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문서컬러시안 활용 1-기관지 4.3과 평화 38호 PDF(파일)_optimiz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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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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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February. 
Vol. 38

특별기획  

기억, 진실 그리고 정의

양조훈 이사장 취임사  

4·3아픔 치유하고, 4·3가치 세계로

특별인터뷰_ 걸음과 거름  

“우리는 역사의 정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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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O N T E N T S 2020. February. Vol. 38

권두시
이 봄이 가기 전에

_ 이종형

양조훈 이사장 취임사
4·3아픔 치유하고, 4·3가치 세계로

_ 양조훈

특별기획
기억, 진실 그리고 정의

기억과 기록 ① 아르헨티나 

_ 조미영

2020년 신년참배
_ 김영모

특별논단
제주 4·3의 과제와 세계화

_ 김민웅

발굴유해 신원확인보고회 현장
70여년만에 가족과 만나다

_ 김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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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제주바-01019 

등록일 

2011년 3월 25일(계간 비매품)

발행일 

2020년 2월 25일 

발행처 

제주4·3평화재단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 

 

제주4·3평화기념관 4층 

 

TEL. 064.723.4373

 

FAX. 064.723.4303 

 

www.jeju43peace.or.kr 

발행인 

 양조훈    

편집인 

 고성철    

편집담당 

 김영모

편집위원 

 이종형, 김기삼, 김봉현, 

 

 조미영, 정용복, 장윤식

디자인·인쇄   하나출판

표지_ 어두운 세상을 비추다(4·3평화기념관 야간조명)

사진_ 양동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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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_ 걸음과 거름
“우리는 역사의 정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뿐”

김창후 전 제주4

·3연구소장

_ 오승국. 김영모

기획_
허영선의 제주를 걷다

  

등뼈 위에 새겨진 기억

_ 허영선

4·3의 증언

“암흑 속 내 인생을 보상해다오”

강호삼

_ 조정희

4·3유적

이승만 별장과 장터드랭이를 아십니까?

_ 박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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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포커스
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 사례

_ 반영관

재단 신규사업
_ 정용복

새로나온 책

재단뉴스

평화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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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젖은 귀를 말리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어요

돌아오지 않은 이름을 불러요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져요

누명은 죽음보다 완강해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 짓는 시절

그래도 한날한시에 죽을 수는 없어

마냥 짓밟힐 수는 없어

무덤 위에 다시 밭을 일궈 씨를 뿌렸어요

봄이 한번 다녀가는 동안 눈치 보듯 한 뼘씩만 뿌리내리며

죽은 듯 죽은 듯 죄를 지으며 

할 수만 있다면 도로 무르고도 싶은 세월을 견뎌왔어요

귀 막고 눈 감고 입 닫아 일흔 몇 해

착하다고 잘 견뎌냈다고 한번만 등을 토닥여주면

이제 눈물은, 그만 흘리고 싶어요

이 봄이 가기 전에 

당신의 손을 잡고 꽃구경 가고 싶어서 

옛집으로 오는 길목에 내 건 꽃등 보이시나요

환한 길을 따라 오시기만 하면 

아버지, 거기 젊은 당신보다 늙은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어머니, 한눈에 저를 알아보실 수 있을 거에요

젖은 귀를 말리고

붉은 꽃의 울음소리를 들어요

돌아오지 않은 이름을 불러요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져요 

이 봄이 가기 전에

이종형

2004년 「제주작가」 등단.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2018년 <5

·18문학상> 수상. 제주작가회의 회원. 제주민예총 이사장

강요배 - 동백꽃지다

권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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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그리고  4·3가족 

여러분! 

72년 전, 아름다운 섬 제주는 냉전과 분단의 광

풍에 수만 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

다. 이후 금기와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4·3의 진실을 찾기 위한 제주도민의 노

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족과 제주

도민의 헌신적인 진실규명운동의 의지는 특별

법  제정이란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4·3은 

비로소 어둠에서 나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

었습니다.

2008년 제주4·3평화재단의 창립은 누가 뭐래

도 이런 4·3운동의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희

생자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무하며, 4·3의 

진실을 올곧게 알리는 사명을 안고 탄생했습니

다. 4·3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평화

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물

려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서서, 지난 2년 동안 이사장직

을 맡아서 이런 평화재단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

했는지 되돌아봅니다. 4·3운동의 구심점으로의 

위상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 소통과 협치에 역점

을 두겠으며, 종내는 제주4·3이 온 국민이 공

감하는 역사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

속을  얼마만큼  지켰는지  자성해  봅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나마  위안을  찾는다면,  저에게는  행운이  있

었습니다. 제가 평화재단 제6대 이사장으로 취

임하던 2018년은 4·3 70주년이었습니다. 분명 

4·3의 전국화, 세계화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4·3가족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4·3알리기 

열기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드디어 4·3은 이념

적 누명을 벗고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역사가 되

었습니다. 

2017년 23만 명에 머물었던 4·3평화공원 방문

객은 2018, 2019년 연속 40만 명을 돌파했습

니다. 이제 50만 명 시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

다. 제주4·3에 대한 국민 인식도 역시 2017년 

68.1%에서 2019년 82.9%로 2년 새 14.8%포

인트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여기

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과분하게도 다시 2년 동안 평화재단을 이

끄는  선장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보완하

고, 잘된 일은 더 개선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재단 전 직원과 함께 평화재단의 존재의미를 다

시금 되새기고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유족회를 비롯한 4·3단체, 기관과의 유대를 더

욱  강화해가겠습니다.  화해정신을  확산시켜가

기 위해서 그동안 거리감이 있었던 검찰, 경찰, 

군사령부, 더 나아가 보훈단체와 대화하고 유대

를 강화하고자 합니다. 최근에 제주에 새로 부임

하는 검사장, 지방경찰청장, 군지역사령관 등이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1월 14일 이사회를 열어 지난 2년간 이사장을 역임한 양조훈 현 이사

장을 제7대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향후 2년 동안 이사장직을 수행하게 된 양조훈 이사장은 1월 

20일 열린 취임식에서 제주4·3의 치유와 세계화의 비전을 제시했다.

4·3아픔 치유하고, 4·3가치 세계로

양조훈 이사장 취임사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6대·7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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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추가진상보고서는  이번을  제1권으로  여기고, 

앞으로 제2권, 제3권 등을 계속 발간할 예정입

니다.

4·3미국자료 조사도 꾸준히 추진해 갈 생각입

니다.  지난해  미  국무부,  극동군사령부  등  상

위 기관 문서 등을 대상으로 수집활동을 한 결

과, 의미있는 결과를 얻은 바 있습니다. 미국자

료 수집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아울러서 4·3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준비하면서 자료의 체계

적 정리 시스템도 구축하겠습니다. 

지난해  성황을  이룬  4·3  UN  인권심포지엄에 

이어서, 올 가을에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서 4·3행사를 갖고자 합니다. 4·3에 대한 미국

의 역할과 책임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들이 펼치

는 화해운동도 함께 소개할 것입니다. 아울러서 

이런 기회를 통해 ‘미주 4·3기념사업회’ 탄생도 

모색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12월 13일, 저는 중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난징대학살 국가추도식’에 다녀왔습니다. 중국

정부가 공식초청한 한국 인사는 독립기념관장

과 4·3평화재단 이사장이었습니다. 현재 대만 

타이페이 2·28기념관에서는 4·3기록물 전시회

가 작년 11월부터 금년 4월까지 열리고 있습니

다. 이렇게 동북아시아 국제교류는 활발히 이뤄

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4·3과 같은 아픈 역사

를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관계기관과의 교류도 

확대해갈 계획입니다.

금년에 특별히 관계기관의 협조아래 4·3오페라 

공연과 영화제작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4·3의 

대중화를 위한 것입니다. 4·3오페라는 북촌학

살사건을 소재로 한 <순이삼촌>을 올 가을 제

주와 서울에서 공연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내

년에는 가능하면 일본에서도 공연할 수 있게끔 

준비해 보겠습니다. 

4·3평화공원은  물과  음악이  흐르는  공원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금년에는 화단을 만들어 꽃

을 피울 것입니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동백

나무  캠페인을  올해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 

모든 것이 희생자의 안식과 방문객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사업들입니다.

4·3가족 여러분!

그럼에도  지난해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한으로  남습니다.  올해도 

포기하지 않고, 유족회 등 관련기관·단체와 힘

을 합쳐 반드시 4·3특별법 개정을 이뤄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대통령님의 말씀을 인용하

면서 취임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합니다.”

감사합니다. 

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하는 사례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재단에서 올해부터 정부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서 제주4·3트라우마센터를 

시범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생존희생자와 유족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해소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

비하고 있습니다.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트라우마센터 건물은 이용자들이 편리

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유해 발굴과 발굴된 유해에 대한 신원확인사업도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서울대학

교에 의뢰했던 유전자 감식을 통해 또다시 12명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분

들은 70여년만에 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뤄집니다. 모레(22일) 오전 10시 4·3평화

센터에서 발굴유해 신원확인 보고회가 있게 되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그동안 난제였던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발간사업도 곧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달 선보이게 될 추가진상보고서에는 마을별 피해실태, 집단학살사건 전모, 수형

인 행방불명 및 예비검속 피해실태, 유해 발굴사업, 교육계 피해실태 등을 다루

었습니다. 아울러서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단체원 피해실태도 함께 소개됩니다. 

양조훈 이사장 취임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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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장 어머니들의 집회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곳이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도시 곳곳에 배어있고 주민 

90%가 유럽이민자 후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정

열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정도로 차분하다. 

강을 건너 시내중심부로 향하다 만난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Casa 

Rosada)’ 는 분홍색 저택이라는 뜻이다. 과거 요새로 쓰였으나 지

금은 행정부의 중심건물이다. 카사 로사다를 마주보고 마요광장

(5월 광장)이 자리한다. 아르헨티나 독립의 첫걸음을 위한 5월 혁

명을 시작으로 정치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주요무대가 되었던 곳 

이다.   

목요일 오후가 되자 마요 광장이 분주해진다. 울타리 주변에 각종 

포스터와 현수막이 부착되고 노점상인들까지 보따리를 풀며 장사

기억, 진실 그리고 정의

특별기획

조미영 여행작가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제주4·3연구소 연구원으로 4·3유해발굴사업을 총괄했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축제와 문화기획자이기도 하다. 2011년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기록을 담은 「인도차이나-낯선 눈으로 보다」를 출간하며 

현재 여행작가로 활동중이다.

기억과 기록 ① 아르헨티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비슷
한 경험을 가진 외국의 사례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은 필
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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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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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비를  갖춘다.  마치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같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포스터는 환경, 여성, 

소수자, 원주민들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노점의 물품들 역시 예사롭지 않다. 저항의 상

징물들이 새겨져 있다. 이윽고 세시 반이 되자 

사람들이 술렁인다. 광장으로 들어서는 미니버

스를 향해 구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어느새 버

스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버스

에서 내리는 할머니들! 그녀들을 향한 환호와 키

스세례는 여느 아이돌스타 못지않았다. 

오늘은 5월 광장어머니회의 집회가 있는 날이

고 그녀들은 40여년이 넘도록 이 광장을 지켜

온 어머니들이었다. 이제는 80~90세의 할머니

가 되었지만 여전히 매주 목요일이 되면 광장

으로  나와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친다.  평범한 

어머니이자 주부였던 그녀들은 왜 투사가 되었 

을까?

1976년 여느 나라들이 그렇듯 아르헨티나 역시 

경기 침체로 국가재정이 흔들리자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이를 빌미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리고  군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

해 반정부인사들은 물론 지식인, 학생들을 탄압 

과거 불법구금장소였던 곳을 기억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3만여개의 돌에 희생자의 이름이 각인된 추모비

◀ 기억공원에 세워진 추모 예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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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끈질긴 저항과 국가채무위기의 사회적 

불안 속에서 ‘종결법’과 ‘명령복종법’이 공포되

며 군부에 대한 사면의 기회를 주고 만다. 사

회적 화합차원의 용서라는 허울로 어두운 과거

사가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실 찾기

의 불꽃은 1994년 수정헌법에 의해 과거사 재

판이 재개되며 다시 살아난다. 덕분에 실종자

에 대한 조사 작업도 다시 시작되고 2001년에

는 종결법과 명령복종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에 

따라 과거사 청산은 활력을 얻게 된다. 2003년 

대통령에 취임한 키츠네르 대통령은 ‘국가 기억 

자료보관소’를 설립하고 이를 위한 법령 곳곳에 

‘반사면’ 조항을 넣어 과거사 청산의 굳건한 의

지를 보여준다. 

이후  과거사  청산은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그중 에스마(ESMA)는 상

징적인 곳이다. 옛 해군 소속의 휴양시설이었

던 이 곳은 군부시절 불법구금과 고문의 대표

적 장소였다. 지금은 당시의 참상을 알리는 기

억공간으로 거듭나며 인권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과거사 조사가 진행되자 군부는 건물의 

일부를 훼손하며 증거인멸을 시도하였으나 대

부분의  현장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어두침침한 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에 

사람들이  갇혀있었다고  한다.  벽에  희미하게 

남은 낙서자국과 콘크리트의 차가운 공기가 당

시의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또한 이 곳은 군부의 재판을 위한 소중한 증거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에 갇혀있던 이들의 증

에스마의 외벽에 새겨진 군부집권 시절의 사진들

한다.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의 시작

이다. 

이후 1983년까지 몇 번의 군부세력들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는 동안 3,000여명이 정치적 이유

로 사형당하고 12,000여 명이 행방불명되고 수

만 명이 불법구금과 고문을 당한다. 이에 자식

을 잃은 어머니들이 마요광장에 모여 집회를 시

작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의 연대는 무소불위

의 권력 앞에서 더욱 단단해지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은 1983년 첫 민선대

통령인 알폰신에 의해 시작됐다. 실종자진상조

사위원회(CONADEP)가 구성되고 5만 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에는 수많은 

실종자와 3,400여 곳의 불법구금 장소에 대한 

실상이 담겨있다. 이 보고서는 이후 “절대 다시

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눈카마스

(Nunca Mas)」라는 이름의 책으로 발간됨은 물

론 군부당시의 권력자들을 재판에 세우는 결정

적인 증거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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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분류되고 정리하여 서류함에 보관된다. 물

품이 들어오면 소독과 보수를 거쳐 수장고로 이

동되어 보존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로지르는 라플라타강변

에는 ‘기억의 공원’이 있다. 민간단체와 희생자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국가 테러리즘의 희생자

들을 위한 공원 및 추모비를 요구하였고 그 결

과 기억과 관련된 첫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우

선 법적테두리를 만들었다. 정부가 바뀌고 정치

색이 변해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도록 보장하

였다. 설립단계에서부터 현재 운영에 이르기까

지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비결이다. 

원래 이 곳은 버려진 장소였으나 강으로 던져진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적합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낙점되었다. 이들은 추모의 

방법으로 예술을 선택하였다. 미국, 유럽, 중남

미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17개의 조형물을 설

치하였다. 특히 강가에 세워진 파블로 미게즈의 

동상은 상징적이다. 그 소년은 엄마와 함께 납

치되어 이 강에 버려진 실제소년의 이야기를 바

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각국의 지도자들이 방문 

때면 그 소년을 향해 헌화한다. 우리나라의 문

재인 대통령 역시 이 곳을 방문하여 헌화하였

다. 추모의 공간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인권

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소가 되고 있다. 

40여년의 넘는 시간동안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청산은 많은 진전을 이뤘

다. 그 중심에는 하얀 머리 수건을 쓴 5월 광장 

어머니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

이 올 때까지 지속할 것이라고 한다. 아르헨티

나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5월 광장 어머

니회와 할머니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라플라타강변 한가운데 세워진 미게즈의 동상

언을 토대로 현장검증이 이루어지고 사건이 재

구성되며 끔직 했던 과거가 하나씩 밝혀지고 있

다. 특히 임신한 상태에서 잡혀온 여성들이 이 

곳에서  아기를  낳은  후  실종되었는데  ‘죽음의 

비행’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되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즉, 약물을 투입해 잠을 재운 뒤 

강물에 빠트려 죽게 한 것인데 그들은 여전히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행방불명자로 남아있다. 

이때 태어난 아기들은 신분 세탁이 이루어진 후 

군인가족으로 입양되었다. 강제입양이 된 것이

다. 이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다시 

5월 광장 할머니회가 조직된다. 자식과 손자까

지 잃어버린 할머니들이 주축이 되어 관련 추적

조사와 DNA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약  170여명이  진짜  가족을  찾았다.  할머니들 

또한 이 곳 에스마에 상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에스마 ‘기억의 장소박물관’의 관장인 알렉산드

라 역시 17살에 이 곳에 감금되었던 경험이 있

는  생존  수용자이다.  그녀는  박물관학을  공부

한 학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권운동가라고

도 했다. 자신과 같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

해 이 장소에서 일어난 반인륜적인 일들에 대해 

인식하고 반성하며 기억해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박물관은 두 가지 방식의 장치를 활용합

니다. 객관적 정보와 느낌을 호소하는 장치입니

다. 이 장소는 발견된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무 

것도 바꾼 것이 없으니 방문하는 사람들이 당

시의 경험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빔 

프로젝트와 같은 시설과 음향을 통해 당시에 있

던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음을 느껴보는 것입니

다. 그리고 이후 살면서 결정의 순간에 여기서 

일어난  일의  이미지,  텍스트,  소리,  메시지를 

기억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우리

의 미션은 완수된 것입니다.” 

에스마에 상주하는 주요 기관 중 하나가 바로 

‘국가기억자료보관소’이다. 76년부터 83년까지

의 군부시절의 모든 자료가 총 망라되어 있는 

곳이다.  실종자진상조사위원회의의  조사  자료

를 바탕으로 재판결과와 추가 증언 등을 보완하

여 정리해 놓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밀문

서가 공개될 때마다 관련 내용들을 수합하여 조

사에 반영하고 자료를 보완한다. 그 외에도 각

종 인권탄압 사례들을 발굴하여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추가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결과가 

확정되면 전부 디지털로 전환되어 국민들이 볼 

수 있다. 덕분에 학자와 학생들의 연구 자료는 

물론 군부에 대한 재판에서도 중요한 증거가 되

고 있다. 

아카이브 부서는 3개로 나뉘어 진행된다. 문서

와 비디오, 사진, 그리고 물품들을 다루는 부서

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오래된  축음기와  비

디오기기  등이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었다.  마

치 오디오 박물관 같았다. 이는 40~50년 전의 

녹음 파일이나 비디오 등의 자료를 판독하기 위

해 갖추어 놓은 것이었다. 문서는 습도와 온도

를  철저히  맞추어  보관하고  있었다.  서류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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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제주4·3 72주년인 경자년 새해 아침,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

는 염원은 변함없다.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많다. 4·3영령들을 추모하고 평화정신을 되

새기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다짐하는 경자년 합동신년참배를 진행했다.

18 

1월 1일 4·3위령제단 합동신년참배
도내 기관·단체장 4·3 희생자 추모

제주4·3을 기리는 한마음 
경자년 새해 아침을 열다

2020년 신년참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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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20 

21 

국방부·검찰도 4·3추모에 앞장

지난해 제주4·3 희생에 유감을 표명했던 국방부

와 검찰 주요 인사들의 참배도 관심이 집중됐다.

올 겨울 첫눈이 내린 1월 14일 먼저 서주석 전 

국방부차관과 조소영 국방부 인권담당관 등이 

위령제단을 참배했다.

서주석 전 차관은 지난해 재임 당시 서울 광화

문 4·3국민문화제에 참석 제주4·3에 대한 국

방부의 사과를 표명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날  4·3평화공원  방문에는  양조훈  이사장과 

송승문 유족회장 등이 동행했으며 이들은 참배

를  마친  후  위패봉안실,  4·3평화기념관  등을 

둘러봤다.

서주석 전 차관은 방명록에 “70여년전 무장투

쟁과 진압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되신 제주도

민의 영전에 진심어린 사과와 더불어 깊은 조의

를 표합니다”라고 적었다.

박찬호 제주지방검찰청 신임 검사장도 박소영 

차장검사  등  지검  임직원들과  위령제단에서 

4·3영령들을 추모했다.

취임 이틀째 외부활동으로 처음 4·3평화공원을 

찾은 박찬호 검사장은 위패봉안실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4·3의 아픔이 치유되어 평화와 인권

의 가치로 승화되도록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적

었다.

한편 제주지방검찰청에서는 송삼현·조재연 전

임 검사장 등 신임 검사장이 발령올 때마다 먼

저 4·3평화공원을 방문, 위령제단을 참배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4·3생존수형인 형사보

상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도민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진규상 해병대 9여단장과 소속 참모들의 참배

왼쪽부터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고희범 제주시장,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원희룡 제주도지사, 김태석 제주도의회 
의장,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제주4·3평화재단은 1월 1일 오전 도내 주요 기

관장들이 참여한 가운데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에서 신년참배를 진행했다.

이날 참배에는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 김

태석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 이석문 제주특

별자치도 교육감, 고희범 제주시장, 송승문 제

주4·3희생자유족회장 등 기관장과 유족, 제주

도의회 의원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참배 의례는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의 안

내로 기관장들의 헌화 및 분향과 참배객 분향,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원희룡  지사는  방명록에  “이념  갈등의  상처를 

화해와 통합으로 승화시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

오”라고  적었고  김태석  의장은  “오로지  제주, 

평화와 인권”, 이석문 교육감은 “경자년, 새해 

새날에 영령들과 함께 4·3전국화를 위한 교육 

더 힘차게 하겠습니다”라고 남겼다.

이날 해병대 9여단장 진규상 준장도 군 지휘관

으로는  처음으로  4·3영령들을  추모해  눈길을 

끌었다.

진규상 준장은 참모장 박희보 대령 등 소속 참

모들과  함께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참배

했다, 이들은 양조훈 이사장, 송승문 유족회장, 

허영선 4·3연구소장 등의 안내로 분향을 마치

고  위패봉안실  방명록에  “4·3의  아픔을  잊지 

않고 부대를 지휘하겠습니다”라고 적으며 4·3

영령들의 안식을 기원했다. 

이밖에도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위원장  오영

훈),  자유한국당  제주도당(위원장  한철용),  바

른미래당 제주도당(위원장 장성철), 민주평화당 

제주도당(위원장 양윤영), 제주국제자유도시개

발센터(이사장 문대림),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

장 이 근), 농협중앙회제주본부(본부장 변대근) 

등 각 정당·단체 참배행렬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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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22 

23 

83세에 접어드는 제인 폰다가 최우수 영화상 수상 사회를 맡았다. 그녀가 누

구인가? 1960년대 말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에 앞장섰고 얼마 전에는 기후위

기에 대응하는 미국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서 체포되기도 했다. 제인 폰

다는 봉투에 든 카드를 꺼내들기 전,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라고 말한다. 수상작에 대한 암시였고 발표는 명료했다. “Parasite! (기생충)”

이날 가장 많이 듣게 된 단어였다. 

하루 동안 이미 세 차례나 수상 무대에 올랐던 봉준호는 오스카 영화제 피날

레인 최우수 영화상 수상소감에서 현장에 앉아 있던 마틴 스콜세이지의 말을 

인용해 장내를 감동으로 몰아간다. 팔십에 가까운 명장 마틴 스콜세이지의 눈

빛이 뜨거워졌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영화인생 평생을 통해 봉준호를 움직인 발언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아이리

쉬맨 Irishman>이 오스카 후보작으로 올라있던 마틴 스콜세이지를 향한 기

립박수가 이어졌다. 봉준호가 받은 감독상이 마틴 스콜세이지에게 헌정되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면이었다. 봉준호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섰고, 거인은 그 어깨를 젊은 감독에게 기쁘게 내어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

나 이날 할리우드의 “문법”은 바뀌었다. 제인 폰다의 말 그대로였다. 봉준호

의 “개인적인 것”이란 결국 한국사회에서의 그의 경험이다. <설국열차>가 거대

서사였다면, <기생충>은 미세서사다. ‘반지하 생활’을 하는 일가족의 기이한 

현실은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자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자의 현실을 압

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계급격차가 굳어지고 있는 오늘의 

지구적 대치상황을 그대로 짚어냈다. 

모두가 알면서 모두가 눈을 돌리고 있는 현실을 봉준호는 치밀한 서사와 배우

들의 놀라운 연기력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하는 연출로 세상에 드러내

특별논단

<기생충>의 문법 

이 글을 쓰는 즈음에 나는 미국 서부 L.A.의 오스카 영화제 수상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와는 극단에 위치한 동부의 뉴저지에서였다. 일명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상”이다. 1927년에 시작되었으니 벌써 92년이 지났다. 미국 영화사 

100년으로 가는 길목이니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고되어 있

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연 이 날의 주인공은 <기생충>으로 각본상, 최우수 국제영

화상, 감독상 그리고 최우수 영화상까지 거머쥐게 된 감독 봉준호였다. 예상

은 되었으나 역시 막상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영화의 본산이라고 자부하는 할리우드에 배우나 영화작품으로 진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터에 상까지 받는다는 것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를 공

격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제주 4·3의 과제와 세계화

- 우리 이야기, 어디에 있을까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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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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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베즈의 삶을 그려낸다. 총 20권으로 되어 있는 <루공 마카르> 총서 제1권이 

다. 제르베즈의 아들 에티엔은 에밀 졸라의 다른 작품 <제르미날>의 주인공

으로 어느 날 등장한다.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 실패, 그리고 좌절하지 

않을 미래를 그린 이 작품 속에서 졸라는 가장 개인적인 삶의 사회적 맥락을 

짚어낸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의 현장 

취재 르뽀 작품이다. 가난한 존재들이 매일 마주하는 삶을 그는 치열하게 기

록해나간다. 졸라의 <제르미날>처럼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개인의 

삶이 자본주의 체제의 요구와 압박 그리고 욕망의 힘 앞에서 어떻게 매일 망

가져 가는지 폭로하고 있다. 제르베즈의 삶은 아들 에티엔에 와서도 아직 풀

리지 않고 있으나 희망의 단서는 아주 가늘게 목격한다. 하지만 오웰은 여전

히 현재진행형인 빈곤의 현실을 우리에게 마주보도록 한다. 

개인은 그저 개인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시대 전체의 틀 안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니 이런 서사의 기본은 루카치가 짚어냈듯이 인간이란 역사 속에서 자

기 자신의 산물로 만들어져 간다. 위대한 문학은 인간의 실존과 역사의 무대

를 하나로 결합시킨 성과다.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인간의 조건> 역시도 태평양 전쟁 당시 관

동군에 속해 있던 젊은 장교 가지의 삶을 통해 전쟁과 인간, 그리고 비극을 

보게 한다. 그건 가지 개인의 영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가지가 사랑하

는 미치코를 결국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장면은 읽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그 고통은 당연하게도 반전(反戰)의 의지를 북돋는다.

리차드 라잇의 <미국의 아들>은 주인공 비거를 통해 인종차별의 현실을 대담 

하게 보이고 있다. 살인자 비거 라는 주인공, 그 살인의 동기와 과정은 살인 

범 이라는 존재에 대해 옹호할 수도 그러나 옹호하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 

면서 미국의 역사와 사회가 매일 직면하고 있는 모순과 마주하게 한다. 그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개인의 서사인 동시에 사회적 서사이다. 백인이 

는데 성공한다. 그건 어느 낯모르는 타자의 이야기이면서도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한 결과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시

시한 인생들의 삶이 진지하게 탐구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들

이 진력한 서사의 문법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제국의 문명이 지배해온 식민지의 현실이 그 

문법의 뿌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꼽는 위대한 문학작품들이란 대체로 서구제

국의 산물이니까 말이다. 제국이 기생충이라고 멸시하고 짓밟았던 삶이 목소

리를 내어 제국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면 그건 기존의 문법 파괴이자 새로

운 서사의 출발이다. 영화 <기생충>은 그 작업을 이뤄내 한국영화의 세계화

로 가는 길을 뚫어내었다. 할리우드의 서사를 몸에 입고 세계화에 합류한 것

이 아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들의 목록

프랑스 민중작가의 태두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세탁부로 살아간 여인 제

영화 ‘기생충’(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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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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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에 주는 성적이다. 춘자와 상표, 만철이의 이야기가 시대의 비극과 만나면

서 집단서사가 되고 그것은 역사의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겨진다. 

그러나 제주 4·3은 1945년 전세계 전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가 미국의 새로운 식민지가 된 민족이 겪어낸 일이다. 그런데도 여

전히 변방의 망각된, 그래서 아직도 4·3 다음에 붙여줄 이름조차 없는 사건으

로 멈추고 있다. 그래서들 말한다. 제주 4·3의 세계화 이전에 지역화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본거지인 한국에서조차도 역사의식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지 못한 판에, 라고.  

제주 4·3의 세계화가 뜻하는 바, 그 길은

한참 영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제주 4·3을 소재삼아 대단한 영화 하나 만들

자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 이후, 우리의 문학사에 제주 4·3을 확실하게 올려놓은 작품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토로하자는 것도 아니다. 김석범의 <화산도>

도 아직 대중의 독서지평에 친밀하게 들어와 있지 못하다. 

문제는 제주 4·3의 격동과 고통, 그 안에 담긴 개인 개인의 삶이 풀어내는 서

사가 아직도 “우리의 이야기”로 정착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역

이냐 세계이냐의 문제 이전의 차원이다. 지역부터 시작해서 세계로, 라는 방

식을 선택하자는 말도 아니다. 많은 구술 작업과 역사연구, 그리고 제도화된 

작업들이 힘을 들여 이어지고 있으나 그 목소리들이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

재, 우리의 미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숙제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

이다. 어찌 보면 이런 미완의 과제를 지금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그간의 사정

을 외면하는 처사일 수도 있다. “제주 4·3”에 입 열기를 여전히 머뭇거리는 

이들도 있는데,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내놓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를 따져보면 시간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난다고 해서 접근의 새로운 길이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지배하는 사회에서 내부의 식민지가 된 흑인 사회는 이 서사에 담긴 전쟁을 

어느  하루라도  치루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정작  제국의  지배와  그로  인한  식민지의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있지 못하다. 문법의 한계다. 조지 오웰의 <버마의 나날

들>조차도 적나라하게 식민주의의 현실을 파헤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제국과 문화>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한계를 정확하게 

거론한다. 무인도 표류기로 설정된 다니엘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가 사실

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식민주의 체제의 압축 서사인 것을 밝혀내면서 우리

의 시선이 어떤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일깨운다.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

진 대륙>의 저자 월터 미뇰로에 이르면 더욱 더 그 비판의 강도가 강해진다. 

서구가 주도한 이른바 “근대성”이 세계화의 깃발이 되는 것은 제국의 세계적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일 뿐이며, 이 안에 담긴 식민주의를 직시하는 것이 

우리 인식의 혁명적 지평이라고 말한다. 서구의 문화는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

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으나, 식민지의 문화는 이코노미조차 탈 수 없으며 

인종주의 문화인류학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의 창의성과 함께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내야 할 식민주의의 문제를 포괄해야 할 임무”

바로 이 지점에서 <제주 4·3>을 가슴에 이고 사는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것

의 창의성과 함께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내야 할 식민주의의 문제를 포괄해야 

할 임무”를 깨우치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기생충>의 불편함 정도가 아

니기 때문이다. 그건 <기생충>을 담아내면서도 그걸 넘어서는 지점으로 가는 

모험이자 탐색이며 험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이 지난 2013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 시네마 극

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것은 이런 노력의 한 성과였다. 물론 선댄스

라 가능했다. 실험적 독자성과 비판의식 그리고 변방의 목소리를 투영하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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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소멸되고, 그 다음 단계의 길이 열린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

상에 가지고 나갈 서사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기생충>에 대

한 세계의 주목이 부럽지만 제주 4·3은 언젠가 그 이상의 세계적 울림을 가

지고 목소리를 낼 날이 반드시 온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인

적인 것이 역사적이다.”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는 종말을 고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중

이다. 베트남 전쟁의 과정에서 저질러진 “미라이 학살 사건”은 미라이라는 한 

작은 마을의 비극적 이야기다. 제주는 그보다 할 말이 더 많고 많다. 침묵하

지 않는 제주 4·3,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가치와 방향을 바꾸는 역할에 주

목하자. 할리우드의 문법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제국의 문법을 붕괴시키는 

의지를 가지고. 

 

영화 ‘지슬’(네이버 영화 스틸컷)

우리는 <지슬>을 떠올리면 <기생충>이 부럽다. 현기영과 김석범은 에밀 졸라

의 자리에 가 있지 않다. 제국의 문화에는 거대한 담이 둘러쳐져 있다. 그곳

에는 엄청난 자본과 기술력과 소통의 네트워크와 문화에 대한 지배력을 지원

하는 제국의 정치가 작동한다. 이는 제주 4·3을 말하는 논리에 압도적인 제

한을 가한다. 학살을 말하지만 학살의 진정한 지휘세력이 누구인지 정면으로 

말하기 쉽지 않다. 학살의 수단을 누가 동원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지, 그래

서 제주가 어떤 섬으로 전략적 역할을 하도록 기획했는지를 거론하고 이를 교

과서에 실을 수 있는 길은 지금도 없다.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 그건, 45년도 전후질서와 식민지 해방의 역사가 어긋나기 시작

했기 아니, 해방의 역사가 미국이 주도한 ‘전후질서’라는 구도에 의해 질식당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에 서야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새롭게 짚어나가야 한다. 

무엇을? 첫째, 무엇보다도 1945년도 미국의 전후질서 재편의 역사를 우리의 

현실과 접맥해서 연구하고 이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아메리카 제국주의 문제를 우회해서 제주 4·3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제주 4·3은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자주적 미래를 지켜내는 비전의 기

지다. 둘째, 45년에서 48년 한반도 남쪽의 미군정과 45년에서 52년까지 일

본에서의 미군정의 지배질서가 가진 본질을 결합시켜 파악하는 노력이 보다 

깊게 이뤄져야 한다. 이는 특히 한국전쟁 전후(前後)로 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역사적 진실이 담겨진 영역이다. 제주의 전략적 위치는 이로

써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셋째, 개인의 서사는 이러한 역사의 맥락과 결합되어 조명되어야 한다. 이

는 그 개인의 무의식까지도 점령하고 있는 시대적 맥락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과 실존의 정신분석학적 규명까지 가능해진다. 

여기서 마침내 위대한 서사가 탄생할 수 있다. 지역화와 세계화의 대치논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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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가 신원확인된 유골함을 들고 강당으로 입장하고 있다.

70여년만에 가족과 만나다

발굴유해  신원확인보고회 현장

[현장] 4·3 희생자 발굴유해 신원확인보고회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이제라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골함에 가족의 이름표를 붙이려는 순간, 강당은 순식간에 유

족들의 오열로 채워졌다.

70여년전 4·3의 광풍속에서 불법 군법회의, 예비검속 등으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부모형제가 유골단지로 돌아오게 된 

것, 할아버지·할머니가 돼서야 그리운 가족을 만나게 된 이들

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난  1월  22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 주최로 열린 4·3희생자 발굴유해 신원확인

보고회 현장이다.

이날 보고회는 지난해 4·3 발굴 유해 유전자 감식으로 12명의 

신원이 추가로 확인되고, 2명의 가족관계가 확인됨에 따라 추

진됐다.

김영모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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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확인된 12명 중 5명은 1949년 군법회의 사형수, 나머지 

7명은 1950년 서귀포지역 예비검속 희생자로 확인됐다. 이들

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

과 동북쪽에서 발굴된 유해다. 신원 확인을 위해 2019년 유족 

291명의 추가 채혈과 유전자 분석법 등으로 신원을 확인해 이

름을 찾을 수 있었다.

확인된 희생자는 고완행(1917년생·대정 무릉), 고주만(1929

년생·서귀 서홍), 김영하(1932년생·서귀 토평), 김재철(1930

년생·남원 의귀), 양덕칠(1918년생·남원 신례), 양지홍(1921

년생·남원 의귀), 오관형(1920년생·성산 수산), 임공화(1920

년생·안덕 동광), 정옥주(1891년생·남원 신례), 현봉규(1920

년생·서귀 상효), 현춘공(1924년생·서귀 상효), 현행주(1925

년생·서귀 서홍)씨 등 12명이다.

허남익(1921년생·조천 선흘), 허남섭(1923년생·조천 선흘) 형

제의 경우는 2018년 신원이 확인됐지만 관계를 정확히 특정하

지 못하다가 이후 유가족 추가 채혈로 형제관계를 특정 시켰다.

유전자 감식을 담당했던 이숭덕 서울대 교수는 “다양한 유전자 

검사기법을 진행해 정보를 모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채혈에 참

여한 유가족수가 많아서 희생자들의 신원을 밝히는 데 큰 도움

이 됐다”며 “앞으로도 신원을 찾지 못한 분들을 위해 유가족들

의 참여가 중요하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6·25전쟁 전사자의 신원

확인율이 2%도 채 되지 않는 것에 비해 제주4·3희생자의

 신

원확인율이 33%에 이른다는 것은 국내에서 기록할 만한 성과”

신원확인된 가족들의 유골함에 이름을 붙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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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하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제주북부예비검

속유족 등 아픔은 지속되고 있다. 유족들의 한

을 달랠 수 있도록 신원 확인에 최선을 다하겠

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족들이 각자 가족 유골함에 이름표를 다

는 순서가 마련됐고 여기저기서 울음이 함께 터

져나왔다. 이름표를 달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으며 한때 고인과 행복했던 어린시절

을 추억하며 흐느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꿈에 그리던 형님이 돌아왔습

니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너무 기쁘기도 하

고  또  열아홉  어린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형님 생각에 애통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이 없어야 저희 형님뿐만 아니라 4·3으로 희생

당한 억울한 영혼들이 편히 영면할 것입니다. 좀 

더 많은 희생자 유해가 발굴되고 신원 확인이 하

루빨리  이루어져  유족들의  맺힌  한을  달래주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유족대표 김영호씨 감사의 말)

이어 김성언 제주도 정무부지사, 김태석 제주도

의회 의장,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등 참석자들의 헌화·분향

이 진행됐다. 유족들은 4·3평화공원내 봉안관

에 유골함을 운구한 뒤 안치시키고 합동제례를 

통해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봉안관에 유골함을 안치시키기 전 유족이 울먹이며 유골함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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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연구소 창립 이전부터 4

·3연구와 조사로 긴 어둠의 시대를 지나오셨습니다. 선

생님의 경우에는 그때가 오현고등학교 교사 시절로 삼십대 중반 시기였습니다. 

작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을 맞으면서 감회가 새로웠을 텐데 어땠습니까?

작년 연구소가 「30년사」를 발간하면서 제가 제1부 집필과 사진·자료 편집을 맡았어

요. 그게 많이 힘들었습니다.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죠. 작년 1월부

터 시작해 원고 마무리를 9월쯤 했던 것 같아요. 1989년 연구소 창립 이전부터 1990

년대 연구소 활동 부분에 대한 집필. 그러니까 내가 직접 경험했던 수많은 일들을 기

억하고 더듬어가며, 방대한 자료 속에서 그것을 집필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어

요. 단순히 4

·3연구소 30년의 역사만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4·3의 의미와 4·3진상

규명운동의 역사 그 자체를 한 번 정밀하게 살펴보았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은 이들의 

애정이 있어서 4

·3도 살아남았고, 연구소도 살아남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Q

특별인터뷰  _  걸음과 거름

“우리는 역사의 정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뿐”

제주 출생으로 제주4·3연구소 3대(1993년)·9대(2010년) 소장을 역

임했다.  그는  4·3연구소  창립을  전후해  증언채록사업을  시작하고, 

4·3 관련 조사·연구·기행·자료집 발간 등 연구소 사업 이외에 4·3

운동 초기 4·3추모제 공동준비위원회 활동도 꾸준히 벌였다. 저서로

는 「이제사 말햄수다 1」(공저), 「자유를 찾아서-김동일의 억새와 해바

라기의 세월」, 「대마도를 떠도는 4·3넋, 그 넋을 찾아 나선 순례자의 

닷새」, 「다시 하귀중학원을 기억하며」(공저), 「4·3으로 만나는 자이니

치」 등이 있다.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

30년 전만 해도 4·3은 ‘빨갱이 폭동’을 지칭하는 금기어였고, 입 밖에 잘못 내

면 잡혀가 곤욕을 치르게 하는 저주의 언어였다. 그럼에도 제주4·3연구소는 

4·3추모 활동이나 진상규명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제 창립된 지 30년, 그 

지난한 세월에는 4·3과 연구소의 정의를 믿고 자신의 열정과 시간을 아낌없

이 바쳐온 사람들이 있었다. 김창후 전 4·3연구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창

립 이후 지금까지 연구소에서 줄곧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4·3진상규명운

동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개인이 돌아본 4·3운동사도 나름 의미가 있

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담 오승국 4·3평화재단 총무팀장    
사진·정리 김영모 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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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39 

Q

Q

가족들의 반대도 많았을 것 같은데…?

저는 지금도 아내가 제일 무섭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럽니다. 교사 생활 10여

년 만에 강제해직되고 그러다 보니 야인생활이 길었죠. 그리고 또, 저는 공안기

관과도 관계가 참 깊어요. 1983년 때도 그랬고, 그 후 연구소를 창립한 다음에도 

저는 기관을 달고 살았어요. 거뜬하면 협박하고, 전화를 감청하고, 연행하고. 오

팀장도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이 사람들 사건 당사자만 협박하는 게 아니잖아요? 

친지들이며 부모님을 겁주고. 그러면 나중엔 부모님들과 대화하기도 힘들어지게 

되죠. 

증언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발간할 적에 양성자 선생님하고 조천면을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조천은 4

·3 당시 저항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그러다보

니 피해가 아주 많은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의 남은 기억이 있다면?

우리가 그때 조사지역을 조천면과 하귀리를 중심으로 한 애월면으로 정한 이유

는 이곳이 항쟁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4

·3 주도세력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자들

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조사하면서 점차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됐어

요. 이들 봉기 주도자들 거의 모두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들이었다. 그러나 

4

·3이 발발하고, 대학살 후에는 이들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그

때 정말 가슴이 아팠던 건 4

·3이 지나고 보니 조천지역에 본래 살았던 주민들은 

30%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어요. 4

·3과 관련돼 멸족된 집안도 많

았고요, 정말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어요.

조사 나갔을 때 어려웠던 기억도 많습니다. 당시 저나 양성자, 이석문(현 제주도 

교육감), 홍만기(초대간사) 모두 직장에 매인 몸이다 보니 조사는 주말이나 방학

기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연히 힘들었죠. 또 교통편… 당시 조천면 중

산간 마을인 선흘이나 와흘, 대흘 같은 곳의 조사는 교통편 때문에 꽤나 고생했

어요. 하루에 세 편밖에 없는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해 1시간 넘게 걸어 마을로 

들어가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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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기로 4

·3연구를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오승국 팀장도 그렇지만 4

·3진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집안에 4·3희생자

가 있는 경우가 대다수잖아요?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최근에 이 일에 대

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어요. 제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현기영 선배님의 

소설로, 1978년 이후 발표한 ‘순이삼촌’과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같

은 중편연작 소설들. 이 작품들은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연상되던 4

·3이 내 가슴 

속에 비로소 실체를 갖게 해주는 계기로 작용했죠. 그 즈음 저는 문화운동에 관

심이 많았어요. 1983년인가요? 그때 마당극패 ‘수눌음’ 대표로 ‘땅풀이’라는 마당

극을 공연했다가 지금 생각해봐도 큰 곤욕을 치렀어요. 고생 많이 했죠. 문무병, 

김상철 선배, 후배인 김수열 등이 당시 같이 활동했던 문화운동 주역들이에요.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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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모였었는데 말이죠. 그날 행사는 「이제사 말햄수다」 독후감 발표회도 있어서 재

미있었어요. 그 후 기관의 감시는 90년대 중반 제주도의회에 4

·3특위가 만들어

질 때까지 집요하게 이어졌어요. 「30년사」를 보면 당시 힘들었던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초대 소장을 지냈던 현기영이나 2대 소장을 맡았던 고창훈의 수난. 시

인이신 김명식 선배의 구속 사태. 저를 비롯한 많은 연구소 사람들에 대한 상시

적 감시·탄압. 그러나 중요한 건 연구소의 활동가들 모두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

고 지금까지 버텨냈다는 거예요.

1990년  초반의  4

·3추모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4·3추념식’과

는  많이  달랐어요.  반공유족들이  주축이었던  유족회의  위령제와  시민단

체들이  주관하는  4

·3추모제가  별도의  장소에서  열렸잖아요?  그  즈음, 

1992년인가요?  4

·3을 처음으로 전국 이슈화한 다랑쉬굴 유해발굴이 있 

었죠?

그때가  아마  1992년  4월이었죠?  공안기관의  위협은  여전한데  다랑쉬굴에서 

4

·3유해가 얼굴을 내민 거예요. 처음에는 우리 스스로가 더 무서웠죠. ‘아, 이 일

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연구소는 차츰 두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적으로 일

처리를 시작했어요. 우선, 현장보존을 위한 기록 남기기에 최선을 다했죠. 사

진·동영상 촬영은 물론이고 유해의 신원 확인에도 노력했어요. 나중에 유해발견 

사실을 공표할 때에는 중앙언론의 협조도 구했죠.  

그러나 지금도 아쉬운 건 당시 화장된 유골을 그렇게도 유족들이 원했음에도 공

안기관의 압력으로 바다에 전부 뿌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줌의 유

골이라도 유족들에게 돌아갔으면 정말 좋았겠죠. 그러나 아쉬운대로 당시 11구

의 유해는 그 스스로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억울하

게 돌아가신 3만 명의 희생자 중에 지금도 우리처럼 이름 모를 산야에 버려진 이

들이 많다. 한시 바삐 진상규명에 나서라. 우리가 그 초석이 되겠다.’ 저는 열한 

분들의 마음이 당시 이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Q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건, 그 시절 꺼내기도 어려웠던 4

·3 이야기도 이런저런 얘

기 끝에 불쑥 튀어나와 일단 물코가 터지면 막힘없이 이어졌다는 거예요. 4

·3당

시 조천면 중산간 마을들은 소위 ‘민주부락’이었다는 얘기, 무장대 사령관을 지냈

던 김의봉 얘기가 나오자 한 분이, ‘그 분 국민학교에 다닐 때도 어찌나 날랬는지 

학교 가다 꿩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 나서야 학교에 갔다’

는, 소위 민중영웅 탄생 담화가 설화처럼 맛깔스럽게 터져 나왔던 순간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당시에도 주민들은 억눌린 의식 속에 삶이 힘들었지만 4

·3에 대해

서만은 나름의 자부심도 상당했다는 거죠.  

뜻 있는 분들이 모여 1989년 4

·3연구소를 창립했습니다. 공안기관의 감시 

도 심했다는데, 당시 소장님은 어떠셨나요?

1989년 5월 10일 창립식, 용담동 공임쌀집 2층에는 관계 기관에서도 자리를 함

께 했습니다. 굳이 그 분들이 머릿수를 채워주지 않아도 될 만큼 꽤 많은 분들이 

Q

김창후 전 소장과 인터뷰 대담을 하고 있는 오승국 4·3평화재단 총무팀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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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일본에서 4

·3진상규명운동을 하시는 분들, 그분들과 지금도 깊은 연대를 

나누고 계신데 그 얘기도 정리해주시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4

·3을 공부하고 조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항일운동가들에 

관심이 가게 됐습니다. 4

·3 주도자 중 많은 분들이 항일운동가 출신이고, 또 그

중에는 일본에서 활동한 분들이 많았던 거예요. 자연스레 저는 일본에서 활동하

는 ‘4

·3을 생각하는 모임’ 분들과 친교를 나누게 됐죠. 참 궁금했어요. 자이니치

로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4

·3운동을 한

다? 이렇게 시작된 제 궁금증이 「4

·3으로 만나는 자이니치」란 책을 탄생시켰죠. 

이 책에는 재일 4

·3운동가 여섯 분이 나옵니다. 이 분들의 어린 시절부터, 민족

문제며 4

·3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 그 후의 활동들 모두 얘기됩니다. 이 

책을 만드느라 10년이 걸렸어요. 

4

·3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30년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의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연구소에서  매달리고  있는  제주도의  ‘4

·3유적지’ 문제. 올해 완전

한 자료집 발간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오팀장도 2004년 조사작업에 참여하

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그때에는 완전한 조사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연구소가 

2018년부터 2년 동안 전수조사를 벌였어요. 2005년 당시 채 조사 못한 미조사

마을을 모두 조사하고, 최근 대단위 개발로 소실된 유적지도 파악했죠. 이제 자

료집 발간을 계기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매입 작업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유적

지 보존 작업이 본 궤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제가 조금씩 「김문준 평전」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죠? 

조천 출신으로 193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지역 최고의 항일운동가였던 김문준 

선생님. 내년 상반기까지는 발간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제 소망입니다. 

 

Q

Q

4

·3연구소 3대·9대 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이 기간 4·3연구소는 많은 일

들을 했죠. 4

·3기행을 대중화시키고, 부분별로 전문성 있는 자료들을 발간

하는 등 연구소와 관련해 의미 있는 일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분명 아쉬운 

일도 있었을 텐데요? 증언조사사업에 한정해 생각해본다면 어떻습니까?  

증언조사 분야만을 놓고 볼 때, 우리 연구소는 작업의 질적·양적인 면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봅니다. 이제 잘 정리해 결과물들을 대

중들에게 더 많이 선보여야 하는 의무가 남았지요. 그리고 몇 가지 덧붙인다면, 

2000년 4

·3특별법 공포 이후 피해자 중심 조사로 조금은 멀어졌던 ‘4·3 정명’ 

문제와 관련한 성격규명. 거기에 당연히 항쟁 지도부에 대한 조사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구요. 그리고 2010년이죠, 제가 다시 소장을 맡으며 꽤 힘을 기울

여 했던 사업이 있어요. 서청을 비롯한 군·경토벌대 조사. 한 3~4년 했습니다. 

참 힘들었어요. 우선, 증언자 확보가 어려웠어요. 당시 장교로 토벌작전에 참가

했던 분들은 연락이 닿아도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사는 거의 사병 

출신 중심인데, 참 희한한 것은 이들이 작전에 나가 학살사건이 벌어졌을 때 뭐 

기억나는 사실이 없으시냐 물으면, 하나같이 ‘그런 일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 

대답했어요. 뭐, 굳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 데도요. 

1989년 4·3연구소 창립 당시 입주식 축하 만찬(왼쪽부터 김창후, 문무병, 양문흠, 강은숙, 김명식, 강창일, 양성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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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45 

등뼈 위에 새겨진 기억

어쩌다 만난 그녀의 등에서 네 개의 새끼 오름들을 

만났습니다.  제주  중산간  마을  길,  아무도  지나는 

이 없는 저문 길. 팽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던 아

흔 두 살의 백발 그녀. 휘어진 등줄기 위로 볼록볼

록 등판 위 오름처럼 솟아오른 뼈가 스웨터 위로도 

만져집니다. “쳐 두드련 매맞아부난 점점 튀어나완” 

“죽어사 잊어불 일이지” 묻지 않아도 터져 나옵니

다. 말하지 않아도 ‘그해 그때’입니다. 

그건 지금보다 훨씬 얼었던 어느 날의 일. 4·3 초토

화 그 시기, 그래서 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는 일. 

친족 오빠가 산으로 갔다는 이유로 오빠가 잡혀가

고 오빠가 없으니 열일곱 살 자신을 마을 지서로 붙

잡아 갔다는 사건. “막 거꾸로 매달앙 두드리멍 바

른 말만 허렌 핸. 이름 불민 다들 엎어질 건디 어떵 

골아(어떻게 말해).” 그런 머나먼 날의 일, 자식에

게도 시원히 말하지 못했던 말. 인생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왜 지금도 이리 생각나나 모른답니다. 

‘오꼿’, 
그 말 속에 
숨은 말씀

44 

기획  _  허영선의 제주를 걷다

허영선 시인

제주출생. 시인.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

며, 현재 제주4·3연구소 소장, 제주대 강사로 있다. 제주대 대학원 한국학협동

과정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논문 ‘제주4·3시기 아동학살 

연구’가 있으며 저서로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뿌리의 노래」 「해녀들」 

산문집 「섬, 기억의 바람」 「탐라에 매혹된 세계인의 제주 오디세이」 역사서 「제

주4·3을 묻는 너에게」 「당신은 설워할 봄이라도 있었겠지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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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47 

여섯 손자들 키우느라 외할머니는 허리가 더 휘어졌어도 내

색하지 않았다지요. 그럼에도 그 손녀딸이 살아 자식을 낳고 

자식은 자식을 낳고, 겨울 팽나무처럼 살아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따라붙는 그해 그날의 기억들에서 잠시나마 멀어

지게 한 것, 그것은 힘겨운 노동의 삶이었다죠. “물이 착착 살

을 끊어가. 그래도 물에 들어가 여기 가면 (물건이) 있을까. 

저기 가면 있을까 할 땐 잊어버려. 이 쪽 돌고 저쪽 돌고 하면 

잊어버리지.” 물질할 땐 잊어버린다는 말은 왕년의 상군 해녀 

말씀. 그렇듯 4·3의 기억은 끝까지 따라붙다가도 생존의 공

간에 선 순간 잊기도 했다지요. 

얼마전 세상에 나온 <4·3과 여성-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 

(제주4·3연구소편, 도서출판 각)에도 그렇게 ‘살아낸’ 제주여

인들이 있습니다. 그 사납던 시대를 만나야 했던 4·3 그 시

절, ‘오꼿’(그만) 세상 뜬 가족들을 위해 숟가락 꽂고 기도하던 

풍경들, 생의 벌판에서 절박했던 순간들이 출렁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제주여성 8인의 기억 속엔 잔잔한 일상들, 나름

대로 이어지던 민간요법, 의식주, 생활사의 한 단면이 선명합

니다. 여인들의 생존 방식은 때론 격정적이거나, 달관하거나

입니다. 그렇게 살아낸 자들이 지금 힘들다는 젊은 생을 향해 

전하는 말씀입니다.

올까요. 등뼈 위에 박힌 오름같은 기억을 휘감은 아흔 둘 그 

여인에게도, 그 시절, 젊어서 인생을 한꺼번에 알아버린 사람

들에게도 곧 연두의 봄빛으로 물드는 그날이.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이 
전하는 말씀

46 

눈 감아도 누가 때렸는지 눈에 훤해서,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

마는 훨씬 강렬하여서, 죽을 때까지의 일이 됩니다. 

“그때가 꼭 겨울 이맘 때라. 사흘을 잡혀가서 매 맞았어. 그

때 오꼿 죽어부러시민...” 제주어 ‘오꼿’이란 말. 너무나 짧은 

찰나 ‘그만’을 의미하는 부사죠. 이 땅, 그 해. 이리 저리 달리

던 사람들 가운데 ‘오꼿 사라진 사람들’이 있죠. 그러니 그만 

그리 되었다는 말 속엔 지금도 엄연한 트라우마가 숨어있습 

니다. 

그럼에도 목숨 걸고 그때 그 사람들. 끝내 마을 청년들 이름 

하나 불지 않았답니다. 누구에게도 그의 아픔을 보여준 적 없

다 합니다. 생각하니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자신

도 모른다는 그. 너무나 깊은 내용이기에 뼛 속 깊은 비밀로 

칠십년을 넘겼습니다. 지우고 싶어도 한 몸이 된 기억이라 더 

그랬을까요. 

문득, 북촌마을 대학살에서 ‘오꼿’ 어머니 잃고 살아난 어느 

딸이 기억납니다. 맏딸로 태어나 학교 무뚱(마당)에도 나가보

지 못했다는 그녀. 둘째는 밥 빌러 다니곤 했다지요. 

“밥 얻으러 몇 번 나갔어. 어떤 집에선 솥 두껑을 덮어불곡 어

떤 집에선 고맙게 밥을 퍼줬어. 어렸지만 밥 푸다가 솥두껑

을 덖는 집을 보면 나오다가 막 눈물이 가득 찼어. 밥 얻어오

면 낭푼이에 밥을 퍼 놓고 할머니가 가운데 숟가락을 딱 꽂는 

거라. 할머니! 이건 무사 가운디 꽂암수과?(왜 가운데 꽂아놓

나요?) 안보여도 이건 너네 어머니 몫이여. 정말 너무나 기가 

막혔어. 지금도 자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 밖에 안 나요. 

겨울 팽나무같은 
생이 건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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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2년 전 두 눈을 유탄(流彈)에 잃어버려 암흑 속에서 세상을 살아야 하는 불쌍
한 내 인생을 보상받을 권리는 없습니까”

1970년 12월 12일 제주지역 신문에 실렸던 어느 할머니의 절절한 호소. 안구가 없어 움푹 패어

버린 두 눈. 주름지고 메마른 얼굴. 창호지가 찢겨나간 허름한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람. 

표선면 가시리 현경출 할머니다. 

4

·3이 ‘공산폭동’이어야만 했던 엄혹한 시절, 4·3 때문에 두 눈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던 자신

의 억울한 삶을 보상해 달라는 할머니의 한 맺힌 절규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 50년이 지나 이제 

4

·3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지만, 할머니는 세상에 없다. 현 할머니의 아들 강호삼씨

를 만났다.

대담

·사진·정리 조정희 조사연구실 차장

5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어머니

정말 우리 어머니네요? 어머니 사진을 이렇게 신문을 통해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1970년이면 제가 스물 세 살, 우리 어머니가 

예순 한 살 쯤 됐을 땝니다. 제 나이 스물 넷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까, 이 기사가 나오고 얼마 없어 바로 다음해 8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셈입니다. 어머니 생전엔 제 눈이 어머니 눈이었고, 제 손이 어머니 손

이었고, 제 발이 어머니 발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새 세월에 

다 잊혀지고, 지금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얼굴마저 가물가물 해졌

습니다. 가슴에 묻은 어머니를 50년 만에 다시 보고 있네요. 우리 어머

니는 예전 모습 그대론데, 이젠 제가 어머니보다 더 늙은 아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유복자입니다
 
제가 올해 일흔 두 살. 1948년 음력 5월 26일 태어났습니다. 우리 아

버지 제사가 음력 4월 초하루니까, 실제 돌아가신 날짜는 1948년 음력 

4월 2일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딱 55일 만에 제가 태어났습니

다. 저는 유복자입니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안계셨고,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장애. 이 모든 게 4

·3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그놈의 

시국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완전히 망해 부렀어.” 입버릇처럼 내뱉던 

어머니의 한숨 섞인 말들이 당신 혼자서 삭이는 울음이었음을, 누가 가

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4.3 and Peace

48 

기획  _  4·3의 증언

강호삼(1948년생, 조천읍 신촌리 거주)

“암흑 속 
  내 인생을 
  보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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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4.3 and Peace

5·10선거 때문에

1948년 4월 초이튿날이 양력으론 5월 10일입니다. 그날이 선거날이었

다고 들었습니다. 5

·10선거가 있던 바로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

다. 가시리 마을 강팽림 구장. 아버지는 죽창을 들고 산에서 내려온 사

람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그놈들은 함께 

있던 어머니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저년도 찔러라! 찔러라!” 그런데 

무리 중 한명이 만삭인 어머니를 보더니 “애기 낳을 때 된 거 죽여 봐야 

필요 없어. 내버려둬!” 그렇게 어머니는 살아났습니다. 어머니는 뱃속

에 있던 제가 당신을 살렸다는 얘기를 참 많이도 하셨습니다.  

어머니, 두 눈을 잃다

눈앞에서 남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만삭의 임산부는 두

어달 만에 혼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렇게 제가 태어나고 얼마 뒤, 

면사무소에서 담요를 배급해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갓난쟁이인 

저를 품에 안은 채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 주민의 구루마를 얻어 타고 

면사무소로 가던 중, “탕!탕!탕!” 갑자기 총알이 날아왔습니다. 어머니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담뱃불을 붙이느라 고개를 숙이던 찰라, 할머

니의 어깨를 스친 총알이 어머니의 두 눈을 정확히 관통했습니다. 어머

니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눈은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는 그렇게 두 눈을 잃었습니다. 

응원대의 총은 누구를 지키고 있었을까

4

·3 당시 가시리 마을에는 응원대라고 불리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

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러 왔다던 총을 든 육지 군인들. 응원대가 쏜 총

알이 어머니의 두 눈을 정확히 관통했지만 그들은 ‘사고’라고, ‘실수’라

고 했습니다. 총을 가진 자들이 ‘실수’라고 하는데 앞도 보이지 않는 우

50 

◀  1970년  12월  12
일  제주신문에  실린 
현경출 할머니 기사.
4·3관련 내용엔 오류
가  많았지만,  할머니
의 사진 한 장은 50년
전  그녀의  호소를  전
해주기엔 충분했다.
“ 내   인 생 을   보 상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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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한 몸 같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제 나이 스물 네 살 때 입니다. 

인생이 참 허무해지더군요. 어머니 장사(장례)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 

어머니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여름이어서 

런닝셔츠 차림이었는데 셔츠를 벗어 나무에 매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

리곤 기억이 없습니다. 꿈을 꿨던 것 같습니다. 꿈에서 제가 어떤 할아

버지를 막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몽둥이로 저를 때

리면서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따라가면 때리고, 따라가면 때리

고, 그러다 깨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해

는 저물어가고, 저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더군요. 예전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초하루와 보름날 한 달에 두 번 밥을 지어 올리고, 소상, 대

상, 3년 상을 다 치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그날 이후, 어머니 상

을 제라하게 촐려놓고(제대로 차려놓고) 한 달에 두 번 밥을 올리고, 소

상까지 마친 뒤 가시리를 떠났습니다. 

4.3 and Peace

52 

리 어머니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을 책임자였던 남

편이 무참히 살해당하는데도 구하러 오거나 도움을 주지 않았던 응원

대에게 무슨 요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보상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지듯 마을에 남겨진 어머니. 도대체 마을을 지킨다던 그들

의 총은 누구를 지키고 있었던 걸까요?

소년가장이 되다

한 손은 나무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다른 한손은 어린 아들의 작은 손

을 꼭 붙잡고서야 아들 조름에(뒤에서) 졸졸졸 걸음이라도 뗄 수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앞 못 보는 어머니와 어린 아들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

치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9살 많은 형님이 한 분 계셨지만 계속된 불행

에 엇나버린 마음을 잡지 못한 채 방황만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밭이 

있어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으니 집에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했고. 혼

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야 했던 어린 아들은 

국민학교 문턱 조차 넘을 수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가시분교 2학년 

1학기가 제 최종학력입니다. 매일같이 먹을 물을 길어오고, 면사무소

에서 배급을 받아오고, 이웃집을 기웃하며 보리쌀을 얻어오고, 밥을 짓

고, 빨래를 하고. 그러다 14살이 되어 처음으로 밭가는 일을 배웠습니

다. 어디서 밭가는 소리, 쉐(소) 모는 소리가 나면 무조건 쫓아가 일꾼

을 자청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공짜 일꾼 노릇을 하다 보니 어느새 

혼자서도 밭을 갈 수 있게 되더군요. 15살. 드디어 돈을 받고 남의 밭

을 갈아주는 제대로 된 일꾼이 됐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가시리를 떠나다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 

습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해도 늘 가난했고, 고단했습니다. 

아버지 강팽림

4·3이 없었다면, 

우리 아버지가 희생되는 일도, 

우리 어머니가 두 눈을 

잃어버리는 일도, 

제가 유복자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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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55 

54 

“암흑 속 내 인생을 
 보상해다오”

우리  아버지가  4대  독자라  저에게

는 사촌도, 5촌도, 6촌도 아무도 없

습니다. 제일 가까운 친족이라고 해

야  10촌  바깥이니까  집안  제사며, 

벌초며, 모두 다 저 혼자서 하고 있

습니다.  저라고  억울함이  없고,  화

가  없겠습니까?하지만  이미  다  지

난 일. 곱씹어 생각한다고 뭐가 달

라지겠습니까? 4

·3이 없었다면, 우

리 아버지가 희생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가시리에 응원대가 주둔하는 

일도, 응원대가 쏜 총에 우리 어머니가 두 눈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

을 테죠. 4

·3이 없었다면 제가 유복자로 태어날 필요도 없고, 소년가

장이 되어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렇다고 

지금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내 인생을 보상해다오” 우리 어머니의 절절한 절규를 들어준 사람

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국가유공자 불인정, 가슴에 응어리로 남다

이런 집에서 태어난 것도 모두 다 내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가슴속엔 풀리지 않는 응어리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가시리를 

떠나기 전, 마을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로 신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희생된 바로 그 날. 우리 아버지와 똑

같은 이유로,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희생된 가시리 교장선생님은 

1948년 6월 7일 제2구경찰서(서귀포경찰서)에서 작성한 <선거
공무원 및 향보단원 순직자 조사에 관한 건> 공문이다. 표선면 
가시리 강팽림(康彭林, 50)의 약력(구장, 향보부단장, 선거위원)
과 피해내역이 기재되어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소장)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 아버지는 국가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교장선생님의 죽음과 우리 아

버지의 죽음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 왜 차별을 하는 겁니까? 텔

레비전에 나와서 4

·3을 말하는 사람들은 매번 ‘명예회복’을 떠들어 대

던데, 우리 아버지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 건지, 지금이라도 

누가 속 시원히 설명해 주면 좋겠습니다. 

 

<후기>
강호삼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2월.  도서관에서  찾은 

50년 전 신문 한 장을 들고 수소문한 끝에 조천읍 신촌

리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4·3으로 뒤틀려버

린 자신의 삶을 팔자라 체념하고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국

가유공자  불인정만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는  강호삼

씨. 함께 응어리를 풀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재헌국의원

선거  가시리  선거관리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가시리  마

을  강팽림  구장이  1948년  5월  10일  새벽,  투표소가  설

치된  가시리  마을을  습격한  무장대에  의해  살해’  당했

음을 입증할 수 있는 4·3 당시 경찰기록과 미국자료 등

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 5월, 강호삼씨는 아버지 강팽

림의  <4·3희생자결정서>와  사건  관련  기록들을  근거로  

<국가유공자(유족) 등록신청서>를 작성해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에 접수하고, 현재 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강호

삼씨의 어머니 현경출은 지난해 11월 22일, 4·3희생자로 

추가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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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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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목장 부지에 포함된 옛 장터마을터 전경. 집터는 사라지고 집집마다 생활도구를 만들어쓰기 위해 딸려 있던 대숲만 

듬성듬성 남았다.

은쇠였기 때문에 황소만 보아도 신기해하던 시

절에  외국소라니,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목장 

철책에 가서 외국소를 구경하는 것을 꽤 공들이

는 소일거리로 삼았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5분

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지만,  포장도로도  아닌 

자갈길을 아이들의 잰걸음으로, 헤천베리당 보

민 반나절은 탕진하고 올 정도의 먼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 진기한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기에 

하루가 멀다고 목장길을 내 달렸던 것이다. 나

의 유년기의 삽화 중 광활했던 송당목장의 풍경

과 에피소드들은 여직 나의 뇌리에 원초적인 향

수로 남아 있다.

그렇게 유년기의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 송당목

장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라 가혹

했던 4·3의 산물이라는 걸, 또한 그 광풍의 시

간 속에서 살아남았는데도 여전히 마을로 돌아

가지 못한 유랑의 주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이승만 별장과 
장터드랭이를 아십니까?

박경훈 화가

4·3유적

| 유년기의 구경거리 송당목장 

그러니까 이글의 첫 대목은 1960년대 나의 색

바랜 기억의 일기장에서 빌려 온 이야기다. 필

자가 취학하기 전의 이야기니 아마도 1967~8

년도였을  것이다.  송당목장  가는  길은  설탕도 

없던 시절, 단 것을 찾아 헤매던 아이들에게는 

먹거리의  보고였다.  잔자갈을  깔아  놓은  외길

에 철조망 길게 늘어진 목장길을 따라 오뉴월이

면 길 양편으로 산탈(산딸기)이 빼곡, 주렁주렁 

열렸기  때문이다.  칡이나  삼동을  빠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당분을 얻을 수 있었 

기에 아이들은 산탈철이 되면 목장길로 쇄도했

다. 그렇게 한참을 가면 송당목장 입구가 나오

는데, 아이들에게 송당목장은 별천지였다. 이승

만별장의 서구적인 건축양식이 그러했지만, 특

히 진기했던 건 처음 보는 외국산 소들 때문이

었다. 브라만인가 뭔가 하는 참 덩치도 크고 우

악스럽게 생긴 외국소들이 철조망 너머로 가득

했다. 소(牛)라 해봐야 매일 보던 건 제주산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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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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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당마을 소까이의 기억

송당마을은 지금은 셋송당, 웃송당, 대

천동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지만,  4·3

전까지는  웃송당(상동),  셋송당(중동), 

알송당(하동),  장터(장기동),  드랭이(대

천동),  가시남동  여섯마을로  이루어진, 

300여 호, 주민 수 2,000여 명의 광활

한  1소장  터  양촌지역에  자리  잡은  꽤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4·3은 

이 마을에 다른 중산간 마을들보다 일찍 

찾아왔다. 1948년 10월 초 송당사람들

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통보를 

받는다. “오늘 하오 3시까지 광고판거리로 모이시오. 식량과 옷가지 등 가져갈 수 

있는 양만 챙기고 나머지는 땅에 파묻든가 해서 모이도록 하시오!”. 소위 ‘소까이(소

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나라에서 시키는데, 거부할 수는 

없는 법, 갑자기 온 마을이 뒤집힌다. 해촌마을인 평대나 세화리까지 내려가야 하는

데, 가져갈 짐은 많지만, 소지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기에 최소한의 물건과 식량만 

챙기고 우영팟이나 헛간 바닥을 파내어 항아리를 묻고 먹을 것을 파묻어야 했다. 또 

조상님 제사에 쓰일 제기랑, 세간살이 중 중요한 것들을 모아 숨겨야 했기에 하오 3

시는 코앞이었다. 

와당와당 거리면서 광고판 거리에 모이자, 군경토벌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놓기 시작했다. 몇 대에 걸쳐 살아온 집들이 여기저기서 불에 타기 시작한다. 시커

먼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하늘을 가리기 시작한다. ‘어구 저저저거 우리집도 불 붙었

저! 아이고 어떵허여 어떵허여!!“ 여기저기서 아우성과 한탄이 이어진다. 그렇게 송

당사람들은 갑작스런 소개령에 마을을 등지고 해촌인 평대, 한동, 월정, 세화 등지

로 뿔뿔이 내려가야 했다. 그나마 친척집이 있는 주민들도 헛간이나 모커리집에 의

장기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

1948년 송당마을 소개 당시 주민들을 모이라고 했던 광고판 거리 터의 현재 모습. 당시 마을마다 광고판 거리라는 지명

이 있었는데, 리사무소의 문서나 마을의 중대사안을 벽보로 게시했던 공보물 게시대가 있던 장소를 말한다.

탁하여 추운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송당마을이 전소되었는데, 송당 본동보

다 더 한라산에 가까웠던 장터와 드랭이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듬해 가을, 소개되었던 주민들은 송당 중동(셋송당)을 중심으로 마을에 성담을 쌓

는데 동원된다. 해촌으로 소개되었던 주민들은 낮에는 군경이 인솔하여 송당마을로 

돌아가 성담을 쌓고, 저녁이면 해촌으로 돌아가길 몇 달째 반복하면서 마침내 성을 

완성하였다. 이 와중에 주민들의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마침내 성이 완

성되어 주민들은 1년 만에 송당으로 돌아왔으나, 말이 복귀지 집단수용소나 다름없

는 생활이었다. 겨우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소위 ‘함바집’을 지어 성담 안에서 지내

야 했다. 그렇게 1년여를 지내다 마침내 각자 자기 집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장터는 예외였다. 여전히 마을의 복귀를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장터마을을 중심으로 군사기지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날벼락이었

다. 그 사태 속에서도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던 장터 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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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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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터마을에 들어선 국립목장

송당마을은 조선시대 국립목장인 1소장 터에 자리 잡은 마을로, 특

히 ‘넒은 방목지가 길게 펼쳐져 있다’는 뜻을 갖고 있는 장터(장기동)

를 중심으로 광활한 초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우마사육에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1소장 터는 마을주민들의 공동목

장으로 사유지가 대부분이었다. 온 마을이 뒤숭숭했다. 돌아가지 못

하는 장터 주민들만이 아니라 목장지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

다수 주민들은 졸지에 자기 땅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풍문으로 들

리던 군사기지는 국립목장 조성으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장터마을

을 포함한 주변 목장지 300만 평이 수용당했다. 정부는 무상임대를 

조건으로 확보하도록 제주도에 지시했다. 도지사는 공무원과 지역 

유지들을 동원하여 반강제적으로 토지를 수용했다. 주민들의 원성

이 들끓자 나중에는 당시 토지가의 10/1도 안되는, 말도 안되는 푼

돈을 보상비로 지급한다. 1소장의 가장 알짜배기 목장지를 통째로 

정부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정부에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아직도 빨갱이 공포가 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

만 정부에 반항하면 그 즉시 빨갱이로 몰려 화를 당할 것이 뻔하였

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오원권, 장터산디의 기억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저장소

‘귀빈사’라 불렸던 송당목장 이승만별장, 현재 〈대한민국 근대문화

유산(등록문화재) 제113호〉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바로 그 별장이 

있는 터가 장터마을터다. 정확히는 별장에서 서측으로 500m 거리

에 지금도 초지 가운데 빽빽한 대나무숲들이 듬성 듬성 자리한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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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5일 정재설 농림부장관, 이응준 체신부장관 일행의 송당목장 시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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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내’라 부르면서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송당국민학교 봄소풍 단골 코스였는데, 지

금까지도 물 위에 화반처럼 깔린 작은 냇바위들을 뒤덮은 진달래 더미가 만들어낸 

데칼코마니의 곱디고운 풍경은 내 기억의 저장소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드랭이마을, 대천동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57년 4월 2일, 성산포경찰서 

사찰특수유격대에 의해 장터마을 출신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붙잡힌 곳이기 때문

이다. 4·3이야 애초에 끝이 났었지만, 마지막 빨치산을 생포함으로써 상징성에 있

어서 4·3의 마침표가 찍힌 곳이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4·3은 사람 사는 세상만을 뒤집어 놓은 것이 아니라, 산천도 바꿔 버렸

던 것이다. 혹여 송당목장이나 이승만 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이곳이 장터마

을이었음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곳이 그 맛

났던 장터산디의 고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2014년 3월 제주시가 예산을 들여 보수 정비사업을 완료한 ‘등록문화재 제113호’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 

(貴賓舍)’ 전경

마을터다. 장터사람들에게는 낙인 같은 장소일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하다. 조상 대

대로 살아온 장터마을. 4·3의 광풍 속에 송당마을 대부분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소

개가 끝나고 그나마 자기 집터로 돌아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장터사람들은 그나마

도 허용되지 않고 마을을 떠나 졸지에 실향민이 되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장터마을에서 나는 ‘산디(밭벼)’는 그 품질이 매우 좋아 구좌면에서는 명성이 자자했

는데, 이제 그 산디농사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승만은 제주도를 대학살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최고결정권자였다. 그의 말 한마

디에 젖먹이 어린아기까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런 그가 뻔뻔스럽

게도 이곳에 별장을 지어 목가적인 휴가를 즐기려 했다는 것은 비참을 넘어, 오늘까

지도 분노의 외마디가 목젖에 치민다. 가증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

는지, 이명박근혜정권 내내 그를 국부니 뭐니 떠들던 사람들은 이 섬에 와서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종자들이다. 

미국을 위해 제주도를 제물로 삼았던 참혹한 섬에 목장의 아이디어를 냈던 밴플리

트는 미군의 자재를 들여 서양식 별장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플로리다의 소들을 

들여 육우를 생산하려 했다. 흑소 황소 다 내 쫓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브라만종 외

국소를. 어쩌면 그렇게 송당목장이 들어앉은 과정과 닮은꼴인지. 하지만 이승만은 

독재 끝에 국민들에게 쫓기어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4·3과 한국현대사를 

떠올리면 망명지 하와이에서의 죽음마저 사치일 뿐이다. 아직도 자기 땅에 돌아가

지 못한 장터사람들에게는 천추의 원수일 따름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후인 1962년 

5월 송당목장을 찾았다. 그는 목장을 “이 지경으로 운영할 거면 문을 닫으라”라고 

했다. 밴플리트의 만류로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이듬해 민간에 매각해버렸다. 결국 

장터마을은 끝내 복원될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송당의 여섯 마을 중 가장 작았던 드랭이는 지금은 대천동이라는 지명으로 널리 알

려졌고, 산길 들길을 뚫어 가로지른 도로들 덕분에 교통요지가 되어, 유년기의 그 

쇠락한 풍경은 떠 올릴 수도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대천동 내창은 천미천 상류로 

원래 ‘진수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아마도 천미천이 도내에서 최장하천이라서 붙

은 이름인 것 같다. 하지만 어린 날 우리들은 ‘순전히 진달래만 피는 내창’이라고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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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65 

2019년 12월 6일 오후 1시, 제주 아스타호텔에서 ‘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 사례’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

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행사에서는 4·3기록물의 세계기록유

산 등재를 준비하기에 앞서, 지난 1992년부터 시작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의 철학과 역사를 살피고 등재에 성공한 사례들의 등재 추진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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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 사례”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국제 심포지엄

반영관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

뉴스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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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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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동안 브라질 전 지역에 숨겨져 있다가 브

라질 민주화와 더불어 대중에게 공개된 문서들

은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의 중요성을 증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

재에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교훈이 등재 성공으로 말미암아 브

라질은 넘어 “라틴 아메리카, 나아가 전 세계”

에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  반향”을  가져오게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헬렌 자비스(Helen Jarvis) 캄보디아 왕립 정

부 고문은 캄보디아의 투올슬렝 학살 박물관 기

록물들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크메르 루즈 정권이 자행한 반인권적 행위들이 

국제사회는 물론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또한 더

할 나위 없는 해악이자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세계기록

유산 등재가 국제사회에서의 상징성 획득뿐 아

니라 국내-지역사회의 사회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전했다. 아울러 등재 

추진 단계 뿐 아니라 등재 이후에 해당 자료들

을 어떻게 보존하고,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려가 있어야 하며, 현재 

투올슬렝 학살 박물관에서는 이를 위해 자료의 

체계적인 분류, 정리 및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노용석 부경대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 

토론에서는 발표 내용에 대한 토론자 및 청중

들의  질문과  더불어,  유네스코  기록유산  전반

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모아졌다. 이 자리에

서 김귀배 한국유네스코위원회 과학문화본부장

은 기록문화유산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

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객

관성 확보가 우선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

하였다. 해외 석학들의 평가, 논문, 문헌, 등을 

종합토론

심포지엄은 네덜란드에서 참석한 얀 보스(Jan 

Bo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심사소위원회 

위원장의  기조  강연으로  시작되었다.  얀  보스 

위원장은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 기록유산의 

보존, 접근성 및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세계기록유산의  성과와  등재  절차,  심사  기준 

등을 소개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은 바로 

역사적 중요성”임을 강조하였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기록물들은 그 자체로

서 희귀할 뿐 아니라, 그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

는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빙한 것들로, 4·3기록물 또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기록물이 가지고 있

는 역사적 중요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효과적으

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 지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큰 원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열린 사례 발표에서는 국가 폭력 및 인

권 침해와 관련된 국내외 사례들의 세계기록유

산 등재 추진 배경과 신청 과정을 살펴보는 시

간을 가졌다. 우선 안종철 국방부5·18 진상규

명조사위원회  위원이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 과정에 대하여 발표

했다.  안  위원은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

산을 추진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과 전개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특히 세계기록유산 심사 회

의 당시 등재신청 반대 운동에 마주하였을 때 

중앙 정부의 협력을 얻어 이를 타개할 수 있었

던 사례를 회고하며 교훈을 주었다. 

이어 브라질의 비터 폰세카(Vitor Fonseca) 플

루미넨시 연방 대학 교수는 1964년부터 1985

년까지 군사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

한 목적으로 수집 생산한 문서들의 세계기록유

산 등재 사례를 소개하였다. 폰세카 교수는 군

사정권이 국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던 엄혹한 

얀 보스 위원장

비터 폰세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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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4·3기록물의 세계적 가치”를 발굴하고, 이러

한  기록이  세계문명사에서의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김영철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지난 

2017년 국채보상운동의 기록유산 등재 과정을 이

야기하며 “제주 4·3기록물은 20세기 동아시아 역

사를 ‘평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기억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각계의 노

력에 성원을 보냈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 심포지엄은 유네

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  중요성,  세계적으로 

유사한 기록물 사례 검토를 통해 앞으로 4·3기록물

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가질 의미와 더

불어 이를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

요한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행사장은 언

어도,  성별도,  국적도  다른  관계자들이  전하는  전 

세계의 등재 추진 사례들에 귀기울이는 200여명의 

참석자들의 관심으로 열기를 더했다.

다음날인 12월 7일(토)에는 얀 보스 위원장과 비터 

폰세카 교수, 김영철 공동대표를 비롯한 참석자들

이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방문자들은 양조훈 

이사장의 안내와 양정심 조사연구실장의 해설을 통

해 위령제단 참배, 행방불명인 표식, 평화 기념관과 

소장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

록유산 심포지엄을 계기로 제주4·3이 세계 속에 진

실과 화해, 평화에 대한 기억의 구심점이 될 수 있

을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양조훈 이사장의 안내로 4·3평화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는 얀 보스 위원장과 비터 폰세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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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트라우마센터 운영사업 본격 착수

피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 4월 개소 

4·3유족·전문가 7명으로 자문위원 위촉

한국  현대사의  아픔인  제주4·3으로  정신적  고통

을 겪고 있는 생존 희생자와 유족 등의 치유를 돕

는 제주4·3트라우마센터가 오는 4월 문을 연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4·3으로  트라우마를  겪

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한  트라우마센터  운영사업

에 본격 착수했다. 

이에  앞서  정부와  제주도는  6억5400만원의  예산

을 4·3트라우마센터 운영책임을 맡은 제주4·3평

화재단에  지원했다.  현재  재단은  오는  4월  중  트

라우마센터  개소를  목표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주4·3 피해자 
트라우마 치유길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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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재단 신규사업

정용복 편집위원

제주4·3 72주년을 맞는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

아 4·3정신을 계승하고, 이의 완전해결을 다짐하

기 위한 다양한 사업과 행사들이 열린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4·3의 가치를 전국화·세

계화하기 위한 수준 높은 문화예술과 국제학술 행

사 등 다양한 기념행사는 물론 오는 4월 중 제주

4·3트라우마센터를  열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

는 생존 희생자와 유족 등의 치유를 돕는다.

제주4·3평화재단 
2020년 
신규 사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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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  공연을  위해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MOU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동명 중편소설을 원

작으로 창작 오페라 <순이 삼촌>을 제작하여 제

주와 서울공연을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제주의 아픔인 4·3과 지역문화콘텐츠를 바탕으

로 제주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내는 창작 오페

라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소설 ‘순이 삼촌’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

표돼  도민의  한  맺힌  4·3  피해를  세상에  알렸

다.  4·3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두  아

이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대인기피

증과 환청 등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주인공 순이 

삼촌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줄거리다.

제주4·3 세계화 발걸음 - 
워싱턴 4·3 인권 심포지엄 개최

지난해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렸던 ‘제주4·3 

UN  인권  심포지엄’을  통해  제주4·3  세계화의 

첫 발걸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은 데 이어 72

주년인 올해 미국 워싱턴에서 4·3 인권 심포지

엄을 열어 제주4·3의 세계화 기틀을 마련한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도는 오는 10-11월 중 

미국 수도인 워싱턴에서 “제주4·3과 미국, 그리

고 평화’를 주제로 제주4·3심포지엄을 연다.

특히  심포지엄을  통해  4·3을  알리고,  미주4·3

기념사업회를  구성하는  등  4·3의  진상규명과 

도민피해,  그리고  역사적  의미,  당시  미군정의 

책임과  사과  등에  있어  국제적  공감대  형성과 

지지를 끌어내고, 제주4·3의 세계화를 통한 국

제사회의 연대를 강화한다.

4·3 추가 진상조사보고서 및 
자료집 발간

올해  제주4·3  추가  진상조사보고서  및  자료집

이 발간된다. 

제주4·3평화재단은 추가 진상조사 관련 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따른 조사보고서에 이어 4·3 추

가 진상조사 자료집을 발간한다. 

4·3 추가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이후 추가로 확보된 문헌

과 증언, 보고서 등 각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추가조사  내용이  포함된

다. 또한, 4·3 추가 진상조사 자료집에는 4·3관

련 미국 자료 목록과 자료들이 포함된다. 

이번  추가  진상조사보고서와  자료집  발간으로 

제노사이드 관련 연구자 및 평화 관련 기관에서 

제주4·3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된다.

4·3평화재단이 추가 진상조사를 추진하는 이유

는 2003년 10월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

회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이후 「화해와 상생」 「4·3특별법 개정」(2007) 등

에서 진상규명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추가진상조사의 과제는 △제주4·3에 대한 역사

적 평가 △행방불명 희생 실태 및 마을별 피해실

태 △진압작전에 대한 지휘체계 규명 등이다. 

재단은 지난 1월 8일 4·3평화기념관에서 ‘4·3

트라우마센터  자문위원  위촉식  및  제1차  회의’

를  개최해  4·3생존  희생자·유족·관련  전문가 

등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자문위원장에는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김문두 교수(제주도광역

정신건강복지센터장)를  선출했으며  임기는  3년 

이다.

이날 자문위원들은 △센터설립 공청회 개최 △

관련  규정  개정  △접근이  쉬운  센터건물  확보 

△센터시설  마련  및  인력  채용  등을  지속해서 

논의하기로 했다. 

제주4·3트라우마센터는  4·3으로  인해  정신

적·신체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대

상으로 개인·집단상담, 예술치유, 치유 재활 프

로그램,  사회적  건강증진  프로그램  등  다양한 

전문 치유 활동을 지원하는 곳이다.

애초 정부는 국립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센터

를 건립하려고 했으나 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  관계로  5·18민주화운동과  4·3사건으로 

많은 피해자가 있는 광주와 제주에서 먼저 국가

폭력 피해자 치유 지원사업을 시범실시 하기로 

했다.

4·3트라우마센터 자문위원은 다음과 같다. 

▶당연직  ▷송승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

오인권  제주4·3생존희생자후유장애인협회장 

▷강민철  제주특별자치도  4·3지원과장  ▷오승

국  제주4·3평화재단  사무처장(직대)  ▶선임직 

▷김문두  제주도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장  ▷김

선현  대한트라우마협회  이사장  ▷명지원  광주

트라우마센터장(이상  1월  8일  위촉)  ▷김동만 

제주한라대 교수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이

상 2월 13일 위촉)

4·3 창작 오페라 <순이 삼촌> 공연 확정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을  주제로  하는 

창작 오페라 <순이 삼촌>을 국내에서 초연한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시는  올해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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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주화운동사료집 Ⅳ’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등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이사장  강남규)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제주4·3 관련 사료

들을  묶은  ‘제주민주화운동사료집  Ⅳ’를  출간 

했다.

이번 사료집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발행된 

4·3관련 사료집이며 1996년 제주4·3 제48주

기 위령제부터 2003년 제55주기 위령제까지의 

내용을 다뤘다.

특히  4·3진상규명운동  진영의  문건들이  주로 

실렸는데 진상규명을 하는 과정에서 당시 참여

자들의  노력과  고민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당시 위령제, 학술대회를 비롯해 성명서, 결의

문 등 다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사료집은 쉽게 사료를 검색할 수 있도

록 책자와 함께 USB로도 제작됐다. 

도서출판 선진인쇄사. 비매품

‘따라비로 오라’

김정수

제주 김정수 시인이 첫 시집 ‘따라비로 오라’를 

냈다.

시집에는 ‘별들도 슬프면 그림을 그린다’, ‘생선

을 구우며’ ‘겨울나무 가지 끝’ 등 60편이 실렸

고 그중 제주4·3과 세월호 사고 등 비극의 역

사를 어루만지는 시선이 눈길을 끈다. 혼란스러

웠던 제주역사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

민의 아픔을 드러냈으며 스스로 반성하는 가치

관이 담담하게 읽힌다.

김정수  시인은  “앞으로도  문학의  저변  확대와 

정서 순화를 위해 게으르지 않고 좀 더 따뜻하

면서도 울림이 있는 시를 쓰겠다”고 밝혔다. 

2010년  ‘한국문학정신’으로  등단한  시인은  제

주문인협회,  애월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서출판 시와실천.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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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온 책

‘제주4·3연구소 30년, 서른해의 기록’

제주4·3연구소

4·3진상규명과  연구에  있어서  지난했던  제주

4·3연구소(이사장 이규배, 소장 허영선)의 30

년  역사를  담았다.  제주4·3연구소의  창립은 

1987년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  이후  당시까

지만 해도 금기시됐던 4·3 진상규명 운동으로 

시작했다.  이어  도내외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1989년 5월10일 연구소를 창립했다. 

책은  모두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됐으며  제1부 

‘진실과  정의를  향한  길’은  4·3연구소의  창립 

비화  등  4·3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연구소가 주도했던 국제학술

심포지엄과 자료집 발간, 다랑쉬굴 발견 비화,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 등의 과정을 담았다.  

도서출판 각. 비매품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

제주4·3연구소

4·3 시기 제주여성들의 억척스러운 삶과 생활

을 다뤘다. 

책에  등장한  여성들의  나이는  4·3당시  10대 

초·중반이거나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어린 

나이, 한참 뛰놀고 신혼 초기의 단꿈으로 행복 

할 때 제주4·3이란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4·3의 진실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던 기존의 구

술채록집과는  달리  당시  여성들이  제주4·3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또 4·3 시기 죽음을 피해 중산간 들판, 

자연동굴로의 피신, 수용소 생활, 어린 나이에 

보초를  섰던  경험  등  4·3을  전후한  중산간과 

해안마을의 생활상과 ‘4·3을 살아낸 억척스런 

제주여성’들의 참모습을 담았다. 

도서출판 각.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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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 제주4·3으로 잇다
<제주> <대만>

4·3평화재단·2·28기념관 4월까지 대만현지서 전시
‘순이삼촌’ 현기영 소설가의 좌담회 “기억투쟁 강조”

섬(제주)과 섬(대만)이 가진 비극을 공유하는 것으로 평화·인

권의 소중함을 알릴 수 있는 행사가 대만 현지 시민들의 발길

을 붙잡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과  대만2·28기념관(관장  소명치·蕭明治)은 

지난해 11월 15일부터 올해 4월 30일까지 타이페이 2·28기

념관에서 열고있는 ‘2·28국제인권전-제주4·3’ 전시다.

전시는  지난  2017년부터  진행된  제주-대만의  4·3교류전의 

영향으로 마련된 것이며 지난 6월 소명치 관장을 비롯해 기념

관 관계자들이 사전답사를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전시장에는 △제주4·3의 시공간적 배경 △3·1발포사건 △무

장봉기 △초토화작전 △피해실태 △진상규명 등 4·3의 역사

를 영상, 사진, 작가작품으로 종합전시되면서 70여년의 지난

했던 역사를 알리고 있다.

특히 대만 현지인들에게 제주4·3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동백

꽃 스티커를 붙이는 코너도 마련했고 관람객들이 동참하면서 

4·3에 대한 높은 관심이 확인되고 있다.

주립희 대만정치대학교 교수가 ‘2·28국제인권전-제주4·3’ 전시 개막식에서 주요 내·외빈참석자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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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이사장은 “동시대에 발생한 대만2·28과 제주4·3은 국가권력

과 본토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학살되고 40여년 동안 역사를 언급하

지 못하도록 억압당했다는 점에서 너무 비슷하다”며 “대만2·28과 제

주4·3이 ‘역사 속 형제’로서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며 제주4·3평화기

념관에서도 대만2·28의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전시가 열릴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개막공연으로는 산오락회(최상돈·조애란·김강곤)가 ‘애기동백꽃의 노

래’ 등 4·3노래와 228사건을 알리기 위해 문학적 저항을 했던 이민용 

시인의 ‘우리, 나무를 심자’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서 호응을 얻었다.

또 제주4·3희생자유족회 임원들이 대만228유족회 임원들에게 동백

꽃을 달아주고 서로 현안을 공유하면서 향후 두 단체간의 우호·협력

을 다짐했다.

‘우리 나무를 심자’ 노래공연을 펼치고 있는 산오락회

지난해 11월 15일 오전에 열린 개막식에는 설화원(薛化元) 228사

건기념기금회  이사장,  소명치(蕭明治)  타이베이228기념관  관장, 

반신행(潘信行) 228유족회 회장, 장선연(張嬋娟) 국가인권박물관 

부관장, 전위(田偉) 타이베이시 문화국 부국장, 이민용(李敏勇) 시

인 등 대만측 관계자들과 「순이삼촌」의 저자 현기영 소설가를 비롯

해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문옥희 4·3희생자유족회 여성부회

장,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고순홍 4·3평화재단 이사, 이규

배 4·3연구소 이사장 등 제주4·3기관 단체 임원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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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대만과 제주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것은 다시 그 역사가 발

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된다”며 “2·28과 4·3의 진실과 기

억을 지키면서 여론을 끌어들이는 ‘기억투쟁’이 중요하다”고 강조 

했다.

한편 대만 민주개혁을 이끌어내는 데 발단이 됐던 미려도 사건의 

참여자 야오자원도 좌담회에 참석해 당시 민주운동의 성격과 계엄

령 해제 및 정당제 도입 등의 결과를 설명했다. 

좌담회에서 현기영 소설가(왼쪽 두번째)가 설명하고 있는 모습

현기영 소설가가 대만에서 발간된 <순이삼촌> 도서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오후에는 한국의 인권작가로서 4·3의 비극을 소설로 풀어낸 현기

영 소설가와 함께하는 좌담회가 열렸다.

현기영 소설가는 “대만2·28과 제주4·3의 경우 희생자가 수만이나 

죽었기 때문에 주제가 무거워 지금 세대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

울 것이다”며 “하지만 국가폭력에 대해 ‘무식은 유죄’이며 오히려 

진실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이 더욱 큰 죄”라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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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  주도로  지난해  미국자료현지조사팀

(팀장  김기진)  3명을  구성,  6개월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RA)을 중심으로 4·3 관련 자료를 조사한 결과 관련 기록 3만 

8천여 매를 입수했다.

이번에 확보한 자료 중에는 미군정과 군사고문단 수뇌부의 인식을 

직접 기록한 자료들이 많고, 이런 정보를 미 정부 및 군 최고수뇌부

가 공유, 인지하고 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자료에 따르면, 미군정의 최고책임자인 하지(Hodge) 중장

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앞둔 1948년 3월 3일 UN임시위원단과 덕수

궁에서 가진 회의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UN임시위원단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

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

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지는 “선거를 반대한

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

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

다”라며 강력하게 맞섰다.

임시위원단은 “우익세력이 그런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냐”고 따졌고 

하지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범’과 ‘범죄자’는 대응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의 이 같은 답변은 5·10선거를 반대한 제주지역에서 미군의 지

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제주 초토화, 최고 수준의 판단”
4·3평화재단, 미국자료 현지조사 결과 3만 8천매 입수 
미군정, 단선 반대 ‘범죄’로 인식…책임론 향방에 관심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치범’ 수준을 넘어 ‘범죄자’

로 취급했다. 또 제주도민 대상의 초토화작전을 훌륭한 작전으로 평가하면서 향후 제주4·3

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밝히고 또 다른 진상규명에 관심이 모여지고 있다.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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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미국자료를 검색하

는 모습

‘주의(brought to the attention)’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극동군사령부 문서 1949년 7월 21일자에는 유

재흥 대령의 귀순공작과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

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즉 “약 2천 명의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에 

대한 재판이 제주도에서 최근 진행되었다. 350

명의 사람들이 사형을, 약 1천 650명이 20년에

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4·3 군사재판 수형자중 일부가 지난해 한

국 법원에 의해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과 국

가보상판결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당시 미군은 

‘공산주의자들’이란 누명을 씌우고 불법적인 재

판과 가혹행위를 가해도 용인했음을 여실히 보

여주고 있다.

미군 최고수뇌부의 이런 인식은 “공산주의자는 

통상의 법률적 방법으로 다뤄선 안 된다”던 이

승만의 인식(1948년 5월 15일자 극동군사령부 

문서)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승만은 극동군사

령부 정보국 담당자와의 면담에서도 이를 피력

했다.

4·3평화재단은  금년에도  미국자료현지조사팀

을 가동, 미군자료의 비밀해제 요청을 계속해가

면서 조사대상을 NARA 이외에 미육군군사연

구소, 트루먼도서관과 미국 소재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한에  진주했던  24군단의  상위기관인  미  극

동군사령부(Far East Command, 일명 맥아더

사령부) 문서에 의하면 4·3봉기가 일어나고 한 

달가량 지난 1948년 5월 제주에는 미군 70명

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8년 7월 2일자 미 국무부 문서에는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제주의 

최고지휘관 브라운(Rothell H. Brown)대령의 

보고를 바탕으로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자

와 관계되어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

고 있다고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도 담겨 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Roberts)  공한

철 등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에서 소위 초토

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  등

의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미 극동군사령부 문

서에  의하면,  로버츠  준장은  1949년  1월  28

일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

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는  채병덕  참모총

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했다.

극동군사령부  정보요약  보고에서도  우익세력

의 행위에 대한 하지의 답변과는 달리 미군은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이  76명의 

주민들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을  때  “그들에게 

 

1949년 1월 ‘싹쓸이(cleaning-up)’와 로버츠 장
군의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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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키나와, 타이완 등 동시대 아픔을 가진 섬의 역사를 예술로 풀어내고 연대하는 대규모 전시

가 4·3평화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제주4·3평화재단과 동아시아평화예술프로젝트

조직위원회는 지난 12월 19일부터 1월 31일까

지 제주4·3평화기념관과 포지션민제주에서 제

주4·3 71주년 기념 동아시아평화예술프로젝트 

‘섬의 노래’ 기획특별전을 운영했다.

EAPAP(East Asia Peace Art Project, 동아시

아평화예술프로젝트)는  동아시아  지역에  드리

운 전쟁과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지배, 국가폭력

과 전쟁의 어두운 역사를 성찰하고 그것을 동시

대의 평화의제로 연결하는 예술프로젝트다.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열어나가는 성찰적 

자체의 예술활동이며, 특히 평화를 의제로 동아

시아 공동의 역사와 현실을 조망하는 예술활동

이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등 5개국에서 86명의 작가가 출품했으며 ▲주

제기획전(섬의 노래) ▲특별전 1. 표현의 부자

유전@제주 ▲특별전 2. 2019여순평화예술제:

손가락총@제주 등으로 펼쳐졌다.

주제기획전 

‘섬의 노래’ 전시명은 오키나와 전

쟁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오키나와 출신 밴드 

붐(BOOM)의  노래  시마우타(島鳴·섬의  노래)

에서 나왔다. EAPAP조직위는 “오키나와의 서

사를 가진 노래 제목을 제주·대만과의 연대에 

대입함으로써 동아시아 평화의 서사를 도출하

는 실마리를 잡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표현의  부자유전@제주’  특별전은  2019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놓고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군 

‘표현의  부자유

전, 그후

’를 보완한 전시다.

김운성·김서경 작가의 

‘평화의 소녀상’이 눈길

을 끄는 가운데 일본 천황제를 비판한 오우라 

노부유키의 작품 등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본

사회의 고뇌와 갈등을 보여줬다.

아시아 국가들의 
아픈 상처, 
예술로 보듬다

2019년 12월 19일~
2020년 1월 31일 
동아시아평화예술프로젝트 
‘섬의 노래’ 기획특별전 
제주4·3평화기념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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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시에 앞서 정숙인 작가가 여수 주둔 14연대의 호소문과 여수인

민위원회의  선언문을  낭독해  제주4·3과  여순사건의  연대를  확인시켰

다. 또 베트남의 쩐느엉 작가는 망치를 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서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화의 열망을 바라는 퍼포먼스를 펼쳐 박수를 받 

았다. 

베트남 쩐느엉 작가의 ‘임을 위한 행진곡’ 퍼포먼스

‘2019여순평화예술제: 손가락총@제주

’ 특별전은 4·3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여수 주둔 군인들과 여수·순천 인민

위원회의 활동과 항쟁, 학살의 역사를 다뤘다.

지난 12월 18일 열린 개막식에서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관람객들이 

모여 전시를 열게된 배경과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의견을 교류했다.

EAPAP 전시에 참여한 동아시아 예술작가들의 단체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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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2019년 우수관광지 선정
공원내 편의시설, 관리 및 청결 높은 점수

제주4·3평화공원이 2019년 제주지역 공영관광 

지 우수관광지로 선정됐다.

제주도는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공영관광지 

운영평가위원회가 도내 공영관광지 32곳 대상

으로 암행 평가와 실적 평가, 만족도 조사를 실

시해  ‘2019년  우수  관광지’  5곳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평가 결과에 따르면 최우수 관광지로는 기당미

술관이,  우수  관광지로는  제주4·3평화공원이 

선정됐다.  장려상에는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이, 

발전상에는 제주현대미술관과 산방산 등 2곳이 

뽑혔다.

제주4·3평화공원은 공원 내 편의시설이 잘 갖

춰진 점, 관리와 청결도 등에 높은 점수를 받아 

우수 관광지로 뽑혔다.

우수 관광지로 선정된 공영관광지는 지난해 12

월 26일 ‘제주관광인 송년의 밤’ 행사에서 표창

을  수여받았다.  최우수  관광지에는  100만원, 

우수 관광지에는 70만원, 장려상 및 발전상을 

수상한 관광지에는 각 50만 원의 상금이 주어

졌다.

한편 제주4·3평화공원은 4·3당시 자행된 민간

인 학살과 도민의 처참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

기 위한 곳이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해 2003

년 4월 3일 평화공원 기공식이 추진됐고 2008

년 3월 28일 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제주4·3의 전국화 ‘팔부능선’ 넘었다
국민인식도 조사결과 꾸준한 상승 눈길

제주4·3평화재단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2019년 전국민 제주4·3인식조사 결과가 발표

됐다.

조사결과 ‘제주4·3’ 국민 인식도는 82.9%로 작

년(78.7%)보다 4.2%포인트 증가했다.

4·3을 포함한 한국현대사 주요 사건 인지도를 

묻는 질문에는 △5·18민주화운동(99.1%) △노

근리양민학살사건(69.5%) △여순사건(67.7%) 

△보도연맹사건(43.2%)  △대구10·1사건

(34.6%) 순으로 나타나, 5·18민주화운동에 이

어 2번째로 높은 인식도를 보였다.

특히, 2017년부터 3년간의 추이를 보면 ‘제주

4·3’의  증가세(+14.8%포인트,  68.1→78.7→ 

82.9%)가 두드려져 최근 제주4·3관련 사업의 

다변화와 홍보 노력이 성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

인다. 

제주4·3에 대한 관심도 또한 59.5%로 지난해

(47.4%)보다 크게 높아져 인식도 상승세와 궤

를 같이했다.

4·3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는  양민학(52.4%), 

항쟁(9.8%), 사건(8.7%) 등의 순으로 인식하는 

국민이 많았다.

국민인식조사는  한국갤럽이  지난  12월  4일

~6일(3일간)동안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1,512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한 

전화조사를 했고, 응답률 11.9%, 표본오차 ±

2.5%포인트, 신뢰수준 9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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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김두찬관’, ‘충성관’으로 교체
해병대, 4·3단체 의견 수렴 후 새 이름 결정

그동안 논란을 빚었던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의 명칭이 ‘김두찬관’에서 ‘충성관’

으로 교체됐다.

지난 2월 13일 해병대사령부가 ‘김두찬관’ 간판

을 내리고 그 자리에 ‘충성관’이란 새로운 간판

을 달고 현장 사진과 함께 교체사실을 제주4·3

평화재단에 알려왔다.

해병대사령부는 그동안 복합교육센터의 새 이

름을 공모해왔는데, “개인 이름을 사용하기 보

다는 해병대의 핵심가치인 충성, 명예, 도전 중 

맨 처음 가치인 ‘충성’이란 이름을 채택하게 됐

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해병대사령부는 지난해 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

터를 건립하면서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두찬 

장군의 이름을 따서 ‘김두찬관’으로 명명했다.

제주4·3단체들은 김두찬이 1950년 6·25전쟁 

직후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당시  중령)로 

근무 당시 제주에서 발생한 수백명의 예비검속 

학살사건의 실질적인 명령자임을 지적하고 반

대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해왔다. 

4·3평화공원, 2년 연속 방문객 40만명 돌파
4·3 70주년 추모 분위기 이어 평년보다 갑절 증가

제주4·3 71주년이었던 지난해, 제주4·3평화공

원 방문객이 재작년에 이어 2년 연속 40만명을 

돌파했다.

2019년 4·3평화공원 누적 관람객이 412,536

명(지난해 12월 4일 기준)을 기록했다.

이와 같은 수치는 추모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고

조되었던 4·3 70주년을 제외하고 4·3평화공원 

방문객이 연평균 20만명을 넘은 해가 많지 않

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평년보다 갑절 가량 증가

했다고 볼 수 있다.

단체 입장객의 경우 제주도내 초·중·고등학교

를 비롯한 단체 방문객이 2018년 33,292명에

서 올해 18,404명으로 48% 감소한 반면 도외 지

역의  초·중·고와 각종 단체들은 전년 163,951

명에서 180,253명으로 10% 가량 오히려 증가

하였다.

4·3평화재단 관계자는 “4·3 70주년을 기점으

로 다양하게 펼쳐진 기념사업이 4·3에 대한 전

국민 인식도를 상승시켰으며 이는 4·3평화공원 

입장객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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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0일 뉴욕 UN본부에서 열렸던 ‘제주

4·3 UN 인권 심포지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결

과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조태일 주UN대한민국대표부 대사의 환영사부터 

시작된 결과보고서는 심포지엄 관련 사진기록, 준

비과정과 행사진행, 그리고 발표·토론내용, 국내

외 언론보도 목록 등을 담고 있다. 마지막에는 심

포지엄의 성과와 과제를 제기하여 심포지엄의 의

미와 향후 방향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하고 있다.

결과보고서는 우선 ‘사진으로 기록하다’라는 소제

목으로, 심포지엄 준비를 위한 사전답사, 학술회

의 발표와 토론, 대한민국대표부에서의 리셉션 등 

심포지엄 기획과 준비, 운영 과정을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준비과정’은 UN심포지엄을 기획하게 된 배경, 준

비작업, 미국 사전 현지답사 등을 실었다. UN심

포지엄은 공적기관이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

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행사였다.

보고서는 주UN대한민국대표부가 주최하는 행사

가 마련된 배경과 미국 현지 사전답사를 통해 미

국 소재 과거사, 인권, 종교, 외교단체 등 14개의 

협력기관의 지지를 얻어가는 과정도 소상히 담고 

있다.

‘행사진행’  부분에서는  한국방문단의  환영행사, 

심포지엄 개막 전경, 발표와 토론, 그리고 대한민

국대표부에서의 리셉션 내용을 담고 있다.

‘언론보도’에서는  2018년  심포지엄  계획이  추진

되고, 2019년 6월 UN본부에서 실현된 과정과 내

용에  대한  국내외  언론보도들을  다뤘다.  UPI를 

비롯한 국외 언론들도 심포지엄 개최를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4·3의 세계화에 반향을 일으켰다.

결과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심포지엄의 ‘성과와 과

제’를 담아 이후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있다. 4·3

의 미국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자료 조사와 미국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 등 두 가지 

트랙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면과

제로서 워싱턴DC에서의 4·3 알리기와 동시에 소

장 정치가를 비롯한 미국 정계를 설득해야 한다는 

견해가 주요하게 논의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뉴욕 UN본부서 밝힌 역사 담아내다
제주4·3 UN 인권 심포지엄 결과보고서 발간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2019 전국교원 4·3평화·

인권교육 직무연수’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

로 나타났다.

4·3평화재단은  지난  6월  14일  충남교육청을 

시작으로 11월 16일 광주교육청의 8기까지 직

무연수 참가자 550명을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

사하고 이같이 밝혔다.

직무연수는 1박2일에 걸쳐 15시간 운영된 가운

데 4·3의 역사를 배우고 4·3유적을 기행하는 

이론·현장강의로 진행됐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연수과정과 직무수행 도움 

여부’에 참가자 88%(482명)가 ‘매우 그렇다’에 

표시했으며 이론강의에는 89%(489명)가, 현장

강의에는 94%(517명)가 높은 만족감을 보였다.

특히 ‘연수과정의 향후 유지 필요’를 묻는 항목에

서 92%(502명)가 ‘매우 필요함’으로 응답해 4·3

직무연수의 지속적 추진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외에도 △교과과정 편성도 △강사선정 △교

육교재 △연수담당자 친절도 등에 85%이상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제주4·3평화재단은  향후에도  제주도교육청과 

협력해 학교현장에서 4·3교육을 활성화시키고 

4·3의 전국화와 세대전승을 이루기 위해 전국

교원연수를 실시할 예정이다. 

전국 교원 4·3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 높은 만족도 눈길
4·3재단 참가자 550명 대상 조사…지속 추진 필요성 제기

2019 직무연수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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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의  기관지  「4·3과  평화」가 

‘2019 대한민국커뮤니케이션대상 인쇄사보(사

내보) 부문-기획대상’을 수상했다.

‘2019  대한민국커뮤니케이션대상’은  (사)한국

사보협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부처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한국기자협회 

등 24개 기관의 후원으로 개최되며 지난 12월 

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시상식이 

진행됐다.

국가기관을 비롯한 전국 공·사기업과 단체에서 

제작된 커뮤니케이션 제작물을 대상으로 우수

작을 선정, 총 28개 부문에 시상하며, 기업문화 

발전과 작품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심사결과 「4·3과 평화」는 가독성 있는 편집과 

4·3해결과정에서 도민사회에 귀감이 되는 인물 

인터뷰를  비롯해  4·3생존수형인에  대한  법원

의 공소기각, 제주4·3 유엔 인권 심포지엄, 제

주4·3 의인 발굴 등을 다룬 특집 및 신규기획

이 돋보였으며 또 제주4·3을 다양하게 홍보하

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9월 창간한 「4·3과 평화」는 제주4·3평

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을 홍보하

고, 4·3사건진상규명 과정에서 빚어졌던 대립

과 갈등, 반목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킨 제

주도민의 평화정신을 주제로 편집하고 있다. 현

재 38호까지 발행됐으며 일본 현지 신간사(新

幹社)에서 일본어판을 발행해 재일제주인 및 국

제사회에 4·3을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기관지 「4·3과 평화」
2019 대한민국커뮤니케이션대상 기획대상 수상

타 지역 학생들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지향하는 4·3알

리기에 앞장서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경기 운산고(교장 박직희)와 서울 마

곡중(교장  송준헌)이  제주4·3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기념품들을 제주4·3평화재단에 보내오면서 알려졌다.

먼저 운산고에서는 2학년 학생자치회가 ‘평화와 인권 뱃

지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뱃지를 제작했다. 학생들은 

제주4·3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을  모티브로  동백꽃과  제주소녀를  뱃지에  그려넣 

었다.

또 지난해 학교 독서수업에 참여한 2학년 학생들은 제주

4·3추모작품모음집 「한(恨)」’을 발간했다. 작품에는 모두 

150여명이 참여했으며 제주4·3에 대한 감성을 시, 수필, 

영상 시나리오, 그림, 만화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지난 2017년부터 4·3 평화인권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는 

서울 마곡중 학생들도 4·3홍보에 팔을 걷어부쳤다.

학생회가  주축으로  마련한  기념품은  손거울이며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기억하여 기록하다. 제주

4·3’의 문장과 삽화로 디자인됐다. 

손거울 뒷면 동백꽃 소녀

손거울 뒷면 동백꽃 아이들

4·3알리기에 앞장서는 도외 청소년들 눈길
경기 운산고 서울 마곡중, 뱃지 손거울 등 4·3기념품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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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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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평화우체통

평화 인권을 알리는 사업에 맞손 잡다
4·3평화재단, 지난 11월 14일 국제평화재단 - 12월 3일 JDC 등 업무협약

제주4·3 72주년에 이르면서 비극의 역사를 제

대로 알리기 위해 더욱 다양한 사업을 고민할 때

가 됐다. 4·3평화재단도 이에 발맞춰 내부논의

를 거듭한 후 도내 기관·단체와의 협력 및 연대

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9일  국제평화교류  및  4·3의  화

해·상생정신을 알리기 위해 국제평화재단(이사

장 고충석)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결정한 주요 협력분야는 △학술·교육·문화

예술프로그램 교류 △기록물 및 출판물, 전시 콘

텐츠 개발 및 교류 △트라우마 치유 방안모색 협

력 등이다.

협약식에서  고충석  이사장은  “국제평화재단이 

4·3을  아우르는  국제교류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고, 양조훈 이사장은 “해외 학술 및 평화교

류에 공동 협력할 것”이라 밝혔다.

이어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이사장  문대

림·이하  JDC)와  제주4·3의  평화·인권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맞손을 잡았다.

양 기관은 12월 3일 4·3평화기념관에서 임직원 

들이 모인 가운데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주요 협력분야는 △제주4·3의 진실 및 평화·인

권관련 교류와 행사 공동추진 △국내외 네트워

크 구축을 통한 평화확산 협력사업 발굴 및 추진 

등이다.

협약 서명을 마친 후 문대림 이사장은 “기본적으

로 JDC는 제주의 가치를 전제로 사업을 진행하

는 곳으로 제주의 가치는 곧 4·3이 지향하는 평

화·인권의 가치와도 맞물려 있다”며 “오늘을 기

점으로 제주4·3의 세계화를 위한 평화사업에 최

선을 다하고 제주를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만들

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양조훈 이사장은 “4·3 평화·인권사업에 JDC가 

나서줘서 감사하다”며 “평화·인권사업은 과거에

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갈 때 비로소 

발전하기 때문에 앞으로 양 기관이 협력사업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제주4·3 역사의 공감대를 확산하고 현 단계에

서 풀어나갈 4·3의 과제를 고민해보는 제12기 

시민 4·3아카데미가 성황리에 끝났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11월 25일부터 30일

까지 제주테크노파크 벤처마루 대강당에서 ‘제

12기 시민4·3아카데미’를 진행했다.

이번 강의는 4·3의 역사뿐만 아니라 교양, 음

악, 영상, 문화 등을 아울러 깊이 있고 다양한 

주제로 운영됐다.  

이론강의는 대한민국 역사를 전 세계로 홍보하

며 한국 알리미로 유명한 성신여대 교양학부 서

경덕 교수가 ‘대한민국 역사 홍보 왜 중요한가? 

: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를 주제로 

시작했다.

이어 2강 ‘제주4·3의 진실: 발발과 전개과정(김

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3강  ‘제주4·3  미국책임  문제와  화해운동(양조

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4강 ‘4·3과 음

악:  4·3독립의  노래,  통일의  함성(최상돈,  가

수·작곡가)’이 시민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달

했다.

특히 마지막 이론 강의에는 EBS교육방송 장후

영PD가 제주4·3 다큐 ‘바람의 집’(2019.4.2.~

3, 2부작, EBS방영) 편집본과 비하인드 스토리

를 공개했다.

현장답사에는 제주4·3 역사 스토리텔링 전문가

인  오화선(제주4·3연구소  연구원),  조미영(제

주4·3연구소 이사) 강사가 맡아 진행됐다.

한편  12번째를  맞이한  시민4·3아카데미는 

2009년 제1기 수강생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699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시민과 4·3바로알기·과제 함께 고민
제12기 시민 4·3아카데미 개최 - 역사바로알기 국민공감대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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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4.3 and Peace

민주화과거사 유관단체 신년 간담회가 1월 16일 

박종철열사 고문 현장인 서울 남영동 민주기념

관 예정지에서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청와대  김거성  시민사회수석

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지선 스님, 부

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 송기인 신부, 5·18

기념재단 이사장 이철우 목사, 제주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 4·19민주혁명회 정원양 회장 등

이 참석했다.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은 4·3 72주년 추념

식과  전야제  행사,  4·3트라우마센터  시범운영, 

미국 4·3 인권심포지엄 등 올해 사업계획을 설

명하고 유관단체와의 협력을 요청했다. 

고성철 제주특별자치도 지방서기관(사진 왼쪽)이 

제주4·3평화재단 사무처장직을 맡고 사무처 업

무 전반을 총괄한다.

제주도는  지난  1월  15일  승진  120명과  전보 

488명 등 모두 608명에 대한 2020년 상반기 정

기인사를 단행했다.

고성철 서기관은 1988년 공직에 입문해 제주도 

물정책과수자원팀장,  제주도농업기술원  총무과

장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이번 인사발령에 따라 서기관으로 승진한 고성철 

서기관은 제주4·3평화재단으로 파견됐고 1월 17

일 양조훈 이사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민주화과거사 
유관단체 신년간담회 개최
서울 남영동 민주기념관 예정지에서

고성철 서기관, 
제주4
·3평화재단 사무처장 임명
제주도 상반기 정기인사 단행

제주의 순이삼촌들, 편히 잠드소서
도내 곳곳에서 제주4·3위령제 봉행.1월 13일 북촌·동복 1월 27일 영모원

70여년전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

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제가  지역  곳곳에서  열 

렸다.

제주4·3희생자북촌리유족회는 1월 13일 북촌너

븐숭이4·3위령성지에서  ‘제71주년  제주4·3북

촌희생자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날  위령제에는  송승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

장,  고완순  북촌리  4·3유족회장,  홍성효  제주

4·3북부예비검속 희생자유족회장, 오영훈 더불

어민주당 국회의원, 고희범 제주시장, 양조훈 제

주4·3평화재단  이사장  등  4·3유족회  및  도내 

기관·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고완순  북촌리  4·3유족회장은  고유문을  통해 

“억울한 영혼들을 엄동설한 사지로 보내고 천붕

의  심정으로  보내온  날도  70년의  세월을  넘어 

섰다”며 “그나마 바른 생각들이 주도하며 4·3특

별법 제정, 대한민국 역사로 자리매김을 위한 노

력, 4·3수형인에 대한 사실상의 무죄판결 등으

로 역사의 흐름이 정의로 귀결됨을 느낀다. 4·3

특별법  통과로  유족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밝 

혔다.

한편 이날 구좌읍 동복리 4·3희생자위령공원에

서도 합동위령제가 봉행됐으며 1월 27일에는 하

귀발전협의회가 애월읍 하귀리에 소재한 영모원

에서 위령제를 진행해 4·3유족 및 호국 희생자 

유족들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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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제주4·3의 상징인 동백꽃으로 명소를 조성하고 

4·3의 평화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동백 한 그

루 평화 한 걸음’ 캠페인이 2019년에 이어 올해

도 추진됐다.

제주4·3평화재단은 2월 3일부터 23일까지 4·3

평화공원 동백나무 심기 캠페인을 펼치며 4·3유

족 및 도민 등을 대상으로 동백나무 기증 신청을 

받았다.

이번  캠페인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후원으

로 추진됐으며, 기증대상은 수령 20년 이상의 제

주 토종 동백나무다. 1인당 5주 이내 기증할 수 

있으며 이전 식재비용은 제주4·3평화재단이 부

담한다.

기증받은 동백나무를 식재할 구역은 ▲4·3평화

기념관 후문 진입로 ▲4·3평화공원 무궁화동산 

등이다. 

제주4·3관련 단체장들이 2월 11일 신년간담회

를 갖고 4·3 추모와 기념, 홍보사업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날  간담회에는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 

4·3희생자유족회 송승문 회장, 4·3연구소 허영

선 소장, 4·3도민연대 양동윤 대표, 제주민예총 

이종형 이사장, 4·3기념사업위원회 강호진 집행

위원장, 4·3범국민위원회 백경진 상임이사와 강

민철 도4·3지원과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참석

했다.

이날 간담회 참석자들은 4·3평화재단의 주요사

업과 4·3트라우마센터, 워싱턴 4·3인권 심포지

엄 등 올해 역점사업의 내용을 공유했다. 또 각 

단체별 주요사업 일정을 공지함으로써 4·3을 알

리는 사업에 효율성을 높이고 4·3특별법 개정과 

정명운동에 함께 협력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동백나무 심기 캠페인 추진

제주4·3 관련 단체 신년간담회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