고 
하니 가족들은 저에 대한 원망이 컸죠. 제주도에 내려
왔는데 가족들은 더 이상 저를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공사판에서 일하며 부모님과 살았습니다. 가석방됐지
만, 간첩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니 제대로 된 일도 못 했
어요. 부모님도 화북에 살았었는데 아들이 간첩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동네에서 살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이
사했습니다. 그게 지금 살고 있는 도련동입니다. 1년쯤 
지났을까, 무릎이 아파 걷지 못하게 됐고 제주대병원
에서 잘못되면 절단할 수 있다는 각서를 쓸 만큼 어려
운 수술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고문으로 연골에 염
증이 생겼는데 방치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교도소에
서는 진통제만 먹고 버텼는데 이제는 걷질 못하게 된 
겁니다. 수술 이후 공사판에서 일할 수도 없으니 관광
버스 경비원으로 살았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너무
나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일본에
서 번 돈들을 모두 부모님께 보냈는데 동생이 부모님
을 꼬드겨서 돈을 전부 탕진하다시피 썼죠. 부모님 재
산도 모두 담보로 잡힐 정도로 형편없이 해 먹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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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이룬 명예회복, 잊지 말아줬으면

뉴스를 보다가 저랑 같이 교도소에 있었던 강희철이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다고 하길래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아 2009년 재심을 신청
했죠. 그렇게 한참이 걸린 2017년 겨우 무죄를 선고 받
았습니다. 무죄를 선고받고 보상금도 받았습니다. 그 
보상금 중 5%는 시민단체 소속이었던 변상철 사무국
장에게 기부하는 걸로 됐어요. 그렇게 변 국장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았고 돈을 꽤 모았죠. 땅만 있
으면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하길래 제가 땅을 줄 테니 
기념관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수상한 집이 지
어진 겁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고 근무하는 
직원도 있었는데 코로나19 이후로 운영이 안 돼 직원
들이 모두 떠나고 저 혼자만 남아있습니다. 다른 건 바
라지 않습니다. 잊지 않아 줬으면 합니다.

또 조례가 만들어졌는데 아무 혜택을 받아보지 못했
습니다. 조례를 만들 때 바라는 걸 이야기하라 하길래 
조사관들을 비롯해 나를 법정에 세운 사람들에게 진
정한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고문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가니까 알게 모르게 병이 생기고 있는데 
큰 병에 걸리면 의료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달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상금을 받았지만,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니 가정이 곤란한 사람들은 조금이라
도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했어요. 마지막으
로 재심을 몰라서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
직도 있는데 도와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
하고 조례안이 통과됐지만 사실상 지금까지 해온 것
들이 하나도 없어요.

이 수상한 집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기
관이나 시민단체가 관리하거나 운영해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것. 남은 사람들이 이 건물에 
대해 기억하면서 과거 이런 억울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마음으로 지금까
지 버텨왔으니까요.

제주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수상한 섬 이야기' ⓒ제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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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미술인협회의

기억 투쟁사

4·3미술제 포스터 (2022~2025)

동백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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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미술인협회(이하 탐미협)는 1993년에 설립되어 1994년부터 지금까
지 4·3미술제를 열어왔으니 30년 넘게 4·3과 함께하고 있다. 이처럼 4·3
미술제를 이어온 탐미협의 설립 배경에는 1988년 창립된 ‘그림패 

ᄇᆞᄅᆞᆷ코

지’와 강요배가 있다. ‘그림패 

ᄇᆞᄅᆞᆷ코지’는 4·3을 주제로 한 첫 전시회인 

《4월 미술전》(1989)을 세종미술관에서 열었으며, 서울의 그림마당 민에서
도 《4·3 넋살림展》(1989)을 개최했다. 강요배 역시 4·3을 주제로 한 개인
전 《제주민중항쟁사-강요배의 역사그림전》(1992)을 서울의 학고재 화랑
과 세종미술관에서 열어 4·3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씨앗이 
싹을 틔워 탐미협이 결성되었다. 탐미협에는 개인전 이후 고향 제주도로 
돌아온 강요배와 ‘그림패 

ᄇᆞᄅᆞᆷ코지’ 회원이었던 강태봉, 김동수(필명 김유

정), 김수범, 박경훈 등과 진보적인 작가였던 고길천, 고혁진, 양미경, 오석
훈, 이경재 등이 참여했다.

탐미협 활동에서 놀라운 점은 4·3미술제를 시작한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4·3미술제의 지속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4·3미술제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
건을 주제로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사례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
다. 질문의 답은 지난 4·3미술제의 도록에 실린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김유
정은 4회 4·3미술제 도록에서 “지금까지의 4·3미술제는 하나의 제의(祭
儀)였다. 원혼을 달래기 위한 엄숙한 위령제였다.”1)라고 했다. 작품에서도 
같은 답을 찾을 수 있다. 김영훈과 박경훈이 50개의 현무암 위에 각각 하
나씩 양초를 켜고, 그 앞에 물그릇을 하나씩 둔 작품 <진혼>(1998)은 두 작
가가 차린 제사상이었다. 4·3미술제는 말 그대로 제사였고, 제사는 한 해
도 거를 수 없는 법이었다.

지금까지의
4·3미술제는
하나의 제의(祭儀)였다.
원혼을 달래기 위한
엄숙한
위령제였다

글·사진 김연주 문화공간 양 기획자

1) 김유정, 「비극의 제의를 희망의 원리로: 4·3미술제에 답함」, 『자연·사람·역사』, 제4회 4·3미술제 전시도록, 1997, p. 3.

김영훈, 박경훈 _ 진혼 현무암 위에 양초, 물그릇 50조, 1000×70×40㎝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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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로서의 4·3미술제는 탐미협이 기억 투쟁을 벌이
는 장(場)이 된다. 탐미협 작가들은 작품에 4·3을 담
음으로써 반세기 넘는 억압 아래 사라진 기억을 다시 
찾아와서 그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제사는 먼저 가신 
분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의식이기에 탐미협 작가들은 
우선 희생자분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무명천 할머니>(2000)에서 양미경은 무명천 할머니
의 모습을 캔버스에 천을 올려놓고 바느질로 새겼다. 
한땀 한땀 바느질할 때마다 기억도 한땀 한땀 새겨졌
을 것이다. 인민유격대 사령관인 이덕구의 모습은 김
수범의 <이미지 전쟁-달력>(2000)과 같이 주로 포토
몽타주로 작업이 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과거
와 현재의 이미지가 겹치며 그의 죽음이 지금 우리에
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정용성은 “원인에는 흥
미가 없다. 나의 관심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한 브라
운 대령의 그림 <제주지역 미군총사령관 브라운 대령
>(1999) 등 가해자의 모습을 남김으로써 가해자 역시 
잊지 말자고 한다. 가해자는 분명하게 가해자로 기억
되어야 한다.

김수범 _ 이미지 전쟁-달력 혼합매체, 70×50㎝ (2000)

정용성 _ 제주지역 미군총사령관 브라운 대령

200×100㎝, 종이에 목탄 (1999)

양미경 _ 무명천 할머니 캔버스에 천 바느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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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협 작가들은 4·3 당시 사건 또한 작품으로 전했
다. 마을 전체가 불에 훨훨 타고 있고 마을에서 쫓겨
나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강요배의 <천
명>(1993)은 군경에 의해 진행되었던 소개(疏開) 작전
이 어떠했을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강요배의 그림들은 
4·3의 여러 기억을 시각화함으로써 4·3이 더 강하게 
뇌리에 남도록 한다. 

1950년 8월 주정 공장에 수용되었던 사람 중 수백 명
을 돌에 매달아 바다에 수장(水葬)했던 사건은 고길천, 
강문석 등에 의해 표현되었다. 고길천이 목탄으로 그
린 <광야(狂夜)>(2000) 연작은 주정 공장에서부터 바
다에 던져지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표정
에서 공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강요배 _ 천명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50×162㎝ (1993)

고길천 _ 광야(狂夜) 1950-1, 2, 3, 목탄, 콘테, 39×5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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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정뜨르 비행장 활주로에서

시작된 유해 발굴은

탐미협 작가들의

작품 주제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작가는

유해 발굴 현장을 찾거나

유해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이는 작품으로 연결되었다.

별도봉 유해 발굴 현장 (2007)

정뜨르 비행장 유해 발굴 현장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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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석의 <수장>(2008)에서는 현무암이 철심에 묶여 
바닥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그때 상황을 깨닫게 한
다. 돌의 무게가 느껴지고,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다가온다. 이처럼 당시 상황을 전달할 시각 자
료가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탐미협 작가들의 작품은 
사건을 재현하거나 표현함으로써 4·3의 기억을 모아 
보존하고 알렸다.

기억 투쟁으로 탐미협은 4·3의 진실을 밝히려고 했기
에 탐미협의 역사는 4·3진상규명운동의 역사와 맥락
을 같이 한다. 일례로 2007년부터 정뜨르 비행장 활주
로에서 시작된 유해 발굴은 탐미협 작가들의 작품 주
제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작가는 유해 발굴 현장을 찾거나 유해 발굴 작업에 직
접 참여했다. 이는 작품으로 연결되었다. 

정용성은 2007년 화북동 별도봉의 희생자의 유골을 
직접 본 뒤 <귀천>(2007)을 그렸다. <60년 만의 외출
>(2009)도 고길천이 정뜨르 비행장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옷을 프로타주 기
법으로 남긴 작품이다. 10년이 지난 2018년 정뜨르 비
행장에서는 2차 대규모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정용성 _ 귀천 한지에 채색, 180×90㎝ (2007)

강문석 _ 수장 현무암, 철, 가변 설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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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양동규가 유해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흙을 걷어냈으나 어떤 유해도 발
굴되지 않는 현장의 땅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작품화했다. 양동규의 <빈땅>(2018~2021)
이 바로 그 현장이다.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동시에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1994
년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합동 위령제를 지내게 되면서 4·3은 ‘항쟁’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정명(正名)이라는 해결하기 힘든 숙제가 남았다. 또한 학살, 희생자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문화 전반에 짙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탐미협에서도 4·3을 
비극으로 보는 관점이 커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극성을 넘어서 4·3을 다양한 관점에
서 보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특히 작년과 올해에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4·3미
술제의 주제를 모색했고, 2024년에는 《봄은 불꽃처럼》, 2025년에는 《타오른 바람, 이
어든 빛》이라는 제목으로 4·3미술제가 열렸다.

고길천 _ 60년만의 외출 프로타쥬, 139×1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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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규 _ 빈땅 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 60x40cm 30점 (2018~2021)

더 자세히 살펴보면 탐미협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이미 10년 전쯤 시작되었다. 공식적
으로 4·3의 진상이 규명되면서 탐미협은 새로운 역할 즉 4·3 정신의 확장과 다른 지역
과의 연대를 고민했다. 그래서 2014년 개최된 21회 4·3미술제부터 예술감독을 탐미협 
외부에서 찾아 선임했고, 탐미협 소속이 아닌 제주도 작가와 국내 여러 지역 작가가 본
격적으로 4·3미술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종길은 21회에 이어 22회 때도 4·3미술제 
예술감독을 맡아 대만과 일본 작가를 초대하면서 이때부터 4·3미술제에 해외 작가가 
참여하기 시작했다. 매해는 아니지만 해외 작가의 참여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4·3미술제에 국내외 여러 지역의 항쟁과 비극 등이 소개되었고, 4·3이 국내외 
예술가에게 알려졌으며, 서로 소통하고 아픔에 공감하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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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3미술제 포스터 ⓒ탐라미술인협회

제30회 4·3미술제 '기억의 파수' 전시장 전경 ⓒ탐라미술인협회

2019년과 2020년에는 다시 탐미협 내부에서 4·3미술제를 기획했다. 
4·3미술제의 규모가 커져 2021년에는 4·3미술제 준비위원회를 꾸렸
지만 역시 탐미협 회원 중심이었다. 그러나 2022년부터는 탐미협 외부 
인사를 포함한 4·3미술제 조직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구성해 조직위
원회가 4·3미술제를 주관하고 집행위원회가 전시를 기획했다. 이처럼 
탐미협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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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미술제 ‘청년사삼정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청년 작가들 ⓒ제주의소리

그들은

어떤 4·3 정신을 보여줄지,

어떻게 연대를 이루어 나갈지

기대하게 된다.

선배 세대의 탐미협이

4·3미술제의 지난 30년을

이끌었다면 다음 세대의

탐미협이 앞으로의 30년을

이어갈 것이다.

4·3의 미래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탐미협은 35세 이하의 
작가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 ‘청년사삼정감’을 기획했다. 이 프로젝
트는 2년 과정으로 작년에 시작해서 올해 끝났고 워크숍, 답사, 전국 
순례, 전시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청년 작가 7명이 참여했
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이 중에서 일부 청년 작가는 탐미협 회원
이 되었다. 선배 세대의 탐미협이 4·3미술제의 지난 30년을 이끌었다
면 다음 세대의 탐미협이 앞으로의 30년을 이어갈 것이다. 그들은 어
떤 4·3 정신을 보여줄지, 어떻게 연대를 이루어나갈지 기대하게 된다. 
분명히 4·3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줄 것이고, 공식화된 기억 뒤에 가려
졌으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4·3의 기억을 위해서도 계속 투쟁할 것이
다. 따라서 탐미협의 기억 투쟁사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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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정
표선고등학교 1학년 / 4·3 세계화 프로젝트 참여

기억은 우리의 삶 속 어디에나 있다. 언젠가 읽었던 책 
속 인물의 대사, 후회했던 지난날의 행동, 뿌듯했던 성
과 등 모든 것은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기억이 되는 ‘모든 것’의 범위는 어
디까지일까? 대부분 사람은 ‘기억=과거의 일이 머릿
속에 새겨지는 것’이라 인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나 역시 뇌에 각인된 형태만을 기억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기억
의 형태가 단순히 머리, 뇌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알
고 있을 것이다.

나는 4·3 세계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또 다른 기억
의 형태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다. 바로 몸의 
기억이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몸의 기억
은 뇌에 각인된 의식의 기억보다 더욱더 오래 남는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젓가락을 사용하고, 글을 쓸 때 
연필을 잡으며, 사랑하는 이와 포옹한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난다. 
나는 언제나 4·3을 의식의 기억으로만 새기고 있었다. 
나의 뇌 속에, 문자의 형태로 새겨 객관적인 정보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4·3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4·3을 묻거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일상 대부
분을 문자로 남겼지만 4·3에 대한 지식을 꾸준히 새기
지 못해 내 의식 속에 4·3이 자리 잡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4·3 세계화 프로젝트의 기억을 나
의 ‘손끝’에 담았다.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끄적거
린 노트, 자료를 찾기 위해 두드린 키보드, 작품을 제
작하는 과정에서 잡은 펜과 가위로 자르던 종이의 느
낌까지. 그때 느낀 모든 감각은 여전히 내 손끝을 머
무른다. 손끝을 도는 감각은 나의 마음으로 퍼져나가 

손 끝에 머문 4·3
문자에서 감각으로, 4·3을 기억하다

함께한 발걸음 우리의 목소리

4·3 활동 체험후기 모음

세대전승 4321

Be The 

Jeju 4.3

06

July,

2025

기 획

 

art

EXHIBITION

표선고등학교

      PYOSEON HIGH SHCOOL

ART PROJECT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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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피해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황폐해진 마을과 
4·3에 대한 정부의 침묵을 깨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울분을 전한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쌓인 4·3에 
대한 지식은 그 어떤 문자보다 선명한 감각이 되어 나
의 손끝에 담겼다.

<애기 동백꽃>의 노래를 부른 합창단 친구들은 ‘목소
리’에 이번 기억을 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노래를 위
한 회의, 각자의 음을 찾으려는 노력, 최종적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한 모든 순간 속에서 그들은 목소리
에 4·3을 담았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
식으로 4·3에 대한 기억을 만들었다. 손끝을 목소리를 
통해 창의성과 음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4·3이 들어찼
다. 이렇게 4·3에 대한 기억을 몸에 담는 과정에서, 몸
의 기억을 인지하고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지 깨달았다.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묻

는다면 열에 아홉은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라고 답할 것이다. 정말 ‘되풀이’를 막길 원한다면, 문
자화된 기억만으로는 안된다. 다시 같은 일을 겪고 싶
지 않다는 그 감정을 기억해야 한다.

4·3은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
아야 하는 그런 역사. 우리는 4·3을 정말 역사에만 남
아있는 사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분명 여전히 우리는 
4·3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제껏 
의식의  기억에  의존하여  문자화된  정보만을  익히려 
하였던 것과 달리, 우리는 작은 범위이지만 깊은 4·3
의 일부를 완전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은 기
억은 또 다른 미래로 이어져 다시 작은 범위의 기억을 
만들어줄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작은 기억들이 퍼즐
처럼 모이게 되면서, 마침내 우리는 4·3 전체를 완전
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표선고등학교 학생들의 ‘4·3 세계화 프로젝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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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이
표선고등학교 1학년
/ ‘크로코딜로스’와 합창공연 참가

하버드대학교 아카펠라 그룹 ‘크로코딜로스’와 함께
한 무대는 제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깊이 자
리 잡았습니다. 반주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만들어지는 아카펠라 공연의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감
동  속에서,  저  또한  한  사람의  목소리로  그  깊은  울
림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뜻깊고 감
사했습니다. 더욱이 이번 공연이 단순히 즐거움을 위
한 합창 무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 제주 
4·3의 깊은 아픔과 그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
였다는 점이 제게는 훨씬 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는 이름만 익숙하고 마음으로는 멀게만 느껴졌
던 4·3이었지만, <애기 동백꽃>이라는 노래를 처음 보
며 준비하고 함께 무대에 서는 모든 과정을 통해 4·3
의 아픈 이야기들과 그 속에 담긴 진실들이 마치 저의 
이야기처럼 하나하나 가깝게 와닿았습니다. 예술이라
는 매개를 통해 관객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4·3이라
는 역사의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이번 활동 중
에서, 저는 특히 ‘아카펠라’라는 가장 순수하고 본질
적인 형태의 음악이 역사와 감정을 전달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깊은 감동을 받
았습니다.

<애기 동백꽃>이라는 노래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 제
목에서 느껴지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백꽃의 이미지
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가사에 담긴 슬픔과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노래를 부
르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저는 ‘4·3을 겪으신 분들의 
무거운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노래로 진실되고 가
치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고민을 계속

하며, 우리의 무대가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표현 방식에 대해 연구했습니
다. 이번 공연에 참여하며 4·3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
해하고 알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알아가면 알아갈수
록 단순히 아픔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 역사를 ‘바르게 
전달하는 사람’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
었습니다. 악기 없이 오직 목소리만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해야 하는 아카펠라의 특성상, 숨결이나 
떨림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더욱 섬세한 감
정 표현과 중창단과의 화합이 필요했습니다. 크로코딜

하버드 대학교 아카펠라 그룹 크로코딜로스

‘크로코딜로스’와 공연하는 표선고등학교 합창단 학생들

목소리로 전한 기억

아카펠라로 만난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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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멤버들과 함께 연습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오직 음악으로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는 방식을 <애
기 동백꽃> 노래를 통해 경험하고 교류했습니다. 무
대를 마친 뒤, <애기 동백꽃>에 고스란히 담긴 4·3의 
슬픔과 소중한 기억이 단지 한 번의 공연으로 사라지
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영원히 닿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져, 이 노래를 앞으로
도 더욱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이 생겼습니다. 더불어 아직 학생 신분이지만, 예술을 
통해 4·3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그 
아픔과 의미를 ‘공감’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활동은 제게 예술이라는 통로를 통
해 4·3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보다 깊이 있게 마주할 
수 있었던 정말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애기 동백꽃>을 아카펠라로 노래하며 저는 목소리 하
나하나에 실린 감정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
고, 무대에서 제가 전달하려 했던 그 진심이 관객들에
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저
는 아직 세상을 다 알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리 많지 않은 어린 학생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 
경험을 해보니까, 자칫 잊혀질 수도 있는 제주4·3이
라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이야기를 다시 많은 사람들

한테 생생하게 알리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것이 얼마
나 중요한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날의 
아픈 역사가 그냥 ‘제주도’나 ‘우리나라’만의 이야기
가 아니라, ‘인권’과 ‘평화’에 대한 문제로서, 국제사회
에 적극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이야기라는 중요한 인
식을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깊은 깨달음과 책임
감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저는 의미 있는 활동들에 더
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비록 작은 실천일지라도 4·3
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널리 알려 함께 나누는 데 기
여하고 싶습니다.

표선고등학교 합창단

하버드 대학교 아카펠라 그룹 ‘크로코딜로스’ 초청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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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실리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미국 학생 로리입니다. 
계엄령 선포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직접 목격했으
며, 팔레스타인 학생연대 회원으로서 이번 2025 제주 
4·3 평화캠프에 참가해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민
중 역사의 한 장면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제주도의 지리와 문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이 프로그
램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사건
이 실제로 일어났던 그 땅 위에서, 그리고 흔적이 거
의 사라져버린 현장에서 배우는 경험은 깊은 슬픔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남겼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나크바와의 평행선 ···
저는 제주도와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진행 중인 전쟁 

학살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유사성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지역은 강제 이주, 외세의 개입, 대량 
학살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1948년 말, 미국·영국·이스라엘에 의해 영국 위임통
치령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이 결정되고 집행되던 때, 
한반도 역시 미국·소련에 의해 둘로 갈라지고 있었습
니다. 팔레스타인인의 75%가 이스라엘 점령 세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있을 때, 제주도 
또한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혔고, 해안선에서 5km 이
상 중산간 지역의 사람은 모두 적으로 규정되어 사살
당했습니다.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아이들은 목숨을 잃고, 가문은 끊겼으며, 학교는 고문
소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학
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
지구에서만 5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제주 사람들 또
한 인구의 10%가 희생된 대학살의 트라우마를 여전
히 안고 살아갑니다. 제주도의 역사를 배워가며 이런 
기이할 정도의 평행선들이 계속해서 제 마음을 붙들
었습니다.

2025 국내외 대학생 4·3평화캠프 참가자

2025 국내외대학생

4·3평화캠프에 참여한

나의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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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슬픔의 공존
이번 캠프로 아름다움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주도의 아름다
운 풍경을 탐방하면서도 바다에 씻겨 내려가고 오름 속에 숨어 있는 상흔들을 
함께 배웠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참가자들이 함께하면서 문화와 역사를 교류할 수 있는 소중
한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때로는 젊은 학생들을 위한 즐거운 프로그램을 만들
면서 동시에 이 무거운 역사를 기리는 일이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바로 이 미묘한 균형이 학생들
에게 민주와 평화를 형성하게 하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팀 안에서 친밀해졌고, 그 과정에
서 제주의 무거운 역사를 배우며 각자의 역사까지 성
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캠프 이후, 서울로 돌아가 함께 걷던 친구에게 우리가 
배운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잠시 멈
춰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이제야 알았어. 한국
에도 학살이 있었구나.”

그 순간 저는 다시금 제주4·3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리
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2025 국내외 대학생 4·3평화캠프 참가자 위령제단 참배 

참가자들이 유적지에서 만난 4·3유족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다.

2025 국내외 대학생 4·3평화캠프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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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이제 세계의 기억으로’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봉헌식 개최

제주특별자치도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제주4·3기록물 인증서를 4·3

영령께 봉헌하며, 제주4·3이 세계가 인정한 평화와 인권의 역사임을 공식적으로 선

포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평화재단은 7월 18일 오후 4시,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제주4·3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봉헌식’을 주최·주관했고, 

오영훈 제주도지사, 이상봉 제주도의회의장, 김광수 제주도교육감을 비롯한 유족

과 도민 200여 명이 함께했다.

이날 행사는 유네스코 등재 인증서를 봉헌하며 4·3의 진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

음을 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어 등재 과정에 헌신한 하성용 제주도의회의원, 문

혜형 4·3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위원회 공동위원장, 유철인 제주대학교 명예교

수,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김창후 제주4·3연구소장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재단뉴스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봉헌식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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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FALL

오영훈 지사는 “제주4·3기록물의 세계기

록유산 등재는 인류의 양심이 제주인의 

숭고한 여정에 응답한 선언”이라며, “제

주4·3은 이제 세계의 기억이 되었고, 그 

상처와 극복의 과정은 인류 전체의 성찰

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같은 날 오후 7시 제주탑동해변공연장에

서는 ‘세계가 기억하는 제주4·3, 기억으

로 잇는 평화의 울림’을 주제로 등재 기념

식과 평화음악회가 열렸다. 기념식은 인

증서 전달식과 등재 세리머니에 이어, 평

화음악회로 마무리되며 4·3의 의미를 세

계와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됐다.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식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 파이낸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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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과 평화·인권에 대한 밝은 미래의 장’

제주4·3평화재단 주최·주관, 제주특별자치도교육

청 후원으로 열린 제8회 학생4·3문예대회가 지난 

6월 14일(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제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는 도내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문

학(시·산문)과 미술(사생화·상상화) 부문으로 나뉘

어 진행됐으며, ‘제주4·3과 평화·인권에 대한 밝은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창작활동의 장을 마련했다. 

이날 행사에는 도내 학생 총 102명(초등 30명, 중등 64명, 고등 8명)이 참가했으

며, 접수된 작품은 총 102건(문학 59건, 미술 43건)에 달했다. 심사위원단은 주제적

합성, 표현력, 창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문학부문 18명, 미술부문 16명을 수

상자로 선정했다.

대상은 산문 「동백꽃」을 출품한 오서현(저청중학교) 학생과 그림 「그렇게 동백꽃은 

자라고」를 그린 지예윤(귀일중학교) 학생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단은 문학부문에

서 “올해 작품들은 4·3을 겪은 가족의 이야기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에 두

고 쓴 작품들이 대체로 눈에 띄었고, 4·3전승세대인 학생들이 어떻게 4·3을 형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들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며 평했다. 미술부문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4·3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강렬하게 혹은 잔잔하게, 재치있게 다양한 

제8회 학생4·3문예대회

재단뉴스

제8회 학생4·3문예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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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FALL

방식으로 자유롭게 펼쳤다”고 평하는 한편, “참가 학생

들의 작품은 단순한 미술표현을 넘어, 그 안에 깃든 고민

과 마음과 진심이 담겨있었다”며 참가학생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시상 내역은 대상(문학·미술 각 1명) 제주특별자치도교

육감상과 상금 50만원, 최우수상(초·중 급별 각 1명) 상

금 30만원, 우수상(초·중·고 급별 각 2명) 상금 20만원, 

장려상(초·중·고 급별 각 1~3명) 상금 10만원, 지도교사

상(문학·미술 각 1명) 40만원이다. 수상작품은 작품집으

로 발간되어 배포할 예정이다. 

김종민 이사장은 “이번 대회는 학생들이 예술적 상상력

을 통해 4·3을 기억하고 평화의 가치를 체득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며 “앞으로도 청소년들이 4·3을 올바르

게 이해하고 세계시민적 시각에서 평화를 고민할 수 있

도록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 문학부문 수상자 명단

● 미술부문 수상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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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학생4·3문예대회 미술부문 수상작 화보

김혜인 (김녕중) 최우수상

지예윤 (귀일중) 대상

현유준 (아라초) 최우수상

재단뉴스

● 문학부문 수상작은 작품집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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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FALL

강리원 (제주중앙여중) 장려상

최진 (아라중) 우수상

한윤주 (제주동여중) 우수상

강시완 (삼성초) 우수상

김채은 (저청중) 장려상

이예준 (월랑초) 장려상

이재욱 (제주중앙고) 우수상

이하담 (표선중) 장려상

이오설아 (사대부고) 장려상

최선 (영평초) 우수상

현새록 (이도초) 장려상

홍예서 (도순초)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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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은 8월 21일 오전 제주4·3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2025년 4·3장학생으로 선발된 4·3희생

자·유족 자녀들에게 총 2천6백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

다. 올해 장학생은 대학생 10명, 고등학생 12명 등 총 22

명이며, 대학생에게는 1인당 200만 원, 고등학생에게는 

50만 원이 지급됐다.

수여식에는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덕산 박창

욱 전 4·3중앙위원, 김종민 이사장이 참석해 장학생들을 

격려했다. 지난 2016년 1억원을 기탁해 ‘덕산(德山) 박창

욱 장학금’을 조성한 박창욱 전 중앙위원이 김혜인(부산

외국어대학교) 학생에게, 김종민 이사장이 그 외 장학생

들을 대표해 김한결(제주고등학교) 학생에게 장학증서

를 전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2015년부터 학업에 성실히 임하는 

4·3희생자·유족 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장학사업을 펼

쳐왔다. 장학생은 4·3장학사업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

발되며, 지금까지 고등학생 101명, 대학생 126명 등 총 

227명이 장학금을 받았다.

김종민 이사장은 “앞으로도 장학사업을 지속적으로 확

대해 4·3희생자와 유족 후손들의 성장을 지원하고 세대 

간 기억 전승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4·3희생자‧ 유족 자‧녀 장학금 2천6백만 원 전달

재단뉴스

대학생 10명, 고등학생 12명 등 총 22명 선발

제11회 제주4·3장학금 수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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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FALL

초등학교 3~5학년 학생 대상
4·3독서교실 운영

4·3과 평화·인권의 가치를 책을 통해 배우다

4·3독서교실

제주4·3평화재단은 여름방학을 맞아 ‘제주가 들려주는 

이야기’, ‘싸움은 그만’, ‘평화를 제안하다’를 주제로 어린

이 4·3독서교실을 운영했다. 초등학교 3~5학년을 대상

으로 7월 29일부터 8월 7일까지 주 3회, 총 6회에 걸쳐 

진행됐으며, 회차별 20명을 선착순 모집한 결과, 신청 

첫날 접수와 동시에 마감될 만큼 큰 관심을 모았다.

독서교실은 이경희, 정진영 독서토론 전문 강사의 진행

으로 매 회차마다 다른 도서를 활용해 운영됐다. 7월 29

일과 8월 5일에는 「다랑쉬굴 아이」(글 김미승, 그림 이소

영), 「기억공장」(글 안오일, 그림 신진호)을 함께 읽으며 

제주4·3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되새겼다. 이어 7월 30

일과 8월 6일에는 「왜?」(글 니콜라이 포포프) 도서를 통

해 전쟁과 폭력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며 평화의 필요

성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7월 31일과 8월 

7일에는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글 카트린 르블랑, 

그림 롤랑 가리그)이라는 도서로 토론을 펼치며 갈등 해

결의 지혜와 어린이들이 직접 제안하는 평화의 길을 모

색했다.

4·3독서교실은 4·3어린이체험관을 찾는 학생들이 4·3

과 평화·인권의 가치를 책을 통해 배우고, 4·3 역사의 올

바른 이해와 세대 전승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고자 지난 2023년 처음 개설됐다. 독서교실에 3년째 꾸

준히 참여하고 있는 한 학생은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고 

싶다”고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사진도 직접 

찍어 문자로 보내주시고, 활용할 수 있는 교재도 많아 정

말 유익했다”는 소감을 전했다.

4・3

독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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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뉴스

2025년 4·3 심화과정 운영

한국현대사와 제주4·3, 국제관계

2025년 4·3심화과정 수료자

제주4·3평화재단은 4·3연구자를 양성하고 전문성을 강

화하기 위해 ‘4·3 심화과정’을 운영했다. 이번 과정은 ‘한

국현대사와 제주4·3, 국제관계’를 주제로 지난 7월 28일

부터 8월 26일까지 매주 월·화요일, 제주4·3평화기념관 

3층 세미나실에서 총 10강좌로 진행됐다. 

‘4·3 심화과정’에는 한국 현대사와 국제관계 분야의 국

내 대표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7월 28일과 29일에

는 정용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가 동시대사, 과거

사, 현대사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어 8월 4일과 5

일에는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가 남북협

상과 1950년대 통일론을 주제로 강연했다. 8월 11일과 

12일에는 정병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김구와 

이승만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을 다루었으며, 8월 

18일과 19일에는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한미관계와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강의를 이어갔다. 마

지막으로 8월 25일과 26일에는 서민교 동국대학교 대

외교류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

쟁과 제노사이드, 조선인 일본군, 제주도 결7호 작전을 

중심으로 강의를 진행하며 과정을 마쳤다. 심화과정 수

강생들은 연구 주제와 방향을 함께 모색하며 4·3 연구의 

세대전승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제주4·3평화재단은 4·3 연구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연

구자들에게 4·3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공유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제주4·3 및 과거사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대학원생과 연구자를 대상으로 7월 21

일까지 수강 신청을 받아 총 16명을 선발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이번 심화과정을 통해 젊은 연구자

들이 한국현대사와 제주4·3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국제

적 관점에서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

었다”며, “앞으로 학술회의 개최와 연구서 출간 등 다양

한 연구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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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FALL

국제정치학회(IPSA) 제주 워크숍 개최

“민주주의 후퇴 시대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재창조”

세계  최대  규모의  정치학  학술행사인  ‘국제정치학회

(IPSA) 2025 서울 세계대회’의 후속 행사로 지난 7월 17

일, 제주한라대학교 컨벤션홀에서 특별한 국제 워크숍

이 열렸다. 이번 워크숍은 ‘민주주의 후퇴 시대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재창조’를 주제로 한국정치학회(KPSA), 제

주4·3평화재단, IPSA 서울총회 지역조직위원회(LOC)가 

공동 주최하고 국제정치학회(IPSA) 및 노무현재단이 후

원했다.

서울총회에서는 ‘K-민주주의’와 위기 극복의 한국 모델

이 세계 정치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이재명 대통

령의 특별연설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열린 제주 워크숍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회복의 상징

인 제주4·3을 중심에 두고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세

계와 공유하며 한국의 과거사 해결 모델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행사 1부 ‘평화와 민주주의’

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뤄졌고, 2부 특별세션에서는 

‘제주4·3과 평화’를 주제로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과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토론에는 

강창일 전 국회의원의 사회로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양성주 제주4·3희생자유족회 부회장, 김동만 제

주한라대학교 교수가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었다.

특히 4·3의 화해와 상생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2부에서

는 폐허 위에서 공동체를 복원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에 

대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받을 만하다.”는 평가가

세계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기도 했다.

이번 제주 워크숍은 제주4·3의 역사적 진실과 평화 정신

을 되새기며 한국 민주주의를 성찰하고 그 가치를 세계

와 나누는 자리였다. 또한 지속 가능한 정의와 민주주의

의 미래를 모색하고 국제적 공감과 연대의 기반을 확인

하는 뜻깊은 계기가 됐다.

국제정치학회 (IPSA) 제주 워크숍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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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회장 강능옥)가 창립 16주년

을 맞아 7월 6일 아스타호텔에서 ‘제주4·3여성유족 100

인이 

ᄀᆞᆯ암수다’ 포럼을 열었다. 수십 년간 가슴 속에 묻

어둔 아픔을 여성 유족 스스로 드러내며, 기억과 연대를 

통한 치유와 회복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강경숙 전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위원은 ‘빼앗긴 배움

과 다시 시작된 교육’을 통해 4·3 이후 여성들이 학업의 

기회를 잃은 상처와 그것을 다시 공동체적 배움으로 회

복해 온 과정을 짚었다. 이어 고완순 전 북촌4·3희생자

유족회장은 ‘불타버린 마을, 빼앗긴 배움’이라는 발표에

서 가족과 마을을 잃고 학업마저 중단해야 했던 어린 시

절을 증언하며 큰 울림을 주었다.

뒤이어 열린 ‘

ᄀᆞᆯ암수다 마당’에서는 여성 유족 100여 명

이 참여해 교육 단절과 침묵의 세월을 돌아보고, 후손들

에게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

지 않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강능옥 회장은 “여성 유족들은 늘 뒤편에 머물러 있었지

만, 이제는 말하고 기록할 때”라며, “이 목소리들이 평화

와 존엄의 가치를 전하는 유산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

다. 이번 포럼은 단순한 토론의 장을 넘어, 오랫동안 침

묵 속에 갇혀 있던 여성 유족들의 목소리가 공적 기억으

로 자리 잡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평화우체통

‘제주4·3여성유족 100인이

 ᄀᆞᆯ암수다’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 창립 16주년 기념포럼

제주4·3희생자유족부녀회 창립16주년 기념포럼 '제주4·3여성유족 100인이 

ᄀᆞᆯ암수다'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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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와 인권연대의 출발점 되길

제4회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포럼

제주4·3의 평화정신이 유럽의 심장부 로마에서 다시 울

려 퍼졌다. 지난 6월 25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 빌

라 알티에리 박물관에서 열린 제4회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포럼은 ‘평화를 위한 연대–평화운동의 현황

과 과제’를 주제로, 과거의 상처를 넘어 세계 평화와 인

권의 길을 모색하는 국제 연대의 장으로 마련됐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제주4·3평화레퀴엠추진위원회, 제

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국제네트워크가 공동주

최하고,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로마시가 공동 주관

한 이번 포럼에는 오영훈 제주도지사, 이상봉 제주도의

회 의장,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문창우 천주교 

제주교구장 주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기조강연에

서 크리스티안 무스레흐너 다흐슈타인 유럽포럼 조직위

원장은 유럽의 평화 과제를 소개하며 국제 연대의 중요

성을 강조했고,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각국 전문가들이 

과거사 진실규명과 화해·평화의 방안을 논의했다. 포럼 

중간 무대에 선 제주 유스코러스의 공연은 제주의 문화

와 미래세대의 평화 메시지를 세계에 전했다.

이번 국제포럼은 제주4·3이 지역의 기억을 넘어, 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할 보편적 평화와 인권의 가치임을 확인

하는 자리였다. 전날인 24일에는 로마에서 제주4·3 평

화레퀴엠이 열려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제4회 진실과 정의를 위한 제주4·3국제포럼 (이탈리아 로마 빌라 말티에리 박물관,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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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영문 소식지 『진실화해』 제18호(여름호)를 

발간했다. 이번 호는 진실규명 신청인과 한국전쟁 유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의 길을 잇는 매개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원회

는 출범 5년 차를 맞아 소식지를 매거진 형식으로 개편해, 글 분량을 줄이고 이미지 

비중을 늘려 가독성과 전달력을 높였다.

이번 호에는 제103차부터 제110차 위원회에서 이뤄진 주요 결정과 함께, ‘조사기간 

만료 기자간담회’, ‘직권조사 결정-납북어부 인권침해 사건’, ‘직권조사 결정-종교

인 희생 사건’, ‘살아남은 기억들: 흙무덤 아래 드러난 학살의 구덩이’, ‘진실규명 기

여자 보상지원제도’ 등 다양한 기사가 실렸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삶과 남겨진 

증언을 기록하며, 과거사의 진실을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평화우체통

국·영문 소식지 「진실화해」 18호 발간 및 
피해자‧ 가족관계등록부 신청 안내 홍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국문 소식지 「진실화해」 18호 표지

국문 소식지 「진실화해」 18호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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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는 위원회 누리집(www.jinsil.go.kr)에서 전자파일과 e북으로 볼 수 있으며,

영문판은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과거사정리 경험을 알리기 위해 영문 누리집

(www.jinsil.go.kr/en)을 통해 공개됐다.

피해자 가족관계등록부 작성·정정 신청 안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피해자로 진실규명된 분들의 

가족관계등록부 작성 및 정정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신청대상

신청범위

제출서류

신청방법

피해자 본인, 배우자, 4촌 이내 인척, 8촌 이내 혈족

피해자 본인의 가족관계등록부, 사망 기록 정정만 가능

가족관계증명서, 피해자 제적등본(또는 사유서), 진실규명결정통지서 사본

신청 → 심의·의결(90일 이내) → 결정통지서 발급 → 거주지 시·읍·면에 제출

방문 또는 우편 접수 (공휴일 제외, 상시 접수)

02-3393-9700

영문 소식지 

<Truth & Reconciliation> 18호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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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마지막 한 분까지 이름을 되찾아 드려야”

제24회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 봉행

제24회 제주4·3 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가 7월 19일, 제주

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위령제단에서 봉행됐다. 이

번 진혼제는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의 성과를 딛고, 여전히 이름없이 사라진 희생자들을 끝까

지 찾아내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행사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주최, 제주4·3행방불명인유

족협의회(회장 양성홍) 주관으로 열렸으며, 오영훈 제주특

별자치도지사, 이상봉 제주도의회 의장, 김광수 도교육감, 

김종민 4·3평화재단 이사장,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양성홍 회장은 “신원 확인 없는 일괄 화장은 결코 있어서

는 안 된다.”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을 정부에 촉구했다. 

현재 평화공원에는 행방불명인 표석 4,119기가 세워져 있

으며, 위패봉안실에는 1만 4,989위의 희생자 위패와 이름

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위한 무명신위 위패가 함께 봉안

돼 있다.

이번 진혼제는 단순한 추모 의례를 넘어, “마지막 한 분까

지 이름을 되찾겠다.”는 다짐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제24회 제주4·3 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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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특별자치도 재향경우회(회

장 정영남)가 화해·상생 선언 12주년을 맞아 합동 참배

를 진행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두 단체는 지난 8월 2일 오전 국립제주호국원과 제주

4·3평화공원을 잇달아 방문해 헌화와 분향을 하며 4·3

희생자와 전몰군경을 추모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상봉 

제주도의회 의장,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진명기 제주도 

행정부지사,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등 주요 인

사와 4·3유족, 경우회 회원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재향경우회는 2013년 8월 2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조건 없는 화해와 상생을 선언한 

뒤, 매년 합동 참배와 순례를 이어왔다. 특히 현충일에는 

유족회 임원들이 국립호국원에서 참배하고, 4·3 희생자 

추념식에는 경우회 임원들이 참석해 상호 추모의 뜻을 

이어가는 전통을 만들어왔다.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 당시 경찰관 

122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으며, 군인 18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역사적 아픔 속에서 

갈등을 넘어선 두 단체의 화합은 제주 사회의 치유와 평

화를 상징하는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화해와 상생 선언 12주년, 치유와 평화의 길로

제주4·3희생자유족회-재향경우회 합동 참배

화해와 상생 제12주년 기념 합동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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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소식 소개

2025 신화월드 4·3 워크 & 런

일자 2025년 10월 4일 ~ 6일

장소 제주신화월드 인근 4·3 유적지

집결장소 신화스퀘어

집결시간 오후 2시 30분

참가비용 30,000원

• 사전예약 기간: 9월 1일 ~ 20일

• 사전예약 시 1인 20% & 가족 3인 이상 30% 할인

대상 만 5세 이상 자녀 동반 가족 및 성인

기념품 업사이클링 스포츠백, 러닝 케어 및 간식 키트, 

4·3 동백 뱃지, 플로깅 키트

신청방법 QR코드로 예약해주세요

행사

공연

문화 예술 소식 

창작뮤지컬 「 고래의 아이 」

일시 2025년 10월 25일 오후 2시 / 7시

장소 제주문예회관 대극장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

예매일시 2025년 10월 1일 오후 2시 

•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 홈페이지 무료예매

프로그램 개요

‘고래의 아이’는 제주의 아픔인 4·3과 제주 대표신인 영등신, 

제주의 고래를 모티브로, 치유의 메시지를 담아 남녀노소 누구

나 관람할 수 있는 가족극 형태의 뮤지컬입니다. 

예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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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과 의료인들

제주4·3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의료인들이 겪은 고뇌, 

선택, 그리고 희생에 주목한 책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친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의료계가 어떻게 형성되

고 기능했는지를 살펴보며, 특히 4·3 항쟁 당시 의사, 간호사, 약

제사, 산파사 등 의료인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백재중 지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

14,400원

독립운동으로 보는 근대인의 초상

이 책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획된 전기로, 저자가 그동안 연구

해 온 성과를 집성해 누구나 읽기 쉽게 풀어낸 대중적 독서물이

다. 의열단의 투쟁, 무장독립운동, 광복군 활동, 진보적 민족혁명

운동 등 치열한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들과 그와 얽힌 수많은 

인물들의 행적을 학술적 근거에 기반해 엄정하게 서술하며, 과장

이나 억측을 배제했다.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사실대로 밝힘으로

써 역사적 성찰과 공유라는 역사의 본질적 효용을 일깨운다.

김영범 지음

경인문화사 

36,000원

새로 나온 책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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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국민의힘 김용태 국회의원

07.29. 더불어민주당 황명선 최고위원 

07.21. 국민의힘 고기철 신임도당위원장 등 20명

07.29. 제주지방검찰청 정수진 검사장

07.02. 국립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 오수경 센터장 및 직원

06.05. 4·3영화 〈내 이름은〉 주연배우 유준상, 오지호, 오윤아
           및 영화 관계자 참배

주요참배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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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제주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전시 해설

오전(총5회)

오후(총6회)

09:00(예약가능)

13:00(예약가능)

09:30

13:30

10:00(예약가능)

14:00(예약가능)

10:30

14:30

11:00(예약가능)

15:00(예약가능)

15:30

•해설시간 1시간(1회 40명까지 예약가능)

•문의 064-723-4344

4·3유족·희생자 진료비 지원사업

4·3 역사 왜곡 신고센터

•4·3 유족 진료비 지원대상

    <제주4·3특별법>에  따라  결정된  희생자  유족  중 

1954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

•4·3 희생자 며느리 진료비 지원대상

    <제주4·3특별법>에 따라 희생자의 며느리(子婦) 중 

1954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

•지원내용

   외래진료 시 건강 보험분의 본인 부담액 일부 지원

•문의 064-723-4302

•신고대상

제주4·3 역사 왜곡, 폄하, 훼손 사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 결과와 다른 

허위 사실 등을 유포하는 4·3역사왜곡 행위

•신고방법

①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https://jeju43peace.or.kr/) 접속

② 알림/소식 > 4·3 역사 왜곡 신고센터 클릭

③ 온라인 신고 글 작성

4·3생존희생자 의료비 등 지원사업

•지원대상

   <제주4·3특별법>에 의해 결정된 4·3생존희생자

•지원내용

   -  의료비(진료비, 입원비 및 약제비): 건강보험적용분

의 본인부담금 전액 지원

   - 비급여 검사비: 연30만원 이내 지원

   - 건강검진비: 연40만원 이내 지원

   - 장제비: 생존희생자가 사망할 경우 300만원 지원

•문의 064-723-4302

•상시체험 프로그램

회차

시간

1회차

9:00

2회차

10:30

3회차

13:30

4회차

15:30

•운영시간  

    - 주중(월~금) 09:00~18 :00

       (입장마감 17:00, 공휴일 휴관)

•이용대상

    - 6세~11세(유치원~초등학교 4학년 이하)

•문의 064-723-4327, 4328

4·3어린이체험관 이용안내

4·3평화재단 주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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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코너

박경애 010 - #### - 3000

박형규 010 - #### - 1050

김철호 010 - #### - 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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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답 : 세계기록유산

정답자

퀴즈 참여 방법

제주4·3, 여수·순천 10·19, 광주 5·18 민주화운동 등과 같이

국가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상흔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힌트
‘논단 - 제주 4·3 집단 트라우마에 들어 있는 오래된 미래’ 참조

2025년 4월 11일, 유네스코 제221차 집행이사회는

‘진실을 밝히다: 제주4·3기록물’의                                     등재를

최종 승인했다.

Q

퀴즈에 참여해 주신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소정의 선물을 드려요.

A

여름호 독자퀴즈 정답자

독자퀴즈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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