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제주남원 의귀마을

제주남원 의귀마을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초순, 의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한 순간에 삶터를 잃어 인근 오름과 숲, 궤 등에 숨어 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잡혀 희생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4·3행방불명인으로 남아 있다. 4·3사건으로 인한 의귀마을 희생자는 250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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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남원 의귀마을 [지도]
  • 의귀초등학교 [사진]
    의귀초등학교

    의귀초등학교는 1941년 남원공립국민학교 병설 의귀간이학교로 개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는 의귀리·수망리·한남리·신흥리 4개 마을의 어린이들이 함께 다녔던 학구공동체였다. 학교는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2월 15일 폐교되었고 그 직후인 12월 26일부터 육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하였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가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군인 4명과 무장대 51명이 사망하였다. 이 습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여명의 주민들을 학교 동녘 밭에서 학살해버렸다. 이 때 희생자들은 현재 “현의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학교는 4·3사건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49년 8월 1일 남원초등학교 의귀분교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4·3사건으로 인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학생들은 2003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옛터 [사진]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옛터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명이 집단학살당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을 옮겨 3개의 구덩이에 매장(埋藏)한 곳이다. 2003년 9월 16일 세 구덩이의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수습이 힘들 정도로 엉클어져 있어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서쪽 구덩이 17구, 가운데 구덩이 8구, 동쪽 구덩이 14구 등 총 39구의 유해와 50여 점의 유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발굴 직후인 9월 20일 수망리 ‘신산䅲¯루’ 지경에 새 묘역을 마련하고 비로소 ‘안장(安葬)’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유해도 다수 있어 ‘흙 한줌’으로 대신하였다. 2010년 5월 19일 ‘현의합장 영령유허비’를 세워 억울한 희생자들이 묻혀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사진]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명이 집단학살 당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이 ‘현의합장묘 옛터’에 매장(埋藏)되었다가 2003년 9월 20일 마지막으로 안장(安葬)된 곳이다. 유족들은 1964년 ‘삼묘동친회’를 조직하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봉행했다. 1983년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를 담아 ‘현의합장묘’ 묘비를 세웠으며, 유족회의 명칭도 ‘현의합장묘 4·3유족회’로 변경하였다. 2003년 이후 해마다 음력 8월 24일에 이곳에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 동녘 밭 [사진]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 동녘 밭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1949년 1월 10일과 12일, 주민 80여 명이 집단 학살당한 곳이다. 당시 시신 수습도 허용되지 않아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인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훗날 현의합장묘 옛터에 매장 되었다.

  • 장판거리 [사진]
    장판거리

    장판거리는 일제 강점기 서중면 행정의 중심지로써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오일장이 서던 곳이다. 1926년 면사무소가 남원리로 옮겨가면서 오일장은 쇠퇴했으나, 이곳은 과거 의귀마을의 번성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거리로 남아있다.

  • 송령이 골 [사진]
    송령이 골

    이곳은 4·3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는 의귀초등학교 주둔부대를 공격했으나 2시간여의 전투에서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때 사망한 무장대 시신은 초등학교 뒤편에 흙만 대충 덮인 채로 방치되었다가 그해 봄 토벌대의 지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매장(埋藏)되었다. 일부 시신은 가족이 찾아간 경우도 있으나 다수의 시신은 세 개의 구덩이에 매장(埋藏)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4·3연구소’, ‘현의합장묘 4·3유족회’등이 ‘생명의 존엄’과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담아 천도제를 지냈고 그 후 시민사회단체 등이 매년 8월 15일에 벌초를 하고 있다.

  • 민오름 공동목장 [사진]
    민오름 공동목장

    이곳 민오름 주변은 의귀마을 공동목장으로, 4·3사건 당시 토벌대가 무장대 토벌을 목적으로 “영궤䅲¯루주둔소”를 설치하여 전방 초소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또한 소와 말을 치던 테우리들과 4·3사건 당시 토벌대가 이용했던 “이멩이 물”이 아직도 솟아나고 있고, 현재는 근처에 “옷귀마(馬)테마타운”이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 쉼터(의귀천) [사진]
    쉼터(의귀천)

    의귀천은 서중천에 비해 경사가 높아 크고 작은 소(沼)와 궤가 많다. 궤는 4·3사건 당시 주민들이 피신처로 이용하였다. ‘소’를 중심으로 활엽수림 지대가 잘 발달해 다양한 동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의귀천은 곳곳에 물이 많아 사람이 먹는 물, 소와 말이 먹는 물, 농사에 사용하는 물 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등 오래 전부터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민오름주둔소(영궤마루주둔소) [사진]
    민오름주둔소(영궤마루주둔소)

    민오름주둔소는 1952년 100전투경찰사령부 1개 소대가 주둔하여, 남아 있는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곳이다.

  • 영궤 [사진]
    영궤

    4·3사건 당시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을 피해 의귀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던 곳이다. 궤 입구가 넓어 토벌대에 발각되기 쉬웠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당시 주민의 증언이 있다. 영궤는 오랫동안 피신처로 이용되지 못했지만 임시로 비를 피하고 추위를 막기에는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