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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역사문화아카데미

(  4·3역사문화아카데미교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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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명  | 

3

2011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프로그램 일정표

구분

일    시

주            제

강            사

1강

4.  9.  14:00

개강식 
4·3의  진실을  찾아서

양조훈  (전 환경부지사 )

2강

4.16.  14:00

구술생애사를  통한  4·3

함한희  (전북대 교수)

3강

4.  23.  14:00

제주4·3과  미국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

4강

4.  30.  14:00

나의  삶,  나의  문학(  평화정신을바탕으로)

김명식  (시인) 

5강

5.    7.  14:00

4·3진상규명의  과정에서의  영상의  역할

김동만  (제주한라대 교수)

6강

5.  14.  10:00

현장답사(동부)

장윤식  (제주4·3평화재단)

7강

5.  21.  14:00

4·3진실규명의  최근  동향

김종민  (4·3위원회 전문위원)

8강

5.  28.  10:00

현장  답사  (서부)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9강

6.    4.  14:00

재일제주인은  누구인가?

김기삼  (사진작가)

10강

6.  11.  14:00

제주의  민란과  항일운동

박찬식  (역사학 박사)

11강

6.  18.  14:00

4·3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

김영범  (대구대 교수)

12강

6.  25.  10:00

현장  답사  (제주시)

김창후  (제주4·3연구소장)

13강

7.    2.  14:00-

제주4·3과  레드콤플렉스

양정심  (성균관대 교수)

14강

7.    9.  14:00

4·3유족이  전하는  생생한  증언 
제주4·3평화기념관체험

체험자,  유족  2-3명
고범석  (4·3사업소 학예연구사)

15강

8.  27.  14:00

현대한국,냉전,  분단과4·3  :  21세기에의  의미 박명림  (연세대 교수)

16강

9.    3.  10:00-

순이삼촌과  함께하는  현장  답사

현기영 (소설가)

17강

9.  10.  14:00

과거사  정리와  4·3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8강

9.  17.  14:00

노래로  만나는  4·3이야기

최상돈  (가수)

19강

9.  24.  10:00

현장답사  (남부)

오승국  (제주·3평화재단)

20강

10.  1.  14:00

4·3의  평화지향적  해결을  위한  과제
수료식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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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5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목  차

제주4·3의  진실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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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전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  양조훈)

구술생애사를  통한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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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전북대학교  인류학과  함한희)

제주4·3과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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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한겨레신문기자  허호준)

나의  삶  나의문학(평화정신을  바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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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평화시인  김명식)

4·3진상규명  과정에서  영상의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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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김동만)

4·3유적지  답사(동부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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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제주4·3평화재단  장윤식)

4·3유적지  답사(서부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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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김은희)

재일제주인은  누구인가?(달  보멍  하영  울었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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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사진작가  김기삼)

제주의  민란과  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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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제주4·3평화재단  이사    박찬식)

4·3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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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대구대학교  교수  김영범)

4·3유적지  답사(제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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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제주4·3연구소장  김창후)

제주4·3과  레드콤플렉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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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

(성균관대  연구교수  양정심)

제주4·3평화기념관  체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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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

(제주특별자치도4·3사업소  학예연구사  고범석)

현대한국,  냉전,  분단과  제주  4·3  :  21세기에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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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

(연세대학교  교수  박명림)

현장답사  (북촌문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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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

(소설가  현기영)

한국현대사와  과거청산의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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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

(성공회대학교  교수  한홍구)

남부지역  현장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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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

(제주4·3평화재단  오승국)

제주4·3의  평화지향적  해결을  위한  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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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성균관대  교수  서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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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 

7

   

                                       

Ⅰ.  금기시된  역사의  복원

    제주4·3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까이  논의가  제한되었다.1)  과거 

군사정권은  이  사건을‘공산폭동’으로  규정하였다.  1980년대  말까지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는“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발생한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이  규정  하

나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누구도  그  실상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인양  보이지 

않은  울타리가  쳐있었다. 

    따라서  4·3  관련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

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반세기동안  불명예와  사회적  편견,  더  나아가  연좌제에  의한  불

이익에  시달려왔다.  이  지독한‘레드  콤플렉스’는  한때  4·3  체험자들의  증언  기피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세월  속에서도  뜻있는  예술인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형상화하였

고,  지역언론,  연구소,  시민단체  등에  의한  진실규명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또한  뜻있

는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였다.

1)  1992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제주4·3을  20세기  세계  100대  사건의  하나로  선정,  특집  보도했다.  4·3을 

선정한  이유로  첫째  제주섬과  같은  좁은  공간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점,  둘째  이런  중대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을  꼽았다. 

[

]

제주4·3의  진실을  찾아서

양조훈(前제주특별자치도환경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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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

었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추진되었다.  2년여  동안의  조사와  정부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  법정보고

서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새로이  규정하기에  이르렀다.‘폭동’으로  규정했던  제주4·3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공식적

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조사  결과를  토대로  드디어  국가원수가  공식  사과2)하는  상황까지로  변전되었다.  우

리  현대사에는  4·3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많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그  결

과에  따라  국가원수가  사과한  일은  제주4·3이  처음이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로  국가원수의  사과까지  받게  되자,  4·3문제를  풀기  위한  새로운 

해법이  모색되었다.  그것은  보복이나  새로운  갈등이  아닌,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이  비극

의  역사를  평화와  인권의  역사로  승화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2005년  제주도는

‘세계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받기에  이르렀고,  2008년에는  제주4·3평화재단을  출범시키

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제주도민과  4·3유족들은  참혹했던  역사를  딛고,  평화와  상생의 

화해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감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

다.3)

    이  발표문은  제주4·3의  진실은  무엇이고,  금기의  벽을  어떻게  뚫고  오늘날  평화·통일·인

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피는  한편,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고찰해보고자  한다.4)

 

2)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31일  제주를  방문,  4·3사건으로  빚어진  민간인  희생에  대해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주도민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였다.

3)  미  보스턴  웬트워스  공과대학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최근  “4·3은  좌파의  반란이라기보다는  미국

의  전략적  이익에서  비롯되었고,  그  점이  4·3배후의  핵심  동인(driver)이었다.  4·3에  대한  언론의  침묵
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고,  미국도  그  사건이  알려지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중략).  그러
나  이런  비극을  극복하고  일어선  제주도민의  강인함이  놀랐고,  더구나  세계평화의  섬으로  새롭게  거듭
나고  있는  도전이  놀랍다”고  피력하였다.  <제주위클리  2010년  4월  30일자  보도>   

4)  필자는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23년간  진실찾기  현장에서  몸으로  부닥쳤던  체험담을  회고하

는  「4·3  진실찾기-그  길을  다시  밟다」를  금년  1월부터  제민일보에  주  2회씩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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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 

9

  Ⅱ.  4·3의  발발배경과  대량학살  원인

    1.  발발배경

    사건의  배경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제주4·3을  연구,  197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미국학

자  존  메릴(John  Merrill)5)이    논문  결론에서  밝힌  “세계  어디에서도  제2차  대전  후  점령

군에  대하여  제주도와  같이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이  분출된  곳은  없었다”는  표현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제주도에는  귀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는  그  이전에  한반도 

전체에서  값싼  노동  인력을  뽑아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노동력시장’으로  제주도를  선택

했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를  개설했다.  태평양전쟁  기간에도  제

주의  젊은이들이  공장  노동자나  전쟁  노무자  등으로  일본과  전쟁터로  보내졌다.  그들이 

1945~1946년  사이에  귀환한  것인데,  그  숫자는  자그마치  6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변동률 

25%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

    귀향자들이  고향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건국  준비를  위한  자치활동과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는  교육  활동이었다.  자치활동은  건국준비위원회에  이은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표출됐

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  활동은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다.  당시  뜨거웠던  교육  열기로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제주도에  중등학교  10개소,  초등학교  44개소가  설립되

었다.  미군정이  47년  2월  시점에서  전국  각  도에서  뽑은  15개  군을  비교  대상으로  15세  이

상의  남자들에  대한  소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을  조사한  결과  북제주군이  35.7%로  교육  수

준  1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은  얼마  없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6만  명에  이르는 

귀환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  명의  사망,  대흉년과  미곡  정책의 

실패  등  악재가  겹쳤다.  특히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더욱이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의 

꿈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5)  그  후에  미  국무부  고위  관리가  된  존  메릴  박사는  필자와의  면담에서  “4·3의  성격을 제대로  보려면 

초기  상황과  중반  전개과정  등  시간대  분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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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  발포사건’이  터졌다.  제주읍내에서  3월  1일  자주  독

립  등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있었는데,  육지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이  발포,  민간인  6

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군정당국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시위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발표했다.  그

러나  6명의  사망자  신원이  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관람 

군중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했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경찰  발포에  항의,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

관(民官)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했다.  파업에는  도청·법원·검찰을  비롯한  도내  166개  관

공서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  도내  전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하는  등  직장인  95%  이상이  참여한  문

자  그대로의  ‘총파업’이었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짓고  외부  물리력을  끌어들여  무력으

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3월에만  본토에서  응원경찰  421명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대거  들

어왔다.  도지사가  극우파인  외지  사람으로  교체됐다.  본토에서  파견된  응원경찰과  서청  단

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미명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을  연행,  투옥,  고

문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다.  4·3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명이  구금되었다. 

유치장은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조천지서에서  중학생이  고

문으로  숨지는  등  경찰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뭔가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터질  것  같은  위기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1948년에  이르러  한반도는  통일국가로  가느냐,  분단국가로  가느냐는  문제를  놓고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제주사회는  분단을  반대하는  민족적  염원에  부응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이  무렵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위

기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입장에서  당면한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은  대중선동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수호  차원에서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 

1948년  4월  3일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

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해  5월  10일  전국적으로  실시된  제헌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중  2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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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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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인  과반수  미달의  보이콧으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는  남한지역  내의  유일한  5·10 

단선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단독선거를  추진해온  미군정에게는  그들

의  한반도정책을  거부한  제주도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유혈의  사태는  여기

서부터  태동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초토화작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은  남한에서  실시된  5·10  선거에서  제주에서만  유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

던  미군  사령관들이  분개해  했고,  그  이후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했다는 

미국  뉴욕타임스의  보도기사6)에서도  엿볼  수  있다. 

    2.  대량학살  원인

    제주4·3의  인명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명피해의  원인을  면밀히  분

석하면  무장대  측에도  책임이  있었지만,  군경  토벌대의  작전지시와  그  집행과정에  큰  문제

가  있었음이  진상조사  결과  드러났다. 

    토벌대는  1948년  10월부터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준비했다.  4·3  발발  이후  9월  말까

지  6개월  동안  인명피해는  1,00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이후  초토화작전이  전개되

면서  제주섬은  그야말로  ‘피로  물든  섬’이  되고  말았다.  인명피해를  다소  축소한  인상을 

주고  있는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1949년  3월  현재  사망자  숫자는  15,000명으로  추정된

다”고  밝혀  10월  이후  인명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토벌대는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중산간  지대를  ‘적지(敵地)’로  간주하라는  작전명령

에  따라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소실된  가옥만  4만여  동에  이르렀다.  남녀노

소  가리지  않고  주민을  학살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  해안마을에서는  가족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낙인찍어  그  부모  형제를  대신  처형하는  ‘대살(代殺)’을  저

질렀다. 

    국제법에서  금지된  초토화작전의  감행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  그  지휘체계와  실제  전개된  상황을  종합하면  책임  범위에  3가지  축이  있음이  밝혀졌

6)  뉴욕타임스는  4·3특별법  제정  이후  4·3사건에  대한  한국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본격적으로  착수된  직

후인  2001년  10월  24일자에  「남한  국민들  1948년  학살의  진실  찾아  나서다(South  Koreans  Seek 
Truth  About  '48  Massacre)」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뉴욕타임스는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실
시된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만  유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던  미국  사령관들이  분개해  했고,  그  이
후  미군정에  참여했던  남한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  선동가로  여겨지는  섬  주민들을‘청소하는  작전
(a  campaign  to  cleanse)'에  착수하였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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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다.  하나는  초토화작전을  집행한  연대장과  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이고,  다른  하나는  강경진

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또  다른  하나는  이를  부추긴  미군  수뇌부이다.

    첫째  군  지휘관의  책임문제이다.  초토화작전은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인  송요찬이 

“해안선에서  5km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내용의  포고

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이에  대해  “9연대는  중산간지대의  주

민들이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요찬  연대장은  포

고문에서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하여”  작전에  임한다는  입장을  밝혀  상부의  지시임을 

분명히  했다. 

    두  번째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책임문제이다.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은제주사태의  조

기  진압에  조급성을  보였다.  이승만은  극우  성향을  보여  온  서북청년회  단원의  제주  파견

을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대통령

과  국무위원들의  서명으로  발동된  계엄령은  계엄법이  제정(1949년  11월  24일)되기  1년  전

에  국무회의  의결만으로  선포된  것으로  밝혀져  ‘불법  계엄령’이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설사  계엄령이  합법이었다고  해도,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불법적인  즉

결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서  제주사건  등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직접  명령하였다.

    세  번째는  미군  수뇌부의  책임이다.  미군정은  4·3  초기  미군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

로  임명해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미군이  한국군  작전

통제권을  보유,  제주도  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다.  제주도  초토화작전에  주한미

군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역할은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버츠는  1948년 

10월  9일  제주도를  관할하던  광주  제5여단  고문관에게  제주도의  작전지휘계통을  수정조치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에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됐다.  그리고  초토화작전이  한창 

진행된  12월  18일  한국  국방장관  등에  “(제주도  사령관)  송요찬  연대장이  대단한  지휘력

을  발휘했다.  이런  사실이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  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이에  채병덕  참모총장은  12월  21일  “대통령  성명을  발표하도록  추

천할  것이며,  송요찬에게  적절한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화답했다.  이같은  비밀문서  등을 

통해  초토화작전이  미군  수뇌부와  무관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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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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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정부의  진상조사와  후속조치

    1.  정부의  진상조사 

    제주4·3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누구도  그  실상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으로  봉쇄되었다.  1978년  4·3을 

소재로  단편소설  󰡔순이삼촌󰡕을  쓴  작가(현기영)는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무려  40년  가까이  금기시되어온  제주4·3에  대한  재조명의  물꼬를  튼  것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였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신문  4·3취재반의  󰡔4·3의  증언󰡕 

연재(1990년부터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로  이어짐)와  그해  5월  제주4·3연구소의  출범

은  진상규명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제주  도내와  서울,  일본  등지의  4·3단체의  결성과  활

발한  활동,  그리고  1993년  제주도의회  4·3특위의  발족으로  4·3진상규명운동은  더욱  확산되

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세기를  보름  남겨둔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

로  ‘제주4·3특별법’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얻어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월  12월 

‘제주4·3특별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  특별법에  의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3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고,  그  산하에  진상조사의  실질적  기구로  기획단이  발족되면서  정

부  차원의  진상규명작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진상조사팀은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외국과  국방부,  육군본부,  경찰청,  정부기록보존소

(현  국가기록원)  등  국내기관을  대상으로  활발한  조사활동을  벌였다.  사건  관련자  503명을 

대상으로  증언도  채록했다.  기획단에서  2년여의  조사를  거쳐  작성한  진상조사보고서  내용

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03년  10월  15일  최종  확정되었다.7)

    진상조사보고서8)는  4·3  희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하고,  진압과정에서  국가

7)  보고서  심의를  위해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모두  8차례  회의를  직접  주재하였고,  보고서  결론  부분을 

한  자  한  자  읽어가며,  축조심의를  하기도  하였다.  정부  보고서  중  이처럼  밀도있는  심의와  신중에  신
중을  기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8)  진상조사보고서(536쪽)에서는‘4·3사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
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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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는  등  중대한  인권유린과  과오가  있었음을  지적

했다.  특히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15,100명)  가운데  86%가  토벌대에  의해,  14%가  무장대

에  의해  희생됐으며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  등  노약자가  전체의  33%를  차지하

고  있음을  밝혔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무장봉기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으며,  남

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

간인을  살해한  점도  분명한  과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량  인명  피해의  결정적  요인은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에  있음을  부각하였다.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적으로  1948년  제주  섬에서  이뤄졌던  일들은  제노사이드

(genocide·집단학살)  범죄방지  국제협약을  어겼으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

칙이  무시되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제주도는  세계  냉전체제의  최대  피해지역이었으며,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문제가  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

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4·3위원회는  이런  진상보고서의  결과를  토대로  4·3문제를  해

결하기  위한  7개항의  대정부  건의문9)을  정부에  전달했다. 

    2.  후속조치

    이런  건의에  따라  정부  차원의  4·3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하는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었다.  맨  처음  실현된  것이  대통령의  사과이다.  국가원수

의  사과는  명예회복사업  추진의  촉진제가  되었다.

    4·3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5년  개정된  고등학교  국정교과

서  󰡔국사󰡕에  4·3사건에  대한  설명  항목이  추가되었는데,  그  내용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단독  선거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난  사건”이라고  표

현되었다.  검정교과서에도  4·3에  대한  배경  설명이  추가되고,  정부의  진상규명활동이  소개

되는  등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한편,  제주도특별자치도교육청은  계기교육의  자료로 

9)  ①정부의  사과  ②4·3추모기념일  제정  ③진상조사보고서의  교육자료  활용  ④4·3평화공원의  지원  ⑤유족

에  대한  지원  ⑥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⑦추가  진상규명  및  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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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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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에  대한  자료집을  편찬,  향토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10)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추진된 

제주4·3평화공원  조성사업은  정부의  지원  아래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제주시  봉개동 

396,743㎡(약  12만평)에  만들어지고  있는  4·3평화공원  조성사업에는  2010년까지  모두  국비 

600여억  원이  투입되었다.  특히  2008년에  개관된  제주4·3평화기념관은  4·3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진  상설진시실과  다랑쉬굴  참상을  재연한  특별전시실  등이  갖추어져  4·3

사료전시관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박물관으로서  그  기능이  부각되

고  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집단매장지  유해  발굴사업은  특히  제주국제공항  부지  안

에서  무더기로  유해가  발견되면서  충격을  주었다.  이  발굴사업으로  모두  396구의  유해가 

발굴되었고,  DNA분석  등을  통하여  희생자  71명의  신원이  확인되어  60여년  만에  희생자와 

가족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11)  이밖에  북촌  학살터,  섯알오름  학살터,  선흘  성터  등에  대

한  유적지  복원사업도  추진되었다.

    또한  추가적인  진상조사와  기념사업,  유족  등에  대한  복지사업  등을  효율적으로  추진하

기  위하여  2008년  11월  10일  제주4·3평화재단이  출범하였다.  이  재단은  4·3평화공원과  평

화기념관의  관리  운영뿐만  아니라,  추가  진상조사,  유족  복지사업,  추모사업,  문화·학술사업, 

국제교류사업  등을  추진하게  됨으로써  4·3  해결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4·3위원회는  접수된  희생  신고자를  심사하여,  2011년  현재  14,032명(사망자  10,144명,  행

방불명자  3,518명,  후유장애자  156명,  수형자  214명)을  4·3사건  희생자로  인정하고,  그  가

족  31,253명을  유족으로  결정하였다.  특히  4·3위원회는  1948년과  1949년  제주도에서  이루

어진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는  불법성을  인정

하여,  사형수  318명을  포함하여  수형자  2,700명도  4·3희생자로  인정하였다. 

    한편  제주도민들을  옥죄였던  4·3문제가  특별법  제정,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국가원수의 

사과로  이어져  해결  기미가  보이면서  ‘평화의  섬’  논의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제주도는  2005년  1월  27일  정부로부터  ‘세계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

받게  되었다.  평화의  섬  선언문은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이유와  목표를  잘  말해

10)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은  2004년에  󰡔제주4·3사건  교육  자료집  -  아픔을  딛고  선  제주󰡕를  펴낸데  이어 

2008년에는  󰡔제주4·3사건  이해  자료집  -  4·3의  아픔을  딛고  평화를  이야기하다󰡕를  발간하였다.

11)  제주4·3평화공원  안에  봉안관이  마련되어  지난  3월  26일‘행방불명인  발굴유해  영령  봉안식’이  거

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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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주고  있는데,  그  선언문의    전문(前文)은  “삼무정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제주

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다”고  되어  있다.  결국 

평화의  섬  지정  배경과  목표는  ①  삼무정신의  계승  ②  4·3비극의  화해·상생  승화  ③  정상

외교를  통한  세계평화  기여로  압축될  수  있다.

Ⅳ.  새로운  시련과  응전

잘못된  4·3역사가  바로  정립되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보수단체의  반발과  도전도  계속되었다.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의 

사과  표명  직후에  보수단체에서는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

성,  집요하게  보고서  내용의  수정을  요구해  왔다.  4·3에  대한  기존의  정부문서들이  왜곡됐

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아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추진된  것인데,  이번

에는  보수단체들이  역으로  4·3진상조사보고서가  왜곡되었다면서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벌이는  형국이  된  것이다.

‘자유시민연대‘  등  43개  보수단체에서는  2004년  7월  헌법재판소에    4·3진상조사보고서

와  이에  따른  대통령  사과를  취소해야  한다는  요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12)  위헌심판

을  제기한  보수단체에서는  4·3특별법에  근본적  오류가  있고,  진상보고서가  대한민국의  정통

성을  훼손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행복  추구권,  양심의  자유,  재산권  등에  침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헌법재판소는  2004년  8월  이  청구를  각하하였다.  이에  앞서  4·3특별법 

제정  직후인  2000년에도  성우회  등이  헌법재판소에  4·3특별법  위헌심판  청구를  했으나,  헌

재는  2001년  9월  이를  각하  결정한  바  있다.

한편  2004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쟁사󰡕에  기술된  4·3사건  관련내용이  󰡔제주4·3사

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무시하고,  기존의  왜곡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가  파문이  일어났

다.  4·3관련단체의  반발에  이어  정치권으로  비화됐던  이  파문은  국방부와  4·3위원회  관계

자들이  두  차례  회의를  갖고  협의한  결과  논란이  됐던  ‘무장폭동’  용어  삭제  등  모두  35

건을  수정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13)

12)  이때  보수단체에서는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벌여  4·3진상보고서를  반대하는  185,689명의  서명지를  헌

법재판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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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보수진영의  조직적인  반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폐기,  제주4·3평화기념관의  개관  중지,  제주

4·3위원회의  통폐합,  4·3희생자  결정  무효화로  모아졌다.  이들  보수진영에서는  2009년  한해

에만  2건의  헌법소원,  2건의  국가소송,  2건의  행정소송  등  모두  6건의  소송을  한꺼번에  제

기했으나,  대부분  폐소되고  있다.

4·3진상조사보고서의  폐기  주장에  대해서는  ‘법정보고서’14)이기  때문에  임의로  수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즉  4·3특별법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조사기구와  조사기한,  심의

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고,  진상조사보고서는  그  절차에  거쳐  정부위원회에서  확정  의결된 

보고서이기  때문에  누구든  임의로  고칠  수  없고,  수정하려면  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고  맞선  것이다. 

제주4·3  발발  60주년을  맞은  2008년  3월  문을  열게  된  평화기념관의  개관을  막는  보수

단체의  반대운동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반대운동은  소위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

기  위한  대책위원회’란  단체가  불을  지폈고,  이에  재향군인회가  가세하였다.  그리고  이명

박정부  출범을  계기로  총결집된  보수단체의  연합체인  ‘대한민국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

회’15)가  전면에  나섰다. 

급기야는  한승수  국무총리가  나서서  대책회의를  하게  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재향

군인회  임원과의  회동도  이뤄졌다.16)  이런  진통  속에서도  제주4·3평화기념관은  예정대로 

2008년  3월  28일  개관되었다.

13)  수정내용은  오류부분  18건,  왜곡·편향부분  13건,  추가내용  4건으로  정리됐다.  국방부는  그해  12월 

“󰡔6·25전쟁사󰡕  제1집  중  제주4·3사건  수정문은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의  내용과  취지를  고려하여  제주도민의  피해상항을  추가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다”라는 
설명을  담은  수정문과  수정내용을  별지로  만들어  배포했다. 

14)  4·3특별법에는  위원회  산하에‘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이란  기구를  두어  진상조사를  하도록  했

으며,  보고서  작성  기한을‘위원회  구성  후  2년  6개월’로  정했다.  이런  법적  절차를  거쳐  4·3위원회
(위원장  고건  총리)는  2003년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의결하였다.

15)  이  단체는  2008년  3월  조선·동아일보  등에“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은  연기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전면  광고를  게재했는데,  광고  문안  중에는‘날조·왜곡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먼저  시정하
라’,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이  주도한  좌익폭동이었다’,  ‘어떻게  군·경이  학살자이고  초대  대통
령이  악마인가’,  ‘4·3평화기념관에는  좌익폭도도  희생자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문구  등이  있다.

16)  2008년  3월  18일  김태환  도지사와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  등과의  서울  회동  자리에  필자도  동참했

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기념관  전시내용을  추상적으로  지적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토
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5월  23일  재향군인회  회장단과  전국  시·도  지회장  등  23명이  4·3평화기념
관을  방문했다.  필자는  이때  “4·3  당시의  초토화작전은  국제법에서도  금지된  잘못된  작전인데,  그걸 
왜  오늘의  재향군인회가  떠안아  변호하려는가?”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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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국방부가  2008년  6월  교육과학기술부에  교과서  수정의견을  제출하면서  제주4·3을 

‘좌익폭동’으로  기술할  것을  요구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17)이  일었다.  그리고  2008년  11

월부터  한나라당  일부  의원에  의해  4·3위원회  폐지를  목표로  한  특별법  개정작업이  착수되

자  제주도에서  조직적인  반대운동18)이  일어났다.

한편  4·3의  새로운  진실규명에  사사건건  훼방하는  장본인이  이선교  목사라는  사실이  알

려지면서  유족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즉  이  목사는  자칭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란    단체를  만들어  진상보고서와  희생자  심사가  잘못되었다면서  헌법소

원과  행정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심지어  4·3평화공원을  ‘폭도공원’,  4·3위원회에서  희

생자로  결정한  13,564명  전원을  ‘폭동에  가담한  자’,  4·3보고서를  ‘가짜보고서’로  주장

하다  2008년  4·3유족  1백명에  의해  명예훼손  소송에  피소된  것이다.  제주지방법원은  2010

년  4월  8일  이선교  목사를  상대로  한  유족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

리고,  이  목사는  유족  1인당  20만~3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시하였다.  이에  이  목사가  항

소,  현재  상급심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런  요동이  있음에도  이명박  정부의  제주4·3사건에  대한  표면적인  공식  입장은  아직까

지  큰  변화가  없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은  2008년  9월과  10월  교과서  개정문제를  둘러싸

고  제주4·3사건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자  “정부는  ‘제주4·3특별법  제2조’와  󰡔제

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규정한  제주4·3사건의  성격  규정을  존중하여  4·3사건의  진

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Ⅴ.  앞으로의  과제

    동서  냉전의  최대  피해사건인  제주4·3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세계사에서도  드문 

주민  집단학살이면서  반세기  동안  침묵과  왜곡,  금기시되었던  굴곡진  역사의  특징을  갖고 

17)  국방부는  파문이  일자  4·3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폭동’임을  견지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측에서  이  문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국방부와  4·3위원회  관계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자 
필자는  2003년  4·3진상보고서  통과  당시  국방부가  적극  반대하지  않고  기권했던  점,  2004년  국방부 
발행  󰡔6·25전쟁사󰡕를  수정할  때  ‘폭동’용어를  삭제한  점  등을  들어  국방부의  일관성  주장에  문제
가  있다고  반박했다. 

18)  2008년  12월  제주  도내  49개  시민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한나라당  제주4·3특별법  개정안  반대  도민

대책위원회’가  발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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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러나  제주도민과  유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진실규명을  통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

는  작업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의  섬을  선언19)함으로써  세계인

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4·3  역사  흐름도를  정리하면  ①  ‘저항의  역사’,  ‘수난의  역사’⇒  ②  ‘은폐

의  역사’,  ‘침묵의  역사’  ⇒  ③  진실  찾기  운동,  정부의  조사·사과  ⇒  ④  ‘세계평화의 

섬’  선포,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필자는  첫째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고  제언하고  싶다.  4·3을  구조적인  전체  맥락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개인적인  경험이나  이

데올로기적  시각에  치우쳐  해석하려  한다면,  이념문제를  둘러싸고  도민끼리  싸움을  했다는 

단순논리에  함몰한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의  역사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도민

들은  희생자였다’는  인식과  포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두  번째는  이런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4·3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불

굴의  의지를  가지고  오히려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대내외로  천명하게  된  현  상황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제주4·3이  한국  과거사  정립의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는  평가

에  대한  긍지를  갖고  이를  더욱  개선,  발전시켜야  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4·3  진실을  바로  알리는  작업이다.  그  대상은  제주도민,  대한민국  국민,  세계

인으로  그  범위를  점차  넓혀갈  필요가  있다.  국제간의  평화  교류  사업이나  교과서  개정도 

이  일환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추가  진상조사와  유족  복지사업의  확대이다.  행방불명  희생  실태를  포함하여 

마을별  구체적인  피해상황,  나아가  진압작전에  대한  지휘체계를  명확히  밝혀내는  일,  4·3 

정명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도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이다.  또한  생활이  어려운  유

족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대책도  시급히  모색해야  할  현안이다. 

    다섯째는  4·3문제  해결의  구심체  역할을  해야  할  제주4·3평화재단의  활성화  대책이다. 

여기에는  정부  차원의  재정  지원과  명실상부한  민관  협력체제의  실현을  위한  조직  재편  등

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현재  닥쳐온  여러  현안들을  대처하기  위해서는  4·3특별

법  제정  당시의  초심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제주도민의  단합이다.  제주특별자

19)  “4·3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도  제주도는  충분히  ‘평화의  섬’을  추진할  권리가  있다”고  말

한  미국  CNN  기자의  표현도  음미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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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  도의회,  유족회,  4·3관련단체,  지역구  국회의원,  각  정당  제주도당이  한  목소리로  공

동  대처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나아가  전국  유관단체,  국제  평화네트워크

까지  연대  협력한다면  지금까지  닥친  많은  시련을  잘  헤쳐  온  것처럼  당면한  문제들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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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며

“이  날로  우리  300가호  중  250가호가  제사를  명절같이  지내고,  신위를  1~13위나  모시

고  맷밥을  열세그릇가지  올리는  집이  있어...  이  와중에서  울던  아이와  초등학교  마당에서 

실랑이하다  총살된  어미  젖을  먹고  자란  애가  지금  43세야...(『이제사  말햄수다』,  열세번

째  이야기,  ”오라방이나  내  한  풀어주젠“에서)   

“학교  그  사람  다니고,  난  이디  오란에  그자,  시집  살이  해수게.  시집살이  허단,  졸업마

타노난,  구좌면  간에  두해살고,  또  오난,  그  사름  남원멘  뎅기고허난,  난  살림살고  애기

덜광.    일년  살아수다.  지만  해살고,  그  사람난  간.  나만  따라  강    일년  살고.  시아

바님이  살렴  살렌핸  여기  와수게.  여기  오난  남원면에  뎅기곡.  살림살이  허단에  면에  뎅겨

낫주마는.  태  나가난에  그냥  막  웃드르  사름알레  사름  갈라져수게.  서로가  경헌  모양이

라...”(『제주여성의  생애,  살암시난  살앗주』,  “4·3으로  시부모  남편  다  잃어”,  의귀리 

정신숙에서)

열세번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천중학원  1학년에  재학  중  학교가  폐쇄되면서  그  후  1

학년  자치위원회  북촌리  대표책임자로  산과  마을  사이의  연락병역학과  보초대장역할을  하

던  중  체포되었다.  사태당시에는  애학청  소년부  소속이었다. 

[

]

구술생애사를  통한  4·3

함한희(전북대학교  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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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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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숙은  1921년  남원리에서  태어나  의귀리  김목관  댁의  외아들  김계원과  19살에  결혼

해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  남편은  농업학교를  졸업해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4·3의  격량 

속에  희생되었다.  시부모와  남편을  4·3  때  잃었고,  아들을  데리고  여동생이  살던  성산면  신

산리에서  4년간  피신생황을  했다.  그  후  폐허가  된  시댁으로  돌아와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

휘해서  아들을  키우며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

4·3사건을  세상에  알린  용감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다시  쓰여지

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정권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도  도내의  학생들,  언론인,  그리고 

시민들은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감행하였다.  1960년4·19혁명으로  한  때  4·3 

진상  규명에  대한  희망이  움트려는  조짐이  있었으나  5·16  구데타로  인해  4·3은  다시  역사

의  어둠  속으로  갇히게  되었다.  그  후  1970년대와  80년대  초  소설가  현기영,  시인  이산하

가  각각  4·3을  다룬  소설『순이삼촌』과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해서  고초를  당하

는  일이  일어났다.  1986년  6월  항쟁  이후  제주대학교  학생들도  1987년  4월  3일  4·3진상규

명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제주지역  민주화운동가들은  직접  4·3사건을    경험

한  주민들의  구술증언을  찾아  나섰다.  당시까지도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던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도록  주민들을  독려했다.  이와  같은  열기에  힘입어서  언론인들

도  1988년  초에  4·3취재반을  결성하였다.  4·3  40주년을  기리기  위한  특집을  꾸미기  위해서 

시작했고,  그  반향은  컸다.  당시에도  증언을  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때였다.  높고  낮은  장벽을  넘어서서  구술증언이  제주일보  기획연재기사-“4·3의  증언”로 

보도되었다.1)  재야운동단체들이  힘을  합해서  제주4·3연구소를  발족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들은  ‘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  1회  제주항쟁추모제를  개최하는가하면,  본

격적인  진상규명과  학술적인  연구를  위해서  연구소도  만들었다.   

제주도민들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도록  만든  계기가  바로  4·3에  대한  기억,  증언,  그리고 

재현이었다.  오랜  침묵의  시기를  거치고  나서  제주민중항쟁사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

은  국내의  정치변화와도  관련이  있지만,  내막적으로  보면  제주도민들의  줄기찬  항쟁의식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금기의  역사를  풀어낸  것은  제주도민이  가진  역사공동체로서의  의

식과  정체성에  바탕을  둔  실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제주신문이  1989년  4월  3일부터  매주  2회씩  연재하였다.  그해  12월  5일자  제  57회가  마지막  회였다. 

그  후  1990년  6월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제민일보가  창간되면서  4·3연재는  “4·3은  말한다”  기획물
로  다시  시작되었다  (제민일보,“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양조훈  육필기록”, 
2010.12.31~2011.3.24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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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2.  4·3과  구술사

4·3연구는  국내에서  광주5월항쟁과  일본종군위안부  연구와  함께  국내의  구술사를  발전시

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부재해서  구술사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구술사연구를  촉발시키고  역사연구의  방법론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4·3과  구술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여기에서  잠시    구

술사를  통한  4·3의  연구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4·3연구와  앞으로의  전

망을  위해서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다.       

                                                                                                                                                                   

(1)  사회운동으로서의  구술사

   

국내의  구술사연구는  크게    1기와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기는  1980년대  중후반

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이며,  제  2기는  1990년  후반,  2000년도  초반  이후를  말한다.  제  1

기는  진상규명의  절박한  과제를  안고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했던  시기이다.  반면에 

제  2기에는  민주화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금기시  되어온  영역이  줄어서 

구술사의  외연이  확장되는  시기이다.  학계와  시민단체들이  만나서  공동연구를  활발하게  진

행시켜  오고  있다.  그  결과  구술사의  자료수집  및  연구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김귀옥  2006). 

제  1라고  부르는  시기에는  금단의  역사를  드러내는  구술증언채록과  자료집의  출간이  대

세였다.  국가가  엄격히  통제하던  사건의  전말을  추적할  수  있을  만큼  국내  정치상황이  호

전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군부독재체재에  항거해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동이  된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  민주화의  서광이  비추고  있다는  배경  아래서  일어난 

일이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사람들과  단체에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관련  자료수집에  힘을 

쏟았다.  주로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로  관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찾아서  구술증

언을  받기  시작했다.  광주  5월  항쟁2),  일본종군위안부3)  및  제주  4·3사건을  필두로  사실  규

2)  광주5월  항쟁과  관련해서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ㆍ황석영  기록,  1985.  1987,『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

을  넘어-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1,  2』,  풀빛;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광주  5월  민중항쟁  사
료전집』,  풀빛,  등의  자료집이  출간되었다.

3)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한국정신대연구회가  주도한  조선인군위안부를  대상으로  한  구술증언집이 

출판되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3,  1997,  1999,  2001,『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  1, 
2,  3,  4』,  한울;  한국정신대연구소,  1995,  2003,『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  2,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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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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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차원의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제주  4·3사건과  관련한  증언자료

집은  1989년에  나온  제주4·3연구소의  『이제사  말햄수다  I,  II』,  증언채록집  『4·3장정』  6

권,  그리고  제주일보  4·3취재반의『4·3은  말한다』가  5권  (1994~1995)  등으로  간행되었다.   

구술증언집의  출간은  제주도민들의  억압된  사회ㆍ역사의식이  봇물  터지듯  흘러넘치고  있

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민간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기존의  4·3사건에  대한  국가담론을  정면

으로  거부하고  제주도민의  항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제주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은  비극적인  사건은    6·25를  거치면서  반공체제가  강화되면서 

금기의  역사가  된  채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반공이데오로기가  강화된  체제  아래서는  이 

사건은  남로당  세력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해  놓고  있었던  터였다.4) 

민간주도의  4·3규명운동에  압력을  받아서  1990년대  들어서는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움직임

도  일어났다.  제주도  의회가  1993년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4·3피해신고를  공식적으로 

접수하면서  읍면별  피해실태  조사에  착수하였다.  1995년에는  그동안의  조사를  토대로  해서 

4·3피해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그  후  4·3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었고  마침내  1999년  12

월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해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

법’이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  15일  ‘4·3특별법’에  의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다.5)  4·3관련  증언

수집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제주4·3연구소에서  4·3천인증언채록사업을  2004년부터  실시해

서2008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조사자들은  무려  1,028명의  구술자를  만났고,  5년  동안  채록

한  자료가  총  60권으로  엮었다.6)       

지금까지  진행된  진상조사는  조사주체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증언자로부터  구술증언을 

받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조사주체는  비교적  다양했는데,  민간단체,  학자,  매스컴,  정

부기관  등이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채록에  나섰다.  큰  틀에서는  조사주체들의  증언채록  목

적은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의  당면과제,  역사인식,  접근방법  등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초기의  조사사업과  뒤늦게  시작된(1990년대  중반  이후)  국가주도의  진상조사를 

4)  1967년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1990년에  출판된  제주경찰사  등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역사서에 

기록된  바는  그러하다.  (www.jeju43.org)

5)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6)  김은희,  “경험과  기억을  통한  4·3의  재구성-2004~2008년  43천인증언채록을  중심으로,”  『기억의  구

술과  역사-4·3의  경험과  재일제주인,  그리고  한국현대사』,  제주4·3  62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  자료집, 
pp.  17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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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비교해보면,  조사주체들이  소지하고  있는  당면과제와  역사인식은  차이가  크다.  전자는  이 

사건을  제주도민의  항쟁으로  규정했고,  4·3을  국가사에  바르게  편입시키고자  하는  당면과제

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뒤늦게  진상조사를  시작한  정부에서는  도민항쟁의  차원을  드러

내기  보다는  피해상황에  대한  전수조사에  힘을  쏟았다. 

(2)  밑으로부터의  역사로서의  구술사 

구술사가들은  특정한  계층에  의해서  전유된  획일적인  학문연구를  탈피하고자  노력해  왔

다.  그  일환으로  지금까지  역사에서  배제  또는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역사의  지평  위로  끌

어올리고자하였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움직여가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되돌려주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지방민,  노동자,  여성,  이주민,  기타  민중들이  스스로의  목

소리를  내도록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구술사가들은  지방사,  노동사,  여성사,  이주사,  민중

생활사를  재현함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과거  주류의  역사에서는  피지배층인  민중들

은  피동적인  실체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고정적이고  본질화된  이미지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상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밑으로부터의  역사’ 

연구에서는  이들의  주체성을  조명하면서  역사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같은 

역사인식은  구조  중심의  역사로부터  행위자의  실천에  비중을  두는  역사로의  변화를  의미하

게  된다.  전체사나  구조사에서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한계이며,  더구나  역사의  주체가  되는  이들의  인식이나  의식을  알아보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  보기  위하여,  구술사에서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실천행위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역사서술의  방법을  모색코자  하였다. 

주류의  역사기록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역사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역사  민주화의 

원칙을  4·3에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들을  역사적  주체로  인식해야하는  점이  중요하

다.  4·3진상규명이  국가폭력에  희생자를  찾아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주체성에  대

한  환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밑으로부터의  역사쓰기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서  제주도

민들이  분연히  일어난  민중항쟁의  입장에서  4·3을  접근하는  경우와  국가  폭력과  압제로  인

한  희생자를  찾아  4·3에  대한  어두운  기억에  집착하는  경우는  역사의  재현에서  차이를  가

져올  수  있다.  전자는  도민들의  자치ㆍ자율성을  우선적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며  후자는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강조함으로써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전자는  당

시에  제주민들의  삶과  의식세계를  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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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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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앙ㆍ내륙과  떨어진  섬에서  해방  직후  새로운  체재  수립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

는지,  제주민들이  자치ㆍ자율성이  탄압과  저항,  봉기와  학살로  어떻게  굴절되었는지  등을 

알아보는  등의  확대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4·3진상규명이  단지  희생자에  대한  조사로  끝나는  것은  분명  아래로부터의  역사쓰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민중항쟁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쓰기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소외된  제주도민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이

들의  경험을  중시해서  그  경험의  의미를  두껍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경험,  기억  그리고  구술생애사 

구술사에서  역사적  사건의  전개  보다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  자체에  주목하게 

되면  생애사적  접근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생애사란  사람들의  일생을  펼쳐  보이는  방

식으로  일상생활에서부터  개인들이  겪은  크고  작은  경험을  그들의  언어로  엮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구술생애사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4·3사건에  대한  접근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4·3사건  피해사실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제주도민들의  삶의  노정을  추적해서  이들의  경험을 

밝히는  쪽으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같은  변화는  다시  세  가지  정도의  새로운  세부과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첫  번째로는  4·3사건  경험자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역사를  재현

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재일제주인들까지를  포함해서  당시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둘째로는  제주도민의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4·3에  대한 

기억을  채록하고  연구함으로써  4·3의  현재성을  파악하는  데  연구의  중점을  두는  연구도  있

다.  김성례  외  5인의  공4·3을  제주의  ‘지역공동체  문화’라는  틀  안에서  조명해  볼  것을 

강조하였다.  지역공동체  문화는  제주도민의  일상생활과  역사의식에  지배적인  작용을  하는 

살아  있는,  그리고  지금도  생성과정에  있는  문화로  접근하면서    4·3을  조망하였다.  그  과정

에서  이  사건은  제주지역공동체  문화와  공동체  의식의  변화에  큰  분수령을  그은  역사적  계

기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주제는  제주  사람들에게    4

ㆍ3은  무엇인가이다.  이  사건은  전도적인  사건이며,  따라서  제주도민  개개인의  경험은  마을

공동체와  제주도전체의  역사적  경험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김성례  외  2001:90). 

개인의  생애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현하는  연구경향의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

요가  있다.  1980년대  이후  서구에서는  기억의  특성  및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구술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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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구가  진행되어  왔다.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재현의  삼각관계를  파헤치면서  구술사

연구의  인식론과  방법론에  변화를  유도한  방법의  연구가  국내  구술사  연구에도  많은  영향

을  미치고  있다.  각별히  ‘기억의  사회적  생산’  즉  어떤  특정한  기억이  공적  재현(public 

representation)과정을  거치면서  지배기억으로  남게  되는  가를  규명하는  일을  중시하고  있

다.  지배기억은  국가나  지배계층의  적극적인  개입의  결과이며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것과  지배기억과의  경합에서  제외된  다른  기억들은  대항기억이  된다.  대항기억  역시  대항

담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공적인  기억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배기억과  대항기

억이  항상  고정되어  위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지속적인  경쟁이  일어난

다.  여기에  덛붙여서  공적재현에서조차  밀려난  사적  기억(private  memory)은  문자  그대로 

개인들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기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침묵되어진

다.”(Popular  Memory  Group  1982:210,  윤택림  1993:  283에서  재인용)  이러한  사적  기억

을  공적  기억의  자리로  올리고자  하는  노력이  구술사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기억과  정체성을  다루는  주제가  구술사연구의  중심이  될  만큼  여러  분야의  연

구자들이  이  주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공적과  사적  영역의  논의를  잠시  접고  기억

이  단지  과거의  사실을  준거해  줄  뿐만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을  밝히거나  집단을  통합하는 

힘을  지니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집단이  통합되고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단적  기억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한

국전쟁  전후시기에  정치적ㆍ사회적  고통의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경

험을  집단기억으로  강화하기도  하고,  정치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고,  4·3의 

경험과  집단기억을  모으면서  도민통합의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권귀

숙  2006;  김귀옥  2002;  김귀옥  외  2008;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제주4ㆍ3연구소,  1989,  2002.). 

개인구술생애사에서도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이다.  개인의  기억된 

경험/경험된  기억을  사회와  문화현상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구술/서사  전략의  차원을  분석

해서  정체성과  연결을  짓는  연구들은  구술사적  연구방법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김성례  1991,  유철인  1996,  윤택림  2001,  윤형숙  1998).  개인의  구술생애사(oral 

life-history/oral  life-story)를  수집해서  문화분석을  하는  경우,  생애사(life-history)에  더  중점

을  두는  경우와  생애이야기  또는  생애담(life-story)에  중점을  두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

다.7)  전자는  생애사에서  구술자의  경험,  견해,  가치관  등과  같은  사실적  기술(fact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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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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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unt)  부분에  초점을  둔다.  후자의  경우는  구술자의  이야기에서  서술전략의  차원을  파악

해내는  것을  더  중시하는데,  이는  구술자가  풀어가는  이야기의  틀이나  그  전개방식은  그의 

현재적인  입장을  반영한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현재적  입장  속에는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

는  구술자의  성찰적  자세  및  해석  그리고  면담자와의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있게  마련

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애를  회고할  때  구술자는  복잡한  심리적,  인지적,  그리고  전략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는가  찾고,  그 

이야기는  어떻게  비추어질  것인가도  생각해야  하며,  바로  앞에  있는  면담자를  위해서  어떤 

이야기가  적당한가도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짧든  길든  구술자는  다양한  차원의  의식과정

을  거친  후에  생애이야기가  구성된다.  따라서  생애사에서  이야기부분에  초점을  둘  때  연구

자는  생애사가  단순히  사실적  기술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회상을  거쳐서  재구성되는  결과

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구술사가들은  구술이나  증언  속에는  이  두  가지  측

면  즉  사실적  진실(factual  truth)와  서사적  진실(narrative  truth)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을  상

기시키고  있다(김성례  2002:  52;  유철인  2004).  김성례는  조선인  군  위안부할머니의  증언은 

“실재로서의  역사적  과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에  대한  담론”이라는  점을  역설했다(김성례  2002:52).   

4·3연구가  단순한  증언채록을  넘어서  제주도민의  새로운  역사쓰기를  위한  과제로  등장하

면서  남겨진  세부과제  가운데  마지막은  4·3과  제주문화연구가  아닐까한다.  문화기술적인  역

사(ethnographic  history)로  접근해서  일상성에  바탕을  두고  제주사람들이  의미를  만들어내

는  방식을  분석해  보는  것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기술적인  역사에서는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  대신에  ‘메타사회적’인  해석에  더  비중을  둔다.  박찬식은  제

주도가  주변부에  있으면서도  자치적  의식이  강해서  섬  공동체에  가해진  외부로부터의  압박

이  섬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박찬식  2006:  92).  해방  후,  자율성

이  강한  제주도  사람들이  조직해  낸  사회주의  이념,  사회주의  지도자들,  단체들이  사실  사

상적인  외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49년  4·3사태가  진정된  후  작성된  미국  정보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제주민들의  기질이  “천성적으로  정직하고,  독립적이며  육지에서  온  관료들과 

7)  구술생애사라고  할  때,  영어의  life-history와  life-story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이  차이를  일찍이 

강조한  학자는  유철인이다.  그의  논문,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하게  되었다:생애  이야기의  주제
와  서술  전략󰡓(유철인  1996)에  잘  나타나있다.  한편,  최근에는  민속학자들과  구비문학가들도  구별이 
모호한  구술생애사라는  용어  대신  구술생애담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life-story의  성격을  더  강조한다. 
(김남희  2008;  김정경  2008;  정현옥  2007;  천혜숙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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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주해온  사람들과  결부되는  간섭과  도둑질과  독직  등에  대해서  대단히  분개한다”(박찬식 

2006:  92)는  점까지  들어서,  ‘제주사람다움’이  일으킨  사건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

한  분석은  제주도민의  심성을  본질화시키는  기질론으로  후퇴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 

제주도민의  상징적  행위를  두껍게  읽어봄으로써  공동체성,  자율성  또는  육지로부터의  독립

성을  제주도민의  정체성으로  규정해보고자  하는  시도일  수  있다.  4·3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외부세계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나온  항거였으며  이는  오랫동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  온 

공동체가  겪은  사건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같이  생활세계  속에서  형성된  제주사

람다움은  김성례가  분석한  여성구술생애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4·3  이후  ‘홀어멍’이 

되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독립적인  삶은  살아온  문심방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인

식은  제주여성으로서의  독특함이  배어있다.  김성례는  그러한  자신감이  ‘남편에게  짓눌려 

사는  이웃집  서울  여자와  비교하기  위해  과장되게  꾸민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제주 

여성들의  집단적인  자아상과도  일치한다’고  보았다(김성례  2002:38).     

3.  나오며

구술사는  4·3을  국가담론으로부터  구출해서  제주도민의  대항담론을  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구술사,  생애사  그리고  일상사와 

생활세계의  분석을  도입해서  4·3의  역사문화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도  있어왔다.  후자

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4·3의  영역을  현재로까지  확장해서  분석한  연구도  있었다.  즉4·3사

건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분석하여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역사적  유

산으로서의  그  의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듯  기존  연구가  이룩한  성과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  현재  4·3의  과제

이다.  제주도민이  경험한  4·3사건을  전체사  또는  국가사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문화사로서  거듭나야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연구자와  제주도  전체  도민들을  활발하게 

움직여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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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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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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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머리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든  냉전은  트루먼  독트린과  봉쇄전략에  의해서  공식화되었고, 

미국의  대소  정책은  소련의  팽창에  맞서  적극적인  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트루먼  행정부의  대한정책의  목표도  또한  대소  봉쇄였으며,  한국에서의  미국의  입지  강

화와  소련의  외교적  후퇴를  겨냥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지역에서 

4·3과  같은  폭력적  민중저항은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주4·3  발발의  직접  원인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

해  1948년  5월10일  치러진  이른바‘5·10선거’의  반대였다.  이  선거는  해방  3년사의  미국

의  점령정책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미국의  대소  전략과  맞물려  있었

다.

1947년  8월4일자  미국의  대한정책  방향을  구체화한  SWNCC  176/30은  “미국은  현시기 

한반도가  공산주의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철수할  수  없다.  이에  따

른  정치적  반향은  극동과  전세계에서의  미국의  위신을  심각하게  손상하고,  미국이  지지하

1)  이  글은  전남대  5·18연구소가  펴낸  『민주주의와  인권』제7권  제2호에  실린  필자의  논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

]

제주4·3과  미국

허호준(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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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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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대내외의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에  저항하는  소국가들의  의욕을  꺾을  것이다”고  밝히

고  있다.

이어서  이  문서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모스크바  협정의  목적을 

조기에  달성하기  위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한국인  스스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유엔의 

선거감시와  임시정부  수립에  간련된  기타  사항들을  제안하고,  임시정부와  4대국  사이의  협

의에  따라  지원하는  방안  단계별  제안을  하고,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미국  정

부는  한국문제를  차기  유엔  총회에  상정할  것을  모스크바협정  관계국들에게  알리고,  총회 

안건으로  만들기  위해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소련의  미국  쪽  제안  거부로  미국은  1947년  9월17일  한반도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할  것을  제의했으며,  1947년  11월14일  열린  총회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이  이처럼  분단정권  수

립을  의미하는  단정전략을  추진하게  된  것은  미군  철수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남

한  국가와  이승만  정권을  대소  봉쇄의  도구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5·10선거의  성공적인  실시를  한반도  점령기간  중에  수행하게  될  핵심

적인  사안으로  인식하고,  4·3봉기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의  정상적인  실시가  위태로워지

자  대대적인  병력  파견  등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한미군과  미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가  실패한  지역으로  남았다.  4·3  주도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4·3의  발발은  5·10선

거의  저지가  1차적인  목표였으며,  미국의  입장에서는  5·10선거의  실패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강경진압의  한  원인이  됐다.

5·10선거가  실패한  뒤  미군정과  미국은  4·3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공산주의  세력의  저

지’를  통한  대소  봉쇄를  위해  강력한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제주도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4·3의  전개과정  중심부에는  남한의  유일정부

라고  자처한  미군정과  미국이  있었으며,  미군정은  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좌익의  강력한 

근거지’인  제주도에  대한  진압의  강도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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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2.  미군정의  초기  실책

    1)  3·1사건과  3·10  총파업:  미군정의  인식

미군정과  제주도민의  본격적인  충돌은  1947년  3월1일의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

회  때  시작되었다.  제주읍과  애월면,  조천면  주민  등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북초등

학교에서  기념대회가  열려  평화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초등학생에서

부터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6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그러나  경찰이  3·1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조사에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  연행하자  제주도청  직원들은  3월10일  ‘제주도청  3·1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제주도 

민정장관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

에게  보내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에는  제주군정청  한국인  관리의  60~75%와  156개  기관·단체가  파업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금융과  교통,  제조업,  교육,  식량배급  등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이  파업은  남한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민관총파업으로서,  당시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폭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는  “제주도의  총파업이  남한  전역

의  파업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시금석일  수도  있다”고  평가했으며,  미극동군사령부의  정

보요약문은  제주도의  총파업을  가리켜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났

다”고  분석하고  제주도를  ‘좌익의  근거지’로  간주했다.

3·1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3월8일  중앙  미군정청  특별감찰실장  카스틸(James  A. 

Casteel)  대령  일행이  제주도에서  현장조사와  기념대회  집행부에  대한  조사를  벌였으나  결

과는  공개되지  않았으며,  러치  군정장관도  3월13일  기자들과의  정례회견  자리에서  “아직 

보고가  없어  모르겠으나  추후  조사하여  보겠다”고만  말했다.

이어  파업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러치  군정장관의  회견  다음날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도

를  방문했으며,  이에  맞춰  파업주도자들에  대한  검거에  들어가  닷새  만에  200여명을  검거

했다.  조병옥이  제주도를  방문한  다음날에는  전남·북  응원경찰이  파견됐고,  18일에는  경기

도  응원경찰  등  모두  421명의  응원경찰이  제주도에  들어와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고,  민관  총파업으로  제주도민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미군정  경찰

은  물리력의  증원을  통해  진압에  나섰으며,  미군은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만  3·1사건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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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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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3·1사건에  대한  미군정의  시각은  대대적인  검거바람이  불던  3월20일  발표한  담화문을  통

해  드러났다.  담화문의  요지는  제1구  경찰서(제주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치안유지의  대

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담화문은  경무부장과  제주도지사,  제주도 

민정장관  등  3자가  임명한  ‘제주읍  3·1절  발포사건조사위원회’가  합의한  내용으로,  조사

위원회는  제주지방검찰청장  박종훈,  제주읍내  박명효,  제주고녀  교장  홍순녕,  경무부  공안

국  부국장  장영복,  경무부  수사국  고문관  쇼터  대위로  구성됐다.

카스틸  대령의  조사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합의문  작성에  고문관  자격으로  미군 

대위가  포함된  것은  3·1사건에  대한  미군정의  시각을  대변한다.  담화문  발표와  함께  조병

옥은  “제주도  사건은  북조선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려

는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으로  단정지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제주도의  총파업은  3월하순에  이르러  표면적으로는  진정국면에  들어갔으나,  총파업과  관련

해  검거된  인원은  4월10일까지  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사회적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었다.

미군정은  3·1절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제주도를  좌익  거점으로  간주하는 

한편  총파업을  남한내  파업의  시금석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제주도민을  탄압해야  할  대상으

로  규정했던  것이다.  사건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미군정의  미숙하고  무모한  대응은 

‘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2)  4·3봉기와  5·10선거  실시:  미군정의  실정과  강경정책

3·1사건과  민관총파업,  대량  검거사태로  제주사회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미군정은 

4월7일  제주  출신  박경훈  제주도지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의 

유해진을  임명했다.

CIC가  극우파  인물로  분류한  유해진  지사는  부임에  앞서  “극좌와  극우를  배제한  행정

을  추진하겠다”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극단적인  우익강화정책을  폈으며,  이는  4·3  발발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우익강화정책으로  제주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경

제적  불안감이  높아지자  미군정은  유  지사에  대해  특별감찰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남조선과도정부  수석고문관  존슨(Edgar  A.  J.  Johnson)이  지시하고  중앙  미군정청  특별

감찰실  소속  감찰관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이  실시한  이  특별감찰활동은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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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1월12일부터  1948년  2월28일까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유해진  지사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  감찰조사에서  제주도  제59군정중대  법무관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는  11월21일  “유  지사가  한민당이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의견과  다른 

인사를  좌익분자로  분류하는  극우  슬로건을  채택하고  있다”며  “극우단체의  테러와  경찰

의  좌익탄압이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기울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본토  출신  경찰들이  좌익을  동정하고  좌익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데  상당

부분  책임이  있으며,  심사숙고하지  않은  채  정치적  인사들을  체포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표면적으로는  현  정치상황이  비교적  조용하지만  중도  및  온건단체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

이  이들  단체를  극좌로  빠지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해  파괴활동을  부추길  것으로  믿는다”

고  진술했다.

이  주목할만한  미군정  장교의  발언은  유해진의  극단적인  우익강화정책이  4개월여  뒤에 

일어난  4·3봉기에  제주도민들을  내몰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CIC도  유  지사

를  매우  독단적이고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좌익인사로  규정한다고  평가했으며,  정

보원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경찰이  빠른  시일  안에  ‘정의’(justice)를  회복하지 

못하면  모든  단체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유  지사의  우익강화정책은  그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다.  그는  넬슨  중령에게  스스

로  일반  대중을  극좌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단체의  힘을  빌려  조직과  선전활동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감찰활동을  통해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

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결국  그들의  활동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한편  경찰은  수없이  테러행위를  자행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1948년  3월

11일  군정장관  딘  소장에게  4개항의  건의사항을  포함한  감찰보고서를  제출했다.

건의내용은  첫째,  유  지사의  경질,  둘째,  제주도  경찰에  대한  경무부의  조사,  셋째,  미 

경찰고문관의  제59군정사령부  및  사령부  중대  임무의  동시  수행,  넷째,  과밀  유치장에  대한 

사법부의  조사  등이었다.  딘  군정장관은  이들  건의사항  가운데  3개항은  받아들였으나,  유 

지사의  경질  건의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유  지사가  감찰조사를  받던  도중  남조선과도정부  수석고문관  존슨의  유  지사 

면직  건의에  대해서도  딘은  1947년  12월3일  “도지사에  대한  면직은  간단하지  않고,  내각

과  민정장관  안재홍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며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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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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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유해진의  지사직  존속이  경질건의  시점에서  불과  2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5·10선거

의  성공적인  실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미군정  수뇌부의  의지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유  지사의  극단적  우익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1948년  3월6일  조천중학원 

2년생  김용철,  14일에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고,  3월말에  한림면  금릉

리  출신  박행구가  총살당하는  등  3건의  고문치사  및  총살사건이  잇따랐다.

김용철의  고문치사  소식을  전해들은  조천중학원생들은  조천지서  앞에  몰려가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항의집회를  열다가  또다시  붙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김용철  고문치사사건은 

중앙  미군정청과  선거감시를  위해  남한에  온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의  비상한  관심

을  끌었다.  미군정청  사법부  소속  민간인  변호사  매기(Thomas  Magee)가  진상조사를  위해 

3월22일  제주에  파견됐고,  4월15일에는  UNTCOK의  프랑스  대표  마네(Manet)가  딘  군정장

관에게  사건의  경과를  묻기도  했다.

경찰과  서청의  행패,  유  지사의  우익강화정책으로  제주도민들의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4월3일,  무장대는  “탄압이면  항쟁이다”며  단선·단정  반대와  통일국가  수립을  요구

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11개  지서  및  우익단체  간부의  집과  사무실을  공격하면서  ‘4·3항

쟁’을  단행했다.

하지  중장이  4월2일  산하  지휘관들에게  성공적인  선거  실시가  미사절단의  핵심적인

(essential)  성과라고  강조하고,  군정장관이  선거의  감시  및  집행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  다음날  무장봉기가  감행된  것이었다. 

UNTCOK  사무국  차장  밀너(I.  Milner)는  4월7일  제주도의  치안상황에  대해  민감한  관심

을  표명하면서  4월9일로  예정된  UNTCOK의  제주도  방문을  우려하자  미연락장교  웩커링

(John  Weckerling)  준장은  4월8일  그를  만나  “경찰  증원뿐  아니라  제주도  주둔  경비대도 

예비부대로  남아있다”며  “상황이  잘  통제되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이러한  밀너와  웩커링  준장간의  대화  내용을  담은  비망록은  하지  중장에게  보고된  것으

로  주한미군사령부  및  군정  당국,  UNTCOK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웩커

링  준장이  밀너에게  말한  지  이틀  뒤인  4월10일  국립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  100명이  2차 

응원대로  파견됐다.  이에  앞서  4월5일에는  전남경찰  100명이  파견됐다.  하지  중장은  투표

율이  좋지  않으면  남한  정부는  압도적인  국제적  승인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

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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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4월  초·중순  무장대의  공세에  이어  4월말에  이르자  미군정의  강력한  토벌작전이  전개되

기  시작하면서,  진압작전도  경찰에서  경비대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4월15일  UNTCOK  회

의에  참석해  제주도  사태에  대한  위원들의  발언을  들은  딘  소장은  UNTCOK의  우려를  불식

시키고,  제주도의  무장봉기세력을  제거해  5·10선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다음날  해안경비대와 

국방경비대에  제주도  합동작전을  명령했다.  합동작전은  해안경비대의  지원을  받아  경비대  1

개  대대를  4월20일까지  제주도에  파견해  전투를  준비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제3여단  고문관  드로이스(Clarence  D.  DeReus)  대위가  고문관으로  작전에  참가하도

록  명령을  받았고,  제주도로  파견된  경비대  대대에는  기관총과  카빈,  탄약을  보급했다.

이어  딘  소장은  4월18일  연락용  비행기  L-5  2대를  보내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의  작전통제  하에  두었으며,  4월20일  ‘제주도의  파괴분자를  섬멸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제주도의  토벌대도  맨스필드  중령의  작전  지휘를  받도록  했

다.  또한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하기에  앞서  무장대  지도부와  접촉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항복할  기회를  주도록  했다.  이는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  간

의  이른바‘평화협상’으로  나타난다.

이와  동시에  하지  중장은  미군  제6사단장에게  전문을  보내  이  작전에  모든  가능한  지원

을  맨스필드  중령에게  하도록  하는  한편  공격을  받지  않는  한  미군부대는  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들  전문은  미군정과  경비대와의  관계,  제주도  소요  진압에  대한  미군정의  역할

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제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중령은  평화협상이 

열리기  전날인  4월27일  제주도를  방문해  무장대의  진압과  주민  장악에  대한  맨스필드  중령

의  계획을  확인했다.2)  슈  중령은  제주도  상황에  대해  1948년  4월28일  이전의  작전은  상황

을  정당화할  만큼  공격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지금이라도  강경  진압정책을  펴야만  선거의  성공적인  실시와  남한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척결하는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5월2일  미군  연락기는 

무장대들의  활동을  관찰했으며,  경찰  응원대는  제주도  사태를‘전면적인  게릴라

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해  나갔다.3)

미군정은  제주도  소요가  ‘심각한  상황’(serious  situation)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서,  공산

주의  활동이  증가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Washington  Post」  1948.4.24).  「뉴욕타임즈」

2)  Subj:  Report  of  Activities  at  Chejudo  Island.  Lt.  Col.  Schewe,  G-3  to  Col.  A.  C.  Tychen,  A/C  of 

G-3,  29  April,  1948,  RG  338,  NARA.

3)  Hq.  7th  Div,  G-2  Periodic  Report  No.  105,  5  May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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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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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같은  날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선거등록사무소를  공격해  9명의  경찰을  포함한  49

명이  지난  2주  동안  희생됐다”고  보도했고(1948.4.24),  「로스엔젤레스타임즈」(Los  Angeles 

Times)도  같은  날  “제주도  폭동은  미국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유엔  감시  하에  치르는  5·10 

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움직임과  일치했다”고  보도했다(1948.4.24).

이러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대부분  제주도  사태를  단일  기사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북

한이나  소련의  동향을  같은  기사에  포함시킴으로써  소련과의  연계성을  암시하는  듯한  보도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뉴욕타임즈」는  1948년  5월3일자  사설을  통해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지  간에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소련은  조선을  흡수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소련의  의도는 

(한반도)  북쪽에  수립한  괴뢰  정부의  최근  움직임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는  현재  미국 

점령  지역까지도  포함해  소련  장악  하의  (남북한)  단일국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

는  내전으로  가는  길이다.  이미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선거  저지를  위해  살인적인  게

릴라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이  신문은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이  쓴  ‘게릴라전(small  war),  한국의 

섬에서  맹위  떨쳐’라는  기사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경찰  무기의  압수,  경찰  처벌,  진압군 

처벌,  유엔이  지원하는  5·10선거의  철회  보장  등  5개항의  항복요구  사항을  제시했다고  보

도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문은  “스탈린이  유엔  감독하의  선거를  사보타주하기  위한  노력에 

유격전을  더하고  있다”며  제주도  사태를  예로  들었다(「Washington  News」  1948.5.5). 

5·10선거를  열흘  남짓  앞두고  4월  29일에  이어  5월  5일  다시  제주도에  내려온  딘  군정장관

이  김익렬  연대장을  박진경  연대장으로  교체했다.

5·10선거를  앞둔  지극히  중요한  시기에  그의  두차례의  제주도  방문은  제주도  사건이  안

고  있는  폭발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같은  날  서울로  올라간  딘  군정장관은  서울에

서  제주도  사태를  “5·10선거에  반대하는  북조선  공산군  간자(間者)에  의한  사주로  일어난 

것”으로  인식했다(「우리신문」  1948.  5.  8).

「워싱턴포스트」도  “딘  소장이  제주도  시찰을  마친  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

에  상륙해  선거반대  테러  과정에서  게릴라들을  지휘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기사

를  실었다(1948.  5.  7).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나,  미국무성과  군

부의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의  언론에  보도되는  제주도  사태를  주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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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5·10선거의  실패와  미군정의  공세

1)  제주도  5·10선거의  실패

좌익의  선거반대와  대부분의  우익  및  중도파가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5·10선거는  미군정

과  이승만  계열에  의해  주도적으로  준비되고  실행됐다.  이들은  선거의  ‘자유  분위

기’(free  atmosphere)보다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경찰과  우익청년단

체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국회선거위원회는  1948년  4월9일  마감된  선거등록  결과  모두  805만5,798명이  등록하여 

등록률이  91.7%라고  4월14일  발표했다.4)  이러한  선거등록  결과에  대해  하지  중장은  4월13

일  성명을  내고  “전유권자의  90%  이상이  등록을  완료하였으므로  5월10일  시행될  총선거

에  투표할  자격을  가졌다.…압도적인  투표  등록  성과는  어떠한  강요에  의해서는  도저히  불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것도  자타가  모두  다  공인하는  바”라고  발표했다(「동아일보」 

1948.4.14).  그러나  한국여론조사협회의  여론조사  결과는  응답자  91%가  강제등록을  한  것

으로  나타나  이런  주장을  무색케  했다(「조선일보」  1948.4.16).

하지는  ‘압도적  투표  등록  성과’에  고무됐지만,  제주  지역의  등록률은  전국  시·도  가

운데  최저치인  64.9%에  지나지  않았다.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주한미군사령부는  5

월8일  5·10선거에  대비해  남한  주둔  미군에  “미군은  남한의  선거에  대한  공산주의의  공격

을  저지하도록  원조하기  위해  경계령을  내리고  경찰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

계령을  내렸다.

이어  선거  당일에는  미  태평양함대  소속  순양함과  구축함  등  2척이  남한  해역에  들어왔

다.  미군정  경찰도  본격  선거체제에  들어가  4월30일  경무부장  조병옥이  총선거에  대비한 

남한의  치안확보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고,  선거  당일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향보단과  경찰

력을  총동원해  투표소를  왕래하는  도로의  주요  지점과  같이  기타  주요  장소를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무장경찰,  향보단원,  미군의  경비태세  등  삼엄한  경계  하에  첫  선거가  남

한에서  실시됐다. 

하지의  정치고문관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5월12일  국무성에  보고한  선거  당일의 

모습에  대해  자신의  참모의  시찰을  인용해  “훌륭한  투표시설과  주민들의  반응,  자유롭고 

4)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09,  April  1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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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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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스런  선거분위기가  있었다”며  “선거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럽다”고  밝혔다. 

부영사  마크(David  E.  Mark)도  선거비망록을  통해  “과거  미국의  정책이  한국사회에서  우

익  정치집단의  장악을  불러오고,  이승만에  대한  반대세력으로서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반이

승만  진영의  기를  꺾는데  많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5)

제주도는  5·10선거  기간  동안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요가  발생한  지역  가운데  한곳이었

다.  5월7일부터  5월11일  오후  2시까지의  선거  관련  제주도의  소요  현황을  보면,  △경찰  사

망  1명  부상  21명  △우익인사  사망  14명  부상  5명  △공산주의자  사망  21명,  주택  방화  22

곳이었고,  경북지방은  △경찰  사망  1명  부상  2명,  선거위원  사망  1명  △우익인사  사망  8명 

부상  18명  △공산주의자  사망  20명  부상  4명  체포  177명  △지서  습격  5명  △기관차  파괴 

17개  등이다.6)

미군정은  미국인  관리들에게  투표소에  출입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과는  달리  제주도에

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미군이  직접  선거에  개입했다.  미군들은  제주도에서  선거

현장  감시는  물론  선거  실시를  위한  투표함  수송  및  점검  등에도  참여했는가  하면  직접  투

표장에서  투표  현장을  감시하기도  했다.7) 

미군정  장교들은  3개반으로  나눠  제주지역에  대한  선거감시활동을  벌이고,  종합보고서와 

함께  각  반이  작성한  자세한  선거감시보고서를  군정청에  제출했다.  서울에서  파견된  군정

장교인  스피어(T.  J.  Speer)  대위,  테일러(Herbert  W.  Taylor)  대위,  번하이젤(Charles  K. 

Bernheisel)  중위  등  3명은  5월5일  제주에  들어와  제59군정중대  장교들과  합류해  선거감시

활동을  벌인  뒤  5월15일  서울로  돌아갔다.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은  이들이  도착한  다음날인  5월6일 

감시활동을  할  지역을  배정했다.  이에  따라  번하이젤  중위는  구좌면에  배치됐고,  제59군정

중대  켈리(David  C.  Kelly  Jr.)  대위는  조천면에  배치됐다.  5월7일  이들  장교  2명은  자신들

이  담당한  지역에서  하루종일  투표소를  방문하고  각  면사무소로  투표용지를  전달했으나  2

5)  Despatch  No.  124,  Enclosure,  Memorandum  on  Elections(Vice  Consul  David  E.  Mark),  Jacobs  to 

the  Secretary  of  State,  Subj:  Observation  of  Elections  in  South  Korea,  May  12,  1948.

6)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31,  11  May  1948.

7)  Inclosure  No.  46,  Report  of  General  Observation  of  MG  Election  Observation  Teams,  Cheju  Island, 

“Report  of  the  Military  Governor  of  holding  of  elections  in  South  Korea  on  10  May  1948,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a  Korean  National  Assembly  and  Government  under  the  observation  of  the 
United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이하  MG  Report),  W.  F.  Dean  to  Hodge, 
Subj:  Report  of  the  Holding  of  Elections  in  South  Korea,  10  July  19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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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개  면에  대한  감시결과는  상반됐다.

켈리  대위는  조천면에  대해  “파괴분자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것으로  보이며,  규정된 

선거절차에  대해  희망이  없는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반면,  구좌면에  대해서는 

“선거전  단계가  ‘국회의원  선거  시행규칙’에  지시된  제반  절차를  따르고  있으며,  훌륭하

게  선거준비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북제주군  애월면과  한림면,  추자면을  맡은  스피어 

대위는  각종  도로  장애물과  무장대가  뿌린  유인물을  발견했고,  주민들이  산으로  피신한  사

실도  확인했다.

자발적이거나  강요에  의해  주민들이  중산간  지대로  오르자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무더기 

대리  투표가  이뤄졌는가  하면,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행위도  잇따랐다.  미군정  요원들의 

선거감시활동  보고서는  선거가  치러진  투표소와  주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뿐  주민들

이  선거를  반대하거나  무장대에  의한  선거반대  투쟁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미군정이  투표함  직접  호송,  투표소  직접  감시  등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제주도  5·10

선거에서  남제주군  선거구는  투표율이  86.6%였으나,  북제주군  갑  선거구는  43%,  북제주군 

을  선거구는  43%의  투표율을  보여  과반수에  미달했다.  국회선거위원회는  선거법  제44조에 

따라  5월19일  딘  군정장관에게  제주도  북제주군  갑과  을  선거구의  선거무효를  건의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의  선거  실패가  남한의  전체  선거구도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

면서도,  “이들  선거구는  파괴분자들의  활동과  폭력행위  때문에  인민의  진정한  의사표현으

로  볼  수  없다”며  선거무효를  선언했다.

이어  5월26일에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6월23일에  재선거를  치를  것을  명령했다.  남한  단

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에서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유혈사태가  빚

어졌으나,  유독  제주도에서만  선거가  실패한  것이다.  미군정이  5·10선거의  성공을  강조하는 

그  이면에서는  선거가  실패한  뒤  공산세력의  척결을  구실로,  혹독한  진압을  예고했다.

2)  미군정의  총공세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4·3이  발발한  제주도의  5·10선거는  선거기간  동안  폭력행위의  강

도에  있어  다른  지방의  선거에  따른  소요와는  양상이  달랐다.8)  딘  군정장관은  하지  사령관

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에서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

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고  밝힐  정도로  제주도  소요를  예의주시했다.

8)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38,  7  May  1948;  No.  139,  14  May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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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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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중장과  UNTCOK가  5월12일  남한의  5·10선거에  대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

(「경향신문」  1948.5.12;  5.30)한  가운데  미군은  제주도  소요에  대해  강력한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미극동사령부는  하지  중장이  ‘민주주의  승리’라고  발표한  12일  구축함  크레이

그(Craig)호를  제주도에  급파하고,  상황이  악화되면  전투기  사용까지도  고려했다.  같은  날 

미군정  스탠리(Stanley)중령이  제주도에  급파됐다.  5·10선거의  실패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

군정이  전면적인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비대는  5월14일부터  21일까지  조천면 

송당리와  교래리에서  동굴  수색과  진압작전을  벌여  200여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9)

박진경  연대장은  매일  한  사람이  한명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강경  진

압작전을  전개했다(「서울신문」  1948.8.15).10)  이와  동시에  미보병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

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이  5월제주도  사태의  진압을  위해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브라운  대령은  제주도의  모든  고문관들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제주도  주둔  경비

대와  경찰  등  제주도의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는  최고  지휘권을  맡았다.11)

하지  중장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제주도  지구  CIC에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브라운 

대령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12)  브라운  대령은  6월2일  “지난  5·10선거  때는  성적이  좋지 

못하였는데  백성들을  보호함으로써  6월23일  재선거시에는  진정돼  자유롭게  대표를  선출하

도록  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원인을  치유하지  않은  무력진압은  사태의  해결을  어렵게 

할  뿐이었다.  조선중앙일보  조덕송  특파원은  현지발  기사를  통해  제주도  상황을  다음과  같

이  전했다(「조선중앙일보」  1948.6.10).

 

농림기임에도  들판에서  볼  수  없는  촌민을  만나려  일행은  부득이  마을로  들어갈  수  밖에는 

없었다.  철갑  군대무장을  빌려  입은  일행의  모양을  무엇을  인정하였는지  길에  서있던  마을사람

들은  피하는  듯  집안으로  들어간다.  순박하여야  할  그들의  표정이  왜  이다지도  공포와  회의의 

빛에  말없이  어두우냐.  이  마을  역시  한번  산으로  올라갔다  돌아온  사람들이다.  간신히  일행의 

신분  목적을  알린  다음  더듬더듬  대답하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다시  부락으로  돌아왔지만  옷

을  벗고  밤잠을  잔  적이  없었다.  눈  앞에다  거두어드릴  곡식을  두고도  무서워서  밭에  갈  수 

없고  산사람이  오면  또  언제  산으로  올라가게  하게  될는지!…국방경비대나  경찰이  주둔하면  그

들은  양민이  되고  산사람이  내려오면  또한  그들  자신도  산사람이  되는  것이다. 

9)  Hq.  XXIV  Corps,  G-3  Operations  Report  No.  26,  22  May  1948.

10)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손선호  하사의  진술.

11)  Charles  L.  Wesolowsky증언.

12)  CG.  USAFIK  to  59th  MG  Group,  Chejudo,  Undated,  RG  338,  NAR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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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상공에는  미군  정찰기가  날고,  제1선에는  전투를  지휘하는  미군의  지프가  질주하고  있으

며,  해양에는  근해를  경계하는  미군함의  검은  연기가  끊일  사이  없이  작전을  벌였다(「조선

중앙일보」  1948.6.6).  그러나,  미군정은  6·23재선거를  치를  상황을  만들지  못하자  6월10일 

행정명령  제22호를  공포하고  제주도의  재선거를  무기  연기했다.  결국  브라운  대령도  6월23

일로  연기된  재선거를  성공시키지  못했으며,  ‘점령기간내  핵심적인  성과’라던  선거가  두 

번씩이나  실패했다.

6·23  재선거가  무기한  연기되자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은  진압작전을  한층  강화해  경

비대  1개  대대당  2중대  규모로  편성된  대대를  제주도의  동서남북에  주둔시켜  모든  대대가 

한라산  고지대를  향해  내륙으로  전개하는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으로  3천여명이  체포됐으며,  575명이  수용소에서  경비대와  미군으로  구성된  4개 

심문팀의  심사를  받았다.13)  브라운  대령의  중산간  지역에  대한  고립  및  검거작전으로  5월

22일부터  6월30일까지  검거된  도민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

군정장관  대리  콜터(John  B.  Coulter)  소장이  6월15일  소요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제주도

를  방문한  사흘  뒤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의  부대장  및  야

전지휘관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인물의  한명으로  평가’받던  박진경  암살사건은  미군정의  비

상한  관심을  모아  딘  군정장관뿐  아니라  로버츠  준장과  그의  참모들이  대거  제주도에  내려

왔다.  이들은  전날  열린  진급식에  참석한  뒤  상경했다가  암살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내려온  것이다.  이어  경비대원들에  대한  무장해제와  함께  한국군내  최초의  숙군작업이  실

시됐다.

제주도  상황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에서  강력한  (선거방해)시도를  했으며,  분명

히  다른  지방과  북한으로부터  많은  수의  훈련된  선동가와  다량의  무기,  탄약을  들여왔다”

며  “이런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는  경무부장  조병옥의  시각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쪽에서  나오는)  라디오방송에서는  제주도를  ‘동양의  그리스’로  취급할  것”이라고  분석

한  미군정의  시각은  제주도  소요사태의  원인  치유와는  거리가  멀었다.14)

13)  Inclosure,  Memorandum  for  CG.  Subj:  Visit  on  Cheju  Do,  Coulter  to  Hodge,  15  June,  1948, 

Despatch  No.  199,  Subj:  Disturbances  on  Cheju  Island,  Joseph  E.  Jacobs,  U.S.  Political  Advisor 
to  the  Secretary  of  State,  July  2,  1948.

14)  Subj:  Report  of  U.S.  Liaison  Officer  with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  John  Weckerling  to  CG.  USAFIK,  7  June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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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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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초토화작전과  재선거를  위한  정지작업

    1)  초토화작전:  여순사건의  영향

제주4·3봉기  이후  제주도민들에  대한  학살사건은  1948년  10월하순부터  1949년  1월사이

에  집중됐다.  초토화작전15)은  정부  수립후  미군  철수가  시작되고  여순사건이  발생한  직후 

시작됐다.  여순사건의  진압으로  수개월동안  소요가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의  소요사태를  진

압하기  위해  미군  수뇌부와  정부는  자연스럽게  제주도  무장대  세력의  제거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미국은  미군이  철수하면  동해안을  따라  게릴라작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견하고,  이를  이

끄는  그룹은  제주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그룹일  것이라고  보았다.16)  이에  따라  미군은 

우선  철수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제주도  소요를  진압해야  미군의  명예로운  철수와  신생  대

한민국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 

국방경비대의  작전지휘권은  ‘한미군사행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대의  모든  작전명령은  이를  발표하기에  앞서  해당  미고문관을  거치도록  돼  있

었다.17)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  준장이  이를  국무총리  이범석에게  상기시킬  정도였다.

제주도  주둔  고문관들도  미군의  철수  때까지  제주도에  남아서  현지  작전에  대한  조언과 

한국군에  대한  훈련을  실시했으며,  주한미군  사령부  정보참모부는  경비대에  게릴라  상황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10월20일  이후  5㎞  이내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

주하겠다”는  포고문  발표(10월17일)에  이어  초토화작전을  앞두고  제주도  주둔  경비대의 

증강을  위해  증파될  예정이던  제14연대  제1대대가  10월19일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  여순사

건이  일어났다.18)

15)  초토화작전은  일본군이  만주에서  의병운동을  진압할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의병의  근거지가  되는  산

간  소마을을  불태워  평지의  일본군  지배  하에  있는  마을로  집단  이주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1930년대의  만주에  있어서의  집단마을과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취한  전략촌의  원형이  되는  전술이
었다(藤原  彰(엄수현  역)  1994,  138).

16)  Hq.  USAFIK,  JOINT  WEEKA  No.  34,  21  Aug  1948.

17)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고문관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  준
장이  국무총리  이범석에게  보내는  서한,  1948.9.29(제주4·3위원회,  『제주4·3자료집』8,  2002,  90-91).

18)  1948년  8월대정면  모슬포에서  대대  고문관으로  근무했던  켈소(Minor  L.  Kelso)  예비역  중령(당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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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소속  고문관  웨스트(West)는  10월22일 

제주도  주둔  제9연대  고문관  버제스(F.  V.  Burgess)  대위에게  “정찰을  시작하고  본토의 

반란군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색출할  것”을  지시하고,19)  정보주임에게  전화로  메시지를 

남겨  “여순사건과  관련한  심사가  이뤄질  때까지  제주도  상륙을  감시하고  체포”토록  지시

했다.  여순사건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맞물리면서  미국으로서는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은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보여준  경비대의  문제점에  대해  예정된  12월의  주한미군  철수에  앞

서  개선이  이뤄질지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미군이  철수한  뒤  남한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한국군의  능력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자연히  제주

도  소요사태의  진압문제가  최대  관심사로  부상하게  되었고,  제주도  토벌작전에  커다란  영향

을  주게  되었다.

송  연대장의  포고문  발표와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제주도의  무장대는  10월24일  선전포고

와  함께  호소문을  발표하고,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송  연대장이  이끄는  제9연대의  초토

화작전은  사실상  10월하순에  시작됐다.

제9연대는  10월29일  애월면  고성리  부근에서  제2차  작전을  벌여  135명을  사살하는 

등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시작됐다.  주한미대사  무초(John  J.  Muccio)는  11월3일  국

무성에  보낸  전문을  통해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을  섬멸하는데  있어  정부의  눈에  보이

는  무능력에  대한  긴장감이  여전하다”며  한국군의  ‘능력’을  우려했다.  이는  남한  정

부로  하여금  제주도  사태의  진압을  위해  더욱  강경한  진압작전을  전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로버츠  준장은  송요찬  연대장이  강력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CIA의  활동도  우수하다

고  평가했으며,20)  송  연대장은  하지  중장에게  보낸  추천서를  통해  “10월10일부터  임무를 

수행한  정찰  조종사  에릭슨(Fred  M.  Erricson)  중위가  반란군의  집결지,  사령부,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제9연대에  넘겨줘  진압할  수  있게  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21)

위)은  여순사건을  최초로  목격한  미군  고문관이다.  그는  “순천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지프를 
몰고  가기  위해  도로에  죽어있는  민간인들을  끌어내기도  했다”면서  “처형에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포함돼  있었다”고  밝혔다(마이너  켈소가  필자에게  보내온  서한,  2001.9.10).

19)  Radio  32,  Message,  West,  Advisor,  G-3  to  Capt.  Burgess,  Chejudo,  1250  22  Oct  1948.

20)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제24군단  사령관에게,  군사고문단  주간활동,  1948.11.8;  11.15(제주4·3위

원회,  앞의  자료집,  72-73).

21)  송요찬  연대장이  제24군단  사령관에게,  군사고문단장  경유,  제목:  에릭슨(Fred  M.  Erricson)  중위에 

대한  추천,  1948.12.6(제주4·3위원회,  『제주4·3자료집』10,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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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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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G-2  보고서만  보더라도  11월1일부터  21일까지 

제주도  상황은  경비대원  5명과  경찰관  1명의  사망을  제외한  희생자는  358명으로  하루  평균 

17명이  사살됐다.  11월13일에만  156명이  사살됐다.22)  이승만은  제9연대장에게‘가능한  한  빠

른  시간  안에’(at  the  earliest  possible  time)  봉기를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Washington 

Post」  1948.11.19).

미군  보고서는  제9연대의  작전이  중산간  마을의  주민들이  게릴라들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한다는  전제  아래  민간인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  among  civilians)을 

채택했다고  밝혔다.23)  수많은  도민이  학살되는  가운데  1948년  12월17일자  미군  보고서는 

“최근  제9연대의  진압작전이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는  수준  높은  작전을  전개하려

는  열의와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열의  때문”이라고  분석했다.24)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처럼  중산간  지역에  피신한  도민들은  무차별  학살됐다.  초토화작전 

시기의  제주섬은  ‘죽음의  섬’이었고,  ‘킬링필드’였다. 

제주도  지구  CIC는  “폭도들의  활동이  감소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9연대의  공세작전 

때문”이라며  “공식  보고된  사상자수는  3,549명이지만  믿을만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5,000여명이  넘을  것이  확실하다”고  분석했다.25)    주한미사절단은  이런  희생자들에  대해 

“이들이  모두  진짜  게릴라들인지  의심스럽다”고  논평했으나,26)  송  연대장이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함으로써  무장대의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민들에  대한  학

살을  묵시적으로  방조했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2월20일  제주도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불러온  송요찬의  작

전을  격찬하고,  이런  사실을  언론과  대통령을  통해  널리  알려야  한다고  추천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국군에  의한  대량학살을  합리화시켰을 

뿐  아니라  더욱  조장하였다.

2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9,  16  Nov  1948.

23)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4)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15,  17  Dec,  1948.

25)  Despatch  No.  11,  Inclosure  No.  1,  Subj:  Political  Survey,  971  CIC  Cheju,  21  Nov,  1948,  Subj: 

Transmitting  Report  of  Developments  on  Cheju  Island,  Drumright  to  the  Secretary  of  State,  Jan  7, 
1948.

26)  COMGEN  USAFIK  to  CINCFE,  Tokyo,  Japan,  21  Nov,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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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2.  5·10재선거:  대량학살이  남긴  상처

1949년  1월소련  잠수함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는  미국  언론들의  대대적인  보도는  미

국을  자극했다.  「워싱턴포스트」는  1월9일자에서  ‘소련  잠수함에서  제주  공격신호’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어  1월8일  3척의  소련  잠수함들이  4일  전 

남한  연안에  나타났으며,  제주읍을  공격하라고  게릴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

를  이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척의  잠수함이  오후에  삼양마을  연안에  나타났고,  1척은  밤에  한림리  연안에  나타났다.  제

주도  경찰이  연안에서  소련기를  확실히  보았다고  보고했다.  삼양마을  연안의  잠수함들이  불빛

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발포는  하지  않았으며,  산간  내륙에  포와  기관총들을  은닉한  1천여명으

로  추정되는  게릴라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려고  했으며  상륙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잠수함들은 

연안으로부터의  경찰의  강력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4시간  동안  삼양마을  연안에  머물렀다고  내

무부  비상경비본부는  말했다.  한림리  연안의  잠수함은  다음달  오전까지  떠나지  않았다.

같은  날  「뉴욕타임즈」도  이를  보도했다.  이처럼  미국의  언론들은  소련  잠수함의  출현

설에  대해  마치  직접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자세하게  보도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

는  나오지  않았다.27)  하지만  이러한  보도는  미국무성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1949년  1월2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시하지만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

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지시했다.28)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서는  제주도와  전남사건  관계자들을  ‘가혹한  방법’으로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하지  중장의  전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개인  고문격인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  대령은  1948년  말  이승만에게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국

무장관  애치슨과의  대화를  통해  게릴라들이  속히  제거돼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공

27)  “반군(rebel  forces)이  본토와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들이  있으나  이들  보고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한국  해군에  의한  지속적인  정찰활동과  정찰  비행,  해안마을에서의  경찰의  치밀
한  감시는  외부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시키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May  1949).

28)  제12회  국무회의록,  194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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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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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있다”면서  “나약한  정책은  워싱턴의 

지지를  상실하고,  위협에  잘  대처하는  것만이  많은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밝혔다.29)  한

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준장은  1월26일  유엔한국위원단(UNCOK)  1진의  1월30일  입국을  앞

두고  UNCOK의  활동과  국민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폭도와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하도록 

육군과  해군에  명령했다.  ‘가혹한’  탄압을  지시한  이승만은  1월28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는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하며,  군  1개  대대,  경찰  1,000명을  증

파하게  되었으니  조속히  완정(完征)하여  줄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월31일  제6여단  유격대대가  제2연대와  함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제주도로 

이동했고,  군  참모장은  제주도와  지리산의  소요로  유엔의  불신을  받는  일이  없도록  지시함

으로써  무차별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승만은  2월2일  굿펠로우의  1948년  말  남한내  게릴라  제거를  촉구하는  서한에  따른  답

신  형식으로  “제주도에  대규모  경찰과  군  응원대를  파견해  공산  테러리스트들을  조만간 

체포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와  작전참모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1949년  1월5일부터  5·10재선거가  끝난  5월13일까지  ‘무장대’나  ‘폭도’로  분류된  사살

자만  1,262명이고,  포로로  붙잡힌  제주도민도  2,523명에  이른다.  1월17일에는  이른바  ‘북

촌리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2월20일에는  제주읍  도두리에서  민보단에  의해  ‘반

도’(insurgents)라고  규정된  76명이  집단학살됐는데,  이  가운데는  중학생  나이의  소년들과 

여성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현장을  목격한  미군사고문단은  이를  제지하거나  중단시키지  않았으며,  ‘민보단

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고  논평했다.30)  미군은  “폭도라  하더

라도  그들에  대한  반인륜적  잔인성과  적법절차의  부정은  한국  고위관리들의  우려를  강력히 

불러일으켰으며,  그러한  폭력행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개념과  모순된다”고  지적했으

나,  남한  정부에  그러한  우려를  전하거나  제재조치가  취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군은  소탕작전을  위해  1949년  3월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했으며,  이승만은  재

차  3월8일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게  제주도와  전남  등지를  철저히  소탕하라

29)  Goodfellow  Papers,  Box  1,  draft  of  letter  to  Rhee,  no  date  but  late  1948,  Bruce  Cumings,  The 

Question  of  American  Responsibility  for  the  Suppression  of  Chejudo  Uprising,  Presented  at  the 
50th  Anniversary  Conference  of  the  April  3,  1948,  Chejudo  Rebellion,  Tokyo,  March  14,  1998,  p. 
11에서  재인용.

30)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77,  3  March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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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지시했다.31)

주한미사절단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는  3월10일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에게  제

주도  상황과  관련해  서한을  보내  “제주도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으며,  이런  상황

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다음날  로버츠는  드럼라이트에게  회신을  보내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제

주도의  게릴라와  군사작전  등에  대해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고  밝혔다.32)  이는  제주도  사

태  진압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문관에게  매우  협조적인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하버러(Walter  J.  Haberer)  중령의  자문을 

받아들이면서  작전을  수행했다.33)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미고문관의  지도를  받으면서  제주

도  소탕작전을  벌인  것이다.  드럼라이트는  제주도  상황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악화됐다”고  지적했으나,  무장대의  활동이  적극적인지  아니면  진압군의  진압정책이  무차별적

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34)  「뉴욕타임즈」는  3월15일자  ‘한국에서  반란군  추적  개시돼’라

는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의  기사를  통해  한국군의  제주도  토벌  상황을  전했다.

한국  육군은  남한을  테러하고  있는  공산주의  주도  게릴라  도당들에  대해  봄철  공세를  시작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3일  육군  지휘관들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방화

하고,  시골에서  식량을  약탈하는  반란군들을  체포하거나  소탕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함께  이 

대통령은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이범석과  내무장관  신성모를  수천명의  반란군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남해안에서  50마일  떨어진  황폐화된  제주도에  파견했다.

정부  소식통은  14일  반란행위로  제주도가  마비됐고,  25만여명  대부분을  내륙지방에서  해안마

을로  강제이주시켰다고  말했다.  정부  대변인은  지난해  여름  이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은  제주

도민  숫자가  1만5,000여명이라고  말했다.  1만여채의  가옥은  방화로  파괴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골롬반  수도회의  스위니(Austin  Sweeney)  신부는  13일  서울에  도착한  서한을  통해  제주도 

인구  대다수가  기아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하루에  감

자  1개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년이상  제주도에  거주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농민들이  내륙의  농경지를  포기하고  섬의  몇몇  큰  해안마을로  이동했다고  밝혔다.

31)  제26회  국무회의록,  1949.3.8.

32)  주한미군사령관  로버츠  준장이  드럼라이트에게,  제목:  제주도  상황,  1949년  3월11일(제주4·3위원회, 

앞의  잘료집,  64-66).

33)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April  1949.

34)  Despatch  No.  142,  Subj:  Political  Summary  for  Feb,  1949,  Everett  F.  Drumright,  Counselor  of 

Mission  to  the  Secretary  of  State,  March  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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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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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반란군들은  본토의  공산주의자들이  운영하는  기지로부터  비밀리에  왕래하는  소형  선박

으로부터  잘  보급받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관영  북한  라디오방송은  주말에  “인민들의  저

항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제주도의  반란행위  성공을  계속해서  자랑했다.

3월16일에는  국무총리  이범석이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도에서  소련제  기관총과  탄약을  반

란군들로부터  노획했다고  밝히고,  소련이  훈련받은  게릴라  지도자들을  소련이  점령하고  있

는  한국의  북부지역으로부터  제주도로  몰래  들여오고  있다고  말했다(「New  York  Times」 

1949.3.17).  이러한  제주도  사태와  북한,  소련을  연계하는  한국  정부  관계자의  발언이나  미

국  언론의  보도는  과장된  것이었다.  이승만의  제주도  방문을  8일  앞둔  4월1일  현재  군·경 

토벌대의  숫자는  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5만여명이었다.  인구  28만여명의  땅에 

5분의  1에  가까운  인구가  토벌활동에  나선  것이다.

제주도  소탕작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무초는  4월4일  이승만을  만나  “한국은 

제주도와  전라남도에  만연한  게릴라  도당을  제거하고  보안군(진압군)을  훈련시킴으로써  남

한에서의  입장을  굳건히  해야  한다”고  진압을  독촉했다.  미국은  남한내  ‘공산주의  세

력’을  제거함으로써  제주도의  5·10  재선거를  성공시키고,  남한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지  않

으면서  6월30일의  예정된  주한미군의  철수가  끝난  뒤에도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세우겠

다는  계획이었다.

4월9일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이승만은  ‘게릴라에  대한  정열적이고 

성공적인  진압’을  한  유재흥  대령과  경찰,  민간기관을  격려했다.  무초는  같은  날  국무장관

에게  “제주도가  남한에  혼란을  퍼뜨리고  테러를  가하기  위한  소비에트의  주요노력의  장소

로  선택됐다는  것은  통제를  받은  라디오방송으로부터  나오는  선전의  본질을  보면  분명해진

다.  이는  본토의  전남과  경남에서  지속적이고도  유사한  작전으로  지속됐다.  대한민국  후방

지역의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소요와  불안정을  제거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소비에트  요원들이  큰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소련이  남한  테러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를  채택했고,  소비에트  요원들이  제주도에  들어

오고  있다는  무초의  발언은  아시아에서  반공  보루를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

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민간인들이  아무리  많이  희생되더라도  토벌하지  않으면  안될  대상

으로  인식한  것이며,  제주도를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무대’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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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무초에게  제주도  방문  결과와  관련하여  군의  작전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섬멸되었음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  규정돼  섬멸된  제주도민의  대다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군·경과  무장대가  무서워  이리  저리  피신해야  했던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의 

대화  어디에도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이데올로기만  존재했

다.

주한미대사관은  5월2일  “3월시작된  전면적인  소탕작전이  4월말  사실상  막을  내렸고,  대

부분의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죽거나  체포됐고,  사상을  전향했다”고  국무성에  보고했다.35) 

주한미군사령부  G-2는  한국  쪽  정부자료를  인용해  1949년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반

도’  사살  1,075명,  체포  3,509명,  투항  2,063명,  진압군  사망  32명,  부상  17명의  인명피해

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처럼  ‘반도’들의  숫자가  많은  이유에  대해  진압군이  제주도  중

산간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모두를  통상적으로  반도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논평했

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5월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해체와  군경  철수는  토벌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월  9일  후보자  등록  및  유권자  등록을  마감한  제주도  북제주군  5·10재선거는  갑  선거

구가  전체  유권자  3만8,230명  가운데  3만6,387명이  등록해  95%의  등록률을,  을  선거구는 

유권자  2만6,649명  가운데  2만5847명이  등록해  96.5%의  등록률을  보였다).  5월10일의  선거 

결과  갑구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소속의  홍순녕,  을구는  대한청년단  소속의  양병직이  당선

됐다.

제주도의  5·10  재선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국회  의석수  200석을  모두  채

우고,  남한  내부의  소요를  종식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대내외에  선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  뿐  아니라  미국으로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제주도  5·10재선거의  성공으로 

5·10단독선거가  실시된  지  만  1년  만에  완전한  대한민국  국회가  구성될  수  있었으나  그  이

면에는  공산주의자나  폭도로  몰린  수많은  제주도민들의  학살이  수반되었다.

유엔  한국대표  조병옥은  5월16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은  극동의  민주주의 

보루로서  투쟁하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며  제주도  사건을  예로  들면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미국의  원조를  요청했다.  정부는  제주도  사건의  진압을  ‘민주주의  보

35)  Airgram-60,  Everett  F.  Drumright,  American  Embassy  to  the  Secretary  of  State,  May  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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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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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를  위한  노력으로  평가했다.  무초는  5월26일  한국의  국방장관과  교통장관에게  한국군

이  제주도와  지리산  작전에서  거둔  ‘성과’를  언급하며,  한국의  진압군은  이러한  행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치켜세웠다.36)

재선거가  성공했으나  제주도의  무장대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5

월22일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  등지를  소탕하기  위해  무기가  필요하다”며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이처럼  공산주의  척결을  명분으로  한  학살은  5·10  재선거가  끝난  뒤에도 

계속됐다.  체포되거나  귀순한  제주도민들은  재판과정에서  형식적이거나  재판  절차도  없이 

가혹한  선고를  받았으며,  숱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6월  3일부터  7월12일까지  민간인  1,652명과  군인  47명을  기소해  345명에게  사형을  선고

했고,  238명에게는  무기징역,  311명에게는  15년형,  705명에게는  7년  이하  징역형을  선고했

으며,  54명에게  무죄를,  46명은  석방했다.  10월2일에는  이승만의  승인에  따라  제주도에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249명이  집단처형됐다.  10월13일,  무초는  국무성에  “제주도 

작전이  너무나  파괴적일  정도로  성공해  ‘반도’들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섬’에서 

어떠한  회복도  할  수  없음을  보고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보고했다.37)

제주도에서의  작전은  미대사관의  관심과  대책  제시,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계속됐다.  제주도경찰국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것은  1954년  9월21일로, 

4·3봉기에서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2만~3만여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다.

5.  맺음말

미군과  미군정은  3·1사건에  대한  대책의  미숙  내지  정책적  오판을  했다.  미군정은  사태

의  진상조사보다는  남한  총파업의  시금석으로  간주하며,  제주도를  좌익거점으로  보았으며, 

이는  4·3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어  주한미군사령부는  점령기간중  ‘핵심적인  성과’라는  5·10선거의  성공을  위해  총력

을  기울였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의  5·10선거가  실패하자  미군  대령을  최고  사령관

으로  전면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36)  Despatch  No.  607,  Muccio  to  Department  of  State,  26  May,  1949.

37)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Oct  13,  1949, 

FRUS,  1949,  Vol.  Ⅶ, 

pp.  1086-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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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  과정에서  미국  언론의  보도태도는  사건의  본질보다는  단편적인  사건보도와  제주도 

사태를  소련  내지는  북한과  연계시킴으로써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

으로  보인다.  초토화  시기는  물론  4·3  봉기  이후  사건이  최종적으로  끝나는  시점까지  미

국은  제주도  사태의  진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제주도민들의  대량학살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초토화작전과  관련해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부분적인  자료

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미국  고위관리들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시각이 

제주도  사건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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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함(金明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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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나의  삶  나의  문학은  아름다운  넋(영혼)을  꽃피워내는  살림살이입니다.  평화의  토대  위

에서

첫째로,  평화정신으로  나를  채우는  일입니다.

둘째로,  평화정신을  지켜내고,  안간힘을  써서  평화정신을  깨트리려는  내적,  외적  세력·침

략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셋째로,  평화정신을  현실화-발현시켜내는  일입니다.  평화정신의  토대  위에서  죽임-살해가 

없는,  모두가  모두를  살리는  살림의  문화를  꽃피워내는  일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참  삶이고 

참  문학-문화라  여겨집니다.  평화의  정신은  바로  살림의  문화를  구축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

니다.  살림의  문화는  바로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그  나라-그  사회-그  마을-그  가정-나를 

나답게  꽃피워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모든  그리움이  실현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  넘치는  제  삶의  고향인  평화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  서로가  한  몸이  되어  노동이 

축제가  되는  그러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게  「나의  삶」이고,  그러한  삶  자체가  「문학

이  되고  문화가  되는」  그러한  희망으로  오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  나의  문학은  바로  희망의  나라로-평화의  나라로-평화의  살림살이로-평화의  문학-

[

]

나의  삶  나의  문학

-  평화정신을  바탕으로

다사함  (金明植)

울림글쓰미(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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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평화의  文化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살림문화의  정신적  토양을  일구어 

내어,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넋(영혼)을  한없이 

꽃피워내는  일이  되어야  하며,  살림의  방식이  되고,  살림의  문학-예술,  즉  살림의  문화가  되

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림의  文化는  평화의  토대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토대  위에서  살림살

이를  영위해왔다고  여겨집니다.  살림문화의  토대란  흙·땅의  토대요,  바다·물의  토대이며,  산과 

오름의  토대,  그리고  제주말과  글의  토대입니다.  나의  삶과  문학도  바로  이  네  가지  토대의  깊

이와  넓이를  모체로  해서  오늘날까지  일구어왔다고  여겨집니다. 

    평화의  정신도  살림(살아있음)  文化의  토대  위에서  피어난다고  여겨집니다.  글쓰기(문학)

를  통해서  평화를  꽃피워내는  일도  위에든  네  가지의  바탕  위에서  꽃을  피워내고,  알차게 

열매  맺게  한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다  피워내지  못한  제주4·3민중해방투쟁

의  지향도,  제주  땅·흙의  토대,  제주  바다·물의  토대,  제주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의  토대, 

그리고  제주  말과  글의  토대  위에서  평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내려고  했던  평화

혁명의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땅·흙이라는  토대

    땅·흙은  살아숨쉬는  목숨들(생명체)  모두에게  살림의  토대가  됩니다.  「땅」이라는  말  자

체가  「모두  다  한몸-우주되게  한다」를  뜻합니다.  「흙」이라는  말도  「하늘  따앙  사람이 

(하늘  내려주신  바)  그대로  한울이다(人乃天)」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땅·흙이  무너지

면,  썩으면  천대받으면  우리가  무너지고  우리가  썩어지며,  우리가  천대받게  됩니다.  땅·흙

이야말로  천하지대본(土地天下之大本也)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땅·흙의  토대  위에서  평화(정

신,얼,넋)는  자라고  꽃  되며  열매  맺게  됩니다.  땅·흙은  우리네-모든  생명체의  몸이기  때문

입니다.  땅·흙은  우리네-모든  생명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땅·흙은  우리네  조상들의  영혼, 

정신인  넋이  묻혀  있으며  조상들의  숭고한  피와  살,  뼈가  묻혀있는  오늘도  살아계시는  거

룩한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네  살림살이의  배움터(학교)입니다.  일터이고  고향이며,  그리운 

나라입니다.

    우리의  평화정신은  바로  땅·흙의  평화정신에서  움튼다고  여겨집니다.  땅과  흙의  평화정

신은  현실화-발현시키는  일이야  말로  참  삶이고,  바로  그  삶이  문학이  되고  문화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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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함(金明植)  | 

77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믿음-신앙인  것입니다. 

    땅·흙의  평화정신은  제물(자연)이라는  평등한  토양  위에서  모든  생명체를  길러내고  아름

답게  꽃  피워내며,  드디어는  알찬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제물(자연)평화  살림살이의  정신을  낳게  합니다.  땅·흙은  정직합니다.  땅·흙은 

원수도  없고  적군도  없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양식을  평동,  평화하게  나누어  줍니다.  이

러한  땅·흙의  정신이야  말로  참  삶의  토대이며  참  문학-문화의  길이라고  여겨집니다. 

2)  바다·물이라는  토대

    「물」은  「한울(참  뜻,  참  가치-real  value)」을  뜻합니다.  삶의  참  뜻(가치價値)과  문학-

예술-문화의  참  뜻(가치)도  우주  만물-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한  몸으로  살려내는  물인  한울

의  토대  위에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다는  모든  지상의  물과  지하의  물을  한데  모

아  놓은  한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바다는  「부도」라고  했으며,  모든  생명은  물·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지요.

    바다·물이라는  제물(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살려내는  생명수가  됩니다.  살아있음이란  살

아있는  물이  되고  살아있는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살아있음이  참  삶으로  승

화되고,  참  삶을  말과  글,  그리고  온몸으로  드러내는  예술-문화란,  참  한울이신  참  물이  됨

이요,  참  바다가  되는  일이겠지요.  참  물인  「나」,  참  바다인  「나」는  물처럼  바다처럼 

언제나  살아서  흘러내려야  하며  끊임없이  출렁거려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고  영원히  살

아있을  수  있게  되겠지요.  바다·물이라는  토대가  썩게  되면  우리  몸이  썩어집니다.  나의  삶

과  나의  문학은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나를  썩지  않게  하는  생명  활동이고,  나를  잘  살아있

게  하는  정신-정서활동인  것입니다.  바다·물이야말로  정신사적으로  평화의  토대이며  평화정

신을  길러내는  거름이라고  여겨집니다. 

    「바다」는  참  빛을  비추는  땅을  뜻합니다.  참빛은  모든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힘(Energy)

입니다.  바다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나」를  살아있게  함입니다.  「물」은  「참을  이루어내

는  힘(Energy)」입니다.  「바다·물」은  참으로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살림문화의  토대입니다.  특히  제주바다·물은  생명의  보고이며  우리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평화의  출렁거림-살아  춤추는  축제의  마당인  것입니다.  나의  삶  나의  문학은  살아  춤추는  축

제의  몸-나라를  구축하는  일인  것입니다.  제주바다·물은  그야말로  제주사람들에게  있어서  살

아있는  하늘나라요,  “아름다운  영혼-넋”을  탄생시키는  모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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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산·오름의  토대

    산·오름은  이렇게  「서있다」요,  이렇게  「오른다」를  뜻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21세

기가  저렇게  흘러간다고  해도,  산·오름은  이제  여기에서  나는  이렇게  「서있겠다」는  선언

이며,  나는  「이렇게  오른다」의  결의입니다.  그  결의를  튼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는  이렇게  서있겠다」,  「나는  이렇게  참  한울로  오른다」를  잃어버린-아닌(?)  빼앗겨버린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바로  산이고  오름인  것입니다.  그대는  어떠한  「산」으로  살아

가고  있으며,  어떠한  「오름」으로  고운뜻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고  있습니까?

    나는  날마다  「나의  산」으로  서있고자  하며,  「나의  오름」을  쉬임  없이  오르고자  합니

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나의  문학인  것입니다.

    「산」은  언제나  「산」으로서  서  있으며,  「오름」은  끊임없이  「오름」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오름-날마다  올라가는  살아있음이  다름  아닌  평화  살림살이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산으로  한라산을  살고,  나의  오름으로  그리운  그  나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4)  말소리·글의  토대

    말소리와  글이  죽으면  얼이  죽고  넋이  죽으며  사람이  죽습니다.  말소리와  글은  살아있는 

정신이며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토착어(제자리  말글-터박이  말글-토박이  말글)가  죽으

면  표준어가  죽게  됩니다.

    토착어는  우리의  모국어입니다.  모국어가  왜곡되고,  병들면  토착민이  왜곡되며  병들게  됩

니다.  살아있는  몸인  말소리와  글(생태언어학적  맥락에서)은  모든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명

체의  넋(영혼)을  아름답게  꽃피워내는  생명활동인  것입니다.  토박이(토착어-모국어)  말소리

와  글은  가장  자기다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살림문화의  알맹입니다. 

      토박이  말소리와  글은  우주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몸짓-살아있음의  몸놀

림-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소통과  결의,  웃음과  울음,  기쁨과  놀라움,  아픔과  버거움,  괴로

움과  사랑,  그리움과  사모함,  존경과  찬미를  드러내게  합니다.  말소리와  글은  우리네  넋(영

혼)을  아름답게  하는  넋(영혼)의  하늘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말소리와  글은  우리네  살림살이

를  넉넉하게  해주는  길잡이(이정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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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함(金明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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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마지막으로  -  제물(자연)살림살이를  제창하며

    제물(자연)은  우리에게  땅·흙으로,  물·바다로,  산·오름으로,  말소리·글로  한울의  힘과  그 

위대하심을  가르쳐줍니다.  제물(자연)은  우리에게  함께  아울러  살아갈  수  있는  평화의  정신

과  평화의  나라-평화를  짓는  길잡이  노릇을  하여  줍니다.  바로  제물(자연)-땅과  흙,  물과  바

다,  산과  오름,  말소리와  글은  우리네  삶과  문화,  예술을  무한히  자라나게  하는  어머니입니

다.  제물(자연)인  어머니  대지는  우리네  삶을  지켜주고,  넉넉하게  해주며,  우리네  문화(문학

-예술)를  아름답게  피어나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평화의 

토대가  되며  배움과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종합예술의  전당이  됩니다.

    우리를  사람(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길잡이는  바로  하늘의  짝이  되시

는  제물(자연)-골짜기입니다.  모든  문화와  평화의  나라는  제물(자연)  골짜기,  즉  땅과  흙, 

산과  오름,  물과  바다,  말소리와  그림(글)에서  비롯됩니다.

    나의  삶과  나의  문학-문화는  바로  평화정신의  산실이  되며,  모든  살아있음의  토대가  되

고,  모든  교육의  근간이  되는  제물(자연)을  이루는  땅과  흙,  산과  오름,  물과  바다,  말소리

와  그림(글)의  얼과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나를  지어주신  제주의  땅과  흙,  물과 

바다,  산과  오름,  탐라의  소리(말)와  탐라의  그림(글)인  제물(자연)은  평화의  토대로서  나의 

삶의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나의  문학의  보루입니다. 

그리하여  제주4·3민중해방의  역사도  제주라는  토양인  제물(자연)  속에서  평화의  꽃으로  태

어났습니다.  꽃으로  피어나야  합니다.  알찬  희망의  열매로  영글어가게  될  「제주  4·3  평화혁

명」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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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들어가며 

2003년  10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은  군경토벌대의  진압작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음을  인정하고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사과  했다.  이는  잘못된  역사에 

대한  국가차원의  최초의  사과였다.  이보다  15일  앞선  10월  15일에는  정부차원의  4·3진상보

고서가  공식  채택되었다.  이러한  정부차원의  공식입장  표명으로  그동안  ‘4·3폭동’으로  규

정되었던  역사를  어느  정도  바로  잡게  되었다.  이는  지난  1987년부터  본격화된  4·3진상규

명운동의  결과였다.1)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자는  4·3진상규명  운동은  1989년에  이르

러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방송사를  중심으로  4·3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

기  시작했다.  진상규명운동  17년  동안  단독  다큐멘터리만  약  30편이  제작되었고,  4·3영상증

언  140여  편,  기타  여러  장르로  40여  편이  제작되었다.2)  단독  다큐멘터리는  중앙방송사  3

편,  제주지역  방송사  19편,  독립  다큐멘터리  8편이  제작되었다.3)  이들  4·3다큐멘터리는  진

1)  지난  1960년  4‧19  혁명으로  이후에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4․3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다음해  5‧16 

군사  쿠테타로  중단되었다.

2)  다큐멘터리외에도  메거진  프로그램의  하위프로그램(속칭‘꼭지’),  토론  프로그램  등  다양하게  제작되

었다.

3)  <표  1>  참조

[

]

4‧3진상규명과정에서  영상의  역할

김동만  (제주한라대학  방송영상과  교수,  다큐멘터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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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81

상규명운동과  담론의  변화를  기준으로  나누면  1989년~1994,  1995~1999.  4,    1999.  5~2002. 

2003~현재로  나누어  볼  수  있다.4)

2.  4·3진상규명의  시기별  영상의  역할   

    1)  1989~1994  :  문제제기 

1989년은  제주지역  진상규명운동의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성립되던  시기였다.  1989년  최

초의  공식  4·3추모제가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리면서  제주4·3연구소가  창립됐고,  제민일보의 

4·3연재가  시작  됐다.  이에  맞춰  제주도내  지역방송사에서도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

하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제주MBC는  <4·3기획1,    현대사의  큰  상처>라는  보도리포트  형식의  다큐멘

터리를  방송했다.    뒤이어  9월에는  KBS제주가  특집다큐멘터리  <영원한  아픔  4·3사건>을 

방영했다.  이들  다큐멘터리들은  4·3의  숨겨진  아픔을  조심스럽게  드러냈고,  좌․우  대립이라

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음에  초점이  맞추었다.  “어머니와  누이, 

지아비가  폭도의  죽창에,  또  토벌대의  총에  무참히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영원한  아픔 

4·3사건)는  이들  다큐멘터리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은  여전히 

4·3을‘폭동’으로  표현하고  무장대를  ‘폭도’로  표현했다.  한편  중앙의  KBS에서도  <해방

과  분단  :  제1편  제주도-4·3전후>(1989)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나  방영되지  못했다.  이

데올로기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뤘다는  것이  주  이유였다.  한  소설가의  역사  진실  찾기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군경토벌대의  과잉진압을  직접

적으로  비판한  진일보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불방  처리되면서  KBS에서는  1998년까지 

4·3다큐멘터리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이시기  TV  다큐멘터리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민감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나라  방송의  실정과  이데올로기적  편견,  방송통제  등의  제약성  등으

로  인해  일정정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98년  이전까지  공중

파  TV다큐멘터리  영화는  4·3의  진실에  대한  실체적  접근보다는  객관성을  빌미로  양비론적 

피해실태만을  부각하거나  민감한  문제  비껴가기를  통해  외형만을  다루다  끝내버리는  아쉬

4)  권기숙은  4․3TV다큐멘터리를  1989-1997:4․3이라는  사태,  1998-2002:대량학살과  상처,  2003-현재  :  진상

규명운동  투쟁으로  나눴다.  (권귀숙,  앞의논문,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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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움을  남겼다. 

1990년  이후  지역사회에서  ‘민중항쟁론’을  들고  나온  진보  지식인과  ‘공산폭동론’을 

주장하는  반공단체의  대립이  심해  졌다.  이로  인해  위령제가  2곳에서  치러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제주MBC는  1995년까지  7회에  걸쳐  매년  보도리포트  형식의 

4·3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이데올로기  대립  극복과  국회차원의  4·3문제  해결을  촉구했

다.5)

1994년에는  중앙방송으로는  처음으로  MBC가  시사매거진  2580에서  <이젠  말하리라>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다.  4·3으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을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4·3의  비극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1993년에는  제주4·3연구소와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공동으로  다랑쉬굴 

4·3희생자의  유골발굴과정과  처리과정을  담은  비디오를  제작해  배포했다.  4·3다큐멘터리  중 

최초의  독립다큐멘터리였다.         

지난  91년  MBC에서  제작,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로  극영화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영

화자체의  선풍적  인기로  인해  제주4·3항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제

주4·3항쟁’을  처음으로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수많은  제주사

람들  역시  그  영화를  보면서  4·3  항쟁  당시  처참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와  형제들을  떠

올렸다.  그  동안  가슴속에  꾹꾹  담아두었던  분노와  설움을  영화를  빌어  몰래  눈물을  터트

렸다.  비록  40회가  넘는  시리즈  중에  제주4·3항쟁에  대한  내용은  6편에  지나지  않지만  객

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4·3의  진실에  접근하려  한  극영화로서의  표현노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민들은  나오지  맙서!  양민들은  나오지  맙서!'  '민족을  나누는  50단독선거

는  막아사주'라고  외치는  항쟁참여자들의  소리를  통해  항쟁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양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을  계획한  미군정의  책임과  무

차별적인  집단학살을  자행했던  군경토벌대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반면  이데올

로기  대립의  선명한  주인공들이  격정적인  삶  속에  제주4·3항쟁을  억지로  끼워  넣어  자칫 

제주4·3민중항쟁이  제주민중에  의한  항쟁이  아니라  외지의  사주에  의해  발발했거나  첨예한 

사상대립  속에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  마냥  비쳐질  허구가  존재함으로  인해  진실이  왜곡될 

크나큰  결함을  가지고  있음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5)  MBC는  4·3기획  시리즈  7편을  제작  했다.    <현대사의  큰상처>(1989)    <묻힐수  없는  외침>(1990),  <잃

어버린  고향>(1991),<마지막증언>(1992),  <이념의  대결을벗자>(1993),  <4·3의  국회청원>(1994),  <다시
찾는  역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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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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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995~1999.  4  :  진실  찾기   

두  곳으로  나누어  치러지던  위령제가  1994년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1995

년부터는  화해의  무드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민간의  갈등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

었다.  진상규명운동으로서  국회특별법제정  촉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제주도의회의  <4·3피해보고서의  발간>은  대량학살을  드러내는  증거자료가  되면서  본격적

인  대량학살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시기  4·3다큐멘터리들의  초점은  4·3은  과연  어떤  성

격이고,  대량학살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진실  찾기에  맞추어졌다.  다큐멘터리들은 

4·3봉기의  정당성을  설명하면서  군경토벌대의  강경토벌  결과로  나타난  대량학살의  문제를 

인권과  국가폭력  입장에서  강하게  비판했다.  이  시기는  독립다큐멘터리들의  진출이  두드러

졌다.     

1995년에는  4·3을  민중항쟁으로  바라본  독립다큐멘터리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

쟁>(1995)이  만들어져  전국대학에  유포되었다.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은  제주사람

들의  정서를  통해  그동안  억눌리고,  은폐되어  말할  수  없었던  4·3의  원인과  성격,  피해의 

참혹성을  민중항쟁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다.  뒷부분에  와서  무려  16분에  걸쳐  스크롤되

는  1만  5천명의  4·3희생자의  명단은  이  영화에서  압권이다.  뒤이어  제작된  <레드헌

트>(1997)는  체험자의  인터뷰를  통해  대량학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이  작품들은 

4·3의  전국화에  기여한  바  크다.  <레드헌트>는  해외에까지  4·3을  알려나가는  계기를  만들

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국가보안

법으로  구속되고,  인권운동가  서준식씨가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독립영화들은  공중파와는  달리  이데올로기  사슬을  과

감히  끊고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4·3을  민중항쟁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화의  깊숙한 

곳에서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살아있는  정신이  배어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방송다큐멘터리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과  균형적  감각을  유지하

지  못하는  부분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것,  4·3의  원인과  성격에  대한  진실보다는  미국과 

군경토벌대의  대량학살이라는  4·3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등이  아쉬움을  남기기

도  한다.

1988년에는  독립영화로  영상분석다큐멘터리  <제주도메이데이의  실체>가  만들어져  4·3의 

미국책임론을  거론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침묵을  지키던  방송사에서도  <북촌사람들>(제주

MBC)이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99년에는  <인권보고서  다랑쉬  굴의  침묵>(제주MBC)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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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제작되었다.  99년  9월에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에서  <제주  4·3>을  제작

해  방송했다.6)  이들  TV  다큐멘터리들은  기존  이념의  문제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의  문제를  제기했고,  정부차원에서  해결을  촉구했다. 

    3)  1999.  5~2002  :  은밀한  상처  드러내기

1999년  12월  16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본격적인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10여  년만의  결

실이었다.  이  시기를  본격적인  4·3해결의  물꼬를  튼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때  제작된  다큐멘터리들은  통사적  접근에서  놓치고  있던  보다  구체적이고  은밀한  상처

를  드러내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는  4·3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4·3의  후유증을  갖고  살아가는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로  4·3

의  문제를  현실화하고  있다. 

<무명천  할머니>(1999),  <레드헌트2>(1999),  <잠들  수  없는  모정>(2000),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2000),  <일본으로  간  4·3영혼>(2001)들이  이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독립다큐멘터리  <무명천할머니>(1999)는  4·3  당시  총상으로  턱을  잃어버려  늘  무명천으

로  얼굴을  감싸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잠들  수  없는  모정>은  4·3  당시  희생된 

아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104세의  할머니  이야기를  다뤘다. 

<일본으로  간  4·3영혼>  역시  4·3으로  인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재일  제주인들의  아픔을 

오늘의  시각에서  풀어낸  작품이다.  행방불명된  수형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제주라는  공간을  벗어난  또  다른  4·3희생자들의  사연을  취재하고  있다.  4·3의 

상처를  보다  내밀하게  들어내  고  구체적인  실상을  통해  4·3의  문제를  보다  깊숙이  파헤짐

으로서  4·3진상규명에  한층  다가갔다고  볼수  있다. 

    4)  2003~2005  :  되돌아보기 

정부차원의  공식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6개월의  유예기간을  두고  통과된 

것은  7개월  후  대통령사과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진상규명운동이  이뤄낸  결실이

었다.  2003년  4월의  다큐멘터리들은  모두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기까지의  진상규명운동의  역

6)  이제는  말할수  있다의  <제주4·3>은  ‘진실찾기’  시기를  넘어선  9월에  방송된  작품이자만  이시기에 

촬영되었고  전체적인  맥락이  ‘진실찾기’에  해당하므로  이시기에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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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85

사를  되돌아보는데  초점을  두었다.  <순이삼촌  그리고  진상보고서>는  4·3  문제를  처음  제기

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에서부터  다양한  장르를  통해  4·3진상규명운동을  전개

해온  투쟁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남은  과제에  대해  점검하고  있다.  <4·3인권보고서,  55년만

의  진실>은  진상보고서가  담고  있는  내용을  통해  4·3이라는  역사가  공식적으로  어떻게  기

록될  것인지를  점검하고  진상규명운동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두  작품은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이라는  시점에서  그간의  역사를  한번  매듭짓고  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

여주고  있다. 

3.  2005년~  현재  동향 

2005년은  4·3사건을  다룬  장편  독립  극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감독:김경률)의  탄생

과  더불어  4·3을  소재로  한  극영화  제작  움직임이  본격화된  해라  할  수  있다.  제주4·3을 

소재로  한  영화는  1950~1960년대에  만들어진  반공영화가  몇  편이  고작이다.  4·3영화는 

1948년  5월  미군정이  촬영한  최초의  4·3기록영화를  「제주도  메이데이(Cheju-do    May 

Day)」,  白明鉉감독이  1953년에  제작한  4·3토벌영화  「한라산에  봄오다」,  1964년 

주한미국공보원 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영화  「한라산」  등이  있다.  물론  1992년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독립영화  「무명천  할머니」등의  수  십편의  다큐멘터리가  있

기는  하지만  논외로  치면  극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은  비록  독립영화이기는  하지만  몇 

편  없는  극영화  중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유일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끝나지  않은  세월」은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점에서  새

로운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4·3을  다루었다는데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영화는  도내  코리아  극장,  대구평화영화제  등  도내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과거사청산국회의원모임  주최로  국회시사실에서  상영되어  제주4·3의  아픔과  진실을 

국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성과  기술적  측면에서는  자본과  기술  등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영화의  불모지에서 

시도된  장편  독립  극영화라는  점,  영화  제작진과  배우를  제주현지에서  조달하고  도민들의 

후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제주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하겠

다.  안타깝게도  제주4·3의  영화화에  혼신을  다했던  김경률  감독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뇌출혈로  요절해  제주영화계에  슬픔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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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끝나지  않은  세월」제작과  함께  2005년은  4·3을  소재로  극  영화제작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  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한국감독협회  이사장  임원식  감독,    일본감독

협회  이사장이자  영화  <피와뼈>의  양석일  감독,  동국대학교  감독  지망생  등  여러  사람들이 

4․3소재  극영화  제작  논의에  불을  지폈다.  2008년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에  재학중인  제

주출신  정종훈씨가  감독을  맡은  HD  장편극영화  「꽃비」도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1960년

대  제주를  배경으로  4·3의  이후  세대인  학생들을  통해  4·3의  모순을  재현했다.  .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상업영화로서  1백50억원이  투자되는  블록버스터  ‘한라산아’

가  추진되었으나  투지회사의  발빼기로  무산되었다.  주)괸당엔터테인먼트와  삼일회계법인은 

관광과  역사를  접목한  세계적인  영화를  만들어“시사회를  유엔  인권위에서  갖겠다”며  도

민들을  들뜨게  했으나  결국  물거품으로  끝나는  헤프닝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는  시대분위

기에  편승하여  4·3이라는  소재를  역사적  진실  찾기나  예술적  승화보다는  얄팍한  상술로  활

용하겠다는  사기극  되버린듯하여    많은  예술인들을  씁쓸하게  하였다.  4·3을  소재로  한  영

화화에  대한  논의는  2005년말  다시  지펴지면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의삼촌’을  원작으로 

하는  극영화  ‘순의삼촌’을  제작  계획이  발표  된다.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이면서 

제주영상위원회  부위원장인  임원식  감독이  영화제작  계획을  현실화하여  ‘저예산  예술영

화’  제작을  선언한  것이다.  제작사인  (주)비숀픽쳐스(대표  임원식)는  중산간  1만4200평에 

9억원을  들여  '순이삼촌  영화세트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이겠다고  발표  했다.  하지만 

이마저  감독이  무책임한  추진과  투자미흡으로  현재  까지    정지되면서  4·3영화논의에  장애

물로  작용하고  있다.  “4·3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4·3의  진실을  전국과  세계에  알

리기  위한  것으로  상업성의  논리를  앞세워  제주  4·3의  정신을  훼손하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는  임원식  「순의삼촌」감독의  발표는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도민들은  여전히  4·3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영화로  태어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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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87

<표1  >  4·3다큐멘터리  목록

시기
분류 

제          목 

형식     

제작자 

제작
년도   

  문
  제
  제
  기

  일요리포트/  현대사의  큰상처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89

  영원한  아픔  4·3사건

  특집다큐 

  KBS제주/신현국
                    김기표

  1989

  분단과해방:  4·3사건  전후

  보도특집    KBS/전형태김기표

  1990

  일요리포트/  묻힐수  없는  외침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0

  일요리포트/  잃어버린  고향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1

  일요리포트/  마지막  증언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2

  일요리포트/  이념의  대결을벗자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3

  다랑쉬굴의  슬픈노래 

  독립영화    김동만 

  1993

  일요리포트/  4․3의  국회청원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4

  시사매거진2580/  이젠말하리라

  보도특집   MBC/황헌

  1994

  진 
  실
  찾
  기

  일요리포트/  다시찾는  역사  4·3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1995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

  독립영화   김동만 

  1995

  레드헌트

  독립영화   하늬영상/조성봉

  1997

  북촌사람들 

  특집다큐    제주MBC/김건일 

  1998 

  제주도메이데이의  실체 

  독립영화   김동만 

  1998

  4·3인권보고서-다랑쉬굴의  침묵 

  직접해설   제주MBC/송창우

  1999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  4·3사건

  간접해설   MBC/이채훈

  1999

  드
  러
  내
  기

  무명천  할머니

  독립영화   4·3영상단/김동만 

  1999

  유언 

  독립영화   4·3영상단/김동만 

  1999

  4·3증언-나는말한다. 

  연재물

  제주MBC/방영철외

  99-01 

  레드헌트2 

  독립영화   하늬영상/조성봉 

  1999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특집다큐   KBS  제주/김영훈

  2000

  잠들  수  없는  모정 

  특집다큐    제주MBC/김귀진

  2000

  4·3  남겨진의혹   

  특집다큐    제주MBC/송창우 

  2000

  대마도의  4·3위령제 

  독립영화   김동만 

  2001

  평화와  상생의바람  4·3평화공원

  특집다큐    KBS  제주/김영훈

  2001

  일본으로간  4·3  영혼

  간접해설   제주MBC/변창영

  2001

돌아 
보기

  4·3인권  보고서  55년만의  진실

  특집다큐    KBS  제주/김영훈

  2003

  순이삼촌,  그리고  진상보고서   

  보도특집    제주MBC/김건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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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4.  주요  4·3  영상  해설   

    ①  <영원한  아픔  4·3사건>

<영원한  아픔  4·3사건>은  제주4․3사건을  좌우이데올로기  속의  희생양으로서  제주도민을 

다루고  있다.  즉  ‘군경토벌대’로  상징되는  우익진영과  ‘폭도’로  상징되는  좌익진영의 

대립을  축으로  ‘양민’으로  대표되는  희생자들이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받아야  했던  억울

함을  드러내는  기록과  증언이다.               

    ②  <묻힐  수  없는  외침> 

제주MBC의  <4·3기획2-묻힐  수  없는  외침>은  새롭게  정리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로서 

제주4·3의  현재  모습을  다루고  있다.  4·3의  현재  모습이라는  틀  속에서  “폭동”론을  주장

하는  사람들과  “항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을  통해  합일점을  모색하고,  과거갈

등과  현재갈등의  축  속에서  4·3  당시의  희생자를  억울한  희생자로  규정,  좌우를  떠나서  역

사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③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1992년  다랑쉬굴의  11구의  4·3희생자  발굴에서부터  정부와 

북제주군청에  의해  화장되기까지를  시간적  흐름을  축으로  그들이  어떻게  희생되어  무엇  때

문에  죽었는지를  밝혀  가는  프로그램이다.  더불어  유해를  둘러싼  제주4·3연구소와  관청의 

갈등을  보여준다.

    ④  <레드헌트> 

독립다큐멘터리  레드헌트는  4·3의  원인과  발발,  5·10선거  반대,  초토화작전,  결말에  이르

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미군과  군경토벌대,  서북청년단을  폭압자로  그리고  제주도민의  모습

을  희생자로  그리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대량학살의  참혹성과  그 

책임자를  규명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많은  희생자들의  증언과  집단학살의  피해사례를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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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89

    ⑤  <다랑쉬굴의  침묵>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게  과감히  말하자.  이제는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자.”

‘4·3인권보고서-다랑쉬굴의  침묵’은  1999년  제주MBC  문화방송의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인권적  측면에서  4·3을  바라보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나이든  노인들까지 

참혹하게  희생되었던  제주4·3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목적이다.  다큐멘터

리는  4·3  생존자들은  목소리를  모아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 

무참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또  4·3당시  미군정이 

촬영한  ‘제주도  메이데이’를  통해  ‘코소보  사태’등을  주도하며  세계적인  인권국가를 

자처하고  있는  미국의  책임도  지적하고  있다.

    ⑥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주4·3>의  제주도메이데이  영상자료  활용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MBC의  정규프로그램으로서  그간의  이데올로기적  금기나  사회 

금기의  벽을  깨고  달라진  역사인식  속에서  묻혀진  역사와  사회현상을  조명하고자  하는  의

도를  갖고  있다.  중앙방송사가  제주4·3을  특집으로  편성한  경우는  이  다큐멘터리가  유일하

다.  이  다큐멘터리  역시  4·3의  대량학살의  문제를  인권과  국가폭력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4·3의  원인과  전개과정,  결말에  이르는  서사적  구조  속에서  대량학살의  1차적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체험자의  증언과  당시  토벌책임자들의  증

언,  미군정자료와  각종의  문헌자료  등을  현장증거로  풍부히  제시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는  4·3  당시의  대량학살과  관련해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⑦  <무명천  할머니>

독립다큐멘터리로  <무명천  할머니>는  4·3  당시  영문을  알  수  없는  총격으로  턱을  잃어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삶과  몸짓  증언을  통해  제주4·3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4·3의  아픔과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⑧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제주KBS가  제작한<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4·3과  한국전쟁이라는  중첩된  역사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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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흔적을  통해  4·3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4·3  당

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검거되어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전쟁

이  발발하면서  흔적을  감춰버렸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들  수형인들이  어딘가에서  처형당했

을  것으로  가정해  그  가정을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학살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있다.

    ⑨  <일본으로  간  4·3영혼> 

제주MBC가  제작한  <일본으로  간  4·3영혼>은  제일  제주인들의  4·3  이야기다.  왜  그들은 

일본으로  떠나야  했으며,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억과  상처는  무엇인가에  초점

이  맞추어져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기억과  상처를  통해  4·3의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 

있다.       

    ⑩  독립영화  <끝나지  않는  세월> 

독립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은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형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형민

과  역시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처를  잃은  황가라는  두  노인

의  회상을  바탕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50여년  동안  4·3의  아픔을  가슴속에  응어리로  담

아왔던  형민의  눈을  통해  4·3당시  학살의  참혹함과  가족  공동체의  모순을  화해로  풀어나가

고  있다.  더불어  아직도  가해자의  사죄가  없는  현실을  황가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어쩌

면  아직도  가해자의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고  당시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은  세월’이라고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5.  나오며 

영화의  전파력은  책이나  보고서보다  훨씬  강하다.  가깝게  광주항쟁만  보더라도  관련  영

화들이  주는  충격은  어떤  책이나  보고서에서  주는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주4·3항쟁 

역시  역사적  진실규명과  그  실체를  알림에  있어  영화가  차지하는  몫은  자못  크다고  할  것

이다.  역사적  진실  찾기라는  측면에서  독립제작자와  방송제작자와의  역사적  진실의  반영은 

상호  차이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방송사인  경우는  지배이데올로기와  조직의  관점,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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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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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반응이  제작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만  독립제작자는  상대적으로  주변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3진상규명과정에서  독립  다큐멘터리와  방송 

다큐멘터리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두  주체의  다큐멘터리는  진

상규명과정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다.  서로  다른  의무와  역할로  활동했다기보다는  각각의 

시기와  각각의  방송,  각각의  위치에서  동일한  담론과  동일한  목소리로  경쟁하듯  상호  보완

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이  점은  4·3진상규명운동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담론을  형

성하고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대통령사과를  이루어내는데  숨겨진  동력으로  작용했다.  최근 

4·3영화제작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제주4·3의  진실에  대한  영상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4·3의  부활을  꿈꾸기에  부족한  점이  없다.  진정  제주4·3항쟁의  진실

이  평화와  인권으로서  부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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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코스  :  함덕  의사(義士)기념비  -  선흘리의  4·3(목시물굴  -  불칸낭)  -  대흘  총맞은  비석 

-    와산  종낭마을  -  와흘  김용철지묘

1.  의사(義士)  한백흥·송정옥  기념비

1947년  초대  함덕리장으로  임명됐던  故한백흥(韓伯興,  1897~1948)  선생과    당시  마을유

지였던  故송정옥(宋禎玉,  1893~1948)선생,  이들은  토벌대로부터  무고하게  학살당할  위기에 

처했던  마을청년들을  구하기  위해  토벌대에게  협조를  구하다  그  청년들과  함께  무참히  학

살된  4·3의사자이다. 

1948년  11월에  접어들면서  4·3사건의  전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토벌대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다  총살했다.  무장대  역시  지서를  습격하거나  토벌

대에  협력하던  우익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1948년  11월  초  토벌대는  함덕리  주민들을  현재의  함덕중학교  뒤편  평사동  모래사장에 

집결시켰다.  곧바로  함덕리  청년  6명을  끌고나와  “이  놈들은  폭도들과  내통한  놈들이다. 

앞으로  폭도와  연락하거나  식량을  제공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며  구덩이  여섯  개를  파놓

고  처형하려했다. 

이때  “이  젊은이들은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여서  산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  폭도들이 

[

]

4·3유적지  답사(동부지역)

장윤식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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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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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목숨만  부지시켜주면  우리  마을유지들이  잘  선도해서,  착한  대한민국  백성으로  살

도록  지도해나가겠다.  이  청년들의  신원은  우리가  보증할  테니  제발  죽이지  말라”며  토벌

대  앞에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당시  함덕리  구장이었던  한백흥과  마을  유지였던  송정옥이

었다.

하지만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호소가  광기에  사로잡힌  토벌대에게는  먹혀들지  않

았다.  오히려  군인들은  “이  자들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양쪽에  구덩이  하나씩을  더  파

게하고는  현장에서  무참히  총살하고  청년들과  함께  구덩이에  파묻게  했다. 

4·3  당시  경찰관을  지낸  함덕리  주민  김○규씨도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한백흥  선생은  당시  함덕리장과  3구장을  역임하던  중  1948년  11월1일  함덕리에  주둔하던  9

연대  군인들이  주민들을  함덕리  평사동  모래사장에  집합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청년 

여섯  명을  무장대라며  총살시키려  하자,  한백흥  선생과  송정옥  선생이  신원보증을  하겠다며  만

류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두  분을  청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한

경면  두모지서의  순경으로  있던  내가  함덕리로  왔을  때  동료  경찰관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4·3사건  전개상황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가을로  접어들며  악화일로

를  걸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거나  트집을  잡히면  곧바로  토벌대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던  무법천지의  암흑시절이었다.  이러한  세상에  한  사람의  마을청년이라

도  살려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토벌대에  간청을  한  것이  죽음의  빌미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통탄할  일인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  모두  향토와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한백

흥  선생은  역사에  빛나는  조천만세운동의  주역으로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던  독립운동

가이며,  송정옥  선생은  일제시대  청년운동을  하며  향토사랑을  실천했었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  전국  각

지로  번져나갔고,  그  해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의  만세운동  시작으로  제주도에

까지  파급됐다.  이때  4일간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지에서  주민  1500여명이  거세게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한백흥  선생도  약관의  나이로  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만세운동

과  관련하여  일제경찰에  검속된  인원은  모두  29명이다.  이  중  23명  모두가  1심에서  징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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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년에서  집행유예  3년까지  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한백흥  선생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

주지청에서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한백흥  선생은  아직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선정이  안됐다.  이에  대해  그의  유

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독립유공자  선정이  되지  않는  것은  4·3  때  돌아가셨다는  이유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할아

버지는  해방이후에도  함덕리장을  지내는  등  국가에도  충분히  협조했다.  그런데  왜  독립유공자

로  선정되지  않는가?  아직도  4·3희생자라는  굴레가  이렇게  무거운데  누가  국가를  위해서  헌신

하겠는가.  자손으로서  참  죄송스럽고  억울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다쳐도  만세운동을  주도

한  김시범  선생도  유공자  인정이  안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말처럼  4·3희생자  중  보훈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는  한백흥  씨에  국한

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19년  조천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

서를  낭독한  제주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가인  김시범(金時範,  1890~1948)  선생이다.  그는 

조천만세운동의  거사모의와  시위주동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만세운동으로  기

소된  29명  중  최고형이었다.

김시범  선생은  1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  후에도  사숙(私塾)과  야학을  통해  독립의 

의지를  가르쳤으며,  소비조합운동에  참여하는  등  조천일대  독립과  계몽운동의  선봉에  서  왔

다.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은  제주항일기념관  등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제주지역 

3·1만세운동과  관련한  자료와  사진에는  김시범  선생이  항상  첫  번째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해방정국의  소용돌이는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게  했을  뿐  아

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처참한  족쇄를  만들고  말았다.

김시범  선생은  조국이  광복되자  새  조국  건설에  앞장서게  된다.  해방이  되면서  남한에는 

각  지역마다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

고  김시범  선생은  조천면건준위원장에  이어  초대  조천면장(1945년  9월~1946년  7월)을  지낸

다.  또한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기념대회  준비위  조천면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와  관련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돼  벌금  3000원을  선고받는다.  또한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가  의장으로  선출된  민전의  부의장으로  뽑힌다. 

그후  제주에는  4·3의  광풍이  거세게  몰아친다.  1948년  10월말  경부터  제주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검속을  강행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고  있던  김시범  선생도  군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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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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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돼  함덕  서우봉  해변가에서  총살  희생된다. 

김시범  선생일가의  비극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아들과  딸도  4·3의  광풍에  휩쓸려  희

생된다.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본인과  그  후손들이  혼란스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어떤  희

생을  치렀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한백흥  선생의  손자들도  할아버지의  희생  이후  어린나이에도  마룻바닥  밑이나  토굴을  파

서  숨어  살아야  했다.  또한  송정옥  선생의  가족들은  그  희생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

다. 

함덕리민들은  이렇듯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지  60년이  넘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정성을 

모아  마을  젊은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내려  했던  두  분의  의로운  희생을  기리기  위해 

2010년  8월  21일  기념비를  제막했다.

2.  선흘리의  4·3

    가.  선흘리의  4·3  희생

선흘리에는  동양  최대의  난대림  군락지로  알려진  ‘선흘곶’이  있다.  그리고  거문오름 

동굴계가  뻗어내려와  뱅듸굴,  목시물굴,  도툴굴  등  크고  작은  천연동굴이  밀집해  있다.  이

러한  자연적  조건이  4·3사건  당시에는  난리를  피해  숨기  안성맞춤인  주민  피신처가  되었

다.  때문에  선흘리  주민들은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모두  불  태워지고  해안마을로  내려

가라는  토벌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선흘곶  등지로  숨어들었다.  소개  명령  이전부터  당시 

국민학교에  주둔하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들이  총살을  하자  목숨부지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

다.  또한  곧  가을걷이  한  곡식과  목숨처럼  아끼던  우마  등의  가축을  두고  내려가기가  아까

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금만  견디면  이  난리가  끝나겠지…’라는  기대를  안고  가족단

위  혹은  끼리끼리  자연적인  피신처로  몰려들었다.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은신한  곳은  ‘목시

물굴’이고  또  다른  곳은  ‘도툴굴’이었다.

며칠만  임시로  몸을  숨기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주민들

의  소박한  바람은  처참히  깨어졌다.  토벌대는  수시로  불  타버린  마을과  그  주변을  수색했

다.  11월  25일  ‘도툴굴’이  먼저  발각됐다.  마침  그  굴에서  나와  ‘반못’에서  물을  긷던 

주민이  군인에게  붙잡힌  것이다.  도툴굴의  위치를  파악한  토벌대는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

총을  난사하며  ‘도툴굴’을  포위했다.  굴  안으로도  수류탄을  던졌다.  변변한  저항조차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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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지  못하고  완전히  제압당한  주민들은  모두  군인들에  의해  끌려  나왔다.  약  25명의  주민들 

중  바로  굴  인근에서  18명이  총살당했다. 

나머지는  모두  군인  트럭에  실려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하던  군부대로  압송됐다.  이곳에서

는  무시무시한  고문과  협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

었다.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도툴굴’에서  1㎞  남짓  떨어진  ‘목시물굴’의  존재

가  누군가를  통해  실토됐다.  그곳에는  남녀노소의  주민  150명  정도가  은신해  있었다.

11월  26일  아침  ‘목시물굴’의  존재를  실토한  주민을  앞장세운  토벌대가  역시  수류탄

과  총을  난사하며  진격했다.  굴  바로  밖의  ‘트’(은신처,  주민들이  움막을  지어  활용했던 

비트를  일컫는  당시  용어)  인근에서  끼리끼리  모여  있던  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굴  안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피했다. 

군인들은  비좁은  입구  때문에  섣불리  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깜깜한  굴  안에는  무

거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도  신경에  거슬릴  정도였다.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는  주민들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아이  아버지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질식해  죽었다. 

“이러다가  아이들까지  다  죽는  것  아니냐?  나가자!”라는  웅성거림이  들렸고,  이내  주민

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갔다.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는  생각들을  하며  하나  둘  굴  밖

으로  나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입구를  통해  나갔기  때문에  그  시간  또한  적지  않

은  시간이었다.  주민들을  모두  끌어낸  토벌대는  나이대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17세  이상

의  청장년과  부녀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들이  따로  세워졌다.  토벌대는  17세  이상의  청장년

을  끌고  가더니  바로  굴  남쪽에서  총살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가족  혹은 

이웃주민  40여명이  주검을  봐야  했다.  전날  ‘도틀굴’에서  잡혀  고문  끝에  ‘목시물굴’

의  존재를  실토하고  길안내  했던  주민도  역시  총살당했다.  나이가  많아도  키가  작으면  어

린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살았고,  나이가  어려도  덩치가  크면  죽음의  대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희생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  중  비교적  건장한  남자들에게  트럭이  있는  곳까지 

굴  안에  있던  식량과  식기를  지고  가라고  해서  약  1㎞  정도  물건을  옮겼는데  7명  정도의 

젊은  그들을  ‘반못’  바로  옆  ‘궤우물’  인근에서  총살해버렸다.

‘도툴굴’에는  주로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면  ‘목시물굴’은  부녀자와  노약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난리가  일어나면  본능적으로  가족  중의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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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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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서  은신처를  달리하거나,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는  길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목시물굴’과  ‘도툴굴’  사이에서  그  본능이  감지된다.  즉,  숨을  곳을  달리하자던  형은 

‘도툴굴’에서  죽고  ‘목시물굴’에  숨었던  동생은  키가  작아  살아난  경우다.  물론  두  곳

에서  몰살당한  가족도  부지기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조그마한  바람이  실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죽은  이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특히  ‘목시물굴’  희생자들은  주검  위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기  때문에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목시물굴’에  숨었다가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숲속으로  뛰어가  살아났던  한  주민은  “목시물굴이  토벌대에  습격당한  뒤  ‘벤

뱅듸굴’에  갔다가  역시  그곳도  기습을  당해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곳에  왔었다.  도툴굴  주

변과  목시물굴  주변에  시신이  널려  있었는데  시신들의  반  이상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기름을  붓고  불태운  것이었다.  넋을  잃고  있다가  까마귀나  개

들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흙이라도  덮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살아난  사람  4명이  시신을 

가지런히  놓고  흙을  씌웠다.  그런데  뒷날부터  유족들이  하나  둘  찾아와  시신을  헤집으며 

찾는  통에  다시  엉망이  됐다.  그래서  고아무개란  사람과  나무를  반쪽으로  깨서  이름을  적

고  흙을  다시  씌웠다.  그  명단을  종이에  적어  내가  하나  갖고  다른  하나는  작은  단지에  담

아  새동네  자왈  속에  묻어뒀는데  나중에는  못찾겠더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  두  곳에서 

희생당한  주민들이  나중에라도  시신을  온전히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은  약  50㎝  정도의  나무  팻말  때문이었다. 

이곳  현장에서의  죽음을  피했다고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

은  ‘벤뱅듸굴’  등지로  은신했다.  그곳에는  이미  선인동  등  선흘2리  사람들이  많이  은신

했었는데  오래지  않아  발각되어  또  희생을  치른다.  이제  물러날  곳은  더욱  깊은  산속이었

다. 

한편  ‘도틀굴’,  ‘목시물굴’에서  끌려나와  함덕  주둔  군부대에  끌려간  주민들도  희생

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비교적  11월  28일  젊은  남자들이  트럭에  실려  억수동  인근에

서  집단희생을  치른다. 

이날  학살터로  끌려가다  극적으로  살아난  주민이  있었다.  당시  17세  소년이던  그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떠났다.  그런데  억수동  인근에  다다르자  트럭이  멈춰서버렸다. 

원인은  엔진  과열이었다.  운전병이  헬멧을  벗어주며  그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령했다.  물을 

뜨고  돌아와보니  마을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운전병만  있었다.  그  운전병은  소년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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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렇게  겨우겨우  살아나온  사람도  있었지만  소용돌이에  갇힌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희생

이  이어졌다.  특히  어린  여성들이  함덕  서우봉  바닷가의  벼랑끝  속칭  ‘몬주기알’  일대에

서  처참하게  희생되기도  했다.   

이렇듯  선흘리  주민들은  약  일주일  사이에  100여명  가까이  희생되며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

까닥하면  목숨이  달아났던  험악한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  속에  산

간을  헤매거나  해변마을에서  남의  집  외양간이나  창고  등지에서  힘겨운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변변한  살림살이도  갖추지  못한  채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울  정도였다. 

또  걸핏하면  도피자가족이라고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져있으면  도피자가족  수용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다.  산간마을에서  내려온 

주민들을  우선  의심하며  곱게  보지  않던  시절의  삶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 

같은  그  겨울을  넘어서야  비로소  삶의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살

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성을  둘러  그  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라는  것

이었다. 

때문에  4·3당시  제주도는  거대한  성곽의  섬이었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했던 

환해장성이  바닷가에  있었다면,  4·3  당시에는  산에서  습격하는  무장대를  막으려고  성을  쌓

았다.  해안마을은  여러  마을을  방어하려  한라산  쪽으로  기다랗게  장성을  쌓기도  했지만,  중

산간  마을은  모두  마을을  두르는  성을  제각각  쌓았다.

선흘리는  주민들이  주로  살았던  현재의  마을이  아니라  ‘알선흘’이라  불리던  낙선동에 

성을  쌓았다.  원래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성을  쌓는  일은  젊은  남자들이  대규모  희생을 

치른  이후인지라  피난지의  남녀노소  모두  나서야  했고,  더러는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동원

되어  쌓기  시작했다.  마을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  성을  쌓는  작업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

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가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한  주민은  “낮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 

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  등짐을  져서  돌

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허기지고  힘든  노역이었지만  그래도  업신여김  당하고  고픈  배  움켜쥐며  해안마을에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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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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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보다는  고향  사람끼리  오순도순  농사를  지어  따스운  밥  먹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하

루  빨리  성  안  생활을  그리며  주민들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성을  쌓았다. 

성의  규모는  대략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m의  직사각형 

모형이었다.  또  성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

의  침입을  막으려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

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

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갇힌  생활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밤에  성을  지키는  일  또한  주

민들의  몫이었다.  경찰이  3~4명  파견되어  근무를  했으나  그들은  주민들을  감시하고  보초근

무를  감독했다.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  자

원입대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들이  맡을  수밖에  없었

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  파견소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또  노인들에게조

차  보초를  잘못섰다고  파견소  경찰이  폭행하는  일이  빈번했다.

주민들은  경찰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경비를  섰지만  무장대는  귀신같

이  출물했다.  1951년에는  무장대가  습격해  바로  다음날  결혼을  하는  처녀  한명을  납치하기

도  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던  광기의  시기를  넘겼지만  감시받고  멸시당하는  숨죽

이는  세월은  그대로  이어졌다.  또한  집단생활은  지극히  비위생적이고  밤낮  없는  노동과  보

초근무에  고단한  몸을  편히  쉴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러한  생활은  1954년  9월까지  이어졌

다.

    다.  4·3의  흔적

    1)  잃어버린  마을

선흘1리에는  4·3  당시  여러  동네가  있었다.  현재의  본동과  더불어‘장상동’이라  일컫던 

‘새동네’,‘큰굴왓’,‘실물가름’  그리고  낙선동  인근에‘봉냉이동산’,‘돗바령’,  ‘당

오름(=동카름)’등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4·3  이후에  복구된  마을은  본동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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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나뿐이다.  1956년  본동으로의  이주가  허용되고,  또  몇  년이  지난  후  자그마한  동네에까지 

재건이  허용되었지만  돌아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미  해안마을  피난지에  정착한  사

람도  있었고,  본동  혹은  성이  둘러진  낙선동에  머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동네에서  한창  힘을  쓸  젊은이들이  4·3  당시  대부분  희생되었기  때

문에  동네를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잊혀지고  방치된  작은  동네들은  모두  잃

어버린  마을로  남아있다. 

그들  마을  대부분은  지금은  과수원이  되어버렸지만  대나무  숲이  우거져  집터의  흔적을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고,  깨진  그릇이나  올레  등이  남아있어  한  때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

케  한다.   

    2)  낙선동  4·3성

멸시받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나마  참혹했던  4·3시기를  버티게  했던  곳은  성  안이었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생활한  함바집은  억새로  방과  방  사이의  칸을  막고,  비좁은  공간이었지

만  맘  편히  가족들과  몸을  누일  수  있는  나름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선흘리민들이  축성을  한  낙선동은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해

변과  가까운  곳에  성을  쌓아  집단생활을  했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

면서  비로소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

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당시  제주  지역  마을마다  쌓은  석성은  대부분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제

한이  풀린  1954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원상회복  되거나,  이후  개발의  과정  속에  사라졌다. 

그러나  낙선동  성터는  주변  감귤원의  방풍  역할을  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는  것이다.  때

문에  4·3을  알려고  하는  도내외  탐방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제주도에서  2009년  낙선동  4·3성의  일부를  복원하고  공개했다.  당시  처참한  생활을  느끼

지  못하게  하는  엉터리  복원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지만  4·3의  흔적을  확연히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적임은  틀림없다.

    3)  은신처

‘도틀굴’은  ‘반못’에서    직선거리로  50m  정도  떨어져  있어  ‘반못굴’이라고도  불

리는  천연동굴이다.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넓고  높은  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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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101

만날  수  있다.  굴은  일자형으로  곧게  뻗지  않고  여러  가지로  흩어지며,  2층,  3층으로도  연

결이  되는  미로형  동굴이다.  1948년  11월  25일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이  굴에  몸을  피했던 

주민  20여명이  현장에서  희생됐다. 

‘목시물굴’  또한  천연동굴이며  4·3  당시  몸을  피했던  주민  약  40여명이  11월  26일  희

생된  곳이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약  100m  정도  된다.  한쪽  입구는  한  사람이  누

워서  들어갈  정도로  좁고  한  쪽은  비교적  크다.  안에는  넓은  공간도  있으나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형성해  울퉁불퉁하고  낮은  형상이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

기는  부적절한  구조다.

눈이  많이  왔던  그날,  혼비백산한  주민들이  좁은  굴  안으로  피하고  나오는  과정에서  무

릎이  까지고  발에  상처를  입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1㎞  정도  떨어진  ‘반못’  근처까지  걸

어갔는데  그  길엔  선혈이  낭자했었다.

‘목시물굴’  안에는  당시  주민들이  신었던  고무신이  있다.  어른  것도  있고  아이의  것으

로  보이는  아주  작은  고무신도  있다.  또한  호롱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주민들은  동굴  안에서도  생활했지만  굴  밖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도  했다.  나무가 

우거진  곳이기  때문에  식사  등  대부분의  생활은  주로  밖에서  해결했다.  ‘목시물굴’  주변

에는  주민들이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산재해  있다. 

    4)  불타버린  것들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가옥만  불태운  것이  아니다.  선흘리는  초토화과정을  겪으며  당

목(堂木)도  잃어버렸다.  선흘리  주민들은  매년  정초에  마을당(堂)인  일뤠당에  모여  굿도  하

고  거리굿도  했었는데  당목이  불타고  당도  훼손되었다.  할망당이라고도  불리던  이곳의  당

목은  와흘  본향당의  신목보다  더  굵고  컸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온  마을이  불타면서  마을  안  거리에  위치해  있던  팽나무에  불이  옮겨  붙었다.  모두  타버

려  생명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팽나무의  한쪽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타버려  죽어버린  굽이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수종이  다른  나무의  씨가  새싹을  틔워  몇  십 

년을  같이  살고  있다.  그  나무는  마치  죽음과도  같았던  4·3의  아픔을  극복한  선흘리  마을

사람들  모습처럼  의연하게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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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총  맞은  비석

조선시대  제주목에서  정의현  가는  길에  쉬어가던  곳이  동원이다.  특히  목사,  현감,  판관 

등  고관이  쉬어갈  때는  주민들을  동원해  편의를  도모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났던 

자리에  공덕비  등을  세워  기념하고자  했다.  그러한  공덕비가  동원에  4기가  있다. 

1865년  고종  2년에  세워진  「使相鄭기源去思碑」,    1881년  고종  18년에  세워진  「使相白

公樂淵恤民善政碑」,  1881년  고종  18년에  세워진  「判官宋公詳淳永世不忘碑」,  1892년  고종 

29년에  세워진  「判官康公仁鎬善政碑」  가  있다.  이  비석은  와흘,  선흘,  대흘,  와산  등  4개 

마을  주민들이  목사와  판관에  대해  마을의  일을  해결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비석

이다.

4·3  당시에  이  비석은  총탄에  맞았다.  당시  비석  바로  앞에  경찰토벌대의  동원주둔소가 

있어서,  그들의  조준사격  연습에  총을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원래  삼나무가  우거진  번영로  길가  숲속에  있었으나,  도로확장  과정에서  지금

의  위치로  옮겨졌다.

4.  동원주둔소  옛터

1949년  이후  경찰토벌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약  20m×10m의  4각형으로  성을  쌓았었다. 

성은  와산,  대흘리민  등  조천면  관내  주민들을  동원해  쌓았다.  성  안에는  경찰관  숙소로  사

용하는  건물  한  채와  화장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곳이  있었다.  4각형의  네  귀퉁이로 

망루가  있어서  바깥쪽을  사방으로  경계했었다. 

1948년과  1949년  초  대토벌  이후  궤멸  상태에  빠진  잔비(殘匪)소탕을  위해  요소요소에 

경찰주둔소를  세워  경비를  했는데,  동원주둔소는  그  중의  하나였고  경찰  10명  이상이  번갈

아  주둔했었다.  이곳에  민간인들이  같이  경비를  섰다는  증언은  없다.  다만  와산리민  한○호

(남,  03년  63세)  씨는  “이곳  주둔소에  어느  마을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젊은  여자가  밥  시

중을  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이유인지  화장실에  있는  여인에게  총을  쏘아  죽여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같이  있던  노인회장  고○송(남,  03년  74세)  씨도  한씨

의  말을  듣고는  자기도  들은  바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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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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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남마을

와산  본동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당오름  정상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4·3  당시  10

여호  50명  내외의  주민들이  농사와  축산에  종사하면서  살아가던  소담한  자연마을이었다. 

여러  성이  살았으나  주로  한씨가  모여  살았다.

종남마을은  1948년  11월  20일  소각된  이후  복구가  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옛  집터들은  현재  대나무와  덤불숲에  남았으며  마을  길과  올레  등이  비교적  뚜렷이  남

아있다.  종남마을은  4·3  이후  지금까지  다른  마을에  비해  개간이  되지  않았다.  지금  종남마

을엔  집  한  채의  형상이  지붕만  걷어진  채  그대로  남아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올레와  외

양간,  통시  그리고  깨어진  옹기,  민구류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잃어버린  마을의  쓸쓸함을 

달래고  있다.  이  집터는  4·3  당시  한달천씨가  거주했던  곳이다.  이  곳에  와산리가  재건된 

얼마  후,  김○천씨가  그  집  담에  지붕만  얹고  들어와  10여년  정도  살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초토화  이전  주민들이  직접  조성하여  이용했던  봉천수  우물  2곳과  우마용  물

통  1곳이  그대로  남아있다. 

와산리  재건  이후  당시  4·3때  잃어버린  마을  중에서  집  담이  남아있는  곳은  이  곳  종남

마을이  유일하다. 

6.  김용철의  묘

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21세)이  고

문치사  당했다.  이  사건은  조천중학원  학생을  포함한  지역주민은  물론,  전  도민적도  분노를 

자아냈다.  당시  미군정당국도  사건을  중시하여  조사를  했는데,  검시관의  부검을  통해  고문

치사임이  밝혀졌다.  미군정고문관이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했으며,  당시  조천지서에  재직했

던  조한용  지서장  등  5명의  경찰관  모두에게  3~5년의  징역형이  언도되기도  했다. 

김용철의  장례는  많은  사람들의  참석  하에  치러졌다.  동생  김○선(남,  02년  63세)에  의

하면  수백  개의  만장으로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의  길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도피입산

하는  계기가  됐고,  도민들로부터는  경찰에  대한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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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묘지는  마을  인근  ‘작은뒷당’에  있던  묘를  1993년  4월  23일(윤3월  2일)  가족공동묘지

로  이장했다.  비문에  4·3과  관련한  글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동생  김○선  씨는 

“애초  묘에는  비석이  없었다.  이장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만  해도  4·3에  대한  사실

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때였다.”고  했다.

4·3의  도화선이기도  했던  중요한  사건의  상징물이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연을  알  수  있는  어떠한  표식조차  없는  또한  아쉽다. 

참고  문헌

제주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Ⅰ』,  도서출판  각,  2003.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역사문화진흥원,  『유네스코제주세계자연유산마을  선흘1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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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 

105

          코스  :  해안동  잃어버린  마을  ‘리생이’  -  어음리  빌레못  굴  -  하가리  연화못 

-  자운당 

1.  해안동  잃어버린  마을  -  리생이   

해안리는  4·3  당시  동동(30호),  하동(50호),  상동(속칭  ‘리생이’,  80호)의  3개  자연마을

로  이루어진  제주읍  서부지역의  전형적인  중산간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어승생오름  앞까지 

펼쳐진  광활한  벌판에서  소와  말을  방목하고,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해안리  주민들이 

4·3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은  5·10선거  때였다.  해변마을인  외도,  이호,  도두  주민

은  물론  인근  마을인  도평,  광령  주민들까지  선거거부를  위해  해안리  지경으로  피해온  것

이었다.  이들은  주로  해안  남쪽  속칭  ‘붉은덩어리’  주변에  마을별로  야영을  하며  2~3일

을  지내다  내려갔다.  이때  해안리  주민들도  움막을  짓고  3일  정도  살다  내려왔다. 

조용하던  해안리가  뒤숭숭해지기  시작한  것은  가을  무렵부터였다.  1948년  11월  1일  밭에

서  일하던  송창률(21)이  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됐다.  그  후  주민들은  감자  파러  갔다가  토벌

대가  온다고  하면  목장에  숨는  일을  반복했다.  토벌대는  공회당(현재  새마을문고  자리.  당

시  공회당에서는  멀어서  외도국민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해안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이학

교를  열어  교육하고  있었다)에서  주민들에게  19일까지  소개하라고  명령했다.  곧  주민들은 

[

]

4·3유적지  답사(서부지역)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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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연고자를  찾아  외도나  이호,  도두로  소개했다.  토벌대는  소개민들이  해변마을로  소개한  직

후인  11월  20일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소개민들은  소개지에서  많은  고충을  겪었다.  그러

나  소개민들  못지  않게  피해를  당한  것은  무서워서  해안마을로  소개하지  않고  마을  인근에 

숨어살던  사람들이었다.  12월  7일,  토벌대는  마을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면서  벌판이나  굴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  날,  ‘곰궤’에서  주민  20여  명이  학살됐다.  해안  주민이 

집단학살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다. 

1949년  가을,  외도  등지로  소개했던  해안리  주민들은  도평  하동에  성을  쌓고  도평주민들

과  함께  도평  하동에  임시로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그  후  해안  주민들은  해안마을을  복구

하기  위해  낮  시간에는  해안으로  가서  성을  쌓았다.  해안리  성은  사각형  모양으로  3개  자

연마을  중  하동에만  쌓았다.  1950년  봄,  마침내  해안  주민들은  성  쌓기를  끝내고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주민들이  복귀하면서  외도지서  해안파견소가  마을  안에  설치돼  순경들이 

근무했다.  주민들은  마을  방어와  파견소  경비를  위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특공대를  편성했

다.  현재  해안리의  희생자는  1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안리  상동인  속칭  ‘리생이’는  1948년  11월  20일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된  후 

현재까지  복구가  되고  있지  않다.  당시  80여  호로  해안리에서  가장  컸던  마을로  주민들은 

주로  목축업을  주업으로  생활했다. 

현재  비교적  넓은  지역에  마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나  대부분  귤밭으로  변해  옛 

정취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을  입구에는  2002년  제주도에서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서  있다.

다음은  표석의  내용이다.

<잃어버린  마을  표석>

-  리생이  -

여기는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제주시  해안동  리생이  마을터이다.

3백여  년  전  설촌된  이후  120여  호에  5백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평화롭

게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독승물  등  생수가  도처에  넘쳐흐르고  수많은  학동들이  글 

읽는  소리가  진수서당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이라고  비켜가지  않았으

니  1948년  11월  20일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이  미처  가재도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아랫 

마을로  내려간  후  마을은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이  와중에  50여  명의  주민들이  이슬처럼 

스러져  갔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안리에  축성하여  살기  시작한  이후  다시는  리생이  마을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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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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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지  않아  지금은  잡초만  우거지고  빈  집터엔  대나무만이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여기를  지나는  길손이거나  찾아온  사람들이여  이곳에도  정다운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았음을 

기억하라.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  보라.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2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라.  찾아가는  길

해안동  마을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200m  가면  ‘개소교’라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

를  건너  남서쪽  방향으로  600m  가면  리생이의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보인다.  표석  옆의  작은 

길을  따라  가면  리생이  마을터가  나오고,  옛  집터와  올레,  대나무숲이  무성해  있는  삶의  현장

을  볼  수  있다.     

2.  빌레못  굴의  희생  -  30년  피난지로  믿고  살았건만…… 

    1)  개요

빌레못굴  희생터는  1949년  1월  16일,  애월지역  군·경·민  합동  토벌대에  의해  빌레못  굴

에  숨어  있던  어린  아이들,  부녀자,  노인  등  23명이  무참하게  총살당했던  현장이다.  그리고 

70년대  초반  유해  4구가  동굴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어  4·3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곳이기

도  하다.   

당시  빌레못  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피바람  몰아치는  광란의  시절만  넘기면  좋은  세

상  만나  헤어진  가족들과  만나  오손도손  살  수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고  있었

다.  이들은  어음리,  납읍리,  장전리에서  모여진  다  어찌  어찌  엮어져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을  30년쯤은  끄덕  없는  피난지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굴을  찾지  못하리라  믿었던  이들의  꿈은  1949년  1월  16일,  봉성리  구몰동이  습

격당하자  경찰  토벌대와  애월지역  청년단의  수색작전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빌레못 

굴은  평상시엔  굴  입구가  좁아  쉽게  찾지  못하는데,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이곳을  지나는 

토벌대는  굴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토벌대는  구몰동  습격의  보복  대상자로  굴속에  숨어  있던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  아무  죄 

없는  여자들,  힘없는  노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어음리  사람들은  빌레못굴  학살하면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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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아들,  막  고운  아이,  그  아이의  발을  잡아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다고  말을  한다.  토벌대는 

굴  밖으로  사람들을  끌어내면서  7개월  된  아기를  보자마자  돌에  쳐  죽이는  광기를  보였다. 

당시  굴  밖에서  희생당한  시신들은  산에  있던  가족들이  내려와  임시  수습을  했다.    그들

은  너부러져  죽어  있는  내  아내,  내  아이,  내  어머니,  아버지를  보면서  말문이  막히고,  기

가  막혀  넋이  나갔을  것이다.  시신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애기들을  엄마  품에  안겨주고 

간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좋은  세상  만나  잘  살자고  굳게  약속했던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던가. 

한편  이날  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들어갔던  양재인과  여섯  살인  그의  딸  강숙자, 

그리고  납읍리  현원학과  그의  아들,  이들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영영  빛을  잃고  말았다.  이

들은  20년  후,  동굴  탐사대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애월면  공무원들과  어음리  주민들은 

유해를  수습하고  당시  도립병원으로  안치  시킨  후  유족들을  찾아  인도해주었다.

2)  증언 

=  빌레못  굴  유일  생존자의  증언

“소개하라고  해서  알고  지내던  납읍리  현집  할아버지댁에  찾아가  살고  있는데  여기서도  재

차  소개  하라는  겁니다.  이집  할아버지는  내려가도  위험하고  어디  숨을데를  알아보고  있다고 

해서  제가  빌레못굴을  가르쳐줬습니다.  그  분이  빌레못굴을  가보더니  그곳이야말로  ‘30년  피

난지다’며  안심해도  된다며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애월로  소개

를  갔죠.  애월리에  가보니  소개민이라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초서는  일에도  끼워  주지  않는 

겁니다.  돌아가는  것이  더  위험해  보여  어머니께  아무래도  피해야겠다고  작별을  고하고,  빌레

못굴로  왔습니다.  이곳에  30명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한  달  가량을  살았을  겁

니다.

그  사건  나고  사흘동안  굴속에서  꼼짝  않고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강규남씨가  처를  찾아 

보려고  와서  굴  입구를  열어  놓고  갔습니다.  강규남이는  “살아  있으면  나오라”고  막  부르다

가  돌아  갔습니다.”  (어음리,  양태병,  80세)                     

 

=  목격자의  증언 

“폭도들이.  (봉성)  구모리  오란  몇  사름  죽이고,  집도  다  불  붙여불고.  애월  경찰들이여,  각 

마을  청년회여,  가까운  금성리  청년들,  귀덕  청년들,  젊은  사람들  뭣[철창]들  둘러매고  다  모였

는데,  날이  밝아가니까  폭도들을  잡으러  간다고.  어디  요기  빌레못  거길  알아지느냐고.  어도[현 

봉성리]  사름들은  길을  잘  가르치라고  했어.  10명.  내가  나이도  제일  어리고  해서  가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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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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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크리듯]  앉아  있으니까  나와!  나와!  열놈이  앞장서서  가는데  앞에  가르치라고  들고  했어. 

척후병으로  경찰  하나하고,  우리  열사람  하고  앞에  갔지.  나머지는  좀  떨어져서  막  군대들  모

양으로  따라오고.  어도  자리왓  동쪽으로  어음  2리로  길이  있어요.  지금도. 

앞에  서서  빌레못  가니깐  지금도  그래요.  거기  올라가면  창창창.  지금도  거시기가  올라와. 

김이.  팡팡팡.  김이  팡팡팡  올라오니  ‘아...  이상허다.  여기  뭣이  있는  거라고.’  길안내로  간 

사람도  알고  있는  데가  그  장소[빌레못굴]가  아니였어.  경찰부대가  탁  진을  쳤어.  여기  틀림어

시  뭣이  들어  있다고.  다  포위하라고  했어.  그  부근에  진을  좍...  제일  먼저  나보고  들어가라고 

했어.  하이고,  무서워서.  “이디  뭣이  있는가  해서  들어가봐,  들어가봐.”  경찰은  들어가지도 

않고.  나보고만  들어가라고  했어.  나  혼자  그때  들어간,  어디  가서  이것저것  보지도  못하고  들

어가자마자  톡  앉아버렸어.  위에선  내가  들어가서  여기저기  살펴보는  줄  알지.  횃불도  어시  그

냥  들어갔으니...  톡  앉아서  한참  있으니까    애기  우는  소리.  그때도  어린  애기  하나  있었어. 

곧  난  3개월인가  된  거.  “액,  액”  애기소리가  나.  겁이  나서  촤르륵이  나완.  “이  세끼야,  뭔 

소리야,  뭔  소리야”  허난  “아,  여기  뭐  사람소리  같은  거  납디다.”고.  횃불을  준비해야  되겠

다고.  (억)새를  매오라고  했어.  그거를  묶어서,  불  붙여서  들어가  보니  거기  사름들이  햐...  감

저랑,  뭐  곡식들,  재긴  것들이  꽉  있었어……  어도를  두번을  뛰어  간  보니까  사름들을  전부  잡

아내기  시작해연  허는  걸  보니까  사람이  여자들,  어음  2리에  젊은이  우리  연령쯤  된  거  둘.  그 

다음은  다  할아버지,  할머니.  거기서  이젠  다  나오라고  해서  세웠어.  23명이던가.  내가  알아지

는  건  규남이  어멍,  규남이  누이,  소나이  놈  다섯살인가.  그거.  규남이  각시허곡,  규남이  딸. 

그거는  없어.  저거로구나...  먼데서  내가  본  뿐이지...  그날  그  사름을  죽이라는  명령이  탁  내

려졌죠.  여기  다  거세기  허라고.  그것들을  다  세워놘...  그디  다  모연  앉아  있었어.  그디  규남

이  누이는  하이고,  죽지  말젠  거기  경찰,  애월  조씨,  그  사름도  이젠  죽었어.  그애가  알아지난 

그건지,  “살려주시요,  살려주시요.  살려주민  내가  하간  말도  다  말하고,  다  하겠습니다.” 

“이  새끼,  이  새끼  말해봐,  말해봐”  허니  말을  못해.  거기서  탕허난  그건...  하난  도망가는 

거  군인이  쏘완  죽이고.  거기서  (애기는)  안앙들  다  죽었어.  그자  오드랭이  있는  걸  탕탕  쏘우

니,  경찰하고  군인하고  줄  세원,  “사격개시!”  다르륵  다르륵  쏘우난.  애기도  호나  있었어.  옷

도  안  입젼.  그  겨울에.  물애기가.”  (어음리,  김00)

=  시신  수습과정  증언

“납읍리가  소개할  때  외할아버지는  ‘해로  불근,  대로  불근’이라며  숨어  살  데를  마련해 

놨으니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곽지리로  아버지  따라  내려왔죠.  그  후에  빌레못  굴

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토벌대로  갔던  사람들이  말해  줬습니다.  그때

부터  울면서  지냈습니다.  계속  눈물만  났습니다.  그러다가  49년  봄인가?  곽지,  금성  사람들만 

산에  올라가서  새를  비어  오도록  했습니다.  초가지붕  일  새[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간  곳이 

마침  빌레못굴  근처였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기회  봐서  찾아보자고....  작업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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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아버지께  말씀도  안  드리고  빠져  나왔습니다.  빌레못굴에  갔죠.  나란히  25구가  흙이  덮여  있었

습니다.  흙  밖으로  팔이  삐져나온  것이  있었는데  그건  들짐승이  물어  갔는지,  잘라져  있었고, 

얼굴이  나온  것도  있었습니다.  오싹했죠.  그래도  할아버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흙을  걷으

면서  확인해보니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숙모도  있고...  (눈물)  숙모  옆에는  7개월이었던  애기

가  품에  있었습니다.  훍을  더  지쳐  두고  급히  돌아왔습니다.  대열에서  빠져  나갔다고  경비원한

테  죽을뻔  했습니다…  그  후  여름인가  정식으로  시신을  수습하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곽지에  있었는데  아버지하고  내가  구루마를  빌려서  올라갔죠.  다른  가족들도  그날  같

이  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숙모는  수습을  해오고,  아기는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그  애기가  순경이  돌에  쳐  죽였다는  애기입니다.  납읍  출신  순경이  숙모가  애기를  안고  굴

에서  나오는데,  입구가  좁으니까  그  순경에게  애기를  받아  달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애기를  받

자마자  돌에  쳐  죽였다는  겁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7개월  됐을  겁니다.  아주  고운  아이었

습니다.  그것을  본  외숙모는  어떠했겠습니까?”(납읍리,진운경,72세)       

=  굴  속  유해  수습  과정  증언 

“모녀가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여자  아이  발에  고스란히  걸쳐진  고무신이  단서가  되어  유족

을  찾은  걸로  알고  있다.  남자  하나는  30m  떨어진  곳에  누워있고,  다른  남자  하나는  목에  허

리띠가  걸어져  있었다.  애월면  공무원들에  의해  유해들은  당시  도립병원으로  옮겨진  후  유족들

에게  인도됐다.”(어음리,  문창남,  남,  73세) 

3.  하가리  응원경찰  주둔소  옛터

하가리는  1948년  11월  13일  육시우영  사건으로  27명이  집단  희생당한  사건이  일어난  마

을이다.  육시우영  사건  이후  응원경찰  20여  명이  하가리  향사(연화못  앞)에  주둔했다.  이 

마을에  경찰이  들어오면서  파견소  주변에  성을  쌓고  경찰  5~6명이  주둔했으며,  1949년  가

을부터는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1개  소대  20여  명이  주둔했다.  소대장이  악독해서  추운  겨

울에도  동네  사람들이  말을  잘  안  들으면  정신훈련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연화못에  들어가

라고  하는  등의  기합을  주었다. 

민보단은  17세  이상  35세  이하의  남녀가  각각  1개  소대씩  편성되어  매일  훈련받았고,  파

견소와  동네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다.  주민들은  경찰이  먹고  쓸  식량이나  장작을  조달

해야  했고,  고된  노동  속에  간혹  보초  서다  잠을  자거나  하는  경우에는  혹독한  매질이  따

르는  등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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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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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23일  파견소에서  송두진이  구타당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나

자  경찰은  마치  피해자가  도망가다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주둔소  성  밖으로  던

져버렸다.  이  일로  담당  경찰을  파면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한림으로  전출  보내고 

사건은  끝났다.  당시  송두진은  아들이  없어지자  아들  어디  갔느냐고  취조  당하는  과정에서 

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  때  아들은  경찰이  무서워서  자기  집  마루  밑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육시우영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해병  3기생인  오창기(사망)  씨는  휴가  오면  마

을에  주둔해  있던  응원경찰을  복수심에  두드려  패기도  했다  한다. 

연화못  건너  길  서쪽에  위치했던  향사는  없어지고,  현재  창고  건물  하나가  들어서  있다. 

4.  자운당

자운당은  지역이  꽤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세군데가  크고  작은  학살이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조사되었다.  첫번째가,  1948년  12월  28일  납읍리  주민  30여명을  학살

한  장소이다.  토벌대의  납읍  주민  학살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48년  12월  28일  아침  7시  경,  토벌대는  애월로  소개  간  납읍  사람들을  애월지서  앞으로 

전부  모이라고  한  후  30여  명을  호명했다.  소위  ‘납읍리  자위대원  명부’라는  문서를  보면

서  호명했다.  토벌대는  이들을  GMC에  싣고  제주시  방면으로  가다가  신엄  지경  자운당의  한 

밭가에서  총살했다.  시신은  신엄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고  흙을  덮어주었다.  그  후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시신  소재를  애타게  찾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자운당에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당시  교사였던  양순병의  시신은  다른  시신들과  같이  있지  않

고  밭  두  개  건너  다른  곳에  있었다  한다.  양순병은  도망가다  총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세번째는  납읍리  주민들이  학살된  1948년  12월  28일,  애월면  관내  하귀리,  상귀

리,  유수암리,  고성리  등지의  주민  70여  명  역시  집단적으로  끌려와  이곳에서  학살됐다.   

토벌대가  애월  관내  주민  70여  명을  학살한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날,  학살현장을  목격했던  김여만(신엄리,  03년  85세)씨는  “자운당  서쪽  밭에서  학살

집행이  있었지.  몇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4~5명은  동쪽  밭에서  죽였어.  내가  아는  사람도 

3명이  있었지.  문봉택  형제하고,  상귀  사람이야.  문봉택은  나에게  한  구덩이에  전부  담아버

리면  나중에  시체를  못  찾을  수  있으니까  자기만  따로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어.  내가  군인

에게  얘기를  하자  문봉택만  밭담  쪽으로  데려가  죽였지.  희생자들은  하귀지서에  수감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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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던  사람들로  알고  있어.”라고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특공대장으로  있었는데,  군인들이  시

체를  처리해달라고  해서  현장에  갔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날  자운당에서  학살된  하귀  주민들은  1948년  12월  20일  경  토벌대에  의해  강

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었다.  토벌대는  12월  20일  경  하귀1구를  포위하고  들어와  주민들을 

공회당  자리(현  하귀1리  마을회관  터)에  집결시켰다.  소개민들도  많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경찰이  호명을  했다.  호명된  사람들은  곧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  제주읍으로  향했다.  비

슷한  시간에  하귀2구에서는  토벌대가  주민들과  고성,  상귀  등지의  소개민들을  하귀국민학교

에  집결시켜  “눈  감으라”고  명령했다.  토벌대는  산에서  붙잡아  온  아무개를  시켜  “네가 

아는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다.  이렇게  무차별  손가락질  당한  사람들은  차에  태워져  제주

읍내로  보내졌다.  자운당  학살은  이렇게  제주읍내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약  1주일  후에  이

곳으로  끌려와  희생된  것이다. 

12월  28일  학살에  대해  강태중(하귀리,  03년  72세)  씨는  “제주읍내에서  자운당으로  향

하던  차가  하귀리를  지날  무렵  조군하라는  분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웃옷을  벗어 

던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말했다. 

시신  수습은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다음  해  5월  초  토벌대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구덩이에  살짝  흙이  덮인  시신은  이미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유

족들은  대강  옷가지  등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된  시신은  총  72구였다. 

한편  이  날  아버지(고두옥,  39)가  희생돼  시신수습  현장에  갔었던  고택주(남,  03년  74세) 

씨는  사건  현장에  대해  김여만  씨와는  다른  증언을  했다.  고씨는  “사건  현장은  하가리로 

올라가는  길  입구  동쪽  밭과  아랫밭이야.  이  동쪽  밭에  큰  무덤이  둘  있었고,  무덤  하나는 

길  아랫밭에  있었지.  트럭이  제주읍  방향에서  세대가  왔었다고  하는데  무덤  하나가  트럭 

한  대에  탔었던  사람들로  추정돼요.  4~5명  도망간  사람들이  죽은  곳도  나는  아랫밭으로  알

고  있어.  이  날  모두  72구  수습했다고  기억해.”

김여만  씨와  고택주  씨가  지적하는  학살  장소는  달랐다.  그러나  조사하면서  고택주  씨를 

현장으로  모셔갔는데  고씨는  서슴없이  동녘밭과  아랫밭을  지적했다.  그래서  1948년  12월 

28일,  애월면  관내  하귀리,  상귀리,  유수암리,  고성리  등지의  주민  70여  명이  학살된  장소

를  고택주  씨의  증언에  따라  신엄리  지경  자운당의  두  밭으로  결정했다. 

자운당이라는  같은  곳에서,  같은  날에  왜  이런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아직도  밝혀지

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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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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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재일  제주인은  누구인가?

 

    재일  제주인은  자신의  출신지에  대한  공동체문화를  유지하며  또한  출신지역에  대한  남다

른  애정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재외국민이다.  그러므로  재일  제주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경제적  상황을  자세히  알고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식

민지  국민으로  굴욕과  차별을  견디면서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독특한  고향  이미지를  형성해 

온  특성이  제주인의  정체성으로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립성이  강한  제주인

들은  근면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남의  어려움을  도외시  못하는  인정  또한  서로

를  혈연관계만큼의  돈독한  관계를  갖게  한다. 

    자녀관계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가부장적이지  않다는  점도  자녀들이  부모의  고향에  대

한  맹목적인  사랑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래서  그들은  이미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인정하며  새롭게  지향할  곳

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재일  교포’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들이  고향으로  보내  온 

물품과  조상에  대한  관심,  기제사를  봉행하는  고향의  혈육에  대한  고마움을  끝없이  표현한

다.  제주  어느  곳을  보더라도  발전이라는  명목아래  재일  제주인들이  고향사랑의  흔적을  충

[

]

재일  제주인은  누구인가?

(달  보명  하영  울었주  중에서)

김기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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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분히  볼  수  있다.  그들은  풍부하게  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상과  부모의  땅에  정성

을  기울여왔다.

    이제  1·2세들이  부모와  고향에  대한  관심에서  3.4세들이  세계를  향한  지향으로  넓혀나가

고  있다.  부모들이  넓은  삶을  선택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신들의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

는  것이다.

    그들의  삶을  그저  동경으로만  보아지지  않게  되었다.  재일  제주인들이  살아  온  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급한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  사소한  일로  흘러버리지  않고  사회에  야

기될  과제로서  학계에서는  연구바탕을  이루고  있고  고향에  대한  큰  사랑이  결실은  이제는 

대상이  뒤바뀌어  그들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일련의  과정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Ⅱ.  제주도민이  도일의  역사적  배경

    1.  도일의  역사

    제주  출신  재일동포는  공식  통계로  약  12만  명에  이른다고  되어  있지만,  미등록  동포를 

포함한다면  15만  명은  넘는다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은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과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  지역에만  94%에 

해당하는  11만여  명이  집중  거주하고  있다.  관서지역인  경우  전체의  69%인  8만  1,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47개  도.부.  현(都.府.縣)  가운데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오사카부(府)로,  7만  1,600여  명에  이른다.  대판.  교토(京都).효고(兵庫).나라(奈良).오카야마

(和歌山)등  관서  지역  5개부.  현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재일  동포  8만  1.300여명  이라는 

인구는  이  지역  전체  외국인  22%가  상주  할  만큼  일찍부터  이민요충지가  되었는데,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큰  産工地區로서  그  노동력의  근간은  재일  제주민들의  값싼  노동력이  바탕

을  이루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역사는  1세기가  넘는다.  일본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조사자

료에  의하면  1895년에  재일  한국인  수는  12명,  한일합방  이후인  1915년에는  3,989명이었다

고    한다.  우리  동포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노동력의  필요성에  따른  이주,  일제의  수

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잃은  농민들의  도일,  징병,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도일한  경우,  학

업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는  4·3사건으로    인해  건너간  경우도  상당  수  된다.

    제주도에서는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시행되었던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결과  농토를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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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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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한  빈농들이  일본의  자본주의  산업  호황에  따라  방적,  탄광,  토목  등에  임금이  저렴한 

단순  노동자로서  취업을  위해  건너간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초기  일본  진출자로서  자유도

항제  실시  이후에  도일한  사람들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고,  나중에  오는  형제나  친척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주선  하는  일까지  맡았다.

    일제는  1922년  12월  15일부터  자유도항제를  실시했다.  그  전까지는  조선인의  일본  이민

을  금해  왔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자  일본  자유주의가  조선

의  저렴한  단순  노동력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주와  오사카간  직항로의  개설은  부산

과  시모노세키를  거치지  않아  시간이  절반이나  줄고  경비도  세배로  절감  되었으므로  배고

픈  제주주민들은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안은  채  일

본으로  가는  배  ‘군대환(君代丸·기미가요마루)를  탔다.

    도항증명서만  갖고  있으면  쉽게  일본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기술를  가지지  못

한  사람들도  배를  탔다.  제주도민이  25%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다.  역

설적이지만,  나중에  그들은  일본  땅에서도  또  하나의  제주도를  형성  시키는  구심축이  되었

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일본으로  가게  되면  남은  사람들은  어려움에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들로부터  돈이  송금되어  어려움에서  구원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군대환은  1922년(大正  11년)  10월에  개통된  제주~오사카  정기항로를  운항했다.  제주도의  각 

면의  제주,  한림,  서귀포의  항구를  돌며  승객을  태우고  4일  항해  끝에  오사카에  도착했다. 

    2.  일본의    저임금  노동력

    제주인이  일본으로  가게  된  주요  원인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강제  징용과  회유, 

협박  등  온갖  방법을  동원  농민을  중심으로  젊은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시켰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  아시아에서  상권을  도로  거둬가기  시작  하자  공업  경

기의  호황을  맞기  시작한  틈을  타  아시아의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  했다.  1910년을  넘어서

면서  급격히  증가하는  공장의  노동  수요를  일본  내에서  충당을  못  하자  식민지로  눈을  돌

려  ‘직공수집장이’를  조선으로  보내어  노동자를  모집하기  시작  하였다.

    오사카시  사회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동자로서  일본이나  만주,  그  외의  다른지역으

로  이주하는  것은  닷  생활의  여유가  있거나  또는  소질이  좋은  사람에  한하였기  때문에,  농

업  노동자로서  조선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격심하게  곤란하거나  굶주리고  있는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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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었다고  보고된  바  있다.  징용자나  탄부,  토공,  단순노동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에서 

농토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을  잉여노동을  간주하여  막무가내로  끌어갔고,  자본주의 

과정의  인력난을  조선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대체  해나갔다.

    1920년대  이후  조선  농민들의  살림  파탄은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운  일본의  토지  수탈

로  인해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직공  수집을  하면서  조선의  여성  노동력까지  마구잡이로 

포섭하거나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직공수집장이’들이  공언한  말을  듣고  3년이면  300

원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농지를  담보로  농지를  빌리거나  고리채를  얻는  경우,  아니면  일

본으로  가는  비용을  전부  외상으로  해서  일한  후  갚기로  하여  공장  취업을  시작  했다.  이

렇게  해서  진  빚을  몇  년을  일해도  갚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했다. 

    가혹한  노동조건과  비참한  환경아래서  조선의  방직  여공의  신변  보호서는  합법적인  것처

럼  보였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여공의  신병을  구속하는  수단이  되었다.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할  줄  알았던  여공들은  첫날부터  기대했던  상황이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도착해서  받아든 

침구며  기숙사라는  것은  한마디로  돼지우리와  다름없었다.  밀폐된  방안,  탁한  공기,  공동으

로  사용하는  잠자리,  더러워져  때가  말라붙은  침구,  다다미  한  장에    한명이  여공이  사는 

과밀한  상태......,  이름만  기숙사였다.  민족  차별은  더  심각했다.  일본인  여공과  조선인  여

공이  같은  건물을  기숙사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드물게  같은  건물에  있다  하더라

도  방은  함께  쓰지  않았다.  한  건물  안에서도  남향  방은  일본인  여공이  쓰고  햇볕이  잘  들

지  않는  북쪽  방은  조선인  여공에게  주어졌다.

‘1925년  3월  14일  한경면  조수리에서  출생,  19살인  1944년  2월  군대환을  타고  시모노  세끼

항에  입항하여  기차로  대판에  도착  하였다.  대판에서  테라다  방적공장에서  아침  7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일하면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식사  때가  되면  사발  밑바닥에  나물을  깔고  그 

위에  밥을  얹은  음식이  나왔다.  공장에는  제주사람들이  많았으며  2년  정도  있다가  공장일을  그

만  두었다.  그  후  경도에  있는  외삼촌  집에  머물렀지만  생활이  어려워  냄비,  주전자,  옷가지 

같은  생필  품을  가지고  쌀,  강냉이,  감자,  밀가루와  바꾸려고  아키타,  규수  등  전국의  지방을 

돌아다녔다.  48년  23살  때  아이가  하나있는  남편과  결혼을  하였으나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려도  병원에  한번  못가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일이  잊혀지지  않

는다고  지금은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으며  가끔  호,  목요일에  노인정에  나가서  하루를  보내

고  오는게  낙이고  손자  손녀들이  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서 

자손의  얼굴을  한번  더  보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돌아가신  남편과  고향에  한번 

씩  방문  하고  부모님  산소에  배향하는  걸  큰  소원으로  살았다고  한다.  (경도거주  윤O옥  할머

니  당  84세    1988,  2008  11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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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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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장에서는  언어  소통이  안되어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어느  여공은  그  공장을  나올  때

까지  한마디  일본  말을  못하고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하면  작업반장에게  얻어만  맞았다고  했

다.  그러다  간혹  빚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곳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미는  사람도  있었다.  타국에서  가정을  꾸민  뒤에  가장들은  더욱  힘

에  부치는  일을  감당  해야만  했다.  단순  저임금  노동자에서  자영의  기반을  마련하기까지의 

그  어려움은  이루  다  표현  할  수  없었다.  단  한대뿐인  기계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동일시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그날  치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의  생계비  몫이  일을  먼저  해

두고  나서야  아침을  먹고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기계임대료,  재료비등에  지불해야  할  돈울 

벌기위해  죽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루를  이틀로  살아간  것이다.

    간신히  돈을  모아  집에서  가내  수공업  형태의  일을  하기까지  멀고도  험난한  과정을  겪어

야  했고,  아이들  양육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생계유지에  급급했던  기층노동자들은 

자식을  가르치면서  생활하기가  너무  힘에  버거웠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재일동포  2세들

에게는  바쁘기만  한  부모  아래에서  모국어와  모국의  전통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부는  해방이  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사람에  섞여  타향살이를  마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대부분  남아있는  사람들은  변화하는  국제  상황과 

영주권문제에  직면  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해방이  되고  나자  4·3  사건이  일어나서  다시 

도일  하는  자가  급증  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6.25전쟁이  발발한  덕택에  일본은  다시  전쟁경

기의  호황을  맞고,  2차  세계대전  패전의  늪에서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  했다.   

    일본의  노동  시장에  넘쳐나는  일자리를  찾아  불법으로  밀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다.

Ⅲ.  동포사회  성장과  고향의  근대화  참여

    1.  동포사회의  성장

    도일한  1세들은  갖은  고통  속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나갔다.  새로  일을  찾아오는  사람들

에게  잠깐이지만  쉴  공간도  마련해  주었다.  고향에서  불러들인  가족과  생활하려면  일본인

들과  부딪치지  않는  곳이  좋았다.  더구나  제주도  사람들은  사투리가  심해  조선  사람들끼리 

있어도  의사소통이  어려웠으므로  제주도  말이  통하는  고향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  곳을  찾

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는  제주사람들이  많이  있는  오사카에  제주인만  집단을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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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어  사는  지역까지  생겨났다.  오사카시  이쿠노쿠  이카이노(大阪市  生野區  猪飼野)가  바로  그 

곳이다.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자  일본인들이  싫어하긴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일한  한국인들끼리  지방색을  드러내며  갈등을  빚기까지도  했다.  그때마다  제주인

들은  고향의  특유한  풍속을  바탕으로  상호  부조  정신을  발휘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더  깊

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  으로  보인다.  이쿠노구  저사야에는  지금도  제주사람의  언어, 

풍습,  물건등이  제주보다  더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

다.  재일동포  1세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자리  잡으면서  일본  말이나  글은  몰라도  그리  불편

을  느끼지  않았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이  대부분  제주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생겨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이곳은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범람하는  낮은  지대여서  일본인들이  주로  가축만  사육했을  정도로  주위가  불결한 

곳이었다.  거주지를  구하기  어려웠던  제주노동자들이  이곳에  하나  둘씩  정착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제주사람들의  거주지로  탈바꿈해  간  것이다.  가장이  공장에  일을  나

가면  아낙네들은  주변의  산과  들에서  산나물을  캐거나  버려진  밭을  일궈  채소를  가꾼  후 

사람들이  왕래가  많은  자리에  좌판을  벌여  팔았다.  차츰  그  자리가  넓혀져서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코리아타운’  이락  부르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일본땅에  와서  까

지  제주의  아낙네들이  식량  부담을  덜기  위해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들  전용시장으로  키

워나간  것이다.  억센  생활력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이곳에는  한복집,  생선가게,  김치가게, 

그릇집  등이  있어  마치  제주시  동문  시장에  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2.  세시  풍속

    재일동포  3·4세들은  다른나라에  거주하는  동포들과는  달리  한국어  사용능력이  현저히  떨

어져  부모와  할아버지  세대들과의  모국어  대화조차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국이나  고향의 

세시풍속과  친족들  간의  상호부조의  미풍양속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명절이나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태양력에  따라  정초

의  설은  양력  1월  1일에  지내고,  8월  15일에  추석을  지낸다.  명절에는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제주에서  하는  벌초  관습은 

없고,  매장방법도  일본의  풍습을  받아  들여  돌아가신  조상을  모신다.  장묘방법은  일본인들

이  장례문화를  그대로  따른다.  묘지를  구입해서  조상의  묘비를  세우고,  단  아래에  공간을 

만들어  화장한  유해를  납골해  모신다.  이때  만들어진  납골  공간은  납골  항아리를  여러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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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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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을  수  있게  하여  자식이  사후에도  안장이  가능하게  조성한다.  2.3세들은  우리처럼  연중 

특별한  날을  정해  묘소에  참배하는  게  아니라  일본  풍습대로  기쁜  날  이나  슬픈  날에  찾아

가  묘소를  참배한다. 

    제사를  지낼  때  멀리서  사는  자식들이  참석은  어렵고,  반드시  참제(參祭)해야  하는  이유

도  갖지  않는다.  제주에서  제사는  보통  자정에  올렸는데,  일찍이  재일  동포들은  이튿날  회

사출근에  지장을  준다는  생각으로  망자가  돌아가신  날  저녁  7~8시에  제를  지내기도  한다. 

요즘에는  제사날에  가까운  일요일에  지내기도  한다.  역시  제사는  가족과  친척이  모여  제사 

후에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혈연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

다.  제사는  부모를  기억하고  자손들  간에  동질감을  갖게  하는  매개  역할을  크게  하는  것이

다.  이때는  일본과  다른  전통의례를  행함으로써  제주인  이라는  혈연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으로  건너  갈  때  어렸거나  글자를  잘  몰랐기  때문에  제사  때에  지방을  쓰지  않는다. 

이들은  어렸을  적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제차를  행한다.  제물은  고향  사람들이  올리는 

음식을  보아  그대로  하거나,  아니면  기억을  더듬어  차리거나,  고향을  방문했을  때  보고들은 

바에  의해  예전그대로를  중시하여  장만  한다.  돼지고기적,  소고기적,  메,  갱,  생선,  고사리, 

콩나물,  호박,  사과,  배,  귤  등을  차리고  나머지는  고인이  평소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  한다. 

이런  음식  재료들은  교포들이  운영하는  식품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1세들에  의해  모셔지는  부모의  제사는  고향에서  형제나  조카들이  지내고  있기  때문에  더

더욱  지방을  쓰지  않는  다.  이런  생각은,  양쪽에서  제사를  지내면  집안에  흉한일이  생긴다

는  의식이  잔재해  단지  부모의  제사를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지방  없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1세들은  미혼  노동자  시절  부모님  기일이  되어도  제사를  지낼  처지가  못  되었다.  일을  마치

고  하숙집에  돌아오면  하숙집  주인에게  자기의  국과  밥을  따로  달라고  하여  자기의  방에  와서 

고향을  향해  저녁밥을  오려놓고  절을  세  번  한  뒤, 

“멀리  떠나와  부모님  제사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자를  용서  하십시오”라고  한  뒤에  저녁밥

을  먹었다고  한다.(교토  거주  고  김O석씨,  구좌읍  평대리  출신)       

‘1914년  9월  13일생,  열여섯  살  때인  1930년  2월  성산포에서  군대환을  타고  3일정도  지나 

일본에  도착  했다.  대판에  둘째형이  살고  있어서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이다.  대판에서는  제주사

람이  경영하는  구슬  공장에  취직했는데,  그  공장에는  고향  사람이  8명이나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달에  5원  정도  받으면서  약  1년간  일을  했다.  그  후  단추공장,  장남감  공장,  프레스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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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카라멜  공장등  일본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공장일만  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스물여섯 

살에  친구의  소개로  표선면  성읍리  출신  당시  열여덟  살인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신부는  13

살에  물질을  하려고  밀항을  한  아가씨였다.  결혼후  경도에  있는  프레스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단독주택을  한  채  빌려  1층에는  친구  부부가  살고    그들은  이층에서  살았다.  1940년에  큰  아

들이  태어났고  프레스공장을  그만  두고  일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이혼을  하였고  아들과 

둘이  살다가  1946년  교토서원에  프레스  공장을  차리면서  재혼을  하였는데  2남  2녀를  두어  결

혼  후  분가를  시키고  둘째아들이  공장을  물려받아  같이  생활을  하였다.  고향에는  20년  전부터 

왕래하기  시작했고  여유가  있으면  매년  아니면  격년으로  왕래를  했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혈육으로는  누이동생과  큰형의  자식들이  부모님제사와  조상의  묘를  돌보고  있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  제사에  따른  ‘제월전’을 

마련하여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시  하는  가하면  조카와  누이동생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

을  소개시켜준다든지  여행을  시켜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고향의  가족들도  극진하게  대접

을  하였다고  한다.  친가뿐  아니라  처가를  향한  마음도  한가지로  고향을  방문하면  양쪽  산소를 

참배하고  친척들을  불러  식사  대접을  하고  고향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  했었다.  위로  둘째형도 

경주에  거주를  하는데  일본인  형수가  일본인이고  조카들이  어머니  성을  따른다고  하여  자신의 

조상과  부모를  버렸다는  생각에  왕래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같이  사는  며느리가  한국말을 

잘하여  부부와  며느리가  서로  잘  통한다고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한국말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

고  부인이  글을  몰라  더욱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1988년  인터뷰)  ’ 

    재일  동포  1세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굶주림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래서  고향의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집착이  매우  크고  고향에서  형제나  조카가  조상과  부모의  제사를  모시면서  벌

초를  해준다는  점을  매우  미안스럽게  생각해서  형편이  어려워도  여러  가지  형태로  대가를 

치루는  경우가  많다.

    전통의례로서  명절과  제사,  상례는  고향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판의  경우  제주도의 

전통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세에  이르게  되면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단지  국적만  한국일  뿐  그들에게  모국을  인식하게  해주는  어떤  것도  찾아  볼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을  걱정하는  1세들은  어쩔  수  없는  세태임을  인정

하면서도  자신들의  방식을  자식이  이해하고  따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극진한  향수와  사랑은  차별  대우밖에  받지  못하던  가엾은  이민  노동자

들의  가슴에  사무친  그리움의  감정이라고  치부될  뿐이다. 

    이민  1세들은  1세기  가까이  지나면서  생존해  계신  분들이  몇몇이다.  다행히  살아  계시다

고  하여도  활동하기  어려운  연세이시다.  한창  때의  혹독한  노동자  시절과  정착  생활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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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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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위해  견디어  냈던  그  많은  일들을  뒤로  한  채,  이민  일대기를  마감하는  기로에서  병마와 

고독감에  싸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어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關西  재일  교포  의학회가  1985년  발간

한  ‘재일동포  성인병  실태’  라는  보고서를  보면,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조사된  재일  동

포  사망원인  가운데  결핵의  경우  일본인보다  2배,  정신장애  2.4배,  간경변  2.7배,  자살  1.9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결핵으로  사망한  교포가  많은  것은  열악한  주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높은데,    공장  기능공과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면

서  작업  중  사용하는  접착제  등  독성  물질  사용,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의  장시간  노동  등

이  주요인이었다.  일본이  세계에서  드문  고도산업사회를  형성한  이면에는  민족  차별  속에

서도  냄새나고  위험이  뒤따르는  힘든  제조업  분야에  종사한  재일  한국인들이  피와  땀이  깃

들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3.  결혼  문제

    재일동포  1세들은  심한  민족차별로  인해  그들만의  집단을  이루며  살았는데,  2세에  접어

들면서  취업차별  문제와  결혼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

는다  하더라도  받아주는  직장이  없으며  일본인과  꼭  같이  시험을  치룰  수  있는  기회가  주

어지지  않았다. 

    2세들의  결혼문제는  더욱  큰  문제로  ,일본에  거주하면서  한국의  풍속을  이해하는  배우자

를  찾아내는  것이  어려움으로  대두되었다.  일본은  전후  한국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  주지 

않았고,  조국으로의  이송도  외면해  버렸다.  일본인과  동등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고,  영

원한  이방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차별을  해  버린  것이다.  동포  2세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활에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늦게  일본으로  귀하하거나  일본인과의  결혼을  통

해  국적을  바꾸어  버리기도  하였다.  여자인  경우에는  일본인과  결혼을  해서  일본  국적을 

얻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  남성의  경우보다  약  3배에  이르러  결혼  적령기의  재일  2,3세  여

성들의  일본인화가  가속화  되었다.  이때는  태어난  아이들이  부계를  따라  일본  국적을  취득

하게  된다.

    그러다  1985년  1월  1일부터  일본의  국적법이  부모  양계혈통주의로  바뀌어  아버지가  한국

인이고  어머니가  일본인인  경우에도  신생아는  저절로  일본국적을  취득하게  되어서,  만  22

세에  이르기까지  한.  일  어느  국적이든  선택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정  일본  국적법  제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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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제14조)  따라서  일본인  처를  맞이하는  동포  수가  크게  증가해,  귀화하는  동포  수까지  합한

다면  재일  한국인  수가  이전의  교포  사회를  이루던  때보다  훨씬  줄어든다고  봐야  할  것이

다.

    일본인과의  국제결혼은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를  대등하게  인정하는  서구이민자들과의  국

제결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인  .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서  당

사자들끼리  좋아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그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정부

가  현재의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재일  한국인들을  일본  땅에  영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정하

고  그  인권을  존중  할  때가  어서  와야  할  것이다. 

    동포끼리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일은  시급한  일이다.  남자로서  장자인  경우에는  더욱  갈

등을  빚는다.  일본에서  성장한  결혼  상대자를  고르지  못한  경우,  조국에서  결혼  적령자를 

찾아서  결혼을  했던  일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았다.  그러나  자라나  환경이  달라서  서로

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사고방식이  다른  문화차이로  인해  불행을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4.  고향의  근대화  참여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일동포고향방문’  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터져  나왔다.  새롭

게  알려지는  조국의  발전상이  재일  한국인들에게  조국의  발전상이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

롭게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유증을  같이  겪어야만  했고,  얼마  후  조

국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치러야  했으며,  조국의  재건에  한  몫을  담당하려고  무진  애를  썼

던  그들이,  일본에서  도민회를  결성하고  고향  땅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는  역대  도민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故  ‘강위전(姜

渭典)’  재일  제주도민회  고문이  도민회  창립  10주년을  맞아  기고했던  글을  보면  고향에 

대한  절실한  사랑과,  재일  제주도민들이  합심해야  일본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굴욕을  벗

어  날  수  있다는  역설을  느낄  수  있다.

  “60년  전,  1910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언어가  안  통하여  제대로  자기의사를  표현  못하고, 

일터다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소나  말이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시절,  우리  제주사람들

은  ‘한국인’과  ‘섬놈’이기  때문에  이중삼중으로  굴욕적인  고통을  겪은  팔십  고령의  한 

제주사람으로서  과거의  굴욕은  이제  악몽으로  化  하고,  우리  제주사람이  결속한  재일제주도

민회를  만들어  빛나는  성과를  만들어  온위에,  오늘  다시  동향끼리  한자리에  모여  추석명절

을  즐기게  되는  것은  실로  감개무량  합니다.  그  옛날  우리  제주사람들이  소위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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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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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제주섬놈’이라는  욕된  지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로는  하나보다도  둘이  모여야  하

며....,  아시다시피  우리  재일본도민회는  우리와  우리고향과  나아가서  조국과  민족의  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제주도  사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初志에  돌아가서  도민회의  발전을 

위하여  大同團結하실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오늘  추석  모임이  재일제주도민이  도약적  발전

을  위한  하나의  초석이  되기를  도민  여러분과  함께  빌어마지  않습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당시  제주도지사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도민회를  설립하

였고,  이후  고향방문단으로  많은  재일제주도민이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라의  건국  이

래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국

땅에서  뼈저리게  고생했던  경험에서  우러나는  이해심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고향  돕기  사업

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국방문단  행사를  통해  고향돕기  사업에  나서기  시작  했다.  그리고  조금만  여유

가  있고  틈만  나면  고향에  관심을  쏟았다.  국토  재건  사업이  한창일  때  전기  .  수도가설  . 

도로포장  .  교량건설  사업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뿐인가,  해방  후에  제주도에  각급  학교

의  설립붐이  일  당시,  또  학교가  설립되고  나서도  각종  교육  기자재  등  재일동포의  지원을 

안받은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  제주도의  아열대  기후에  착안하여  일본으로부터  감귤묘목을 

대량으로  들여다  농가에  보급시킨  것은  공헌중의  공헌으로  기록된다.  감귤나무  보급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서귀포를  중심으로  제주도  전역에  번지기  시작한  감귤농사는  농가에  고

수익을  안겨다주어  제주도의  발전이  거듭됐다.  한때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  하지  않았

던가,  과거의  가난과  굶주림의  흔적은  어느덧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Ⅳ.  3·4세와  세계화

    3세에  이르면서  한국인이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  생활환경과  교

육환경에서  민족  차별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의식이  자

라나  타국에  이주해간  어떤  동포들에  의해서도  모국어  사용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세들은  기술도,  배운  것도  없이  이국땅에서  정착을  하려고  밤낮으로  피땀을  흘리며  살

아야했으므로  모국어  교육  여건을  만들  수  없었다.  또  일본이  민족  차별  정책인  언어  말살 

정책이  심해서  공장에서건  어느  곳에서건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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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본말만  사용하도록  강제된  동포  2세들이  학교와  동네  놀이터  등  어디서도  모국어  사용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재일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장애로  남게  되는 

것이다.

    3·4세에  이르러서는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할  때와  결혼을  할  때에  부딪히는  장벽으로 

국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일본에  살면서  참정권이  없는  것과  공기업이나  공무원  임용에 

장애를  겪는다는  점이다.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경쟁을  통하여  동등한  입장을  가졌기  때문

에  무리  없이  지내는  듯  하지만  취직이나  결혼에  당하게  되면  갈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것이  큰  문제점이다.  납세의무와  국가  발전의  참여는  늘  같지만  일본의  단

일  민족주의는  다민족의  정치  참여나  국가  주요  기관에는  등용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발

상이  재일  제주인의  후손들에게는  미래에  오는  제약으로  나타난다.

    4세의  교육을  일본이  아닌  제  3국을  통해  이루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일본만을  삶의  터

전으로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들도  이민자로서  자신의  후세에게도  지엽적인  한계에서  벗어

나게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좋은  미래를  주지  못하는  데에  항상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자신

이나  남편은  제주인의  2세들로서  부모의  고생했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학교를  다닐 

때와  취직을  하려  했을  때에  부딪혔던  장벽이  너무나  컸었다.  단지  제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을  받았고  그런  걸  자녀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들이  고

향에  베푸는  걸  싫어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사는  방식을  존중하는  하

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자녀의  학업에  있어서는  철저한  관리를  했으며  나은  환경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  하는  모습

을  바람직한  삶의  방식으로  보고  자식들에게  본보기를  주려고  노력을  하였다.  가족의  화목을  우

선으로  하여  심리적  안정을  바탕으로  자식의  포부를  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들이  일

이라고,  간혹  자식이  유학을  하려고하면  외국인여권이  문제되어  한국의  외무부에  직접  방문을 

해야  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여행하는  마음으로  다녀간다고  하였다.  그때는  자녀와  둘이서만 

다닐  수  있어서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의  쇼핑센타에서  물건도  사고  밤거리를  다니면서  한

국의  또래를  접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고  했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순수해서  보

기가  좋았다고  또래의  일본  아이들에  비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걸로  생각한다고  했다. 

미래  자신들은  일본이  고향이고  묻혀야  될  땅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자식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고향에  있는  자신들에게로  돌아오는  걸  바라며  사는  것이다  라  했다.  “(교토거주  2

세,  오승자  57세)  -2008년  11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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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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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가  지나서도  재일  교포로서의  정체성이  화두가  되어  살아가는  2세도  볼  수  있었다.

‘2세로서  안정된  부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결혼에  임했을  때의 

커다란  충격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휘감아  놓아  지금까지의  생을  담보로  잡혔다는  그녀는 

제주도  출신들끼리의  지역성으로  인한  또  다른  차별이었다고  하였다.  친정부모님  고향이  아버

지는  남제주군  남원이고  어머니  고향은  남제주군  신흥리인데  민간신앙인  토산리의  뱀신앙을  믿

을  거라는  이유로  말도  꺼낼  수없었던  때를  악몽으로  기억  하고  그  후부터  이유모를  굴레속에

서  살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만  참고  넘겨야  하는  일에서  놓여나지  못

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자식을  해외로  유학을  시키고  여유가  생기자  문화학교에서  문학공부

를  하면서  유독  같은  제주인  이면서도  그  속에서  또  다른  차별을  받아야  했었는지를  풀어내는 

것이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사는  목표라고  했다. 

자신의  자식은  일찌감치  넓은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게  노력  했고  둘인  자녀  중  한명

은  영국에  유학  중이고    한명은  돌아와서  자신의  일을  돕고  있는  중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문

학인으로  자신의  삶의  원천을  표현  해보고  싶다고  했다.(오사카  쯔르하시  거주  김O자씨  50대 

후반.  200811월  인터뷰)‘         

Ⅳ.  앞으로의  과제

    재일  제주인들은  고향을  방문  할  때마다  향리에  쏟아  부은  흔적을  바라보며,  발전하는 

고향의  모습에서  더  이상  수난  받았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만큼  흡족해  한다.  자

신과  부모  .  형제의  기막혔던  삶의  고통을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둔  채,  세월이  감에  따라 

고향  사람들도  어느덧  세대가  바뀌고,  자신들  역시  일선에서  물러나  후세들이  자라는  모습

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병마와  싸우며  타국에  뼈를  묻어야  할  처지인  지금은  몇  안  남은  1세들,  자신들과  대화

가  이루어지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  지난날  고단하게  살았던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억눌

림.  고국에서  책임져주지  않는  소외감  등을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과거의  숱한 

이야기들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새로  탄생하는  자손들에게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로만  기억되어  가는  이민  1세들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

지만  현실은  그  悲願을  외면하고  있다.

    묘목이  자라나  아름답고  쓸모  있는  성목이  되기까지는  알찬  밑거름이  있어야  한다.  어쩌

지  못해  고향땅을  등지고  힘겹게  살면서도  가까스로  생활이  제자리를  잡자  다시  고향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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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들이  가난을  타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준  재일  제주인의  핏줄을  우리는  기억하고  추모해

야  한다.  민족차별과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우리의  자랑

스러운  할아버지로,  고향과  조국을  잊지  않고  자손들에게  민족의  뿌리를  남겨준  선조들로도 

말이다.

    재일  동포  2세들은  그들이  부모가  겪었던  근본의  어려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대학공부를  마쳐도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하고  민족적  차별을  받으며 

직업전선에  나서는  3세들의  어려움  또한  당면한  문제이다.  언어뿐  아니라  외적인  모습조차 

일본인  그대로인  이민  4세가  서서히  민족차별의  아픔을  느껴가는  성장기에  놓여있다.  타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기도,  일본인으로  살기도,  일본인으로  동화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입

장에  놓여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며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재일동포의  자손들이,  그들의 

조상을  가엾게  여길  줄  알고  조상을  기억하는  고향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21세기

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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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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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민란의  시대

조선후기에  빈발한  민중들의  항쟁은  민란(民亂),  변란(變亂),  농민전쟁(農民戰爭)으로  대

별해서  볼  수  있다.

민란[民擾]이란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생산  활동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  국

가권력에  의한  부세수탈이나  수령과  이서배의  수탈에  대항하여  통문(通文)을  돌리거나  정소

(呈訴)를  거쳐  봉기하는  것을  말한다.  봉기  지역이  고을  단위로  이루어지며,  투쟁의  목적도 

탐관오리의  규탄이나  부세수취의  부당성에  대한  경제투쟁의  차원에  머무른다.  주로  향회에 

의해  주도되고,  군현  단위의  향권을  장악하거나  중앙정부의  회유가  있으면  곧  진정된다. 

1862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제주에서까지  발발하였던  임술민란(壬戌民亂)이  대표적이다.

한편  변란[兵亂]은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훈장·의원·지관  등을  생업으로  하던 

저항적  지식인  집단이  정감록(鄭鑑錄)을  비롯한  이단사상을  무기로  하여,  빈민이나  유랑민 

등을  동원해서  무장을  갖추고  투쟁하는  행위를  말한다.  동원된  민인들을  병기로  무장시키

고,  직접  관아를  공격한다.  참여계층이  특정  고을의  단위를  벗어나  고을  간  연대세력을  형

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왕조의  전복을  기도하는  움직임이다.  칭병소란(稱兵騷亂)·적란(賊

變)·역모(逆謀)  등으로  불리는  정치투쟁이다.  영조  때의  무신란(戊申亂,  李麟佐의  난),  1801

[

]

제주의  민란과  항일운동

박찬식  (역사학자,  제주4·3평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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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고종  때의  이필제(李弼濟)의  난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농민전쟁은  농민을  주체로  한  대규모의  변란을  말한다.  고을  단위의  국지성

을  벗어나  중앙권력의  타도와  사회개혁을  주장하며,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는  무장투쟁이다. 

농민운동  내지  민중운동에  있어서  가장  고양된  형태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대표적이

다.

조선후기  제주지역에서  발발한  민중항쟁은  1862년  ‘강제검란’,  1898년  ‘방성칠란’, 

1901년  ‘이재수란’이  대표적이다.  이들  항쟁은  위에서  거론한  유형  가운데  민란에  가까

운  성격을  지녔다.

    1.  1813년  양제해란1)

양제해란(梁濟海亂)은  19세기  초  인사의  부조리와  수취체제의  문란을  배경으로  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네  지방관(제주목사,  제주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과  향리들의  제거를  통

해  별국(別國)을  건설코자  한  시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당시  제주목사 

김수기(金守基)  또는  배후세력이  이  사건을  반란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실제 

거사를  구상한  자들이  구상한  것은  관리들의  폐단  시정과  지방  권력구조의  개편이었다.

양제해는  1770년생으로서  1813년  옥사로  죽을  때  나이가  44세였다.  제주목  거마촌(巨馬

村,  제주시  아라2동  걸머리마을)  출신으로서  제주목의  별감을  네  번  역임했고,  풍헌을  두 

번  지냈다.  1813년  봄에  양제해는  제주목  중면의  헌장(풍헌)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그믐

에  중면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그에게  향리들의  소굴인  상찬계(相贊契)  혁파를  위한 

등소운동의  장두로  나서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윤광종(尹光宗)은  먼저 

김재검(金載儉)에게  가서  양제해  등이  변란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김재검은  상찬

계의  칼자루를  쥔  핵심  인물로서  양제해에  대해  늘  경계해  오던  차에  이  보고를  들었다. 

그는  양제해가  주도하던  등소  계획을  변란을  도모한  사건으로  부풀려서  제주목사에게  보고

하였다.  김재검  등은  야초대(夜招隊)와  800여  명의  향리들을  총동원하여  변란  사실을  밤늦

게  목사에게  알렸고,  목사는  포졸들을  양제해의  집으로  출동시켜  양제해를  제주목  관아로 

포박하여  왔다.

1)  권인혁,  「19세기초  양제해의  모변실상과  그  성격」,  󰡔탐라문화󰡕  7,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1988  ;  정

민,  「‘상찬계시말’을  통해  본  양제해  모변사건의  진실」,  󰡔한국실학연구󰡕  15,  2008  ;  박찬식,  「양제
해  모변과  상찬계」,  󰡔탐라문화󰡕  33,  2008  ;  김정기,  「양제해와  제주백성의  ‘모변(1813)  다시  보기」, 
󰡔탐라문화󰡕  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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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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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해는  거듭되는  신문에도  모변(謀變)  사실을  부인했고,  상찬계  소속인  향리들이  자신

들의  비리  사실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더욱  심하게  곤장을  내려쳤다.  양제해는  아는  옥

졸에  의해  감옥에서  잠시  풀려났으나,  다시  잡혀  와서  결국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후대에 

김익강(金益剛)이  작성한  「상찬계시말(相贊契始末)」에는  이러한  양제해의  죽음을  ‘상찬계

가  입을  막아버린’  의도적인  타살이라고  규정하였다.

양제해  등의  거사는  변란·반란이  아니라  구폐(救弊)의  명분을  강하게  내세운  민란  또는 

향전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또한  제주지역  내에서  정치·사회·경제적  폐단을  일삼고  있던 

상찬계를  타파하기  위한  등소운동에서,  더  나아가  상찬계와  결탁한  제주목사의  통치에  대한 

부정이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민란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상찬계  조직은  조선후기  제주도  향리·향임층의  동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찬계는  19세기  초  향리  직임뿐만  아니라  주요  향임직을  장악하였

던  실질적인  제주도  향권의  주도세력이었다.  이들은  제주목사  등  지방관과  밀착되어  향권

을  독점하여  나갔다.

19세기  후반  이후  1862년  임술민란,  1898년  ‘방성칠란’,  1901년  ‘이재수란’  등  주요 

민란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이들  민란의  배후에서도  어김없이  제주도  향리·향임층  내부의 

향권  지배를  둘러싼  상호  대립과  갈등이  재연되었다.  따라서  1813년  양제해란은  조선후기 

제주사회  정치·사회  세력의  구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  1862년  ‘강제검란’2)

1862년(철종  13)의  농민항쟁(임술민란)은  전국적으로  80여  개의  군현에서  발생하였다.  대

부분의  민란은  삼정(三政:전정·군정·환곡)의  문란  때문에  일어났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강

제검란’은  당시  전국적인  농민항쟁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9월부터  비롯

된  ‘강제검란’은  10월과  11월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특히  3차 

민란에서는  봉기민들이  제주목관아를  점령하여  제주도의  행정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  강제검(姜悌儉)이어서  ‘강제검란’으로  불린다.

‘강제검란’  역시  지방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  때문에  일어났다.  조선후기  제주도민들

2)  김동전,  「1862년의  제주민란」,  󰡔제민일보󰡕  이야기제주역사  67,  2001.  3.  5  ;  권인혁,  「철종조  제주민란

의  검토  -  제주목안핵장계등록을  중심으로」,  󰡔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삼영사,  1985  ;  망원한국
사연구실  19세기  농민항쟁분과,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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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  나라에  내는  세금은  중앙정부에  올리지  않고  대부분  지방관아  재정에  충당하였다.  그러

나  본래  조세  액수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아  관아재정  및  진상물  마련에  별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이에  진상물을  마련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제주도  남자들을  대상

으로  평역미(平役米)를  거두었다.  민란이  발생했던  1862년  당시  제주도  남자들은  평역미로 

1년에  여섯  말을  봄·가을로  나누어  지방관아에  바쳐야  했다.  빈부의  격차에  상관없이  세금

을  부담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부담은  무척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농민들

은  생계유지를  위해  개간이  허용되지  않는  목장지역에  들어가  몰래  토지를  일구어  경작하

였다.  이러한  개간  지역에  대한  화전세와  목장세를  지방관아에서는  관아재정  확보를  위해 

과도하게  징수하였다.

9월에  발생한  1차  민란은  과다한  화전세  징수에  저항하는  대정현  화전민들의  민란이었

다.  추수기가  다가오자  지방관아에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는데,  한  말로  정해진  세금

액수보다  훨씬  많은  네다섯  말을  징수하였다.  이에  덕수리  김석란  등이  부당한  화전세  징

수에  저항하는  취지의  사발통문을  돌리면서  모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세금  징수  관리들

의  집을  부수고,  제주목관아로  들어가서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제주목사  임헌대로

부터  시정을  약속받음으로써  1차  민란은  진정되었다.

10월의  2차  민란은  제주목사의  지시로  화전세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강제

검·김흥채  등이  5죄인  타살  등을  주장하면서  대정현뿐만  아니라,  제주목·정의현에까지  사발

통문을  돌리면서  시작되었다.  강제검은  대정현  광청리의  화전민으로  예전에  대정현  서리를 

역임한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강제검은  민란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하였

고,  전  도민적인  봉기로  확대시킬  수  있었다.  강제검  등이  주장한  5죄인은  김석룡·김종주·

송인원·송응환·김형량으로서,  이들은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지방관아의  향리들이

었다.  1만  명의  봉기민들은  다섯  죄인을  수색하여  이들의  집을  때려  부수고,  민란에  동참하

지  않은  사람들의  집을  차례로  파괴하였다.  그리고  봉기민들은  제주목관아로  들어가  목사

를  만나  5죄인을  제거할  것을  약속받았다.

봉기민들은  제주목사에게는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는  아직까지  봉기민들이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정치문화적  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민

들은  지방관리들과  결탁하여  제주도민을  괴롭혔던  토호세력과  육지  상인들을  또  다른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조천리에  거주하던  정의현감과  대정현감을  각각  역임한  김해김씨,  거창신

씨의  집을  부수었다.  그리고  포구에  정박해  있는  육지  상인들의  선박을  불태웠다.  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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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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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베를  싣고  와서  제주도  특산물인  미역·전복·양죽·말  등과  무역하면서  제주도민들로부

터  부당하게  이익을  챙겨서  평소  도민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11월의  3차  민란은  2차  봉기가  진정된  뒤  제주목사가  봉기주도자들을  잡아들이도록  한 

데  대한  불만으로  발발하였다.  이에  강제검  등이  제주목관아를  점령하기  위해  수만  명의 

봉기민들을  동원하여  제주성  동쪽의  연무정에  집결하였다.  11월  17일에는  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제주목사를  관아에서  축출하였다.  관청을  점령한  봉기민들은  그  동안  각종 

수탈의  근거가  되었던  모든  문서를  불사르고,  평소에  원한이  깊었던  5죄인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구폐절목을  작성하는  등  제주도의  행정

을  1월  말까지  장악하였다.  강제검  등  민란지도부는  제주목사로부터  병부와  인신을  빼앗으

려고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제주도에서  민란이  확대되고  있음을  중앙정부에서  확인한  것은  12월  14일이었다.  정부는 

임헌대  목사를  파직하고  신임목사로  정기원을  임명하는  한편  민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안핵사로  이건필을  파견하였다.  신임목사  정기원은  제주에  도착한  직후  제주도  양반세력들

의  도움을  받아  1월  말에  강제검  등을  포박하였다.  정기원  목사는  민심의  불안을  진정시키

기  위해  관덕정  앞에서  도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제검과  김흥채를  효수하였다.

제주안핵사  이건필은  총  52명을  신문하여,  그  중  30명을  처단하였다.  11명이  유배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처벌받은  사람들  가운데  화전민이  가장  많았고  품

팔이꾼·목축업자  등이  망라됨으로써,  빈민층이  적극적으로  민란에  가담했음을  보여  준다.

    3.  1898년  ‘방성칠란’3)

1898년  대정군을  중심으로  ‘방성칠(房星七)란’이라는  커다란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민

란은  제주도  밖에서  유입된  신흥종교인  남학(南學)의  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이 

민란에는  당시  주로  목장토를  경작하던  화전민들이  주로  참여하여  지방관리나  향임세력의 

조세  수탈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일부  김낙영·최형순과  같은  유배인들이  처음에  민란지도부

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898년  민란은  신흥종교와  화전민층이  결합하여  지방관·

향리·향임층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3)  조성윤,  「1898년  제주도  민란의  구조와  성격  -남학당의  활동과  관련하여-」,  󰡔한국  전통사회의  구조와 

변동󰡕,  문학과지성사,  1986  ;  박찬식,  「방성칠란과  이재수란의  주도세력에  관한  새로운  자료」,  󰡔탐라문
화󰡕  16,  1996  ;  오세창,  「1898년  제주  방성칠란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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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  민란의  주요  원인은  화전세와  목장세에  대한  과도한  수탈  때문이었다.  제주목사  이병

휘가  수탈한  장화세(場火稅)의  액수를  보면,  1897년의  제주읍의  장부에  기재된  규정  집세액

은  1,200석이었으나,  실제  도민들로부터  집세한  액수는  1,838석이었다.  또한  이  민란에  참

여하였던  민인들  가운데는  이전  1896년에  있었던  민란의  진압을  담당하였던  채구석  대정군

수나  조천김씨  등  제주도  토호  세력에  대하여  반감을  품은  자들이  많았다.

이  민란의  주역인  방성칠(당시  나이  50세)은  1891년  강벽곡·정선마  등  남학교도  수백  명

의  무리를  이끌고  전라도로부터  제주에  들어와서,  제주군  능화동(현  제주시  오라동)에  거주

하며  화전  경작을  하였다.  방성칠  등  남학교도들은  화전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포교를 

하던  중에  지방관아에  의한  화전세  과다  집세에  저항하여  민란을  주도하였다.  남학당은  대

정군  광청리를  중심으로  하여  화전민들과  결합하여  민란을  주도하였고,  당시  제주에  유배와 

있던  김낙영·최형순이  민군  지도부에  합류하여  민란에  참여하였다.

민란은  1898년  2월  7일  장두  방성칠과  촌민  수백  명이  제주목  관정에  몰려와  소장을  제

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화전세와  마장세(馬場稅)·호포(戶布)·환자(還上)의  지나친  수취

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제주목사  이병휘가  시정할  것을  약속하여  일단  해산하였으나, 

관에서  장두를  잡아들이려고  하자,  즉각  이에  반발하여  봉기하게  되었다.

남학당  간부  방성칠·강벽곡·정선마  세  사람이  직접  장두가  되고,  강제평·김안일을  선군령

(先軍領)으로,  양용이·강명송을  후군령(後軍領)으로  정하고,  오을생과  방성화(방성칠의  동생)

는  장정들을  모집하는  역할을  담당시킴으로써  민군의  조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방성칠의 

심복  부대인  어남군(御南軍)은  2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각자의  목봉  머리에  ‘남(南)’자를 

새겨서  남들과  구별하였다.  남학교도들이  친군을  구성하여  민군  체제를  갖추게  되자,  2월 

28일  곧바로  제주성으로  입성하였다.  민군은  곧바로  제주목사와  대정군수를  성밖으로  축출

하여  성내를  장악하였다.  방성칠은  이어서  유배인  김낙영과  최형순을  좌우대장으로  삼아 

외진(外陣)을  구성하였다.

방성칠은  제주성을  장악한  뒤  별국(別國)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강벽곡이  오

등촌의  고여송이란  인물을  주법(主法)으로  세울  것을  제안하였으나,  방성칠은  정감록(鄭鑑

錄)의  참언에  따라  유배인  정병조를  주법으로  삼을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정병조가  도피

하여  버림에  따라서  결국  자신이  스스로  법사(法司)가  되어  독립정부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이때  방성칠은  제주의  유배인들로  하여금  육조(六曹)를  구성케  하여  중앙정부와  같은  체제

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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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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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주성에서  도망쳐  나온  송두옥·홍재진  등  토착지배세력들과  유배적객들은  조천의 

토착양반세력과  연합하여  반군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민군지도부로  나섰던  김낙영·최형순 

등을  회유하여  반군에  합세시키고,  전열을  정비하여  3월  13일  방성칠이  제주성을  비운  사

이  진입하여  다시  성을  장악하였다.  방성칠  등은  일본에  부속을  청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

나  실패하고,  오히려  민군에  참여한  민인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사기가  떨어

진  방성칠과  남학당은  제주군  귀리로  퇴각하였다가  모두  궤멸되었다.  이로써  ‘방성칠란’

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4.  1901년  ‘이재수란’4)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이재수란’은  대한제국  정부의  봉건적  수탈에  저항한  민란이면

서,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구열강의  문화적  침탈에  저항한  민중운동이다.

전제군주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황실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내장원에서  봉세관 

강봉헌을  1900년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징세를  하였고,  심지

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  징세를  담당

하던  지방관·향임  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징세를  함으로써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됨으로써  전교하기  시작한  제주의  천주교회는  프랑스의  힘

을  배경으로  하여  교세를  키워갔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버리

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루어져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

신락  노인이  교당에  끌려가  죽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

다.  더구나  일부  교민들은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폐와  교폐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정군에서는  사설  상무사(商務

社)가  조직되어  교민들과  사사로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1901년  5월초  중앙의  조세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고  민란은  시작되었다.  봉세관

의  조세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강봉헌은  도망쳐버린  데다  교민들의  한림민

4)  강창일,  「1901년의  제주도민  항쟁에  대하여」,  󰡔제주도사연구󰡕  1,  1991  ;  김양식,  「1901년  제주민란의 

재검토」,  󰡔제주도연구󰡕  6,  1989  ;  박찬식,  「한말  제주지역의  천주교회와  ‘제주교안’」,  󰡔한국근현대
사연구󰡕  4,  1996  ;  박찬식,  「한말  천주교회의  제주교안  인식-󰡔뮈텔문서󰡕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
사연구󰡕  19,  1998  ;  박찬식,  「‘1901년  제주항쟁’의  역사적  기억」,  󰡔제주역사문화󰡕  13·14,  2005  ;  박
찬식,  「1901년  제주민란에  나타난  교폐와  ‘물고자’」,  󰡔역사민속학󰡕  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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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회소  습격사건을  계기로  민군과  교회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민군은  동·서진으로  나뉘어  도

민들을  규합,  세력을  강화시켜  제주읍성  남쪽  황사평에  주둔하였다.  이로부터  민군과  제주

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교민들  사이에  상호  살상이  이어졌다.  결국  서로의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

고  교민들을  관덕정  앞에  모여  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사진  1>  1901년  5월  28일  관덕정  광장에서  민군에  의해  살해된  교민들의  시신

당시  민란의  과정에서  피살된  자들은  대부분  교민들이었다.  교회측에서는  대체로  5백~7

백  명  정도가  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숫자는  교민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이  숫자는  샌즈가  상경하여  고종

에게  보고하였던  쌍방  간  3백  명이란  숫자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제주교안이  진정된  1902

년  제주에  남아  있던  교민  강인봉이  남긴  서한에  따르면,  교민들  중에  피살된  자가 

350~360명이라  하였다.  최근  발견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을  보

면,  사망자  수는  도합  317명으로서,  교민이  309명,  평민이  8명이다.  그  중  남자는  305명, 

여자는  12명이다.  이는  안종덕  검사가  파악한  수와  일치한다.

이  사건  직후  프랑스  군함  2척과  일본  군함  1척이  출동함으로써,  제주도를  둘러싸고  열

강간에  충돌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  고조되었다.  결국  찰리사  황기연이  파견되어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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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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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  등  민군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감으로써  사건은  진정되었다. 

1901년  10월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세  장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피살된  교민들  중  연

고가  없는  이들의  시신은,  프랑스의  압력에  의해  천주교  공동묘지가  된  황사평에  묻혀있다.

‘이재수란’의  이면에는  기존의  향권(향촌사회의  권력)을  위협하는  외래적  요소인  천주

교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사회경제적·문화적·종교적  반감이  작용하였다.  특히  사회세력화된 

천주교회는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토착세력을  상당히  위협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심하게  배척을  받았다.  교민들이  각  마을의  신당과  신목을  빠짐없이  훼손한  것은  제주민들

에게  문화적  충돌을  넘어서서  생존기반을  위협하는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봉세관의 

독점적  징세권  행사에  대하여  기득권자였던  지방·향임층·향리층들이  더욱  반발하였고,  여기

에  기층민들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저항이  중첩되면서  민란으로  터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 

민란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봉세관과  천주교회의  세력화  과정에서  빚어진  제주민의  전계층

적인  반발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제주민들이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갈등,  전통과  외래

문화  사이의  충돌로  발발하였다.  20세기  벽두에  제주민들은  세계와의  만남을  제국주의적 

문화적·경제적  침탈에  대한  충돌로  시작하였다.

Ⅱ.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항일운동

    1.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축

일제는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이래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모방하여  동화(同化)정책을  조

선식민정책의  근본  방침으로  표방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식민지  현지  관료를  선발

하여  그들을  활용한  통치  방식을  썼던  것에  반해,  일제는  대부분의  요직에  일본인을  배치

하여  조선민족을  철저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조선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켜  조선민족을  영원히  지배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단순한  식민지  지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다른  열강국의  식민지  통치는  지배

를  받는  나라의  문화·역사·종족을  남겨두는  것이었으나,  일제는  완전한  동화정책에  골몰하

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제의  침탈정책은  제주지역에까지  미쳐졌다.  1906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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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를  폐지하고,  제주·정의·대정  3군의  군수는  전라남도  관찰사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도정

(島政)의  책임은  제주군수  김중배(金重培)·윤원구(尹元求)·서병업(徐丙業)  등  현지  출신이  맡

았으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한  주사  자리에  일본인들이  배치되어  행정  처리를  주도하였

다.

1913년  12월에  공포된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부터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

편이  이루어졌다.  이때  제주지역에서는  정의·대정  2군을  제주군에  합침으로써,  조선시대 

500년간  이어져온  3읍(군)체제가  단일군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아울러  추자도가  제주로  귀

속되어  추자면이  됨으로써  제주도는  1군  13개의  면으로  행정구역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1915년  5월  1일  도제(島制)를  실시하면서  군수를  없애고  도사(島司)를  두어  경찰

서장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제  제주도의  실질적  통치권자인  도사  자리에는  직접  일본인이 

배치되어  식민통치를  강화하였다.  1915년  초대  도사  이마무라(今村鞆)로부터  1945년  마지

막  10대  도사  센다(千田專平)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조선인이  부임한  적은  없었다.  또한 

1916년  서귀포에  제주도서귀포지청이  개설됨으로써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동남·서남  등  셋

으로  구분하던  지방행정이  산북과  산남으로  양분되어  오늘에  이르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행정과  더불어  지방통치의  핵심인  경찰조직에도  변화가  있었다.  본래  1894년  제주에  처

음  근대식  경찰조직인  경무청이  설치되었는데,  1906년  광주경무  고문의  소속으로서  제주분

파소를  두었다가  1907년  10월  목포경찰서  제주분서를  두었다.  1908년  10월  제주경찰서로 

승격,  순사주재소  3개를  설치하여  경부  이하  30명  정도의  경찰관으로  전도의  경찰사무를 

처리했다.  1924년  당시  경찰서장  이외에  33명의  경관이  경찰서에  있었다.  각지에  15곳의 

경찰관주재소가  있고  순사부장  이하  3~4명의  순사를  배치하였다.  제주경찰서의  창설  당시

에는  조선인  경찰서장이  임명되었으나,  얼마  없어  일본인  경찰서장이  부임하였고,  1915년 

이후에는  일본인  도사가  서장을  겸임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통치의  의도를  드러내

었다.

일제는  통치조직을  완비하는  과정에서  주민  대부분이  거주하는  농촌을  지배하기  위해  그 

이전에는  단순히  행정구역에  불과하던  면(面)을  말단  통치기구로  만들었다.  각  면의  면적을 

조정하고  각  면에  면사무소를  세우는  한편,  세력  있는  조선인을  각  면에서  선발하여  면장

으로  취임시켜  면을  실질  통치기구로  삼았던  것이다.  1915년  5월  도제의  실시와  함께  제주

군에  속했던  중면을  제주면으로,  정의군  좌면을  정의면으로,  대정군  우면을  대정면으로  명

칭을  바꿨다.  1931년  제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5년  4월  13개  읍·면의  명칭이  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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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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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  소재지의  리명(里名)으로  대부분  변경됨으로써,  현재  읍·면의  명칭으로  굳어지게  되었

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제주도  각  면에  자문기구인  면협의회를  설치하여  주민들의  여론을 

반영한다는  미명  아래  면  부과금  5원  이상  내는  유지들  가운데서  협의회원을  선발하여  그

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선발되는  자는  전  인구의  1%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면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일제는  3·1운동  이후에는  과거  한말  유력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3·1운동

이  전국적으로  한창  전개되고  있던  시점인  1919년  5월  1일에  유력자로  명성이  있던  홍종시

(洪鍾時)를  제주면장에  앉히는가  하면,  지방제도  개정  때  없애버렸던  정의·대정  문묘를  복

원시켜  주었고,  일부  유림을  선발하여  일본  시찰을  명목으로  일본  관광을  시켜주었다.

이처럼  일제는  읍·면협의회나  면장을  중심으로  하는  말단  통치조직에  부유한  주민이나 

과거  유력계층을  포진시켜  지방민들의  반발을  무마시킴과  동시에  통치에  편리함을  꾀하였

다.  그러나  이는  일반  주민들이  정치나  행정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에  다

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면  행정은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와  총독부로부터의  명령

을  집행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농회·해녀조합·축산조합  등  각종  조합의  조합장은  도사가 

겸임하였고,  각  면장이  면의  조합  책임자가  되었다.  면민들은  면  경비에  충당되는  호세부가

세·지세부가세  외에  이들  조합비를  강제적으로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연히  제주도민의 

면  행정에  대한  반발은  1920년  후반부터  각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터져나왔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  전  기간에  걸쳐서  제주도  행정의  책임자인  일본인  도사에게  경찰서

장까지  겸임하게  하면서  강력한  탄압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읍·면장과 

읍·면협의회에  제주지역  유지를  충원시킴으로써  교활한  민족분열정책을  구사하였다.  일제에 

의해  선택된  유지들은  당시에는  ‘출세’했는지  몰라도  전형적인  일제  식민지  통치의  하수

인으로  이용당했던  것은  분명하다.  일제는  지방통치조직에  제주  출신을  적당히  임용함으로

써  마치  ‘자치’가  실현되는  듯이  선전하였지만,  정작  일제강점기  내내  이들을  요직에  기

용한  적이  전혀  없었으며,  구체적인  지방자치제의  실현을  구상했던  바도  없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제는  오로지  한민족을  말살시켜  철저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직접  통치의  식

민지  지배  방식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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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2.  일제의  자본  침탈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제주도민들  역시  식민지  지배강탈  체제에  편입되

어  사회․경제적인  고난을  겪었다.  일제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광활한  중산간 

토지를  국유화하여  화전농민들의  경작권을  빼앗아버렸다.  1920년대  이후로는  자신들의  자

본  침투와  자원  침탈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제주도내의  연안  항․포구를  중심으로  식민지 

개발사업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와  일본  사이에  직항로를  개설하여  제주에서  남

아도는  값싼  노동력을  일본  공장지대로  투입시켜  제주도  사회에  일대  변화를  몰고왔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경제상태는  도민  1인당  평균  소득수준이  전국의  2분의  1에도  못미

치는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지주  또는  걸인이  거의  없이  자작농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13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자작농이  토지를  강탈당하고  말았

다.  일제는  1913년  8월  5일  제주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토지조사령  시행규칙에  의

해  신고서를  작성하여  1913년  8월부터  1914년  5월까지  제출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토지소

유자는  기한  내에  그  주소·성명·소유자·지목·등급  등을  신고하여야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한  전라남도  당국은  1916년  1월4일  제주도  전역에  대한  토지소유자  및  그  구역을  공시

하고,  도청에서  열람하여  이의가  있는  자는  60일  이내에  신청토록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들은  복잡한  신고양식  및  근대적  법률관념에  어두워  조상  전래의  농지를  그대로  몰수

당하였다.

토지조사사업  결과,  1913년  경지면적  4만9520정에  비해  1926년에는  전답  9만959정으로 

83.68%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작면적의  증가는  세금부과  대상지의  확대와  새로운  토지의 

개간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업의  결과  방대한  국유지가  생겨났는데,  이것

은  목장토와  둔전을  일제가  무상으로  국유화한  데  따른  것이었다.  국유지로  편입된  목장토

의  일부는  19세기  이래로  개간되어  온  땅으로  농민들은  개간에  따른  도지권(영구경작권)을 

갖고  있었는데,  사업  과정에서  일제는  이러한  도지권을  빼앗았으며,  나머지  개간되지  않은 

목장토도  강제로  국유지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러한  일제의  국유지  약탈정책에  맞서  개간 

농민인  화전민들이  목장토  및  둔전에서  소유권을  찾기  위해  소유권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

였으나,  결국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화전농민들  대부분은  생활기반을  도외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914년에는  총령  제136호  시장규칙에  의하여  성내·삼양·조천에  시장을  설치하였다. 

그  뒤  1917년에는  이를  확대하여  애월·한림에  시장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장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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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의  근본적인  의도는  일본  상품을  비싼  값으로  제주도민에게  판매하고자  한  것이었다.  고

액의  시장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징세액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시장  설치가  도민의 

경제적  상태를  호전시킬  수는  없었다.

192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제주도민들의  경제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1923년  12월  15일  개통된  일본  오사카와의  정기  직항로  개설로  말미암아  제주도의 

농․축․수산물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반면  양식과  일용잡화가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1930

년대  후반  일본(오사카,  시모노세키)과의  무역  비중은  목포·부산과의  연안무역과  거의  같아

졌다.  제주도민들은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  이후  살길을  찾아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  직항

로  개설은  일본경제의  호황으로  제주도가  일본산업의  ‘노동력  공급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여  항로의  경제적  수요가  늘어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자본주의가  발전

함에  따라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여기에  제주도  청․장년층이  대거  일본자본주

의의  노동자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해상교통의  진전에  따라  제주도내의  각종  항만  개발도 

이루어졌다.  산지항이  1926년에서  1929년까지  1차,  1931년부터  1934년까지  2차로  나누어 

개발되었다.  공사비  57만원을  들여  서쪽  방파제  530m,  동쪽  선착장  150m를  건설하고,  매

립지를  7만  400㎡로  확장,  넓이  24만㎡,  수심  6m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또한  서귀항·성산

항·모슬포항·한림항  등도  1920년대  후반부터  새롭게  개발되었다.

1925년에는  처음으로  육상  대중교통수단이  등장하였다.  1928년  일제는  제주도를  일주하

는  궤도  부설작업에  착공하였는데,  협재-제주-김녕을  잇는  구간이  1928년  8월에  완공되어 

시운전하였으나,  인명사고가  나면서  영업이  폐지되고  말았다.  또한  1932년  해안  일주도로를 

노폭  10m로  확장함으로써  교통이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일제는  말단  통치기구인  면의  주민

들을  강제  동원하여  도로  개설이나  보수하게  하였는데,  제주도  해안을  한바퀴  도는  일주도

로의  경우  현무암을  깨뜨려  도로를  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32년도에는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한라산  횡단도로를  만드는  일에도  착수하였다.  또한 

1938년  군용도로로  개설된  제주-표선간  동부산업도로와  제주-대정간  서부산업도로가  개통됨

으로써,  물자  및  인구  이동이  나날이  확대되었다.  도  당국은  도로에  해당하는  곳의  땅을  거

의  무상으로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면장의  지휘하에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개설로  도내  교통의  원활함을  가

져왔겠지만,  실은  일제의  자원  침탈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교통수단의  개설과  확대는  곧바로  급속한  상품경제의  전면화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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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도내  상거래액과  도외  지역과의  교역액  추이는  1929년  세계대공황의  영향으로  침체되었던 

1930년대  초를  제외하고는  일제  전  기간  동안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

거래를  주도해온  것은  도외  지역과의  교역이었는데,  유입상품의  내역을  보면,  각종  직물·잡

화·연초·백미·소맥분·도기류·소금·사탕·비료·신발·술·석유  등  거의  전부가  생활필수품이었다.

이들  상품  중  일제  전  기간에  걸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직물류와  잡화류였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상품은  도내  상거래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결국  제주도내  자

급자족적  자연경제를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도민들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화폐 

취득을  위한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  생산활동은  산업구조의  취약성으로  인해 

출가노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생산부문에서는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가  그대로  이어진  반면,  유통부문에서는  급

속히  상품경제가  확산·지배하는  엇갈린  경제구조가  심화되면서  제주도민들은  1인당  생산액

이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심각한  빈곤상태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절대빈곤에  따른  굶주림은  출가노동의  기본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상품경제가  전면화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도민들은  화폐  취득을  위하여  겸업노동과  출가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항일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사회운동은  학생·지식인·청년·농민·노동자  계층  등  모든 

사회계층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시기  사회운동은  크게  보아서는  민족주의적인  실력양성운

동과  사회주의적인  대중운동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의  경우에도 

운동의  최종  목표는  민족의  해방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항일운동의  범주에  넣고  이해해

야  할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은  내륙지방  다른  지역에  못지않게  활기를  띠고  전개되었다.  제주

도  항일운동의  배경에는  식민지시대  이전부터  중앙정부의  수탈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제주도민들의  공동체적인  정신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맞

서는  항일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식민지시대  제주도민들은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에  따라서  많은  청년과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노동  현장

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일본에서의  유학과  노동  생활을  통하여  일본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몸소  체험하고  귀향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이들  일본에  건

너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내륙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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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회운동이  노동자·농민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데  비해서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청

년들과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도민  대다수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특징을  보여  주

고  있다.

1)  일제강점기  전반기  항일운동(1910~20년대)

일제강점기  전반기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은  조천면의  1919년  만세시위운동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서울·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

곡으로  확산되었다.  조천리  출신의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은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등  조천면의  유지들과  밀

회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경향  각지의  사정을  알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전

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면

서  행진에  돌입하여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여  신촌까지  나아갔다.  이  시위

에는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김장황(金章煥)  외에도  김용찬(金容燦),  고재륜(高載

崙),  김형배(金瀅培),  황진식(黃鎭式),  김경희(金慶熙),  김필원(金弼遠),  김희수(金熙洙),  이문

천(李文千),  박두규(朴斗圭)  등이  참여하였다.  이어서  김필원(金弼遠),  백응선(白膺善),  박두

규(朴斗圭)  등은  3월  22일  조천리에서  재차  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백

응선(白膺善),  이문천(李文千),  김연배(金年培)  등이  조천리에서  함덕리에  이르는  사이에서 

많은  군중과  더불어  시위를  하였고,  김연배는  그  다음날인  24일에도  함덕리  장터에서  그곳

에  집합한  많은  군중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조천  만세시위운동  이후  구우면(한림읍·한경면)과  신좌면(조천면)의  유생들에  의해

서  만세운동의  계획이  모의되었음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당시  만세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

에서  일어나자  저지리  서당  훈장  박세현(朴世賢)과  김여석(金汝錫)  등은  전도의  서당  학생

들을  궐기시킬  것을  의논하여  격문을  만들고  거사  전에  고사를  지내다가  검거되었다.

3월의  만세  시위운동을  겪은  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들의  항일의식은  더

욱  고양되어  갔다.  1919년  5월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독립희생회’가  조

직되었는데,  그  연락원  김창규(金昌圭)가  임시정부  선포문,  해외통신문  등을  가지고  들어와

서  제주교회  김창국(金昶國)  목사,  조봉호(趙鳳鎬),  최정식(崔靘植)  등에게  군자금  모금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전도에  걸쳐  모금하여  송금하다가  같은  해  7월에  탄

로나서  모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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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  사건  관련자  가운데  조봉호는  원래  구우면(한림읍·한경면)  귀덕리  출신으로서,  경신과 

숭실학교에서  수학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제주교회  창립  당시  이기풍(李基豊)  목사를 

도와서  조사(助師)로  일을  보았다.  애월읍  금성리  교회는  그가  설립한  교회이다.  그는  독실

한  기독교  신자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38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963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을  그의  유가족에게  내려졌고,  1977년  사라봉  모충사에  도민의  이름으로  기념

비가  건립되어  그에게는  순국지사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또한  문창래(文昌來)는  애월면장으

로  있다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면직되었다.  1930년대  초  그는  동아통항조합의  자주운항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항일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1920년에는  조천리  출신  김운배(金沄培)와  문봉기(文奉祺)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해임시

정부와  접선하여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손영직(孫永稷)의  지시로  독립기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60권을  가지고  와서  활동하다가  1921년  2월에 

검거되었다.  그  결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되어  복역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오자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의  민족분열정책에  의하여  제주도  내의 

유림들이  주도하던  민족운동이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러한  시기에  제주의  청년들  가운데 

민중  계몽에  앞장서고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그들은  각종  수양회,  흥학회,  청년회  등의  청년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  사

립보통학교,  야학,  개량서당인  의숙,  노동야학  등을  열어  교사로  참석하였으며,  소년단을  만

들어  대중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주도  청년운동의  선구자로  세  사람은  김명식(金

明植),  고순흠(高順欽),  김문준(金文準)으로서,  모두  북제주군  조천읍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1920년대  들어와서  제주도  청년들은  당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에  다니면서  일제의  식민

지  교육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26년  6월  25일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일

본인  교사  야나기다(柳田彦二)가  실력도  없는  데다  조선민족을  멸시하는  발언을  자주  한  것

에  분개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한편  1929년  11월에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학생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직후  이  운동

과  관련하여  조직적인  항쟁을  펼치던  ‘학생전위동맹’(‘학생혁명당’이라고도  함)이  1930

년  일경에  적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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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강점기  후반기  항일운동(1930~40년대)

1930년대로  접어들자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  운동의  특

징은  주로  청년·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

고,  해녀투쟁과  같은  대중운동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  각  지역에서는  청년·학생들이 

반일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1930년대  전개되었던  항일운동  가운데  북제주군  지역에서  발

생하거나  북제주군  출신자들이  관여하였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1931년  1월  1일  신년하례식에서  조천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  국가  및  칙어봉답가

(勅語奉答歌)  제창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순재(金淳在),  김민원(金

玟元),  한을룡(韓乙龍),  김봉택(金奉澤)  등은  퇴학당하고,  졸업생  김주삼(金柱三)  등은  일본

인  교장을  습격할  계획을  하였다  하여  구속되었다.     

또한  1931년  3월  평소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여  오던  졸업예정자  김원요(金源堯)를 

학교측에서  퇴학시키자,  양두옥(梁斗玉)와  신창진(愼昌珍)등이  주동하여  졸업식  때  시위를  일

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적발되어  동조자  10여  명이  일경에  연행되고,  양두

옥과  신창진도  퇴학당하였다.  이에  2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차별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스기사키(杉崎)  교장의  사택을  습격하여  사택의  기물들을  파괴하며  항쟁하였

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수의  학생이  검거되어  퇴학당했을  뿐만  아니라  복역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각  지역별로  청년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청년들이  주력하였던 

것은  야학을  통한  교육계몽  활동이었다.  그러나  일경은  이러한  교육  활동을  좌익사상을  주

입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관련자들을  구속시켰다.  1930년  3월  조천리에서  김순탁(金淳鐸), 

김시추(金時秋)  등이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소녀들을  야간에  모아놓고  교육을  시켰

는데,  경찰에서는  사상  주입을  시켰다는  혐의로  구속하였다.  또한  하귀리의  강문일(康文一), 

박영순(朴榮淳),  김홍규(金弘奎)  등의  청년이  1934년부터  마을에  야간강습소를  설치하여  미

취학  청소년들을  교육하였는데,  역시  좌익사상을  주입시켰다  하여  1936년  초에  검거하여 

형을  언도하였다.

야학  외에도  청년들은  연설회  등을  통하여  소년계몽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2년  2월  4, 

5일에  조천리의  김평원(金平遠),  김순재(金淳在),  이만구(李萬九),  김주완(金柱完)  등은  소년

들을  모아놓고  반일적인  내용의  연설을  하다가  검거되었다.

한편  함덕리의  청년들은  좌익사상가  한영섭이  1931년  1월  15일  일본  동경에서  사망하자 

장사를  지내고  3월  17일에  「동지적광(赤光)한영섭기념비」를  세우고  항일의  내용이  들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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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비문을  새겼다.  이에  일경은  비를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시기  항일운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문은  대중운동이었다.  북제주군  관내에서는  식

민지시대  제주도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던  구좌면  해녀항쟁이  일어났다.  1931년  6월부터  구좌

면  하도리에서  시작된  이  투쟁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관제  어용화되었던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본인  도사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해녀조합은  지정상인과  결탁하여  지정판

매를  강요하고  저울눈을  속이는  방법을  동원해서  해녀들이  고생하면서  채취한  전복·해조류의 

가격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해녀조합비를  과도하게  징수하고  출가증을  발급할  때  수수료를 

받는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구좌면의  하도,  종달,  세화,  연평(현  우도면),  정의면(현  성산

읍)의  오조,  시흥  등  6개  마을  해녀들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시

위를  벌였다.  당시  해녀  시위대는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며  만세를  연호하면서  행진하였다. 

그리고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하던  다구찌(田口禎熹)  도사를  포위하여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

다.  이  때  해녀측에서  제시하였던  요구  사항은‘지정판매  절대  반대’,‘출가증  무료급여’, 

‘담당  서기의  면직’,‘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일본상인  배척’  등으로서  반일적  성격

이  강하였다.

일제는  경무국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에  좌경분자들로  조직된  구좌면  ‘민중운동협의회’가 

활동하고  있다는  혐의를  잡고  청년  수십  명을  검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  검속되었던  백여 

명  가운데  해녀로서는  하도리  부춘화(夫春花),  부덕량(夫德良),  김옥련(金玉蓮)  등  세  명을  제

외하고는  전부  석방되었다.  그러나‘민중운동협의회’  관련자들은  다수  구류되어  재판에  회

부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제주  경찰에서는  그동안  내사하여  왔던  제주도  청년사회운

동단체  조직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게  되었다.  3월  1일  모슬포  시위를  계기로  오대

진(吳大進),  이신호(李辛祜)  등을  검속하고,  이어서  3월  11일에는  제주청년동맹원  수십  명을 

전도에  걸쳐  검거하였다.  이후  구좌면  청년들의  재판  과정에서  이들에게  해녀투쟁과  관련된 

혐의는  없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한  것만이  문제시되고  있다.  결국  일제는  해녀투쟁 

사건을  당시  제주도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을  대거  검거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해녀항쟁은  연  인원  17,000여  명의  참여와  대소집회  및  시위  횟수  연  230여  회에  달하는 

대규모의  운동이었다.  이  사건은  해녀들이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였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만  볼  것이  아

니라,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항일  민족해방운동으로  평가되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단지  해녀들만이  아니라  지역  청년,  일반농민층도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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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 

145

하였고  사건의  여파가  제주도  전  지역으로  미쳤던  점을  고려할  때,  전도민적인  항일운동으

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시대에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  가운데  여성

운동과  어민운동의  측면에서는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해녀항쟁  이후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다수의  주도  청년들이  검거되어  버림으로써  그  맥이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하로  잠적하였던  청년  일부가  흩어져  있는  운동가들을  규합하

여  산북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의  건설에  나섰다.  1932년  10월에는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조직간담회가  개최되었고  마침내  1933년  1월  28일에는  운동가들이  제주도  적

색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전후하여  구우면(한림읍)에서는  1932

년  10월  농민조합  준비를  위한  농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신좌면(조천읍)에서는  1933년  2월 

신좌  적농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농민조합  준비조직은  해녀항쟁으로  운동세력이  소멸한  구좌면을  제외한  산북  지역의  각 

면으로  뻗어나갔다.  역량이  비교적  강하였던  구우면에서는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반

대운동을,  역량이  약하였던  제주읍과  신우면(애월읍),  신좌면에서는  운동가들이  진흥운동조

직으로의  침투를  강화하고  진흥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농조  준비위원회는  제주청년동맹  출신인  김두경(金斗璟)이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는데, 

1934년  말까지  운동을  지속하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의해  대거  검거되었다.  이  운동으로 

운동가  62명이  입건되었는데,  김두경  등  16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장창구

(張昌求)  등  나머지는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고,  고자화(高子華)  등  10명은  일본  등지로  도

피하였다.  16명은  목포로  호송되었는데,  일제는  이  재판을  보복  차원에서  전개하여  1937년 

6월에  가서야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1936년  6월  부생종(夫生鍾)은  옥사하였고, 

김두경은  1937년  7월에  병보석으로  출소하였으나  7월  14일  사망하였다.

한편  일본  전협  출신인  배두봉(裵斗鳳,  하귀리,  30세)  등이  신우면에서  농민조합  건설운

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  역시  1935년  검거되어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더이상 

조직적인  항일운동은  제주도에서  전개되지  못하였다.  일제의  대탄압과  1940년대  전시체제

하의  총동원령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항일운동  세력이  국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잠적

하였던  것과  같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일부  청년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비판하는  반일  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검거되

기도  하였다.  특히  조천리의  김시용(金時容)  등은  항일의  목적으로  1937년부터  소비조합운

동을  벌이면서  반전사상을  계몽하다가  1942년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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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Ⅰ.  4·3의  기억

    1.  기억의  문화적  재현 

과거  사건에  관한  기억의  행로는  대략  서너  가지일  수  있다.  서서히  지워지다  희미한  흔

적만  남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길,  아니면  망각과  변조·왜곡을  유도  또는  강요하는  힘들

에  맞서면서  유지-재생-전수되거나  재구성-변형되는  길이  그것이다. 

이  기로에서  후자  쪽의  행로로  들어서게  되면서  내용  범위와  의미가  정해지고  하는  데

에는  기억의  실체화와  물질화가  중요한  몫을  맡게  된다.  떠다니는  기억들을  잡아채어  정박

시키고,  억눌렸거나  가라앉은  기억들을  끌어올리며,  다른  집단이나  후세대인들에게  부단히 

환기시키고  전달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런  방향으로의  개인적·집단적  실천은 

문학·예술적  창작-표현  행위,  기념물·조형물의  제작,  유적지  지정·보존이나  추념공간의  조

성·유지,  정기적  의례의  기획  및  실행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듯  다양한  방식·형태의  ‘문화

적  재현’  행위들을  통해  기억은  의식적으로  재생시켜져  다시금  유지되는  것이다. 

1)  이  강의용  원고는  아래의  졸문들을  부분적으로  조합하여  재구성하면서  수정·보충도  가한  것임:  「기억

에서  대항기억으로,  혹은  역사적  진실의  회복―기억투쟁으로서의  4·3문화운동  서설」(2003);  「평화·인
권의  시각으로  보는  제주4·3과  4·3운동」(2005);  「4·3  기억의  처소와  기억문화의  변천」(미발표).  원
문의  주와  전거  표기는  모두  약하였음.

[

]

4·3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

  문화운동과  ‘기억의  터’를  성찰함1)   

김영범(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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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147

4·3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원초적  기억들에도  저마다의  체험과  견문  내용이  다양한  이

미지와  압축상징들로  엮어져서  들어앉아  있었다.  ‘생체기억’이면서  ‘심층기억’일  수  있

었지만,  그것들이  고스란히  전수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마멸과  파편화,  그리고  단

절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기억들이  반세기를  지나서  분출하기 

시작했고,  오늘  이  시점까지  우리에게  전수되어  과거를  추체험하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분출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땅을  파서  수맥을  찾아내고  지상으로 

끌어올린  인위적  공사의  덕인  점이  컸다.  그  ‘공사’에  해당한  것이  다방면으로  시도·전

개된  문화적  재현  작업들이었다.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선도된  그  작업이  1990년대에  들어

서는  집단적·조직적인  재현  활동으로  발전해  갔다.  증언  채록,  추모제  거행,  마당극·노래 

공연,  영상물·조형물  제작이  대표적  사례들이었다.  특별한  의도와  목적의식을  담고  있었다

고  보아야  할  실천적  문화운동  범주가  그로부터  성립했으니,  ‘4·3  문화운동’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  운동은  원초적  기억의  부활만  아니라  재구성과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오

늘  강의에서  그것을  살펴보려는  소이이다.   

      2.  4·3의  관제기억과  그  영향 

남한  국가가  제조하여  관리해  온  공식역사  속에서  4·3은  1948년  4월  3일  미명에  제주도 

전역에서  공산반도(‘폭도’)들이  경찰관서와  우익인사들을  기습  공격한  사건으로  기술되었

고,  결국은  패퇴하고  만  무장봉기로  인식시켜져  왔다.  하지만  수십만  제주인들의  기억  속에

서  4·3은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군·경과  우익집단이  자행한  무차별적  민간인  살해의 

참상,  가족·친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수형인  불법  처형,  부녀자 

성폭행과  능욕,  가옥  파괴와  촌락  폐허화  등의  갖은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늘상  따라다닌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들.....

이에  대해  국가는  4·3의  성격을  ‘공산폭동’으로  못박아  규정짓고  주민들의  마음속에 

원죄의식을  심어놓고는  집단학살  행위에  대한  합리화를  기도하며  자기면죄부  부여의  근거

로도  삼았다.  반공국가의  시선으로는  4·3  당시의  제주도  주민  다수가  용서받지  못할  존재

인  ‘빨갱이’이거나  ‘(준)폭도’였다.  피살자의  유족이나  후손들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

지라는  듯,  촘촘한  연좌제의  그물망으로  계속  옥죄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관제기억

(official  memory)이  제주도민만  아니라  국민  일반에게도  공공적  기억으로  강요되듯  주입시

켜졌다.  주로  관찬서를  통해  만들어져서  초·중등학교의  교과서,  반공영화,  언론매체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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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물  등을  통해  보강·전파된  기억이었다.  그것에  대한  의심과  도전은  가혹한  법적  규제와  물

리적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을  낳았고,  그런  공포심에  의해  관제기억은  성역처럼  유

지되었다.   

그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삶의  조건  속에서  제주사람들의  의식과  심리는  극심한  패배주

의,  공포심(레드  컴플렉스),  자책감,  체념적  숙명론,  허무주의  사고에  점령당했다.  ‘4·3사

태’의  직접  체험자였거나  피살자의  유족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가  미쳐버린  시절,” 

“눈물마저  죄가  되던  험악한  세월,  피가  피를  부르던  험악한  세월”을  돌이켜  생각하기 

싫어했고,  기억의  목록에서  애써  지우려  했다.  매년  돌아오는  부모·형제·친지의  제삿날에, 

육체적  상흔의  고통  속에서,  느닷없이  가해지는  연좌제의  피해  체험  속에서,  4·3의  기억이 

불시에  되살아나곤  했지만,  가능한  한  되살리고  싶지  않고  떨쳐버리고픈  기억이었다.  그래

서  4·3의  기억은  대개가  억압되고  파편화된  상태의  것으로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어쩌다  끄집어내지더라도  관제기억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매우  분열된  모습으로  재현되

었다.  그런  양상은  1980년대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나오기  시작한  증언·회고담  등의  자료를  통해  4·3  체험자들의  사건  당

시의  지위­신분별  사회적  기억의  형상  및  특징을  탐색해  본  결과(권귀숙,  2006)에서도  의

식의  분열  또는  모종의  심리적  고착  현상이  확인된  바  있다.  경찰,  군인,  서청원,  ‘산사

람’,  좌익단체원,  우익단체원,  민보단원,  피난생활자,  피해자  등의  범주별로  구체적인  기억

의  내용들이  서로  다르면서도  “나는  피해자,  남은  모두  가해자”였다는  생각에  그들  모두

가  사로잡혀  있음이  발견된  것이다.  학살의  비극이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으로  초래되었음

을  감지하면서도,  그  힘의  실체를  찾고  확인하려기보다  가까운  이웃을  포함한  서로를  원망

하고  비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4·3의  기억은  거의가  부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채 

기억  주체들의  의식의  분열까지  수반하고  있었다.  대중의  역사적  기억이  관제기억에  포박

된  결과였던  것이며,  국가가  벌여온  ‘기억의  정치’가  그만큼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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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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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4·3  문화운동

 

    1.  진실  찾기의  첫걸음   

4·3의  역사적  기억이  대중적·공공적  차원에서  재구성되려면  역사인식  자체가  먼저  바뀌

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전환에는  역사적  진실  자체의  복원적  재구성이  전제되어야  했다.  진

실의  복원은  진실  찾기,  진실  포착,  진실  확인을  차례대로  거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네  가지의  연속과제를  떠맡아  수행코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통틀어  ‘진실회복운동’이라 

이름할  수  있다면,  4·3에  관해서도  그  운동은  절실히  요청되었고,  실제로  1980년대  후반부

터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4·3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금기시되고  있던  폐색  상황에서  그  진실  찾기의  기폭제가  된 

것은  현기영이  1978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순이  삼촌」이었다.  이  소설에서  문학의  이름으

로,  문학의  힘을  빌려,  30년  전  제주도에서의  집단학살  사실이  폭로되고  그  참혹한  실상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진실의  한끝이라도  드러내고  알리려는  의지가  오래된  금기의  벽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고,  유례없는  역사적  비극에  대한  육지부  외지인들의  진지한  시선이  조

금씩  형성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  소설을  표제작으로  하여  1979년에  출간된  현기영의  소설

집은  당국에  의해  즉시  판금되었지만,  은밀히  유통되면서  사실상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1986년에는  청년시인  이산하가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는데,  ‘민족해방·통일지향

의  서사시’로  평가된  이  작품은  무장대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영웅적  반외세

(반미)투쟁으로  그려냈다.  그로  인해  시인과  게재지(『녹두서평』)의  발행인·편집장은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필화사건이  4·3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를 

부쩍  높여주는  효과를  낳았다. 

4·3의  진실  찾기가  본격화한  것은  1987년의  6월항쟁  이후의  일이었다.  우선은  사건  체험

자,  희생자  유족,  군·경·관  관계자,  일본으로  도피했던  남로당  도당  간부와  무장대  가담자 

등의  회고기록  발굴과  증언  채록  작업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런  맥락에서  증언집이  출간되

었으니,  오성찬의  『한라의  통곡소리』(1988)와  제주4·3연구소의  『이제사  말햄수다』 

1·2(1989)가  그것이었다. 

1989년  초에는  제주신문사에  4·3  특별취재반이  구성되어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

했다.  이  기획연재는  1990년에  『제민일보』로  지면이  옮겨져서  「4·3은  말한다」라는  제목

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도민들의  4·3  재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4·3을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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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이  아니라  ‘4·3이  말하는’  것이라는  그  제목은  가감  없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갈망이  얼

마만큼  큰지를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  특별취재반은  수십  개  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촌

로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생생한  증언  자료를  확보해냈다.  취재기간  6년  동안  3천여  건의 

증언이  채록될  수  있었다.2) 

국회  5·18  청문회를  통해  광주학살의  진상과  그  책임소재가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  데

서  고무도  되었을  터인즉,  용기  있고  솔직한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요된  침묵과  절대

적  금기의  벽이  깨지면서  묵은  기억들이  하나씩  인출되기  시작했다.  ‘기나긴  벙어리의  세

월’을  견디며  살아와  이제는  80,  90대가  된  4·3세대들이  발설의  욕구에  비로소  배출구를 

찾은  듯  말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직접  겪어서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생겨난  가슴  속  응어리를  이제는  풀어야겠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들을  보기  전엔  죽을  수  없어,  절대로  죽을  수  없어”라는  통한의  몸

부림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  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나

왔다.  4·3이  스스로  입을  열어  이제  모든  진상을  털어놓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2.  4·3  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

  1)  4·3  문화운동의  태동

      (1)  문화운동의  前史로서  추모·위령제

소설가  현기영이  근친의  대명사인  ‘아버지’와  ‘삼촌’을  소설  제목으로  썼던  것은  역

사를  바꾸어보려다  스러져간,  아니면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어  무참히도  죽어간  이들에  대해 

자녀세대가  맛보게  되는  절절한  그리움,  깊은  상실감,  솟구치는  연민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

복합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대변하는  것일  법하였다.  그런  심리는  망자들에  대한  추모, 

추념,  애도의  정을  가장  먼저  불러일으킨다.  「순이  삼촌」이  발표되고  몇  달  후인  1979년  4

월  3일,  제주  출신의  재경  청년지식인,  사회운동가,  종교인  몇몇이  어느  개인가옥에서  비밀

리에  추모  제사를  지낸  것도  그런  심리가  반영된  행위였고,  상징적  의미가  큰  의례였다.     

그  후로  4·3  문화운동의  기폭제는  추모·추념의  제의·행사나  그  시도  속에서  나오는  경우

가  많았다.  최초의  공개적  추모행사는  1988년  도쿄에서  열렸는데,  전년도에  결성된  <제주

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것이었고,  그  후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제주도에서

2)  제주도  주민들만  접할  수  있었던  「4·3은  말한다」  연재기사는  나중에  다섯  권의  책으로  묶여나왔다(제

민일보  4·3특별취재반,  199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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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151

는  1988년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40주년  계기의  추모제를  준비하였으나,  당국의  저지로  성

사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2월,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제주여민회,  제주청년연합  등  12개  단체가  준비위원회

를  구성하여  협의하고  같이  움직인  결과,  제주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행

사는  ‘큰굿’  제차에  따라  진행되었고,  마당굿도  곁들여졌다.  그  후로  1993년까지  매년  4

월초에,  10여  개의  문화예술·여성·민족민주운동·천주교·학생  단체들로  구성된  ‘4월제  공동

준비위원회’(‘공준위’)가  추모제를  준비하고  주최하였다.  서울에서도  1990년에  제주사회

문제협의회와  재경제주학우회협의회의  주관으로  성균관대  잔디광장에서  최초로  추모제가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추모행사의  연례화가  시도되었다. 

1991년에는  ‘민간인희생자  유족회’가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위령제를  따로  개최하였다. 

이는  ‘누구를  추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다툼의  파생물이었

다.  유족회장은  추념사에서,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붉은  광란배들이  제주도를  공산기지로 

만들려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폭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때  민민운동  진영과  시민단

체  중심의  4월제  공준위  주최로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추모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가두시위로  항의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키고  무차별로  연행하였다. 

1992년의  위령제에서도  앞의  유족회장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속임수로  제주섬은  사회

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싸움터로  화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암

울했던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이웃과  이웃을  위로하고  사랑과  화합의  악수를  나누자”고 

제의하여,  전년도와는  다소  달라진  자세를  내보였다.  같은  날,  시민단체  중심의  공준위가 

개최하는  추모제도  전년과는  달리  경찰의  저지나  방해를  받음이  없이  계획대로  열렸다. 

1993년에는  도의회가  중재에  나서서  유족회와  공준위가  공동으로  위령제를  개최하고  한

곳에서  봉행하는  방안이  모색되었으나  협상  결렬로  무산되었다.  이  해의  4·3추모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7백  곳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는데,  4·3을  ‘민중항쟁’으로  기리고  항쟁  참여자

와  학살  희생자를  다같이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의회의  거듭된  중재  노력은  1994년부터  유족회·공준위  공동  주최의  합동위령제  거행으

로  결실을  맺었다.  공준위는  ‘추모제’라는  명칭을  고집하지  않았고,  유족회는  무장대  가

담  혐의가  있는  사망자도  ‘희생자’  명단에  들어가는  것을  용인했다.  다만  “4·3으로  인

해  사망했으나  도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인사는  위령제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로만  합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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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다.  ‘폭동’과  ‘항쟁’이라는  ‘극단적인  용어’도  서로  쓰지  않기로  했다.  모든  희생자 

유족들  간의  화해와  50만  도민의  화합을  위한  디딤돌이  놓아진  것이었다.  위령제  봉행  취

지문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이고  해결자인  제주도민의  단결에서부터  4·3의  명예회복은  시

작될  것”임이  강조되었다.  도지사의  추도사는  “슬픔과  고통의  4월을  화합과  전진의  4월

로  승화시킴으로써  갈등을  치유”할  것을  주문했다.  제주도의회  의장도  “단순한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나  떳떳한  제주인”이  될  것을  역설했다. 

이윽고  1997년에는  4·3의  상처를  범도민적으로  승화시킨다는  취지로  ‘제주4·3사건  희생

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50주년이  되던  1998년부터  매년  위령제를  주

최하였다.  그리고  2001년부터는  범도민위령제봉행위원회가  매년  새로  구성되어  위령제의 

개최를  주관하였다.  유족회의  위령제는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공준위의  추모제는  탑동광장

에서  따로  거행되던  것이,  합동위령제가  되면서부터  종합경기장에서  치러졌다.  특별법  제정 

후  위령공원  부지가  봉개동으로  정해지자,  2000년도부터  그곳으로  위령제  장소가  바뀌었고, 

평화공원  완공  후에는  거기서  매년  치러진다.

      (2)  4·3  문화운동의  태동과  그  주체·조직 

합동위령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제의  형식의  틀에  갇히면서  소극적인  해원의  의

미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이에  반해  도내  문화예술계서는  4·3의  진실  회복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  하의  창작·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그  성과들이  집적되며  공개되어  갔다.  그런 

활동은  일단  개별  작가·연행자  나름의  미학적  감수성과  독자적  상상력,  그리고  특출한  기량

으로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보다  계획적·집중적·조직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고  움직여  갈  필

요성을  느꼈음에서  그들은  하나의  운동대오로  결집하였다.  기록이나  증언에  의해  밝혀진 

4·3  관련  사실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심상을  아울러  표출해내고  창조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집단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리고  목적의식적으로  수행,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니,  4·3

의  문화적  재현  운동  즉  ‘4·3  문화운동’이  태동한  것이다.  그것  역시  진실회복의  열망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는데,  제주사람들에  의해  제주  현지에서  비상한  활력으로  추동되었다. 

4·3  문화운동은  특히나  단단한  조직적  틀의  확립을  요하는  것이었다.  6월항쟁  이후로  민

주화운동의  지평이  확장되어  감과  더불어  1970년대의  민족문화론·민중문화운동의  흐름을 

부활시켜  잇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발양되었고,  제주에서도  여러  개의  문

화운동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제주청년문학회,  우리노래연구회,  <놀이패  한라산>,  <그림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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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  등이  그것이었다.  곧이어  전3자는  1987년  8월에  협의체적  연대조직을  결성했는

데,  그것이  제주문화운동협의회(이하  ‘제문협’)이었다. 

전체  조직성원이  50명에서  80명  사이  정도이던  반공개조직으로서  제문협은  민족민주운동

과  보조를  같이하는(또는  그  일환으로서의)  문화운동이  안고  있던  여러  과제들을  소화해내려 

하였다.  특히  “제주인의  눈으로  제주  역사를  바라보자”는  각오로  4·3의  복원에  어떻게  기

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다.  다른  여러  단체들과  함께  4·3 

추모제의  거행을  꾀하여  공준위  참가단체의  일원이  된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였다. 

제문협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림패  코지는  <사진패  시각인식>과  함께  1989년에 

시각매체운동연구소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문화운동  노선을  추구하였다.  1991년  3월에  

코지는  <노래패  숨비소리>,  <풍물패  새날>,  영화·사진작가  그룹인  움직거리,  문학인  그룹 

들메와  제휴하여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이하  ‘제문연’)을  결성하였다.  제문연은  1994년  2

월에  제주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이  결성될  때  참여하면서  해소되었다. 

또한  제문협의  각  가맹단체도  개별적으로  제주민예총  산하의  분과위원회로  결합했다가 

1996년에  전체  조직이  민예총으로  해소되었다. 

 

  2)  4·3  문화운동의  전개

제주민예총은  발족  직후부터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문화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목

표는  명백히  4·3의  진실  회복에  두어졌고,  1994년부터  연례적인  4·3문화예술제(통칭  ‘4월

제’)  개최를  중심사업으로  삼아  내리  10년간  그대로  이행하였다.  민예총의  사업과  활동은 

문학·미술·음악·연극·사진·굿·문예비평  등  7개  분과(준비)위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뒤에 

가서  풍물·민요·영상  분과의  위원회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문학위원회에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소설가들과  제주청년문학회  회원  일부가  적

극  참여하다가  1998년에  제주작가회의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림패  코지>  회원들과 

진보적  성향의  몇몇  미술인들의  결합으로  1993년  9월에  창립된  탐라미술인협의회(‘탐미

협’),  <노래모임  숨비소리>와  <소리빛  사월>,  <노래패  섬하나  나하나>,  <놀이패  한라산>, 

<풍물굿패  신나락>,  <민요패  소리왓>,  <영상다큐작가패  바람섬>  등,  분야별  상시활동  조직

과  그  성원들이  민예총  각  분과위원회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래서  매년도의  4월제  주제에 

걸맞는  내용으로  분과별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4월제는  한  달  내내  제주시를  중심으로  도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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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본구조는  3월  31일의  전야제와,  4월  1일부터  30일  사이에  적정  기간과  날짜를  잡아서 

개최되는  문학제·미술제·음악제·연극제  등의  분과별  행사들의  결합으로  짜여졌다.  전야제의 

내용은  초기에는  관덕정  광장에서의  초혼굿과  마당굿으로  구성되었는데,  몇  년  후  거리굿이 

그  중간에  첨가되었다.  초혼굿은  시청  앞에서,  각  문화예술단체·유족회·시민사회단체가  어

우러져  펼치는  거리굿은  남문로와  중앙로를  거쳐  관덕정으로  이어지는  가로에서,  그리고  마

당굿은  관덕정  광장에서  연행되었다.  전야제의  이런  형식  배치는  제주도의  오랜  무속  전통

을  현재화시킨  것이었다.  개별  행사의  내용은  문학의  밤(창작시  낭송,  비디오  상영),  문학강

연회,  시전,  미술전,  마당극,  추모노래  공연,  라이브  콘서트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4월제  주최측과  참여단체들은  그  나름의  메시지를  열정적이고도  곡진한  목소리로  전하고

자  애썼다.  항쟁과  학살의  현장에서  스러져  간  이들의  “넋이여  오라”(1995년  미술제  주

제)고  호곡했고,  도민  모두가  ‘진혼’(1994년  노래공연  주제)에  나서야  함을  깨우쳤다. 

“닫힌  가슴을  열며”(1994년  미술제  주제)  4·3의  비극을  직시할  것을  호소했으며,  “섬의 

하나됨을  위하여”(1995년  예술제  및  노래공연  주제)  이념적  분열이  해소되기를  염원했다. 

그런가하면  4·3의  항쟁정신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의  “되살림과  깨어남의  아름다움”(1996

년  미술제  주제)을  그려내려고도  했다.     

문학  분야에서는  4·3문학  작가들과의  대화(‘4·3과  나의  문학’)와  세미나(‘4·3의  역사

적  진실과  문학적  수용’),  심포지엄(‘4·3문학의  재조명’)  등을  통해,  4·3의  진실과  상처

가  문학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재현되어  왔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4·3문학의 

소재가  된  곳들을  직접  답사하는  문학기행도  시도하였다. 

4·3의  회화적  재현은  코지와  탐미협이  같이  주력한  활동목표였고,  해마다  괄목할  만

한  성과를  거두어  갔다.  민중미술의  주요  역군으로  중앙  화단에서  활동해  온  강요배  개인

의  집중적인  작품활동을  통해서도  특출한  성취가  시현되었다.  1992년에  개최된  그의  ‘4·3 

역사그림전’은  “4·3항쟁의  퇴색해  가는  희미한  기억의  불씨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하

려는  집요한  회화적  작업”으로  평가받음과  함께  큰  호응을  얻었다.  그  후  1998년에  서울·

광주·대구·부산에서  순회  전시한  50여  점의  역사화는  제주의  역사와  4·3의  전모를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낸  것으로,  50주년을  계기로  한  ‘4·3의  전국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연극  분야에서는  <놀이패  한라산>이  4월제에  매년  참가하고  전국적인  활동도  벌이면서 

걸출한  성과를  낳았다.  한라산은  1989년  서울(예술극장  한마당)에서  가진  「잠들지  않는  남

도―4·3제주민중항쟁」  공연을  필두로,  ‘총론에서  각론으로’라는  방향성  아래  4·3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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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탐색하고  드러내는  작업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4월굿’  연작으로  기획  창작한  마당

극들을  매년  4월제  기간에  제주시·서귀포·한림·고산에서  공연하였을  뿐  아니라,  해마다  서

울·대구·원주·인천·목포·성주로  장소를  바꿔가며  개최된  전국민족극한마당에  참가하여  창작

마당극을  공연하였고,  부산·광주·대전·청주  등  다른  도시에서의  순회공연도  가졌다.  그럼으

로써  한라산  단원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고민하며  포착해  낸  4·3의  진실을  도내외로  널리 

전파시켜  공감대를  키우며  전국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  4·3  문

화운동  대오에  새로  합류한  노래패·민요패·풍물굿패의  활동도  저마다  특색을  내보이며  4월

제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뒤늦게  발굴·확인된  역사적  진실의  전달·전파에  영상이 

매우  중요한  몫을  한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지만,  4·3  문화운동에서도  영상작품의 

제작과  영상자료의  활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미  1991년에  MBC가  방영

한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부분적으로  4·3을  다루면서  기존의  공산폭동론을  배제하

고  제주도민들의  수난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4·28  평화협상의  결렬과  미군정  및 

경찰측의  강경진압책  채택의  배경까지도  영상화하여,  수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4·3의  비극

에  눈뜨고  그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끔  했었다.   

1993년에  4·3다큐멘타리  제작단이  조직되어  제주4·3연구소와  제문협의  지원으로  「다랑쉬

의  슬픈  노래」를  만든  것을  필두로,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1995),  「제주도  메이데이

의  실체」(1998),  「무명천  할머니」(1999),  「유언」(1999)  등의  수작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

들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4·3의  진실이  파헤쳐지고  호소력  있는  영상  이

미지로  전달되어  갔다.  1998년의  위령제에서  4·3다큐멘타리  제작단은  “4·3의  증언―이제

는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증언장을  마련하여,  피해자나  희생자  유족들의 

생생한  육성증언  장면을  영상화하였다. 

1997년에  조성봉이  만든  다큐영화  「레드  헌트」도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  인권영화제,  부

산국제영화제,  베를린영화제,  암스테르담영화제에  속속  출품되어,  4·3의  진실이  전국화·세계

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영화가  대학가에서도  널리  방영되자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동원하여  제재하려들었지만,  법원의  무죄  판결로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조성봉은  1999년에

도  「레드  헌트  2」를  제작  출시함으로써  국보법  체제하의  반공폭압주의에  맞서며  정면돌파

를  꾀하였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4·3  문화운동에서  영상매체를  중시하고  영상자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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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적극  활용하는  추세는  점점  강해졌다.  그런  추세는  4월제  기획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1998

년부터  영상  분야가  추가되었다.  그  해에  다큐멘타리  작품인  「본풀이」가  상영되었고,  1999

년에는  “4·3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를  통해  본  미군정과  4·3”이라는  주제로  영상세

미나가  열렸다.  그리고  2000년에는  ‘기억에서  부활로’라는  주제  아래  “평화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가  열렸다.  이와  관련하여  1999년에는  시각자

료의  확충이라는  취지에서  역사사진전과  유물유적전이  새  행사항목으로  도입되었고,  그럼으

로써  4·3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4·3  50주년이  되던  1998년에는  4월제에  학술행사가  추가되었고,  그  후로도  매년도의  중

요  행사항목으로  유지되었다.  4·3사건  때  파괴되어  결국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에  대한 

현지답사  및  문헌조사  결과가  학술심포지엄을  통해  보고된  후  책자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그  후로  ‘잃어버린  마을’들은  4·3주간  중의  역사순례  대상이  되었고,  영구히  기억하기 

위한  표석도  세워졌다.  학술대회는  매년  주제를  달리하여  열리면서  4·3을  기억하고  그  진

실의  복원을  통해  올바로  청산하는  길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다. 

    3.  4·3  문화운동의  효과와  의의 

4·3  문화운동은  항쟁과  학살의  이중적  시간대를  보고  겪고  살아남은  자들의  심층기억과 

사적  기억들을,  그러나  관제기억의  지배력과  그것에  포섭되어버린  사회적  기억들의  무게에 

눌리어  침묵하는  개인의  회상으로만  존재하던  수동적  기억들을,  1980년대  후반  이래의  민

주화의  시·공간  속에서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며  분출하는  활성적  기억으로  만들어갔다. 

억압되었던  기억에  변성과  변위가  일어나,  자기  확신을  기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부활하고 

변환된  기억들은  다시  기존의  관제기억에  심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사회적  기억의  질서를 

교란시키면서,  4·3에  관한  새로운  공공적  기억의  소재요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4·3의  문화적  재현  운동은  결과적으로  청산  대상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집합기

억의  형성,  새로운  역사적  기억의  구성·창출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었다.  그것은  한  집단/공

동체/사회가  역사적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낡은  이데올로기적  기억으로부터 

신생의  기억=대항기억으로의  옮겨감,  그것도  단순  수평이동이  아니라  극적인  비상과  초월

에  가까운  수직이전을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지의  극적인  사례가  된다.   

그런  초월의  경험은  다시금  4·3의  미래기억을  ‘항쟁’이나  ‘통일’과  같은  대서사

(grand  narrative)적  어법에  가두어두지  않고,  공동체의  비극을  딛고  모두가  같이  일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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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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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상생’의  경지로  올려놓기도  한다.  1998년  4월제의  화두가  ‘해원상생’이었으니,  50

년  전의  비극의  역사가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월제  기획단은  65m  높이의  해

원방사탑을  쌓기로  결정했고,  도민들은  돌  하나씩을  가져다  정성껏  얹었다.  그  해  미술제의 

주제처럼,  “상극의  빗장을  열고  상생의  아름다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화해와  상생’을  당위처럼  강조하는  화법들이  풍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

기에  4·3을  비극의  역사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암암리에  내재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어

두운  기억을  속히  털어버리고  그  정신적  부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에  급급한  청산주의

적  조급함의  기미도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화해와  상생의  조건이  무엇이며  얼마만큼  충족

되었는지도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로  상투적  구호처럼  너무  쉽게  입에  올려지는  모양새

도  나타났다.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공식  사과,  평화공원  조성  등으로  진실회복운

동의  가시적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한  화해의  국면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도  4·3은  正明되지  못했고  그  역사적  성격이  확정되지  못한 

만큼,  미해결의  실천적  과제들이  남겨진  상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Ⅲ.  기억의  터

    1.  4·3  유적과  ‘기억의  터’

4·3은  많은  유적을  갖고  있다.  대부분  방치된  채  무관심과  외면  속에  훼손되거나  파묻혀

져버린  경우가  적지  않은데,  뒤늦게  그런  과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4·3  유적’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조사·발굴  후  보존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역사교육,  평화·인권교육

의  장으로  자리매김되기도  했다.  특히  역사현장들(무장대  근거지였던  오름들,  주민  은신처

와  희생터  등)에  대한  발굴과  탐사기행이  요근래  10여  년  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유

적들이  갖는  현장성(장소성),  역사성,  기념성을  재인식하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2002년도부터  제주4·3사업소의  용역  수주  방식으로  제주4·3연구소  조사팀(김창후  외  6

인)에  의한  본격적  유적조사  사업이  수행되었다.  그  보고서는  [제주시,  북제주군  편]과  [서

귀포시,  남제주군  편]으로  각각  간행되었다(제주도·제주4·3연구소,  2003). 

이들  보고서의  집필  과정에서  적용된  ‘유적'  분류와  조사된  분포  수는  다음과  같다. 

(※  표기된  숫자는  제주시·북제주군  +  서귀포시·남제주군의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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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①  잃어버린  마을(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에  의해  전소된  후  현재까지  미복구  상태인           

중산간  마을;  당시  가호  수  10호  이상):  82+26=108

②  성(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별로  1948년  12월경부터  쌓은  성곽):  44+21=65

③  은신처(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동굴이나  자연적  엄폐물):               

28+7=35 

④  희생터(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해  5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된  장소):  101+52=153  (은         

신처  및  희생터:  9  별도)

⑤  민간인  수용소(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무차별  체포되어  집단  수용되었던  지서,  유치         

장,  창고  건물  등):  9+11=20

⑥  주둔지(군·경·서북청년회  병력이나  무장대가  주둔했던  곳):  50+33=83

⑦  희생자  집단묘지(토벌대에  희생된  주민들이  집단으로  안장되어  있는  곳):  2+4=6

⑧  비석(군·경  전사자,  주민  희생자,  복구유공자  군·민  등에  대한  추모비,  충혼비,  송덕비,   

공적비  등):  25+16=41 

⑨  역사현장(4·3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  45+16=61

⑩  기타(위의  아홉  가지  분류에  속하지  않은  조형물,  건조물  등):  8+10=18

총계  401+196=597개

전체적으로  이  분류  내용은  공간  유적,  장소  유적,  설치물  유적의  세  범주로  대별하여 

재분류될  수  있다.  공간  유적에는  폐허만  남아있다는  의미에서의  유허공간과,  특정  목적을 

위한  인공적  조성공간이  포함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잃어버린  마을이고,  후자에는  집

단묘지가  해당한다.  장소  유적에는  성벽,  은신처,  희생터,  수용소,  주둔지,  역사현장  등의 

유적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설치물  유적은,  형태  및  건조시점의  차이를  염두에  둘  때,  사건 

당시부터  세워진  비석류  기념물과,  근래  들어  세워지기  시작한  위령탑·방사탑  등의  상징조

형물,  두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유적’의  의미는  남겨진  흔적이므로,  사건  이후에  인공적으로  조성되거나  만들어진  집

단묘지,  비석류,  상징조형물  등은  엄밀히  말하면  4·3사건의  유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유적의  의미를  확장시켜  적용한  것으로  보면,  위의  분류  내용을  그대로  수용

할  수  있다.  사건의  이러저러한  내용  자체와  직접  연결되고  있던  장소·공간의  유적(현장유

적)만  아니라,  사건과  연관되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특정  공간과  설치물  등의  유적(조성유

적)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는  그  자체로  기억되거나  기억될  수  있는  유적

이고,  후자는  후대  사람들의  기억을  위한  적극적  행위의  결과로서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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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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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적이  매몰되었거나  방치되고  있고  어떤  유적이  보존되고  있거나  새로이  발굴되었

는지를  확인하고  비교해  보면  집합기억의  방향과  추이를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

든  모든  유적은  4·3의  기억을  담고  있거나  인위적으로  물질화하여,  기억의  산실,  저장고, 

환기처,  증식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을  피에르  노라

(Pierre  Nora)가  제시한  개념인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  sites  of  memory)로  한

데  묶어  잡아볼  수  있겠다.

기억의  터는  당연히  유적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분석  목적을  위

해  4·3  기억의  터를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유형화시켜  본다. 

①  유허공간으로서,  잃어버린  마을들

②  장소유적으로서,  성벽,  은신처,  희생터,  수용소,  주둔지

③  집단적·공공적  애도·추모공간으로서,  희생자  집단묘지  또는  묘원 

④  인공기념물로서,  각종  비석류 

⑤  상징조형물로서,  위령탑,  방사탑,  조각품  등   

기억의  터를  만들고  가꾸고  관리하는  주체는  크게  보면  국가(지방정부  포함)와  시민사회 

두  차원이다.  그동안  4·3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양극화되어  온  것과  무관하지  않게,  4·3  기

억의  터도  공식·비공식  차원에서  저마다의  형태와  양식으로  건조·조성되어  왔다.  그런  기억

의  터들의  유형별  존재양식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와  그  의미구조의  변

천에  대해서도  간단히  논급해보려  한다. 

    2.  기억의  터의  존재양식과  의미구조   

  1)  비석류 

      (1)  관제  충혼비,  추모비,  순직지  표석,  공적비,  기념비  등 

        ①  ‘공적비’와  (순직군경  추모)‘비’  2기:  제주시  일도동.  노상  방치  도괴  파손. 

공적비는  이승만  공덕비로  추정. 

        ②  전사군인  ‘추모비’:  제주시  월평동  도로상.  1948년,  2연대  소속  하사관  전사자 

6명  대상.  ‘열사’로  호칭하여  표기.  관리  부실. 

        ③  ‘평정기념비’:  1949년,  백록담  서쪽  봉우리에  2연대  1대대  제4중대원들과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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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청년들의  힘으로  4백근짜리  비석을  운반하여  세움.  현재는  흔적  없음. 

        ④  ‘한라산개방  평화기념비’:  1955년,  백록담  북쪽  능선에  신선부대가  한라산  개

방  기념으로  자연석으로  축조.  현존.   

        ⑤  (순직  경찰간부  4인)  ‘추모비’:  제주시  화북동.  1949년  건립.  “정의동지” 

“향토치안의  수호신”. 

              경찰간부  순직지  비석  A:  제주시  외도동사무소  뒤편  묘역.  1949년  제주경찰서장 

외  직원들이  축조. 

              경찰간부  순직지  비석  B:  애월읍  구엄리  사무소  앞.  1949년  제주경찰서장  외  직

원들이  축조.  “조국광복의  사도”로  호칭.   

              경찰간부  순직지  비석  C:  제주시  오라동  종합운동장  입구  공터.  1949  제주경찰

서장  외  직원들이  축조.  “건국의  초석,  민족의  수호신”  운운. 

              (경찰간부)  충혼비: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입구(원래는  관덕정  경찰국  청사내). 

전면에  전사경찰간부  명단,  후면에  “숭고한  경찰정신  순국의  일편단심,  빛나는 

조국광복  청사에  영세영(불?)멸”.경찰간부  순직비群:  서귀포시  중문동  충혼묘

지.“조국광복의  대의에  쓰러진  무명의  不死神(?)”

        ⑥  박진경  추모비: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  원비는  1952년  제주도민  및  군경후원회 

명의로  건립비문  마멸로  1985년  재건립.   

        ⑦  (군·경·민)  ‘충혼비’: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  입구.  “일부  불량배가  괴뢰  사

주에  살인,  방화를  자행하던  중  공비가  봉기하니...군경민이  필사적  충심으로  7

년간  헌신적으로  토벌.”“국가민족을  위하여  귀중한  생명을  공헌한  수백  주의 

군경민  영령의  충혼을  위안하며  공훈을  세전키  위하여...”.  1957년,  제주도공비

완멸기념행사위원회  위원장  박○○.   

        ⑧  군인전사자  추모비:  1949년  1월의  의귀전투에서  전사한  군인  4명을  위해  49년말

에  건립.  의귀리에서  남원읍  충혼묘지로  이설.  이  충혼묘지에는  남원읍  일대에서 

희생된  경찰,  군인,  면장  및  직원,  이장,  민보단원,  한청단원  순직기념비도  다수 

있음.

      (2)  민간  축조  충혼비,  추모·추도비,  공적비

        ①  순국기념비:  한경면  한원리  소공원.  무장대  피습  희생  주민  10여  명  위령  목적. 

두모리민들이  1949년에  축조.  4언절구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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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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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김재만(마을  경비용  총기  구입비  희사자)  기념비:  조천읍  신흥리  마을회관  경내. 

1952년,  마을  주민들이  건립.  4언절구식  한문  비문. 

        ③  교장·급사  순직터  비석:  제주시  삼양동  삼양초등학교  교문  좌측.  1953년,  학교후

원회가  건립.   

              마을재건  공적비:  삼양초등학교  교문  좌측.  학교  재건  공로자·희사자  송덕,  건립

연대  미상,  ‘학구민들의  성의로’...  ‘4·3폭동사건’       

              애국학도  추도비:  삼양초등학교  교문  좌측.  무장대에  희생당한  학도대원  6명. 

2002년  총동창회가  재건립. 

        ④  (전사·순직  주민)  충혼비:  애월읍  유수암리.  1958년,  동리  전우들이  축조.  순직 

우익단체원  기념비:  서귀포시  서홍동  북초등학교  교정.  1950년에  국민회  서홍리

분회,  대한부인회  서홍리  분회,  대한청년단  서홍리  단부  공동  건립.  “향토방위

중  폭도대접전신사”  “폭도토벌중  전사야”.  1988년  서홍동  청년회  재건립.  순

직경찰관  합동위령비:  1956년  서홍청년회  건립.  1991년  서홍동  청년회가  개수. 

        ⑤  경찰  연행  후  행불자(강두호)  추모비:  애월읍  하귀리  도로변.  1973년  조카들이  축조. 

        ⑥  (순직  방송인)  추모비:  제주시  연동  KBS  제주방송총국  사옥내,  1993  건립.  “젊

음을  조국에  바쳐  산화한...거룩한  희생을  길이  빛내고자...”  “공비들에게  납치

되어  죽창과  총검에  무참히  찔리는  만행  속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기개 

높은  방송인의  모습으로  순직”

        ⑦  희생자  위령비:  안덕면  동광리  옛마을터.  토벌대에  희생된  친지와  마을  주민들을 

위해  1999년에  동광리  출신자들이  건립.  “서기  1948년  4·3사건의  슬픈  사연을 

통곡의  소리로  새겨놓습니다.  (중략:  마을  내력)...4·3사건이  발생하여  마을에  모

든  가옥은  불타  없어졌고  주민  일부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며  나머지  주민들

은  뿔뿔이  헤어져  삶에  온갖  역경을  겪었다.  4·3사건  전만  해도  진하고  천박했던 

중산간  이곳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빼앗긴  서러움과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의  슬픈  통곡소리를  먼  훗날  후손들의  가슴  속에  원히  간직하고  이  사연

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⑧  육군소령  000  기념비:  서귀포시  강정동.  강정초등학교  신축용  목재  조달  공덕. 

중문지역  주둔  2연대  파견대장. 

              청덕비:  충남중대  제1소대장  최융양  외  대원들이  마을을  지켜준  데  대한  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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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표시.  1949년  5월  수산리  주민. 

        ⑨  충의비:  무장대의  습격에  대항하다  피살된  31명  용흥리  주민  위령비.  1980년에 

한국전쟁  참전  전사자  충혼비와  나란히  세워짐.  “4·3의  거센  광풍  휘몰아치던 

날/  죽창을  치켜들고  신명으로  방패삼아/  놈들의  지른  ㅂ루을  피뿌려  진화하며/ 

내  고장  내가  지켜  후손에게  주리라고/  님들의  귀하신  몸  초개같이  바쳤으니/ 

이  아니  충의이며  애국호향  아니리오/  몸은  비록  진토되어  흔적마저  감췄으니/ 

님들의  거룩한  넋  번영의  상록수  되어/  이  고장  굽어보며  영원토록  푸르리라.”   

              애향용사  순직비:  1949년  1월과  2월  무장대의  습격으로  희생된  성읍리  주민들을 

위령하기  위해  1961년  성읍리  4-H구락부원들이  건립. 

        ⑩  복구기념비:  수산2리  복구  기념으로  1954년에  경찰서장과  면장  및  마을주민  이름

으로. 

        ⑪  동문지:  애월읍  유수암리.  2001.  “우리  마을의  고통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이

에  표석을  세워  옛  고적의  광경을  후세에  상상케  함이로다.”

        ⑫  4·3사건  (희생자)  위령비,  조남수목사·김남원면장(민보단장)  공덕비:  대정읍  상모

리  짐개동산,  1996.

이상의  민간  축조  비석류는,  상모리(1996),  동광리(1999)  위령비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

사  군·경,  또는  무장대의  공격에  희생된  주민을  위한  것이었다.     

  2)  집단적·공공적  애도·추모공간 

    (1)  만벵디  공동장지

        -  한림읍  금악리,  1950년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한림지역  예비

검속자  63명,  1950년에  일부  유족들이  군인들  몰래  시신  수습. 

        -  현재는(언제부터?)  관의  지원으로  묘역이  정비되어  있고,  위령비(‘7·7  희생자영령 

위령비’)도  세워져  있음.    희생자  명단,  건립  경위,  추도시  음각.

        -  “(전략)  반  세기가  넘어서야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을  떳떳이  해원하고  이해와       

관용의  21세기  도민  대화합의  기틀을  다져  평화와  인권이  살아  숨쉬는  상생의  터

으로  삼고자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에  힘입어  삼가  이  빗돌을  세웁니

다.”(2001.9.6,  7·7만벵디유족회  근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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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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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조일손지지

        -  1950년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대정지역  예비검속자  집단묘. 

        -  원래는  1957년에  유족들이  유해발굴인양  허가를  어렵게  얻어내어  149위를  인양하

고  그  중  132위의  공동묘역을  안덕면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약  200평  면적으로 

조성. 

        -  1961년  묘역해체  및  비석파괴  사건  발생. 

    (3)  현의합장묘 

        -  남원면  의귀리.  1949년  군에  의한  피학살  주민  39명(무명  영·유아  13명  포함)       

시신  합장묘.  1983년에  유족들이  묘비  건립.  2003년  유해  발굴  후  새  묘역  조성, 

이장. 

        -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일편단심  조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

하신  이름들이여”(묘비문  중  일부) 

        -  “우리  유족들은  가해자들이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지는  않았지만  용서하렵니다. 

서로  증오하고  미워함을  계속할  때  지난날의  굴절된  역사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

니다.  한을  한으로  풀고  미움을  미움으로  풀어서는  안되리라  생각니다.  한과  미움

을  넘어선  성숙한  자세로  우리  제주가  평화가  가득한  행복한  섬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을  잊지는  맙시다.”(유족회장  주제사)

    (4)  영모원

        -  애월읍  하귀리민들이  마을  출신  항일운동가,  4·3시기  군경민  희생자,  한국전쟁·베

트남전쟁  전몰호국영령들을  한곳에  모셔  추모키로  하고,  2003년에  건립. 

        -  4·3사건  당시  희생자가  많기로  대표적인  두  마을  중  한  마을에서  주민들  스스로 

논의하고  준비하여  개원.     

        -  위국절사  영현비,  호국영령  충의비,  4·3희생자  위령비,  희생자(‘4·3  삭풍에  흩날

린  꽃잎’)  각명비. 

        -  위령비문:  “여기  와  고개  숙이라.  어느  주검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느  혼백

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지난  세월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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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

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

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년이  길

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라.”   

 

  3)  상징조형물 

    (1)  4·3사건  (주민)희생자(93위)  위령탑 

        -  구좌읍  행원리  도로변.  행원리  4·3유족회  명의로  건립.  주민  기부  부지에  주민  성

금으로.  1998년에  마을  단위로는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건립된  것. 

        -  매년  4월  3일에  위령제  봉행.  無碑文의  형상이  함축적임. 

    (2)  해원방사탑

        -  제주시  일도동  신산공원  입구.  1998년  4월  3일,  제50주년  4·3학술·문화사업추진위

원회  주관으로  축조.  폭  4m,  높이  6.5m.

        -  마을  단위로  액운막이용  석축  방사탑을  세웠던  제주도의  전래풍속에  따라...

        -  취지:  “4·3은  모든  제주인의  흉흉한  역사이다.  섬  공동체를  파괴해버린  4·3은  어

떤  일보다도  먼저  이를  극복하려는  염원의  방사탑을  세워야  했다.  이제  4·3  50주

년을  맞는다.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4·3은  침묵의  역사였고  금기의  영역이었

다.  제주도민의  회한의  가슴을  태웠던  4·3은  세계사로서  한반도의  비극이었다.  그

러므로  제주도민들은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의  재발되지  않도록  방사탑을  세

워야  한다.”

        -  매년  방사탑제가  거행됨.

    (3)  모자상 

표선면  토산2리  앞  바닷가  소공원.  18세부터  40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이  한꺼번에  희생당

한  토산리에서  홀로  자식들을  키워내며  마을을  지킨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위로하고  기

리기  위해  주민  개인(김승률)이  2002년에  세운  조형물.  애기구덕을  흔드는  어머니상  조각과 

표석문으로  구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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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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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장소유적들           

수용소와  주둔지는  실물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지도상의  지점으로만  나타나고,  성벽도 

대부분  훼손  또는  소실되어  겨우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관음사  주둔소는  1949년  초까지 

무장대  본거지였고,  1948년  말부터  토벌대와  무장대간  전투  현장이  되었다.  1949년  2월  12

일,  2연대가  방화하여  전소시키고  그  터에  2연대  2대대가  주둔하면서  주변을  요새화했다. 

현재  관음사  경내  5만평의  밀림지대  27군데에  토벌대가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  숙영지,  초

소,  방어돌담  등  유적이  대량으로  남아  있다.  관음사는  1964년에  복원되고  1968년  중창되

었다. 

장소유적  중에서는  희생터가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오래  기억되는  유적이다.  1990년대  초

부터  주민  제보에  의해서나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대표적인  희생터들의  재발견이  이루어졌

다.  몇몇  희생터는  원래  은신처  혹은  수용소였다가  결국  최후의  희생  장소가  되어버린  곳

들이다.  주요  희생터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다랑쉬굴

    ②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

          “이곳은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곳이었으나  1950년  7월  7일  예비검속에  연루

된  132명의  무고한  양민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역사의  터입니다.  1995. 

9.  17.  대정  나라사랑청년회” 

    ③  너분숭이  애기무덤  군락

          북촌리  일주도로변,  사건  당시부터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오래  방치된  무덤군.  현재

는  그  옆에  소규모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음. 

    ④  큰넓궤  유적 

          은신처  겸  희생터.  발굴된  후로  답사  대상이  되고  있음. 

    ⑤  송령이골

          남원면  의귀리.  1949년  1월,  토벌대에  의해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을  구출

하고자  기습했다  교전  중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  방치  상태이고, 

2004년  5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벌초하고  표지판  세움.  “국방경  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우리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

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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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⑥  주정공장  터

          1948년  겨울서부터  주정공장  위에  있던  고구마  저장  창고는  4·3에  연루된  자  들을 

가두는  수용소로  바뀌었다.  1949년  봄부터  토벌대가  선무공작을  실시하자,  생존을 

위해  산속에  숨어지내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해안지대로  내려왔고,  군·경은  이들을 

빠짐없이  이곳  주정공장에  수용하였다.  이들은  주정공장  안에  있던  취조실에서  심

한  고문을  받았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이곳  주정공장 

터는  생과  사가  갈려지는  마지막  현징이었다....6·25가  터지자  형무소에  수감된  이

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집단적으로  학살되어버렸다. 

          당시  사람들을  가두었던  (주정공장  터)  절벽  위의  10여  개  고구마  창고는  지금은 

현대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창고  밑에  있던  주정공장  터

는  아직도  공터로  남아서,  창고  속에  갇혀  굶주리며  공포에  떨던  이들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박찬식,  2002:  42)

    ⑦  화북  집단학살터

          1948년  12월  제주경찰서·농업학교  등에  잡혀온  민간인  870여  명을  대상으로  치러

진  군법회의(제1회)에서  사형에  처해진  38명이  총살된  현장.  정확한  처형  장소에 

대해서는  유족들의  증언  내용이  엇갈리고  있지만,  1951년에  시신을  찾아  안장했던 

이,  당시  처형  현장에서  총살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이의  2000년도  증언에  따르면 

화북동  일주도로변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도  현장에는  매장된  시신이  상당수  있

는  것으로  주민들은  증언한다.

    ⑧  조천지서  앞밭  집단학살터

          1949년  2월  3일,  조천면  관내의  ‘도피자  가족’으로  지목되어  끌려나온  70여명의 

중산간  마을  출신  노약자·부녀자·어린이들을  민보단원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이  학

살한  곳. 

    ⑨ 북촌리  학살터

          1949년  1월  17일,  무장대의  기습으로  대원  2명이  전사한  데  대한  보복으로  2연대 

3대대(서청  출신으로  구성된  특별대대)가  북촌리  주민  700-800명  가량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합시킨  후  북촌초등학교  동쪽과  서쪽  인근  밭으로  수십명씩  끌고가 

총살.  250-300명이  희생됨.  탯질밭(옴팡밭  주변)에는  미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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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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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흙만  덮은  애기  무덤이  10여  개  남아  있음. 

    ⑩ 선흘주민  피신처/학살터

          1948년  11월  25일부터  나흘  동안  선흘리  주민(대부분  청년층)들의  피신처인  도틀굴

(일명  반못굴),  목시몰굴,  엉물  등지를  군인들이  수색하여  120여  명을  학살. 

    ⑪ 표선백사장

          “현재  표선  백사장은  대규모의  민속촌이  들어서고  해수욕장이  개설되어  모든  사람

의  눈과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나아가고  있지마는  우리는  그곳 

백사장을  먼곳에서만  보아도  몸서리쳐지고  우리  부모형제가  참혹하게  갔던  곳으로 

천륜의  아픔을  뼈저리게  삼키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는  것...”(토산리  4·3사

건  실상기  중,  『제6회  4·3유적지  순례』,  제주4·3연구소,  1992)

  5)  유허공간으로서  잃어버린  마을들 

‘잃어버린  마을’로  불리우는  중산간지역의  폐촌들이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생존  원주

민들의  기억  속에만  그  잔영이  존재한다.  그러나  「4·3은  말한다」  연재물에  자극받아  기

획된  1998년의  조사사업  및  그  결과를  발표하는  학술회의를  계기로  ‘잃어버린  마을’들의 

발굴과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특별법  시행  이후인  2001년부터  매년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의  주관으로  지정된  ‘잃어버린  마을’에  설촌  내력과  4·3  때

의  구체적인  폐허화  경위를  적고  기억  대상으로  삼을  것을  주문하는  내용의  표석들이  세워

지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표석설치  사업은....4·3  영령들을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실시되고  있다.”(한라일보, 

2002.3.28).  표석  제막식에는  도지사,  군수  등  기관장,  단체장,  주민  등이  참석하는데,  도지

사는  “잃어버린  마을을  비롯한  4·3  피해현장과  유적지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를  거쳐  보전

과  표시를  남겨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가시리  새가름  표석  제막식에서 

우근민  지사).   

표석문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양식  아래  약간의  변이를  보이곤  한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서러운  역사가,  비극적인  역사가,  아픈  역

사가)  재발하지(재연되지)  않(는  영원한  평화의  섬이)기를(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기

원하며,  염원하며)  (상생의  염원을  모아:  한남리  빌레가름,  2002,  가시리  새가름,  2002)  이  표석

을  세운다.”(오라리:  2001,  노형동  드르구릉:  2001,  와흘리  수기동:  2001,  세화리  다랑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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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2001,  봉성리  자리왓:  2002,  명월리  빌레못:  2002,  해안동  리생이:  2002,  금악리  웃동네:  2003, 

저지리  하늬골:  2003,  상천리  오리튼물:  2004,  남원리  버너리굴:  2003,  동광리  무동이왓:  2001)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  어찌  슬프

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4·3사건으로  하여 

이  고장을  지키다  가신  님들의  명복을  두손  모아  빌면서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

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이  표석을  세운다.”(화북  곤을동:  2003)

“이곳에  밝은  햇살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서귀포시  영남동:  2001)

“이곳에도  정다운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았음을  기억하라.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보라.”(해

안동  리생이:  2002)  (※“기억하라  여기에도  사람이  살았었음을/  지금은  폐허가  되어  존재조차 

잊혀진  한의  역사를  되새겨  보라”:  김경훈  시,  「잃어버린  마을,  리생이」)

2001년  4월에  <제주4·3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도내  4·3  유적지  다

섯  군데에  대한  순례를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실시했다.  귀로에서  참가

자  260명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음과  같은  답변들이  나왔다. 

“마을은  없어졌지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솔직히  비석  하나만  덩그라니  놓여  있고  의미  있는  순례는  아니었다.  좀더  잘  관리되었음 

좋겠고  다시는  4·3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보고  설명을  듣는  것  좋았다.  그러나  마을  흔적이  거의  없어  아쉬웠다.”

“4·3때  불타고  죽었다고  들었으나  영남마을에는  집터가  생생히  남아  잘  알  수  있었다.”

“잃어버린  마을에  표석을  세운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는지?  표석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마을을  보러  온  것인지,  표석을  보러  온  것인지,  헷갈린  측면이  있었습니다.  화

재로  소실,  전소  등의  표현만  있지,  누가  어떻게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없었

다.”

“너무  실속  없는  순례였다.  물론  이번  순례의  취지는  잃어버린  마을에  대해  알기  위한  것

었지만  막상  가도  비석만  덩그러니  있고,  설명도  너무  짧고  성의가  없었다.”

“잃어버린  마을은  별로였다.  4·3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을  직접  답사를  해보니  희생자들에게  숙연해진다.”

“도저히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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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흔적도  없는  마을,  가슴  아프다.”

“비석보고  설명  듣고  그래서,  느낌이나  소감은  없다.”

“솔직히  잃어버린  마을,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실망했다.  우리  세대는  보지  않은  이상  직접 

느끼기가  어려운데,  기념비만  있는  곳에  무엇을  느끼라는  것인지...”

“앞으로  잃어버린  마을에  표석을  세운다면  지금같은  대리석은  좀  (제주정서에  맞을까요)  그

렇지  않은가요?  역사성과  기록성을  위한다면  소박한  현무암으로  마을  주변  환경에  거슬리지  않

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표석을  세울  것이라면  차라리  원인을  규명할  때까지  표석세우기를  미루는  것이  어

떨지요?”

“잃어버린  마을에  시각적  효과가  좀  더  있었으면....”

  3.  기억의  터에  비추어  본  4·3  기억문화의  변천 

4·3에  대한  집합기억,  사회적  기억의  내용과  실황에  대해서는  권귀숙의  일련의  연구들에 

잘  집약  정리되어  있다(권귀숙,  2006).  그에  따르면,  4·3의  기억은  입장  차이에  따라  분기

하여,  거의  양극화의  양상을  보여  왔다. 

①  국가(교과서,  관찬서)/군경(당사자,  단체)/우익단체원  생존자/무장대에  피해를  보거나 

피살된  이들(군경·민간인)  유족의  입장---공산폭동으로  이념적  규정,  국가폭력은  정당한  공

권력  행사

②  피학살자  유족과  친지,  군경  가해에  의한  부상자,  다수  지식인,  사회운동가 

③  직접  피해와  무관한  일반  주민 

그동안의  4·3  기억의  추이는  ①의  입장에서의  기억(관제기억)이  공식  기억으로              군

림하다가  서서히  ②의  입장에서의  기억에  의해  압도되고  대체되어  온  형국이었다.  ③은  내

심이야  어떻든  ①에  동조하다  ②에  공감하는  쪽으로  선회한  듯하다.  여기서  보더라도  역사

적  참화나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집단적·사회적  기억은  의식적인  선택과  배제  행위의  결과

물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그  존재양식을  살펴보았던  바  여러  종류의  ‘기억의  터’들은  그  형상과  銘文을 

통해  무엇인가의  의미들을  담아  내뿜고  있다.  시간적  추이를  따라  그것들을  음미해보면, 

4·3의  기억의  축이  어떻게  변이해  왔는지를  대략  추리해볼  수  있다.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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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반공주의·국가주의  일변도의  기억

      -  1940년대말~1950년대의  각종  비석류  기념물들

      -  관민  상동/공모 

      -  공격성과  증오심의  상징적  표지 

      -‘공산폭동’  전일적  기억.  주입된  기억의  산실들

      -  피학살  기억의  압살/매장.  가해-피해  관계의  전도된  기억

  2)  억압된  통한/원한의  기억

      -  1950년대  이후  조성된  집단묘지들과  1973년의  행불자  추모비

      -  집단묘지의  존속은  가족주의로  부지된  침묵  조건부의  타협의  산물 

      -  다랑쉬굴  봉인의  비극(1992)---통한의  기억의  분출  계기를  관이  봉쇄,  질식시킴

      -  민간사회  내부의  갈등도  유발.  폭압  반공주의의  최후의  몸부림

   

  3)  해원·상화의  초월적/공동체주의적  기억   

      -  1998년  이후.  해원방사탑(1998),  행원리  위령탑(1998),  잃어버린  마을  표석(2001  이

후),  영모원(2003)  등

      -“기억하되  이제는  화해를...”

      -  기억의  역사화와  동시에  미래화도  추구 

      -  참화기억의  승화

      -  그러나  작위적  기운도  다분함

      -  상생/상화의  의미  모호---죽은  자와  산자  사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그와  더불어  ‘기억의  터’의  여러  존재양식은  기념문화의  전반적  구도가  어떤  방향으로 

이행해  왔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①  주체:    국가/관변    →    주민                             

    ②  대상:    죽은  자  →    [죽은  자  +  산자]              ex)  ‘잃어버린  마을’ 

기명-소수            무명-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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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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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터의  위상과  기능:        정적(공간)          →      동적(의례·행사)

                                                기억의  유폐                  기억의  활성화

  4.  남는  과제들 

  (1)  유적  발굴  계속과  총조사  실행:  희생터,  주둔지,  은신처  등  망라 

  (2)  분산성/산포/고유  의미로부터  집중성/통합/부여된  의미로의  이행 

  (3)  현장답사·기행을  통한  추체험적  공동기억의  심화 

  (4)  평화공원  공간을  통한  상생적  기억의  확장   

  (5)  억압과  배제로부터  해방과  포용의  담론으로 

        :  모두가  입  열어  말하게  하라 

          -  4·3의  진실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  전자라고  본다면  부분적  진실에서  총체적  진실로,  후자라고  본다면  일면적  진실

에서  전면적  진실의  추구로  나아가야  할  것. 

 

   

<  인용된  문헌  >

권귀숙.  2006.  『기억의  정치:  대량학살의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진실』.  문학과지성사.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1998.  󰡔4·3은  말한다󰡕  1~5권.  전예원.     

제주4·3  제50주년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편.  1998.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학민사. 

제주도·제주4·3연구소.  2003.  󰡔제주4·3유적  Ⅰ―제주시,  북제주군󰡕.  도서출판  각.

제주도·제주4·3연구소.  2003.  󰡔제주4·3유적  Ⅰ―서귀포시,  남제주군󰡕.  도서출판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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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코스:  관덕정  -  주정공장  -  곤을동  -  북부예비검속위령비(공항  유해발굴)  -  관음사

1.  관덕정

삼도리는  예로부터  관덕정을  중심으로  관청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제주읍사무소는  물

론  법원이  있었고,  제주경찰서와  9연대본부  등  토벌대의  지휘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4·3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1947년  3·1절  집회의  북국민학교,  이어진  발포사건이  일어난 

관덕정  앞  마당이  있는  곳이다.

1947년  총파업  이후  제주경찰서에는  잡혀오는  구금자로  넘쳐났고  혹독한  고문취조는  지

금도  회자되고  있다.  특히  4·3  발발  이후  대치국면이  악화되면서  1948년  10월  이후  제주경

찰서에  잡혀온  도민들은  혹독한  고문  이후  처형장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덕정  앞  광장은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빠져나오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제주시  중심가에  제주도

가  걸어온  숱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서  있는  관덕정도  있다.  이  건물은  1448년  세종

30년  목사  신숙청이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서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또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  쓰여졌다. 

[

]

4·3유적지  답사  (제주시)

김창후(제주4·3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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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후  | 

173

한편  해방  직후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각  지역별로  조직되어  왕성한  활동을  할  즈음인 

1945년  9월  ‘건준청년동맹’이  결성되어  그  간판을  관덕정  기둥에  걸었었다.  그때는  관덕

정  정자를  사방으로  막고  사무실로  썼는데,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건준청년동맹’은  인민

위원회  사무실로  옮겼다고  한다.  또  조직의  명칭도  1945년  12월경에는  ‘제주도청년동맹’

으로  바뀌었다.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이  있던  1947년  3월  1일,  이날  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3·1절  기념

식을  마친  참가자들이  동서로  나뉘어  시위를  전개했고,  서쪽  행렬이  관덕정  앞을  빠져나갈 

즈음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이며  쓰러졌지만  경찰이  아무런  조치없이  그냥  들

어가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항의를  하려는데  갑자기  망루에서  경비중이던  경찰의  발포로 

주민들이  쓰러졌다.  이  사건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번져  사상  초유의  민관총파업으로  이어

졌고  끝내  4·3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또  관덕정  앞에선  1949년  6월  6일  무장대사령관 

이덕구가  교전중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전시해  주민들에게  관람토록  했었다. 

지금  관덕정  주변엔  당시의  건물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제주경찰서가  있던  곳은  목관아

지  복원으로  흔적이  없고,  주변의  법원  등  관공서  건물도  없어졌다.  관덕정도  문화재  지정 

이후  수차에  걸쳐  개보수를  했다.

2.  주정공장(동척회사)  옛터

1934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회사)  제주주정공장은  해방전후 

제주도의  주요한  산업시설이었다.  공업발달  여건이  충분하지  못한  제주도의  여건상  도내에

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산업만이  가능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생산

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주정공장이  세워졌던  것이다.  제주주정공장은  일제시대에는  일

본인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해방후  되돌려졌다.

이  곳은  당시로선  비교적  큰  가공공장이었고,  그에  따른  창고도  역시  큰  규모였다.  이 

주정공장  창고를  4·3  당시  수용소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1949년  봄이  되면서  한  겨울을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피난입산자  중  살아남은  주민들이  대거  귀순하면서,  경찰지서나  군부

대로부터  인계되는  귀순자들로  이  곳  주정공장  창고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귀순자를  한  곳에  수용했고  부상자와  임산부도  같이  수용했다.  혹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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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고문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주정공장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기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곳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단  경찰서나  군부대에서  취조를 

받고  수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주정공장내에도  경찰  특별수사대가  상주하면서  귀순

자들을  취조하기도  했다.  청년층은  대부분  재판에  회부되어  육지형무소로  이송됐고  이들 

중  대다수는  6·25  직후  집단희생  당한다.

당시의  주정공장은  산비탈  아래,  현재  여객선터미널  입구  맞은편  SK주유소  일대에  있었

다.  수용소로  활용했던  창고는  산비탈  위,  지금의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이다.  2001년부

터  매해  4월이면  주정공장이  있었던  터에서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에서  4·3  당시 

행방불명된  원혼들을  위무하는  ‘제주4·3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봉행하고  있다.  지금은  당

시의  건물이  모두  헐리고,  수용소  터에는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흔적은  찾

아볼  수  없다.

3.  화북동  잃어버린  마을  -  곤을동

약  70여  호로  이루어졌던  곤을동은  1949년  1월  4일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복구되

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다. 

화북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천  안쪽에  있던 

안곤을  22호,  하천과  하천  사이에  가운데곤을  17호  그리고  동곤을  28호  등으로  이루어졌던 

마을이다.  동곤을과  가운데곤을  주민들은  ‘덕수물’,  안곤을  주민들은  ‘안드렁물’이란 

용천수를  식수로  사용했었다.  작지만  마을  공회당도  있었고  안곤을과  가운데  곤을엔  말방

앗간도  있는  전형적인  자연마을이었다.  제주  해안마을의  주요  생활형태인  반농반어로  생계

를  꾸리던  이  곳  주민들은  1949년  1월  4일,  불시에  들이닥친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전소되

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날  오후  서너시쯤  들이닥친  군인들은  안곤

을과  가운데곤을의  집집마다  불붙이며  주민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젊은 

사람들  10여명을  별도봉  바닷가로  끌고가  총살했다.  이날  김봉두(22세),  이완성(33세)  등 

젊은  사람들이  주로  희생됐지만  김관근(48세),  김축색,  문태오(50세),  예촌양서방조카(45세) 

등  나이  든  사람들도  희생됐다.  또  살아남은  젊은  남자  대부분을  화북지서로  끌고가  하룻

밤을  지새운  뒤,  다음날  화북리  연대밑  속칭  ‘모살불’이란  해안에서  총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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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후  | 

175

지금은  폐허가  된  터에  양옥집  한  채만  덩그라니  있다.  또  2003년  4월에  제주도에서 

‘잃어버린마을’  표석을  세워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다.  안곤을  터엔  방앗돌이  있고  집터

가  비교적  뚜렷이  남아있다.  제주시  중심과  인접해  있고,  해안마을이면서  초토화를  겪고  결

국은  잃어버린  마을이  된  상징적인  마을이다.  곤을동은  비교적  뚜렷한  흔적이  남아있고,  곤

을동  출신  생존자들의  의지도  강하기  때문에,  보존  혹은  복원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

할  필요가  있다.

<표석전문>

잃어버린  마을  -  곤을동  -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진  이곳  제주시  화북동  곤을마을(坤乙洞)

은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  곤을,  안곤을로  나뉘어진다.  곤을마을은  고려  충열

왕  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현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  지  7백년이  넘는  매우  유서  깊

은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사를  주로  했으며,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도  겸하면서  43호가  소박하고  평화롭

게  살았다.  그러나  4·3사건의  와중인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

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  어찌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고  24명이  희생되었다.

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  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 

별도봉을  휘감아  도는  바닷바람  소리가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4·3사건으로  하여  이  고장을  지키다  가신  님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면서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3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4.  제주국제  공항

구  제주비행장과  그  인근(현재  제주국제공항  내에  포함됨)은  수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이 

이루어진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행해진  학살은  자료가  없어  전체적인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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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  중  대표적인  두  사건은  1949년  10월  2일에  있었던  소위  제2차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의  총살과,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제주시와  서귀포지역  예비검속자

들에  대한  집단학살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진상  파악이  매우  어려우나,  한국전쟁  직후  제

주경찰서와  주정공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수장학살자  제외)을  트럭에  싣고  이  곳에  와서  총

살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는  트럭  10대에  실린  약  500명  정도였다.

  제주  4·3연구소에서는  1,2단계  공항  내  유해  발굴을  수행하여  382위의  유해를  발굴하였

고,  제주  4·3  유족회에서는  발굴된  유해를  평화공원  봉안관에  안치했다. 

5.  관음사  군  주둔지  옛터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2연대  2대대(대대

장  이석봉  대위)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다.  2연대는  제주도의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토벌

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곳  관음사  주둔지  외에도  서귀포  수악교  인근에  1대대를  교래리와 

산굼부리  사이에  3대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  관음사  일대는  4·3발발  당시

부터  무장대의  주요  길목이었고  한  때  무장대의  본거지가  되었던  어승생  진지와  가까운  작

전상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한  것으로  보인다.

관음사  경내  5만여  평의  밀림지대에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당시의  흔적을  간직

한  채  남아있다.  규모가  큰  중대급  숙영지는  가로  세로  25m  규모이고  그  보다  작은  소대

급  숙영지도  있고  3~4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도  여러군데  남아있다.  또  관음사  뒷산인 

아미봉(해발  650m)  정상에도  숙영지와  초소가  비교적  훼손이  안된  상태로  남아있어,  4·3유

적지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음사  입구의  초소는  관음사  기반정비를  하면서  일부 

훼손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관음사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당시  초소를  복원한  것이  보인다.  또  관음사  대웅전 

뒤편  숲속에  일제시대  닦은  작전도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당시  숙

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또  그  길을  따라  아미봉  정상에  이르면  작은  숙영지와  초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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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심  | 

177

1949년  봄의  대토벌이  끝나고  6월  인민유격대장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제주4·3은  막을 

내렸다.  이제  항쟁의  열기는  제주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단독선거를  분쇄한  저항정신은  사

라졌다.  제주는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죽음과  예비검속으로  이어지는  학살의  공

포가  지배하는  상처투성이  섬에  불과했다.  제주도민이  조그마한  반발심도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학살의  여파는  컸다.  학살은  항쟁의  의미를  넘어설  정도로  제주도민에게  각인되어

갔다.   

반공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학살의  경험은  제주도민의  피해의식을  가중시켜  레드콤플렉

스를  내면화시켰다.  레드콤플렉스는  제주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정

도는  심한  편이다.  제주는  섬이라는  격리성과  변방성,  척박한  토지와  자연환경,  그리고  외

부로부터  수많은  침탈과  착취를  당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이루

어왔다.  그런데  4·3은  기존의  제주사회와  권력관계를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지역공동체가  파괴되면서  도민의식이  크게  변화,  왜곡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4·3의  피해  경험은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4·3진상규명운동과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제주4·3특별법에도  투영되었다.  즉  4·3은  사건  자체가  종결됨에  따

라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제주도민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

]

제주4·3과  레드콤플렉스

양정심(성균관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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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소개령과  지역공동체  파괴 

제주  지역공동체가  파괴되고  제주도민의  피해의식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4·3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초토화  진압작전과  중산간  마을  소개가  이루어지면서 

전개된  학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4·3이  발발한  직후  제주도민은  군경토벌대의  진압  을 

두려워하면서도  5·10단독선거를  저지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격대의  세력은  강성하였고  중산간  부락은  유격대의  세력권에  놓여있었다.  그러

나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시작된  군경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제주도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도민  의식을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특히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혀  해

변  마을로  소개당한  중산간  지역  주민들의  피해의식은  더욱  컸다.             

소개령은  1948년  10월  17일에  국방경비대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발표한  포고문에  따른 

것이었다.  포고문에서  토벌  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은 

산악지역  등  어떤  특정한  지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  전부를 

포함했다.  토벌대에  의한  무분별한  학살은  그  이전에도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이  포고문이 

발표된  이후  11월부터  중순부터  대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다.  초

토화  작전은  중산간에  위치한  주민들이  게릴라들에게  도움과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

정  아래  채택되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해안지대로  소개시킨  뒤  게릴라들이  은거

할  수  없도록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전법이었다.  이를  어겨  중산간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하였다.1)  항쟁  진압  과정에서의  엄청난 

피해는  바로  이  초토화  작전  시기에  일어났다.2) 

초토화  작전은  소개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개시킨다는  것은  주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제거함을  의미했다.  집도  식량도  살던  고향  마을도  모두  불태워짐으로써  의식주의 

1)  제민일보4·3취재반,『4·3은  말한다』4,  전예원,  1997,  292-295쪽.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되고  10월  17일  송요찬  경비사령관은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중산간  부락  주민들에게는  해안마
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일부  마을은  소개명령이  채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
에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2)  주한미군사령부  G-2는  “1948년  한  해  동안  14,000-15,000여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

고,  이들  가운데  최소한  80%가  보안군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주택의  3분의  1이  파괴되었고,  전체  도
민의  4분의  1이  마을이  소개되어  해안마을로  이주하였다”고  보고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1  Apil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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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심  | 

179

기반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나아가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소개와  토벌과정에서 

마을의  물리적  기반도  구성원도  구성원간의  협력관계도  사라져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

변의  해안  마을들로  제각각  흩어졌다.  아무런  생계  대책  없이  집과  밭을  빼앗긴  그들은  이

제  남의  집  곳간이나  마구간  같은  곳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었다.3)   

해변  마을에서의  소개  생활은  불안과  비참함의  연속이었다.  소개가  이루어진  시기는  가

을  수확이  거의  마무리된  시기였지만,  주민들은  소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겼

기  때문에  곡식들을  그냥  곳간에  두거나  땅에  묻어둔  채로  내려왔다.  이렇게  두고  온  곡식

은  유격대의  보급물자를  막는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소개된  후에는  통행

금지령에  묶여  농사지으러  밭에  나가는  일조차  금지되었다.  통행금지는  저녁  여덟시였다. 

그  이후에  나다니다가  잡혀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산간  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폭도’  취

급을  받은  것이었다.  소개지에서도  토벌대에  의해  ‘폭도’로  체포당하거나  혹은  소개지인 

마을이  유격대에  의해  습격당했을  때에도  폭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학살되었다.   

소개령은  또한  중산간과  해변마을을  갈라놓아  도민들끼리  싸우게  하는  대결구도를  조장

함으로써  제주의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는  예로부터  중산간  주민은  해변마을  사람들을  ‘알뜨르  보재기(해촌  사람들

을  멸시하여  쓰는  말)’라고  하면서  무시해왔다.  일제의  침략  이전의  제주도  경제상태를  보

면  조·보리  등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해산물  채취는  부업으로  하는  형태의  자급자족  구조

였다.  이런  경제구조  속에서는  중산간  마을이  해변  마을보다  물적  토대가  우위·에  있었다. 

중산간의  토지가  해변토지에  비해  비옥하여  3배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중산간 

마을은  해안  마을에  비해  부촌으로  인정되었고  신분적으로도  양반  대접을  받았다.4)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  침략  이후  해촌  중심의  친일  상업,  공출  수집  등  친일구조가  부를  축적함으

3)  백조일손지지  유족인  조정배는  소개지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개지는  지서

의  명에  의하여  제한되었다.  가재를  다  버리고  단순  봇짐으로  고산으로  내려갔고  두모와  용수로  소수 
가구가  연고지를  찾아간  것이다.  사전  대책  없는  인구의  대이동으로  임시수용소가  마련되었다.  연고가 
있는  사람은  그나마  외양간과  헛간  등을  얻어  침식을  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니  기약  없는  생을 
연장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언제  불러가  생죽음  할지  모를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의  한  겨울을  땅바닥에서  멍석을  펴고  살았으니  그  고통과  생활상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리
라.  봄이  되면서  가장  귀한  것이  땔감,  성담을  몰래  넘어가서  古松의  뿌리를  캐거나  고사된  초목을  수
거해서  해결했는데  먹고  연명하는  것이  삶의  전  과정이었다”(조정배,『낙천리  향토지』,  디딤돌, 
1999,  63쪽).

4)  유철인,「마을」『제주도지』2,  1992,  1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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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로써  해변마을로  경제적  중심이  이동하였다.  그래도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해변마을에  대

한  무시는  여전했다.  해녀들의  복장을  이유로  해변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떼거리로  몰려  온  ‘웃뜨르  것들(중산간  주민들을  멸

시하여  쓰는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애써  잡은  전복,  소라,  생선  따위를  가지고  중

산간으로  팔러가면  자기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들조차  하대를  예사로  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5)  이러한  경제적  물적  토대의  변화나  부의  이전  등이  전통적으로  중산간에  대한 

해변  마을  사람들의  극복  노력과  맞물려서  갈등을  빚게  된  점도    진압  과정에서  적나라하

게  드러났다.  더욱이  중산간  지역  사람들과  접촉하면  무조건  폭도로  취급받는  상황  속에서 

해안  마을  사람들은  중산간에서  소개온  사람들을  경계하고  냉대하였다.  군경토벌대는  이러

한  내적  갈등을  진압에  이용하였다.  중산간  마을을  토벌할  때  해변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

와  같이  올라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도망  못  간  사람들은  잡혀서  죽을  땐  창으로  죽고.  군인들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  민

간인을  시켜서  죽인  겁니다.  다른  지역  사람도  아닌  영평  상동  사람이  와서  그렇게  합니다.  다 

아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요.  이건  우리가  같은  핏줄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

니까?6) 

특히  민보단을  동원한  토벌  작전은  양  쪽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민보단원이었던  해변 

마을의  한  주민은  그  실상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  때  토벌대가  민보단을  동원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마지못해  따라다닌  것이긴  하지만 

토벌대가  중산간을  휩쓸며  학살하던  현장에  해변  마을  민보단이  있었으니  제주  사람끼리  감정

이  악화된  것입니다.  중산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총이라도  들고  대항하던  무장대가  아니라  멀

리  도망치지도  못한  채  마을  부근에  숨어살던  노약자들이었습니다.7)     

남원면  지역은  이  같은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48년  11월  28일  유격대는  그동안

의  중산간  토벌전에  대한  보복으로  토벌대  주둔지인  남원리·위미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지

목살해가  아니라  무차별하게  벌어진  학살과  방화는  해변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토벌

5)  제주4·3연구소  편,「노형동의  잃어버린  마을들」『4·3장정』4,  백산서당,  1991,  21쪽.

6)  제주4·3연구소  편,『이제사  말햄수다』2,  한울,  1989,  223쪽

7)  양상석  증언(제민일보4·3취재반,『4·3은  말한다』5,  전예원,  1998,  131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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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중산간  마을에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찾아내  학살하는  등  보복의  악순환이  잇따라  벌

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남원·위미리  주민들은  대부분  토벌대의  적극적인  협력자

가  되었다.8) 

민보단을  동원한  군경토벌작전은  주민끼리의  대결  양상을  낳았다.  보복의  감정으로  토벌

대에  앞장서는  결과를  낳아  마을  공동체를  약화시켰던  것이다.9)  제주도민끼리  싸우는  형극

이  조성된  셈이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가운데에서도  해변마을  몇  몇  부락은 

향토방위에  공로가  많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10) 

민보단을  동원한  토벌작전에서  더욱  악랄한  행위는  학살  방법이었다.  토벌대는  민보단원으

로  하여금  이웃의  사람들을  직접  죽이라고  종용했다.  군경토벌대는  민보단원에게  죽창을  주

면서  자신들은  뒤에서  총  들고  감시했다.  찌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되는  상황에서  민보단

원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웃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제사음식을  나눠먹고  품앗이를  하면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4·3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  고문을  받았어요.  그녀의  오빠가  육지형무소로  갔다는  게  빌미였지요.  경찰들은  하귀  국

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

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

들  한  번  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모두  한동안  몹시  앓았습니다.11)

8)  미군  보고서에도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12월  14일  제주도  경비대는  모슬포,  서귀포,  남원

리,  한라산  부근의  게릴라를  말살하기  위해  공동  노력하는  4군데의  합동작전에서  민간인  3천  명의  지
원을  받았다.  제주도  민간인들은  아마도  자기  마을에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게릴라  행위에  복수하기 
위해,  산악에서  게릴라들을  빗질하듯  쓸어버리는  당국의  작전에  지원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Hq. 
USAFIK,  G-2.  P.  R,  1948.  12.  16).

9)  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5,  130-134쪽.

10)  “이번  본도  경찰국  비상경비사령부에서는  남제주군  관내  표선면  하천리를  비롯하여  안덕면  사계리 

신효리  및  북제주군  애월면  금성리  한림면  용수리  등  6개리  리민을  표창하게  되었는데  이는  본도 
4·3사건  이래  리민이  일치단결함으로써  부락경비에  헌신  노력하였으며  지금까지  공비의  피습  및  통
비(通匪)  등으로  인한  불상사가  전무(全無)할  뿐만  아니라  특히  민경(民警)  융화와  제반  경찰행정  운
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재산잔비  소탕작전  및  향토방위에  다대한  공로가  있어  다른  부락에  모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30일  사령관  윤석렬씨로부터  표창장  수여가  있을  것이라  한다”(『제주신
보』,  1952.  4.  26).

11)  김계순<애월읍  하귀리>  증언(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6,  미간행원고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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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항쟁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흔히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이후  집단,  지역적으로  확산되었

다.  4·3초기에  산에  올라가  활동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전향하여  살기  위해서  자기  동료들

을  팔거나,  한국전쟁  때  자진  지원이나  강제  징집으로  참전하여  ‘귀신잡는  해병대’로  이

름을  드날리는  해병대  3기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모두  그러한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다.12)   

4·3항쟁의  발발  직후에는  토벌대가  무차별적으로  인명을  살상했다면  유격대는  선별적으

로  살상했다.  그러나  대토벌이  시작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복수극이  이어졌다.  1949년 

가을부터는  토벌대가  마을  별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일명  ‘자경대’  혹은  ‘민보단’을  조

직하여  축성을  보초서거나  마을  경비를  담당하게  하면서  유격대가  마을에  접근하기도  어려

워졌다.  토벌대의  총살극에  기가  꺾인  주민들은  명령에  따라  철저히  경비를  섰기  때문에, 

밤에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의복  등을  내놓을  것을  강요하던  유격대와의  충돌은  당연한  수

순이었다.13)  특히  경찰  산하에  특공대가  조직되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자경대가 

조직됨으로써  주민과  유격대의  연계가  끊겼다면  특공대의  존재는  그  이상이었다.  단순한 

단절을  넘어  적대관계로  변한  것이다.  특공대는  살기  위해  나섰던  것이지만,  산악지역에  대

한  토벌전에  주민들이  끼여  있다는  사실은  유격대로  하여금  무차별  보복  습격을  감행하게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14)     

소개와  토벌  과정에서  마을은  물리적으로  파괴되었고,  마을  사람들의  사망으로  구성원은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인간관계의  파괴가  병행되었다.  서로에  대한  불

신과  죄책감은  공동체의  정서적  토대를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토벌대의  작전  과정에서  비

롯된  학살의  경험으로  인해  제주  지역공동체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편  제주도민은  학살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생존을  위한  ‘반공국민으로  거듭나기’

 

군경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일반  제주도민은  생존을  위해  빨갱이  폭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순수한  국민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민보단,  향토자위대  입대,  해병

12)  김종민,  앞의  글,  374-376쪽.

13)  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5,  82-83쪽.

14)  제민일보4·3취재반,  같은  책,  289-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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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입대,  반공대회  등에  동원되면서  반공국민으로  거듭나야했다.     

제주도  민보단이  창설된  것은  1948년  8월  11일이다.  이때  도  단위  민보단  조직이  창설

되고  이어  각  지역별로  민보단을  조직하였다.  민보단이  본격적으로  조직된  것은  소개령  직

후부터이다.  민보단은  ‘향토방위는  지역주민  스스로  맡는다’는  미명  아래  창설되었다.  민

보단은  16〜60세의  주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실제로는  민보단을  구성할  청년들이  절대  부족

하였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향토방위의  의무가  부여되었다.15)   

일반주민과  유격대를  분리시키기  위한  축성과  주둔소  쌓기는  마을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

되어  대부분  한  달  만에  구축되었다.  주둔소는  일종의  축성작전의  하나로  한라산  밀림에 

인접한  주요  거점마다  유격대에  대한  방어와  효율적  토벌을  위해  한라산  주위를  둘러가며 

곳곳에  쌓은  2차  진지이다.  축성과  주둔소에는  경찰과  마을에서  차출된  청년들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하였다.  주둔소의  경우는  한라산  토벌에  나선  군인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기

도  했다.16)   

일반  주민들은  고단한  축성  쌓기에  이어  밤낮으로  죽창과  철창을  들고  보초를  서야했다. 

남자들이  적은  지역에서는  65세의  노인과  아낙네들까지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쌓는  일에서부터  밤에는  교대로  성을  지키는  보초의  일을  감내해야  했다.  이  외에도  주민

들은  여러  가지  토벌부역에  동원되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참담한  생활  속에서도  주민

들은  토벌대의  식사와  심부름을  책임져야  했으며,  직접  토벌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  때에 

경찰에  잘못  보여서  혹은  유격대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주민들도  많았다. 

토벌  부역에  동원된  마을  주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서북청년회원들의  뒤치다꺼

리였다.  대부분의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생각하는  그들은  마을에  들어오자  온갖  패륜과 

절취  등의  보복적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다.  서청들은  각  가호마다  5〜10명  씩  나뉘

어  기거하면서  잠자리와  식량뿐만  아니라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전부  무상으로  부담하도록 

했다.   

걸핏하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돈이나  가축,  곡식  등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면  좌익분

자,  빨갱이  운운하며  경찰에  끌고  가  못살게  굴거나  심하면  살인  하는  것을  예사로  삼았다. 

그들을  멸시하는  ‘보리자루부대’17)라는  말에는  제주도민의  강한  불신과  노여움이  담겨 

15)  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3,  266-270쪽.

16)  제주4·3연구소  편,「시오름  주둔소」『4·3장정』5  ,  나라출판,  1992,  78-79쪽.

17)  보리를  담는  자루처럼  헐렁한  모양의  바지를  입고  다녀서  붙여진  경멸이  담긴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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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있다.  또  다른  토벌  부역은  특공대로  편성되어  토벌작전에  동원된  것이었다.  중산간  마을에

서  소개  내려오고  난  후  마을  주위에  성을  쌓은  이후에도  여전히  산발적인  유격대의  공격

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격대의  조직은  궤멸  상태에  이르러    활동  범위는  단지 

식량  확보를  위한  생존  차원의  산발적인  공격이었다.  유격대는  대토벌이  있을  때마다  대항

하여  싸우기  보다는  3〜4명  씩  분산하여  한라산  깊숙이  몸을  숨겨  피해  다니면서  목숨을 

보전했다.  이에  토벌대는  유격대의  근거지를  찾아내서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토벌대는  마을  내에  남아있는  남자들을  특공대원으로  뽑아  토

벌대의  길잡이로  동원했다.  특공대원은  군경과  달리  일반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군경,  민간이  합동으로  토벌  나갈  때는  유격대와  구분하기  쉽도록  흰  띠가  두  개  둘러

진  검은  모자를  쓰도록  했다.  특공대원은  죽창  등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들고  군인

이나  경찰관보다  앞서  최전방으로  내몰렸다.18)   

특히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전향한  사람들이  주로  토벌대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4·3말기의  토벌은  대부분  이들  ‘길잡이’의  안내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산에서  활

동하다가  체포당한  여성들도  종종  동원되었다.

내가  민보단에  있을  때  토벌도  갔어요.  남자  한  명에  여자  여덟  해서  9명이  1개  소대인데 

철창을  매고  토벌을  나가요.  가다가  총소리를  빵  한  번  나믄  그게  준비고,  두  번  나면  완전무

장해서...세  번  나면  돌격하고  쏘라.  조천서  근무도.  서고  토벌도  나갔다.19)

   

민보단원들  가운데는  보초를  서다가  혹은  토벌작전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

다.  어느  경우에는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거나  근무가  태만하다는  이유  등을  군경

의  총탄에  사살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민보단에게  편입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기 

때문에  많은  제주도민이  자원했다.  이승만  정권은  민보단뿐만  아니라  대한청년단과  같은 

우익청년단을  강화하면서  제주도민을  규율하고,  나아가  토벌작전에  직·간접적으로  동원하였

다.   

거의  모든  마을  주민들이  민보단과  우익청년단원이  되어  마을의  보초를  담당하고  군경토

벌대의  보조  병력으로  동원된  것은  1949년에  들어서면  더욱  심해졌다.  1949년  3월  대토벌 

18)「양민학살사건  국회진상조사위원회  속기록<1960년  6월  6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

위원회  편,『제주4·3사건자료집』4,  2002,  173쪽. 

19)  증언자는  인민유격대장  이덕구의  동네로  유명한  조천면  신촌에  거주하다가  입산  후  활동하다가  자수

하였다.  제주4·3연구소  편,『이제는  말햄수다』1,  한울,  1989,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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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의  성공으로  무장대의  세력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고,  5·10재선거가  다가오자  이승만

은  1949년  4월  9일  제주를  방문했다.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먼저  제주를  완전한  평화로 

만든  후  다시  전라도로  가면서  숙청하며  38선을  분쇄하고  북한으로  진군하여  낙원의  정부

를  세우자”고  했고20),  4월  13일  ‘제주도  시찰과  국민조직  강화’라는  관민합작의  반공태

세를  강조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21)   

이승만의  담화  이후  국민반과  유숙계라는  사회감시체제가  진행되었다.22)  제주에서는  소

개된  중산간  마을의  재건과  맞물려  집단부락  건설과  보갑제를  실시할  방침을  세웠다.23)  보

갑제는  ‘소개령’  이후  불태워진  마을을  재건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몇  개의  부락을  하나

로  무장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곽을  쌓고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면서  주민

들의  연대책임식의  감시  체계였다.         

이승만의  제주  방문  직후인  4월  11일  여성계는  ‘제주도부녀자대회’를  열어  “각하에 

자애로운  심려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재건을  조속히  완수함에  총진군하기를  맹서하였습

니다”는  메시지를  국회에  보내,  대통령에게  감사하고  재건에  앞장서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24) 

한편  이승만  정권은  제주4·3을  반공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였다.  특파원의  현지  시찰기를 

통한  신문  보도  외에도  사진전을  개최하여  일반인들에게  직접  제주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반공  선전의  강도를  높였다.  물론  여기에는  토벌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진과  같이  토벌

대에게  불리한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1949년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7일간에  걸쳐  육군본

부  정훈감실  보도과와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  보도대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대한민

국  독립  1주년  기념  ‘제주도  평정  보도사진전’을  개최하였다.  전시품은  “제주도의  공비

섬멸  군경민(軍警民)  합동작전  및  평정된  제주도의  모습,  이(李)대통령  이하  각부  장관의 

동지  시찰  등  다수의  실황사진”이었다.25)   

신문  보도와  사진전에는  “공산분자들의  음모로  곤경에  빠진  제주도민의  비참함과  토벌

대의  선무공작의  성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공산분자의  잔혹함과  토벌대의  자애로움을 

20)『자유신문』,  1949.  4.  12.

21)『동아일보』,  1949.  4.  13.

22)  김득중,『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3,  299-305쪽.

23)『국도신문』,  1949년  4.  22.

24)『제헌국회속기록』제2회  제75호,  1949.  4.  14.

25)『국도신문』,  1949년  8.  25.  ;『조선일보』,  1949.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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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대비시키고  있다.   

4·3발발  직후의  언론  보도도  1년이  지난  1949년의  보도  태도는  확연히  구분된다.  4·3발

발  직후에는  4·3이  일어난  원인  중의  하나는  군경의  잔혹한  탄압에  있다는  등의  객관적인 

보도를  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언론통제가  이루어짐으

로써  1949년의  신문과  잡지들은  4·3은  공산분자들의  음모로  야기된  폭동으로만  보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군경토벌대의  성공적인  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을  칭찬하는  기사만이  넘쳐

났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폭도의  최후의  사명(死命)을  제압할  날은  마침내  닥쳐왔던  것이니  함(咸

炳善)중령이  지휘하는  국군의  정예  제2연대의  제주주둔이  곧  이것이다.  제2연대의  제주  진주는 

작년  11월이었다.  2연대는  진주함과  동시  종래의  미온·소극작전을  떠나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  작전을  실시하고  한편  이(李昌楨)소령이  영도하는  민사처를  중심으

로  폭도의  귀순공작을  시작하였다.  이  같은  피투성이의  작전은  불과  4~5개월에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그  대부분을  포로로  하였고  양과  같이  선량한  백성을  적의  독아(毒牙)로부터  구원하

였다.  총을  메고  먼지를  둘러쓴  국군과  경찰의  파도를  뚫고  한산한  가두를  거쳐  함(咸)연대장

을  찾았다.  반갑게  맞아주는  함(咸)중령은  제주에서  알려진  한라산의  호랑이라기보다  온정에 

넘친  인간  함중령이다.  과연  그럴  것이다.  폭도  측에는  호랑이거니와  도민에게는  둘도  없는  친

구가  아닌가?26)

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토벌대의  자애로운  모습을  등장시킨  신문  기사는  제주도민의  참혹

한  생활과  대비됨으로써  공산분자들의  잔혹상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토벌대

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제주도민에  대한  빨갱이  낙인은  쉽게  걷혀지지  않았다.27)  여전히  제주도민은  빨갱이  섬

26)「동백꽃은  다시  피려나  /  제주에서  본사  특파원  이병훈  기(記)①  /  포위·고립화  작전  주효(奏効)  / 

제2연대의  공훈은  혁혁!」,『국도신문』,  1949년  4.  21.  이외에도  국방부장관  제주시찰  수행기에서는 
국방장관이  제주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  등의  자애로움을  담고  있다(『조선일보』,  1949.  4.  19).  신
천지에  실린  「평란  제주도  기행」은  아예  “1949년  7월  24일  삼가  대통령  취임  1주년을  추억하면서 
쓴다”하고  “이승만의  통솔과  지도아래  강력한  국민조직망를  통한  방위국민운동으로  민족통일  과업
을  완수하자”면서  이승만  정권이  벌이는  반공운동을  찬양했다(『신천지』,  1949.  9,  제주4·3사건진상
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편,  앞의  책  4,  198-207쪽).     

27)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조선일보에  1949년  6월  2일부터  6월  4일까지  3일에  걸쳐  ‘제주사태의  진

상’을  연재하였다.  민국당  후보로  5·10재선거  북제주군  갑구  출마를  앞두고  선거용으로  쓴  것인데도 
제주에  대한  빨갱이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사상  및  치안대책’으로  “군경을  전부  제주도출신
으로  하면  정실관계로  또다시  좌익을  옹호하고  은폐할  터이니  반드시  육지로부터  공정한  인물을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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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순화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4·3  발발  2주년을  맞아  실은  중앙의  한  신문의  사설은  제주도민을  좀더  체계적으로  동

원하고  반공국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육을  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4월  3일  이  날은  겨레의  머리  속에  아직  기억도  새로운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제주도  폭

동사건이  발발한  날이다.⃛…육지와  다른  평화를  구가하고  이젠  전고미유의  피비린내의  세례를  받

은  그들에게  우리는  좀더  계획적인  시책으로서  그들을  위무하여야    하겠다.  국군은  정훈공작  면

에  있어  진정으로  그들의  심중을  위무할  수  있는  선무반의  파견과  아울러  군민합작에  힘쓸  것이

며  현지  위정자는  그들의  경제재건을  위한  특별융자의  방도를  강구…더욱이  이러한  참상을  유도

한  원인이  도민의  天品과  해방후의  적절한  계몽시책이  없었음에  원인되었음을  성찰하여  다시  이

러한  비참한  현상을  초래하지  않도록  일반  민중교육에  특수한  시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공산당에  속지  않으리라  맹서하는  도민들은  부모  처자를  빼앗긴  가슴  쓰린  3년 

전을  회고하면서…신생조국에  발맞추어  폐허된  향토의  재건에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28)       

이처럼  “4·3이  피비린내는  동족상잔이었고,  이의  원인이  제주도민의  타고난  성품에  있

다”이라는  인식은  빨갱이의  멍에를  벗어나고자  하는  제주도민에게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

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제주도민은  강제  동원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반

공국민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반공전선의  보루인  군으

로  제주도민은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국민을  반공  전선으로  동원하려는  작업은  강화되었고, 

아직도  유격대의  토벌이  종결되지  않은  제주도  상황에서  그  정도는  더욱  심했다.     

1950년  7월  30일  청년방위대  제주도추진위원회  결성식에  이어  8월1일  국민회  도위원장, 

대한부인회  도회장,  한청  도단부  단장,  도  문교사회과장,  북제주군수  등이  발기하여  도지사, 

법원장,  검찰청장,  도  총무국장  등을  비롯하여  읍내  민간  유지  참석한  가운데  ‘군경  및  청

방    원호  추진’을  목적으로  제주도  銃後報國會(회장  강지수)가  결성되었다.29)  1950년  9월 

초에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가  전선에  투입되자  경찰이  유격대  진압작전을  전담하

게  된다.  제주경찰은  의용경찰대를  조직하여  경찰업무를  보조하고,  진압작전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긴급명령  제7호로  선포(7월  21일)된  비상향토방위령에  의해  8월  중순에  경

것.”이라면서  제주에  대한  사상적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조선일보』,  1949년  6.  2,  6.  3,  6.  4). 

28)『한성일보』,  1950.  4.  4.

29)『제주신보』,  1950.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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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서장  관할  하에  각  부락단위로  만  17〜50세까지의  남자로  향토방위대를  편성하였다.30)   

교육계에도  4·3사건  때  좌익으로  의심을  받았던  최남식  제주농업학교  교장,  한림수중  오

승진은  정직처분을  받고,  우익활동에  앞장선  강계돈을  농교장,  청년방위대  간부인  고정일을 

북국민학교로  발령을  내는  등  교육계  인사를  단행하였다.31)                   

위와  같이  빨갱이  폭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주도민의  몸부림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 

입대와  학도병  지원이라는  군  동원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제주도에서는 

입대  선풍이  일어났다.32)  해병대  사령부가  4·3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이동해  있는  동안  한

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이  때  모병한  해병3기와  4기는  대부분  제주  출신이다33).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  되었다.     

해병대에  지원한  많은  사람들은  당시까지도  계속되는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유격대 

가족이거나  연루의  혐의로  인한  보복학살을  모면하기  위해  입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비검속의  두려움은  입대한  이후에도  여전했다.  훈련받다가  헌병이  와서  이름을  불러서 

데려간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34)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져서  학살당하지 

않을까하는  불안  속에서  전쟁터  일선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편  학생들의  학도병  지원도  이어졌다.  한림수산중학교  교사,  학생들  129명35),  1950년 

8월  5일  오현중학교  4백  여  학생  등이  학도병  지원을  하였다36)  제주신보에서는  “대한청년

단원으로  4·3사건에  참여한  후  2연대에  편입한  형과  같이  전쟁에  나가게  된  동생의  이야

기”를  게재하는  등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다.37)  그리고  해병대의  육지로의  이동을  앞둔  시

점에서는  “해병대가  도민에게  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개혁을  가져왔고”,  “신병으로 

입대하는  본도  출신들을  키워서  배전의  찬연한  성과와  승전의  소식을  기원”한다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38)         

30)『제주신보』,  1950.  8.  11.

31)『제주신보』,  1950.  8.  6.

32)『제주신보』,  1950.  8.  5.  1950년  8월  5일  해병대  모병에  응한  신병  입영식을  모슬포와  제주북민학교 

교정에서  거행하였다.

33)  1949년  12월  28일에  제주에  진주한  해병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을  겸임하

였다.   

34)  제주4·3연구소  편,『이제는  말햄수다』1,  151쪽.

35)『제주신보』,  1950.  8.  1.

36)『제주신보』,  1950.  8.  9.

37)『제주신보』,  1950.  8.  1.

38)『제주신보』,  195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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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학생들은  4·3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도  학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천  삐라  사건이  났을  때는  조천  관내  출신  학생들은  국민학생까

지  전부  함덕국민학교에  집단  수용될  정도였다.         

1950년  9월  23일에는  예비검속자  48명의  석방자가  대한민국에  충성을  하는  선서가  있었

고,39)  1950년  10월  26일에는  ‘평양탈환  경축  제주도민대회’를  열고  신  국방장관에게  감

사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40) 

국민방위군  향토방위대의  해산으로  민간방위  태세가  약화되자  전국적으로  의용경찰대, 

의용소방대,  민간방공대  등을  대한청년단에  통합하여  특동대를  조직함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1952년  1월  25일에  대한청년단  특동대가  발족되어  향토방위와  공비소탕을  위하여  경찰과 

보조를  취하고  대공투쟁의  전위대가  될  것을  결의했다.41)       

이와  같은  자발적  동원의  노력은  군경  당국으로부터  향토방위의  표창을  받는  결과를  낳

기도  했다.42)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도내에서  세워진  방위군학교  등에서  징집된  사람  중  건장한  장정들

을  선발하여  전문적  게릴라  토벌  요원을  양성하고  그들로  11사단(화랑사단)을  창설하여  먼저 

지리산  지구  게릴라  토벌에  투입시킨다.  ‘빨갱이  폭도’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다른  지역

의  ‘빨갱이  폭도’라고  명명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비극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3.  빨갱이  논리와  피해의식

대규모  집단  학살에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학살의  동기를  제공하고,  학살을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마

비시키거나  위안을  줌으로써  학살에  가담하도록  돕는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인간  이하

의  존재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43) 

39)『제주신보』,  1948.  9.  23.

40)『서울신문』,  1950.  10.  27.

41)『제주신보』,  1950.  1.  26.

42)『제주신보』,  1952.  4.  26.  1952년  4월  제주도  경찰국  비상경비사령부에서는  남제주군  표선면  하천

리,  안덕면  사계리·신효리,  북제주군  애월면  금성리,  한림면  용수리  등  6개리  리민을  향토방위의  공
로로  표창하기도  했다.

43)  최호근,『제노사이드-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2005,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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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제주4·3에서  가해자를  사로잡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한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로 

대변된다.  이  논리는  대한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익의  이데올로기로서,  공

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을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의식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44)  이 

속에는  혐의만  가지고  특정인과  특정  집단을  좌익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그것이  범죄로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애국적인  행위로  용인될  가능성이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

로  빨갱이  논리는  학살의  집행자들을  법적·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빨갱이라는  주술적인  단어로  집약되는  신념  체계는  근본적으로  민족이나  인종  간

의  학살  현장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종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  제주도  주민의  대량학살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의  산물이었다.  4·3당시  초토화  작전의  목표가  된  것은  개별적인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입산자의  가족들과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같이 

빨갱이로  간주되는  모든  이들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4·3학살  당시의  빨갱이  사냥은  유태

인  말살과  같은  인종말살이었다  할  수  있다.  ‘빨갱이  섬’의  낙인을  받은  제주도  주민은 

새로운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열등한  인종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4·3이후에도  그  낙인은  나머지  생존  가족이나  친족에게  ‘빨갱이  가족’  혹은  ‘폭도  가

족’의  유산으로  남아  연좌제의  피해를  결과하였다.  그것은  특정  인종에  대한  증오에서  발

단한  테러리즘의  조직적인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45)   

초토화  작전  시기에  학살당한  제주도민  가운데  대다수는  좌익  사상을  품은  사람이  아니

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수립을  원한  사람들이  아니라,  해방  후에  가중된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희생자들은  일

부를  제외하고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심지어  그  보다  폭이  더  넓은  좌익  범주에도  속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빨갱이

로  낙인찍혀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46)         

육지에서  제주로  파견되어  주민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해야  했던  군경과  서북청년회  입장

에서는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를  쓰고  자기들만의  독특한  의사소통  구조를  갖고  있는  그들

이  대단히  이질적인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김익렬  9연대장도  제주도민과  육지인들

44)  김동춘,『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280쪽.

45)  김성례,「국가폭력의  성정치학-제주4·3학살을  중심으로」『흔적』,  문화과학,  2001,  271-272쪽.

46)  강성현,「제주4·3학살사건의  사회학적  연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02,  8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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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풍속의  차이로  9연대는  외국에  주둔하고  있는  인상마저  주었다고  할  정도였다.47)  제주

는  고려  말  이래  중앙과  육지의  끊임없는  흡수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율적이

고  독자적인  문화와,  풍속,  언어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한편  이것은  육지  출신의  진압세력

에게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이라는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일  수  있는  차이도,  가까이서,  그것도  의심하는  가운데  바라보고  경

험하면  충분히  위험스러운  것도  느껴질  수  있었다.  토벌을  하러  온  사람들의  눈에  제주도

민들은  동족이나  내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과  빨갱이  논리가  결합되었을 

때  폭력  행사는  엄청난  수준으로  정당화되고  강화될  수  있었다.48)   

토벌대는  학살을  수행하는  데에  아무런  심리적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심지

어는  살인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9연대  정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즉결총상에서부

터  심지어  생사람을  수장하는  등  각종  학살극을  주도한  탁성록은  대표적인  예이다.49)  마지

못해  학살에  가담한  제주  출신  경찰이나  민보단원들과는  대조적이었다.50)  다음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잡혀가니  동네  친척이  나를  빼내려고  서청에게  진상했는데,  그  놈들은  받아먹어  놓고는 

나를  그냥  잡아갔지.  그  때  김완배(4·3당시  남로당  농민부장)  처  등  6명이  잡혀갔는데  뒤에  오

는  제주  출신  순경과  서청  출신  순경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어.  이북  형사는  중간에  처치해

버리려고  “앗어버려(죽여라)”  해.  제주  출신  김순경은  “아니다.  지서장  허락을  받아야  한

다”고  하면서,  “너희들  빨리가”  외치니  우리들은  부리나케  앞으로  갔어.  당시는  같은  순경

끼리도  밥을  같이  안  먹을  정도로  차별이  심했어.  제주  순경과  육지  순경이  말이야.51) 

토벌대라는  같은  입장이지만  제주출신과  육지출신  특히  서청의  태도는  달랐다.  서청에게 

있어  제주도민은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처단되어야  할  빨갱이에  불과했다.  특히  학살  과

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입산자였거나  입산자의  아내인  경우, 

혹은  임시  수용소에  수감된  여성들에  대해서는  성적  가해  행위뿐만  아니라,  살해의  형태도 

비인륜적이었다.

47)「김익렬  유고」『4·3은  말한다』2,  276쪽. 

48)  박명림,「민주주의,  이성,  그리고  역사  이해  :  제주4·3과  한국현대사」『제주4·3연구』,  452쪽.

49)『4·3은  말한다』3,  385쪽.

50)  강성현,  앞의  글,  78쪽. 

51)「북촌은  앗아본거라」『이제사  말햄수다』1,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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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경찰은  민보단과  부인회원들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

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삭인  상태로  아기를  낳았지요.  경찰은  그  여자를  발가벗긴  후  민보단원

과  부인회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총으로  쏘았습니다.  생후  한  달도  안  된  아기

가  죽은  엄마  옆에서  바둥거리자  경찰은  아기  얼굴에  대고  또  한  발의  총을  쏘았습니다.52)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인식하는  상황은  빨갱이를  재생산하는  여성의  몸과  가족을  적대시

했고,  ‘빨갱이’  가족은  언제든지  대살(代殺)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53)  빨갱이  종자를  말

려야  한다는  이유로  생후  한  달도  안  된  아이도  학살당했던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적인  고문도  빈번히  일어났다.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

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

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버렸습니다.  이튿날  경

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54) 

이  외에도  살기  위해서  혹은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  속에  여성들은  경찰  혹은 

우익청년단과  강제로  결혼하거나  성적  농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55)  가족,  실제로는  남자 

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또  다른  가족구성원인  여성을  토벌대에  강제  결혼시키는  사례는 

여성들이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56) 

52)  김형순<표선면  성읍리>  증언(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5,  88쪽에서  재인용).

53)  강성현,  앞의  글,  91쪽.

54)  김호겸<4·3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증언(제민일보4·3취재반,  앞의  책  4,  222-223쪽에서  재인용).

55)  국방경비대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대위,  서북청년단장  김재능  등  군경토벌대의  패륜적  행위를  증언하

는  사람들이  많다(제민일보4·3취재반,  같은  책,  227-228쪽).

56)  김성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잔혹한  학살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여성의  신체는  폭력  행사의  전시장이자  폭력의  정치적  기술이  각인된  장소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신체는  가족과  인척  그리고  공동체와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적  신체에  귀속되는  장소이다. 
이런  논리에서  여성의  순결과  정조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사회적  신체의  상징이  되고  그 
정체성의  보루가  된다.  따라서  여성의  개인적인  수치와  희생은  공동체  전체의  수치이며  희생이기  때
문에  피해여성들의  침묵이  강요되는  것이다”(김성례,  앞의  글,  284-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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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심  | 

193

4·3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의  제주  여성들의  삶  또한  질곡의  여정과  같았다.  4·3이 

발발하고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집과  마을이  불타버린  후  여성들은  남은  가족들을  이

끌고  해안  마을의  소개지로  내려가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전략촌으로 

와서도  여성들은  남성의  노동력을  대신해서  축성작업을  하고,  보초  경비를  서고  토벌대의 

뒷바라지를  했다.  인력이  부족한  작은  마을에서는  부족한  젖먹이  어린아이를  업고  축성부

역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고된  나날들이었다.57)   

한편  당시에  빨갱이로  지목된  제주도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피해갈  수  없었다. 

이는  소위  ‘제주도  유지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주도  유지사건’은  1950년  8월  1

일  토착  유력자  12명이  전격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혐의는  인민군의  제주도  상륙

에  대비해  ‘인민군  상륙  환영준비회’를  조직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  구속된  사람은  제주

지방법원장  김재천,  제주지방검찰청검사장  원복범,  도총무국장  홍순원,  도서무과장  전인홍, 

변호사  최원순,  변호사,  김무근,  사업가  김영희,  사업가  이윤희,  제주화물  사장  백형석,  도상

공과장  이인구,  제주읍장  김차봉,  도립병원  과장  김대홍  등이었다.58)   

구속된  이들  대부분은  혹독한  고문으로  혐의  사실을  거짓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신현준 

제주계엄사령관의  결재로  8월  21일  이들은  모두  처형될  운명이었다.  다행히  구명운동과  진

상조사가  급히  이루어져  9월  4일에  석방됨으로써  이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었지만  35일간 

이들의  겪은  고초와  제주지역  사회에  던진  파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  사건

은  지방  유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주주둔  군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의  모략으로  밝혀

지면서  종결되었다. 

제주지방법원장과  제주지방검찰청검사장  수준의  고위  유력자조차  일개  군  정보과장의  영

향력에  의해  사형  직전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  빨갱이  논리는  모

든  것에  우선했다.  일단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에게는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용납되었

다.  제주도의  소위  내노라  하는  엘리트들도  이렇게  당하는  마당에  일반  제주도민의  처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제  제주에는  빨갱이라는  멍에와  침묵,  그리고  제주도민의  내면에는  피해의식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특히  5·10단선을  저지한  유일한  지역이라는  자부심은  “괜히  나섰다가  혼만 

난다”라는  자괴감으로  바뀌어나갔다.  인민위원회와  4·3항쟁으로  이어진  투쟁  과정에서  마

57)  제주4·3연구소  편,「대정지역의  4·3항쟁」『4·3장정』6,  나라출판,  1993,  58쪽.

58)  강용삼·이경수  공편,『대하실록  제주백년』,  태광문화사,  1984,  790-8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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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을  내의  잘났다고  이야기되는  인사들은  대부분  죽었다.  즉  제주공동체의  파괴  과정에서  공

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엘리트  집단은  파괴되었다.  소위  잘  났다는  사람들은  죽고  이

제  ‘몰명진’  사람들만이  살아남은  제주가  된  것이다.59)   

반면에  제주에서  진압군으로  각종  잔혹한  행위를  했던  서청  출신들  중  일부는  제주에서 

재산을  모으고  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해나갔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이들

이  제주에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빨갱이라는  협박으로  주민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군과  경찰의  이름으로  사업을  해서  이윤을  챙겼기  때문이다.60)  혹은  재력  있는  집안의  제

주  여성과의  강제결혼을  통해  제주에  정착하였다.61)  토벌대원들은  학살  현장에서  도리어 

재산을  축적하고  생계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가혹한  토벌과  그것의  근거로  이용된  빨갱이  논리는  제주도민의  입을  다물게  했다.  빨갱

이라는  말의  실체가  모호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마당에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사

람은  없었다.  제주  섬은  철저히  외부와  고립되어  있었고  제주에  사는  섬사람들은  빨갱이 

사냥의  한  가운데  있었다.  외부에서  이에  항의하거나  저지할  수  있는  조력자는  없었다.62) 

아직까지  산에  남아있는  유격대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투쟁이  아니라  도피  중인  사람들이

었다.  그리고  이미  유격대와  제주도민의  유대는  끊어져  있었다.  이제  제주도민에게  있어  유

격대는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에  불과했다.  토벌의  피해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59)  김종민,  앞의  글,  390-393쪽.

60)  미군사고문단도  서청이  제주에서  재산을  축적한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  주둔  미군

사고문단  피취그룬드Fischgrund  대위는  1949년  11월  22일자  제주도  시찰보고서에서  “모든  서청은 
제주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잔류중인  서북(서북청년단)  가운데  300명은  경찰에  있
으며  200여명은  사업을  하거나  지방정부에  근무하고  있다.  주민들은  서북이  제주도에  들어온  해  동
안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부자가  되거나  자신들보다  더  혜택을  받은  상인들이  되고  있기  때문에  서
북에  대해  상당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고려돼야  한다.  부지사와  현재의 
군사령관은  북한  피난민  출신들로  서북에  동정적이다.  지방언론은  현재  서북  회원들이  운영하며  그들
이  원하는  것만  보도하고  있다.  또한  서북  상인들은  때때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찰과  군,  정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본인은  1년  전  서북이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현지
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난에서  출발해  부자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
자명예회복위원회  편,  앞의  책  11,  182-185쪽.)

61)  오금숙,「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  사례」『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역사비평사,  1999, 

245-248쪽.

62)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의  인명  살상에  대한  우려와  항쟁의  원인을  군경

의  탄압에서  찾는  기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1949년에  이르면  제주4·3항쟁은  철저히  공산분자들의  음
모로만  이야기된다.  1948년  6월에  신천지에  실린  조덕송의  글과  1949년  9월의  서재권의  글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재권은  4·3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진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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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심  | 

195

주민들은  이제는  산에  오른  청년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똑똑하다  하여  마을의  자랑거리

였던  청년들이  화근이  된  것이다.63) 

4·3때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으로  학살됨에  따라  빨갱이  사냥의 

공포는  제주도민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한  해  전만  하더라도  삐라를  뿌리고  왓샤시위를  하

던  사람들이  이제는  오로지  생존에만  급급한  처지가  되었다.  특히  4·3항쟁  시기에  소위  마

을에서  교육을  많이  받거나  항일투쟁의  경험으로  존경받던  사람들  대다수가  유격대에  참여

하거나  혹은  유격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되었기  때문에  도민의  패배주의는  더욱  깊어

갔다.64)  4·3의  한  축을  차지하는  저항  정신은  망각되어갔다.

피해의식은  극우반공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든다.  그것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왜  그

렇게  강력하고  강인한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한  요소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특정  지역의 

고유한  현상이라기보다는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피해가  특히  심했던  지역에서  두드러졌

다.65) 

생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에  순응하면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강요된  침묵

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학살의  과정에서  점차로  내면화되어갔다.  레드콤플렉스가  커질수록  한

편으로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제주도민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극우반공체제의  강화  속에서  4·3기억에  대한  강제적인  망각으로  이어졌다.             

수십  년  간  계속된  금기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항쟁의  기억뿐만  아니라  학살의  고통

도  드러낼  수  없었다.  빨갱이  섬이라는  4·3의  멍에를  씻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4·3  그  자체

를  언급해서는  안  되는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63)  증언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청년들이  활발하고  힘센  마을들은  예외  없이  큰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

다.  토벌대에게  부모를  잃은  유족들  중에서도  토벌대를  원망하기  보다는  산에  오른  청년들에게  더 
적개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누가  총을  쐈든,  청년들이  난리를  피는  바람에  애꿎은  자기  가족들까
지  그토록  처참하게  희생을  치른  것  아니냐는  것이다(김종민,  앞의  글,  377-379쪽).

64)  김종민,  같은  글,  390-392쪽.

65)  서중석,『조봉암과  1950년대-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  역사비평사,  2000,  7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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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제주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은  6개의  관과  2개의  특별관으로  구성되었다.

6개의  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었다.

    ∙  1관    역사의  동굴

    ∙  2관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  3관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5·10단선반대)

    ∙  4관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  5관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운동)

    ∙  6관    새로운  시작(남겨진  것들)

    ∙  특별관  다랑쉬  굴의  재현  및  팽나무  연출

  전시의  연출  구성은  4·3사건의  정부공식보고서󰡐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  기반하였

다.

〈1관〉 

1관은  역사의  동굴이다.  30미터의  동굴은  현시점에서  4·3사건이  일어났던  과거로    역사

로  거슬러  올라가는  상황  연출의  공간이며,  4·3당시  피신처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4·3백비를  만나는데  글이  새겨지지  않은  이  비석은  4·3으로  인한  억울함이  해

1)  제주특별자치도  4·3사업소  학예연구사

[

]

제주4·3평화기념관  체험

고  범  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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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범석  | 

197

소되고,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이  분단의  시대를  넘어 

통일되는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겨  똑바로  일으켜  세울  것이다.

〈2관〉

2관은  흔들리는  섬이다.

1945년  일제의  패망에  따른  해방과  제주인의  자치열기,  그리고    미군정에  의해    좌절되

어  가는  제주의  현대사를  표현하고  있다.  연출적  전개는  크게  전쟁-  해방-  자치-  미군정- 

3·1발포사건-  탄압  의  순서로  전개된다.

‘전쟁과  해방’  코너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의  진지구축(결7호작전)과  무

장해제,  항복(종전)과  귀향,  그리고  해방의  기쁨(아트워크  1  -  미명)이  다루어지는  공간이다.

‘자치와  미군정’  코너는  해방  이후  자주독립  국가를  외치며  활동하며  시작된  ‘자치’

의  열망은  '미군정'의  코너와  대립되어  상호  대치하게  된다.

‘자치’의  공간은  제주도  인민위원회  결성을  시작으로  자주독립을  위한  활동으로  마을

행정,  치안활동,  학교건립  등  당시  제주도의  뜨거웠던  자치의  열망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미군정’의  공간은  항복조인식  후  일장기를  내리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가며 

(45년  9월9일)  남한에  미군정이  선포되는  내용과  제주가  ‘도’로  승격되며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제주도에서의  미군정에  대하여  보여주는  공간이다.

미군정의  실정을  보여주는  연출코너는  미군정  시기의  생활상이  일제강점기  때와  다름없

이  가난과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적  의미를  삽화패널과  멍석에  말려있는  죽음의 

기둥으로  연출하였다. 

좌,  우에  위치한  2개의  특별코너는  미소의  분할점령  정책과  당시  민족간의  좌우대립에 

관해  심도  깊게  알아보는  공간이다.

3·1  발포사건코너는  3·1절  기념대회와  발포사건  /  3·10  총파업  /  검거선풍/  2·7  사건과 

고문치사로  구성되었으며  4·3으로  가는  길목으로  연출되어  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대

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영상애니메이션  기법(아트워크-  2  :  박재동)을  사용하여    4·3의  원

인으로서  3·1발포사건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3·10  총파업  후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단정지으며(아트워크-3)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이  제주도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2·7사건과  고문치사의  사건들이  발생되며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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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관〉

3관은  바람타는  섬이다.

무장봉기와  분단거부의  공간으로서  4·3  무장봉기의  새벽과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5·10  단선반대를  중심으로  극적인  연출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4·3이  일어나는  새벽  상황을  벽면과  천장의  반사면을  이용하여  역동적이며  추상적인    영

상애니메이션(아트워크  -  4    :    4·3의  새벽)을  보여줌으로써  무한공간을  연출하는  코너이다.

미군정의  대응코너에서는  무장봉기에  대한  미군정의  초기대응과  평화협상  결렬,  오라리 

사건과  제주  메이데이영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강경진압/  최고수뇌부회의/  미군정  본격진압작전/  연대장교체  등이  설명되어  있다. 

그  다음은  ‘5·10  단선반대’코너이다.

상부벽면의  당시  5·10선거를  반대하며  입산하는  주민들의  모습(아트워크-5  :  강요배  작)

과  평화로운  한라산의  5월  하늘(아트워크  -  6  :  한라산의  평화)이  겹쳐  보일  수  있게  연출

하여  당시  오름에  올라간  상황을  관람객들이  교감할  수  있도록  공간이  연출되어  있다.

이어  전국의  단선반대  상황과  2개선거구  무효화,  미군정  보복진압,  9연대원  탈영/박진경

의  암살  등의  코너와  연결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인민공화국  수립의  상황을  영상과  패널을  통해  비교할  수  있도록  설

명해주고  있다.

특별코너로서  역사속의  민중저항을  다루는  코너가  있다.

제주저항의  전통  (아트워크  -  7)과    세계의  민중봉기가  연출되어  있다.

〈4관〉

4관은  불타는  섬이다.

초토화  작전(불타는  섬),  죽음의  섬,  귀순과  무장대  궤멸,  예비검속과  피해상황  종합의 

내용을  다루는  4·3의  결과를  보여주는  연출  공간이다.

제주도의  모형은  5km의  적성구획  설정과  함께  초토화되어  가는  제주도의  모습을    설명

해주는  연출이다.

전면의  영상애니메이션은  초토화  작전의  전개와  결과를  중심으로  향후  발생될  학살과   

죽음에  대한  내용을  선이  굵고  강한  느낌의  영상(불타는  섬  :  아트워크  -  8)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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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범석  | 

199

축성  벽  복도를  지나다  보면  당시  시대적  흐름선상에  있는  특별코너인  여순사건을  만나

게  된다.

또한,  소개에  따른  당시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모형연출기법으로  폐허가  돼버린  마을(폐

허의  방)이  연출되어  있다. 

축성  벽  복도가  끝나면  5km  적성구획을  형상화  하는  죽음의  섬이  표현되어  있다.

제주도  곳곳에서  벌어진  당시  여러  죽음의  유형들을  23개의  조소작품으로  표현하고  있

다.(죽음의섬  :  아트워크-9)

북촌리의  비극을  중심으로  여러  학살에  대한  증언의  방이  나온다.

사실적이며,  구체적인  증언을  통해  토벌대의  학살과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죽음사례  등

에  대해  들을  수  있다.

죽음의  섬을  지나  중2층에  오르면  20세기  세계의  제노사이드와  집단광기  속에서도  희생

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던  의로운  사람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이  곳  중2층은  앞서  관람 

하였던  3관의  단선반대  공간상부면까지  연결되어,  죽음의  원인이  되는  5·10단선  반대의  모

습과  그로  인해  전개된  죽음의  사례들을  다각적인  시각의  창으로  돌이켜  보는  사유의  공간

이다. 

처절한  피난생활과  춘계대토벌/선무공작과  귀순/집단수용/재판,  무장대  궤멸  등을  설명하

는  코너가  나온다.

초토화  작전의  실상과  연결선상에  있는  특별전시관인  다랑쉬  굴은  1992년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당시의  긴박했던  피난생활과  학살  등의  상황을  연출한  4·3의  상징적  공간

이다.

한국전쟁  후  예비검속,  형무소  재소자의  학살(행방불명  :  아트워크  -  10)등,  죽음에  대한 

코너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인적  피해,  마을  피해,  물적  피해,  공동체의  해체  등  희생자  명단을  통

해  초토화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5관〉

5관은    흐르는    섬이다.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의  공간으로  복구와  정착  →  후유증  →  진상규명운동으로  구성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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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특별코너인  잃어버린  마을  코너가    나온다.

4·3사건으로  소실된  마을들의  기억과  시간의  흐름을  팽나무와(아트워크  -  11  :  팽나무의 

기억과    시간)  마을의  잔상을  통해  서서히  나타나는  치유를  보여준다.

초토화된  섬에서  다시  일어나는  모습과  재일제주인,  연좌제,  국가보안법  그리고    후유장

애와  레드  콤플렉스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4·3이후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제주인의  증언을  들어볼  수  있는  방이  있다.

이  곳  진상규명운동  공간은,  4·19  직후의  진상규명과  좌절(깨어진  백조일손  비),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4·3운동,  지속적인  진상규명운동의  전개와  4·3  특별법의  제정,  대통령의  사

과를  통해  현재까지  이르는  역사적  상황들을  정리하였다.

〈6관〉

6관은  새로운  시작이다.

에필로그  공간으로  특별관인  '해원의  폭낭'과  소원을  염원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  마을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하는,  풍토적이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신당수의  공간   

팽나무를  통하여  4·3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지금까지  전시된  것을  통하여  느낀  점을  차분하게  생각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공간이다.  이  사유의  공간을  지나  소원지를  걸어놓으면  상설전

시실  관람을  마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물별,  사건별,  마을별  증언들을  통해  4·3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볼  수  있

는  정보검색실이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은  과거사  청산의  역사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기념관,  제주도의    향

토성을  바탕으로  한  기념관으로서  한국현대사  전문역사박물관이다.

기록의  공간,  상생의  성지,  위령·추념의  공간,  복합문화공간인  제주4·3평화기념관은  기념 

및  추모의  공간,  아카이브,  역사교육  의  공간이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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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범석  | 

201

아트워크  설명

1.  미명(微明,  A  dim  light)

■  작가명  :    정용성 

■  규      격  :    5460*5460 

■  표현방법  :  회화    (종이에  먹) 

■  작품설명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

쟁에서  패망함에  따라  해방은  갑자기 

찾아왔다.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종언

이자  오랜  전쟁의  끝을  의미했다.  사

람들은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며 

이  날의  감격을  누렸다.  밝지  않은  빛 

속에서  서툰  솜씨로  태극기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화면  속  가족의  감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2.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  작가명  :  박재동

■  규      격  :  4분  이내

■  표현방법  :  애니메이션  영상

■  작품설명  : 

      제주  4·3의  기폭제가  사건이  3·1

발포  사건이다.  이날의  집회  끝 

무렵  주요  시위대가  이미  관덕정

을  지나간  뒤  한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채이고  성난  군

중이  기마경찰을  공격하자  경비경찰들이  경찰서를  공격하는  줄  알고  발포하였다.  이  때  총

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주요시위대가  아닌  구경꾼들이었고  이에  제주도민들이  분노  항의

하였으나  경찰이  정당방위를  주장하자  분노가  폭발하여  총파업에  돌입하고  그에  체포와  구

금으로  대처하면서  점점  더  악화된  사건이다. 

      총격에  쓰러져간  무고한  양민을  어떻게  보여  주고  그들이  죽어  갔던  사실이  얼마나  슬프고 

분노할  만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들이  그  슬픔에  동참하면서  이어  벌어지는 

총파업과  무장봉기  등을  보면서  '아하!  과연  그럴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하

는  것이  본  작품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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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레드  아일랜드  (Red  Island) 

 

■  작가명  :  문경원

■  규      격  :  2’30’’  랜덤플레이

(2’30’’  random  play)

■  표현방법  :  미디어  설치(Media 

installation,  custom  software)

■  작품설명  : 

      ‘1947년(담화문  발표)  미군정의  조장된  시각에  의해  ‘레드  아일랜드(붉은  섬)’로  잘못  규

정지어진  제주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제주도를  낙인  찍듯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고  있

는  조장된  시각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파편화된  섬의  이미지인  이합집산하는  사람들

의  동적  경로를  좆아  움직이는  미군정의  잘못된  시각은  랜덤  플레이(무순  배열의  프로그

래밍)로  움직이는  사각의  창을  통해  사람들을  붉은  실루엣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이  조

장된  시각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고,  섬의  형상으로  다시  구체화  된  사람들은 

스캔  되듯  움직이는  사각의  창을  통해  마치  낙인을  찍는  듯한  사운드와  함께  레드(RED)

로  상징화된다.  그러나  붉게  투사된  사람들의  구체적  형상은  곧  스캔  된  창이  지나  간 

뒤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며  잘못된  규정과  본래의  제주도  사이에  대조적인  의미를 

암시한다. 

4.    4·3의    새벽  (The  Dawn  of  Jeju  4·3)

 

■  작가명  :  주재형

■  사이즈  :  3min  30sec,  Color,  Sound

■  표현방법  :  2D  영상애니메이션

■  작품설명  :

      ‘무장봉기의  새벽’은  시간적으로  밤

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감

정의  공간이며    상징적인  공간을  의

미한다.  처음에는  감정이  억눌린  정적  공간이지만  이  후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공간으

로  바뀐다.  이  곳은  시간이  지나면서  봉기의  상황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한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진다.  사건의  구체적인  현장묘사보다는  봉기가  일어난  새벽의  인물

들의  감정과  이미지들을  전통  한지  위에  상징적으로  영상화  했다.  세포같이  꿈틀거리는 

배경  이미지들과  살짝살짝  보이는  사건의  꼴라주를  통해  이  검은  유리방  안에  들어온 

관객들이  4·3의  새벽에  일어난  제주  민중의  감정적  발화를  공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고

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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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범석  | 

203

5.  제주저항의  역사 

■  작가명  :    오석훈 

■  규      격  :    (450  x  980  x  40)  x  5EA

■  표현방법  :  부조  (청동) 

■  작품설명  : 

      제주도의  항쟁의  역사는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이후 

고려  의종  때  현령관이  파견되면서  최초의  민중항쟁인 

‘양수의  난’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반

도  중앙정부의  억압과  탄압이나  세계제국의  외침에  맞선 

지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제주민의  항쟁사를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  크게  다섯  개의  테마로  표

현    ①  양수의  봉기,  ②  삼별초의  난,  ③  1901년  제주항

쟁,  ④  법정사  항일운동,  ⑤  해녀항일투쟁으로  섹션화  하

여  작품화하였다. 

6.    한라산의  평화

 

■  작가명  :  김창겸

■  사이즈  :    160cm  x  160cm  x  20cm,  2분이내

■  표현방법  :  미디어아트

■  작품설명  : 

      오름의  호수를  상징하는  물을  보여준다. 

      돌확에  투사된  물  영상이  실제의  물같이  보이

고  오름의  평화로움을  물에  투영된  하늘과  구

름이  상징한다.  천천히  물결이  가라앉으면서 

하늘의  구름이  투영되어  보이며  빠르게  나타

났다  사라지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평화

롭고  고요하지만  신기루  같은  허상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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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7.  제주도민의  5·10  (단선반대  산행  )

■  작가명  :  강요배

■  사이즈  :  17080x2000

■  표현방법  :  회화  (캔버스  위  아크릴물감)

■  작품설명  : 

      긴장을  배후에  둔  평화로운  풍경임.  산

에오르는  가족,  보초선  무장대,  움막집 

짖는  사람들,  초원에서의  연설회,  여인들,  고사리꺽는  소녀.  할머니,  정찰기를  보고  놀라

는  사람들,  정찰기와  평원의  내용으로  이루어짐.    좌측으로부터  암시  ⇒  중앙  평시  ⇒ 

우측으로  가면서  부감  처리하여  상당한  시선  왜곡이  이루어지도록  표현됨. 

8.  불타는  섬  (Burning  Island)

 

■  작가명  :  이가경

■  규      격  :  3분  16초(HD디지털, 

3:8화면비율)

■  표현방법  :  2D  애니메이션

■  작품설명  : 

      4·3의  초토화와  대학살을  배경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목탄의  거친  흑백  모노톤으로 

소개되는  마을들과  학살의  과정을  통해  불타는  섬과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  죽음의  섬 

■  작가명  :  고  길  천

■  규      격  :  29m  x  2.5m  (5.8m)  안에  23개  조각된 

형상들  배치 

■  표현방법  :  조소  (석고붕대,  흙  마감)

■  작품설명  : 

      오랜  일본강점기를  통해  배운  잔악한  학살의  관련 

여러  사례가  4·3당시  군,경에  의해  그대로  재현  되

었다.  4·3당시  여러  죽음의  유형들을  자료,  증언을 

통해  제주도민들이  어떻게  희생을  당했는가를  조사

하여  제작되었으며,  조사된  여러  학살의  유형들을 

크게  항쟁을  상징하는  도입부,  총살,  교수,  참수,  질식사,  수장,  현재적  의미의  발굴된 

유골,  행방불명자,  기타  상징화된  특정  이미지로  나누어  표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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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범석  | 

205

10.  행방불명  (제주사람들  )

■  작가명  :  박불똥  (박상모)

■  사이즈  :  14,300mm  x  2,800mm 

■  표현방법  :  혼합재료  설치미술  (철판, 

철선,  철봉,  돌,  패널,  실사출력물, 

영상이미지) 

■  작품설명  : 

      ‘행방불명’은,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

하여  이승만  정권이  저질렀던  불법적인 

‘예비검속’  과  ‘집단학살’의  결과이다. 

‘행불자’는  제주도민만도  3,000여명으로  추산되나  국가  공인  수치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피해자’의  행방불명뿐  아니라  ‘가해자’마저  행방불명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행방불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도입부의  첫  장은  예비검속  등에  의한  수감상황을  나타냈다.  중앙부인  두  번째  장은  집

단학살의  참상과  가해자를  그렸다.  마지막  셋째  장은  ‘가해자의  행방불명’에  대한  언급

이다.  철판에  뚫린  구멍들은  행방불명된  3,000의  제주도민의  수를  뜻한다.  구멍에  꿰어

진  철선들은  가해자의  총구를  떠나  피해자의  몸뚱이에  박힌  총알의  궤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연결하는  의미이다. 

11.  팽나무의  기억과  시간  (The  Memory  of  Nettle  Trees) 

■  작가명  :  문경원

■  사이즈  :  3’00”  미디어  설치(Media 

installation)

■  표현방법  :  2D  애니메이션   

■  작품설명  : 

      ‘4·3의  사건으로  소실된  마을의  기억

과  시간  ‘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팽나무의  상징적  모습을  통해  4·3  의  기억과  치유를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마을   

전경  중  ‘자리왓’을  중심으로,  마치  팽나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듯  소

멸된  마을의  잔상을  통해  서정적인  슬픔을  표현한다.  실제  남아있는  마을  입구의  팽나무

와  이미지들은(자리왓,  다랑쉬  마을,  곤을동  등)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팽나무의  섬세한  형상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마을의  시간을  상징화한다.  또한  마지

막  팽나무의  형상은  남겨진  것들의  시간과  치유를  슬프고  아름다운  에필로그로  이끈다. 

이는  잃어버린  마을의  현재  모습이자  남겨진  실  뜻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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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문제의  제기: 

제주는  무엇인가?  제주는  무엇으로  다가가고  있는가?  제주는  무엇으로  다가가야  하는가? 

그럴  때  21세기  오늘의  시점에서  왜  4·3인가?  교육자료로서의  4·3은  무슨  의미를  갖는

가?  청년의  시기  우리는  왜  과거를  공부해야하는가?  미래로서의  과거는    삶에서  무슨  의미

인가? 

1).  세계인들에게  제주  4·3은?

2).  동북아시아인들에게  제주  4·3은?

3).  한국인들에게  제주  4·3은?

4).  제주인들에게  제주  4·3은? 

    왜  4·3은  현대한국과  제주의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인가?  이  때  문제의  핵심은  4·3이 

과연  제주의  미래일  수  있는가이다.  해답은  “그렇다”가  될  것이다.  4·3없이는  오늘의  제

주의  의미와  상징의  거의  모든  것은  없었을  것.  그냥  하나의  지역,  지방이자  섬.  상징과  정

신은  철저하게  과거의  산물.  누가  조심하고,  누가  뭔가  살리려하고  누가  과거의  가치를  찾

으려  하는가?  개인적  집합적  차원의  4·3의  영혼과  정신  때문.  역사의  크기는  종종  희생의 

[

]

현대한국,  냉전,  분단과  제주  4·3:  21세기에의  의미

제주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박명림(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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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207

크기에  비례.  과거는  곧  미래라는  것은  미래의  비전이  그로부터  나오기  때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실  현대한국의  축도(microcosm)이자  미래.   

2.  현대한국과  제주4·3(I)

제주는  무엇을  보여주어  왔고(과거),  무엇을  보여주고  있으며(현재),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미래)?  ==  비전  창조자로서의  과거

1).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  미래로서의  과거(past  as  a  future).  영혼과  정신

학살의  섬,  관광의  섬 

2).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  전환과  모색

평화의  섬,  인권의  섬,  연대의  섬

3).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  비전과  가치

왜  과거와  미래는  하나인가? 

3.  현대한국과  제주  4·3(II)

***  변화의  정도,  폭,  속도에  대한  인식과,  돌아봄의  필요. 

1).  1940년대의  학살의  시대:  오늘의  지혜,  성숙,  바름,  선도의  토대이자  토양이고  거름. 

미래를  위한  희생x소망으로서의  시련과  연단.   

2).  1950-80년대  동안의  오랜  억압과  눌림의  침묵의  시대.  반면효과  다대.  침묵이  크고 

길었던  만큼에  비례하여  인내의  크기와  운동의  크기가  모두  컸음.  단절.   

3).  80년대  말  -  90년대  말의  터짐과  분출,  운동의  시대.  누가  주도?  전적으로  제주인들

의  소생,  노력,  결집,  연대의  산물.  이로부터  타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4).  90년대  말  이후  상징변화.  인권,  생명,  발전,  평화,  개방성.  그러나  외부인들과  외국인

들에게  제주인들의  고난,  분노와  운동의  시대,  터짐의  시대는  모르는  것.  과거  관광의 

시대에  학살의  시대를  모르고  왔듯이  평화와  생명을  말하는  오늘의  그들은  다시  2번

과  3번은  전혀  모르고  지나옴.  학살과  인내와  운동의  산물로  찾아낸  인권(생명),  발전

(번영),  평화(공존)의  자치와  이상을  그들은,  또  우리는  그냥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

닌가?  (제주의  가르침  :  화해의  두  수준  --  엷은thin  화해와  두터운thick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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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4.  냉전,  분단,  제주  4·3 

    가.  “미래를  위한  과거”의  의미와  수준. 

      1)  국제적  수준;  지구적  냉전

      2)  국가적  수준;  분단과  분단국가의  등장.  지구적  냉전의  한국화

      3)  지역적  수준(마을  공동체):  사회적  분리와  균열-사회적  극단화의  지역화,  국  가적  분

리의  사회적  심연

      4).  변방과  고립:  제주도의  지리적  및  지정학적  위치.  변방(periphery)의  산물로서의 

“고립과  학살”에서,  중추(hub)의  산물로서의  “교량과  연대와  평화”(제주위상의 

혁명적  전환) 

    나.“평화에  대한  범죄”와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  사이에서

      →  평화시기의  “사실상  전쟁  범죄”.  이는  분단국가  수립과정의  산물.  정통성  및  폭력

의  문제에  직결

      1)  내부  평정을  위한  전국적  차원의  억압

      2)  국가  테러리즘

      3)  정권  획득을  위한  좌우  대결 

      4)  내생적인  갈등?

    다.  책임;  책임을  묻지  않는  제주해법과  제주방식의  교훈.  제주인들은  어떻게  정의를  추

구하면서도  관용을  견지할  수  있었는가? 

      1)  누구의  누구에  대한  범죄인가?  부분적  비난,  부분적  책임

        a.  미국,  또는  소련?

        b.  국가,  또는  북한의  침투?  북한  요인의  영향은  무엇?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는가? 

        c.  지역  공산주의  리더십

        d.  지역  조직들?

        e.  상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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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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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범주

        a.  법률적  책임;  최종  해결?

        b.  정치적  책임

        c.  도덕적  책임

    라.  이데올로기의  문제

      1)  반공주의  대  공산주의  (급진주의  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이었는가?  아니다.  제주도에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없었다.  제2

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제주도의  초기  정치공간의  의미

      2)“작은  전통”(little  tradition);  저항의  오랜  전통?

      3)  급진주의  혹은  온건주의

      4)  폐쇄와  고립의  의미

5.  탈냉전,  민주화와  제주4·3

    가.  4·3과  현대제주

      1)  죽음

      2)  승자와  희생자

      3)  연좌제와  억압시스템

      4)‘희생자’와  그  가족에  대한  공산주의자나  좌익으로의  누명과  반복호출

    나.  정신과  영혼  -  진실을  향한  긴  여로로서의  제자리  찾기

      1)  분단된  기억과  분단된  역사

      2)  권력의  논리와  진실의  논리

      3)  민주화와  과거사의  재평가;  미래를  향해  과거로  나아가기

        a.  제주4·3의  공식  역사  작성;  망각의  길고  조작적인  행위

        b.  제주4·3  역사의  재평가;  민주화의  산물

        c.  모순된  두  평행선의  종합;  ‘제주4·3특별법’  제정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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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설치.  탈냉전,  화해,  통일을  위한  역사의  본보기이자  선

례.  그러나  남은  과제가  다대함.  문제의  초점은  보상.  진실은  규명되었고  국가의  범

죄행위도  증명되었으나  보상할  수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생명과  형평의  원칙. 

    다.  제주인들  앞에  놓여있던  4가지  선택;  우리는  어떻게  ‘과거’를  넘어설  수  있었는가? 

지금  그  과제는  끝났는가?  -  세계와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의  함의와  교훈.  진실 

규명  이후  어떻게  정신의  물질화와  타락을  방지하고  지켜갈  것인가?  

      1)  복수  ;  폭력과  보복 

      2)  재판  ;  법률과  정의  독점의  재현

      3)  망각의  지속  ;  아무  것도  하지  않음  -  “과거는  과거다.  과거를  잊자”

      4)  남아프리카  방법;  진실과  화해의  결합

      5)  제주인들의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어떻게  비극적인  과거의  유산을  넘고  있는

가?  우리는  무엇을  남겼는가?  평화=타인  포용.  처벌의  최소화  용서의  최대화.

6.  20세기의  제주  대  21세기의  제주  :  같음은  무엇이고  다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가.  제주의  변화,  전환,  모색의  해석과  의미 

        발전(번영),  평화(공존),  인권(생명)의  결합  매트릭스로서의  제주의  전환

        최근  제주의  3대변환이  보여주는  한국사회  전체,  그리고  세계에의  의미연관은  심대. 

이  3대변환은  한국사회의  최근  변화의  압축적  소우주. 

      1)  제주  4·3  특별법  --  인권(생명).  인권과  생명의  복원.  제주  정체성의  재생

      2)  제주  국제자유도시  --  발전(번영).  삶의  질  향상의  걸음.   

      3)  세계  평화의  섬  --  평화(공존).  생명과  번영의  전제로서의  평화와  안정

        ==>  한국,  그리고  세계  최초로  21세기  핵심  화두인  생명,  번영,  평화를  모두  알기지은 

첫  번째  사례.  한국을  선도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초유의  사례.  이  모든  변화가 

어떻게  10년  이내에  압축적으로  달성  가능했는가?  또  조건의  구비가  성공을  담보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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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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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제주x제주인의  정체성x시민권(성)과  지향  가치

      1)  지방  정체성과  시민권  (local  identity  and  citizenship)  :  제주도민으로서의  제주인. 

      2)  민족  정체성과  시민권  (national  identity  and  citizenship)  :  한국의  인권,  평화,  관광, 

휴양,  남북교류,  해양진출기지. 

      3)  지역  정체성과  시민권  (regional  identity  and  citizenship)  :  동아시아  시민.  동아시아 

교류,  연대,  평화  거점. 

      4)  세계  정체성과  시민권  (global  identity  and  citizenship)  :  세계  정신의  선도  기지로

서의  의미와  행동.  세계  평화의  섬(island  of  world  peace  -->  island  for  global  and 

regional  peace) 

    ***  제주인의  디아스포라(Jejuian  diaspora)의  의미  :  제주,  부산,  일본,  서울.... 

        ==>  탈냉전과  탈이념을  넘어  이제  제주의  핵심가치와  정체는  1)  다양성과  포용성,  2) 

소통과  대화,  그리고  3)  섞임과  소통,  통합과  융섭의  정체성과  철학을  보여주고 

있고,  또  그리해야.  대한민국  단일  시민권  속의,  동아시아시민이자  글로벌  시민으

로서의  다중정체성(multiple  identity)을  지향. 

    다.  동북아  질서  변화와  제주:  지역  변동의  초점?  --  동북아  지역의  3대  주요  시대  변화

와  제주의  지역적  위상

      1)  동북아시아  식민주의와  제주  :  고통,  전란,  군사대결의  초점. 

      2)  동북아시아  냉전과  제주  :  4·3과  한국전쟁  시의  제주의  고난.  학살  이후의  억압.  음

습과  위축.  가위눌림.  냉전의  세계  상징.

      3)  동북아시아  탈냉전과  제주  :  정상회의,  동아시아  및  남북  교류,  인권과  생명  집결  및 

연대 

        ==>  1)과  2)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는  동북아  전체  질서와  제주의  위상,  제주인들의  삶

은  밀접하게  맞물린다는  점.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  (위의  소  시기  제목들

이  한국의  식민지와  제주,  한국의  냉전과  제주,  한국의  탈냉전과  제주가  아닌  점

은  의미심장)  제주인인의  디아스포라가  생긴  것도  바로  동북아  질서  전체  변동과 

연결된  것.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하게  깨달아야하는  두  번  째  점은  동북아  질서 

변화와  한국  국가의  위상,  그리고  제주의  지방  위상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

니라는  점.  일치와  함께  일정한  불일치,  불균등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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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지역과  국가,  지방  사이의  불균등  발전과  진행,  이점을  인식하는  것  역시  매우  중

요.  국가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국민  일반이  받아야하는  국

가차원의  고난에  제주민들이  받아야했던  지방차원의  고난이  중첩.  동북아에서의 

지역위상에  직결. 

7.  21세기의  제주: 

    “4·3”에서  “동북아  평화  거점”으로  --  비전,  수준,  의미,  역할,  방법

(1)  비전과  역할로서의  동북아  평화거점

(2)  방법과  영역으로서의  동북아  평화거점 

가.  전제

      (1)  제국주의x식민주의  및  냉전시대의  동북아에서의  제주의  위상을  볼  때  21세기  평화

를  위한  제주의  위상과  역할은  동북아  평화  활동과  발전의  중요한  근거의  하나.  말

을  바꾸면  안보와  안정의  요체

      (2)  현재의  평화거점  수준:  회의,  포럼,  대화,  만남,  교류  중심의  평화거점  역할.  즉  몇

몇  평화상징들  및  평화연대  활동에  한정되어있다. 

그렇다면  이것들만으로  과연  실질적  정신적  평화거점이  될  수  있는가?  최소한  아래의  네 

가지  준거와  범주에서  동북아  평화  거점  역할을  수행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방법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어떻게  평화거점을  구축하고  확장하는가가  아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동북아  평화거점의  네  수준

      1)  정신과  영혼: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정신과  영혼의  가치와  이상을  보여주는  것.  제주 

4·3  평화공원은  그  점에서  20세기  냉전과  학살,  전쟁,  이데올로기의  현장을  보여주

는  세계  및  동북아  평화교육  현장으로  자리  매김되어야  한다.  인류와  동북아인,  한

국민들의  평화정신의  상징의  하나로  자리잡게  하자는  것이다.  평시  3만의  학살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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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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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과장이  아니기에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어  세계에  보여주고  교육하자는  것.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느냐는  우리가  앞선  두  시기,  즉  학살의  시기와  침묵의  시

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4·3평화공원은  제주의  동북아 

평화거점도시로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2)  기구와  활동,  담론과  실천

          두  번  째는  실질적  평화연구,  교육,  갈등해소  기능을  수행하는  것.  평화의  곳집역할을 

하는  것.  평화활동가들의  활동,  교육,  연구,  재교육,  생산의  중심으로  역할하는  것.  그

럴  때 

          (ㄱ)  한국과  동아시아,  세계의  많은  평화교육,  연구,  갈등관리센터를  유치하여  실질적

으로  연구하고  담론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  스위스의  제네바처럼  국제  및  지

역기구를  대거  유치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된다.  제주를  동북아의  스위

스로!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집행기구/동북아시아  공동체위원회,  동북아시아  의회(North 

East  Asian  Parliament),  동북아시아  난민  고등판무관실,  동북아시아  무역기구,  또

는  경제협력기구,  동북아시아  인권재판소,  동북아시아  인권위원회,  동북아시아  평

화센터,  동북아  갈등관리센터,  동북아시아  군축센터,  동북아시아  이주노동자센터, 

동북아시아  여성인권센터,  동북아시아  역사재단,  동북아시아  비핵지대기구,  동북

아시아  환경기구,  동북아시아  NGO  연합회의.  각종  유엔  및  국제기구의  동북아 

지부  및  한국  지부  유치. 

          (ㄴ)  한국어,  영어와  동북아  각국  언어를  통한  제주  평화연구,  세계  갈등해소  사례연

구  시리즈,  저널  출간.  그를  위한  세계적  평화연구가와  활동가들이  제주에  상주

하며  연구x활동할  수  있는  방법도  고려해  볼만. 

          (ㄷ)  동북아  평화  대학  또는  평화대학원,  동아시아대학  또는  동아시아학  대학원의  설

치도  고려해  볼만.  제주대학의  단과대학이나  전문대학원으로,  또는  중앙정부와 

제주도의  지원을  받는  독립된  대학이나  전문대학원으로  설치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ㄹ)  남북교류센터를  통한  남북회담과  교류의  중심지  역할  -  이미  충분히  제안되고 

검토되고  있는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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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안보와  평화  개념의  지평  확장과  변화:  국가안보와  지역안보,  동북아  안보와  한국안보

          국가안보와  지역안보(regional  security),  공통안보(common  security)  개념과  현상의 

등장에  따른  제주위상의  변화.  오늘날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가안보  개념

은  거의  의미가  없다.  유럽안보,  지역안보  개념과  차원에  이미  포괄되고  흡수되어있

는  상태.  동북아와  한국에서  이러한  상태를  상정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  중국과  일본

을  포함,  아직까지  유럽  국가들이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를  넘어  공동안보

(common  security)나  지역안보(regional  security)를,  또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유용한 

채널로  인정하고  수용하였던  유럽안보(European  Security)의  개념과  같은  지역단위 

안보구상,  즉  동북아  안보(North  East  Asian  Security)의  구상이  이곳  역내  국가들에게

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국가안보,  즉  중국안보,  일본안보,  한국안보,  북한안

보,  대만안보의  개념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  안보의  확보  없이는  한국안

보,  일본안보,  중국안보의  확보도  어렵다는  발상의  전환,    요컨대  중국,  일본,  한국, 

북한,  대만이  모두  동북아  안보의  확보  없이는  국가안보도  어렵다는  인식에  도달해야

하나  여전히  역내갈등요인을  상정한  국가안보  관념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

아지역에서  이것은  오늘의  한반도  전쟁위기에서  볼  수  있듯  너무도  절박하고  현실적

인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  장기적으로  동북아  안보,  또는  지역안보와  공통안보  개

념과  차원으로  발전해  나가야  국가안보,  지방안보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  때  비로소 

제주는  한국안보를  넘어  동북아  안보,  공통안보의  거점역할을  명실상부하게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러한  발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심역할을  수행해야하는  것도  하나의  과

제라고  할  수  있다.   

      4)  사람과  상찬,  기념:  명예제주도민,  제주평화상,  제주평화대회(회의,  축전)

        (ㄱ)  사람처럼  중요한  홍보채널은  없다.  명예제주도민  위촉을  통해  많은  비제주외국인 

및  한국인,  타지거주  제주인을  제주와  연결시키는  것.  제주와  인연을  가졌던  세계 

및  지역,  국가,  인류  평화에  기여한  인사들을  선정하여  명예도민  위촉.  이곳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던  사람들.  제주특별법,  평화의  섬  제정...  등에  기여한  사람,  4·3

정신의  실현....  제주  명예를  높인  사람들...,  요컨대  제주  정신,  4·3,  제주  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제주와  인연을  맺은  한국과  외국의  활동가,  지식인,  정치인,  문화

인,  연예인,  정책가들을  선정하여  제주와의  일체감을  높여주고  홍보도우미로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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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 

215

용.  또  ‘명예도민의  날’을  제정하여  단체  초청을  통한  연대증진.  한국과  동북

아,  전  세계에  제주  명예  도민들이  살면서  제주  평화  정신을  선양할  것. 

        (ㄴ)  동북아  최고의  평화상으로서의  제주평화상  선정과  시상.  평화  실천가,  운동가,  인

권,  환경,  빈곤퇴치,  소수자  운동가와  기구,  단체,  나라,  사건  .....  등을  포함한 

“아,  저사람!”,  “아,  저  운동!”,  “아,  저  단체!”,  “아  저  정신!”,  “아,  저 

사건!”,  “그래  제주평화상  받을  자격  충분해!”  세계인들이  이렇게  말  할  수  있

는  사람과  운동과  단체를  세계,  동북아,  한국으로부터  선정하여  시상하자.  크지 

않으나  가장  아름답고  권위있는  상으로  키우자. 

        (ㄷ)  진정으로  평화를  고민하고  운동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평화의  난장을 

자주  꾸리고  제공하자.  세계  최고의  평화  페스티발로서의  제주  평화축전,  제주  평

화대회를  개최.  정책영역으로서의  평화를  넘는,  삶으로서의  평화를  누리도록  해줘

보자.  그럴  때  평화벨트의  구축  및  연대  기능  및  평화지대  구축의  거점  기능 

“동시”  가능.  오키나와,  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  광주,  거창,  부산-마산,  인천, 

난징,  베이징  등을  연결하는  지역  및  국가별  지방적  평화(인권)거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기능  수행  필요.

8.  맺음말에  대신하여 

    1)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고한  결과  우리는  네트워크로서의  제주,  거점으로서의  제

주,  교량으로서의  제주,  지방으로서의  제주,  중심으로서의  제주를  “모두  사고할  수  있

는”  지점에  까지  다다랐다.  이것이야말로  4·3을  잇고[정신]  또  넘는[유산]  가장  소중한 

제주  재발견의  작업이요  재구성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지

혜를  통해  우리와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와  세계에  함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2)  제주  지정학(regional  location)의  비용과  효과:  이제  “비용으로서의  제주  지정학”과 

“효과로서의  제주  지정학”을  비교하여  합리적으로  선택해야하는  계기들이  자주  대

두하고  있다.  내부  토론과  합의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3)  부분주의(partialism)와  가분성(divisibility)의  문제.  앞서  검토했듯  이제  제주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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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과  위상은  나누어서  접근해야.  부분의  총합으로서의  제주,  여러  가치의  종합으로서의 

제주를  추구. 

    4)  그러나  두  가지  내부  분화는  조심하고  지양해야.  먼저  우리  내부를  보자.  갈림과  분

화의  단초.  인권,  연대,  생명은  4·3단체,  4·3  시기,  4·3  관련  사업,  과거  프로젝트이고, 

발전,  번영은  비(非)  4·3  시기  및  단체,  관련  사업,  미래프로젝트인가?  둘은  왜  만나야

하고,  왜  하나여야  하는가? 

    5)  끝으로  제주  평화센터에서의  회의와  중산간지역의  삶,  제주의  글로벌화와  어느  마을에

서의  삶이  근대와  전통,  누림과  고난으로  유리x단절되는  자기충돌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됨.  (한국과  세계는  물론)  무엇보다  제주인들의  삶에  기여하는  인권,  발전,  평화일  수 

있느냐가  핵심  동력과  가치의  하나가  되어야. 

    6)  결국  “제주는  한국,  동북아,  세계의  냉전을  넘어  21세기로  나아가는  모범이자  축도이

자  모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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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 

217

1.‘순이  삼촌’을  집필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답)  나의  문학적  출발은  정치색이  배제된  이른바  순수문학으로부터였다.  대중의  삶은 

정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문단에서는  정치색이  있는  작품은 

비문학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  역시  습작  시절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그러

나  막상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서  문단에  데뷔하고  나니까,  내  고향  제주도가  겪은  4·3수

난의  고통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순수문학을  버리고  참여문학(리얼리즘의  문학)으로  방향전환하게  되었다.  4·3은  마치  원죄

처럼  내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고,  나  역시  4·3의  생존자로서  다른  도민들과  함께  4·3의  트

라우마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2.「순이  삼촌」의  내용은  70년대에  무서운  금기여서  거기에  도전하기

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답)  70년대는  군부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군경  토벌대가  저지른  양민  대량학살이란  악

행을  고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펜대를  쥔  작가였기  때문에 

[

]

북촌문답

현  기  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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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그  사건에  대해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에  떨며  썼다. 

나  자신은  7,  8세  때  겪은  사건이라  증언청취가  필요했는데,  증언자들도  두려움에  떨면서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없이  눈물을  지으며  증언하던  그 

분들  앞에서  나  자신도  눈물을  흘렸고,  그  증언들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  때도  울면서  인물

들을  형상화해  나갔다.

3.‘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북촌마을  학살사건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답)  북촌  마을은  한날  한시에  4백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그래서  4·3수난의  상징

처럼  되어  있었다.  수난의  비극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마을을  무대로  삼았다. 

대학생  때  어느  여성잡지에서  북촌을  무남촌이라고  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북촌의  참사를  통해  4·3을  조명해  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의  향리인  노형리가  더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보다  효과적인  문학적  전략을  위해서  한날  한시에  몰사죽음한 

북촌을  무대로  선택하게  되었다.

4.  4·3사건과  관련한  어린시절의  경험담을  듣고  싶다.

(답)  7,  8세의  어린  아이었던  나는  그  참혹한  사건의  극히  일부  밖에  모르는데,  내  눈에 

비친  수난의  양상은  나의  자전적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족

은  사건  초기에  노형리에서  성내로  피란  갔기  때문에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으로  130여  개  부락이  불탈  때  여러  날  동안  밤에  방홧불이  구름에  벌겋게  번져 

있는  광경,  효수된  산사람들의  머리들이  관덕정  광장  구석에  뒹굴고  있는  광경이  생각난다. 

5.  60여  년  전의  사건인  4·3은  이제  역사가  되어  버렸다.  작가가  역사

를  다룰  때  태도나  방식에  있어서  역사가와  어떻게  달라야  하나?

(답)  역사가가  과학적으로  기술한다고  하지만,  그  과학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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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 

219

종  있는  것  같다.  시저나  나폴레옹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에  역사가가  자신도  모르게  이끌

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민중의  시대에  영웅사관,  왕조사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도  사실

이다.  서구의  어느  저명한  역사가는  독재자를  연구하다보면  몰입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카리스마에  홀리게  된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그러한  정신에서  나온  역사란  과학이  아니라 

편견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도  탐구  대상에  몰입하지  않으면  형상화하기  어렵지

만,  그러나  시각이  판이하다.  영웅사관이나  왕조사관을  배격하고,  독재자나  왕이  일으키는 

전쟁과  탄압에  희생물이  되는  민중을  옹호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인  것이다.  그래서  80년대 

나타난  역사소설들은  그  동안  역사가들이  등한했던  민중  탐구를  하게  된다.  나의  경우,  방

성칠란ㆍ이재수란과  항일잠녀항쟁은  역사계의  조명을  별로  받지  못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설에서  다룰  때  감히  역사가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이란  자료들을  해석하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어느 

상황을  재현하는  것일  텐데,  그러나  인간  정서가  배제된  메마른  자료들과  이론만으로는  그 

상황을  제대로  해명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자료들을  인간  삶,  그  피와  살의 

문맥  속에  넣어  보아야  상황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예컨대  4ㆍ3봉기의  원인을  놓고  따져 

볼  때,  매우  절실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역사가가  놓치기  쉬운  것이  지도자  김달

삼  개인의  내면  정서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학병에  끌려가기  직전,  일본  어느  중학교(5년

제)에서  교련  대대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악독하기  짝이  없는  교관을  전교생  앞에서  제압

하여  엎드려  뻘뻘  기어가게  만들었고,  46년  대구사태  때는    부모가  포목  장사를  하고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그  시위에  참가해서  사살당한  의과대학  여대생의  시신을  어깨에  메

고  시위대의  선두에  선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이것은  김달삼의  중학교  후배인  신

학자  고  정하은  박사가  나에게  들려준  증언이다.  게다가  김달삼은  본명이  이승진으로  40여 

년  전  민란의  지도자인  이재수와  한  고장  한  집안사람이다.  산방산  밑,  고부  이씨  집안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격정적인  성격,  그리고  이재수의  투쟁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자

부심  같은  것들이  모험주의의  불쏘시개가  되지  안했나  하는  생각이다.  즉  역사가  간과하는 

것을  문학이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6.  영향  받은  작가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답)  중학교  시절에는  김동리ㆍ황순원ㆍ오영수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글쓰기를  배웠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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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교  시절에는  싸르트르ㆍ까뮈의  실존주의  문학을  좋아했고,  대학에  가서는  제임스  조이스ㆍ

윌리엄    포크너로부터  ‘의식의  흐름’의  테크닉을  배웠고,  또  카프카도  좋아했다.  등단  이

후  문학적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즉  리얼리즘을  발견하면서  자연히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독자는  나의  작품들에서  앞에  언급한  작가들의  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내적  증거가  발견될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에  눈뜨기  시작한  뒤

로는  몇몇  특정한  작가들보다는  서구를  포함한  동시대의  많은  리얼리스트들로부터  두루  영

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7.  작가의  약점ㆍ상처·고통이  작가의  문체를  태어나게  한다고  하는데......

(답)  나에게도  상처가  있다.  유년시절에  겪었던  4·3의  상처가  그것이다.  나의  상처는  트

라우마,  즉  후유증으로서의  상처이다.  그  상처는  오랫동안  말이  어눌한  실어증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나는  말더듬게  만드는  내면의  억압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나의  문체

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일련의  나의4·3소설들은  수만  원혼에  대한  진혼굿이자,  나  자신의 

내면  억압을  해방시키는  행위였다.    「순이  삼촌」  발간  직후  나는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

문을  당했다.  4·3은  역대  독재  정권들이  일절  발설하지  못하게  묶어놓은  금기의  영역이었

기  때문이다.  3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4·3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이고,  고문  받는  나는  마지막  4·3  희생자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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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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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한국은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만물상이다.  역사의  전환기에  단  한  번도  제대로  구시대의 

과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다보니,  각  시대의  과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쌓이게  되었다. 

과거청산이란  어느  나라에서나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식민지배와  분단과  전쟁과  학

살과  군사독재  시기의  국가폭력이  낳은  온갖  문제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한국의  경우,  과거

청산은  더욱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1987년의  6월민주항쟁  이후  비록  제한

된  성격이었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과거청산  작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과거청산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권위주의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  사법살인,  의문사,  강제구금과  고문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가져  온 

국가폭력이  겹쳐진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서는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성장,  세계

사적  차원에서의  냉전의  붕괴1)에  힘입어  과거청산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최초의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에  이어,  실질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김대중  정권,  그리

1)  불행히도  한반도에서는  냉전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이  냉전은  남과  북의  대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  남측  사회에서는  민주화와  더불어  이념갈등이  가시화되었고,  이는  흔히  남남갈등이라  불리운다.

[

]

한국현대사와  과거청산의  전개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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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과거청산  작업은  3개의  정권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의문사

위원회,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수많은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거리에서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을  요구하던  사건  관련자나  시민운동가,  전문가들이  위원회의  일선에 

배치되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15년여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걸친  한국의  과거청산작업은  수많은  논란을  낳았고,  한국

사회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과는  별도로,  내부의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기억의  내전

을  치렀다.  과거청산은  그  나라의  민주화의  진척  정도와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상호작용을 

미친다는  점에서  빠른  시일  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한국에서의  과거청산의 

경험은  과거청산,  또는  이행기의  정의  확립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과거청산’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이행기의  정

의(transitional  justice)’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해방  후에는  일제잔재 

청산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1960년  4월혁명  이후에는  ‘양민’학살  진상  규명요구

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1979년  박정희  피살  직후에는  유신잔재  청산이,  1988년  여소야

대의  정치상황에서는  5공2)  청산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요

구들은  모두  좌절되거나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시대의  전환기에  가장  생생한  문제들은  먼지

를  덮어쓰고  ‘과거’라는  보따리  속에  한꺼번에  싸인  채  구석에  밀려나  있게  되었다. 

과거청산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렇게  각각의  역사적  이행기에  첨예하고  뜨

거운  문제였던  과제들이  제  때에  해결되지  못하고  누적되면서  뭉뚱그려  ‘과거’라  불리게 

된  불행한  역사의  결과라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도대체  과거란  어디

부터  어디까지가  과거이고,  과거란  것이  ‘청산’될  수  있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많은  문제

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과거청산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오늘’의  문제도  산적

해  있고  다른  나라들은  ‘미래’로  나아가는데  좌파세력이  득세한  한국만  과거에  매달리고 

있다며  트집을  잡곤  했다. 

그러나  과거청산의  문제는  한국의  수구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들은  미래

로  나아가는데  한국만  과거에  발목을  잡혀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냉전의  붕괴  이후  전

세계는  바야흐로  과거청산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냉전  시대에는  동서  양진영의 

대결  속에서  각각  자기  진영  내에서의  국제적  지지  -  또는  묵인  -  를  기반으로  반공독재는 

2)  전두환의  집권기간을  흔히  5공화국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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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223

반공독재대로,  공산독재는  공산독재대로  각각  자국민을  상대로  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그

러나  냉전의  붕괴로  구공산국가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소련과  동구  각국에서는  공산정권 

시절  비밀경찰  등에  의한  국가폭력과  인권침해가  남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

로  제기되었다.  또한  극우반공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나라에서도  민주화가  확산되면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과거청산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는  과거청산  문제가  전후  보상의  형태로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한국의  경우는  국제관계에서의  과거청산과  국내의  과거청산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시기와  관련해서는  국내적으로는  친일  청산의  문제가  있

는가  하면,  강제  연행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원폭  문제처럼  주로  일본  정부가  책임

져야  할  문제가  있다.  해방  후에도  제주4·3사건3)이나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  군사독

재  시절의  의문사처럼  한국  정부가  기본적인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있고,  또  노근리  사

건4)처럼  미국  정부가  책임질  일도  있다.  한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기간  중에  발생한  베

트남  민간인  학살은  다른  국가,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  피해자의  역할에  익숙했던  한국 

국가와  국민들에게  곤혹스러운  책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5)  또한  한국전쟁  기간  중  남과 

3)  4·3  사건:  남한  단독정부  수립  기도에  반대하여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중봉기이다.  제주

도에서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이후  소요가  발생하였는데,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이
듬해  4월  3일을  기해  무장봉기했고,  이승만  정권은  이를  가혹하게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최소 
25,000-30,000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인  1999년  제정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따라  2000년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
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
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http://www.jeju43.go.kr/index.php)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2000년  8월  28일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2003년  12월  보고서를  간행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하였다.  2008년  60주년을  맞아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이  건립되었
다.

4)  노근리  사건:  노근리  사건(老斤里事件)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26~29일  충북  영동군  주곡·임계

리  주민들이  황간면  노근리  인근  경부선  철로와  수로·쌍굴에서  미군  항공기의  폭격과  기관총  등으로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약  3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해자들과  국내  언론의  진
상규명  요구가  있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9년  9월  AP통신의  보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미  양국의  합동지상조사를  거쳐  2001년  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유감  -  사과가  아니라  -  을  표명
했다.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
로  하는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2006년  3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
사보고서를  발간했다.

5)  1965년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후  1973년  철수  때까지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사건  이  약  90  여  건  발생하여  8천  -  9천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
다.  전쟁  종료  이후  베트남정부는  이에  대한  기초조사를  하였고,  각  마을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오랜  기간  묻혀  온  이  사건은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건에  대해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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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북이  서로  상대방  지역을  점령했을  때  발생한  민간인학살은  통일  과정이나  통일  후에  심각

한  문제로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 

2.  과거청산의  주요과제

한국  국내의  과거청산으로  한정해서  살펴본다면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은  친일잔재  청

산,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군사독재  시기의  국가폭력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친일잔재  청산  문제

해방  직후  일본제국주의  잔재  청산은  너무나  당연하게  제기되는  문제였다.  일제의  지배

를  벗어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때  독립운동에  종사해  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친일파

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분단된  남쪽에서는  이상한  일

이  벌어졌다.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질서유지라는  명목  하에  경찰,  관료  등  친일분자들을 

그대로  현직에  복무케  한  것이다.  미국은  이들이  친일(pro-Jap)한  것이  아니라  직분에  충실

(pro-job)했을  뿐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미국의  보호는  친일

파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더구나  친일파들의  지위와  권력은  일본

인들  밑에서보다  더  제고되었다.  분단은  민족의  분단이었지만,  해방은  친일파들의  해방이 

되고  말았다.  친일파들은  격렬한  좌우대립  현장에서  일제의  주구,  민족의  반역자에서  반공

의  선봉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이들은  이승만  아래  결집하여  남한단정을  추진했다. 

1948년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좌파와  남북협상파는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우파 

인사들로  구성되었지만,  국민들의  여망인  친일파  청산,  즉  식민지  지배의  인적  청산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법률  3호로  제정했고,  이에  의

거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

자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특위는  좌우대립이  심각한  상황에서  경찰조직의  동요를  가져오게 

된다면서  반민특위  활동을  사사건건  견제했다.  1949년  5월  이승만  정권은  국회  내에서  반

하는  한국시민들의  성금으로  2003년  뚜이호아에  한베평화공원이  건립되었다.  인권평화단체들은  베트남
전  진실위원회를  만들어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벌였고,  이  운동은  현재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원회(http://www.peacemuseum.or.kr)로  발전하여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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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의  제정과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해온  소장파  국회의원  13명을  남조선로동당의 

프락치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고,  이어  6월  6일에는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습격하

여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6월  29일에는  친일  청산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인  김구가  친일파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그리고  김구  암살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친일파들의  친일청산  무력화라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사건들이다.  이로써 

신생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청산은  좌절되었다.  아니,  단순히  친일청산의  실패나  좌절이라 

하면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  될  수  있다.  친일파들이  실권을  장악한  대한민국에서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고  하던  양심적인  인사들이  친일파에  의해  거꾸로  청산당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와해나  백범  김구의  암살,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군사독

재  시절  고문과  간첩조작의  주역들이  모두  친일파나  그들이  육성한  세력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6) 

2)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1948년  제주  4ㆍ3사건,  같은  해  10월  국군  14연대의  여수ㆍ순천  ‘반란’사건7)  등을  거

치면서  민간인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본격화되었다.  한국정부는  과거  일제의  사상보

국연맹과  같이  좌익  출신  전향자들을  보도연맹이란  조직을  통해  관리했는데,  이들  중  약10

만-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쟁  발발  직후에  군경  등에  의해  불법처형되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좌익출신  전향자들을  어떻게  취급했

는지를  잘  보여준다.  남한군의  퇴각  이후  처형당한  좌익  인사들의  가족들이  보복  학살에 

나서는  경우도  자주  있었는데  남한  측  통계에  따르면  그  수는  13만이라  한다.  한편  인천상

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뒤에는  돌아온  우익들이  다시  좌익  가족들에  대한  보복학살을 

자행했다.  또한  지리산  등  후방  지역에서도  공비토벌이라는  명목  하에  곳곳에서  군ㆍ경ㆍ 

6)  친일파와  고문: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韓洪九,  󰡔韓洪九の韓國現代史󰡕  1,  2003,  平凡社,  pp.  114-124

를  참조할  것.

7)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20일  발생한  국군  14연대의  항명사건으로  정부의  강경진압과

정에서  ‘반란’이란  이름을  얻었다.  전남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는  제주  4·3봉기의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좌파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를 
조직하며  여수를  장악하고  순천에까지  진출했다.  정부는  10월  22일  여수ㆍ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
하고  미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강경진압에  나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14연대  생존자들은  지리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가  되어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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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무장단체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벌어졌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한 

짧은  기간  동안  북한  측  주장에  의하면  모두  17만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거세게  일어났으나,  5

ㆍ16군사쿠데타로  인하여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대거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3)  군사독재  시기의  국가폭력

민주주의를  향한  꿈을  짓밟고  출발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곧바로  중앙정보부(KCIA)를  창

설하였다.  중앙정보부(1980년대  이후에는  국가안전기획부,  약칭  안기부로  개명)는  박정희에

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국가  속의  국가로  군림하면서  불법연행, 

불법감금,  고문,  용공조작,  불법사찰과  도청,  감시,  언론과  노동통제,  정치개입,  사법통제  등 

국정  전반과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폭력의  중심기구로  작

동했다.  중앙정보부  이외에  국군보안사령부와  치안본부  대공분실  등  대공경찰  역시  군사독

재  정권  유지의  첨병으로서  국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국가폭력의  주요  기구였다.

군사정권  시기의  집권세력은  해방  전에  일본군ㆍ만주군  장교  출신  등  자신이  친일경력이 

있거나,  직접적인  친일경력은  없다하더라도  일본이  키워낸  군국소년들이었다.  특히  초창기 

중앙정보부,  특무대(보안사의  전신)  등에는  일제시절  고등경찰이나  헌병보조원으로  독립운

동가들을  고문하던  자들이  다수  남아있었다고  한다.  군사독재  집권세력의  친일문제가  갖는 

심각성은  그들의  해방  이전의  행적보다도,  그들의  발전  전략  및  국가운영  방식이  1930년대

의  식민지  조선  또는  만주국의  전략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북

한과  대치하는  분단상황  속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정보부 

등  폭력기구에  의존하여  강력한  통제  속에  병영국가를  만들어  갔다.  그  과정은  오늘날  과

거청산의  대상이  되는  국가폭력  사건을  연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1972년  이른바  ‘유신’  친위쿠데타  이전에도  1차  인민혁명당 

사건8),  동백림공작단  사건9),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10)  등  많은  공안사건을  만들어냈지만, 

8)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박정희  정권  시기의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1964

년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한창일  때  발생한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는  서울지검  공안검사들이  증거불
충분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여  큰  파문이  일었으나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당직검사가  기소를  강행
했다.  10년  뒤인  1974년  발생한  2차  사건  역시  반유신데모가  한창일  때  학생  조직  민청학련의  배후에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는  명목  하에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을  체포하였다.  중앙정보부의  고문수사와  군법회의  사형  판결을  거쳐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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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에는  국가폭력이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악명  높은  유신체제  하에서 

군사독재  정권은  유신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조차  영장  없이  체포하여  군사법정에  세웠다. 

언론사에는  중앙정보부  등  각종  공안기구의  기관원들이  상주하다시피  했고,  학원에는  시위 

예방과  주동자  검거를  위해  전투경찰에  주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이른

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  8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공포정

치가  민중들의  저항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박정

희  군사독재정권은  그  대응방안을  놓고  내분에  빠져  결국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사살로  종식을  고하였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고  민주주의가  온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육성된  기득권층의  핵심인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일련의  쿠데타에  이어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자행하면서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재편에  성공했다.  박정희  정권  시

절의  국가폭력  기구들은  내부의  개편과  상호  권력관계의  변화는  있었을지언정  그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은  채  폭압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여러  개의  신문사와  방송

사의  문을  닫고  1천  여  명의  언론인을  해직시킨  언론통폐합,  불량배  단속이란  명목  하에 

노동운동가  등  체제  저항인사나  무고한  수많은  시민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낸  삼청교육대  사

건,  강제징집된  학생들을  보안사의  프락치로  사용하여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다 

형이  확정된  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흔히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데,  학생운동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전형적인  공안조작사건이다.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
였다.  일본어로는  韓洪九,  「朴正熙の法による殺人  -  人民革命黨  事件,  民靑學聯  事件,  人民革命黨  再建
委員會  事件」,  高橋哲哉  外  編,  󰡔法と暴力の記憶  -  東 アジアの歷史經驗󰡕,  2007,  東京大學出版會를  참
조할  것. 

9)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유럽에  거주하던  한국유학생,  지식인들이  호기심  또는 

북한에  있는  가족ㆍ친지  등의  소식을  알기  위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비밀리에  방문하거나  관계
자들을  만나는  일이  있었는데  중앙정보부는  이를  대규모  공안사건으로  꾸몄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독일ㆍ프랑스  등지에서  관련자들을  불법연행하여  국제적인  물의를  빚었다.  박정희  정부는  독일ㆍ프랑
스  등의  압력  때문에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  유럽에서  활동
하는  대표적인  한인예술가들이  이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10)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승ㆍ서준식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이  일어나는  등    한국의  공안기

관,  특히  보안사는  재일동포  관련  간첩사건을  많이  적발하였다고  발표했다.  공산당이  합법화되어  있
고  또  북한의  교민조직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에서  나서  자란  재
일동포들은  조작간첩  사건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건진상규명위원회가  보안사
가  조사한  73건의  재일동포  관련  간첩  사건  중  극히  일부를  재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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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6명의  죽음을  가져온  녹화사업  등을  자행했다.11)  군사정권의  폭력성이  강화되고  보안사,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중앙정보부가  1981년  명칭을  변경),  대공경찰  등의  폭력성이  강화

되면서,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들의  의문사도  빈발12)했고,  조작의혹이  제기되는  간첩사건

이나  공안사건  역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런  용공조작  사건은  불법연행,  수십  일간의 

불법  감금,  고문과  가혹행위  등을  수반하였다.  또한  안기부  등의  통제를  받는  언론은  공안

기구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기기에  바빴고,  법원  역시  고문에  의해  조작된  공안사건에  대해 

검사의  구형대로  판결하여  정찰제  판결이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13)

3.  민주화와  과거사  정리

사실  ‘과거사’란  이름이  붙은  ‘오래된’  문제들은  한  때는  자기  시대의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과거사’는  처음부터  ‘과거사’가  아니라  한  때는  펄펄  끓는  현

대사였던  것이다.  한  예로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은  바로  1980년대의  최고의  과제인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궤도에  들어서면서 

이행기의  정의를  확립하는  문제는  사회의  주된  과제로  부각되었다.  민주화의  진전은  과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입을  열어  증언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14)  국회의  광주청

11)  녹화사업:  군사독재  정권은  학원가의  반정부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학생운동에  열성적인  학생들을  군

대에  강제입대시켰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보안사령부는  학생운동  전력을  지닌  강제징집자  및  정상
입대자들을  대상으로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좌경오염  방지’라는  명목  하에  학생운동 
활동사항과  조직체계  등을  조사하고(개인별  심사),  대상자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도록  하는  ‘순화’ 
업무를  진행하였으며,  ‘순화’된  것으로  판단된  병사들에게  출신  대학교이  학원첩보를  수집해  올  것
을  요구하는  ‘활용’,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였는데  이를  녹화사업이라  불렀다.  이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을  느낀  대상자가  자살하는  등  직간접으로  6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2권,  2007,  pp.7-8)

12)  의문사: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의문사가 

많이  발생하였다.  의문사  유가족들의  400여  일에  걸친  농성에  따라  1999년  1월  제정된  「의문사진상규
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0년  10월  출범하였다.  1기  위원회
는  모두  83건을  대상으로  조사에  착수하여  19건을  의문사로  인정하였으나  많은  사건은  미해결로  남았
다.  이  때문에  2기  위원회가  63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11건을  새로이  의문사로  인정했다.  1기  위
원회  보고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4  (1차:  2000.10-2002.10),  2003,  2기  위원회  보고서는 
󰡔진실을  향한  험난한  여정: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차󰡕  1-3,  2004가  있다.

13)  정찰제  판결:  유신정권  이후  사법부가  공안사건,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구형량을  백화점의 

정찰제처럼  그대로  받아들여  판결하게  된  것을  비꼬아서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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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회,  5공비리  청문회  등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아온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와  한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토해냈다.  한국이  민주화의  첫  발을  뗀지  얼마 

후인  1989년  가을부터  동구의  여러  나라에서  공산체제가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내적,  외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면서  그  동안  억눌렸던  온갖  문제들이  터져  나왔고,  국회와 

정부는  이런  요구를  일정하게  수용하여  입법화,  제도화해  나갔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의  출범,  그리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에  이어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출범으로  집권세력  내에  과거의  국가폭력과  직ㆍ간접으로  연결된  세력이나  개인은 

점점  사라져갔고,  제한된  범위이지만  과거청산을  위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과거청산 

관련  주요  법률의  목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식민지배  이전과  식민지배  관련법

    △  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1993.06.11)

    △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4.03.05)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2004.03.05)

    △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2004.03.22)

    △  한·일  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2005.01.14)

    △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

    △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  (2007.10.17)

    △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2007.12.10)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관련법

    △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1996.01.05)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0.01.12)

    △  노근리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4.03.05)

 

○  국가폭력  및  인권침해  관련법

    △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1990.08.06)

    △  헌정질서파괴범죄의공소시표에관한특례법(1995.12.21)

    △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12.21) 

1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현대사의  성영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것을  목표로  문화방송(MBC)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  간에  걸쳐  모두  100회  방영한  현대사  다큐멘터리.  민간인학살,  친일파,  국가보안법, 
중앙정보부의  각종  용공조작  사건,  녹화사업  등  극히  민감한  주제들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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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  5·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2002.01.26) 

    △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2000.01.15)

    △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2000.01.12)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2001.07.24) 

    △  삼청교육피해자의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  (2004.01.29)

    △  군의문사진상규명등에대한특별법(2005.07.29)

○  포괄적  과거청산  관련법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2005.05.31)

위의  법에  근거하여  수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국의  과거청산  작업이  원활히  진행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구시대와의  철저한  단

절에  기초하여  진행된  것이  아니라,  민주화를  추구했던  정치세력이  끊임없이  구지배세력에 

포섭되거나  타협을  하면서  진행되었다.  민주화의  이런  한계는  시민운동,  민중운동  차원의 

과거청산  요구가  국가에  의해  제도화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은  한  때  민주화를 

주장했으나  과거사와  관련해서는  청산  대상인  구지배세력과의  타협으로  인해  집권한  상태

에서  민중의  요구에  의해  과거청산에  나서게  된  정권이  갖는  태생적  한계였다. 

한  예로  김영삼은  광주학살의  책임자들이  만든  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집권했는데,  그는 

광주문제의  처리에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희생하는  대신,  사면을  전제로  한  성급한  처벌,  그

리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아닌  보상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성찰이  사

라진  광주에서  학살은  마치  소수의  신군부세력만이  자행한  것처럼  축소되었다.  광주의  학

살을  은폐하고  학살자들을  찬양한  언론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사라졌고,  80년대  민주화운

동의  원동력이었던  광주는  이제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이나  관련자들만의  광주로  축소되었

다. 

광주의  과거사  진상규명과  회복의  정의  실현은  매우  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  작

업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동안  국가에  의해  폭도로  매도되던  사람들이  민주화운

동  국가유공자로  포상을  받고,  폭도를  ‘진압’했다고  훈장을  받은  자들이  감옥을  가고,  희

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이  주어진  현실을  보면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등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  역시  해원의  꿈을  갖게  되었다.  똑같은  국가폭력의  피

해자인데,  광주  문제의  진전을  보면서  수십  년  간  억눌려  온  자신들의  원한과  피해를  널리 

알리고  배상을  받을  기회를  꿈꾸게  된  것이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많은  돈을  풀어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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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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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다.  정권의  주도세력들은  이로써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구 

지배세력과  야합을  통해  집권하게  된  자신들이  광주의  책임자들을  처벌함으로써  과거의  잘

못으로부터  자유러워지고,  이를  통해  과거사  정리를  마무리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  문제의  처리는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과거사  문제  해결의  기나긴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역시  처음부터  심각한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들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  법이  대상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의  시기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당시  김대중  정권은  5·16군사반란의  주역인  김종필과의  제휴를  통해  탄생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대중  정권은  김종필이  주도한  5·16군사반란의  반민주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껴가고  김종필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1969년의  3선개헌에  대한  반대

를  민주화운동의  기점으로  삼았다. 

과거사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에  국고  1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보수층의  환심을  사

야했던  김대중  정권에게  박정희는  군사독재와  인권탄압의  책임자가  아니라  기념해야  할  대

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김대중  정권이  2000년  10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것은  정권이  원해서가  아니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가족들이  국회  앞

에서  무려  400여일이  넘게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한  결과일  뿐이었다.  어렵게  군사독재  정권 

시기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규명의  첫발을  떼었지만,  길은  험난했다.  의문사위원회에  주어

진  조사권한은  미약했고,  민주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지만,  과거  공안기관에서  민주

인사들을  불법감금하고  고문을  자행하거나  지시한  자들은  여전히  현직에  눌러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군사독재의  통제를  벗어난  언론,  특히  방송은  과거사  진실규명과  원상회복의  정의

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

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대표되는  일련의  역사관련  프로그램은  친일파  문제에

서부터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사건  및  각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인혁당  사

건,  조작간첩  사건  등  군사독재  시절의  인권침해  등  과거청산과  관련된  주제들을  광범위하

게  다루었다.  이들  프로그램은  언론사의  취재력과  인력을  바탕으로  개별  사학자들이  접근

하기  힘든  자료와  증언자들을  발굴하고  이를  공중파를  통해  방영함으로써,  이런  사건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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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대중들이나,  그저  막연하게  사건의  이름  정도나  들어본  대중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사건의  현재적  의미와  해결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1980년대  땡전  뉴스15)

나  내보낸다는  비아냥을  듣던  방송이  이런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와  더불어  언

론사에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이들  노조가  단지  언론  종사자들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언론과  방송의  공영성을  위해  투쟁해  온  결과였다.  다만  소유구조의 

공공성이  그래도  보장되어  있는  MBC나  KBS에서는  괄목한  성과가  나온  반면,  사주의  사적 

지배가  강력한  주요  신문사의  경우  대체로  과거청산  문제에  소극적  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4.  노무현  정권과  과거청산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라는  구세력에  전혀  빚진  것이  없는  인물이  당선된  것

은  과거청산을  위한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

기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  문제,  노동문제에  대한  정권의  보수적인  태

도,  양극화  심화  등으로  인해  정권을  지지했던  민주개혁  성향의  대중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가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은  오히려  보수적인  정책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세

력은  체질적으로  다른  노무현  정권의  출현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2004년  3월의  탄핵  사태는  의회를  장악한  기득권  세력이  노무현  정권을  출밤  초기에  조

기퇴진시키려는  의도로  자행한  것이었다.  탄핵사태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본질은  ‘과거청산  없는  형식적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

였다고  할  것이다.  한국의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끊임없이  구시대의  반민주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형식적,  제도적  민주화를  진전시켜왔는데,  여전히  의회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구세력이 

발전된  민주주의의  형식을  이용하여  국민이  선출한  권력을  축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런  기득권  세력의  시도는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탄핵    약  한  달  여  후에  벌어진  17대  국

회의원  선거에서  종전  47석에  불과하던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  의석을  획

득했고,  여기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탄핵에  가세한  전통의  민주당을  제

치고  원내  제3당으로  부상했다.

15)  땡전  뉴스:  전두환  정권  시절,  극도의  언론통제와  방송사의  권력에  영합하려는  태도가  결합하여  9시 

시보가  ‘땡’  하고  울리면  뉴스가  늘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  이라고  그의  동정을  보도한  것
을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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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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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거청산을  위한  진용은  완벽하게  갖춰진  것처럼  보였다.  여당은  민주화  이후  최초

로  원내  단독과반수를  차지했고,  민주노동당이라는  든든한  우군을  두게  되었다.  대통령에 

이어  의회까지  민주개혁  진영이  장악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선출되는  권력인  행정부와 

의회가  민주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탄핵으로  위기  상황에  몰렸다가  의회의  새로운  뒷받침을  받게  되며  화려하게  복귀한  노

무현  대통령은  2004년  8·15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청산에  대한  강력

한  의지를  표명했다.16)  대통령의  과거청산  의지  표명  이후  국가정보원,  국방부,  경찰청  등 

과거  국민을  상대로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기구들이  2004년  1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상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시발로,  2005년  상반기까지  각각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각각  설치했다.  이들  위원회는  법률에  의해  뒷받침되는  기

구는  아니었지만,  과거의  국가폭력  기구가  대통령과  시민사회의  강력한  요구에  응하여  잘못

된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모두  민간위원들이  의결정족수  이상을  점하도록 

구성되었다.  그러나  행정부  내에서  검찰은  대통령의  의지표명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  작업

에  착수하지  않았고,  사법부  역시  과거  공안사건  판결문을  검토하는  작업만  하였을  뿐  가

시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2004년도  하반기에  한편으로는  과거의  국가폭력  기구  내에  민관  합동의  과거청산  기구

가  설치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가  추진되었다.  그런데  국가보안

법  폐지와  과거청산을  강력히  주장해  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의  대통령에, 

역시  민변  회장  출신인  고영구  국정원장에,  민변  부회장  출신인  강금실  법무부장관에,  민변 

대표간사  출신인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갔다  온  수십  명의 

국회의원이  포진한  국회는  놀랍게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실패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남았다

는  것은  개혁이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표류하기  시작한  것

은  비단  여당만이  아니었다.  과거청산  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은  느닷

없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다.  기득권  세력의  대표격인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

16)  광복절  경축사:  2004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59회  광복절  경축사에서  “친일의  잔재가  청산

되지  못했고,  역사의  진실마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애국선열에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분열과  갈등을  청산하고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길”이라며  과거사  진상규명에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진상규명은)  반민족  친
일  행위만이  대상이  아니라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도  그  대상이  돼야  한다”
며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사안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국회  내에  만
들  것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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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구하면서,  과거  기득권  세력의  집권  시기에  벌어진  국가폭력의  실체를  규명하여  바로잡은 

작업인  과거청산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2005년  12월  포괄적인  과거청산  기구로  출범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다.  <진화위>의  출범은  과거청산  관련  피해자들과  시민

운동진영의  오랜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염원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위원회의 

출범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진화위>가  너무나  명백한  한계를  처음부터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여  책임을  가리고  회복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과거청산  본연의  취지와는  달리,  위원회는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의 

공작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했다.  위원회의  사명에는  국가폭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항

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또는  적대세력(공산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등이  위원회의  조사임무

로  추가되었다.  이는  위원회의  정체성  혼란에다가  가뜩이나  부족한  조사인력과  예산을,  즉 

위원회의  손발을  묶는  효과를  가져왔다.  위원의  구성에  의회와  대법원의  추천을  받은  인사

가  포함되도록  한  결과  <진화위>  -  그리고  몇몇  과거사  관련  위원회  -  일부  위원의  경우 

왕왕  조사대상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위원회의  조사권한으로  부여된  동행명령권

의  경우,  사법부는  영장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과태료  부과를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리기

도  했다.17)  그러나  위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연  위원회가  과거청산의  방

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가  여부이다.  위원회는  민족독립조사국,  집단희생조사국,  인권침해조

사국  등  3개의  조사국을  갖고  있는데,  처음부터  기대할  것이  없었던  민족독립조사국은  제

쳐놓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두  개의  국이  얼마만큼  자신들이  조사대상으로  삼는  분야에  대

하여  개별사건에  대한  조사를  넘어서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이나  권위주의  정권  시

기의  인권침해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을  포함한  큰  그림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냐가  매우 

우려가  되는  상황이다.  민간인학살  사건의  경우는  그래도  시기와  내용이  비교적  집중되어 

있으나  오랜  시기에  걸쳐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  권위주의  정권시기의  인권침해  문제는  개

별사건의  집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이  너무나  많다. 

한편  <진화위>를  비롯한  각종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함으로써  생긴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17)  동행명령권이란  증인이나  참고인이  조사에  응하지  않을  때  지정한  장소에  동행을  명령할  수  있는  제

도로,  2001년  제정된  의문사  진상규명특별법에는  "핵심  참고인이  3회  이상  출석  요구에  불응하면  동
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동행명령장  발부  후에도  출석하지  않으면  최고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불응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점에서  출석요구와  다르다.  진
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도  동행명령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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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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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으로서의  과거청산운동이  급격히  공동화(空洞化)되었다는  것이다.  시민운동단체들

은  과거청산  작업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운동의  정책과  전략을  제시하면서,  국가가 

책임을  지고  과거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해  왔다.  <진화위>  등  과거사위원회의 

출범은  시민사회의  요구가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시민사회의  일선에서  과거청산  관련  활동을 

해  온  활동가  중  상당수가  위원회에  조사관  또는  전문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인적인  자원이  부족하다보니  이들의  공백을  채우지  못해  시민단체는  인력난에  시달리

게  되어  외부의  비판자와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또한  정부기구인  위원회에 

들어간  활동가  출신들이  관료적  장벽을  뛰어넘는  활동력과  지혜를  보여주었다는  만족할만

한  점수를  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200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국정원,  국방부,  경찰  내부에  설치되었던  과거사

위원회는  각각  보고서를  발간하고  활동을  종료하였다.18)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은  10년  만

에  보수파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법률에  근거한 

14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  가운데  9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통합하고  나

머지  5개는  존치기한이  만료될  경우  자동  폐지한다”는  내용의  과거사위  관련  위원회  통폐

합안을  발표하여  많은  논란을  낳았다.19)  이  방침은  기득권층에  기반한  새  정부가  과거청산

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방침

은  과거사  관련단체의  격렬한  반발과  통폐합의  실효성  문제  등으로  인해  당장은  잠복하고 

있으나  이명박  정권의  본질  상  재연할  가능성이  높다.

5.  맺음말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을  과거청산이  넘쳐나는  나라라  생각한다.  반면  이웃  일본에  대해

서는  과거청산을  전혀  하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만을  본다면  그렇게  보일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5년  이후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이런  생각은  근거가  박약한  것

이다.  일본의  경우  과거청산이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침략전쟁을  일으

18)  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1-6,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

위원회  종합보고서󰡕  1-3,  2007;  경찰청,  󰡔경찰청  과거사건  진상규명위원회  백서󰡕,  2007;  경찰청,  󰡔경
찰청  과거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2007.

19)  「'과거사'  되는  14개  과거사위원회」,  󰡔조선일보󰡕  2008년  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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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킨  책임을  물어  군부,  귀족,  구  정치인,  고등경찰  등에  대한  인적  청산이  이루어지고,  재벌

이  해체되었다.  물론  침략전쟁을  일으켜  전범으로  처벌받은  구정치인들이  55년  체제  이후 

정치일선에  복귀함으로써  그  의미가  반감되기는  했지만,  일본은  상당한  수준의  과거청산을 

경험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이  단순히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역청산이  일어났으며,  일본제국주의가  키운  군국소년들이  일본제국주의가  주

입시킨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씻어낼  기회를  갖지  않은  채  다스려온  나라였다.  한국은  민

주화  이후에야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며  이들이  남긴  ‘잔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과

거의  규정성을  교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난  국가들  중  남베트남과  함께  식민지배에 

협력한  세력이  정권을  잡은  드문  사례였다.  한국의  민주화가  혁명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인  물갈이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지배엘리트들은  구체제와  강한  연속성

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의  과정에서  한  편에서는  과거청산의  요

구가  거세게  등장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구체제의  지배세력이  여전히  민주화되어가는  사

회  내에서  기득권을  성공적으로  지켜내면서  과거청산에  저항해  왔다. 

원래  과거청산은  기득권층의  강한  저항을  불러오는  작업인지라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과거청산은  특히  시끄러웠는데,  이는  구세력이  여전히  사회적  헤게모니

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이  권위주의  정권시기의  국가폭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

성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고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과거청산은  구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상태에서  진행된  동구 

각국의  과거청산  작업이나  독일의  나치  청산  작업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며,  구세력과의 

타협  속에서  사면을  통한  진실의  고백을  끌어낸  남아프리카  형태의  진실과  화해  모델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시작된  한국의  과거청산은  처음부터  처벌을  포기하면서  시작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광주학살과  관련하여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잠시  감옥에  갔다  왔지

만20),  이는  사면을  위한  요식행위였을  뿐,  이를  제대로  된  처벌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20)  1995년  7월  18일  검찰은  5·18광주학살과  관련한  고소ㆍ고발  사건에  대한  6개월  간의  수사결과를  발

표하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1995년  10월  19일  노태우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모은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어지면서  부패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된  12·12  쿠데타  및 
5·18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요구가  들끓게  되었다.  이에  대통령  김영삼도  5·18을  덮으려던 
입장을  바꾸어  5·18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법에  따라  검찰은  12월  3일  군형법상의  전두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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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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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공소시효의  벽에  막혔든,  아니면  과거청산을  추동하는  힘의  한계였든  한국의  과거청

산운동은  처벌을  통한  정의의  회복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통한  피해자와  다른  사회구성

원들  간의  화해의  길을  포기했다.  의회와  행정부에  포진한,  그리고  언론권력을  장악하고  있

는  구세력의  저항을  뚫고  국가차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을  가능케  하기  위해  과거청산

운동  진영은  “우리는  누구를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실규명을  원할  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절에  마련된  과거사  관련 

법안  중  어떤  것도  처벌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처벌의  포기가  진실규명의  걸림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책임을  면해  보려는  가해자  측  관련자들이  서로  발뺌을  하는  속에서  사건

의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처벌의  위험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는  관련자들은  처음부

터  고압적인  태도로  나왔다.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을  통해  고문 

등  국가폭력의  지휘체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남아프리카의  진실

과  화해  위원회는  고백을  끌어내기  위해  사면을  해  주었기  때문에  진실을  위해  처벌을  포

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과거청산운동은  처벌을  포기하고  들어감으로써  진

실마저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20  여개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만들고  근  1천  명이  월급

을  받아가며  과거청산  작업을  펼쳤지만,  가해자  측의  고백을  거의  끌어내지  못했고,  단  한 

명의  가해자도  감옥에  보내지  못한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픈  한국의  과거청산운동의  현주소

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한국의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은  가해자  측  개인들이  거의  고백을  끌

어내지  못했다.  다만  국가정보원,  국방부,  경찰  등의  3개  권력기관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

를  통해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악명  높은  국가폭력  기구들이  기관  차원에서  과거의  국가폭

력에  대한  고백과  사과를  받아냈을  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진보진영으로부터  큰  기대와  지지를  받고  출범했지만,  총체적으로  낙제점

을  받았고,  2007년  대통령  선거는  보수세력의  압승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중들의  기대치와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이전의  김대중  정권과  비교해서도  초라한  성적표

를  받았는데,  그래도  김대중  정권에  비해  좋은  점수를  받은  과목은  과거청산과  관련된  분

야라  할  수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국고보조로  상징되는  김대중  정권의  과거사 

게  반란수괴죄를  적용하여  기소하는  등  신군부측  핵심인사  11명을  구속기소하였다.  대법원은  1996년 
4월  17일  전두환에  사형,  노태우에  징역  12년  등  항소심  형량을  확정했다.  그러나  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대통령  김영삼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전두환ㆍ노태우와  관련자  전원을 
특별사면하여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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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과  비교해  볼  때,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이나  한나라당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경제정책의  추진으로  상징되는  개혁의  포기는  과거청산의  동력을  급격

히  위축시킨  주된  원인이었다.

과거청산은‘과거’라는  용어와는  달리  지극히  현재적인  문제이며,  오늘날  발생하는  문

제들의  뿌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청산이  현재의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미  FTA  추진,  한반도대운하,  비정규직  확산과  사회  양극화,  대추리

로  상징되는  미군기지  이전을  포함한  한미동맹  재편,  그리고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  등

등은  현재  한국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문제들이다.  이들  문제들은  한  때  자기  시기의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모든  과거청산의  문제들이  그렇듯이  오늘  해결되지  못하면  미래의  과거사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이  미래의  과거사가  되는  것을  막아내는  힘이야말로 

현재  과거사란  말로  뭉뚱그려진  국가폭력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다. 

노무현  정권은  개혁의  방향상실로  인하여  보수세력에  정권을  내주었고,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시절부터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하는  방침을  밝히는  등  정부  차원의  과거사 

진실규명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중단  또는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움직

임은  2008년  4월  9일  실시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3사건의  발생지역인  제주도의  3개 

지역구에서  이명박의  한나라당이  모두  낙선하는  바람에  잠시  주춤하고  있으나,  정권의  성격 

상  곧  재개될  것이다. 

지금  현재  과거청산과  관련된  한국의  기상도는  매우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청산의 

전망이  아주  어두운  것은  아니다.  한  예로  2006년도에  인터넷에서는  만화가  강풀의  󰡔26년󰡕

이란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제목의  26년은  바로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26년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반성하지  않는  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보며  기획된  이  작품은  광주학살  희생자들의  유자녀들이  전두환을  암살하

려  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한편 

광주민중항쟁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700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26년󰡕과  󰡔화려한  휴가󰡕  이전의  광주는  과거사의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분명 

시들어가는  주제였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접근하기에  따라서  광주는  5·18과  8·15를  혼동

하는  젊은  층의  깊은  공감과  분노를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26년󰡕은  사회적 

처벌이  좌절된  사회에서  보복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불처벌’  관행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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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히  문제를  제기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따른  정권교체로  과거청산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  어려

움은  정부  차원의  진실규명  작업이  당분간  힘  있게  추진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과거청산  작업  전체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청산이  국가폭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강력한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과거청산의  전부일  수는  없다.  국가로  하여금  과거청산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

로  임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힘이  필요한데,  노무현  정권  시기  시민사회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동안의  활동가  상당수는  위원회에  흡수되어  개별  사건의 

조사를  따라  하기에  급급했고,  유족들이  전면에  나서다  보니  일반  시민들의  참여할  공간이 

사라지면서  마치  과거청산이  금전적인  배상ㆍ보상을  바라는  운동인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

게  되었다. 

지금  이명박  정권  시기는  과거청산운동의  시민적  동력이  재충전ㆍ재가동되어야  할  시기

이다.  90년대의  과거청산운동이  주로  정부에  대해  과거의  국가폭력의  은폐된  진상을  규명

하라는  요구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노무현  정권  시기는  미흡하나마  국가가  여러  위원회를 

설치하여  실제로  다양한  국가폭력  사건들을  조사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정원,  국

방부,  경찰  등  과거사위원회와  진실과  화해위원회,  군의문사위원회  등의  보고서를  통해  간

행되었다.  이는  종래  피해자  측의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존재하던  과거사가  정부  차원의  조

사를  거쳐  국가에게  책임이  있음이  국가  스스로에  의해  자인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진실규

명은  물론  미흡했다.  지난  수십  년  간의  국가폭력의  사례들이  지난  몇  년  간의  진실규명 

작업에  의해  그  전모가  다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의  진실

규명을  통해  피해자들이  주장해  온  비극적인  사건들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고,  국가도  그 

주된  책임을  인정하였다는  점은  이제  시민사회와  국가에  대해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것

이다.  이제  드러난  진실에  따라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  조사되지  않은  유사한  수많은  사

건들은  이대로  덮을  것인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책임자에  대한  처벌  문제를  포

기할  것인가?  이런  엄청난  일을  처벌할  수  없다면  법과  정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가?  가해자가  전혀  반성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화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해  과거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단계를  넘어  일부나마 

드러난  진실을  토대로  국가에  대하여,  보다  중요하게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진실

과  정의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  기반한  화해에  대하여  이야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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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코스  :  제주의  남부  -  항쟁의  길,  수난의  길속냉이골  -  현의합장묘  -  수악주둔소 

-  영남마을

     

1.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의로운  영혼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

현의합장묘.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할  그당시  국군에게  하고  싶은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비명에  학살된  의귀리와  수망리의  평범한  주민들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또한  위압감  없이 

비교적  소박하게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3기의  봉분앞에  세워진  위령비의  비문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

다는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

월이여.‘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욱밭  방엣불  질러  죽

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

순  돋지  않던가요.”

[

]

남부지역  유적지  답사

오승국(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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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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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혼들이여

남원읍  의귀리,  마을  앞에는  넋이오름이  아담하게  솟아있고  그  오름과  마을을  끼고  서중

천이  유유히  돌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과  빛나는  역사

의  뒤편에는  잊을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은  한과  눈물,  통곡의  세월을  말해주는  장소가  현

의합장묘다.  어디  이곳  뿐이랴만은  4·3항쟁  당시  영문도  모른채  토벌대에  잡혀가  인간  이

하의  취급을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곳은  의귀리  인근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4·3당시  남원면  중산간  마을인  의귀·수망·한남리는  의귀국민학교를  함께다니는  학구공

동체로  한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은  다른  지역보

다  일찍  시작되었으며,  군인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

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

들었다.

무도한  보복학살 

1948년  12월  26일,  국군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  1대대(대대장  허욱  대위)  2중대(중

대장  설재련  중위)는  그동안  강경토벌을  주도하던  국군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와  교체

되어  당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된다.  그들은  곧  학교지붕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성곽

구축등  토벌준비를  완료한다.  2중대  군인들은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

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의  핵심부대는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

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0일(음력  1948년  12월  12일)  새

벽,  2중대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토벌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

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은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

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해버린  것이다.  학살  현장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  지쳐  쓰

러져간  갓난아기의  넋도  있었다.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

들의  거두어간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  해  봄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게  되면

서  이  사건과  무관한  한남리  민보단원들에  의해  ‘개탄물’  동쪽으로  옮겨졌다.  세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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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구덩이에  던져져  ‘멜젓  담듯’  매장되고  만것이다.

이  사건을  지켜  보았던  고운희(87세)할머니는  “여기  묻힌  사람들은  양민으로  구분되어 

다음날  남원으로  소개  될  예정이었으나  전날  산부대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주민들을  학교  옆밭으로  끌어내어  집단  총살을  했다.  이날  죽어간  사람들  중에

는  아이  안은  어머니,  임신한  여성,  오몽  못하는  노인,  10대의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하며  억울해  했다. 

사태가  끝나자  유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점차  묘역을  가다듬어갔다.  1964년  12

월에  삼묘동친회를  조직하여  부모형제가  묻힌  땅을  사들인  데  이어,  1968년  봄에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행해왔으며,  1983년  봄에는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로  ‘현의합장묘’  라는  이름의  묘비를  건립했다.  이후  유족들은 

2002년  6월부터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으고  관계  요로에  간청한  끝에  유해발굴과  이묘

계획을  결정했다.

반세기의  세월을  넘어  54년만인  2003년  9월  16일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벽5시  현

의합장  유족회가  집전하는  개토제를  올리고  유골발굴을  위한  파묘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다.    발굴작업  시작  3시간이  지나자  집단학살되어  매장된  유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습조차  힘들  정도로  유골들이  마구  엉클어져  4·3당시의  비극적  참상을  그대로  보여  주

고  있었다. 

반세기  넘게  구천을  떠도는  칭원하고  억울한  죽음들을  떠올리며  유족들의  눈가에는  이슬

이  맺혔고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당시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2중대  군인들에

게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유해발굴과  이묘

이  날  이묘를  위해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  8구,  동쪽 

봉분  14구  등  총39구(남자  15구,  여자  7구,  청소년  추정  2구  포함한  성별  미상  17구)의  유

해가  50여점의  유물과  함께  확인됐다.  그러나  어린이의  유골을  비롯한  다수의  유골들은  이

미  세월의  더께에  흙이  되어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유족들은  한  구  한  구의  유

골로  나누지  못했지만  세  봉분의  흙  한  줌씩을  함께  옮겨넣음으로써  흩어진  유골들을  대신

했다.  현의합장묘  유족회는  통곡과  오열속에  발굴된  유골들은  봉분별로  화장하여  지세  좋

고  양지바른  이  곳,  수망리  ‘신산모루’지경에  새  묘역  을  마련해  고운  잔디  입혀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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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243

9월  20일  안장하였다. 

당시  현의합장묘  유해발굴은  제주4·3관련  첫  본격적인  발굴의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물증보존의  중요성과  4·3의  비극성을  결정적으로  증거할  유골을  최소한의  과학적  조치

없이  소멸해  버린  점은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4·3  담론이  묶여있던  시기

에  ‘의로운  영혼’  이란  이름을  희생자들에게  헌사한  점은  4·3운동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

다.

2.  의귀리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

      이념의  그늘에  묻힌  쓸쓸한  영혼의  노래

남원읍  의귀리  마을  서쪽  구석진  곳에  ‘송령이  골’이라  불리우는  장소가  있다.  이곳에

는  4·3당시  의귀리  전투에서  군인들에  의해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시신  수습  당시  구덩이  2개를  파고는  버리다시피  매장한  상태  그대로이며  최근까지  돌보

는  사람  없이  방치되고  있다.  이  무덤에  묻힌  시신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주

민들의  증언을  통해  15여구  정도가  될  듯  하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폭도의  이름으로  푸른  잡초에  덮혀  있어,  봉분의  모습도  초라하

기  그지없다.

그러나  지난  2004년  5월  14일,  지리산  실상사  주지였던  제주  출신  도법스님을  단장으로 

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이  곳에서  천도제를  올리고  벌초를  한  후  안내판과  소박한 

방사탑을  참가자들과  함께  세웠다.

이  후  4·3연구소,  놀이패  한라산,  통일청년회  회원들과  현의합장묘  양봉천  회장  등에  의

해    매해  벌초가  이루어지고  있다.

죽음의  섬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새로  설치되어  기존의  제9연

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

되었다.  여기에  다시  해군함정(해군소령  최용남  부대)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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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

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

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

의  섬’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9일,  제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의  강경  진압작

전은  이  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의귀국민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는  것이다.

2중대  군인  의귀리  주둔

의귀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며,  군인토벌대는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삶터를  잃은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  주변과 

돌담  밑에서  기거하거나  산으로  숨어들었다.

1948년  12월  26일,  국군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  1대대(대대장  허욱  대위)  2중대(중

대장  설재련  중위)는  그동안  강경토벌을  주도하던  국군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와  교체

되어  당시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된다.  그들은  곧  학교지붕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성곽

구축등  토벌준비를  완료한다.  2중대  군인들은  수색  중에  발견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가 

하면  일부는  학교  안에  임시로  수용했다.  토벌대는  수용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고문

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학살도  일삼았다. 

이에  무장대의  핵심부대원  200여명은  이들  주민의  안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토벌대를  무

력화시키기  위해  1949년  1월  12일  새벽,  2중대를  습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간파한 

토벌대의  화력에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에  대해  주한미군  육군사령부  일일  정보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약  200명의  폭도가  1월  12일  새벽6시  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

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사망,  10명의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

정이  노획됐다.”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  일등중사  이범팔,  이등중사  안성혁,  임찬수로  밝혀 

졌으며,  이들의  위령비는  남원읍  충혼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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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245

당시  2중대  군인으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이윤(83세.  충남출신)  중사는  자신이  쓴  수기 

‘진중일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중대  주둔지를  중심으로  직경  6km  지점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였고,  수색전에서  반도  앞

잡이  두  놈을  생포하였다.  놈들을  문초한  결과  1월  13일에  놈들이  우리  중대를  습격할  목적으

로  매일  밤  중대  주둔지  근처에  잠입하여  병력상황을  조사하여  놈들  본부에  연락했다고  한다. 

놈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가  놈들을  먼저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준비를  완료한  시간이  새벽 

3시  반이었다.  (중략)  출동시간이  임박한  5시경에  전초진지에서  돌연  기습을  알리는  신호탄과 

함께  사면에서  반도들의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더니  내무반으로  총탄이  마구 

쏟아졌다.  (중략)  나는  지붕에  설치된  기관총  진지에  올라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놈들  30여명

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놈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무장대원들의  죽음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  본부를  상대로  한  무장대의  기습은  3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이  날  군인  4명이  전사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수의 

무장대가  교전중  사망했다.  당시  무장대는  2연대가  제주도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틈을  타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패퇴함으로써,  이덕구가  지휘하는  무장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이  후  분산,  은거  상태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은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

인들이  양민들을  보복  살해해버린  것이다.  이들의  시신의  안장된  곳이  바로  ‘현의합장

묘’다.

한편  무장대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 

해  봄,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아  마을이  재건되면서,  민보단원들에  의해  송령골  두  개의 

구덩이에  던져져  ‘멜젓  담듯’  매장되고  만것이다.

이  사건  이후,  2연대  1대대  2중대는  중산간  마을이  무서웠던지  돌연  1월  20일  본부를 

태흥리  군부동산으로  이동하여,  해변마을인  태흥과  신흥리의  주민학살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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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3.  서귀포시  영남리(瀛南里)

      디아스포라의  비극,  엄청난  희생  마을은  사라지다

서귀포시  강정동  영남리라는  마을을  들어  보았느가.  분명히  제주섬에  존재해  있으며  지

금도  이  마을  옛터의  지번은  영남리  번지로  되어  있다.  최근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며  어수

선  한  강정동은  해안  중심의  마을이지만  영남리  마을은  서귀포시  일대에서  가장  고지에  위

치해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4·3  당시  20여  가호,  인구  100여명이  살고  있었으나,  무차별  초토화 

토벌로  인해  70여명의  주민의  희생되는  초유의  비극을  겪었다.  인구  비율  희생자  숫자로는 

4·3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거의  전  마을  사람들의  죽었기  때문에 

4·3이후  마을  옛터는  폐허로  변했다.

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

유월의  영남마을은  삼나무  동백나무,  산뽕나무,  대나무  등  숲으로  푸르게  덮여  있다.  그 

사이로  포근하게  남아  있는  옛길과  집터,  돌담,  우물  등이  마을의  슬픈  역사를  안고  늘  젖

어  있다.  대나무  숲  속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새의  독특한  소리가  4·3때  죽어간  이들의  넋

을  부르는  듯  처량하다.

영주산은  한라산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영남리는  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영남리의  설촌은  180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북쪽  어점이  오름 

앞에  있는  왕하리와  판관마을,  영남리  동동네  근처에  있었던  틀낭밭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

어  설촌이  이루어  진  것이다.  마을이  융성했던  일제시대  중기에는  50여  가호가  있었을  정

도로  그리  작은  마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해안마을  중심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해안마을로  옮겨가  해방  이후에는  20여호  정도가  남아  있었다.

1898년의  방성칠  난과,  1901년의  이재수  난에도  영남리  주민들이  참여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영남마을의  기개를  전

도에  알렸다.  이  당시  영남리  주민  6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김두삼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자춘  선생은  4·3당시  마을  근처  야산에  숨어  지내다가  군경토

벌대에  희생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이  당시  법정기록에는  이들의  주소가  영남리로  표기된  것

을  보아,  일제초기  마을조사  과정에서  하나의  독립된  리(里)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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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247

지독한  토벌과  인권유린

영남마을  사람들에게  화전(火田)은  중요한  생활  수단이었다.  초기에  화전을  일구어  다랑

이  밭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하게  되는데,  주  작물은  고구마,  메밀,  콩,  산디  등 

이었다.  또한  영남리  주민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마을  중심에  위치한  김원희의  집에 

서당을  유치하여  아이들의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당시  서당훈장은  색달리  출신의  김봉성이

었는데,  그는  1949년  초  어점이  악  근처의  궤에  숨었다가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잡혀  그  자

리에서  죽창으로  난자  당해  희생되었다.  당시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훈장에게  글

을  배웠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훈장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도  후환이  두려워  눈물을  흘리

면서  죽였다고  한다. 

1948년  11월  18일  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따른  소개령이  내려지자  대부분의  주민들

은  해안  마을로  내려가기보다는,  이  사태가  금방  끝나겠지라는  생각에  마을  위쪽의  어점이

악  왕하리와,  내명궤,  땅궤  등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에  잡혀  학살되었다.

11월  20일  영남리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불에  타버렸으며,  주민들은  조상들이  살

았던  왕하리  냇가에  움막을  지어  대규모  피신생활을  하던  중,  1949년  1월에  2연대  1중대, 

서귀·중문경찰과  민보단  합동의  대토벌  때  거의  희생되었다. 

당시  왕하리  학살  때  영남  마을  주민들은  죽어가면서도  먼저  죽은  시신을  함석으로  덮

어주었다고  한다. 

서귀포  주둔  육지출신  토벌대는  토벌과정에서  잔혹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시신의  목을  잘라  등에  져  오게  하고,  숨어지내던  여성을  잡았을  경우에는  옷을  벗

겨  희롱하는게  다반사였다.  특히  육지  출신  한  군인은  땅궤에  숨어있는  영남리  처녀를  살

려주겠다며  어점이  주둔소로  데려가  국부를  엠1소총으로  쑤셔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

기도  했다.       

디아스포라의  슬픔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이산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다. 

4·3을  거치면서  영남마을은  주민의  70퍼센트가  희생되었으며,  마을은  완전히  폐촌이  되

어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대가  끊겼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유년기의 

아동들이었기에  고아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사건을  잊으려고  고향  영

남리  출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정,  용흥,  도순,  법환  등지로  한두명  씩  흩어져서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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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있다.  4·3을  경험한  주민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  이제는  강정동에  사는  김종원(73)씨가  유

일하다.  그는  지금  병상에  있다.

영남리라는  행정리의  지명은  남아있으나  주민은  한  사람도  없는  제주도  유일의  마을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

영남리는  남쪽으로는  고군산과  범섬이,  북쪽으로는  어점이악과  시오름이  보이는  아늑한 

마을이었다.  현재  마을  옛터로  들어서면  계단식  화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올래길과  대나

무가  무성한  집터,  밭담,  4곳의  우물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즐

겼던  왕돌빌레와,  5개소의  통시  자리도  그대로  남아  있어  옛  마을터임을  쉬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영남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나오고,  당시  주민들이 

경작했던  농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영남마을  옛터  서쪽에  들어선  아르도  펜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잃어버린 

마을이  상징인  영남리  마을유적지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증언  -  김종원  씨

“가족친지  15명을  4·3때  잃었습니다”

김종원(73.  사진)씨는  현재  4·3당시  영남리  마을의  비극을  증언하는  마지막  인물이다.

살아남은  사람도  많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별세했기  때문이다.  강정에서  살고

있는  그는  4·3당시  부모님을  포함하여  15명의  가족,  친지를  잃었다.

“소개를  내려가지  못하고  마을  근처에  숨어  있다가  쌀오름  근처에  피신처를  옮겨  있던  중 

토벌대에게  발각  되었어요.  토벌대는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어요.  여러  사람이  죽고,  누님은 

나무  밑에  ‘푹’하고  넘어졌는데  나무위에  있는  눈이  떨어져  덮는  바람에  살아  났어요.

누님은  그  후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굶주림을  채우려고  내려왔어요.  그때  누님은  토벌

대에게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또  친족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은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장소였어

요.  토벌대가  총을  쏘아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로  실신시킨  뒤  한  사람

씩  끌어내  모두  총살해  버렸습니다.  그  겨울  몇  달  동안  일가족  15명이  다  토벌대의  총에  맞

아  죽었습니다.”  며  눈물을  비친다.

김종원  씨는  당시의  충격으로  19세  때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고  있다.  수면장애와  우울

증으로  인해  병원치료와  약으로  모진  삶을  버텨왔다.  4·3후유장애자로  선정이  되었지만  아무 

도움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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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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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례리  수악주둔소

      피눈물로  쌓은  산남토벌의  전초기지 

수악  주둔소로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남원읍  신례리  북쪽  수악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초지와  계곡,  잡목숲을  헤쳐  들아가면  고대  유적처럼  시커먼  석성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다.  1950년  겨울  경찰이  지휘하에  신례리,  하예리,  상효리  전  주민이  동원되어  피눈물

로  주둔소  성을  쌓았다.

이  주둔소는  이때  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

용되었다.  당시  토벌대의  주둔지  석성  중에는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계속되는  4·3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25일  이후에도  제주  섬은  4·3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

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시체가 

가득한  ‘죽음의  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9일,  제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의  강경  진압작

전은  이  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

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의  석성은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중산간  지역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

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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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00전투경찰사령부와  무지개부대

한국전쟁  직후까지  제주도  토벌을  주도했던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1950

년  9월  6일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주를  떠나자,  한라산에  남아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은 

제주경찰이  주도하게  된다.  1951년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이원용  총경)는  필

승중대,  한라중대,  백록중대,  신선중대,  뇌격중대,  충성중대로  편성하여  마지막  잔여  무장대

의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토벌작전의  개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무장대를  몰아놓고  이  지역에서  포착  섬멸

하는  작전이었으며,  최소한의  경찰병력을  이용하되  다수의  주민을  동원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1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해병1개중대(중대장  권석기  중위)가  제주경찰

과  합동으로  전방에  투입되어  토벌에  나서게  된다.

주민동원,  주둔소  구축

수악주둔소는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당시  80여명의  잔여  무장대는  기후가  온화하

면서도  지형이  험한  한라산  남동쪽과  서귀포  북방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기  때

문에  토벌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요하게  축성되었다.

토벌부대  3소대는  수악주둔소  부근에서  무장대  40여명과  치열한  교전을  치른  끝에  5명

을  사살하기도  했다.

수악주둔소의  위치는  수악의  동남쪽이며  신례천과  하례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산에  위

치해  있어서,  주변을  조망하기에  아주  적지이다.

남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  효돈  넘어  까지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남

리  경  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과  북쪽으로는  물오름  인근  까지  내

다  볼  수  있다.

주둔소는  내성과  외성으로  견고히  쌓았으며,  외성은  보초와  전투의  편의를  위해  회곽도

를  갖추고  있다.  회곽도의  바깥쪽  높이는  3.5m  가량이  되며,  내벽은  2m  가량이  높이이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250평  정도이다.

수악주둔소의  축조  작업에는  인근의  신례리와  하례리는  물론  서귀포의  상효동  사람들까

지  동원되었다.  주둔소가  구축된  이후  경찰토벌대는  주민들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이  주둔

소에  집결시킨  후  함께  토벌작전을  수행  하였다.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사업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주민들이  맡아서  했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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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  | 

251

용소  대장이  지원명령을  내리면  음식에서  술  까지도  바쳐야  했다.  신례리  주민들은  이  당

시의  힘든  고통을  회상하며  고개를  흔든다.

주둔소의  정문  앞쪽에는  높이  6m  정도의  삼나무을  세워,  그  꼭대기에  주둔소  표시인  하

얀  깃발을  달았다.  그들은  토벌과정에서  사로잡은  무장대의  머리를  잘라  와서  나무  꼭대기

에  걸었다가  며칠  후에  그  머리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한  증언자는  그때의  상황을  실감나

게  들려준다.

유적지로  보존  필요

수악  주둔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외성과 

내성은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도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주둔소 

내부에는  건물이  있었던  곳과  건물에  난방을  했던  아궁이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화장실 

터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는  올렛목과  내성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목의  흔적들도  밑돌로나마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성  외부는  동사면으로  일부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서사면과  남북사면은  원형에  가깝게  잘 

남아  있다.  내성  서쪽면과  외성  사이에는  돌웅덩이  형태로  노천  목욕탕  터가  뚜렷하게  남

아  있다.  내성  내부에는  경찰전투100사령부  대장  숙소와  부대원들이  기거했던  숙소  등  3개

의  건물터가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제주경찰국  제100경찰전투사령부에  근무했던  허  모씨는  “1952년  창설된  100사령

부는  4개  중대(101부대,  102부대,  103부대,  105부대)로  구성,  한라산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토벌작전을  실시했다.  1953년  1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부대인  무지개  부대와  합동작전을  실

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초대사령관은  김원용  총경이었다가  나중에는  한재길  경감이  맡았다.”며  이  시기에  많은 

주둔소가  축성되었다고  밝혔다. 

수악주둔소는  4·3의  말기인  1951년부터  해병중대,  제100전투경찰사령부,  무지개부대의 

산남  일대  토벌의  핵심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례리  주민등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노역과  각종지원,  그리고  토벌

작전에  나갈  수  밖에  없었던  통한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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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1.

2005년  1월  27일  노무현대통령은  서울  청와대에서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선포

식에서  “제주도는  4·3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딛고  과거사정리의  보편적  기준인  진실과  화

해의  과정을  거쳐  극복해나가는  모범을  보였다”라고  4·3의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  선포식장에는  ‘세계가  하나  되는  곳,  평화의  섬  제주’라는  표

제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평화의  섬’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삼무정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

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다”

먼저  ‘평화의  섬’으로  선포되기까지  제주4·3의  아픔과  치유  과정을  살펴보고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기로  하겠다.

제주도는  해방을  맞으면서  육지의  어느  지역보다도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

]

제주4·3의  평화지향적  해결을  위한  과제

서중석(성균관대교수·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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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253

해방은  탈식민의  민족적  혁명과  현상유지  사이에  갈등을  가져왔다.  해방이  되었을  때  즉

각  서울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되었고,  남과  북의  각지에  건준  지부가 

조직되어  치안을  유지하는  등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하였다.  건준은  미군이  들어올  즈음

에  인민공화국으로  바뀌고,  건준  지부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문화인  등이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해방은  민족혁명이자  사회혁

명이었다. 

제주도  또한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  있었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육지와  상당히  달랐다. 

일제가  최후결전지로  지목하여  오키나와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를  뻔하였다가  해방되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의  해방과  평화는  더욱  의미  있었지만,  일본  등지에서  약  6만명이나  귀환

하여  더욱  해방의  열기가  높았다. 

건준지부와  인민위원회는  제주도민의  지지를  강하게  받았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1947년 

초까지  영향력이  컸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  미군정이  제주인민위원회를  인정하여  장기간 

공존하였던  것은  제주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주민들과  굳게  결합하여  해방의  기쁨과  요구를 

잘  대변하였고,  래디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육지  어느  지역보다도  평

화의  땅이  되었다.

그렇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47년  3·10관민총파업  직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육지경찰과  서북청년회원,  유해진  제주지사  등의  비리와  부패,  관권  남용,  탄압과  횡포,  고

문,  재산  약탈,  강간  등은  평화의  섬  제주도를  불안과  갈등의  연옥으로  바꾸어놓았고,  섬주

민과  육지인들의  대립으로  나가게  하였다.  해방과  반해방의  구도는  육지인=억압수탈자와 

제주도민=피억압수탈민중의  구도와  중첩되어  나타났다.

분단이  코  앞에  닥쳤을  때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외침이  거세게  일어났다.  분단을  막

아야  한다는  중요  이유중의  하나가  분단이  되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면  엄청

난  참화에  한국이  놓인다는  것이었다.  김구·김규식이  남북협상을  하기  위해  1948년  4월  북

행한  것도  민족의  비극인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두  지도자는  통일국가  수립만이  한반도

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두  분의  북행에는  대단한  국민적  성원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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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통일국가  수립에서  제주도와  육지는  비교되었다.  제주도  주민들은  분단을  눈앞에  두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소망을  간절히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육지의  축소판이었으나,  육

지보다  더욱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4·3으로  나타났다.

     

4·3직후에  있었던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유격대  사령관과의  4·28평화회담에  관해서도 

평화의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4·28평화회담에서  마련된  평화는  오라리사건으로 

깨졌다.  5월  1일의  오라리방화사건은  서청과  대동청년단원  등  청년단원이  저지르고는  무장

대한테  덮어씌웠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처에서  주민집단학살이  일어난  제주도는  슬픔과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4·3에서

는  여러  연구자들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최소한  2만5청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아마도  3

만명  내외의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중  대부분은  주민집단학살이나  형무소집

단학살  등으로  희생되었다.  한국의  역사  어느  것을  살펴보더라도  제주도와  같은  이러한  좁

은  지역에서  3만명이나  학살당한  것은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참혹한  대학살이  발생

한  것은  미국학자  메릴도  지적한  대로  제주도가  고립된  섬이어서  무참히  학살을  자행하여

도  육지나  세계  등  외부로  알려질  염려가  없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한국사와  관련해서도,  진상규명과  관련해서도  제주도  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제주도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은  이데올로기를  빙자해  저지

른  명백히  비인간적  반문명적인  전쟁범죄(War  Crimes)  행위다.  유엔은  1948년  국제협약에

서  제노사이드는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하였다.  1968

년  유엔총회에서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비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국내법

상의  제한을  받지  않고,  따라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범행일시에  관계없이  소추가  가

능하다고  규정하였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정은  4·3  진상규명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2.   

제주도에서의  주민집단학살은  한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참혹한  비인간적  사태라

는  점에서도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학살에  대한  기억과  피학살자  가족들에 

대한  족쇄였던  연좌제,  진상규명운동에  대한  탄압  등은  극우반공독재를  유지시키는데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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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255

한  기제(mechanism)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한국에서  극우

반공체제가  왜  그렇게  장기간  지속되었는가는  4·3학살과  한국전쟁기의  주민집단학살이  미

친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뢰꾀르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사건에는  공포가  결부되어  있다”

라고  말하였지만,  주민집단학살은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하고  확산시킴으로써  극우반공체제

를  유지시키고  강화하였다.  그러한  공포는  학살당할  때  피학살자가  가졌던  것일  뿐만  아니

라,  그들의  가족과  그것을  목도한  모든  사람들,  나아가서  그것에  관하여  얘기를  들었던  한

국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것은  집안에  좌익  한명이  있다고,  또  마을에  좌익  한명이  있다

고  온  집안,  마을이  고통을  입었던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억’의  공포라고나  할까. 

제주도에서는  4·3학살,  그것에  이어  있었던  한국전쟁기의  학살로,  현기영의  지적처럼  수

십년  동안  공포에  질려  통곡조차  하지  못하고  큰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멍든  꽉  닫혀진  가슴에는  필설로  말할  수  없는  공포의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다.

피학살자  가족들은  남편이나  부모가  학살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연좌제에  몰려  경찰

의  감시를  받았다.  ‘기억의  공포’를  새롭게  해주고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한  것이  연좌제

였다.  연좌제에  묶인  가족들은  감시를  받으며  공무원은  물론이고  외국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업  취직도  제한을  받았다.  이들은  5·16쿠데타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와  경찰에  의

해  더욱  조직적으로  ‘관리’되었다.

가족들은  1950년대에  피학살자의  시신조차  안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3.

제주도에  평화는  1960년  4월혁명과  함께  찾아오는  듯했다.  4월혁명후  국회에서  조사단이 

내려오고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등을  외치며  묘소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다시  살벌한  겨울이  도래하였다.  제주4·3진상규명동지회원들은  5월 

17일  검거되었으며,  유족들이  세운  백조일손지묘는  훼손되고  위령비는  부수어져  파묻혔다.

극우반공독재는  학살과  연결되어  있는  가족과  일반  주민들의  공포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학살을  목도하고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백색독재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노동운동  농

민운동  등  사회운동도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얼어붙은  분위기에서,  또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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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정보부  등  사찰당국이  막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일방적으로  주입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역사의  왜곡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제주도경찰국에서  펴낸  󰡔제주

경찰사󰡕(1990)  315쪽에는  제주도에서  있었던  가장  규모가  큰  주민집단학살인  조천면  북촌

리  학살에  대하여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

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갔다”라고  쓰여  있다.  그뒤에도  경찰에  의한  역사  왜곡

은  계속  되었다.

평화의  서광은  6월항쟁  이후  비쳐졌다.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제주4·3  진상규

명은  다름  아닌  역사바로세우기인데,  제주4·3  진상규명은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기

여할  뿐만  아니라  제주도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어  있다.    6월민주

항쟁은  4월혁명보다  더  도도한  민주주의의  큰  물결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학살  진상

규명운동도  4월혁명기보다  훨씬  강도  높고  규모가  크게  전개되게끔  되어  있었다.

6월민주항쟁  이전에도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  등이  있었으나,  󰡔순이삼촌󰡕에  대한 

판금조치가  말해주듯,  1980년대에도  4·3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파묻혀  있었다.  그렇지만 

1987년에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4·3대자보’를  교정에  부착하였고,  김대중  대통령후보는 

4·3진상규명을  공약하였다.

통일운동이  활기차게  일어났던  1988년  4·3과  관련된  움직임은  한층  활발하였다.  4·3관련 

서적과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  등이  번역,  출판되었다.  표선면  가시리  등에서는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졌다.

1989년  4월  3일을  맞아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반장  양조훈)은  「4·3의  증언」을  연재하

기  시작하였던바,  새로  창간된  제민일보가  이것을  이어받아  장기간  연재하였고,  일단  󰡔4·3

은  말한다󰡕  5권으로  결실을  보았다.  역시  1989년에  문을  연  제주4·3연구소(소장  현기영,  강

창일)는  각종  심포지움  등으로  4·3에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증언집을  출판하는  등  4·3진상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89년에  처음으로  열린  4·3추모제도  뜻깊은  것이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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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257

전해에  결성된  반공유족회는  1990년에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로  진전되었다. 

1989년에는  국회에서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과거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올바른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격언이  함축하는  바대로,  집

단학살  진상규명은  건강하고  화기에  찬  민주주의와  평화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대단히  중요

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참혹한  과거의  역사가  망각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민주주의와  평

화는  꽃을  피울  수  없다.  사회구성원들이  반목하고  갈등하는  속에서,  다시  말해  과거의  잘

못에  대한  단죄와  명예회복,  화해가  없이는  화기애애한  사회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

하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제대로  자리잡게  한다는  것은  역사바로세우기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불행한  과거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번도  확실하게  과거를  청산한  적

이  없다.  1960년  4월혁명은  분명히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으나,  장면정부는 

의지가  없었고,  곧  이어  일어난  쿠데타  주동자들은  오히려  4·3,  거창  등의  유족회를  탄압하

면서  집단학살  진상규명  등을  철저히  금압하였다.  박정희가  살해된  10·26  이후  기회는  다

시  주어졌으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군부  유신잔당의  쿠데타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제주4·3  진상규명은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것은  피학살  주민들이  희생될  때  가졌던  심정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것이고,  그들을  역사의  정면에  명예회복시키는  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료관  등을  통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될  것이고,  앞으로는  다시는  그

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엄숙한  교육장으로  역할할  것이다. 

4.

제주도에  평화가  정착하는  데는  새천년이  시작된  21세기  벽두에  곧  2000년  1월에  제주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위원회가  조직되어  정부  차

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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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그렇지만  위원회  활동은  난관도  많았다. 

위원회가  부딪친  첫  번째  난관은  희생자  명예회복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특별법  제2조  1에서는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

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로  규정했고,  제3조  2에서는  위원회

에서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에  관한  사항  등을  다루도록  했다. 

희생자  명예회복  범위  문제와  관련해  최초로  구체적인  언급을  한  곳은  헌법재판소였다. 

가해자측이  특별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낸  것에  대한  판결에서  헌법재판소는  특별법의  합헌

성을  인정하면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대상자로  1)  수괴급  무장병력  지휘관  및  중간간부, 

2)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  3)  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에  가담한  자를  꼽았다.  헌

재의  견해에  대해  개의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의견도  위원회  안과  밖에서  만만치가  않았

고,  심사소위원회에서  공방이  벌어졌다. 

본인은  헌재의  견해를  중시하지  않으면  가해자측에서  위헌소송  등  여러  방법으로  위원회 

활동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고려해,  “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무장대의  간부·지휘관으로  군·경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대항하

여  진압군경과  이들의  가족,  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하고  경찰서  등  공공시설을  방화한 

자  등은  제외한다.  그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반드시  제시

되어야  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1)  제주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2)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을  제외하기로  하고,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함”을  추가하여  2002년  3월  14일  이한동  국무총리  주재의  전체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두  번째  난관은  『제주4·사건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관련해서  일어났다.

전체회의가  거의  모두  긴장된  분위기였고,  고성이  오갔지만,  특히  2003년  3월과  10월에 

있었던  전체회의는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3월의  경우  전체회

의  예비논의  때부터  긴장된  분위기였는데,  본회의가  열리자마자  전운이  감돌고  고성이  여러 

차례  오고  갔다.  10월의  전체회의는  개막을  앞두고  실상과  차이가  있는,  가해자측에서  내보

낸  보도에  대해  항의하는  고함소리가  서전을  알리는  가운데  역시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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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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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회의가  진행되었고,  군·경측  두  위원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박원순변호사를  단장으로  한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회단에서는  2년  동안  12차례  회의를 

열고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수집한  문서  등  국내외에서  수집한  원고  6만매 

분량에  달하는  10,594건의  문서를  분석하고,  군·경  93명,  입산자  52명,  미국인  3명,  재일동

포  35명  등  총  234명으로부터  청취한  증언  등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심도있게  검토하고  심

의하여,  특별법  제6조  및  7조에  “위원회  구성후  2년  6월내”  작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에 

맞추어  2003년  3월  전체회의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안)』를  제출하였다.  물론  12

차에  걸친  기획단회의에서도  실랑이가  많았다. 

진상조사보고서  작성할  때  4·3계엄령의  적법  여부,  군법회의의  실존  여부,  초토화작전의 

존재  여부,  지휘체계의  책임문제,  남로당의  개입  범위,  미군의  개입  범위와  용어  등이  크게 

문제되었다.  군측에서는4·3사건의  본질은  남로당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무장봉기이기  때문에 

남로당  책임문제를  부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보고서가  군의  과잉진압에  치중되었고,  주

민의  피해  중심으로  부각되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그  반면  유족측은  가해자들의  실명과 

처벌  및  서훈  박탈  규정,  피해자  개별  보상을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서는  일각에서  집요하게  주장해  국정  국사교과서에까지  실렸던,  4·3무장봉기  때  남로당  중

앙당이  직접지시  했다는  설이  근거가  없고,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음을  밝혔

다.  그와  함께  희생자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하고  그  근거를  제시했으며,초토화작전

의  실상과  군법회의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4·3에  대해‘폭동’이라는  용어보다 

‘무장봉기’라는  용어가  적절함을  밝혔다.  미군의  책임  소재를  명백히  한  것도  평가되어

야  할  것이다.

2003년  3월  전체회의에서  고건  국무총리는  새  자료  발굴에  의한  보완  등의  이유를  제시

하며  진상조사보고서를  6개월  후에  확정할  것을  제안해  통과시켰다.  수십년  동안  찾지  못

했던  자료가    새로  나올  리  만무했지만,  군에서  제기한  수정의견  등  30항목이  넘는  수정의

견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소위원회에서  정밀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양보’한  부분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15일  전체회의에서  다시  논의되었

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논전이  벌어졌으나,  고총리가  결국  통과시

켰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자  노무현대통령은  2003년  10월  31일  “저는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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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밝혔다.  정부수립과  전쟁을  전후해서  참혹한 

주민집단학살이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군·경은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회  활동을  탄압했는데,  최초로  노대통령이  4·3사

건에서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는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고  건강한  국가,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데,  그리고  제주

도가  평화의  섬으로  탄생하게  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2005년  1월에는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선포되었다.

세  번째  난관은  수형자  문제였다. 

2003년경부터  2007년  봄까지  장기간에  걸쳐  심사소위원회와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격렬

한  공방이  오간  것이  수형인문제이다.  군·경측에서는  수형인문제를  일종의  마지노선  비슷하

게  생각하는  듯  수형인은  희생자  명예회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그렇

지만  형을  살았던  후유장애인의  경우  고령에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빨리  희생자로  결정해 

의료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는  군·경측  위원도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우

선  후유장애인  16명을  2003년  10월  전체회의에  올렸지만  보류가  되고  말았다.  군·경측의 

강한  반발로  진상조사보고서를  통과시키기도  힘든데,  후유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수형인문

제까지  처리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형인은  일반  법원에서  재판받은  것은  그다지  문제가  안  되었고,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경우가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  경우  군법회의가  적법한  절차를  받았느냐,  정말  군법회의라

는  것이  있었느냐가  핵심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요

청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해당  자료를  보내주지  않았다.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4·3

당시  군  지휘관  증언  등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하여  소송절차가  적법하게  행해졌는지 

알  수  있는  공판조서와  재판(조)서가  현재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초부터  판결문이 

첨부  또는  작성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또  군법회의수형인명

부는  내용상  모순점이  많고,  공판회수  및  인원,  내란죄  간첩죄  등  적용법조와  재판권의  문

제  등에서  재판의  존재  및  적법절차  준수  여부에  대한  입증자료로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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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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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군·경  및  관련자들이  군법회의  재판이  없었다거나  모른다고  증언했고,    경찰 

관계자  증언이나  경찰문건을  보면  조사  단계에서  이미  유죄  무죄의  형량이  결정되어  있었

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수형인이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이  통보되었다고  증언하는  것  등으

로  미루어보아  군법회의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이  확실했다.  군  또는  경찰이  조사

단계에서  이미  형량을  결정한  상태에서  재판없이  처리하거나  수십명  내지  수백명씩  집단적

으로  출석시켜  호명  등의  방식으로  본인  여부  정도나  확인하고  처리한  것이었다.

수형인으로  행방불명인  사람들은  거의  다  전쟁이  나자  군·경에  의해  저질러졌던  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인해  사망했는데,  유기형을  받은  사람을  죽인  것은  명백히  국가의  범죄적 

행위인데도  이들을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산하면 

살게  해준다고  하고  처형한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민간법정의  판례가  무수히  보

여주듯  사형  무기를  받은  사람들도  민간법정에  섰더라면  벌금형이나  단기형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말한다면  현장에서  사살당한  사람이  사살당하지  않은  사람들보

다  더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살당했는데,  현장에서  사살당한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희생자로  인정되었는데,  형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수형인을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으

려는  태도는  수긍할  수  없는  논리였다. 

수형인문제는  진상조사보고서  통과에  두  위원이  항의하여  사퇴한  지  몇  달후에  두  분의 

교수가  위원으로  들어오면서  숨통이  트였으나  여전히  격론은  계속되었다.  2005년  3월  열린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해찬  국무총리는  약속이  있어  회의를  몇시에  끝내야  한다는  마지노

선을  그어놓고  통과시키려  했으나,  뜻밖에도  법무부장관이  제동을  걸고  국방부가  동조하여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특히  심사소위원회  박제승위원장이  조목조목  반박한  것은  인상

적이었다.  이  회의에서  최초로  수형인  606명이  희생자로  결정되었다. 

수형자  논쟁은  그뒤에도  계속되었다.  간첩죄문제도  있었지만,  사형과  무기형을  받은  사

람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다가  금년에  들어와  심사소위원회에서  한 

위원은  내란죄  사형에  대해서만,  한  위원은  내란죄와  간첩죄  사형에  대해서만  희생자로  불

인정하여  3월  전체회의에서  모두  통과되었다.  강창일의원이  앞장서서  노력해  개정된  특별

법  제2조  2에  수형자가  희생자로  자동적으로  포함되게  되었다.  그러나  수형자  문제는  그 

뒤에도  뜨거운  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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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5.  해결하여야  할  과제

(1)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썼기  때문

에  잘  쓰여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제약받아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  것이  몇가지  있다.

제주4·3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더  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본인은 

4·3은  봉기로서의  성격,  항쟁으로서의  성격,  주민집단학살로서의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강조

했지만  이  부분은  더  논의가  되어야  한다.

가해자에  관한  조사나  연구가  더  철저히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승만대통령의  역

할이  규명되어야  한다.  미국과  미군정,  미군사고문단의  역할도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주민집단학살에  관해서도  윤곽은  드러났으나  그것이  이루어진  전반적  과정에  대해서  고

찰이  요구된다.

4·3에  관한  연구는  해방직후,  정부수립시기,  전쟁  전후의  주민집단학살과  함께  이루어질 

때  그것의  성격이나  학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이승만  등  가해자  문제도  마찬가

지다.

연구  관련  자료의  공유  문제도  논의되어야  한다.  일반  연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4·3을  제외한  다른  주민학살  관련  자료는  이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2)

진상규명뿐만  아니라  희생자  명예회복도  앞으로  계속  사업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할  필

요가  있다.  국내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희생자  신고가  안  된  경우가  많지만,  일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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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263

(3)

4·3위원회는  2003년  3월  전체회의에서  ‘제주4·3사건진상조서보고서  안’이  조건부로  의

결되었을  때  정부에  7가지를  건의한  바  있었다.  1)  정부의  사과,  2)  추모기념일  제정,  3) 

보고서  교육자료  활용,  4)  평화공원    조성사업,  5)  생계비  지원,  6)  유해발굴  유적지  복원사

업,  7)  추가  진상규명·기념사업이  그것인데,  정부의  사과  등  일부는  성취되었지만,  대개의 

경우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예컨대  보고서  교육자료  활용도  그렇고,  평화공원  조성사

업도  3단계  사업의  경우  아직  예산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유족에  대한  생계비  지원도  대

단히  미흡한  실정이고  유해발굴과  그것의  보존사업도  여러  차례  예산  문제로  제대로  이루

어지지  못했다.

(4)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자리잡는  데는  제주4·3특별법에  의해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

고  4·3평화기념관이  건립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쓰여진  것과  같이  4·3의  진실이  제주도와  서울  등  육

지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고,  그래서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깊게  하

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희생자들이  법을  초월해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명예회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념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공원,  기

념관,  재단이  세워져  운영되어야  4·3이  영원히  타오르는  불처럼  평화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  있게  된다. 

4·3기념관이  너무  늦게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중국의  남경학

살기념관도  학살  50주년을  맞는  1987년에  세워졌고,  노구교에  있는  항일전쟁기념관이나  할

빈  부근의  731부대  기념관,  일제의  만주침략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워진  심양  9·18기념관,  대

만의  2·28기념관이  모두다  근래에  세워졌다.  독일  베를린의  유태인기념관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학살기념관,  아르메니아에  세워진  오스만  터키의  아르메니아인학살기념관도  최

근에  세워졌거나  세워진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평화공원과  기념관은  다른  어느  지역에  세워진  것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렇지만  더욱  성의와  지혜를  짜내고  재정적으로  지원이  있으면,  더욱  훌륭한  평화공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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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기  4․3역사문화아카데미

념관으로  모습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제주4·3희생자  지도  조형물이  입구쪽에  적절

히  세워져  첫눈에  4·3의  진실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념관이나  기념공원에는  유명한  상징물이  있기  마련인데,  현재  모녀상이나  석부조

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제3단계  사업안에  포함되어  ‘종’  조형물  설치는  그  점에

서  의미가  있다.  제주도의  분위기를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수목을  공원에  배치하는  것도  좋

을  듯하다.  비용이  문제라면  연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4·3의  경우  오키나와처럼  학생

이나  관광객에게  4·3을  온몸으로  실감나게  느끼게  할  수  있는  동광큰넓궤  같은  체험공간 

같은  것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제3단계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제주도  역사를  담는  문제도  고려해봤으면  좋겠다. 

제주도는  다른  지역보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많지만,  4·3기념관은  제주도역사관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몽골의  침략이전의  역사에서부터  조선시대  육지와의  관계  등도  의미가 

있지만,  특히  한말의  남학당  방성칠난이나  이재수난과  같은  민중의  동태,  3·1운동,  해녀투

쟁과  같은  항일운동  등은  더욱  의미  있게  배치되어  4·3과의  연결  또는  4·3의  배경이  관람

자들한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제주도의  풍물  풍습  풍치  인물과  자랑거리  등

이  함께  자리를  해  이곳을  들리는  것만으로도  육지사람들이  제주도를  느끼고  갔다고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더불어  오키나와평화공원의  평화기념당    같은  명소도  어딘가에  배치

되어야  할  것  같다. 

     

4·3의  과거청산이  모범적  사례라고  칭송을  듣는  것과  똑같이  기념관·평화공원도  모범적

으로  잘  되었다는  칭송을    더욱더  많이  들어야  한다.  지금  독립운동  기념관이나  유명한  역

사  인물  기념관  가운데는  내용이  빈약해  발길이  끊어진  곳이  적지  않다  거창학살  기념시설

도  논란이  있다.  광주  망월동  기념관도  약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4·3기념관만은  교육  기능

을  포함해  어떤  기념관보다도  내용  있는  기념관으로  선을  보여  다른  과거사  및  여타  기념

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5) 

궁극적인  평화는  4·3때  제주도민이  갈구했던  바처럼  남북화해와  긴장  완화,  그리고  남북

통일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평화,  세계평화로  이

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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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265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평화공원과  기념관은  남북화해,  나아가서는  통일로의 

길을  닦는데,  주춧돌이자  디딤돌로서의  민족사적  역할을  할  것이다.

1948년  봄  분단  정부의  수립이  코  앞에  닥쳤을  때,  제주도  주민들을  비롯하여  한국인들

은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노애국자  김구  김규식이  앞장선  남북협상을  성원했다.  제주도  주

민들한테  단선  단정  반대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호소력이  있었고,  그것이 

4·3봉기에  항쟁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4·3과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은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에  있었다.

남과  북의  상황을  볼  때  통일로의  길은  기복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과  북의  주

민들이  마음을  열어놓고  자주  만나면서  크게  바뀌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준비하여야  할 

일도  많다.  그러한  통일에의  길을  닦고  여는데  4·3은  한몫을  해낼  것이다.

예전에  제주도  사람들에  의해  귤상자가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여러  차례  접했을 

때,  4·3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  상념이  들었던  것은  본인  한  사람뿐이었을까.  거듭  강조하지

만  운명적으로  4·3에는  통일의  염원이  담겨  있다.  4·3의  진실이  제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

은  통일을  이루자,  통일에의  길을  닦자는  호소력으로  한국인의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4·3

은  남과  북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하게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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