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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학생4.3문예백일장 

고등부  최우수상  ‘산문부문’

용서

서귀포고등학교

2학년  김대경

그  날로부터  40년이  지났다.  지금  내  앞에는,  대략  70살  정도  되는  노인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노인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나의  바짓가랑이로  붙잡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위선적이고  거짓된  눈물이  아닌,  참되고 

참된  눈물로.  하지만,  마음이  혼잡했다.  그리고  의구심이  들고  있다.  과연  나는,  이  사

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나에게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람을, 

내가  용서할  수  있을까.

“엄마,  오늘  점심  뭐  먹어요?”

“무신  그런걸  물어봐.  반지기에  시래기국인디”

“칫,  만날  똑같은거”

“그래도  감사히여겨  니  아방이  남기고  간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우리도 

지금  굶었을거다게”

그랬다  당시  상황은  광복이  되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에,  갑작스레  많은  사람들

이  고국으로  돌아오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로인해  주거문제와  식량문제가  생겼고,  덕

분에  거리에는  집없이  굶는  사람들로  넘쳐났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보리밭을  물려준  덕분에  굶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역

시  철이  안들던  때라,  가끔씩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다.

“오늘은  장날이니까,  집에  오면  몸국  끓여줄게.”

“정말?  그럼  나  애들이랑  놀다  올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몸국이었다.  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쌀밥도 

같이  나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이  친  것처럼  여러발의  총성이  들려왔고,  그

러고는  총성이  멈추더니  군인들이  총알이  날아왔던  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더니,  나는  친구들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숨을  헐떡거

리며  집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었다.  말로는  괜찮을거야!라고  중얼거렸지만,  불안

한  마음은  어째서인지  점점  커지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나와  어머니가  8년동안  살아온  집은,  우리의  배

를  채워주던  보리밭과  함께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흡사  화염이  입을  삼키는  것처

럼  보였다.  부텈에는  어머니가  끓이고  있었을  몸국이  쏟아져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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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내가  불안에  떠는  도

중,  갑자기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총대를  메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어머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  나는  그  군인들을  쫓아

갔다.

군인들을  따라가보니,  우리  우리  마을의  공터가  나왔다.  그곳에는  우리  마을  이장님을 

포함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  어머니도  있었다. 

“엄마!!”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

은  것을  깨달았다.  군인들은  총을  장전하고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일렬로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세워두고는,  빨리  움직이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

러던  중,  어머니는  나를  보시고는,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도망가’

그리고,  내  앞에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사람들에게  겨누더니,  총

을  발포한  것이다.  총알은  사람들의  머리,  가슴을  꿰뚫어  땅을  피로  적시고  있었다. 

사태를  깨닫고  도망을  시도한  사람들도  총알을  피할  순  없었다.  어머니는,  죽기  마지

막  직전까지  나에게  도망치라고  했고,  총알이  가슴에  날아가고는  어머니의  몸뚱이를 

땅에  눕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처형  당하자,  군인들은  그곳에서  모두  철수

했다.  시체를  완전히  덮지도  않은  채.  그리고  나는,  울었다.  어머니의  시체를  끓어앉

고,  그저  울었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더욱  힘차게  내려  피와  섞여  강을 

만들고,  나는  그  강위에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외가쪽의  도움으로  육지에  올라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4.19혁명, 

5.16  군사혁명  등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  사이  가족을  만들고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행복한척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나는  불현  듯이  가족들에게  제주도로  이사를  가자고  말했다.  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이  가는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  노인을  만났다.  분명  산책하던  도중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자기를  알아보겠냐고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는  알  수  없었다.  노

인이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용서  2

그  노인은,  자신이  내  마을  사람을  학살한  군인들  중  한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노인이,  내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백했다.  자신이  쏜  총탄으로,  나의  어머니를  차디찬 

땅에  눕혔다고.  그리고,  노인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내  바짓가랭이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노인의  사과와  동시에,  그  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모르겠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을  앗아간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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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8년이  흘렀다.  나는  늘  그랬듯이,  4·3위령공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  손에 

꽃을  들고,  양복을  입고,  위령비에  가보니,  나의  어머니의  이름과  함게,  희생을  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이  젹혀있었다. 

“나는,  원수를  용서했어요”

나는,  그  비오는  날,  노인의  두  손을  붙잡았다.  용서했다.  노인이  흘리던  눈물은,  진심

이었기에.

“그러니  어머니도  그를  용서하세요”

힘들었다.  용서하기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용서했다.  그리고,  평온해졌다. 

“어머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다.  하지만  따뜻했다.  모든  것이  따뜻했다.  그  날의  햇살

도,  눈물도,  그리고  나의  마음도.  따뜻한  바람이,  나를  감싸주고  있었고,  꽃들도  바람

에  기뻐하는  듯,  꽃잎들이  바람에  맞춰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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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학생4.3문예백일장 

고등부  우수상  ‘산문부문’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통로  -  평화

오현고등학교

2학년  김승현

제주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섬  제주에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중  하나인  4·3사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어떤  곳은  관광지나  제주의  중심시설  바로  근처에  자리하고  있기

도  하다.  이  흔적들은  4·3평화기념관에  간다면  전개흐름을  따라  4·3의  발자취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4·3평화재단이  있어서  그런지  이곳에선  많은  행사가  열린다. 

나도  오늘  백일장에  참가하고자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다.  한  번  스윽  기념관  곳곳을 

둘러보고  희생자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  앉아  글의  주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오셔서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다.  ‘4·3에  대해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느냐?’라고  말이다.  그래서  난  내  평소  지론대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벌어진  불필

요한  대학살이였다’라고  하자  이  분은  나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옹호하는  입장을  대변

하듯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셨고,  그러다  어찌하다보니  이분과  난  20여분간  이  문제

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분은  나한테  좋은글  쓰라며  덕담  한마디  남기고  홀

연히  사라지셨다.  그  분이  하신  말은  대충  이런거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찌됐든  이 

나라를  세운  아버지라  할  수  있고,  미국에서도  인정받던  사람인데  우리가  그  과오를 

가지고  아버지를  비방해서는  안되는거  아니냐?’  ‘미국,  중국도  워싱턴과  모택동이  잘

못을  했어도  그들을  기리는데  동방예의지국인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모순  아닌가? 

등등...  듣기  불편한  말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난  이렇게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서  목

적이  공산주의자  처리라는  것은  인정한다해도  그  수단이  너무  나쁘고,  그릇된  것이며 

결과는  제주도민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지  않았는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릇된  수단이  아무  잘못없는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가

지  않았는가?  아버지든  누구든  사람을  죽인죄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법이다.  4·3

사건  피해자  분들과  유족분들,  그리고  이곳에  잠들어  계신  분들의  심정과  처지,  억울

함은  누가  풀어드릴  것인가?  바로  그분들의  이웃이며  가족인  우리  제주도민이  풀어드

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아저씨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난 

몹시  놀랐고  슬펐다.  원혼들께서도  저승에서  이분의  말을  들으신다면  땅을  치며  통곡

하실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점을  고려해도 

슬픈  기분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숨  돌리기  위해  고개를 

들어  주변풍경을  둘러  볼  때마다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바로  몇  미터  앞의  민들레는 

봄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처럼  화사하게  만발해있고,  햇빛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와서  가만히  보니  기념관  건물부터  공원까지  참  조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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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무들이  곳곳에  서있고,  산ㄷ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  하

며  여러  가지  이름모를  식물들과  올곧게  서있는  조형물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새들

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교태롭게  지저귄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이런  풍경이야말로  무

릉도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

이  껴안고  있는  영혼들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다.  이점

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  한켠이  아프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평화는  다른게  아니라 

고통과  억울함을  지닌  원혼들을  보듬어주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들을 

위로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의  거창하고  위엄있는  원래의  본질적인  의미에선 

벗어날  순  있지만  평화란  개념  자체는  구체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  아닌가?  이렇

게  생각하니  평화란게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곳에  내가  배운  것을  사용하기  위

해  왔는데  얼떨결에  새로운걸  배워가는  것  같다.  오늘  깨달은  평화의  개념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은  4·3의  원혼들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죽을때까지  명심하며  살아갈  것이며,  내가  오늘  본  풍경과  들었던  말들은  앞으로  내

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에  멈추지  않고  오늘  배운  사실들을  주변에  알리며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 

오늘  나는  좀  더  성숙해진  나를  이곳에서  발견했고,  이  나의  손을  꽉잡고  앞으로  나

를  탐색하고  지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  평화는  우리곁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를  깨달으면  우리  모두는  조금더  성숙해진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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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학생4.3문예백일장 

고등부  우수상  ‘산문부문’

4월  3일의  의미

대기고등학교

1학년  조우준

명도암에  4·3평화공원이  생긴  후  할아버지는  늘  4·3사건에  대하여  말씀하시곤  하셨다. 

4·3사건을  직접  겪으신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시다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시고  말씀을  아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4·3평화공원은  동네  공원처럼  지나

가는  곳이었고,  소풍을  가고  매년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제주도에서  일

어났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가벼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누나가  ‘지슬’이라는  영화를  보러  갈  때  같이  따라가  보게  되었는데,  난  그  영화를  보

고  난  후  4·3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본  영화  ‘지슬’은  4·3사건  그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신기한 

점은  요즘  개봉되는  영화에선  찾아  볼  수  없는  흑백  화면이고,  제주도  사투리가  나오

는  동시에  표준어  자막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이  ‘감자’를  제주말로  해놓은  것

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4·3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등  내용은  흘러갔지만  영화가  시작

하고  연기가  가득한  집에서  시체와  함께  사과를  먹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과하지  않은  제주  사투리와  돌담,  초가집  등의  친숙한  배경을  보면서  더욱  실

감나게  느껴졌다.  글이  아닌  영상을  통해  접한  4·3사건은  참담했고,  이런  작품이  한정

적으로  개봉된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겼다.

영화를  보고  난  후  4·3사건을  더  알고  싶어서  ‘순이삼춘’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서촌,  동문로터리,  사투리  등  너무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소설을  읽는다기  보다는  경

험담을  듣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등장인물  ‘순이  삼촌’을  통해  4·3이  얼마나  비참

하고  참담한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  소설은  ‘지슬’을  볼  때와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

다.  ‘지슬’은  그  당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위주로  제주의  모습을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만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  이었는데  ‘순이  삼촌’은  서로의  대화를  통해  제주도민들의 

입장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의  입장도  같이  보여주며  제주  4·3의  진정한  모습을  느

낄  수  있었다.

나는  4·3관련  영화,  소설  등을  보니  진짜  4·3사건을  알고  싶어서  조사하게  되었다. 

4·3사건은  남한만  단독  선거  즉,  5·10총선을  반대하는  도민들과  미군정,  서북청년단 

같은  단체들의  대립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빨치산’으

로  불리고  미군정은  무고한  도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사건을  정

당방위로  무마시킬려고  도민들을  폭동으로  몰아세워  더욱  큰  갈등을  만들어  냈다.  이

에  도민들도  유격대를  결성하여  대항하였지만  턱없이  부족한  인원과  무기들로  잔혹한 

미  군정을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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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고,  그  인원초차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미군정을  이끌던  브라운  대

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내가  할  일은  진압  뿐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명령을  받

은  브라운  대령  입장에서는  본인의  일을  했을  뿐이지만  도민들의  입장에서  원인도  궁

금에  하지  않은  채  도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잔인한  말을  뱉을  수  있는지  정말  놀랐

다.  저  사람이  인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우리나라  선거에  미군이  개입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아직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  화가  난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  진상규명이  시작

되면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  지는  등 

4·3사건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4·3백비를  마주하게  된다.  어 이유로  글을  새

기지  못한  비석.  언젠간  이름을  새기고  다시  세우겠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새하얀  비

석은  언제쯤  채워질  수  있을까?  섬이라는  제한적인  진압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참

담한  일들을  알아가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매년  4

월이  다가오면  제주에서는  4·3위령제를  준비하고  대통령의  참석을  건의하는  등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것이,  제주에서만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제주도민들이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4·3사건.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부타,  도민들부터  스스로  먼저  관심을 

가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사건을  알게  되고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지슬’과  소설  ‘순이  삼촌’처럼  이런  사례들을  참고하여 

여러  방면을  통해  점점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린다면  무고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