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63주년 기념 전국청소년문예공모 시부문 최우수상
눈 덮인 묘비명
이현구
간밤에 폭설이 내렸다
차창 밖으로 제주4.3공원의 풍경은 푹푹,
아무도 몰래 눈밭에 빠져 하얗게 질려갔다
비석은 밤의 그림자를 모서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음지를 밴 채 잠들어 있었다
밤새 탄피처럼 눈이 떨어졌고
바람의 울음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생각은 돌하르방처럼 구멍이 숭숭 난 채 굳었으므로
백골처럼 퇴색되어 있었다
녹나무엔 어둠이 엉겨 붙어 있었고
거리를 총알 같이 뚫고 지나가는 찬 공기는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미 저물어 있는 사람들의 울음이
구석구석 번져 있었고
시간에 뒤덮여버린 평화공원
위령제단의 윤곽만 툭 튀어나와 있다
켜켜이 눌어붙은 눈 속에는
읽히지 못한 비석들의 이름이 있다
어느 사이에 도시는 공백으로 뒤덮였고
아직도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이
묘비 안에 잠들어 있었다
1948년 4월 3일, 흉 진 모습이
기록되지 못한 이름들의 슬픔이 쌓여 있었다
역사는 눈발 안에 파묻혀 있었고
새로 쓰는 이 묘비명은
가려져 있던 사연으로 다시 새겨지는 것
눈 덮인 땅 아래서 긴긴 옛날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었다
제주4·3사건 63주년 기념 전국청소년문예공모 시부문 최우수상
억새풀 꺾지 말거라
김남우
아침이슬이 풀잎에 맺혀 구슬같이 떨어짐과 같이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쾌청한 가을하늘을 비행함과 같이
너에게는 도저히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나니
억새풀 꺾지 말거라
산기슭 올라 올라 백록에 다다르면
흰노루 한 마리 펄쩍하고 뛰어올라 내 앞을 지나가되
그 깨끗한 발굽에는 풀 하나 밟혀있지 않음과 같이
너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나니
억새풀 꺾지 말거라
사람이 태어나 부모를 사랑하고 스승을 공경하고
천군만마와 같은 붕우(朋友)를 사귀며 즐기는것과 같이
너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하되 한가지 금칙이 있나니
억새풀 꺾지 말거라
사명감으로 몸을 칠하고 순수혼을 몸에 부어 범벅이 된 채
온몸을 불사르고 사라졌던 그 작은 억새풀들을 꺾지 말거라
8.15의 흥분은 광기를 낳았고 4.3의 비극은 이성을 낳았다
너는 억새풀 꺾지 말거라
유채꽃 엮어 머리에 얹은 채 버선발로 초가집을 박차고 나와
만세삼창 부르며 몸을 던졌던 그 웅장한 억새풀을 꺾지 말거라
그 작은 풀들의 혼만은 결코 끊이지 않으리
아 ..... 너는 억새풀 꺾지 말거라
인생사 돌고돈다 하지만 역사보다는 못하리라
더러움은 닦여지고 도덕성은 표출된다
사랑은 깨끗한 옥이요 미움은 더러운 포(鮑)일지어니
너는 억새풀 꺾지 말거라
사랑아 내 사랑아 지고지순한 나의 사랑아
억새풀 꺾지 마렴 사랑아
억새풀은 꺾일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단다
잊지 마렴 나의 사랑아 그들은 언제나 다시 허리를 펴고 지켜본단다
언제나 다시 살아난단다 나의 사랑아 잊지마렴 기억하렴 !
제주4·3사건 63주년 기념 전국청소년문예공모 시부문 최우수상
오르는 길
김강인
제주항 가까이 기념품 좌판을 벌려놓던
할머니의 짓무른 눈은 늘 젖어 있었다
안구 깊숙이 들어앉은 백내장이
닦아내도 닦이지 않는 눈물을 밀어 올렸다
끝내 팔리지 못한 기억들이
할머니의 눈 속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그때부터 여윈 몸에서는
끊임없이 바람소리가 들렸다
오래 전
상한 몸속에 신당을 들인 할머니
그 남루한 신의 당집에
버려진 짐승 한 마리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가 땅에 들던 날에야 알았다
오늘은 사십구일재의 늦은 오후
친척들 돌아간 자리에
한 줌씩의 바람만 남아 있다
돌이키면 늘 구멍뿐이었던 시간들
젖은 땅에 묻었던 아들을
얇은 망막 너머 다시 품었던 것이다
오래도록 살갗을 저미던 바람소리는
물결치는 바다에 띄워 보내고 싶었던 소리
잠재우지 못한 신음을 풀어주려고
먼 내륙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다
제주4·3사건 63주년 기념 전국청소년문예공모 시부문 최우수상
피뿌리풀
강유나
오죽하면
호명된 자리마다
제 목을 끌어안고 피어났을까.
다랑쉬 오름 근처
깊숙한 바위틈에서 짓무른 핏 무더기를
나는 보았다.
무자년 잠 못 이루는 통증처럼
한 세월 생채기로 피어나
눈 감을 때까지 가슴 졸였던 운명 같은 꽃
제주도 다랑쉬 오름 근처엔
해마다 진통제로 피워내는
피뿌리플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