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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여름
【기획 의도】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기록
서울 용산구 보광동은 푸른 한강물이 넘실되고 복숭아 꽃비가 내리는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보광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생기를 잃고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용산기지를 건설하면서 둔지미 사람들은 보광동으로 강제 이주됐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다리가 폭파됐다. 마을 사람들은 한강물이 용솟음치고 집의 기둥이 흔들리는 순간을 기억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인심 좋았던 보광동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증오는 극단에 달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 마을청년들은 생각이 다르다는 그 이유로 함께 자라고 생활했던 사람들을 죽였다. 그 이후로 보광동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전쟁 와중에 겪어야 했던 가까운 이의 죽음과 강간 등의 개인적 고통은 가슴 깊은 곳으로 삼켰다.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살아남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일생을 살아남기 위해 몸무림 쳤던 과거의 기억은 오늘날 트라우마로 남았다.
우울증에 걸려 두문불출하던 내가 보광동에 카페를 열게 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다큐멘터리 방송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해 카페를 경영하게 된 나는 보광동 토착민들로부터 한국전쟁 이야기를 듣게 된다. 80대 이상인 노인들은 대개 보광동에서 출생했거나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 피난 온 사람들이다. 보광동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판도라 상자를 연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과 4.19혁명, 군사독재, 경제성장기의 이야기는 보광동 사람들의 기억에 함축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보광동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무슬림공동체, 양공주, 성소수자, 혼혈인들이 토박이 주민과 함께 이질감 없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곳이었다.
머지않아 보광동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곳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과거 보광동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재개발로 보광동 사람들이 흩어지면 그에 대한 기록도 쉽지 않다. 더구나 고령의 주민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되면 보광동의 역사도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재개발로 사라지는 지역의 역사를 서둘러 기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줄거리 요약】
1. 보광동 카페
나는 우울증로 시장바닥의 채소처럼 시들어가다가 우연하게 텔레비전에서 브라질의 어느 빈민가 카페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다큐멘터리는 범죄가 난무한 빈민가에 문을 연 카페가 마을 사랑방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처럼 세상 끝 어느 가난한 마을에 카페를 열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는 보광동 골목길에 카페를 열었다. 카페 단골손님인 보광동 어르신들로부터 1950년 6월 28일 새벽에 일어난 한강다리 폭파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다. 그날 밤 폭파로 한강 이북에서 급하게 철수하던 800여 명이 넘는 군인과 경찰, 시민이 죽었다. 용산대폭격으로 남산 아래의 모든 마을이 불타고 용산역이 무너져 내렸다. 보광동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용산폭격은 바로 화탕지옥이었다. 1950년 7월, 보광동에도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붉은 완장을 찬 보광동 좌익청년들은 인민위원회의 청년단원이 되었다. 좌익청년단원들은 서른세 명의 마을 사람을 반동분자로 몰아서 강 건너 여울목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수복 이후 우익청년단장이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라고 뛰어놀던 친구들은 이념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서로를 때리고 죽였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모두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런 탓에 보광동 노인들은 매년 10월이 되면 벌어지는 한강 불꽃축제를 피해서 남산 넘어 피신했다. 폭죽 소리는 보광동을 향해 죽음의 신처럼 다가오던 B29 폭격기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그해 여름의 기억은 살아남은 자들의 어깨 위를 올라타고 다니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고리적 전쟁의 기억은 어르신들의 몸과 마음을 70여년이 지나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옥죄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커피 잔을 앞에 두고 그들이 가슴 속으로 토해내는 이야기를 귀 기울어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뿐이었다.
2. 보광동 콜라텍
카페에서 경로당 회원들을 초대해서 예천 큰 꽃언니의 아흔두 번째 생일잔치를 열기로 했다. 아흔 두 살 예천언니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어르신들은 언니를 색시처럼 곱다고 칭찬했다가 그해 여름 기억을 떠올렸다. 미국 군인들이 마을로 와서 ‘쌕시(Sexy), 새악시’라고 하면서 여자들은 찾아다녔다. 미군들은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상관없이 치마만 두른 여자를 무조건 잡아갔다. 노인정 회원들의 경험과 목격담이 줄이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으로 인해 여성과 주변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깨닫게 했다. 전쟁 이후, 전국에서 사연이 있는 여자들이 미군기지 담벼락 밑으로 몰려와서 ‘헬로, 아이러브유’를 외쳤다. 미국으로 시집가는 것은 ‘인생 로또’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양공주 대부분이 미군들한테 농락당하다가 버려졌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시골 장터는 나이트클럽 조명 같은 반짝거리는 옷과 현란한 꽃무늬 옷이 점령한 지 오래되었다. 그해 여름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처참한 경험과 목격은 무의식 속에 흰옷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트라우마로 화려한 옷을 입고 순수한 민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목숨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도 싶었다.
쌕쌕이 공격에도 살아남은 꽃언니들은 생일잔치가 열린 보광동 카페에서 아픈 허리와 다리를 잊고 신명나게 몸을 흔들었다. 이날 보광동 카페는 카페가 아니라 주민들의 한숨과 아쉬움을 풀어내는 콜라텍이 되었다. 내가 카페를 열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3. 보광동 공동묘지
전설처럼 내려오는 보광동 공동묘지 이야기는 1950년대 후반 서울시가 피난민과 철거민을 위한 택지조성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청은 보광동 공동묘지를 개장하고 피난민에게 분할한다는 공고를 냈다. 공고를 본 피난민들은 서부개척시대처럼 공동묘지 땅을 차지하려고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피난민들은 묘지에 살면서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유관순도 보광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마을 사람들은 관계기관과 재개발 조합에 유관순 추모비를 우사단 언덕에 세워달라고 수없이 청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평당 칠천만 원을 호가하는 땅에 유관순 공원은 끝내 자리를 얻지 못했다.
보광동 카페는 마을 뉴스를 전하고 사람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작은 마을에 사랑방 카페를 만들겠다는 내 꿈도 그렇게 이뤄졌다. 보광동 카페에 어두운 소식이 전해졌다. 건물주가 돌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다. 나는 따뜻한 이웃을 두고 마을을 떠나는 것이 가슴에 걸렸다. 카페 손님들과 마지막 이벤트로 이별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회색빛 서울을 떠나 푸른 동해로 여행을 떠났다.
꽃언니는 죽어서 썩어 문드러져도 그해 여름은 기억되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나는 복숭아 꽃비가 흩어지는 아름다운 보광동에서 폭탄비가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을, 수륙양용전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 유엔군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목격담을 기록하고 싶었다. 미군부대 담장 아래로 불나방 같이 모여든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의 냉대를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고 싶었다. 그것은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영혼을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고령의 나이에 접어든 목격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보광동 사람들이 남긴 ‘그해 여름’ 이야기는 훗날, 개발로 인해 사라진 보광동을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기록이 되기를 바라본다.
보광동 카페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자작나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도화지를 채우듯 장중한 첼로 소리가 카페 문턱을 넘어 빛바랜 골목길로 흩어진다. 한남3구역 뉴타운 개발이 예정된 골목길은 사람의 손길에서 멀어졌다. 하수도를 따라 굽이 이어진 길에는 깨어진 가로등이 방치됐다.
아침 8시이면 나는 어김없이 빗자루를 들고 카페 앞 골목으로 나선다. 낡은 담장 페인트는 벗겨지고 시멘트 바닥은 여기저기 골이 생겼다. 붉고 파란 원색의 광고 전단지가 붙은 담장 아래로는 대부업체 명함이 뿌려져 있다. 나의 하루는 광고 전단지를 뜯어내고 명함을 치우는 일로 시작된다.
보광동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살이가 버거웠다. 은행으로 대변되는 제1금융기관은 그들이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신 고리대금 업체가 주민들을 유혹했다. 높은 이자를 견디지 못한 채무자들은 야반도주를 감행하기도 했다. 보광동은 한때 경기가 좋았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웃 동네인 이태원의 경기가 악화되면서 보광동 사람들도 따라서 힘겨워졌다. 보광동 사람들은 대부분 이태원의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경기가 눈에 띄게 어려워지면서 카페를 찾던 손님들도 줄어들었다. 대출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월세마저 제때 지불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보광동에 불어 닥친 불황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다.
카페를 정돈하고 첫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분홍 꽃무늬가 그려진 잔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우유 거품을 올리고 라떼 펜을 들어 벚꽃을 그렸다. 첫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보광동 풍광을 즐기는 시간이다. 벚꽃 라떼를 들고 볕이 잘 드는 카페테라스에 앉으면 포근한 6월의 햇살이 나를 맞는다. 오래된 느티나무의 초록 잎새가 바람에 가늘게 흔들린다. 내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순간뿐이다.
보석을 세공하듯이 공들여 만든 커피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나만의 수단이다. 카페를 차린 것은 어쩌면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이었다. 내 손으로 한 알, 한 알 커피콩을 고르고 콩을 볶고 갈아낸 커피는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커피는 첼로의 음색처럼 예민하다. 기온과 습도에 반응하고 바리스타의 컨디션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진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에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맛이 난다. 우울하고 불행한 날에는 무겁고 쓴맛이 난다. 매일 아침, 커피머신에서 추출된 첫 커피에는 그날의 감정이 담긴다. 첫 커피를 맛본 뒤 그라인더와 추출 시간을 조정했다. 우사단 자락의 작은 마을, 보광동 카페에서 나는 나를 위한 커피를 만들었다.
1. 우사단 언덕에 서기까지
나만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들이는 시간은 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오롯한 시간이기도 했다. 보광동으로 오기 전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병원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독한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나는 외출하는 것이 싫어서 인터넷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했다. 택배 기사가 현관 앞에 물품을 두고 가면 문만 열고 물건을 안으로 들였다. 옆집에 사는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웃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방 안에서 음지에서 시드는 식물처럼 서서히 메말라 갔다. 텔레비전만이 유일한 벗이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나마 외로움을 덜게 했다. 그렇게 나는 액션 수사물이나 폭력이 난무한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부질없이 시간을 갉아먹었다.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텔레비전에서는 브라질 어느 빈민가에 있는 카페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소파에 누운 그대로 무심히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다큐멘터리는 범죄가 난무한 빈민가에 문을 연 카페가 점차 마을 사랑방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카페는 총탄과 포탄 소리가 난무하는 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로 총탄이 흩어지는 거리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면 속에서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다독거렸다. 아빠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아이들은 도넛을 먹으면서 경찰특공대가 갱단을 체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마을 카페는 어느새 주민들에게 성당이 되었고, 학생들에게 공부방이 되었고, 주민들에게는 심리상담소가 되는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문득 다큐멘터리처럼 힘겹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카페를 열고 싶어졌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그 공간에 나만의 커피를 내어놓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의 카페는 카페인만을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소외되고 억눌린 영혼이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나는 무엇이 그런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인지 알지 못한다. 갑자기 은둔형 외톨이에서 벗어나서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날 나는 내 몸의 일부가 된 소파를 밖으로 내놓았다. 더이상 소파에 누워서 이렇게 텔레비전만 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냄새 가득한 카페를 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이 쉬는 날에는 전문 커피숍을 찾아다니면서 커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깊고 깊은 아로마 향이 커피에 대한 열정을 더욱 이끌었다. 커피의 강렬한 맛은 시들어 있던 뇌를 깨웠다. 커피콩의 원산지 특성을 배우고 다양한 커피 추출방식에 대해서 세심히 익혔다. 하루 내내 다양한 커피를 맛보며 실험실 연구자처럼 커피의 특성을 기록했다. 커피 학원의 수강을 마친 이후에는 커피 고수를 찾아가서 그 나름의 기술을 배웠다. 카페인 과다 섭취로 손끝이 떨려도 상관없었다. 커피 올림픽에 나가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공부했다. 나는 수공예 장인처럼 섬세한 나만의 커피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이고 싶었다.
그 사이 몇 달이 흘렀다. 나는 카페를 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서 여기저기 골목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번듯한 대로변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묻은 골목길에 카페를 열고 싶었다. 사람 냄새 나는 포근한 골목길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듣고 싶었다. 서울에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골목길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재개발 바람이 일면서 수많은 골목길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었다. 골목길에는 뛰어노는 아이들 대신 길고양이를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노인들은 재개발을 앞둔 골목길에 남아서 휑한 눈으로 투자처를 찾는 방문객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아픔과 설렘이 스쳐 지나간 골목길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우사단 언덕배기에는 차가운 한강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아래로 이리저리 굽은 채로 늘어진 골목길은 마치 실핏줄처럼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었다. 곧 뉴타운 개발로 머지않아 사라질 풍경이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길은 얼기설기 얽혀 있는 전깃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서는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얀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고 붉은 고추는 가을 햇살 아래에서 익고 있었다. 나는 그 풍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바로 내가 찾던 곳이었다. 보광동 골목길은 어린 시절의 향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골목길에 있는 비어 있는 상가를 임차하고 인테리어와 전기공사를 했다. 카페 내부를 붉게 칠하고 화려한 샹들리에를 매달았다. 카페는 마치 붉은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은 감나무 같았다. 카페에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눈꽃송이 스티커로 창문을 수놓았다. 2017년 첫눈이 오는 어느 날, 골동품 보석 상자처럼 반짝이는 나의 카페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2. 사람 사는 마을 보광동
처음 카페 문을 열고서 얼마간은 드나드는 사람들은 적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빈자리를 지켜야 했다. 나에게는 손님이 오고 안 오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카페를 열고 싶었고, 내가 원했던 그 카페를 열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손님은 많이 없었지만 내 열정이 가득 담긴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서너 달이 지나는 동안에도 카페를 찾는 사람은 크게 늘지 않았다. 간혹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지만 곧장 발길을 돌렸다. 붉게 인테리어를 한 탓에 중국집으로 착각해 들어오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장면 주세요.’라고 했다가 머쓱해진 ‘우리 동네에 다방이 생겼네.’라고 하고는 돌아섰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우후죽순으로 카페가 들어섰다지만 보광동 사람들에게는 카페가 아닌 다방으로 여겨졌다.
서너 달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페가 골목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 무렵이었다. 어느 날부터 보광동 할머니 삼총사가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카페를 찾는 첫 손님이기도 했다. 그녀들이 입고 오는 의상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늘 화려했다. 그들이 우사단 언덕을 내려올 때면 골목길은 화사해졌다. 명품 옷을 입은 이탈리아 아주머니들에게도 밀리지 않을만한 패션이었다. 나는 그 패션 감각이 부러웠다. 그녀들은 장마가 다가오는 후덥지근한 여름날이면 바다가 연상되는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색깔별로 입고 나왔다. 붉은, 파랑, 녹색 티셔츠가 어우러진 패션은 매번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나는 매일 그녀들을 위해서 커피 원두를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햇살이 강렬한 날에는 과일 향과 초콜릿 맛이 느껴지는 예가체프, 비 내리는 날에는 깊고 진한 와인의 향기가 느껴지는 콜롬비아 수프리모, 태양이 뜨거운 날에는 화산 토양에서 자란 스모키한 향이 느껴지는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골랐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면서도 그녀들에게 내놓을 오늘의 원두를 생각했다. 오늘은 장마가 다가오는 유월의 날씨에 맞게 커피 특유의 흙 내음이 물씬 풍기는 인도네시아 만델링을 골랐다.
유리병에 담긴 원두 통에서 커피콩을 꺼내어서 그라인더로 갈았다. 물을 끓이고 필터에 원두 가루를 담으면 이슬처럼 물방울이 주전자에서 떨어지고 원두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었으며 커피 향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신선한 원두가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한약 다리듯이 정성껏 커피를 내렸다. 이윽고 핸드드립 서버는 진한 커피가 가득 찼다. 만델링은 묵직한 바디감이 매력적인 커피이다. 나는 그녀들의 발랄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하늘색 바탕에 금색 백조가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그림이 새겨진 앤티크 잔에 커피를 담았다.
첫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녀들은 눈 속에서 활짝 핀 동백꽃처럼 화려한 꽃무늬 코트를 입고 카페로 들어왔다. 격식을 갖춘 톤으로 커피를 주문한 그들은 카페 안을 둘러보고는 한강이 내려 보이는 곳에 앉았다. 함박눈이 보광동 붉은 벽돌집 위에 흩날렸다. 마을에 보이는 지붕 위로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내용의 붉은 색 글자를 새긴 깃발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보광동에도 카페가 생겼네.”
가볍게 잔을 든 그녀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커피를 마셨다. 훗날 그들은 골목길을 지나면서 카페에 홀로 있는 내 모습이 눈에 밟혔다고 했다. 보광동에서 그녀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마을회관이 유일했다. 그녀들이 카페를 찾기 시작하면서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목욕 바구니를 들고 카페에 오기도 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한강으로 나가다가도 카페에 들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며 운동하다가 커피를 마시러 들렀고, 어떤 이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알리기 위해 카페에 왔다.
마을 사람들은 카페를 레트로 풍으로 보광동 다방이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도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필요했다. 보광동은 한남뉴타운 3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부동산 투기꾼이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마을은 조금씩 비어갔다. 짐을 가득 실은 이사 트럭이 자주 골목길을 떠났다.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은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뉴타운 개발은 토박이 주민까지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카페테라스에서 커피콩을 볶으면서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카페에서 수다를 떨며 마을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을에 살던 누구는 누구하고 반세기 전에 바람났었고, 누군가는 술 먹고 행패 부리다 경찰에 끌려갔고, 누구는 도박하다가 빚이 생겨 도망갔다는 이야기들이다. 가끔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카페에 나타나면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반세기 전에 예쁜 아줌마랑 바람나서 도망간 아저씨는 보광동 통신원이 전한 것처럼 카사노바가 아니라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였다. 가족을 버리고 총각이랑 살림 차린 아줌마는 입소문처럼 섹시한 요부가 아니었다. 사건 사고의 중심이 되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도망갔다가 대부분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보광동은 작은 시골처럼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서로 다 아는 마을이었다. 대부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밖으로 내보일 만한 살림살이가 없었다. 하루 일당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가끔은 외상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매몰차게 외상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싫은 표정을 감췄다. 하지만 카페 운영은 월세를 겨우 낼 정도로 순탄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평생 장사로 잔뼈가 굳은 할머니 삼총사는 쉽게 눈치챘다. 그들은 아침 장사가 중요하다며 매일 아침 첫 손님이 되어 주었다.
3. 보광동 패션 피플, 꽃언니들
만델링이 담긴 커피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잘 차려입은 삼총사는 수다를 떨며 손톱에 붙인 보석으로 반짝이는 손을 들고 커피를 마셨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과 주름진 손등으로 나이를 대충 가늠해봤다. 팔십은 넘어 보였다. 처음에는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가 혼쭐이 났다. 그 이후, 꽃언니라고 호칭을 바꾸었다. 큰 꽃언니, 작은 꽃언니, 막내 꽃언니라고 주름살 순서대로 불렀다. 그녀들도 꽃언니라는 호칭을 싫어하지 않았다.
꽃언니들도 나를 카페 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등대지기’라고 불렀다. 보광동을 밝히는 등대지기라는 의미다. 나는 사장이라는 거창한 직함보다는 보광동 등대지기라는 호칭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정겨웠고 내가 마을 사람의 일원이 된 것도 같았다. 보광동 카페는 마을 사람의 택배를 받아주고,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쉼터가 되었다. 주말이면 마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강아지, 고양이 손님들이 오는 애견카페가 되기도 했다.
마을의 아저씨 손님들은 카페를 여전히 다방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가끔 호기를 부리며 ‘옆에 앉아봐. 내가 커피 한잔 사지’라며 우쭐댔다. 이럴 때면 꽃언니들은 욕을 바가지로 하며 그들을 내쫓았다. 언니들은 손님이 내게 반말을 하거나 예의 없이 굴 때면 어김없이 욕설을 하며 나무랐다. 그 덕분에 무례하거나 거친 말투로 말을 거는 아저씨 손님들은 점차 없어졌다. 꽃언니들은 그렇게 카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막내 꽃언니,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나는 삼총사 중 가장 어려 보이는 꽃언니에게 물었다. 그녀는 푸른색 마린룩 티셔츠를 입고 바다 빛깔의 네일아트를 했다. 굵은 손마디와 절뚝거리는 걸음 상태로 봤을 때 나이가 꽤 많은 듯했다. 그녀는 보광동의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전쟁의 기억이었다.
“한강다리 끊어질 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어. 보광동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동네를 떠난 적이 없어. 한강다리가 폭파되는 그 밤중에는 떡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강에서 쿵쾅쿵쾅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그때 한강물이 하얗게 솟아오르고 우리 집 대들보가 시계추처럼 흔들렸어.”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그날을 회상하며 카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응시했다. 그녀는 불안한 감정을 숨기려는 듯이 반짝거리는 손톱의 보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나이를 더듬어 보았다. 한국전쟁 70주년이니 70년 더하기 16살, 그녀는 우리 나이로 86세였다. 그녀가 들려주는 한국전쟁의 경험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내게 한국전쟁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 더 먼 옛날 이야기였다. 그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던 그날의 끔찍한 참상들을 때로는 흥분하고 때로는 떨리는 어투로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현충일 방송에서 폭파로 끊어진 한강다리를 봤던 기억이 났다. 잠시 핸드폰으로 한강다리가 폭파된 이미지를 검색해 보았다. 처참한 몰골을 한 한강다리는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꽃언니들이 떠난 카페는 다시 음악 소리만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커피잔을 치우고 테이블을 닦았다. 삼총사가 앉았던 테이블에서 작은 보석이 반짝거렸다. 보광동 막내 꽃언니의 손톱 끝에서 빛나던 푸른색 보석이었다. 꽃언니들이 화려한 네일아트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언니들은 전쟁 통에 신부 옷도 입어보지 못하고 시집간 것이 한이 되어서 한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예천에서 살았던 큰 꽃언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원주에서 살았던 작은 꽃언니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고, 보광동 단오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막내 꽃언니는 큰 사업가가 되어서 가난한 친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언니들은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시집가서 호된 시집살이에 고생하다가 늙어갔다. 몇 년 전 할아버지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루를 더 살지, 일 년을 더 살게 될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나이가 된 언니들은 여자로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어졌다. 할머니가 아닌 여자로,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화려하게 가꾸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그녀들은 일부러 화려한 장신구를 찾았고, 화려한 의상을 찾았다. 홈쇼핑을 보면서 유행하는 패션스타일을 익혔다. 이런 노력 끝에 삼총사는 화려한 꽃할머니로 불렸으며 보광동 할머니 패션계의 리더가 되었다. 꽃할머니들은 그것을 증명하듯 클래식한 바바리를 걸치고 젊은이들이 입는 청바지를 즐겨 입고 보광동 골목 메인스트리트를 걸었다. 사람들이 꽃할머니들에게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말을 던질 때마다 그녀들은 ‘내 나이가 어때서’라며 당당하게 응수하곤 했다.
“카페 등대지기, 우중충하게 옷 입고 다니지 마. 전쟁 났어? 밝게 입어야 좋은 기운이 들어와.”
보광동이 고향인 막내 꽃언니가 내 옷차림에 대해서 한마디 했다. 나는 대개 검은색 앞치마와 검은색 티셔츠, 바지를 마구잡이로 걸쳐 입고 다녔다. 우울증이 생긴 이후로 의상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옷을 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옷을 살 때면 인터넷에서 같은 옷을 두서너 벌 동시에 구매해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녔다. 이런 우울한 옷차림의 나와는 달리 꽃언니 삼총사는 매번 사탕 가게 젤리빈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나왔다. 꽃언니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즐기며 소녀들처럼 자신을 가꾸고 있었다.
4. 소외되어가는 평범한 동네, 보광동
커피 생두를 체에 담아서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가을걷이를 끝내면 시골 할머니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서 못 생기고 깨진 콩을 골랐다. 나도 할머니들처럼 일그러진 커피 원두를 골랐다. 세상일을 잊는데 묵주 돌리기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이 커피콩 고르는 일이다. 미인대회 미녀 고른 커피 원두를 핸드 로스터기에 담았다. 가스 불을 켜고 커피콩을 볶는 로스팅을 시작했다. 로스터기를 좌우로 흔들자, 생두가 타다닥 하는 소리를 내며 균열이 갔다. 눈으로 커피 원두가 구워지는 색을 살피고 코로는 커피 향을 맡았다. 언젠가 방문했던 동티모르 커피 농장의 엄마들은 아침마다 진흙 아궁이에서 커피콩을 볶았다. 동티모르 엄마들이 만드는 커피 맛은 커피전문점의 훈련된 바리스타가 만드는 계산된 커피 맛이 아니었다. 동티모르 흙냄새와 적도의 따가운 태양이 담겨서 원시적이고 정글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비록 카페를 찾는 손님은 적었어도 동티모르 엄마들처럼 매일 사용할 커피를 직접 로스팅했다. 하루에도 수차례 카페테라스에서 커피콩을 볶았다. 단 냄새가 나는 쌉싸름한 커피 연기가 미로 같은 골목길에 퍼졌다.
붉은 지붕을 줄지어 놓은 골목길은 보광동 사람들의 숱한 이야기가 새겨진 곳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 같았다. 고통받고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보광동에 카페를 연 이후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히잡을 뒤집어쓴 아랍 여인네,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러시아 댄서,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필리핀 보모, 큰 키에 화려한 화장을 한 트렌스젠더, 나이든 유흥업소 아가씨, 나이트클럽 바운서 등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보광동에서는 모두 평범한 이웃이었지만, 주류 사회에서는 소외되거나 사회안전망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보광동은 월세가 저렴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 때문에 마을에는 유달리 독거노인이 많았다. 어르신들은 하루 종일 보광동 골목길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녀가 있어도 연락이 끊기 경우가 대다수였다. 카페 골목길에 살았던 할머니도 서른에 과부가 되었다. 용산역에서 밤새 전철을 닦아 번 돈으로 세 자녀를 키워냈다. 하지만 자식들은 할머니를 돌보지 않았다. 지붕이 반쯤 무너져 내린 낡은 단칸방에서 할머니는 홀로 겨울을 났다. 지난겨울에는 다섯 번이나 쓰려져서 병원에 실려 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웃 사람들은 홀로 지내는 할머니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옷도 빨아다주었다. 한 할머니는 홀로 단칸방을 뒹굴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웃 사람에게 발견됐다. 추운 겨울 끝 무렵이었다. 혼수상태로 발견된 할머니는 119 구급대에 실려서 급히 병원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주민자치센터 지원을 받아서 할머니 장례를 치렀다.
보광동에서는 119 구급차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노인들이 많은 마을은 여러 가지 일로 응급차를 불렀다.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노인도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때로는 홀로 사망한 노인이 담요에 쌓여 실려 나갔다. 담요로도 덮지 못한 그들의 발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왔다. 한평생을 열심히 살고도 마지막 길을 홀로 떠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었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보광동 사람들의 상황도 불경기로 절망적이었다. 커피를 마실 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힘겨워하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가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가끔 얼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카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얼음을 봉지에 담아 건넸다. 경제불황에도 보광동 사람들은 여전히 정이 많았다. 카페를 지나치다 붕어빵을 건네는 이웃이 있었다. 내가 커피를 내놓으면 노인들은 스티로폼 박스에 키운 상추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보광동 이웃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시원한 음료를 건네고 그들의 안부를 묻는 것뿐이었다. 이웃들은 그 작은 관심에도 고마워했다.
5. 투덜이 스머프의 고릿적 상처
팔순이 넘은 어르신이 마닐라삼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하와이 꽃이 그려진 화려한 셔츠를 입고 카페에 왔다. 보광동에서 유명한 투덜이 스머프였다. 그는 매번 투덜거렸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에도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지나는 오토바이에도 짜증을 냈다. 벚꽃비가 내리는 날에는 벚꽃이 발에 차인다고 투덜거렸다. 햇빛이 강렬한 날에는 눈이 부시다고 투덜댔다. 그는 영락없이 만화영화 스머프의 주인공 투덜이 같았다. ‘투덜이 스머프’라는 별명이 그에게는 맞춤옷처럼 어울렸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오래전의 나처럼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한때 햇살이 스며든 창틀에다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누가 한마디라도 건네면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우울증으로 분노조절장애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투덜이 스머프도 경로당 친구들과 입씨름하다가 감정 조절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를 참지 못하고 전봇대를 걷어찼다가 발등을 다치기도 했다. 그의 모습은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올 때마다 각별하게 신경 써서 대접했다.
나는 반고흐가 평생 마셨다는 예멘에서 온 골든 모카 마타하리 원두를 분쇄기에 넣었다. 이 원두커피를 내리면 예멘의 흙냄새와 초콜릿 향미가 피어올랐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를 탄 상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커피를 유리잔에 담고 얼음 조각을 넣었다. 그의 테이블에 커피잔을 올려놓고 꽃언니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을 걸었다.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보광동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보광동에서 태어나서 보광동에서 평생 살아왔다고 자랑을 했었다.
“고릿적 이야기를 왜 꺼내.”
투덜이 스머프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머리가 아픈 듯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건강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무릎은 부어올랐고 활력이 없었다. 그는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시끄럽다며 짜증을 냈다. 그의 취향에 맞추어 50년대 올드 팝으로 바꾸었다.
나도 한때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좋아했고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나서야 스스로를 뒤돌아볼 수 있게 됐다. 내가 아픈 만큼 남도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을 때, 그제야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방의 입장도 헤아려 보면 더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투덜이 스머프의 짜증도 마음의 상처로 생겼을 것이라고 마음을 고쳤다. 그가 짜증을 낼 때마다 상한 기분을 감추고 상냥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다행히 카페에 흐르는 올드 팝은 그의 기분을 맞춘 듯했다. 오래된 노래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추억과 아픔이 담겨 있다.
병원 치료를 받고 돌아오던 보광동 언니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투덜이 스머프를 발견하고 들어왔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광동에서 함께 지내온 이웃사촌이었다. 그 두 사람은 여태껏 보광동 고향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아래 보광마을에 있던 개풍유치원과 한남초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한국전쟁도 함께 겪었다. 보광동 언니가 투덜이 스머프네 집안으로 시집가면서 이웃사촌에서 집안 아저씨와 조카 사이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사이는 남녀의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마치 오랜 동무처럼 말이나 태도가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나는 탯줄을 묻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친근함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탯줄을 묻은 땅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땅에서 태어나 생명을 받고 평생을 살며,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이었다.
투덜이 스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보광동 언니에게 “What a beautiful day!”라고 인사를 건넸다. 감정 기복이 심한 그는 우울하면 짜증을 냈고 기분이 좋으면 영어로 인사하거나 올드 팝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맞은편에서 앉았던 보광동 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철부지 어린시절에 했을 법한 몸짓으로 투덜이 스머프의 팔을 툭툭 치며 놀려댔다.
“투덜이 아저씨 기억나? 우리 쌍굴다리 밑에서 솜 포대기는 총탄이 못 뚫는다고 그 더운 여름에 솜이불을 둘러쓰고 숨었잖아. 그 밤에 다리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철수하던 군인들이 트럭과 함께 한강 물로 퉁퉁 빠졌는데, 그때 그 소리를 듣고 아저씨가 놀라서 바지에 오줌 지렸잖아. 지독한 오줌 지린내가 아직도 기억난다니까.”
보광동 언니가 투덜이 스머프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한강다리가 폭파되던 날을 기억해냈다. 깊은 밤, 마을 사람들은 한강에서 들리는 폭음을 듣고 경원선 철도 아래 쌍굴다리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가 말하는 쌍굴다리의 철둑길은 지금은 서울-문산간을 연결하는 기차가 달린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국군은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한강다리에서 불꽃이 솟아오르고 폭발음은 주변 마을을 흔들었다. 한강다리가 끊긴 줄 모르고 철수하던 군용트럭이 한강물에 빠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보광동 사람들은 6월 27일 밤에 마을 원두막에 모여서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서울 시민 안심하라는 말을 철떡 같이 믿고 피난을 가기 위해서 쌓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강다리가 폭파됐다. 서울 시민들의 피난길이 끊어진 것이다.
보광동 언니가 어린시절 오줌싸개 이야기를 꺼내자 투덜이 스머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보광동에서 나름,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 그가 어린 시절 한강다리 폭파 소리에 오줌 쌌다는 이야기는 품위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조카는 아직도 쓸데없는 걸 기억해.”
그는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창가에서 노들섬이 누워 있는 한강대교를 바라봤다. 8차선 다리 위로 수많은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말마다 한강대교를 자전거로 달렸어도,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서울의 어느 곳보다 노들섬에서 볼 수 있는 석양을 좋아했다. 노들섬의 노을은 매번 가슴을 애잔하게 했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자전거를 타고 자주 노들섬으로 석양을 보러 갔다. 한강다리에서 섬으로 내려서면 석조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다리 교각을 만난다. 푸르스름한 이끼가 피어오른 교각에는 스티로폼으로 사람이 거꾸로 떨어지는 형상을 누군가가 만들어서 붙여 놓았다. 나는 그 다리 교각이 한강 폭파 때 겨우 살아남은 교각인지는 몰랐었다.
그날 밤 폭파로 한강 이북에서 급하게 철수하던 800여 명이 넘는 군인과 경찰, 시민이 죽었다. 그중에는 투덜이 스머프의 한남초등학교 짝꿍이던 숙이도 있었다. 숙이는 경찰인 아버지를 따라서 피난 트럭에 올랐다가 다리에서 폭사했다. 내가 보았던 스티로폼으로 만든 사람형상은 그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그때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마음이 아파 왔다. 칠십여 년 전 한강 다리 폭파로 수많은 사람이 다리에서 폭사했지만 그 사건은 역사로만 남았다. 노들섬에도 한강대교에도 비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작은 추모비나 명판조차 없다.
6. 인민군 죽이자고 떨군 폭탄에 불탄 보광동
카페 창문 너머 한강을 순회하는 비행기가 보였다. 작은 상업용 비행기인 것 같았다. 보광동 언니와 투덜이 스머프는 말문을 닫고 비행기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비행기만 보면 긴장했다. 언젠가 헬리콥터가 보광동 상공을 비행하고 있을 때 혈압이 급하게 올라서 119를 부르기도 했다. 119대원들은 용산기지에서 항공작전이 있을 때마다 보광동 어른들은 급격한 혈압상승이나 심장마비를 자주 일으킨다고 했다. 대부분의 계모임에서 회원들은 모아둔 돈으로 해외여행을 즐기지만 보광동만은 달랐다.
보광동 어른들은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했다. 대다수의 고령의 회원들은 제주도도 가보지 않았다. 보광동 언니는 미국에 사는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탔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 우황청심환을 먹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기내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숨이 막혀 왔다. 미국 공항에 도착할 즈음에는 파죽음이 되었다. 한국전쟁기 투하된 대량의 폭탄은 평생 이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투덜이 스머프는 두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관자놀이를 손으로 세게 누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용산에 장맛비처럼 폭탄이 떨어졌어. 우리는 안심하라는 대통령 말만 철떡 같이 믿었는데. 과수원도, 집도, 학교도, 뒷동산에서 놀던 염소도 폭탄을 맞았어.”
투덜이 스머프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폭격이 시작되자 김치 항아리를 보관하던 구덩이에 숨었다. 그 구덩이 안에서 폭발음과 비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부림을 쳤다. 폭격이 끝나서야 겨우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불타버린 집을 사이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우성과 통곡이 메아리쳤다. 이태원초등학교도, 서빙고초등학교도, 한남초등학교도 그날 모두 불탔다. 수많은 친구가 폭격으로 죽었다. 폭격을 맞은 병원도 무너졌다. 투덜이 스머프는 용산 폭격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 7월 16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전투기는 용산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창공에 날쌘 매가 보이면 들판의 토끼는 숨을 굴이 있었다. 하지만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용산사람들은 그대로 폭격을 당했다. 그 말을 듣던 보광동 언니도 얼굴이 상기된 채 이야기를 쏟아냈다.
“한강에 빨래하러 나가는데 하늘이 새까맣게 폭격기가 뒤덮었어. ‘이 박사 처갓집 정찰기’가 잠자리처럼 떠서 시끄럽게 소리를 냈어. 정찰기가 한강 일대를 순회하고 B-29폭격기를 불렀어. 그다음 폭격기가 무겁게 비행해 왔어.”
폭격기를 본 보광동 언니는 놀라서 한남동 느티나무 그루터기에 난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7월 16일 폭격으로 남산 아래 모든 마을은 불탔다. 서울역도 용산역도 폭격을 맞아서 무너져 내렸다. 효창동, 용문동, 한강로는 일주일 넘게 불타올라서 연기가 자욱했다. 동빙고는 모래더미만 남았고 폭격 맞은 언니네 집은 무너져 내렸다. 신도 복숭아 산지로 유명했던 보광동 과수원도 잿더미로 변했다. 십자가를 높게 매단 보광동 교회마저도 폭격으로 파괴됐다. 김유신 장군의 사당과 제갈공명 사당도 불탔다. 한강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 안으로 피신했던 사람들도 죽었다.
투덜이 스머프는 눈을 감고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나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꺼냈다.
“지하철역에서 교회쟁이들이 불신지옥이라고 하는데, 난 신을 믿지 않아. 죄 없는 사람들이 폭격을 맞을 이유가 없었어. 온 동네가 불바다, 바로 화탕지옥이었어.”
투덜이 스머프는 손바닥을 활짝 펴고 폭격기가 한강 위를 낮게 비행해서 마을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1950년 7월 어느 날, 정찰기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면서 한강을 순회하다가 피난민을 실은 우마차를 봤다. 인민군 마차로 오인한 정찰기는 폭격기를 불렀다. 빠른 속도로 날아온 폭격기는 한남동 굴다리에 포탄을 투하했다. 이날 굴 안에 숨었던 피난민들은 모두 불타서 온전한 시신이 없었다고 한다.
“폭격기를 피해서 도망치면서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신령님, 보살님 등 세상에 있는 신이라는 신은 다 불렀어. 그런데 그 누구도 폭격을 멈추게 하지 않았어. 이제 내일 모래면 구십인데 무슨 지옥이 무섭겠어. 그때가 바로 화탕지옥이었지.”
보광동 언니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전쟁이 시작되고 물자공급이 끊겼다. 폭격 때문에 한강으로 낚싯배를 띄워서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었다. 한남동 나루터에서 대기하다가 폭격을 맞은 인민군 전차가 불에 탔다. 그곳에는 불에 타다 남은 군량미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에 탄 쌀로 죽을 쑤어서 나누어 먹었다. 화약 냄새가 심했지만 살기 위해서 먹어야 했다. 어린 손자들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던 투덜이 스머프네 할아버지는 서울 수복 전에 결국 굶어 죽었다.
그해 여름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은 대개 특이한 행동을 했다. 마을 잔치가 열리는 날이면 음식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자주 했다. 마을 잔치 때마다 돼지 머릿고기를 더 많이 가지고 가려고 하는 다툼이 자주 일었다. 그렇게 바둥거리며 챙긴 음식은 봉지 그대로 냉장고에 들어가서 결국 상한 채로 나왔다. 그 세대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심했다. 마을 잔치에는 모두 배불리 먹을 만큼의 음식이 준비되었지만 나이든 어르신들은 항상 음식을 더 챙기려고 칭얼대었다. 보광동 패션 리더 꽃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경로당 잔치 때마다 남은 음식을 싸 와서 냉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집어넣고 상할 때까지 잊어버렸다.
나는 그동안 어르신들이 음식에 집착하는 것을 치매의 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보광동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세대들이 그토록 음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굶주림을 경험한 세대는 본능적으로 코브라처럼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었다. 기아로 생긴 트라우마였다. 나는 그들을 치매 노인네라고 치부하고 음식을 싸 온 봉지를 볼 때마다 잔소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끄러워졌다.
폭격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라고 한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내가 경험한 배고픔이란 단식원에서 몸보신 하면서 며칠 굶어 본 것뿐이었다.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는 단식이었지만 너무나 힘든 경험이었다.
그해 여름 보광동 사람들은 논 한 마지기도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타박만 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보광동 언니의 주름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해 여름, 언니는 옹이가 박힌 손으로 한강 모래사장을 긁으면서 조개를 캐고, 남산자락에서 풀뿌리를 캐서 어린 동생들을 먹였다. 전쟁이 끝난 후, 언니는 영양실조로 한동안 시력을 잃었다.
7. 사람이 죽는데 이념이 무슨 소용
카페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왔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투덜이 스머프와 보광동 언니는 말을 잊은 채 카페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웃 편의점에 가서 막걸리를 사서 카페로 돌아왔다. 카페에서는 커피나 차만 마신다는 규칙은 보광동 카페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손님들이 우울하거나 답답해하면 술을 사 와서 같이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광동 언니에게 한 잔 건네고 투덜이 스머프에게도 건넸다. 우리는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또 다른 한 잔을 마셨다. 연거푸 두 병을 비웠다. 세 병째 뚜껑을 열었을 때 언니의 얼굴이 벚꽃 빛으로 물들었다. 카페 음악 파일에서 트로트 메들리를 골랐다. 트로트에서 흘러나오는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누구나 한번 왔다 가는 인생’이라는 후렴구를 따라 부르면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취기가 오른 나는 흥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사이 투덜이 스머프의 유치원 친구가 골목길을 지나다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항상 뉴욕 양키스 야구단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야구단 잠바를 입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뉴욕에서 보광동으로 돌아온 그를 양키스라고 불렀다. 그는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었다. 뉴욕에서 자리 잡고 열심히 살았지만 매년 7월이 되면 술이 고팠다고 했다.
해방 이후 보광동 청년단원들끼리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져서 좌우 극한대결로 치달았다. 낮에는 한국청년단원이 밤에는 민족청년단원이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끌고 갔다. 용산 철도국에서 일하던 양키스의 큰형은 유명한 한국청년단의 행동 대원이었다. 큰형은 빨갱이를 잡는 일이 구국의 길이라고 하면서 마을 좌익청년들을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북측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마을 좌익청년단원들이 완장을 차고 우익청년단원이었던 큰형을 잡으러 왔다. 눈치를 채고 이미 피신한 큰형 대신 작은형을 끌고 갔다.
1950년 7월, 보광동에도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붉은 완장을 찬 보광동 좌익청년들은 인민위원회의 청년단원이 되었다. 막노동꾼과 머슴들은 인민위원회 산하의 청년단이 되었다. 그들은 팔에 붉은 별이 새겨진 완장을 차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사상교육을 명분으로 유지들을 모아 놓고 사람들의 손을 뒤로해서 통신선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서른세 명의 마을 사람을 반동분자로 몰아서 강 건너 여울목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시신을 던진 모래 구덩이에서 아기를 업은 엄마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용산 인민위원회로 몰려가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곧 인민재판이 열렸다. 평양에서 온 인민재판장은 주민 학살은 청년단원들의 과잉행동이라고 결론 내리고 주동자들을 끌고 갔다. 양키스의 가족도 반동분자 명단에 올라 있었는데, 주동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처형이 중단되면서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불안하고 초조했다.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그를 잡으러 올 것 같았다. 보광동을 도망치듯이 떠나서 뉴욕으로 갔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공원에 앉아서 한가하게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을 때도 누군가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잡한 뉴욕 지하철에서 동양인 얼굴만 봐도 그를 잡으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집에서도 언제나 창문 커튼을 내렸다. 그해 여름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술을 먹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기도 했다. 교민이 다니는 대형교회에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웃 형들이 눈이 벌게져서 대나무 죽창을 들고 도망간 큰형 대신 작은형을 끌고 가던 장면이 수시로 생각났다. 작은형이 갇혀있는 아현초등학교 담벼락을 붙잡고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악몽 같은 그해 여름 기억은 귀신처럼 몸에 붙어 떼어지지 않았다. 잊으려고 도망쳐 봐도 소용없었다. 그해 여름의 악몽으로 운전대를 놓쳐서 대형 교통사고도 냈었다.
그는 마침내 고향 보광동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투덜이 스머프와 함께 다녔던 개풍유치원 동기들을 만나서 묵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전쟁을 함께 겪은 친구들이 유일했고 편안했다. 그는 막걸리 잔에 술을 따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사촌끼리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고 죽여야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라고 뛰어놀던 친구들은 이념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서로를 죽였다. 큰형이 빨갱이라고 잡아서 때린 사람들은 이웃집 형들이었다. 인민군이 진주하고 큰형을 잡으러 온 이들은 마을에서 친하게 지내며 같이 밥을 먹던 형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은 강남에 수륙양용전차를 세워놓고 남산을 향해서 며칠 동안 포격을 해댔다. 그때 남산 아랫마을은 모두 불탔다. 보광동 아이들은 우사단 언덕에서 유엔군 전차가 물에 둥둥 떠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유엔군 전차가 한강을 건너오자, 마을 사람들은 두 손을 머리 높게 들고 마을 광장에 섰다. 엄마 등에 업힌 아기들의 울음 속에 사람들은 석빙고 얼음 조각처럼 전차 앞에서 얼어붙었다. 마을 대표로 병사들과 이야기하러 나선 투덜이 스머프의 아버지 도포 자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는 가슴을 겨눈 총구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투덜이 스머프는 카페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두통으로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집에도 유엔군 전차가 왔어. 한국 병사가 ‘손 드세요’라고 말하자, 우리는 대문 앞에서 손을 번쩍 머리보다 높게 들었어. 유엔군 병사가 집을 수색하고, ‘Okay’라고 말한 이후에야 한국 병사가 ‘손 내리세요’라고 했어. 전차는 우리 집 수색을 끝내고 과수원 하던 윗집으로 갔어. 그 집에 홀로 있던 누나는 도망가다가 죽었어. 군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도망가다가 그 자리에서 총격을 받아서 죽었어. 겨우 열일곱 살이었는데. 총소리가 나서 가보니 이미 누나는 죽어 있었어. 내가 정말 좋아했는데, 복숭아꽃처럼 예쁜 누나였는데…….”
투덜이 스머프는 길에서 얼굴 볼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소녀만 보면 과수원집 누나를 생각했다.
마을 수색이 끝난 후 유엔군 전차는 서울 시청을 수복하기 위해서 남산을 넘어갔다. 인민군은 양진고개 너머에 있는 경원선 철로 옆에 호를 파고 유엔군에 대항했다. 수복 이후 인민군 참호에는 군인들이 모두 총격을 받아서 죽어 있었다. 마을에 국군이 들어온 이후에는 우익청년단장이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그는 인민군 밑에서 완장을 찼던 좌익청년단원들을 찾아내고 마을 공터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죽였다.
보광동 언니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자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1.4 후퇴로 중공군이 보광동에 들어오는데 정말 짱꼴라였어. 맨발로 운동화를 눌러 신고 옷도 진흙투성이였어. 중공군이 행군하면서 밭에서 날호박을 따서 먹는 모습이 생각나. 꼭 참외마냥 날호박을 깨물어 먹었어.”
보광동 언니네에도 중공군이 찾아와서 보리쌀을 털어갔다. 중공군은 값나가는 물건이나 식량을 빼앗았다. 마을 어르신이 ‘중공군 새끼들은 먹을 것도 안 갖고 전쟁 나왔나.’라고 할 정도였다.
보광동 언니가 벌써 다섯 번째 막걸리 병을 들었다. 기포가 빠지도록 병뚜껑을 숟가락으로 톡톡 쳤다. 주저 없이 병뚜껑을 비틀어 연 그녀는 막걸리잔에 술을 콸콸 부었다.
“빨래하러 한강에 나갔는데 강 이편에는 인민군과 중공군이, 강 저편에는 국군 수천 명이 죽어서 얼어붙어 있었어. 아직 스물도 안 된 어린아이들이 새우등 꼬부라진 것처럼 허리도 펴지 못한 채로 죽어 있었어. 무섭기보다 너무 불쌍했어.”
보광동 꽃언니는 정월이 되면 나물과 막걸리를 준비해서 한강으로 나갔다. 그해 겨울 한강에서 총에 맞거나 얼어 죽었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였다. 카페 문을 닫을 무렵이면 언니는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한강에서 돌아오곤 했다.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고 풀 죽은 모습으로 막걸리 병을 내밀었다.
8.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마음도 먹지 못하고
나이든 어르신들이 카페에 올 때마다 나는 사실 불편했다. 어르신들은 종일 카페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우익정당을 칭송하거나 반대쪽 정당을 욕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들의 의견에 조금이라도 이견을 나타내면 어김없이 젊은이들이 모두 빨갱이가 되었다고 화를 불같이 냈다. 정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출입을 금지할 수도 없었다. 대신 어르신들이 카페에 나타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었다. 나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때리고 죽인 보광동 청년들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어르신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푸념을 노인네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귀를 닫았다. 그들을 투덜거리면서 카페에서 밀어내기에 바빴다. 노인네들이 빨리 세상을 떠나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찾아온다고 믿기도 했다.
그해 여름, 투덜이 스머프는 대통령만 믿고 피난길에 나서지 않았다가 폭격기가 보광동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을 보며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끼리 서로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 모든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만 했고, 결국 트라우마로 남았다. 젊어서는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해 여름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강에 비행기만 나타나도 식은땀이 나고 공포에 숨쉬기도 어려웠다. 피곤에 쓰러져 잠들면 시체가 너부러진 거리가 꿈으로 나타났다.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트라우마는 병이 아니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단계 의료기계업체의 상품홍보 매장에 가거나 사이비 종교 모임에도 나갔다. 그해 여름을 잊기 위해서 몸서리치게 노력해 봐도 소용없었다. 술에서 깨면 고통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식들에게 그해 여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고릿적 이야기라고 타박만 당했다.
어디에도 고통을 토로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기까지 했다. 명치가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도 버거웠다.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잠들기가 두려웠다. 꿈속에서는 폭격에 집이 불타고 피가 낭자한 거리의 모습들이 보였다. 자식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참혹했던 과거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술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슈샤인 보이였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구두통을 메고 미군을 찾아다녔어. ‘헬로 슈샤인, 원 달러’ 하면서.”
그는 미군 군사고문단이 머무는 을지로호텔 주변을 떠돌면서 구두를 닦았다. 군화에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짝반짝하게 광을 내었다. 구두를 닦고 돈이 생기면 쌀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말없이 쌀 봉지를 받아들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자식을 바라봤다. 전쟁 이후에도, 그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용산 폭격으로 집과 과수원이 모두 불타서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영어가 유창해지면서 용산기지에 하우스보이로 취직이 됐다. 군부대 안에서 구두를 닦고 청소를 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는 병사들이 귀국하면서 버린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여든 살이 넘은 지금도 미국 드라마나 뉴스를 자막 없이 본다. 병사들이 군장을 메고 행군하면서 불렀던 군가나 팝송도 여전히 기억했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잊힐 거야. 누가 그해 여름 이 마을에서 폭격 맞아 죽고 굶어 죽은 아이들을 알겠어. 그 이야기하니까 더 우울해져. 아이스 워터 좀 가져와 봐.”
투덜이 스머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테이블을 쳤다. 나는 급히 컵에 얼음을 넣고 소다와 레몬과 바질을 담았다. 시원한 여름용 카페 음료였다. 카페 스피커에서 빌리 할리데이의 ‘글루미 선데이’가 흘러나왔다. 그는 음료를 마시다가 생각에 빠졌다. 언니도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9. 한평생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남아
햇살이 가득한 유월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해 여름도 햇살이 찬란했다고 한다. 그날은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 폭격기가 폭탄을 수없이 떨어뜨려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듯이 빌리 할리데이의 애달픈 목소리가 카페를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미동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해 여름으로 돌아간 듯했다. 나는 방해되지 않도록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페 부엌으로 몸을 감췄다.
투덜이 스머프는 의자에 반쯤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다.
“I was a little hungry boy였어. 여기 더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투덜이 스머프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잠시 비틀거렸다. 양키스가 그를 부축했지만 그는 뿌리치고 카페를 떠났다. 전쟁 이후, 그는 비가와도 우울했고 해가 떠도 우울했다. 때로는 밥을 먹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었다. 작은 실수에도 버럭 화를 내고, 투덜거리거나 시비를 걸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인마저도 그를 떠났다. 가까운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다. 전쟁의 기억은 서서히 그의 영혼을 파괴했다. 폐쇄공포증마저 그를 괴롭혔다. 치료가 필요했지만 먹고 사는 일이 먼저였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모두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런 탓에 보광동 노인들은 매년 10월이 되면 벌어지는 한강 불꽃축제를 피해서 남산 넘어 피신했다. 폭죽 소리는 보광동을 향해 죽음의 신처럼 다가오던 B29 폭격기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보광동 언니는 막걸리 일곱 병을 비우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를 부축해서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우사단 언덕을 올라 달팽이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 막다른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주택에 도착했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아픈지 손바닥으로 가슴을 탁탁 쳤다.
“마음이 아파. 왜 아픈지는 몰라. 절에 가도 교회에 가도 마음이 아파. 평생 마음이 답답해. 어떻게라도 이야기하며 풀고 싶데, 누가 잡초 같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겠어.”
그녀는 비틀거리며 블랙홀처럼 어두운 집 안으로 사라졌다. 창문에 불이 켜지고 텔레비전이 켜졌다. 드라마 볼륨이 골목길까지 울려 나왔다. 저녁 시간대의 막장 드라마가 방송 중이었다. 배우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울음소리가 어두운 골목길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언니도 나처럼 지독한 외로움을 잊으려고 드라마를 틀어놓고 잠드는 것 같았다.
왕이 기우제를 올렸다는 우사단 언덕에서 어둠에 잠긴 보광동 아랫마을을 바라보았다. 한강변 고층아파트에서 내뿜는 불빛으로 한강은 보석처럼 빛났다. 그 빛은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간 참혹했던 시간을 묻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우리 조상들은 죽은 사람이 한이 맺히면 가뭄이 들고, 한을 풀어주면 하늘이 비를 내린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왕은 기우제를 올리기 전에 궁녀들을 속가로 돌려보내서 시집을 보내주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다. 한을 풀어주면 마른하늘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그해 여름에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계절의 변이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겨울에는 눈도 내리지 않았고 봄이 와도 봄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는 보광동 카페 손님들로부터 처참한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역사책으로부터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장맛비처럼 내리는 폭격 속에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해 여름의 기억은 살아남은 자들의 어깨 위를 올라타고 다니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잊으려고 도망쳐 봐도 소용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더욱더 생생해져 갔다.
그들에 비하면 내 고통의 무게는 커피 가루만큼이나 가벼웠다. 나는 그동안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었던 작은 일에 실망하고 아파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해’라고 외치며 주변인들을 미워하기만 했다. 나와 달리 그들의 고통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폭격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구걸도 했다. 자존감도 잃어버렸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보광동 사람들은 전쟁 트라우마를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깊은 밤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꽃언니와 투덜이 스머프의 이야기가 내내 떠돌았다. 이제라도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스런 짐 보따리를 같이 나누어 들고 싶었다. 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일도 누군가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 고통스런 짐 보따리를 잠시 내려놓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해 여름이 남긴 상처를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름진 손을 잡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들이 아픈 고통을 훨훨 털어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다시피 연 마을 카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이웃들이 숨겨왔던 고통과 사연도 알게 되었다. 고릿적 전쟁의 기억은 어르신들의 몸과 마음을 70여 년이 지나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옥죄고 있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처절한 기억의 고통은 가슴 속에서 옹이가 되어서 자랐다. 그 옹이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을 답답하게 했고, 얼음송곳처럼 가슴을 찔러 가위 눌렀다. 나는 그 옹이가 녹아내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 가슴 깊숙이 쌓인 옹이를 풀어내는 현실적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커피잔을 앞에 두고 그들이 가슴 속으로 토해내는 이야기를 귀 기울어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보광동 카페는 가슴에 옹이를 새기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갔다. 나는 옹이가 박힌 이들을 위해서 항상 문을 열었다. 나는 카페에 찾아오는 그들을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준비했다.
보광동 콜라텍
그 어느 해보다 심한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6월 초여름의 상긋한 햇살도 미세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습기가 겹친 무더위는 한증막 같은 날을 만들어냈다. 습한 날씨는 급기야 사람의 몸과 마음까지도 지치게 만들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에는 습한 기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고층건물이 일렬로 들어선 한강로 대로변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그해 여름 가해진 용산폭격으로 이곳 한강로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고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서 무너졌다. 사람들은 양동이로 물을 담아 불길을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관포탄을 퍼붓는 전투기는 다시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한강다리가 끊겨서 피난을 가지 못한 서울 시민이 1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포탄을 피할 마땅한 방공호조차 없었다. 무자비한 폭격에 그대로 노출된 수많은 사람이 집과 생명을 잃었다.
그해 여름 부산으로 피난 간 이승만 대통령은 목사들을 불러서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바람처럼 그해 여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전투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격해서 서울을 폭격했다.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장마철에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1.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한강로
한강로 고층건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도로는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삼각지를 지나다가 이면도로에 자전거를 세웠다. 오래된 듯한 시간의 흔적이 물씬 묻어있는 어느 명패 상점 앞에서 물통을 꺼냈다. 시원한 물이 입안에 흘러들어가서야 겨우 시야가 넓어졌다. 내가 서울에서 가장 즐겨 찾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산타워 아래로는 미군기지의 나지막한 붉은 지붕과 한강로 고층건물이 어우러져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어부들이 모여 사는 한강변 마을인 둔지미에 일본군사령부를 건설했다. 그로 인해 그곳에 살던 둔지미 마을 사람들은 보광동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들은 둔지미 마을에 생긴 일본군사령부에서 노무자로 일하며 고향 둔지미 마을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본 패망 이후, 미군은 일본군 기지를 인수하면서 그곳에 미8군사령부를 건설했다. 2029년이 되면 이 용산기지는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둔지미 마을이 아닌 용산민족공원이라는 녹지공간이 조성될 예정이다. 높은 철조망이 백여 년 만에 걷히고 모든 군사시설이 철거되어 동양화 화폭처럼 아름드리나무와 철새가 초원을 수놓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둔지미 마을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삼각지도 보광동처럼 재개발을 앞두고 있었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만들어져 유곽으로 조성된 적산가옥이 남아 있다. 유곽을 가득 메웠던 가난한 어린 아가씨들의 흔적은 이제는 지워졌다. 단정한 글씨로 명패라는 나무간판이 붙은 가게 안으로 60~70년대의 다양한 명패들이 전시된 것이 보였다. 자개로 학 문양이 새겨진 명패, 투명 플라스틱 명패, 스테인리스 명패 등이 세월의 흐름에 맞춰 전시되었다. 장군, 대령, 중령 소령 등의 명패도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나는 명패 가게 사장에게 카페 간판을 부탁했었다. 그는 단정하고 수려한 글씨로 자작나무에 ‘보광동 커피’라고 새긴 작은 간판을 만들어 주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보광동에 뿌리내리고 살라는 덕담도 덧붙였다. 그의 가족도 그해 여름의 악몽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용산폭격으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집은 무너져서 흔적도 남았다. 그는 열한 살의 나이에 사남매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그는 글씨를 썼다고 했다. 연필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막대기로 글씨를 썼다. 수십 년 써 내려간 글씨는 그의 삶처럼 올곧고 굳건했다. 그의 단정한 성품처럼 가게도 흐트러짐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몸을 달구던 열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나는 자전거에 다시 올라 서울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남영역과 서울역을 지나서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2. 그해 여름 기억박물관
오백 년 전통의 남대문 시장도 폭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 남대문 시장도 서울 폭격으로 전소되었다. 지금과 달리 잿더미였을 남대문을 상상하며 상가로 들어섰다. 대도상가 낡은 유리문이 삐걱거렸다. 그 안으로는 양동이에 담긴 싱그러운 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시장 출입구에 있는 꽃가게에서 분홍장미 아흔두 송이를 주문했다. 카페에 손님이 많지 않아 자주 꽃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봄이 오는 날에는 노랑 프레지아나 튤립을 사러 제법 찾았던 곳이다. 여름이 오면 수국을 사서 유리병에 꽂았다.
문득 오래전에 네팔 산골 마을에서 보았던 비닐봉지 화분이 생각났다. 가난한 산골 아주머니들은 화분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닐봉지에 꽃을 심었다. 마을에서는 검정색 비닐봉지 화분에서 활짝 피어난 메밀꽃과 유채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집집마다 늘어선 비닐봉지 화분의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을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나는 그 마을의 꽃처럼 보광동 카페도 침체된 마을을 밝히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아주머니가 포장지에 쌓인 장미 다발을 두 손으로 건넸다. 제법 묵직한 꽃다발에서는 향긋한 꽃내음이 물씬 쏟아 나왔다.
오늘은 카페 단골손님인 예천 큰 꽃언니의 생일이다. 그해 여름, 스물두 살이었던 예천 언니는 어느덧 아흔두 살이 되었다. 카페에서 그녀의 아흔두 번째 생일잔치를 열기로 했다. 수입상가에 들려서 초콜릿을 사고 문구상가에 들러서 파티용품을 구입했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장미 다발을 싣고 남대문을 벗어났다. 자전거로 가파른 남산 고갯길을 힘겹게 넘어서 해방촌 언덕에 다다랐다.
남산 아랫마을인 해방촌에 모여 살았던 이북 피난민들은 수공업으로 니트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들이 만든 니트 제품은 남대문 시장에서 유명해졌고 급기야 한국 니트 생산을 이끌었다. 한때는 골목길마다 실을 짜는 소리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과 동남아 공장에 밀려나고 니트를 생산하던 사람들도 마을을 떠났다. 마을에 남은 노인들은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해방촌 언덕에 앉아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SNS를 통해 맛집으로 알려진 경리단을 거쳐 용산구청까지 자전거는 막힘없이 달렸다. 유엔사 사령부를 지나서 동빙고 가파른 언덕길에 접어들면서는 힘겹게 페달을 밟아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양키스는 유엔군 폭격으로 사망한 큰형을 동빙고 언덕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그는 폭격이 멈춘 밤 시간을 이용해서 큰형을 드럼통에 넣고 장작을 쌓아 불을 붙였다. 동빙고 언덕은 폭격 맞아 죽은 보광동 사람들을 화장하느라 밤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가 형을 화장한 동빙고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봤다.
전쟁 전 보광동은 복숭아 꽃비가 내리고 푸르른 한강물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꼬마들은 겨울이면 동빙고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한강을 향해 내려갔고, 여름이면 물장구치며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그 마을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제3세계 빈민촌처럼 얼기설기 지은 집이 마을에 가득 찼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전거에 다시 올라서 언덕길을 빠르게 내려갔다.
강한 햇살을 피할 나무 그늘이 부족했던 보광동은 아침부터 양은냄비처럼 부글부글 달아올랐다. 카페테라스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아침 청소를 시작했다. 커피 기계가 예열될 즈음, 야간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나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그녀들은 쉰 목소리로 카페인 함량이 적은 더치커피를 주문했다. 눈가에는 반쯤 떨어진 속눈썹이 늘어져 있었고, 입술에는 희미해진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 고단한 밤을 보냈던 것 같았다. 그녀들은 대개 낮에 햇볕을 쬐지 못하고 밤에 일해야 했다. 그래서 얼굴이 종이인형처럼 창백해 보였다. 카페 의자에 축 늘어진 상태로 앉은 그녀들은 아이스 더치커피로 밤새 마셨던 독한 술을 해장했다. 더러는 출근 전 미장원에서 공들여 만든 머리를 풀어헤치고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햇살이 따가워질 즈음에서야 잠에서 깨어나 우사단 언덕길을 힘없이 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그들은 다시 카페를 찾아왔다.
예천 큰 꽃언니의 아흔두 번째 생일잔치에는 경로당 회원 전원이 모이기로 했다. 카페를 푸른빛과 은빛 풍선으로 장식하고 경로당 단체 사진을 걸었다. 단체사진을 찍던 날 꽃언니들은 졸업사진을 찍는 학창시절 소녀마냥 들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네일 샵에서 반짝이는 인조 손톱을 붙이고 파마를 하고 새 옷을 입고는 카메라 앞에 섰다. 낡은 경로당 문 앞에 해바라기 꽃처럼 활짝 웃는 언니들이 서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쩌면 나이가 많은 꽃언니들의 마지막 사진이 될 것 같기도 해서 가슴이 찡해졌다.
순천 언니는 생일잔치를 며칠 앞두고 목욕탕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급히 119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언니는 골반이 상해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고령의 언니들이라 하루하루가 조심스러웠다. 꽃언니들 가운데 누가 하루만 보이지 않아도 다들 궁금해 하고 불안해했다. 꽃샘추위가 지나는 동안에는 세 명의 경로당 회원이 세상을 떠났거나 요양병원으로 갔다. 그래서인지 꽃언니들의 저녁 이별 인사는 남달라 보였다. 언니들은 저녁에 헤어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아침 해 뜨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서로를 만날 때면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반가워했다. 그녀들은 카페에 와서도 내 손을 다정하게 붙잡고 안부를 물었다. 손님이 많았는지,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를 습관처럼 물었다. 그런 행동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닭살 돋는다’고 타박하면 꽃언니들은 ‘우리는 배터리가 다 되어서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언제 저승길 갈지 몰라’라고 응수했다. 제주에서는 해녀 한 분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바다 박물관 하나가 없어진다고 한다. 꽃언니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박물관이 하나 사라지게 된다.
3. 색시를 찾아다니는 군인들
보광동 언니가 집에서 만든 떡케이크를 들고 왔다. 원주 언니는 막걸리 다섯 박스를 카페로 배달시켰다. 나는 구순이 넘는 할머니 생일잔치에 막걸리 다섯 박스는 과하다고 말렸지만 원주 언니는 막걸리 정도는 문제없는 나이라며 고집을 피웠다. 구순이 넘은 회령 언니를 선두로 하여 평택, 송정, 춘천, 원주, 산청, 김포, 강화, 파주, 익산, 인천 출신의 언니들이 모였다. 경로당 남자 회원들도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다. 유독 투덜이 스머프만 보이지 않았다. 6월이 되면 투덜이 스머프의 우울증은 더 심해졌다. 그는 문을 잠그고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는 두문불출했다. 투덜이 스머프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경로당 회원 모두가 그를 걱정되었지만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예천 언니는 노방으로 만든 보라색 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고 가볍게 걸어왔다. 누가 봐도 예천 언니를 아흔두 살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대나무처럼 곧은 허리로 흐트러짐 없이 걸고,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는 유달리 도드라져 보였다. 말을 할 때마다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예천 언니의 아름다움은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처럼 성형수술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단아한 모습은 삶이라는 격한 고통 끝에 생겨난 자연 속의 보석처럼 순수했다. 카페에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눈길을 모았다. 경로당 회원들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박수로 예천 언니를 맞았다. 남자경로당 회원들은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내뱉었다.
“아이고 큰누님, 어서 오셔요. 아직도 색시 같구만요.”
경로당 회장 할아버지는 예천 언니를 주빈석으로 안내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내가 뭔 색시야. 쭈글쭈글하고 다 늙었는데. 이제 거울도 보기 싫어.”
투정하는 모습을 보인 예천 언니는 카페 벽면에 걸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 만족스러워했다. 큰언니는 우아하게 주빈석에 앉아서 립스틱을 꺼내고 화장을 고쳤다.
‘색시’라는 말에 파주 언니는 정색하며 나무라듯 말을 뱉었다.
“형님, ‘색시’ 그 말은 하지 마셔요. 잊어버렸어요? 미국 놈들이 마을에 와서 어눌한 발음도 ‘쌕시, 새악시’ 했잖아요.”
파주 언니가 영어 악센트가 강한 발음으로 ‘쌕시(Sexy), 새악시’를 흉내 냈다. 순간 둘러 모인 언니들 표정이 어색해졌다. 언니네 마을인 파주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전장이 된 파주는 공방전이 펼쳐지는 접경지대였다. 아군과 적군이 번갈아 마을을 빼앗고 뺏기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미군은 수시로 집집마다 돌며 여자를 찾았다. 젊은 처녀가 없으면 나이든 할머니도 끌고 산으로 갔다. 언니는 군인들을 피해서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어느 날 이태원 골목에서 파주 언니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언니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전단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언니의 어깨를 툭 치고 인사를 건넸지만 언니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골목길 안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주변에는 여러 명의 건장한 미군이 군복을 입은 채 걷고 있었다. 미군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언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골목에서 나왔다. 칠십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언니는 여전히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카페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말문을 닫은 남자회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막걸리만 연신 들이켰다. 나는 그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지만 어찌할지를 몰랐다. 그저 언니들의 눈치만 살폈다. 누구라도 선뜻 나서서 분위기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페에는 에어컨의 바람 소리만 들렸다.
겨우 예천 언니가 말을 이었다. 언니는 징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난 아직도 그 기억이 나. 그놈들이 총 들고 ‘색시, 색시’ 하면서 여자들을 찾아다녔어. 한번은 이웃집 여자애가 빨래하러 나가다가 미군한테 잡혔어. 흰둥이들이 그 애를 야산으로 끌고 가면서 초콜릿을 집에 던져놓고 갔지. 해 질 무렵에야 여자애가 머리를 산발하고 터벅터벅 걸어왔어. 옷고름은 풀어 헤쳐지고 넋이 나간 모습이었어. 그 이후로 정신이 이상해진 그 애는 마을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몇 년 뒤에는 저수지에 빠져 죽었어.”
그해 여름, 예천 언니는 스물두 살이었다고 했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자, 유엔군 사령부는 예천에 지상군을 투입하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가했다. 유엔군은 인민군을 색출하기 위해서 마을을 드나들었다. 미군 병사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사립과 방문을 죄다 걸어 잠갔다. 할머니들은 딸이나 손녀들에게 일부러 더러운 옷을 입히고 얼굴에 검댕이 숯을 발랐다. 언니는 군인을 피해서 어두운 다락에 숨어 있었다. 미군들은 나이가 많거나 어린 것과 상관없이 긴 머리에 치마만 두른 사람을 보면 무조건 잡아갔다.
테이블에는 손 타지 않은 초콜릿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 바구니를 살짝 치웠다. 오전에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파티 음식으로 사 왔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언니들이 초콜릿에 손을 안 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천 언니네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미군이 겁탈을 하고 비스킷이나 레이션을 던져놓고 갔다. 그들에게 초콜릿은 달콤한 기억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속이 탄 듯 원주 언니가 막걸리를 병째로 마셨다. 그녀는 입에 묻은 막걸리를 냅킨으로 닦아 내면서 말했다.
“젊은 놈들이라 여자 냄새만 맡아도 환장했지. 칠십 년이 지났어도 그놈들이 두꺼운 손으로 여자들을 잡아채던 일이 안 잊혀져. 우리 국군도 똑같았어. 앞장서서 여자들을 찾아내서 흰둥이에게 바쳤어. 늙은 여자, 젊은 여자 가리지 않았어.”
원주 언니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는 군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이야기하며 혀를 끌끌 찼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아야 했다. 가슴 한켠이 곽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내게 군인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창시절 관람했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진 멋진 제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씩씩하고 아름다웠다. 칼같이 잘 다린 군복을 입고 어린아이를 구해내고, 마을 지키는 군인의 모습은 어린 소녀들의 영웅이기도 했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전진하는 군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영화 속에서 가공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언니가 본 군인은 늑대처럼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면서 잡아가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배우고 믿었던 진실이 거짓이 되는 순간 내 가슴이 미어졌다.
원주 언니는 가슴에서 치미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에어컨 바람을 세게 맞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마을 언니도 빨래하러 나가다가 미군을 만났어. 미군이 언니에게 총을 들이대며 쏼라쏼라 하다가 ‘핸즈 업!’이라고 했대. 언니가 손을 머리로 올리니까, 대번 언니를 숲으로 끌고 가서 윤간을 했어. 미군이 가고 나서 국군이 또 했나봐. 무려 세 번이나. 언니 집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남자한테 시집보냈대. 그런데 언니는 남편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 사실을 말했는데, 그 얘길 들은 남편이 펑펑 울더래.”
원주 언니는 마을 언니 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멨다. 그 남편은 아내의 참담한 과거를 알고 얼마나 절망했을까. 나는 그 남편이 전쟁 중에 겁탈당한 아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잘 살았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군인들이 피난민 천막으로 들어와서는 손전등으로 여자들을 찾아냈어. 나는 할머니 치마 속에 숨어서 겨우 살아났지.”
원주 언니는 춘천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서 군인들을 피하기 위해서 머리를 삭발하고 남장을 했다. 언니는 한창 꾸미고 다닐 청춘 시절에 머리를 삭발한 것이 한스러워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물결이 흐르는 듯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돌멩이를 삼킨 듯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토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느끼한 군인들의 손아귀를 피해서 급히 도망치는 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주 언니는 언니들의 말을 들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언니는 목에 메어서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미군들이 껍을 씹으면서 총부리를 들고 우리 마을로 왔어. 인민군을 수색하다가 여자들만 있으면 겁탈했어. 그 집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그 집으로 가지 못했어.”
오랜 세월 너머로 숨었던 기억을 더듬어 말하면서 파주 언니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았다고 했다. 이후에도 그 집안사람들을 마주하지 못했다. 노인정 회원들의 경험과 목격담이 줄이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쟁으로 인해 여성과 주변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깨닫게 했다. 언니들이 내뱉는 단어마다 절규가 담겼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해 여름, 겁탈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처녀들은 아이를 임신하면 유산시키기 위해서 간장을 먹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등의 갖가지 민간요법을 동원해 아이를 지우려 했다. 아이가 유산되지 않은 처녀들은 결국 마을을 떠났다. 전쟁이 끝난 후, 고아원마다 혼혈 아이들이 넘쳐났다.
꽃언니들은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위로했다. 시대를 잘 못 만난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신 막걸리 잔을 들어올렸다. 가슴이 먹먹해진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손님들 시선이 미치지 않는 부엌으로 갔다. 세차게 물을 틀어놓고 싱크대에 쌓인 컵을 씻었다. 눈물이 분홍 고무장갑 위에 뚝뚝 떨어졌다.
4. 박씨 아저씨의 운동화
보광동 골목길에 처음 왔을 때, 나를 매료시킨 것은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이 뛰어놀던 모습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처럼 보이는 어르신들은 유창한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후에 태어난 혼혈인으로 대부분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카페에 자주 오는 박씨 아저씨도 70년대에 혼혈인 친구들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의 인적이 뜸해지면 카페에 와서 영어로 신나게 떠들었다. 나는 박씨 아저씨가 카페에 들어서면 음악 파일에서 ‘섬집 아기’를 선곡했다. 그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우사단 언덕에 올라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렸다. 그는 다양한 버전의 섬집 아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버전의 섬집 아기 화음을 즐겼다. 눈을 지긋하게 감은 박씨 아저씨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빨래하러 가다가 겁탈당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렇게 세상에 나은 그는 회색지대에 사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한국에서는 미국 사람이었고, 미국에서는 한국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했던 삶은 고단했고 힘들었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박씨 아저씨는 뉴저지에서 건물 청소부로 일했다. 새벽녘에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할 때마다 보광동이 생각났다. 보광동에서는 피부색에 차별받지 않고 마을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피부색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아이들은 팔도 사투리로 떠들면서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고 장마철마다 한강물이 범람하여 대야를 타고 다녔던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그곳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광동이 더욱더 사무치게 그리웠다. 자식들의 만류에도 그는 결국 보광동으로 돌아왔다.
박씨 아저씨는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우사단 언덕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우사단 언덕은 세월에도 변함없이 여전히 한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는 자주 보광동 시장에서 새 운동화를 사 왔다. 운동화가 여러 켤레 있었지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 모았다. 이웃들이 과도한 운동화 쇼핑을 흉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매번 새 운동화를 신은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카페에 나타나곤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새 운동화를 신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종일 공장에서 일했지만 그에게 새 운동화를 사 줄 수 없었다. 그는 수줍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가 새 운동화를 사 올 때마다 즉석 사진을 찍어서 카페 마을 소식판에 붙였다. 일 년 동안 스물한 켤레의 각양각색의 운동화가 마을 소식판에 나란히 붙었다. 그와 함께 활짝 웃는 카페 단골손님 사진도 가득 붙었다.
5. 흥겨운 보광동 마을 콜라텍
송정리 언니가 집에서 가져온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고 음악을 틀었다. 신나는 트로트 반주가 흘러나왔다. 카페 문 앞에 ‘대관으로 영업 종료’라는 메모를 붙였다. 간접 조명만 남겨놓고 메인 조명도 껐다. 흥이 넘쳐나는 카페는 보광동 콜라텍으로 변신했다.
“아이고. 징한 세월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들 생일잔치나 합시다.”
송정리 언니는 마이크를 들고 ‘백세인생’을 부르기 시작했다.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꽃언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택 언니가 마이크를 받아들고 노래를 이어 불렀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꽃언니들은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세상을 잊은 듯 춤과 노래를 이어나갔다.
때마침 카페를 지나던 단골손님들도 슬그머니 들어와서 할머니들과 합석했다. 뮤지컬 공부하는 학생도, 해장 커피를 마시러 온 아가씨도, 마을 삼촌도 카페로 모여들었다. 오늘의 주인공 예천 언니가 마이크를 들고 ‘보약 같은 친구’를 불렀다. 그 노래에 맞춰 모두가 일어나서 신나게 몸을 흔들어댔다.
어느새 카페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찼다. 흥겹게 노래 부르던 예천 언니가 ‘사는 날까지 같이 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라는 노래를 마쳤다. 그 순간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카페의 밝은 조명이 꺼지고 보광동 언니가 새벽부터 만든 떡케이크를 내어왔다. 케이크에는 아흔두 개의 촛불이 빈틈없이 꽂혔다. 노래방 기계에서 생일 축하 반주곡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말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어 양초 불을 껐다. 꽃언니들은 ‘건강하게 백오십 수 하세요!’라며 박수를 쳤다.
1928년생 예천 언니는 체 게바라와 동갑이고 아문센이 남극 탐사하던 해에 태어났다. 영특한 머리와 예절 바른 학생으로 일본인 선생님에게 사랑을 받았다. 언니는 중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담임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해서 안동역으로 나갔지만, 귀환 일본인 속에서 선생님을 찾을 수 없었다. 언니도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꿈을 접고 시집을 가야만 했다.
아궁이 앞에 앉을 때마다 학교에서 배웠던 시를 외웠다. 그 순간만은 학교에 가 있는 듯했다. 아기가 등 뒤에서 칭얼거려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언니는 학교 의자가 아니라,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서글펐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된 이후에는 예천 집으로 일본에서 편지가 왔다. 제자를 걱정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였다. 언니는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꿈을 접었다고 차마 답장하지 못했다.
예천 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다들 고마워, 나도 내 목숨 줄이 이리 길지 몰랐네.”
예천 언니네 고향 예천에도 네이팜탄, 기관총, 로켓포가 쏟아졌다. 언니는 평생 어둡고 답답한 곳에 가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을 동네 사람들은 언니가 내년에도 무탈하게 생일잔치를 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활짝 웃는 예천 언니의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보광동 언니가 떡 상자를 열어서 백설기, 찰떡, 콩떡, 경단을 꺼냈다. 나는 하얀 백설기를 베어 물었다. 보광동 언니가 만든 떡은 조미료와 설탕으로 맛을 내지 않았다. 눈가루처럼 소복하게 쌓인 쌀가루 본연의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보광동 언니는 일곱 살 때부터 떡 장사하는 엄마한테 떡 조기교육을 받았다. 서울 수복 이후, 딸이 군인에게 겁탈당할 것을 두려워한 엄마는 언니를 강제로 시집보냈다. 어느 날 아기를 업고 물지게를 진 언니는 시댁으로 돌아오다가 교복을 입은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녀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평택 언니가 신사임당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만든 음식을 꺼냈다. 녹두전에는 실고추를 이용한 화조도가 수놓아져 있었다. 꽃언니들은 각기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꺼내 펼쳤다. 서울식 갈비찜, 원주식 추어탕, 함경도 가자미식혜, 강원도 총떡, 경기도 설야맥적, 충청도 도토리 묵국, 전라도 낙지호롱, 홍어찜, 안동 찜닭 등이 연이어 나왔다. 팔도 음식의 고수이자 음식 평론가로서 자질이 충분해 보인 언니들이 만든 음식은 인사동의 유명 한정식보다 훨씬 더 맛있고 화려했다.
익산 언니가 카페 단골손님인 뮤지컬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중국에서 뮤지컬이 좋아서 무작정 한국으로 건너온 학생은 마이크를 들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를 부르며 노래를 시작했다. 할머니 팬클럽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췄다. 목욕탕 바구니를 들고 가던 아주머니들이 카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뮤지컬 학생은 서너 곡 더 부르고 노래를 끝냈다. 언니들이 나에게도 마이크를 넘겼다. 나는 목청껏 ‘사랑의 배터리’를 불렀다. 언니들을 그 노래를 합창하며 따라 불렀다.
한동안 신이 나서 춤추며 노래하며 놀던 언니들의 얼굴이 모두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할머니 팬클럽도 흥분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언니들은 무릎을 탁탁 치며 웃었다. 신이 춤출 때는 관절염 통증을 잊었는데, 자리에 앉은 이후에야 통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보광동 언니는 백설기를 썰어서 잔치 구경을 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미용실 파마 모자를 쓰고 온 아주머니, 목욕탕 바구니를 들고 온 아주머니도 백설기 봉지를 하나씩 들고 카페 문을 나섰다. 나는 식구와 가족이라는 참된 의미를 여기서 느낄 수 있었다. 식구란 DNA로 연결된 가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식구의 진정한 의미는 한자리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보광동 사람들은 마을 잔치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 식구가 되었다.
6. 백의민족의 상징은 반짝이
카페 단골손님 중에 새하얀 빛깔의 원피스를 차려입고 온 아가씨가 있었다. 꽃언니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그 아가씨를 바라봤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부러워하고 저마다 예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람은 인생의 배터리가 다 되어 갈 때는 후회와 미련만 남는다고 한다. 꽃언니들은 전쟁 때문에 잃은 자신의 청춘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가씨가 카페를 떠난 이후에는 ‘하얀 목련 같다’고 부러워했다.
유달리 아가씨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봤던 평택 언니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전쟁으로 잃어버린 젊은 시절을 한탄했다.
“전쟁 때는 흰옷도 못 입었지. 흰옷만 입어도 기관총 사격을 당했어.”
평택 언니는 피난을 다니다가 전투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전투기는 모기떼처럼 흰옷 입은 피난민을 따라다녔다. 총알을 피해서 수차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흰옷을 입고 논에서 일하던 작은 아버지도, 빨래를 하던 큰어머니도 엄지손가락만한 총알을 맞고 죽었다.
평택 언니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무심코 그녀의 꽃무늬 신발과 은사가 섞인 반짝이 양말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꽃이 가득 그려진 붉은 블라우스에 화려한 문양이 찍힌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평택 언니의 현란한 패션을 볼 때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공작새 깃털을 몸에 꽂고 다니는 까마귀 같다고 생각했었다. 결코 ‘흰옷을 입으면 총 맞아 죽는다’는 언니의 가슴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을 알지 못했다.
월미도 언니도 목이 마른지 얼음물을 벌컥거리면서 삼켰다. 언니도 갈라진 목소리로 인천상륙작전으로 마을이 불탄 마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논으로 쌕쌕이가 빙빙 돌다 낮게 날아오면서 기관총을 쐈어. 비행기가 얼마나 낮게 날았는지. 나는 조종사 얼굴도 봤어. 비행기에는 별표 미군 표시와 NAVY라고 쓰여 있었어. 우리 마을은 네이팜에 모두 불타고 친구들도 기총사격으로 죽었어.”
월미도 언니는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지붕을 뚫고 기관 포탄이 쏟아졌다고 했다. 급히 마당으로 나와 보니 미 해군 전함들이 인천 앞바다 가득 떠 있었다. 갯벌로 피했지만 전투기의 기총사격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흰옷을 벗어서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월미도는 네이팜탄이 투하되어 불타올랐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해 온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을 싹쓸이 바꿔버렸다. 대한민국 시골 장터는 나이트클럽 조명 같은 반짝거리는 옷과 현란한 꽃무늬 옷이 점령한 지 오래되었다. 단아한 색상의 옷은 이제 시장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할머니마저도 흰색 모시저고리와 옥색치마를 벗어던지고 꽃무늬 대열에 합류했다.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도 꽃무늬가 만개한 옷을 입고 반짝이 모자를 썼다. 생선 파는 아저씨도 단풍나무 색깔의 윗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썼다. 시장 상인이나 시장을 보러 온 사람들은 움직이는 유흥업소 광고판 같았다. 화려한 색깔의 꽃무늬 의상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찾기 어려웠다.
어쩌면 우리가 백의민족의 상징인 흰옷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옷을 입는 이유는 전쟁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여름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처참한 경험과 목격은 무의식 속에 흰옷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트라우마로 화려한 옷을 입고 순수한 민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목숨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도 싶었다. 과학자들은 암울한 경험과 기억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유전된다는 생물학적 증거를 속속 밝혀내고 있다. 가족 사이에 유전의 영향은 최소한 3대는 간다고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꽃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전국의 할머니들이 왜 그토록 반짝이는 옷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암울한 전쟁의 기억은 전쟁을 겪지 않는 다음 세대에도 유전된 듯했다. 이제 사람들은 흰옷 대신 단풍 색깔의 옷을 입고 전국의 산과 들을 물들이고 있다.
7. 산 목숨과 죽은 목숨은 ‘한 끗 차이’
보광동 콜라텍 영업이 종료되면서 카페에는 다시 차분한 음악이 흘렀다. 꽃언니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품에서 호랑이가 담배 물던 옛날이야기를 듣던 것처럼 꽃언니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평균 팔순이 넘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니들의 부모, 조부모까지 거의 200여 년에 걸친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언니들의 이야기는 역사책에서는 기록되지 않는 민초들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했다.
익산 언니는 동학군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조부모가 있었다. 투덜이 스머프네 조부모는 둔지미 마을에서 쫓겨나서 보광동으로 온 후 일본군 노무자로 일했다. 회령 언니의 약혼자는 낙동강 전선에 장교로 참전했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산청 언니네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버렸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역사였다. 하지만 이런 역사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어 내려온다. 역사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어야 한다.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 내가 보광동 꽃언니들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유였다.
익산 언니는 버릇처럼 말끝마다 ‘산목숨과 죽은 목숨은 한 끗 차이’라고 했다. 계단에서 넘어져서 ‘한 끗 차이’로 목숨을 구했고, 더위에 설사병이 나도 ‘한 끗 차이’로 살았다고 했다. 그녀는 1950년 7월 초, 이리 장날에 시장에 갔다가 전투기가 이리역을 집중 폭격하는 것을 보았다. 이리역의 직원이 역사 지붕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다급히 흔들며 아군인 것을 알렸지만 전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역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기차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이리 언니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한 끗 차이’로 많은 사람이 생과 사를 달리했다.
춘천 언니도 피난 가다가 홍천 삼마치 고개에서 엄동설한에 얼어붙어 있는 수많은 피난민 시체를 보았다. 춘천 언니가 홍천을 지나가기 전날, 폭격기는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했고, 9km에 달하는 삼마치 고개 일대에서는 피난민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보광동 언니는 대전 가는 피난 기차에 올랐다가 폭격을 맞았다. 기차가 탈선했지만 그 ‘한 끗 차이’로 살았다.
꽃언니들은 오늘의 삶이 마치 마지막 날인 듯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한남 노인복지관 노래자랑에도 나가고 용산노인회 체육대회도 갔다. 병원에 열심히 다니고 마을 청소를 하기도 했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한강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도도 열심히 했다. 꽃언니들은 삼신할미로부터 복 받은 ‘한 끗 차이’ 인생이라서 조금이라도 허투루 살면 안 된다고 ‘쎈’ 목소리로 강조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부끄러웠다. 언니들의 고통에 비하면 나의 고통이 발끝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하찮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절망하면서 나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었다. 나를 점지해 준 삼신할미조차도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을 것 같았다. ‘한 끗 차이’로 목숨을 이어온 언니들의 삶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8. 헬로, 아이 러브 유
그나마 시집이라도 갈 수 있었던 꽃언니들은 행운아였다. 용산에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전국에서 사연 많은 여자들이 보광동으로 흘러들어왔다. 대부분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성폭력을 당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철조망을 두른 용산기지 담벼락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아이들은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헬로, 기브 미 초코렛’을 외쳤다. 양공주는 용산기지 담벼락에 서서 ‘헬로, 아이 러브 유’를 외치며 미군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보광동 언니 집에 세 들어 살던 양공주는 지리산 토벌대에 부모를 잃었다. 어린 동생 셋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열일곱 소녀는 몸을 팔아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으로 시집가는 것은 ‘인생 로또’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양공주 대부분이 미군들한테 농락당하다가 버려졌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절망으로 한강에 뛰어들거나 죽으려고 농약을 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송정리 언니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굽어지지 않는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언니의 손마디는 늙은 느티나무 뿌리처럼 굽었다.
“그 추운 겨울에 양공주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후커힐에 서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송정리 언니는 후커힐 초입에서 이십여 년 넘게 식당을 운영했었다. 식당의 단골손님들은 대부분 양공주였다. 그중에는 미군에게 버림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운 이도 많았다. 언니는 그녀들을 위하여 죽을 쑤어주기도 하고 엄마처럼 다독여주며 보살폈다. 양공주 중에는 성공적으로 미국으로 시집을 갔지만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으로 시집간 아가씨 중 하나는 남편이 사막 한가운데에 그녀를 버렸다. 그 아가씨는 며칠을 걸어 가까스로 사막을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녀는 수년 만에 다시 보광동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끝내 미쳐버렸다. 운 좋게 한국에 돌아온 아가씨들은 호구지책으로 양공주의 길로 다시 들어섰다. 언니는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아가씨들을 후커힐에서 다시 만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정에 굶주린 아가씨들은 명절이 되면 선물을 사 들고 송정리 언니를 찾아왔다.
양공주들은 다른 마을에서는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았지만 보광동에서는 함께 사는 이웃이었다. 주기적으로 양공주 단속 기간이 되면 경찰은 이태원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보광동 아이들은 예쁜 누나들이 경찰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양공주의 손을 잡고 친누나인척하며 경찰을 속이고 검문소를 통과하게 도왔다. 마을에서는 그녀들이 식당, 미장원, 화장품 가게, 옷가게, 술집 등 마을 매출을 올려주는 주요한 손님이기도 했다.
보광동에서는 명절날 고향에 가지 못한 그녀들을 위해서 식당 문을 열었다.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양공주들이 마을을 떠난 이후로 보광동은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그만큼 양공주들은 보광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었다. 송정리 언니는 나이든 양공주의 안부가 걱정되어서 수소문해서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언니는 그 양공주들이 이제 독거노인이 되어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
9. 도깨비시장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서 임대료가 가장 싼 곳으로 알려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광동으로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보따리만 들고 보광동으로 온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은 골목은 아이들이 멸치 떼처럼 몰려다녔다. 초등학교는 학생들로 미어터졌다. 가난한 마을이어서 더러 잡도둑도 있었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가 사라지고 마당에 말려놓은 고추도 없어졌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이웃과 벗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팔도 사람들이 모여서 우사단 언덕에 시장을 만들었다. 남대문이나 동대문처럼 전통적인 시장이 아니라 오후만 되는 열리는 시장이었다. 도깨비불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렸다. 도깨비시장에서는 서울말 대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이북 사투리가 통용되었다. 건강한 몸 하나만 믿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시장에서 노점을 하거나 물건을 나르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시장 상인이나 손님 모두 가난했지만 보광동은 고향마을처럼 푸근한 곳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른 품을 내어주었던 보광동은 이제 머지않아 재개발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회령 언니는 뉴타운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언니는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피난 내려와서 둥지를 틀고 산 보광동이 이제는 내 고향인데, 이 나이에 어디 가라고.”
섭섭함과 아쉬움에 회령 언니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언니는 피난 내려와서 여러 곳을 떠돌다가 보광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언니의 남쪽 고향 보광동은 고층 아파트 건설을 앞두고 있었다. 회령 언니뿐만 아니라 나도 뉴타운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탈리아 영화를 볼 때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지렁이처럼 긴 식탁에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음식을 먹는 장면이 부러웠다. 비록 이탈리아의 풍광 좋은 시골 마을은 아니지만, 보광동은 내 우울증을 떨쳐 버리고 꿈을 이룬 곳이었다. 영화처럼 카페 테이블을 길게 붙여 놓고 보광동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삶의 가치를 느낀 곳이었다. 뉴타운 개발이 나의 행복을 던져진 유리잔처럼 잔인하게 깨어버릴 것 같았다.
보광동 언니가 막걸리 병을 들고 다니면서 잔을 채웠다. 언니는 침울한 기분을 감추려는 듯이 유쾌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자 걱정하지 마시고 막걸리 한 잔 더 하세요. 우리가 쌕쌕이 기총사격에도 살아남았는데.”
보광동 언니가 건배를 외쳤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단숨에 막걸리를 들이마셨다. 송정리 언니는 노래방 기계에서 흥겨운 트로트 메들리를 불러냈다. 쌕쌕이 공격에도 살아남은 꽃언니들은 우사단에 노을이 내릴 때까지 아픈 허리와 다리를 잊고 신명나게 몸을 흔들었다. 이날 보광동 카페는 카페가 아니라 주민들의 한숨과 아쉬움을 풀어내는 콜라텍이 되었다. 내가 카페를 열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10. 고통의 무게
우사단 언덕의 꼬막집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밤업소 아가씨들은 화려한 옷을 나비처럼 차려입고 골목길을 바쁘게 걸어갔다.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며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그녀들의 삶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카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스피커 볼륨을 올렸다. 오늘밤에도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가 담긴 곡을 틀었다. 밤업소 아가씨들은 오늘 밤은 거친 주정뱅이 손님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트렌스 젠더 바에 나가는 아가씨들이 킬힐을 신고 커피를 사러 왔다. 카페 문을 닫는 시간이 되자, 술 취한 일본 남자들을 데리고 오는 ‘따찌’라고 불리는 아가씨들이 해장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갔다.
마음이 점차 무거워졌다. 지난 칠십여 년 간 변함없이 이어진 보광동의 모습이었다. 아가씨들이 늙어 가면 그 자리는 다른 젊은 아가씨들이 대체했다. 용산기지 철조망에 불나방처럼 몰려들었던 수많은 아가씨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시집이라도 갔을까? 정착해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까? 아니면 노년이 되기도 전에 병이나 사고로 죽었을까? 나는 그녀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한국전쟁 전후에 파주에서 찍힌 양공주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그녀는 미군 손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는 로마의 휴일에 출연한 오드리 헵번의 커트 머리를 하고 땡땡이 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고전영화의 주인공처럼 청아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전시장에 걸린 그녀의 사진 앞에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육체를 떠나면 영혼의 무게는 21그램이라고 한다. 영혼도 무게가 있다는데, 고통도 무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의 무게가 있다면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람이 가진 모든 고통의 무게를 측정해서 1등급에서 10등급까지 등급을 매긴다면 전쟁의 참상을 겪은 여성의 고통은 아마도 최상위 등급일 것이다. 어쩌면 계량 불가한 장외 등급일 것도 같았다. 무덤 속까지 성폭력의 고통을 숨기고 사는 여자들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은 여자에게 더욱더 가혹한 것이었다.
꽃언니들도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가슴 속 비밀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차마 그녀들에게 그해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볼 수 없었다. 가슴 바닥 깊게 가라앉은 기억의 조각을 인양한다는 것은 더욱 고통을 가중하는 일일 것이다.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성폭력의 경험이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방황을 했었다. 나는 언니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성폭력의 기억은 다른 고통보다도 더 심하게 자존감을 뒤흔든다. 모멸감은 뇌의 편도체에 영구적으로 남는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 악성 바이러스처럼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도 없게 된다. 그 기억은 지뢰처럼 가슴 속에 숨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해서 영혼을 무너뜨린다. 그해 여름의 기억은 꽃언니들의 건강을 무너뜨렸다. 우울해진 꽃언니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았다. 온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워지고 팔다리는 축 늘어져서 가누기도 힘들었다. 꽃언니들은 경로당에 등록을 하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정해 놓으며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 하루를 경로당에서 보내면서 서로에게 기대어 고통을 극복해 나갔다.
꽃언니들은 명치끝이 칼끝에 꽂힌 것처럼 아파 올 때마다 반짝이 옷을 입고 콜라텍으로 갔다. 가슴이 천불이 난 것처럼 답답해지면 노래방에 가서 악을 쓰며 노래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막걸리를 사 들고 카페에 왔다. 그녀들은 전쟁 전 해맑았던 소녀 시절의 이야기를 즐겨 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에 겪은 일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녀들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놀기 좋아하는 할머니 정도로만 이해했다. 정작 그녀들이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처절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러 갈 때마다 마음이 저려 왔다. 그녀들의 활달한 행동 뒤로 가려진 아픔이 아련하게나마 내게로 전해졌다.
나는 히말라야 산간마을 비닐봉지에서 피어난 메밀꽃처럼 그녀들의 얼굴을 화사하게 만드는 그 미소가 좋았다. 가끔은 꽃언니들을 위해서 카페에 트로트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들여놨다. 언니들은 가슴에서 울화가 올라올 때마다 카페에 들려서 수다를 떨었다. 막걸리에 취한 날에는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바라기처럼 활짝 핀 얼굴로 다시 카페에 찾아왔다. 그녀들의 기나긴 삶의 여정 속 끝자락에 자리한 보광동 카페는 그해 여름의 아픔과 상처를 품어 안고 그들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보광동 공동묘지
전국적으로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열기로 달아오른 아스팔트에서는 쉼 없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숨이 턱 막히고 내 몸이 솥뚜껑에 올려진 삼겹살처럼 자글자글 구워질 것 같았다. 우사단 산자락 마을 사람들은 그 더위를 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전기요금 걱정에 선풍기도 마음 놓고 틀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할 곳을 찾았다. 낮에는 에어컨이 나오는 자치회관이나 경로당에 가서 더위를 식혔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에는 모기장을 들고 한강으로 나가거나 카페에 왔다. 이렇게 보광동 카페는 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카페의 영업시간은 조각얼음이 동날 때까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카페로 몰려들었다. 카페 안에서는 손님들끼리 시원한 자리를 두고 으르렁댔다.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손님들 성화에 빔 프로젝터를 연결해서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을 틀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마을 회의를 하며 수박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손님들은 의자를 붙이고 카페에서 눈을 붙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열대야가 절정에 달한 어느 밤, 클래식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어르신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르신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풀을 먹인 모시 셔츠를 입고 감색 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의자에 발을 올린 채 드라마를 시청하던 단골손님들은 발을 급히 내렸다. 음료를 주문한 그는 위엄 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마치 라이온 킹이 높은 언덕에 올라서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는 장면 같았다. 카페는 거의 피난민 대피소 수준이었다. 아이들은 소파에 누워서 게임을 하고 강아지들은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장난을 쳤다. 어른들은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어르신이 주문한 청귤청 음료를 유리컵에 담고 레몬 슬라이스와 민트 잎으로 장식하여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르신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들고 음료를 마셨다.
마을에서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아저씨들이 카페에 들어오려다가 어르신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카페에서 진을 치던 손님들도 드라마가 끝나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과 의자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뒤축이 나간 슬리퍼를 슬그머니 끌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카페는 오랜만에 대피소에서 벗어나서 클래식이 흐르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도 오랜만에 신세타령하는 손님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차분하게 영업을 마칠 준비를 했다. 커피 머신과 빙수기를 청소하고 주방에 쌓인 컵도 설거지했다. 마지막으로 하루 매상을 정산하고 테이블을 행주로 닦았다.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카페를 떠났다.
1. 귀신들의 땅, 보광동
카페 문을 닫고 보안 버튼을 눌렀다. 테라스에 세워놨던 자전거를 챙겼다. 내일 아침, 카페에 출근하면 테라스에서 누군가 자고 있을 것이다. 우사단 골목길은 거미줄처럼 엉켜있어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쉽게 집을 찾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가 간신히 몸 누일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잠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슬퍼도 술을 마시고 기뻐도 술을 마셨다. 심심해서 술을 마시고 외로워서 술을 마셨다. 새벽에 일을 끝나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술을 마셨다.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곧장 술을 마셨다. 보광동 술집은 24시간 영업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보광동 경기가 악화되면서는 많은 사람이 술집보다는 편의점을 찾았다. 아침에 카페 문을 열 때마다 테라스에서는 모기에 뜯기며 자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숙취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은 흐느적거리면서 우사단 언덕을 올랐다. 자전거를 끌고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귀신들의 땅에서 장사하느라 얼마나 힘드오?”
폐지 줍는 할머니가 수레를 끌다가 말을 건넸다. 골목 가로등이 할머니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나는 귀신터의 내력이 궁금해서 되물었다. 할머니가 말하길, 보광동은 조선시대부터 공동묘지 터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보광동 골목길을 가득 메운 '점(占)집' 간판을 가리켰다.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내공이 충만한 ‘일월신녀', '천상부인', ’선녀보살’, ‘용궁선녀’, ‘천상도령’, ‘천궁’ 등의 명칭이 적힌 간판들이 골목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무속인이 유독 보광동에 끌리는 이유는 터가 센 공동묘지 자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사람 중에 가위에 눌렸거나 귀신을 봤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터가 세서 싸움이나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보광동에서 장사가 잘 되려면 ‘귀신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기가 세야 한다’고 조언했다.
할머니는 돌아서면서도 보광동에 거친 사람이 몰려드는 이유가 공동묘지를 침범한 인간에 분노한 귀신 때문이라며 혀를 찼다. 적막에 잠긴 골목길에는 할머니가 미는 낡은 수레의 삐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기괴한 밤이었다. 그날따라 골목길을 내달리는 배달 오토바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 구석마다 머리 풀고 소복 입은 귀신이 나타나서 내 뒷덜미를 잡아채 갈 것 같았다. 유튜브에서 귀신 탐방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빈집 많은 보광동은 귀신 탐방 놀이터가 되었다. 해 질 무렵이면 카메라 장비를 들고 퇴마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폐가로 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서 귀신 퇴치 작전 회의를 했다. 정말 귀신이 있는 걸까? 갑자기 소름이 돌았다. 급기야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에 혼자서 한강 자전거 도로를 달려서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귀신 이야기에 겁에 질린 나는 자전거를 접어 택시 짐칸에 밀어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공동묘지 이야기로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손님 없는 시간에 텅 빈 카페를 혼자 지키는 것도 무서워졌다. 카페 바닥에서 귀신이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대낮에도 조명을 환하게 밝혔다. 개업 초기에 무속인 손님이 카페 터에 무서운 할머니 귀신이 살고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돈을 벌려는 수작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로부터 공동묘지 터였다는 말을 듣고는 무속인의 말이 거짓말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단골손님 중에는 우사단 언덕에 귀신이 앉아서 울거나 떼 지어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공동묘지 이야기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보광동에 거주한 꽃언니들은 무더위를 피해서 시골 친척집으로 떠나고 없었다.
2. 공동묘지에 천막 치기
이른 아침부터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 연일 계속됐다. 달아오른 지열에 골목길에는 사람들의 왕래도 드물게 이어졌다. 카페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휴가철을 맞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쉴 곳을 찾아 카페로 왔다. 오후에는 라이온 킹 같은 어르신이 카페를 찾았다. 꽃향기와 부드러운 신맛이 특징인 에디오피아 예가체프를 골라서 분쇄기에 갈았다. 물이 원두 가루에 스며드는 동안에 곁눈질로 어른신을 보았다. 아무래도 마을에 오랫동안 사신 것 같은 어르신에게 공동묘지 이야기를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언제부터 보광동에 살았는지를 물었다. 굳게 입을 다문 무뚝뚝한 표정에 묻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공동묘지 시절부터 살았으니 육십여 년이 넘었지.”
어르신은 전쟁 후에 보광동으로 이사 왔다고 했다. 그 시절 우사단 언덕에는 무덤의 봉분이 촘촘하게 도드라져 있던 때였다. 그는 윗옷에서 볼펜을 꺼내서 낙서하듯 냅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냅킨에 그려진 우사단 산자락 공동묘지는 온통 콩나물처럼 봉분이 올라와 있었다. 이태원, 한남동, 보광동에 걸쳐진 공동묘지는 조선시대부터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묻히던 곳이었다.
1950년대 후반 서울시는 이곳을 피난민과 철거민을 위한 택지로 조성했다. 공동묘지는 그때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시청은 보광동 공동묘지를 개장하고 피난민에게 분할한다는 공고를 냈다. 공고를 본 피난민들은 서부개척시대처럼 공동묘지 땅을 차지하려고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피난민들은 봉분 주위에 새끼줄을 두르고 땅 소유 표시를 했다. 묘지 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몸싸움도 자주 일어났었다.
“봉분 위에다가 평상을 만들고 그 위에 천막을 치고 살았어. 평상 아래는 죽은 사람이 누워 잤고, 평상 위에는 산 사람이 누워 잤어. 묘지에 살면서 이승인지 저승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그때는 정말 눈 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일도 많았어. 말로 다 표현 못 해.”
그는 미군 부대에서 버린 탄약상자를 뜯어서 무덤 위에 평상을 만들고, 미군이 버린 낙하산을 구해서 작대기에 꽂아서 천막을 쳤다. 공동묘지에 세운 천막집은 피난 내려와서 8년 만에 처음 생긴 집이었다.
3.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워
1959년 여름, 그가 묘지 위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을 때였다. 우사단 산자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가마니로 감싼 시신을 옮겨와서 깊이 판 구덩이에 묻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상주에게 공동묘지가 곧 없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 상주는 그 말에 그저 슬피 울기만 했다. 여유가 없어서 다른 묘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삽 한 자루로 겨우 구덩이를 판 상주는 가마니에 감싼 시신을 묻고 봉분을 올렸다. 그리고는 대성통곡하며 절하고 머리를 숙인 채 그곳을 떠났다.
얼마 후, 그 무덤에 다른 피난민이 들어와 빗장을 쳤다. 뗏장도 자라지 않은 새 봉분 주변에 새끼줄을 치고 자기 땅이라고 표시했다. 먼저 자리 잡은 피난민들은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며 다른 장소를 권했다. 그러나 이미 자리를 잡은 피난민은 그 말을 애써 무시하고 봉분을 해치고 시신을 파내었다. 시신은 새끼줄로 두 다리가 묶인 채로 그렇게 다른 곳에 버려졌다. 산 사람이 살기 위해서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는 잔혹한 일은 보광동 공동묘지 곳곳에서 벌어졌다.
“공동묘지에 귀신은 없었어요?”
나는 죽은 자들이 안식하는 공간에 침범한 사람들은 해를 입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야. 산 사람이 무섭게 달려들면 죽은 놈은 꼼짝 못 해. 먹을 것도 없고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절박하면 귀신도 안 무서워. 배가 불러야 귀신도 무섭지.”
그는 배고픈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아귀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보면 이성을 잃고 난투극을 벌였다. 그는 공동묘지에서 이웃들과 아귀다툼을 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얼마나 포악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됐다. 가난한 이웃끼리 돕기보다는 서로를 해하고 물건을 훔쳤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그 세상에서 그도 살아남아야 했다.
4. 마당에 나온 검은 관
어르신은 올해 여름과 같이 더위가 심한 날에는 시체 썩는 역한 냄새가 우사단 산자락에서 나온다고 했다. 분묘개장공고가 붙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시청에서 고용한 인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봉분을 파헤치고 유골을 꺼내서 나무 관에 담았다. 트럭은 매일같이 짐칸에 겹겹이 관을 높게 쌓아 올리고 화장터를 빠져나갔다. 인부들이 이장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었어도 무덤은 계속 나왔다. 비석이 있는 무덤은 가족이 나서서 이장했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한 탓에 무덤 위치를 잃어버린 가족도 부지기수였다.
분묘개장공고 동안 공동묘지에 묻힌 형님을 찾아 헤맨 어떤 동생이 있었다. 그해 여름, 용산폭격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형이라고 했다. 동생은 형의 시신을 수습하여 미제 군용담요로 싸고 우사단 산자락에 형을 급히 묻고는 피난길에 올랐다. 깊은 밤에 급히 만든 무덤은 그 위치를 찾기 어려웠다. 동생은 미제 군용담요에 쌓인 시신만을 찾아 헤맸다. 무덤을 파헤칠 때마다 미제 군용담요가 나오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형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동생은 형 시신 대신 우사단 산자락의 흙을 담아서 선산에 묻었다. 무덤을 파다 지친 인부들은 결국 봉분만 밀어버리고 그 위에 터를 조성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이야기를 보태기 시작했다. 우사단에서 치킨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는 정화조 공사를 하다가 마당에서 대퇴골이 나왔다고 했다. 아주머니네 마당만이 아니라 이웃집에서도 검게 퇴색한 관이 마당을 파다가 나왔다. 관 속에는 젊은 남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 있었다. 카페에서 휴대폰을 보던 교회 권사님도 사십여 년 전에 교회 신축 공사를 하다가 관을 목격했다. 그 속에는 시신이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교회에서는 그 시신을 정중하게 모시고 다른 장소에 다시 매장했다. 신문을 읽던 철물점 아저씨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친구네 마당에서 두개골이 나왔는데 친구가 인골을 쓰레기차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친구가 얼마 후에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마을에서 발견된 유골을 훼손하지 않고 정중하게 처리해서 복 받은 사람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었다. 1980년 초반, 어느 적산가옥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유골이 나왔다. 건축주는 유골을 수습하고 화장해서 사찰에 맡겼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적산가옥 터에서는 일본군 금괴가 나왔다. 건물기초공사를 하는 도중에 땅속에서 금괴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부자가 된 건축주는 건물을 더 높게 올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건물을 보금당(寶金堂)이라고 불렀다. 그 일 이후로 마을 공사장에서 유골이 나오면 사람들은 공사를 중단했다. 흩어진 뼛조각을 모으고 한지에 싸서 한강변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성황당에 유골을 맡겼다. 어르신은 뉴타운 공사가 시작되면 1950년대에 수습하지 못했던 유골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했다.
5. 양키 물건
커피를 마신 그는 커피 잔을 뒤집어 유심히 살폈다. 이태원 앤티크 상점에서 구입한 오래된 커피 잔에는 영어로 Made in USA라고 적혀 있다. 가벼운 미소를 보이던 그는 미제 물건 장사할 때 많이 팔았던 커피잔 세트라고 말했다. 그는 이태원 일대에서 유명한 미제물건 도매상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양키장사라고 불렀다.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 고물을 팔아 모은 돈으로 PX 물건을 되파는 사업을 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확장된 이후에는 세관원과 결탁해서 미제 물건을 수입하다가 철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에게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전쟁 나던 해에는 철원공립보통학교에서 전교 1등을 했다. 철원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평양에서 온 여배우 뒤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나고 만 16살이 된 친구들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마을에 남았다. 유엔군이 철원에 들어오면서 소개 작전이 시작됐다. 그는 미군 트럭 제무시(GMC)에 실려서 의정부로 보내졌다. 의정부역에서 탑승한 기차는 광주 피난민 수용소로 향했다. 이후 그는 전주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서 서울 후암동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폭격 맞아 불타버린 집터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넝마주이 신세가 되었다. 미군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서 되파는 일을 했다. 부유했던 과거는 이제 과거일 뿐이었다. 돈을 모아서 보광동 공동묘지에 판잣집을 올렸다. 호롱불을 밝혀, 주워온 양키 물건을 수리하고, 날이 밝으면 용산기지 담벼락에서 양키 물건을 팔았다. 해방촌에 거주하는 피난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담배꽁초를 수거해서 재활용한 담배를 팔았다. 해방촌 담배는 전매청보다 더 솜씨 좋게 담배를 말아서 인기가 좋았다. 이태원 사람들은 기지에서 나오는 짬밥을 이용해서 부대찌개를 만들어 팔았다. 보광동 사람들은 미군 빨래를 하거나 양공주가 미군 PX에서 물건을 사오면 되파는 장사를 했다. 그는 돈을 모아서 이태원에 번듯한 가게를 냈다. 미제는 똥도 좋다고 한 시절이었다. 미군이 신고 버린 군화부터 군복까지 양키 물건이면 무엇이든 다 팔렸다. 마을에서 이북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일만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달리 이북 사람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기반이 없는 곳에서 자리 잡고 살려면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돈이 되는 일은 모두 다 했다. 소처럼 일만 하다가 세월이 갔다.
6. 공동묘지에 사는 이북 사람들
보광동 원주민들은 땅이 있어서 복숭아 과수원이나 밭농사를 해서 남대문 시장에 농산물을 내놓으며 생활했다. 공동묘지에 사는 피난민들은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거나 넝마주이가 되었다. 분묘가 개방된 그 자리에 정부는 상이용사 주택을 건설했다. 벽체와 지붕만 덮어서 간신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집이었다.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들은 갈고리 손으로 버스에서 행상을 하거나 구걸을 했다. 그들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에 취해서 살았고 자주 사람들과 싸웠다. 의리를 내세운 상이용사들은 마을에서 패싸움이 나면 갈고리 손으로 약한 자를 위해 싸워주기도 했다. 상이용사들이 죽거나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 입소했다. 그들이 살던 보광동 장문로 일대 상이용사 집들은 지붕이 내려앉은 채 무너졌다.
철원 어르신은 보광동 공동묘지에 자리 잡고 안정적으로 양공주들로부터 PX 물건을 공급받기 시작했다. 그의 사업수완은 좋은 편이었다. 미제 물건을 도매하여 서울 시내에서 미제 물건을 거래하는 소매상에게 물건을 공급하였다.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철원에서 피난 온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숨을 내뱉듯이 자욱한 연기를 허공에 내 뿜었다.
“밤에 천막 밖으로 나가보면 봉분 위에서 불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어. 혹시나 도깨비불인가 해서 놀랐어.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들이 봉분 위에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어. 그때는 막노동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어. 공동묘지에 살아도 귀신에 빙의될 틈도 없이 잠만 잤어. 그때는 법도 없었고 강하고 약삭빠른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온 세월이 팔십여 년이다. 철원을 떠난 뒤 눈물 흘릴 여유조차 없었다. 하루하루를 살기 바빠서 울고 슬퍼할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우울해지고 슬퍼졌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쌕쌕이를 피해서 도망치는 피난민 행렬과 수용소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조카 얼굴이 떠올랐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끝내는 수면제를 처방받아야 했다. 칠십 년 전에 끝난 그해 여름은 그에게서만큼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필리핀 마닐라 공동묘지에서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살더라고. 개천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밥해 먹고 사는 데, 그 방송을 보다가 텔레비전을 꺼버렸어. 그게 바로 우리 모습이었어. 우리가 오죽 갈 곳이 없었으면 망자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로 들어가서 살았겠어.”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공동묘지에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물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과 싸움이 났다. 공동묘지 아래에 살던 보광동 원토박이 사람들은 우물 뚜껑을 덮고 열쇠로 봉쇄해 버렸다. 식수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한강 물을 길어다 먹었다. 그로 인해 어떤 아이는 이질에 걸려 죽기도 했다. 사람들은 수맥을 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공동묘지 여기저기를 헤맸다. 그 지난한 노력 끝에 물줄기를 발견하고 우물을 파서 물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어.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몇 배의 긴 시간을 보광동에서 살았어. 이북 고향에 탯줄을 묻었지만 보광동에 내 인생을 묻었어.”
철원 어르신은 지독한 우울증에서 빠져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인 그는 투덜이 스머프처럼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홀로 카페에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뉴타운 개발승인이 나면서 이주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그의 우울증도 심해져 갔다. 투덜이 스머프의 우울증보다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보광동에서 태어나서 자란 투덜이 스머프에게는 그래도 수많은 배꼽친구들이 있었다.
철원 어른신과 같은 이북 출신들은 홀로 고통을 삭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의 병은 더욱더 깊어갔다. 대부분의 이북 출신들은 마을에서 숨죽여 살면서 사람들과 교류 없이 지냈다. 인민군 점령지인 고향을 떠나 반공이 국시인 남쪽에서 자리 잡고 살기 위한 일종의 생존방법이었다.
우사단 언덕에서 담배 가게를 하는 아흔세 살 할아버지는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서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그 이후 국군으로 재 입대했다가 제대한 그는 우사단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우사단에서 육십여 년을 넘게 살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가게 할아버지가 홀로 지팡이를 짚고 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그를 돕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옛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네. 다음에 보세.”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가운 햇빛이 그의 정수리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바싹 마른 낙엽을 보는 것 같았다.
한강변에는 기차가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저 기차를 타면 철원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시내의 중고등학생들은 용산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철원역에서 내려 금강산전기철도를 달리는 기차로 바꿔 타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경원선 기차가 정차하던 철원역은 폭격을 맞아서 폐허가 되었다.
그의 고향은 궁예의 태봉국 도성인 풍천원이 자리 잡은 철원군 북면 홍원리였다. 푸른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고 드넓은 풍천원 들판에는 황금빛 벼가 장엄한 물결을 이루던 곳이었다. 고향 홍원리는 휴전선 안에 갇혀서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는 고향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철원 평화전망대를 자주 찾았다. 쌍안경으로 보이는 휴전선 한 복판에 갇힌 고향 마을 홍원리는 잡초에 묻힌 채 사라지고 있었다.
7. 우사단 언덕의 유관순
그를 배웅하고 우사단 언덕을 올려보았다. 이슬람 성원이 햇살 아래서 푸른빛을 내면서 반짝였다. 보광동 우사단 언덕에는 유관순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유관순이 고문 끝에 옥사하자, 이화학당 선생님과 친구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시신을 인수받아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우사단 언덕에 묻었다. 일 년 뒤, 일본군은 우사단 언덕에 사격연습장을 만들면서 공동묘지를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의 시신은 어디론가 흩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관계기관과 재개발 조합에 유관순 추모비를 우사단 언덕에 세워달라고 수없이 청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평당 칠천만 원을 호가하는 땅에 유관순 공원은 끝내 자리를 얻지 못했다. 개발업자들은 그녀의 무덤이 걸림돌이 되어서 혹시나 재개발 공사가 늦춰질 것을 우려했다. 용산구청은 유관순이 묻혔다는 우사단 건너편에 자리한 이태원 부군당에 작은 추모비를 세우는 것으로 유관순 추모 장소 문제를 해결했다.
공공기관이 경제 논리에 밀린 끝에 항일독립운동가가 묻힌 장소마저 왜곡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유관순이 묻혔던 우사단 언덕에는 한강을 바라보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구월이 되면, 우사단 언덕으로는 어김없이 애도의 바람이 불어온다.
8. 야반도주 계획
택배 배달 시간이 끝나면서 골목길은 다시 조용해졌다. 햇살 아래 누운 길고양이는 배를 내밀고 있었다. 보광동도 호황이던 시절이 있었다. 출근 시간이 되면 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사람들을 태우고 오르막을 헐떡이며 올랐다. 저녁이면 업소에 나가는 아가씨들이 미장원에서 줄지어 머리하고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마을에서는 노점만 해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보광동은 뉴타운 개발계획으로 그 이름마저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다. 이십여 년간 골목에서 장사를 해왔던 호떡집도 문을 닫았다. 호떡집 사장님은 가지고 온 호떡을 내놓으면서 도리어 카페 걱정을 했다. 이처럼 보광동은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의 생기 없는 표정처럼 암울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문을 연 카페도 생명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한남뉴타운 개발 속도가 늦어져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부동산 탓만 할 수도 없었다. 은둔하며 살던 내가 새롭게 용기를 내어 시작한 카페는 한남뉴타운 개발 광풍에 휩쓸려 점차 침몰하고 있었다. 아파트 개발 회사가 불도저를 앞세우고 몰려오면 카페 영업도 중단해야 한다. 나는 건설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는 카페 문을 열고 싶었다. 카페가 하루라도 더, 여름 횡단보도 앞에 놓인 그늘막처럼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를 바랐다.
추석이 지났어도 한낮의 더위는 30도를 넘나들었다. 시월이 되었어도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가을이면 으레 옷장에서 꺼내는 바바리코트와 블라우스는 차마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광동 카페는 이상 기후 덕분에 적자를 면하고 있었다. 늦더위 덕분에 아르바이트생 월급도 걱정 없이 줄 수 있었다. 예천 언니 생일잔치 이후로 카페는 활기가 넘쳤다. 어떤 날은 길고양이를 위한 바자회나 마을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공시족은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꿈과 희망에 대해서 토론했다. 나는 음료를 만들면서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노력 덕분에 이제는 마을 카페로 자리 잡은 듯했다. 작은 마을에 사랑방 카페를 만들겠다는 내 꿈도 그렇게 이뤄졌다.
커피를 마시거나 안마시거나 상관없이 수많은 마을 사람이 카페를 찾았다. 붕어빵을 사서 오다가 몇 개 나눠주기도 하고 과일을 사 들고 오다가 한두 개 건네주고 갔다. 카페는 마을 뉴스를 전하고 사람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가끔 사우나에 가면 카페 손님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거나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카페 등대지기도 보광동 구성원으로 품어주었다. 골목길을 청소하고 커피를 만드는 소소하고 행복한 날이 계속되었다.
미세먼지처럼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도 어느새 사라졌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앉아서 탄식하던 날들은 기억 너머에 잠들어 있었다. 아침마다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따뜻한 사람들과 하루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했다. 차가운 서울 한복판에서 보광동은 시골 마을처럼 사람의 정이 살아있었다. 몸이 아파서 하루라도 카페를 쉬는 날이면 안부를 묻는 문자가 여기저기서 왔다.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날은 가을날처럼 짧았다. 보광동 카페에 어두운 소식이 전해졌다. 건물주가 돌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다.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영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건물주는 카페 자리를 수익이 더 높은 단기임대로 내놓을 생각이었다. 이제 보광동 카페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손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카페 물건을 하나씩 인터넷을 통해서 팔기 시작했다. 고가의 로스팅 기계와 우유 빙수를 만드는 빙수기도 팔았다. 유럽에서 사 온 앤티크 컵이나 접시도 내놓았다. 지난겨울 보광동을 황홀하게 만들었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루돌프 사슴도 팔려나갔다. 카페 벽을 장식했던 뉴욕거리를 촬영한 흑백 사진도 팔렸다. 손님들은 물건이 하나둘 없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카페 인테리어를 바꾸고 있다고 둘러댔다. 날마다 카페에 와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손님들에게 카페 영업을 종료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선뜻 하기가 어려웠다.
11월이 되자, 폴리텍대학교 은행나무는 황금빛 은행을 떨어뜨렸다. 카페 집기를 어느 정도 청산하고 나니 돈이 적게나마 남았다. 그 순간 지난 시간 동안 알게 된 사람들이 섬광처럼 스쳐 떠올랐다. 보광동 카페를 닫으면 손님들도 갈 곳을 잃어버릴 것이다. 꽃언니들은 아침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대신, 경로당에 모여서 아침 막장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투덜이 스머프는 경로당에서 투덜거리다가 친구와 말싸움을 할 것이다. 카페에서 노는 보광동 아이들도 갈 곳을 잃은 채 골목길을 헤맬 것이다. 그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도 그동안 정들었던 보광동 사람들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
11월 마지막 날, 카페 영업을 종료하고 중고센터를 불러서 카페 집기를 모두 팔아치우기로 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바람나거나 돈 떼먹고 야반도주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보광동을 떠날 계획이었다.
9. 한강 갈대 아가씨
카페 창문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야반도주를 계획하다가 창밖으로 갑자기 나타난 여인에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포영화처럼 긴 머리카락을 커튼 삼아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카페테라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고는 눈길을 피했다. 보광동 통신원의 전언에 따르면 그녀는 성전환 수술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픈 상태였다.
커피 캐리어에 따뜻한 커피와 레몬차를 담고 머핀을 데워서 봉지에 담아 함께 건넸다. 그녀는 며칠이나 몸져누웠던 것처럼 몸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녀에게 단골손님 특별서비스라고 우기며 커피 캐리어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한강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우사단 언덕을 힘들게 올랐다.
이태원 소방서 뒤편에는 ‘게이 힐’이 있었다. 양공주들이 떠나자 그 자리를 성소수자들이 대신했다. 보광동에 사는 성소수자들은 클럽에서 댄서로 일했다. 보광동은 이태원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월세가 저렴해서 성소수자 공동체도 생겼다. 보광동 마을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차별 없이 이웃사촌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들은 공주풍의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으며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골목을 누볐다. 마을에는 발이 큰 그녀들을 위한 전문 신발가게도 있었다. 그녀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짧은 치마를 입고 식당에 갔고 술집에도 갔다. 보광동 아주머니들은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녀들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목욕탕에서도 언니동생하면서 누군가의 등을 밀어주고 음료수를 나누어 먹고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고 수다를 떨었다. 그녀들 역시 보광동 카페를 자주 찾았다. 카페는 편하게 수다를 떨어도 누구도 불편하거나 이질적인 눈치를 주지 않는 곳이었다. 카페가 폐업되면 그녀들도 갈 곳을 잃을 것이다.
10. 글로벌 마을 공동체
카페에 매일 놀러오는 아프카니스탄 난민 소년 미르는 가족과 아프카니스탄을 떠나서 보광동에 안착했다. 카페에 자주 찾는 미르는 단골손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숙제를 하기도 했다. 카페의 이모, 삼촌들은 한국말을 못하는 그의 부모를 대신하여 국어나 사회 숙제를 도와줬다. 그 덕분에 미르는 보광초등학교의 우등생이 될 수 있었다. 이슬람 사원이 있는 보광동에는 골목마다 아프리카 식당, 할랄 식당, 세계 음식 식료품 가게, 옷가게, 미용실이 있었다. 외국인들은 고향 음식을 먹기 위해서, 혹은 최신 헤어스타일을 하러 보광동으로 왔다. 무슬림들은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조용한 이웃이었다. 무슬림 단골손님들은 공과금 고지서를 읽어달라며 카페로 자주 찾아왔다. 그들은 라마단 기간이 끝나면 로쿰이나 대추야자를 가져다주는 다정한 이웃이었다. 히잡을 쓰고 거리를 걷던 무슬림 엄마들과 마주치면 보광동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무슬림 엄마들은 아이들을 불러 케밥을 나누어 먹었다.
보광동 카페에서는 레게머리를 한 인도 청년, 판초를 입는 페루 아저씨, 터번을 쓰고 다니는 시크교도, 인형 같은 러시아 아가씨, 검푸른 빛깔의 가나 아저씨, 종교 갈등으로 도피해 온 스리랑카 타밀 청년까지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예멘 난민 갈등이 일어났을 때, 보광동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마을 사람들은 무슬림을 비하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혀를 찼다. 무슬림은 할랄 때문에 김밥과 라면만 빼고 다 먹을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배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카페에서 보광동 마을 모임을 할 때마다 무슬림 이웃을 배려해서 아주머니들은 햄 없는 김밥을 싸 왔다. 무슬림 이웃이 마시지 못하는 술 대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미르는 카페 의자에 앉아서 게이힐의 소문난 의상 디자이너 이모랑 사회 숙제를 하고 있었다. 바텐더 이모는 숙제를 도와주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우리처럼 소외된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하나요? 미르와 나는 다른 마을에 가면 사람들에게 차별받을 텐데.”
나이가 든 그녀는 클럽 댄서를 그만두고 이제 무대의상을 만드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나 보광동에서 살아온 세월이 삼십여 년이 넘었다. 보광동 이외의 다른 마을을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재개발 허가승인이 나면서 그녀도 근심과 걱정으로 우울해졌다.
그녀는 이웃들이 떠나고 을씨년스러워진 보광동 골목길에 꽃을 심었다. 봄에는 팬지를 심고 가을에 코스모스를 심었다. 불도저가 오기 전까지, 그녀를 품어 준 보광동을 예쁘게 가꾸고 싶었다. 그녀는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몰려와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기록해주기를 바랐다.
11. 가난한 마을 이름은 부끄럽다
한남3구역 뉴타운 개발 사업이 뉴스로 오르내리면서 카페 인근에 있던 칼국수 집도 문을 닫았다. 2000년 보광동 재개발 조합이 설립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평당 삼백만 원 하던 땅값은 천만 원이 되고 곧 이천만 원이 되었다. 급기야 뉴타운 건축허가가 나자 땅값은 칠천만 원에 육박했다. 땅값이 급등하자 이웃 칼국수 집 부부는 보광동 종점에 있던 집을 팔아서 자식들에게 아파트 사 주고는 마을을 떠났다.
보광동 땅값이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자 자식들은 부모를 졸라서 끝내 집을 팔게 했다. 마을에서는 자식에게 아파트 사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힘들게 사는 노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빈털터리가 된 칼국수 집 부부도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염소를 키우며 살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넓고 빛나는 마을’을 뜻하는 보광동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에 분개했다. 십여 년 전에는 보광동 아랫마을이 뉴타운 사업으로 먼저 재개발됐다. 이곳에 건축된 현대홈타운과 하이페리온은 ‘보광동’ 지명을 버리고 ‘한남동’으로 동 이름을 바꾸었다. 가난한 마을 이름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한남동’으로 지명이 바뀌자 건설회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사는 마을로 홍보하며 소위 ‘명품 아파트’를 팔았다.
보광동 재개발 조합에서도 ‘보광동’이라는 지명을 빼고 ‘한남뉴타운 3구역’ 개발 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보광동에 들어설 아파트도 ‘보광’ 대신 ‘한남’이라는 이름으로 분양된다. ‘보광’이라는 이름은 서울 달동네의 상징이었고 가난의 대명사였다. 그 이름이 창피해서 이름마저도 바꿔버리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도 ‘보광동’이라는 이름마저 사라지는 것에 분개했다.
12. 보광동 카페다운 이별 이벤트
그날도 어김없이 카페로 출근을 했다. 카페 출입문 손잡이에 걸린 종이봉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 안에는 장갑, 장미향 핸드크림, 카드가 들어 있었다. 장미문양이 그려진 카드에는 여성스러운 글씨체로 ‘항상 감사해요’라고 쓰여 있었다. 이름이 없어도 한강 갈대 아가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손수 짠 장갑을 껴 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왔다. 이처럼 따뜻한 이웃을 두고 야반도주하듯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가슴에 걸렸다. 문득 카페 손님들과 마지막 이별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어떤 이벤트가 좋을지 종일 그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카페에서의 이별 파티, 아니면 남산 등산, 손님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리고는 카페를 찾은 손님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손님들 대다수가 멀리 마을 밖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대개 이웃 마을 이태원에서 일하고 보광동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일하러 나가는 쳇바퀴 돌듯이 같은 곳을 맴도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먼 여행은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카페 손님들과 마지막 이벤트로 이별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보광동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는 계획을 세웠다. 회색빛 서울을 떠나 푸른 동해로 여행을 가는 것이 가장 좋아 보였다. 이벤트를 확정하면서 나는 무작정 카페 손님들에게 마지막 이별 여행 소식을 알렸다. 11월 11일, 빼빼로 데이로 알려진 그 날에 맞추어서 외로움에 젖어있는 솔로를 위한 여행이라고 홍보했다.
보광동 꽃언니들에게도, 투덜이 스머프, 뮤지컬 학생, 트렌스젠더, 다른 손님들에게도 알렸다. 관광버스를 예약하고 떡이랑 술안주도 주문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야간업소에서 일하는 까닭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 계획이 무리한 것임을 알게 됐다. 내 바람과는 달리 45인승 버스의 좌석은 분명 텅 빈 채로 남겨질 것 같았다.
골목길에 흩어진 황금빛 은행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아침이었다. 보광동 종점에는 45인승 관광버스가 도착해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나는 시장에서 배달된 떡 상자와 안주, 막걸리, 소주 등을 버스에 실었다. 모임 시간은 점점 가까워졌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나 홀로 관광버스를 타게 될 것 같아서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조바심에 보광동 언니와 투덜이 스머프에게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언덕길을 목 빼고 살폈지만 익숙한 얼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8시가 가까워지면서 버스 기사는 풀죽은 내 얼굴만 살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대로변을 조바심을 내며 살펴보았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수많은 사람 틈에서 내 이웃들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수차례 꺼내 보았지만 메시지도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세운 무모한 계획이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운해지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기사 아저씨랑 단둘이 동해로 떠나야 할지, 아니면 이벤트 계획을 취소해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 버스 짐칸에 실은 많은 술과 안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걱정이 됐다. 이윽고 시각은 모임을 공지한 오전 8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버스 창문을 바라보았다.
순간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가 눈에 띄었다. 한강 갈대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언덕길을 급히 넘고 있었다. 한강 갈대는 대인기피증이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빵 봉지를 먼저 내밀었다. 밤업소 일을 끝내고 빵집에 들러서 빵을 사느라 늦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빈 버스를 보자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잠시 후 버스 앞에는 택시 한 대가 급하게 멈추어 섰다. 택시 안에서는 강남 업소에서 일을 끝낸 아가씨가 급히 내렸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치맛단이 짧은 원피스와 킬힐을 신었다. 나와 운전기사만 버스에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선가에서 한숨 자고 있을 업소 친구들을 깨웠다.
보광동 종점이 소란스러워졌다. 경로당 회원들이 단체로 버스 주위에 모였다. 보광동 꽃언니가 인솔하여 할머니와 할아버지 회원들을 빠짐없이 챙겨온 것이다. 꽃언니들은 버스에 오르면 삼십 분이나 늦은 것을 미안해했다.
“아이고, 늦어서 미안하네. 할매들이 나서려면 시간이 필요해.”
꽃언니들은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올랐다. 언니들은 아침부터 수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부산을 떨고 화장을 고치고 하느라 늦었다고 했다. 동해 바다에서 도드라져 보일 가을 단풍 색깔 등산복을 맞춰 입고 왔다. 은행나무처럼 노랗게 염색을 한 폴리텍 학생들도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올랐다. 카페 전기공사를 도맡아 해주던 전기공사 사장도 친구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트렌스젠더 댄서들은 공연을 끝내고 화장을 지우지도 못한 모습으로 버스에 올랐다. 강남에서 일하는 다른 아가씨들도 총알택시를 타고 헐레벌떡 왔다. 그녀들이 버스에 오르자 소란스러워졌다. 보광동 카페 손님 대부분이 모인 듯했다.
버스 문을 닫을 닫고 출발하려는데 이번에는 오토바이가 버스를 가로막았다. 누군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투덜이 스머프였다. ‘여행 같은 것 뭐하러 가’ 하면서 이별 이벤트 참가를 극구 사양했던 그였다. 버스 문이 다시 열렸다.
“자. 이제 더 올 사람 없죠? 출발합니다.”
나는 버스 마이크를 잡고 물었다. 모두 큰 소리로 ‘네!’ 하고 외쳤다. 강변북로에 들어선 버스는 아침 출근길 정체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버스 기사는 트로트 메들리를 크게 틀었다. 흥에 겨워진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손님 중에는 오십 줄에 들어선 나이에도 변두리 유흥업소를 나가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좋아했다. 보광동 꽃언니들은 다단계 의료기기 업체에서 무료 관광을 보내줘서 한두 차례 당일치기 여행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차내에는 신나게 노래하는 트렌스젠더 아가씨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녀들도 익숙한 마을 사람과 여행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아침 음식으로 김밥과 두유를 나누어 먹은 손님들은 대부분 곯아떨어졌다.
서울 양양 고속도로는 단풍철 행락객을 실은 관광버스로 혼잡했다. 강원도로 가는 최단거리 코스로 만들어진 고속도로는 터널에서 터널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체된 터널 속은 차량이 내 뿜는 소음과 불빛으로 채워졌다.
“우리 바다 보러 가는 것 맞지? 밖에 아무것도 안 보여.”
아픈 몸을 이끌고 온 송정리 언니가 잠에서 깨어나 터널 안에서 물었다. 정체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른 할머니들도 하나둘 답답함을 호소했다. 새로운 고속도로는 첩첩산중 강원도를 두 시간 반 만에 주파할 수 있다고 광고했지만 교통 정체가 심각했다. 답답한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강 따라 굽이진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손님 중에 생애 처음으로 여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물결이 흐르는 강과 푸른 산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사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인제 IC를 빠져나갔다. 세찬 물이 흘러내리는 내린천을 따라서 노랑, 빨강, 주황 단풍잎들이 오색 깃발처럼 휘날리는 하추리를 지나 한계령에 올라서면서 차내에는 감탄사가 쏟아졌다. 그 소리는 나를 뿌듯하게 했다.
버스는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한계령 휴게소에서 잠시 멈추었다. 나는 카페에서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를 나누어주었다. 한강 갈대 아가씨가 나서서 빵을 나누어주었다. 빵을 전해 받는 손님들이 감사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환해졌다. 지평선 너머에는 동해 바다가 있었다. 보광동 사람에게 허락된 공간의 최대치는 한강 건너로 보이는 아파트촌과 남산타워였다.
우주처럼 펼쳐진 광활한 하늘 아래 단풍으로 수놓은 설악산은 저절로 탄성을 만들어냈다. 한계령 전망대에 선 투덜이 스머프는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짧은 휴식을 가진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고래가 뛰어노는 동해 바다로 향했다.
“아… 바다다. 정말 아름답네.”
버스는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동호해변에 멈췄다. 마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눈앞에는 짙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며 굉음을 발산하고 있었고, 그 파도 속에는 서퍼들이 춤추듯 파도를 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들숨, 날숨을 내쉬면서 도시 생활에서 쌓인 탁한 기운을 모두 내뿜었다.
13. 한 가족으로 불릴 보광동 사람들
보광동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으면 안부를 물었고, 누가 아프면 병문안을 하거나 걱정했다. 중국에서 온 뮤지컬 학생이 공연하는 날이면 블루스퀘어 공연장으로 몰려가서 축하 꽃다발을 안겼다. 꽃언니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우리는 단체로 병문안을 갔다. 지난 일여 년의 짧은 시간은 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카페가 문을 열기 전에는 트렌스 젠더나 유흥업소 아가씨들은 마을 사람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보광동 카페는 나이나 성별, 인종, 직업을 떠나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비록 한남뉴타운 3구역 재개발로 보광동 카페는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때로는 정겨운 이웃으로, 때로는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포근하게 주변을 감싸는 소나무 숲에 자리를 만든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고 막걸리를 함께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피톤치드의 제왕이라 불리는 소나무 향내가 바람에 휩쓸려 다녔다. 나는 그제야 보광동 카페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등대지기, 시절 인연이 다 한 거야. 우리도 뉴타운 때문에 모두 떠나야 해. 다들 그동안 고생했어. 고맙고……”
보광동 언니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막걸리 잔을 건넸다. 보광동은 이제 역사 속에서 지워질 운명이었다. 그곳에 존재했던 카페뿐만 아니라 사우나도 김밥집도 오막살이집들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보광동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됐다. 그것이 곧 이별을 의미했다.
한남3구역 뉴타운에 5816가구나 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저렴한 보증금과 월세 사는 사람들에게 평당 1억을 호가하는 고급 아파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아득한 이야기였다.
관광버스는 다시 동해안을 따라 질주했다. 사람들은 다가오는 이별의 아픔을 숨기며 ‘여행을 떠나요’라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낙산사를 지나서 속초 아바이 마을에 도착해서는 순대국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는 바다와 호수를 초승달처럼 연결한 석호를 따라서 화진포 호수를 건넜다. 단풍에 물든 화진포 호수에 철새가 내려앉았다. 호수는 물의 정령이 살고 있다는 전설처럼 아름다웠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는 단아한 별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승만 별장이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별장을 자주 찾아와서 낚시로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도 사람이었는데.”
투덜이 스머프가 세월의 먼지가 낀 별장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벽에 걸린 이승만의 흑백 사진을 보며 투덜댔다. 그해 여름, 이승만이 버리고 도망간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폭격기의 융단폭격으로 끔찍하게 타 죽었다. 아침밥을 먹다가 빨래를 하다가 논에서 일하다가 기차를 타러 가다가 폭격을 맞아 죽었다.
전쟁 후 용산폭격은 군사상 필요한 작전이고 시민의 죽음은 전쟁으로 인한 부수적 죽음이라고 치부됐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도 누군가의 부모였고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생명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국민의 생명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의 생명을 먼저 지키지 않았다. 그는 먼지 쌓인 화진포기념관에서 퇴색한 기록 사진으로만 남았다.
언니는 죽어서 썩어 문드러져도 보광동의 이야기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나는 복숭아 꽃비가 흩어지는 아름다운 보광동에서 폭탄비가 쏟아지던 그날의 기억을, 수륙양용전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 유엔군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목격담을 기록했다. 미군 부대 담장 아래로 불나방 같이 모여든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의 냉대를 감수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그것은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영혼을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고령의 나이에 접어든 목격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보광동 사람들이 남긴 ‘그해 여름’ 이야기는 훗날, 개발로 인해 흔적 없이 사라진 보광동을 기억하는 소중한 기록이 되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주요 인터뷰〉
조점순 2019월 1월 15일
김숙자 2019월 1월 17일
이영하 2019월 2월 1일
조남근 2019월 2월 11일
장남이 2019월 3월 12일
이춘자 2019월 3월 13일
안춘자 2019월 4월 14일
남풍자 2019월 4월 15일
김분순 2019월 5월 1일
김대례 2019월 5월 2일
서억석 2019년 5월 3일
이종운 2019년 5월 5일
김진호 2019년 6월 9일
김영달 2019년 6월 7일
김병수 2019년 6월 8일
김도희 2019년 7월 7일
강한봉 2019년 8월 1일
연제윤 2019년 9월 2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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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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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눈물로 한강 채웠던 그 땅…문화의 새 살이’, 2018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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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 ‘유관순묘는 사라지고 추모비만’, 2019년 2월 3일.
〈기타자료〉
하늘중앙교회,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금식기도’, 2011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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