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Augus
t.
Vol. 40
2020. August.
Vol. 40
특별인터뷰_ 걸음과 거름
토산리의 한(恨)은 씻겨졌을까
특별논단
한국전쟁 70주년과 제주4·3
뉴스포커스
70년 ‘빨간딱지’ 서둘러 떼어주길
4.3시나리오공모포스터(인쇄용).pdf 1 2020-07-15 오후 6:48:44
C O N T E N T S 2020. August. Vol. 40
권두시
맑고 흰죽
_ 변희수
특별논단
한국전쟁 70주년과 제주4·3
_ 김삼웅
특별인터뷰 _ 걸음과 거름
토산리의 한(恨)은 씻겨졌을까
김양학
_ 김동만, 김영모
뉴스포커스
70년 ‘빨간딱지’ 서둘러 떼어주길
_ 허호준
특집
_ 4·3평화문학상
“그들의 아픔, 문학으로 치유되길”
_ 김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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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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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제주바-01019
등록일
2011년 3월 25일(계간 비매품)
발행일
2020년 8월 25일
발행처
제주4·3평화재단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
(봉개동 237-2) 제주4·3평화기념관 4층
TEL. 064.723.4373 / FAX. 064.723.4303
www.jeju43peace.or.kr
발행인
양조훈
편집인
고성철
편집담당
김영모
편집위원
강덕환, 좌용철, 이정원, 김가민, 조정희
디자인·인쇄 하나출판
사진_ 조천 와산리 하르방 베락당에 자리잡은 팽나무(신목).
와산리 본향 베락당은 4·3의 광풍이 잦아들 무렵부터
폐당됐지만 언제 태어났을지 모를 팽나무의 시간만은
여전하다. <박정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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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전승 4·3·2·1
“어설픈 위로보다 공감이 중요하죠”
<기억하리> 4·3평화인권동아리
_ 송지은
기억과 기록 ③ 일본
반쪽의 역사만 기억하는 일본
_ 조미영
4·3의 증언
“ 아버지의 ‘빨간 줄’, 여군에 들어가서 지웠어”
정봉영(1934년생, 제주 도두)
_ 조정희
4·3유적
4·3의 중심에 있었던 오라마을
_ 강봉수
새로나온 책
재단뉴스
평화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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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흰죽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변희수
권두시 _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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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
경남밀양 출생, 영남일보(2011) 신춘문예 등단, 경향신문(2016) 신춘문예, 천강문학상 수상 (2013),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문학나눔 도서선정), 현) 대구시교육청 창의융합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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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과 제주4·3
특별논단
김삼웅
제주4·3 중앙위원, 전 독립기념관장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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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의 6·25동족상쟁
남과 북은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국치와 식민지 생활
을 함께 겪고 독립운동을 더불어 하였다. 해방을 함께 감
격하고 분단을 더불어 비통해 하였다. 싸울 이유가 없는데
싸우는 것은 투견(鬪犬)이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 개들은 투견사들의 돈벌이용으로 서
로 물고 뜯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구경꾼들은 이를
즐기고 개평을 얻는 사람도 있다. 미·소는 한국을 분단시
키고 투견사 노릇까지 하였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면 필연
적으로 동족상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해서 남
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위로 돌
아가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
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
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
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
시를 즐기고 있었다.
6·25전쟁은 몇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
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
화되고 ②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
긴 채 철수 ③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④ 1949년 12월 김일
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
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① 김구·여운형 등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을 의
미하는 38선. 이렇게 한반도를 반으로
나눈 38선은 민족분단의 경계선으로
고착화된다.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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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②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고조 ③ 반민특
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④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가능성 희박 ⑤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 반이승만계열 국회 다수석 차지로 정부에 대한 국
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여기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
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과 스탈린의 적극적
인 사주론도 제기된다.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
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
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황은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
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
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 → 38선 넘어 진격 → 평양점령 → 국군 일부 병력이 압록강 근처 초산까
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
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얼마 후 38도선을 넘어 철원·금화
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전쟁 중 이승만 정부의 군경은 제주 4·3사건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수많은 학살
을 자행하고 국민방위군사건으로 1천여 명의 장정이 굶어 죽거나 부상당하는 권
력형 비리가 자행되었다.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
의 사망자와 쌍방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
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분단체제가 더욱 굳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분계선이 되었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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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분할점령도.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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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진정한 해결을 위하여
제주4·3 항쟁은 6·25전쟁 2년 전에 발발하여 전쟁기간 더욱 참혹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
단선·단정을 주도한 미국은 한반도 남쪽의 반공기지화를 위해 외딴섬 제주에
서 사태를 키우고, 미국의 지원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노선
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참사가 확대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4·3사건은 6·25전쟁
의 전초전으로 남한에 반공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실험장이었다. ‘단선·
단정반대’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봉기한 제주도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미군정
은 초기부터 과격하게 진압하고, 이승만 정부는 법률에도 없는 계엄령을 발동하
여 대대적인 살륙극을 자행하였다.
제주가 외딴 섬이다보니 육지로의 확산을 막기에 수월하고 단선·단정반대를 ‘반
공노선’으로 등치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면서 4·3참여자와 그 가족을 용공
으로 몰아 처형 수감함으로써 분단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제고하고 비판세력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4·3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밝혀졌듯이 4·3사건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도민들의 자발적 거사였다. 소수의 남로당 계열이 봉기에 가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민의 절대 다수는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통일정부의 수
립을 바라는 애국충정이었다. 여기에 분단정권을 바라는 미군정과 우익보수단
체의 폭력과 무차별 살상으로 도민들이 격앙하게 되면서 자위수단으로 무장하게
되고 사태가 확산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제주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토벌대의 집단학살과 과잉진압이 자행되고, 제주도에서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에 해당되는 주민이 희생되는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7년 7개월 동안 제주에서
는 국가폭력의 만행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킬링필
드 사태와 다르지 않았다.
제주의 평화와 4·3사건의 평화·화해·상생 그리고 아픈 상처의 치유를 위하여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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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캄보디아 등은 국제적으로 집단학살의 악명이
높은 제노사이드의 상징성을 띄고 있는 국가들이다. 제주 4·3사건도 잔학성이나
희생자 규모면에서 이들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제주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고 있던 1948년 유엔은〈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을 제정하면서, 제노사이드는 유엔
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
임을 명시했다.
이 ‘협약’이 보다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앞에 열거한 국가들과 연
대하여 ‘협약’의 강화와 위반 국가, 집단에 대한 처벌 등을 강화하는 캠페인을 벌
이는 방안을 마련했으면 한다.
둘째, 제주대학 등 일부 대학과 연계하여 대학에 〈제주4·3 평화학〉과 같은 학과
를 설치하여, 젊은 세대가 체계적으로, 학문적으로 4·3사건을 연구하고, 국내·
국제평화운동으로 연계하는 노력을 벌였으면 한다. 학위를 취득하는 학생에게는
대학이나 행정기관, 연구소에서 우선적으로 취업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
주도는 특별자치도로 지정되어서 행정당국과 대학이 의지만 있으면 조례와 학칙
을 제정하거나 바꾸어서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해외 유학생도 선발하여 교육한
다면 4·3사건의 국제적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분단을 막고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숭고한 통일정
신에서 발원되었다. ‘단선·단정반대’는 곧 통일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4·3의
진정한 해원은 평화통일이다. 평화통일을 위해 더 이상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
는 일이나, 어떠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아픈 4·3사건의 사력을 기억하고 이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는 정확한 기
록을 통해 내일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따라서 각종 정부
기록과 교과서, 참고서 등에 4·3사건의 진실을 수록할 수 있도록, 제주도민운동
을 전개했으면 한다. 지금도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는 ‘4·3폭동’ 따위의 설명
문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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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제주 4·3사건은 미군정시기에 일어난 참극이다. 미군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서 진압지시를 하고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1897
년 7월 7일 하와이 합병과정에서 자행된 학살과 인권유린에 100주년인 1997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미일본인 격리 수용에 관
지난해 북촌 너븐숭이 학살터에서 진행된 전국청소년4·3평화캠프에 참여한 학생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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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사과와 배상을 했다. 미국은 아메리카의 가치인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을 무시
한 제주 4·3사건에 사과하고 응분의 배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 제주도의회가 공식 의결을 거쳐 미국 의회에 요구하는 방안도 검토되
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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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_ 걸음과 거름
토산리의
한(恨)은 씻겨졌을까
인터뷰어 김양학 (토산리 실상기 저자)
대담 김동만 제주한라대 교수
사진·정리 김영모 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김양학 어르신(80)은 4·3피해자 유족이면서 누구보다 진상
규명에 앞장선 사람으로 주목을 받는다. 1987년 그가 쓴 ‘토
산리 실상기 - 우리의 한(恨)’은 어둠속에 갇힌 4·3을 알리
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공안기관의 서슬퍼런
감시에도 불구하고 4·3당시 군경에 의한 토산리 주민 집단
학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줄한줄의 문장은 희
생된 150여 명 토산리 주민들의 응어리진 한의 목소리였
다. 이 글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7
년 말 제주대학교 신문사 기자이자 4·3동아리 ‘제주사회연
구회’ 창립멤버인 김동만 (당시 1학년, 현 제주한라대 교수)
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토산리 실상기’ 내용은 이듬해
4월, 제주대학교 신문에 실렸고, 육지의 타대학 신문기자들
의 취재가 이어졌으며, 1988년 12월, 소설가 오성찬씨가 편
찬한 4·3증언집 <한라의 통곡소리>에 전문이 게재되기도 했
다. 김양학 어르신과 김동만 학생과의 만남은 4·3진상규명
운동의 오랜 동지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30여 년이 지난
현재, 어르신의 한은 씻겨졌을까. 김동만 교수와 표선리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편집자주>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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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산리 주민 학살을 토산리 실상기를 통해 알린 김양학씨와 김동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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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모래사장이 지금은 관광지로 변모했
지만 나는 사태 이후 지금까지 그곳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너무나 한이
맺힌 곳이 돼서 백사장을 볼 때마다 4·3
사건을 되새기게 되거든”(김양학, 1987년
12월 증언에서)
어르신은 오래전의 인연을 잊지 않고 반갑게
맞이해줬다. 흰 숱이 가득한 머리에 다리는
불편했고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뇌경색이 오다보니 한 2~3년 동안 말도 똑바로 못하고 손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니까
글도 못 쓰고 그래요. 요새 4·3소식은 자주 듣고 있는데 유족들의 배·보상과 유족신고 상설화
등 4·3특별법 개정안 통과가 제대로 안되니까 내가 죽기 전에 이뤄질지 굉장히 안타까워요.
양자가 유족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문제도 꼭 해결되어야 해요.”
대화주제는 어디까지나 토산리 주민 학살이었다. 어르신은 여전히 토산리의 영령들을 떠나보내지
못했고 죄의식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언론들이 어르신을 다녀간 듯했지만 토산리 주
민 학살을 알아주는 이는 정작 드물었다.
“4·3당시 제주도야 피해가 없는 곳이 없겠지만 토산리 같이 18세 이상 40세까지의 사람들,
거의 한 세대가 몰살당한 사례는 보기 힘들어요. 그 사람들은 그냥 착하게 토벌대 명령에 따
라 향사(리사무소)와 표선백사장에 모였을 뿐인데, 설마 학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토산리 실상기’에 그런 내용을 적었어요. ‘표선백사장으로 끌고 가서
죄의 유무도 가리지 않고 총으로 폭살하고 창으로 도륙하였으니 진통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면서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었습니다’라고요.”
1948년 11월 당시 여덟살로 어머니 손을 잡고 있었던 어르신은 순간순간의 과정을 눈에 담고 있었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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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다. 향사에 집결해 있는 청년들, 포승줄이 묶인 채로 걸어가는 여인들의 모습 등 어
린 눈에 비친 세상은 비극과 절망이었다.
학살터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다음 해 봄이 돼서야 가능했고 당시 희생자들이 입었
던 옷가지로 겨우 신원을 확인했다. 마을은 점차 재건되고 사람들은 늘어나면서 변
화를 거듭했지만 4·3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 쉰 살이 다 되어갈 무렵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자각과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어르신을 움직
였다.
“85년도에 이장을 맡고 자체적으로 4·3피해조사 초안을 잡아 마을어르신들
에게 4·3당시 증언을 들었죠. 4·3에 대한 후유증과 두려움으로 거부당했던
게 대부분인데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보상과 유족들의 위로차원에서라도
‘토산리 실상기’를 완성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토산리 실상기’가 발표되고 나서 어르신은 경찰서, 보안대 등에서 ‘찍힌 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주민서명을 받고 피해조사
를 다녔다. 1993년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처음 4·3피해자 신고를 받기 이전
부터 어르신은 자체적으로 토산리에서 주민피해신고를 독려했다.
“공안기관에서 하도 전화가 많이 오길래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이렇게 위화
감 주지 말고 나를 (감옥에) 처넣어라. 나는 어디에 가 죽든 살든 내가 듣고 본 것
을 그대로 서술한 것뿐이지 보탬도 덜함도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어요”
4·3에 의한 주민들의 연좌제 피해도 막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토산리 실상기’를 쓰
고 난 뒤 그 자신의 친척도 공직에서 ‘옷 벗을 뻔 했다’ 며 외압을 받은 사실이 있었
지만 그렇다고 이웃의 고충을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 아이가 학사장교로 진로를 잡았는데 신원조회 결과 아이의 할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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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유족들의 증언을 담은 제주대신문 4·3기획기사(1989년 3월 30일자)로 김양학 어르신의 4·3당시 증언도 게재됐다.
김양학 어르신의 인터뷰와 토산리 실상기
가 수록된 월간문화제주(1992년 4월호)
4·3평화기념관에 소장된 토산리 실상기 원본
토산리 실상기 전문이 실린 오성찬씨의
<한라의 통곡소리>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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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4·3당시에 죽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었어요. 그래서 저는 당시
성산포 파견 보안대장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했고 그 결과 장교 입대가 허용
돼 중령으로 제대할 수 있었죠”
‘토산리 실상기’를 쓴 이후에는 4·3취재를 하던 도내외 대학생들과 4·3연구소와
의 만남을 가지며 의견을 교류했고 토산리의 억울한 역사를 호소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신문기고를 통해 여러 차례 4·3해결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강조
해왔다.
특히 김동만 교수와 함께 당시 경찰출신들을 찾아다니며, 가해자로서 집단학살
에 대한 양심선언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 중 학살에 참여했던 김0봉 순경은 그때
의 잘못을 인정하고 토산리 주민들의 억울함을 영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양학 어르신은 토산리 집단학살과정에서 여자들은 마지막까지 살려두
었다가 군부대가 떠나면서야 학살을 했는지 아직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남자들을 학살한 후 여자들을 왜 별도로 수용하고 군부대와 함께 생활토
록 했는지? 군인들이 떠나기 전까지 여자들에게는 어떤 가혹행위가 있었는
지?”
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몫은 후손들에게 남겨진 과제라며 연신 백발의 머리를 쓸
어 넘겼다. 당시 희생자들을 집결시켰던 마을 향사와 그 주변의 4·3성을 유적지
로 복원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겼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양학 어르신과 함께 표선백사장 학살터를 찾았다. 나이 팔십
에 다시 한 번 학살터를 찾은 김양학 어르신, 한동안 그와 함께 말없이 학살터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다 잃고 한숨과 눈물마저 메말라버린 노부모에게 모진 생명을
버리지 못하고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면, 강보에 싸인 어린 자식이나 손자
에게 몸과 생애를 걸어, 70노구에도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끝없는 한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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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야 했으니 이 기구한 운명을 걸고 죽는 순간까지 살아야 했던 우리 부
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이 죽은 자보다 더 고되고 아픈 첫 번째 한이요,
하늘과 같은 남편을 뜻밖에 잃고 뼈를 깎는 아픔 속에 노부모를 모시고 어
린 자식을 뙤약볕이 내리쬐는 밭머리에 누이고 김을 매면서 심장이 멈추는
듯한 공포와 피를 토하는 아픔을 참아야 했던 우리 어머님들의 삶이 두 번
째 한이요, 재롱을 부리고 어리광이나 하며 학교에 가고 뛰어놀며 정상적인
성장을 해야 할 10대 소년이 학교나 놀이터 대신 소를 몰아 땀을 흘리고 몸
과 마음을 떨면서 밭을 갈아야 하는 엄청난 고행의 농군이 되고 배움의 길
을 잃거나 정상 교육을 받지 못하여 전생애의 울분을 참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이 안고 있는 셋째의 한이요, 어느 땅 어느 사회에서나 그
4.3 and Peace
21
러하듯이 청장년층이 없고 또 힘도 없어 생계가 막연하고 가난했으므로 주
위에서의 질시와 수모, 그리고 갖은 치욕을 한없이 받아왔던 것이 네째의
한이요, 현재 표선백사장은 대규모의 제주민속촌이 들어서고 해수욕장이
개설되어 모든 사람의 눈과 마음을 즐겁고 흡족하게 하는 아름다운 관광지
로 발전해 가고 있지만 우리 피해자들은 그곳 백사장을 먼 곳에서만 보아도
몸서리가 쳐지고 우리 부모 형제가 참혹하게 갔던 곳으로 천륜의 아픔을 뼈
저리게 삼키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의 한이요, 젊은
한 세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음 세대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를 않아 가문
의 유지와 지역발전에도 인적자원이 크게 모자라는 것이 여섯째의 한입니
다”(1987년 ‘토산리 실상기’ 초안 중에서)
4·3당시 토산리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표선백사장 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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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포커스 _ 제주4·3행불인 재심
제주4·3 당시 섬을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
다. 이들 가운데는 세상에 나온 뒤 섬 밖을 떠나
지 않았던, 섬이 세상의 전부였던 이들도 있었
고, 징병이나 징용, 또는 생계를 위해 일본 등지
로 떠났다가 해방돼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신혼
의 단꿈에 젖었던 이들도 있었고, 10대의 학생들
도 있었다. 1948~1949년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젖먹이 아들과 딸,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내던져진 포대자루 마냥 낡은
배의 밑바닥에 실려 제주바다를 건너야 했다. 더
이상 한라산을, 제주바다를 볼 수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와 남편, 형제가 끌려가던 날, 공포와 두
려움 속에 울부짖던 어머니의 품 안에서 눈망울
만 굴리던 갓난아기는 어느새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긴 70대 중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젊디 젊었던 여인네는 남편을 가슴에 담은 채
70여 년을 더 살고 있다. 제주에 남아있는 가족
들에게는 주홍글씨처럼 ‘빨간딱지’가 붙었다. 이
들이 나섰다. 내 남편, 내 아버지, 내 형제가 어디
있느냐. 국가에 묻고 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지
난 6월 8일 70여 년 전 내란죄나 국방경비법
32·33조 위반(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 및 간
첩죄)으로 수형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이른바
‘4·3 행불인’ 14명에 대한 첫 심리를 진행했다.
4·3 행불인 재심 청구인은 지난해 6월과 지난 2
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49명에 이른다. 국
내 재심 청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
모다. 재판부는 사실관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증
언할 수 있는 청구인을 중심으로 선별해 심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9월 속행
된다.
■ 4·3 행불인은 누구인가
4·3 당시 제주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숨어 지내
거나 피난생활을 하다 당국의 귀순 권고에 따라
하산한 뒤, 또는 밭에서 농사를 짓다 군·경에 끌
려간 뒤 집단수용소에 수용됐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고 1948년 12월(1차)과
1949년 6~7월(2차) 열린 군사재판(군법회의)을
거쳐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야 했다. 섬사람들의
70년 ‘빨간딱지’ 서둘러 떼어주길
허호준 <한겨레> 선임기자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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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지는 ‘육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죄
명은 커녕 형량도 몰랐다.
어디로 떠났는지조차 몰랐던 가족들은 어느 날
엽서나 편지를 통해 그리운 가족의 소식을 들었
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이마저도 끊겼다. 그
리고 7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들을 ‘4·3 행방
불명인(행불인)’이라고 부른다.
국가기록원이 보관 중인 ‘수형인 명부’에는 1차
871명과 2차 1,659명 등 모두 2,530명의 인적
사항과 수형장소 등이 기록돼 있다. 군사재판에
서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된 384명을 제외한 이
들은 전국의 형무소로 뿔뿔이 흩어져 수감됐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불순분자로 몰려 상당수가
학살되거나 형무소 문이 개방되면서 행방불명됐
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표지석에는 제
주도내에서 행방불명된 이들과 일반 재판을 통
해 수감 생활을 하다 행방불명된 이들을 포함해
모두 3,973기의 표지석이 있다.
■ 재심 청구소송 쟁점은
이번 재심 청구소송은 행방불명된 당사자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6월 8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4·3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 첫 심리에 청구인들과 행불인 유가족 등이 모여들었다.
청구인과 변호인 쪽은 70여년 전 행방불명된 이
들의 사망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또 이름이나
주소가 다른 행불인들이 ‘같은 사람’(동일인)이라
는 것도 입증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도 “피고인(행불인)들이 생존
하더라도 나이가 90대 후반부터 100살이 넘어
생존 가능성은 작다. 그런데도 절차상 생존 여부
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며 이를 입증할 의견
서를 변호인 측에 요청했다.
변호인 측은 형무소 별로 사망 입증에 주력한다
는 방침이다. 재심 청구 소송을 맡은 문성윤 변
호사는 “형무소별로 당시 수감자들을 총살했다
24
는 등의 기록이 명확하게 나온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들도
있다. 재심에 앞서 행불인들이 법적으로 사망했는지를 증명하는
게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 측은 사형 집행이 이뤄진 이들에 대해서는 제주공항 등에
서 발굴된 유해의 유전자 감식 결과를 증거로 제출할 계획이다.
또 대전,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의 사망 입증은 어려움이 없는 것으
로 보고 있다. 정부가 2003년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펴낸 <2010년 상반기 조
사보고서>에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 300여 명 가운
데 한국전쟁 이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200여 명이 수감돼 있던 대구형무소에서도 전쟁 직후 군에
인계됐다고 나와 있다.
문 변호사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 곳에 수감됐던 분들도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4·3평화공원에 행불인 표지석이 설치돼 있
고, 수십 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행불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온 바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입증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동일인’ 문제와 관련된 경우는 전체 수형인의 15% 정도로 추정되
고 있다. 문 변호사는 “당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이름이나 주소를 일부러 바꾼 경우가 있는데, 동일인 입증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1월 이른바 ‘수형 생존자’들이 제기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무죄 판결이나 다름없는 ‘공소기각’ 결정을 받아낸 것과는 달리 이
번 재심 청구소송은 당사자들의 부재로 배우자나 직계 유족들이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당사자가 없기 때문에 행불인들의
상황에 대한 법정 증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배우자나 직계 자손들이 재판에 참여했지만 당사자가 아닌 유족
들은 대부분 전해들은 이야기이고, 직접 당시 현장을 목격한 경우
는 많지 않기 때문에 유족들이 대신 그들의 억울함을 입증해야 하
는 어려움이 있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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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내 3973기의 행방불명인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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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심 절차 어떻게
행불인들의 사망이 입증된 뒤에야 재심 개시 여
부를 결정하는 절차에 들어간다. 사망 사실이 법
원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수형 생존자’들
에 대한 재심과 같은 순서를 밟을 것으로 보인
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4·3
당시 불법적으로 제주도민들을 끌고가 국가시설
에 수감했다. 이들이 행방불명됐다면, 이의 입증
책임도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앞서 지난해 1월 법원은 4·3 수형 생존자 18명
이 낸 재심 청구소송 재판에서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을 했다. 이들의 범죄사실을 구체적으
로 밝히지 않은 채 재판에 회부한 만큼 공소 제
기 자체가 무효라는 취지였다. 문 변호사는 “당
시 갓난아기였던 청구인들보다는 행불인 당사자
들에 대해 증언을 잘할 수 있는 동생이나 배우자
또는 확실한 증언이 가능한 자녀들을 선별해 증
언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해결방안은
이번 재심 청구소송이 승소하면 또 다른 행불인
유족들의 재심 청구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재판부도 이 부분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6월 열
린 첫 심리에서 있었던 재판부의 질문에서도 이
런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재판부는 변호
인에게 “4·3특별법의 국회 처리가 어떻게 되고
4·3평화공원내 행불인 표석을 찾은 유족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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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사건과 관
련한 국회 입법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이 교수는 “과거사와 관련한 확정판결
을 다투는 방식은 재심이다. 제주4·3 당시 군사
재판이 재심을 청구해야 할 유효한 판결로 성립
하는지가 문제이다. 이 때문에 제주4·3유족회와
관련 단체들은 입법을 통해 군사재판 전체를 무
효로 하는 방안을 요구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김광우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은 “이
번 재심 청구소송이 원활히 이뤄져 우리 유족들
이 맺힌 한이 풀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변호사는 “당사자가 있는 수형 생존자들의 재
심 청구보다 이번 재심 청구소송이 몇 배나 어렵
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제주 지역구 오영훈, 위성곤,
송재호 의원은 7월 27일 국회의원 133명의 서
명을 받고 희생자 보상, 군사재판 무효화 등이
담긴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했다. 지
난 20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됐던 개정안이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지 주목된다. 제주4·3유족과 도
민사회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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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_ 4·3평화문학상
“그들의 아픔, 문학으로 치유되길”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에 변희수 · 김여정씨
시 · 논픽션 부문에 선정…상금 4000만원 수여
변희수 시인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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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 시인(1963년생·여·경남 밀양)과 김여정씨(1974년생·여·전남 영암)가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6월 20일 제주4·3
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해 시 부문 당
선작가 변희수 시인과 논픽션 부문 당선작가 김여정씨에게 상패와 상금(각 2천만
원)을 수여했다.
김여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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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문학
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현기영)가 주
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주관하
는 이번 시상식에서는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수상작가와 가족,
현기영 운영위원장, 송승문 4·3희
생자유족회장 등 20명 내외의 최소
인원만 참석했다.
양조훈 4·3평화재단이사장은 인사
말을 통해 “제주4·3의 지난한 진상
규명운동 과정에 현기영의 소설 <순
이삼촌>, 이산하의 시 <한라산>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4·3의 증언자
역할을 해주었다.”며 “제주4·3이 평화와 인권, 화해와 정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
로 만개하는데 4·3평화문학상이 가교가 되고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현기영 위원장은 먼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소설부문의 수상작이 나오지 않은 점에
유감을 표했다.
현 위원장은 “제주4·3을 다룬 작품들은 여러 편 있었으나 본심사에서도 밝혔듯이
소설부문의 당선작을 낼 수 없었던 이유는 4·3평화문학상이 갖는 무게가 크기 때
문”이라며 “다음 공모에서는 꼭 수상작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본다”고 말했다.
이어 “4·3 당시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시기였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오늘 두분의 여성이 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고 앞으로 4·3의 진실과 가치 확산은 여성들이 이끌어나가야 하지 않느냐.”고
웃음으로 축하를 전했다.
변희수 작가의 시 부문 당선작 ‘맑고 흰죽’은 4·3 당시 토벌대의 총탄에 턱을 잃어
버리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진아영 할머니를 다루고 있다.
현기영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장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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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먹을 수밖에 없는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비극적 사건을
되새기면서,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주어진 삶을 힘겹
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도 눈을 뗄 수 없지만 음식을 통해 쓰디
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다.
변희수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작품을 쓰는 동안 만났던 수많은 목소리와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졌다.”며 “4·3에 대한 작품을 누군
가 계속해서 쓰고 또 누군가 계속 읽는다면 진아영 할머니 등 수많은 희생자들에
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것이 문학의 가장 큰 힘이었으면 좋겠다.”고 밝
혔다.
김여정씨의 논픽션 당선작 ‘그해 여름’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에 의한 민간인 집
단학살부터 가난한 민중의 증언을 담았다. 주한미군사령부 바로 옆인 서울 용산구
왼쪽부터 현기영 운영위원장·변희수 시인·김여정 작가·양조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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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동 빈민가에서 카페를 차린 필자가 동네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을 들으며 내
용이 전개된다. 특히 당선작은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지난 2018년 제
7회 제주4·3평화문학상에서 논픽션 부문을 신설한 이후 선정된 최초의 작품으로
눈길을 모은다.
김여정씨는 “〈그해 여름〉은 한국전사에 기록되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보
광동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지난 3년 여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막걸리를 마시
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송곳처럼 박힌 이야기를 들려주신 보광동 사람들에게 감
사 인사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변희수 작가는 196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2011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해 2013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을 펴냈으며
현재 대구시교육청 창의융합교육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상식에 참석한 주요 내빈들과의 기념촬영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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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부문 당선자 김여정씨는 영국에서 대학 졸업 후 국제인권단체 및 NGO활
동가로 활동하다 용산에서 다문화 공동체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실제 보광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중 한국전쟁을 경험한 할머니들을 손님으로 만나게 돼 증언을 채
록했다고 밝혔다.
한편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은 3개 부문에 220명이 1,204편(시 1,082편 소설
112편 논픽션 10편)이 응모됐고, 소설 부문은 지난해 이어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은 제주특별자치도가 2012년 3월 제정한 이후 제8회에 이르
고 있으며, 2015년부터 제주4·3평화재단이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상금은 9천만
원(소설 5천만 원, 시 2천만 원, 논픽션 2천만 원)이다.
제주4·3평화문학상 제1회 수상작은 현택훈의 시 <곤을동>·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 제2회는 박은영의 시 <북촌리의 봄>·양영수의 소설 『불타는 섬』, 제3회는
최은묵의 시 <무명천 할머니>·장강명의 소설 『2세대 댓글부대』, 제4회는 김산의
시 <로프>·정범종의 소설 『청학』, 제5회는 박용우의 시 <검정고무신>·손원평의
소설 『1988년생』, 제6회는 정찬일의 시 <취우>·김소윤의 소설 『정난주 마리아-
잊혀진 꽃들』 ,제7회는 김병심의 시 <눈 살 때의 일>이다.
제주4·3평화재단은 8월 5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2020년 제2차 제주4·3
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날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 7월 27일 위촉된 제4
기 운영위원들에게 위촉장이 전달됐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 조례에 따라 위촉된 제4기 운영위원은 ▲홍성
수 4·3실무위원회 부위원장(당연직) ▲현기영 소설가(이하 위촉직) ▲김동윤 제주대학교
교수·평론가 ▲김윤숙 시인 ▲정지아 소설가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시인 ▲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시인 등 모두 7명이며 임기는 3년이다. 현기영 운영위원장이
제4기 운영위원장에 재임됐으며, 부위원장에는 허영선 4·3연구소장이 추대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제9회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계획과 공모안을 심의했다.
보광동 골목길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이곳 토박이들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50년 여름, 한강다리 폭격과 미군 융단폭격에
서 살아남은 보광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보고자 한 것이 ‘그해 여름’의 기
획의도였다.
보광동이란 지명의 의미는 ‘널리, 두루 빛나는 동네’였다. 하지만, 용산 미8군
기지와 근접한 동네이거나 이태원 이웃동네로만 알려진 마을이다. 최근에 들어
서야 보광동은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보광동이 간직한 마을역사가 아닌 단
군이래 최대의 재개발 사업이라는 ‘한남 뉴타운 3구역’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토박이들의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논픽션 부문 당선작
그해 여름 프롤로그
34
김여정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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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깊은 밤, 보광동 사람들은 한강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었다.
잠결에 놀란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강에서는 섬광이 솟구치고 있었다.
끊어진 다리 위로는 경찰 트럭과 사람들이 깊은 한강 물속으로 떨어지고 있었
다. 다리가 끊어진 줄 모르고 내달리는 트럭도 물속으로 떨어졌다. 한강다리가
끊어지면서 보광동 사람들의 피난길도 막혔다.
1950년 7월 16일, 오키나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29 47대는 용산지역 일대
를 대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5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용산역
은 초토화되었다. 보광동 사람들은 독 안에 든 생쥐처럼 미군의 대규모 융단 폭
격을 견뎌내야 했다. 마을은 초토화됐다. 피할 곳 없는 사람들은 인근 공동묘지
에 토굴을 파고 목숨을 유지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의 한강도하작전이
시작되면서 보광동은 또다시 폭격을
맞았다. 마을에는 온전한 건물이 없
었다.
미군이 용산 기지에 진주한 이후에
야 마을은 생기를 되찾았다. 아이들
은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초콜릿을
얻어먹었고 구두를 닦았다. 기치촌
여성들도 마을로 몰려들었다. 전쟁
이 끝난 직후에는 갈 곳 없는 피난민
이 공동묘지에 터를 잡았다. 상이용
사 촌이 생겼다. 이촌향도한 전국의
사람들이 보광동으로 모여들었다. 보광동 토박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에게 항상 너른 품을 내어주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성 소수자나 이슬람 공동체
도 보듬어 품었다. 보광동 카페에서 토박이들의 삶의 굴곡과 주름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향후 5년 안에 보광동은 한남뉴타운
재개발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해 여름’은 보광동과 이별을 앞둔 이웃들이 남
기는 마지막 고별사이다.
※ 그해 여름 전문은 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음
그해 여름의 주인공인
보광동 어르신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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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전승 4·3·2·1
<기억하리> 4·3평화인권동아리
37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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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이 제72주년을 맞았다. 1948년 4월 3일 이후 72년이 흘렀지만 그 진상은 분명히 드러
나지 않고, 여전히 이념과 대립의 갈등 중심에 서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야기 한다. ‘4·3은
아직 현재 진행중’이라고. 제주4·3의 역사를 알고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이유, 잘못된 역사를 다
시는 이 땅에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민했다. “4·3의 교훈을 어떻게
세대전승 할 것인가”를.
4월 3일이 되면 가슴에 동백 배지를 달자고 했던 제주4·3 70주년부터 돌이켜 보면 변화도 느껴
진다. ‘나는 4·3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들을 추모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을 찾고 있
다. 어떠한 원칙이나 기준, 짜여진 프레임은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시선, 소통의 전달 창구를
만들어 내고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데 그 의미를 부여한다. 자발적 참여에서부터 오는
성취감, 그 성취감은 제주4·3의 역사를 알리고 함께 공감하는 추모 의식으로 번지고 있다. 기관
지 「4·3과 평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세대전승 4.3.2.1>을 기획했다.
4·3역사의 교훈을 전승하는 한걸음들이 모아져 평화로 향하는 길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그 첫
번째 세대전승의 주인공은 한림여자중학교 동아리 <기억하리> 4·3평화인권 동아리 학생들이다.
<편집자주>
송지은 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학생들이 운영한 ‘4·3의 기억속으로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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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바야흐로 팬데믹 시대다. 작년의 오늘과 오늘날
의 오늘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됐다. “코로나19
가 퍼지면 일상이 (삽시간에) 변한다”는 말에 더
욱 공감이 간다.
그러니 학교에는 학생들의 조잘거림이 들리지
않는다. 파릇파릇한 잔디 운동장에도 발 딛고
서 있는 학생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눈을 마주치며 반짝반짝
빛이 났을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다. 집에 갇힌
아이들이나,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이나,
그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매 한가지일 것이다.
제주시 한림여자중학교 <기억하리, 단장 오주현
>4·3 평화인권 동아리 학생들도 개학이 오기만
을 손꼽아 기다렸다. 2018년부터 2년 동안 4·3
을 주제로 한 교과통합 프로젝트 ‘4·3의 기억 속
으로’에 참여했던 학생 20명이 모여 올해 <기억
하리> 동아리를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아리 학생들은 마을 공동체와 제주4·3, 제주
해녀를 연결하여 생각해보기도 하고, 한림지역
마을을 돌며 마을 역사를 알아가기로 계획했다.
더불어 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닦기, 조
화꽂기 등의 봉사활동도 연계할 예정이었다. 코
로나 19가 확산되지만 않았어도 올해 더욱 활발
한 활동을 기대하던 학생들이었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동아리 담당을 맡은 이현
주 선생님이 팔을 걷어부쳤다.
조명등 ‘4·3을 영원히 잊지 않는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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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을 통해서라도 <기억하리> 동아리 학생들
이 올해 계획했던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앞으로 4·3은 그날 하루만 되새기는
역사가 아닌 항상 기억해야 하는 역사의 그날로
자리잡아야 한다’를 주제로 아이들과 소통했어요.
학생들도 비대면 교육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열심히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동아리 학생들은 온라인을 통해서 제주4·3의 역
사를 스스로 공부하고 자신만의 작품을 하나씩
완성해갔다. 이현주 선생님의 도움은 동아리 활
동을 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아쉬움을 덜어주는
단비가 됐다. 제주도 지도 안에 4·3의 의미를 담
아 낸 금속배지(앰블러), 4·3과 동백꽃의 이미
지를 형상화한 엽서, 타조알을 이용해 만든 ‘4·3
을 영원히 잊지 않는 등불’ 조명등, 제주4·3의 역
사를 그린 만화와 포스터... 다양한 작품들이 탄
생했다. 이 작품들은 문을 열지 못하는 학교 안
‘4·3의 기억속으로 전시관’에 하나, 둘씩 모아져
학생들을 기다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개학!
‘4·3의 기억속으로 전시관’도 활짝 문을 열었다.
전교생들이 동아리 학생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작
품을 감상하며, 다시금 제주4·3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학교 교정에는 ‘애기 동백나무’를 식재했고, 예쁜
꽃들을 심어 한림여중만의 작은 동백동산을 꾸몄
다. 꽃이 활짝 핀 동백동산은 친구들과 셀카를 찍
는 포토존이 됐다. 매해 4월 3일에 진행했던 문
학작품 ‘순이삼촌’ 속 음식을 구현한 4·3급식은
지난 6월 10일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학생들
이 학교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제주4·3의 역사
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2018년부터 시작한
4·3교과통합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결과이자 변
화다. 아이들이 제주4·3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내면화하여 작품으로 발현했는지, 동아리 학생들
이 만들어 낸 전시를 통해 한눈에 살펴볼 수 있
다.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단장 오주현(3학년) 학
생은 전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미술 시간에 그려볼 4·3작품을 조사하면서 백비
의 의미를 알게 됐고, 사회시간에 고 노무현 대통
령의 프로필을 작성하면서 4·3희생자들에게 사과
한 것이 너무 인상 깊었어요. ‘4·3을 친구들에게
알릴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4·3을 상징하는 백
비에 평화의 문구를 새기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
어요. 저와 동아리 친구들이 만든 작품을 통해 제
주4·3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좋겠
어요.”
<기억하리> 4·3 평화인권 동아리는 올해 처음
만들어졌지만, 1학년부터 4·3을 주제로 한 교과
통합 프로젝트 활동을 한 선배들은 3년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해이기도 하다.
3년 동안 배우고 느낀 제주4·3의 역사를 정리하
고, 그 결과물들을 전시하는 과정은 학생들에게
큰 성취감을 줬다. 학부모님과 마을 주민들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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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시를 관람하며 제주4·3의 역사를 바라보는 아이
들의 시선을 공유했다. 놀라움과 대견함이 교차
한다.
포항에서 제주로 이주하여 온 이채원(3학년) 학
생은 “4·3평화공원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마을인
다랑쉬굴도 직접 찾아가 이장님으로부터 4·3이
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 후로 제주4·3에 대해
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극적으
로 참여하게 됐고, 동아리까지 만들게 돼서 굉장
히 뿌듯해요. 그간 저의 생각이 자란것도 있겠지
만 4·3이 대한민국 전체의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졌어요.”라고 소감을 전달했다.
학생들은 2학기 개학을 하면 더 다채로운 활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현주 선생님은 학
생들이 일상 속에서도 4·3과 현재, 미래를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더욱 고민하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취재진에게 학
생들이 한마음으로 이야기했다.
“4·3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설픈 위로보다는 공
감을 하려고 했습니다. 공감을 하며 다른 시간의
그들과 같이 살아가려 했고, 4·3희생자들과 유족
들의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희가 제주
4·3을 통해 화해와 용서, 평화를 배움으로써 4·3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향한 우리의 진심이 끊임없
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질 그날을 만들기 위한 <세대전
승 4·3·2·1>의 카운트 다운이 이제 시작됐다.
학생들이 학교 교정에 심은 ‘애기 동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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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_ 기억과 기록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 지점에서 핵폭탄 ‘리틀 보이’가 터진다.
반경 1.6㎞ 지점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폭파되며 히로시마 시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8시 5분 피카동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번쩍했던 기억은 없지만 떨어지는 소리는
굉장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얼른 뛰어나가 돌계단을 내려가면 두 동의 화
장실이 있었는데 거기 도달한 순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히로코씨의 증언이다.
일본정부는 이 같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대표적으로 히
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원폭피해의 실상을 알리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쪽의 역사만 기억하는 일본
조미영 여행작가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제주4·3연구소 연구원으로 4·3유해발굴사업을 총괄했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축제와 문화기획자이기도 하다. 2011년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기록을
담은 「인도차이나-낯선 눈으로 보다」를 출간하며 현재 여행작가로 활동중이다.
기억과 기록 ③ 일본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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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원폭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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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했던 당시의 사진과 유물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
서도 한편에는 피폭 당시 자전거를 타고 있던 신이치가 끝까지 잡고 있던 세발자
전거 이야기나 피폭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린 사다코가 소원을 빌며 접었다는 종
이학 등의 처절한 사연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들 이야기는 문학작품 혹은 영
화 등으로 전파되어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히로시마
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마중한 소녀들에게 종이학을 건넨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지기 직전의 시간에 멈춰있는 시계와 아이들의 사진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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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에게 각인된 역사는 원자폭탄 투하 이후의 처참함이다. 그로
인해 일본은 어느덧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이 되어버렸다. 평화기념관 어디에도 전
쟁의 원인과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수많은 나라들의 피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의 상징과도 같은 원폭돔은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
는 의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은 앙상한 골격의 원폭돔
뒤에 숨어 자신들의 역사를 은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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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코씨는 본인과 딸 등이 피폭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하다. 그러기에 더욱 반전,
반핵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80세가 넘은 그녀가 집회에 나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아베수상은 히로시마에 와도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습니다. 평
화를 위해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베정권이 자꾸 헌법을 바꾸려고 해서 정
말 마음이 아픕니다.”
사키마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 오키나와 전도 중 한편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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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피해를 담보로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
다. 결국 전쟁은 피해국은 물론 가해국의 국민들까지 모두 피해자일 뿐이다.
2019년 6월 23일 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에서는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사를 이어가는 아베수상의 발언
에 주민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오키나와 북부 헤노코에 미 공군기지가 들어
서는 것에 오키나와 주민 71,7%가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의견을 무시
한 채 사업을 강행하는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최후의 격전지였다. 80일 간
의 전투로 약 19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오키나와 주민이 약 12만 명으로 일본
군의 총알받이가 되어 희생되었다. 전쟁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인해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1972년까지 미국령이 되어 었었다. 오키나와인들은
전쟁 이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3등 국민의 설움을 받고 있는 탓에 평화에 대한
그들의 바람은 매우 간절하다. 그러나 오키나와에는 많은 미군기지가 있다.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70%가 이 작은 섬에 있다. 오키나와의 사키마 미술관은
후텐마 미국기지와 경계를 맞닿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사키마 마치오 관장은 일
본의 식민주의적 행태와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이곳에 미술관을 지었다
고 한다. 사키마 미술관의 대표작인 ‘오키나와 전도’에는 전쟁 당시의 끔직한 이야
기들이 담겨있다. 이 그림을 그린 마루키 부부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
로 자신들이 해석한 전쟁을 표현했다. 죽음과 삶 그리고 여백을 통한 추모의 공간
까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야외 옥상은 23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게 설계되어 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1945년 6월 23일의 의미에 맞춘 것이다. 일몰의 강한 빛줄
기가 이 계단으로 쏟아지는 매년 6월 23일이면 이 곳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무뎌지는 전쟁의 기억을 각인시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히
메유리 기념관에 더 많은 애착을 갖는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당한 여
학생들을 위한 기념공간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간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여학
생들이 전쟁 막바지에 포로로 잡히게 되자 집단자결을 했던 장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는 전쟁 직후 전국으로 퍼지며 유명해지고 이후 소설,
공연, 영화 등의 소재가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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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기념관의 방문객이 연간 50만 명이 넘는데 대부분
이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일본인들은 종종 이 히메유리
기념관을 통해 여학생들의 죽음을 감성적으로 접근하곤 한다. 하
지만 이 기념관을 세운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다음은 히메유리
기념관의 학예사의 말이다.
“당시 히메유리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해야 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요, 그 결과 전쟁터로 가서 일본군과 미국
군의 지상전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정말로 무참한 상
황을 경험하고 전쟁의 실태를 전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전해야한다는 생각에 전쟁과 평화에 대
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맹목적 교육에 의해 강요된 죽음을 고발하는 것은 ‘오키나와 전도’
를 그린 마루키 부부도 강조한 부분이다. 그들 역시 죽음을 당연
히 받아들여 부부 혹은 부모가 서로 죽고 죽이는 비인간적 살육의
현장과 죽음 대신 항복을 선언하여 살육의 현장을 피해간 이들을
비교하여 그렸다.
하지만 역사를 왜곡, 은폐하고자 하는 이들은 진실은 덮어 놓은
채 희생을 미화하고 정당화 하며 추모라는 허울로 포장한다. 정치
적 행보를 위해 죽음을 정당화하는 추모의 방식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하는 이유다.
“전쟁의 폭풍이 휘몰아쳐 잿더미로 변한 ‘우리들의 섬 우치나(오
키나와)’ 현민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전쟁의 부조
리와 잔혹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로부터 74년. 꺼림칙한 기
다양한 국적의 말로 평화를 기원하며 적은 글들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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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에 마음을 닫은 전쟁체험자의 무거운 입에서 후세에 전하고자
구전되는 증언 등을 접할 때 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전
쟁은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결의를 새롭게 합니다.”
위와 같은 오키나와현지사의 추도사에서 보듯 전쟁은 어떤 경우
에도 미화할 수 없는 죄악이다.
한편 이날 한 켠에서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
한 위령제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를 주도한 이들은 일본인들이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입장과 달리 전쟁을 일으킨 과거를 반성하며
국적에 상관없이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평화공원 내 위령비에는
일본인 오키나와인, 미국인, 영국인, 대만인, 한국인 그리고 북한사
람들의 이름까지 꼼꼼히 새겨져 있다. 위령제를 주도한 오키모토
후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화요, 평화는 오키나와에 있어서 굉장히 큰 중요한 과제입니
다. 전쟁이란 것은 사람이 일으킨 것, 그리고 일본이 동아시아
전체를 침략해서 많은 분들이 희생되셨습니다. 그에 대해선 일
본정부가 회피하고 자신들이 범한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
고 그게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일
관계는 아주 안 좋은 상태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저는 아주 부끄
럽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평화라는 것은 그런 일본이 자신
의 전쟁 책임을 확실히 자각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
주함으로써 아시아의 진정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일으킨 전쟁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이 해결은 할 수 있을 거라
고 생각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
야 합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이 모두 손을 잡고 두 번 다시 전쟁
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우리들은 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다양한 국적의 말로 평화를 기원하며 적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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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_ 4·3의 증언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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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 아버지의 ‘빨간 줄’,
여군에 들어가서 지웠어”
대담
·정리 조정희 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
사진 김영모 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정봉영 (1934년생, 제주 도두)
정봉영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지난 여름 제주북부예비검속희
생자 위령제가 열리던 용담 레포츠공원에서였다. 매해 눈에 띄
게 줄어드는 참석자들 사이에서 낯선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
왔다. “처음 오셨어요?” 짧은 한마디에 “네. 여자도 유족으로 올
릴 수 있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이런 행사가 있다는 연
락을 아무도 해주지 않아서, 나는 우리 아버지 딸인데도 유족으
로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서 … 오늘 처음 왔어요.” 원망과 아쉬
움이 긴 대답이 이어졌다. 그 후로 1년.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올해 4·3장한어버이상을 수상한 할머니에게 기념사진을 전해
주러 갔던 날. 할머니는 새로 발급받은 4·3유족증을 들고 병원
에 다녀오고 계셨다. 더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또렷한 기억으로
할머니의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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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보약 빨아먹고 10년만에 태어난 아기
이름은 정봉영. 1934년생이니까 올해 여든일곱. 일본에서 태어났어. 우리 아버지
가 오사카시 이쿠노구 이카이노에서 ‘조마에’(錠前)공장이라고, 통쇠(자물쇠)공장
전무로 일을 했거든. 큰아버지와 샛아버지가 ‘오야붕’(책임자)이었고. 열여섯에 결
혼한 우리 엄마는 남편도 없이 도두리에서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10년 만에야 일
본으로 건너가 스물여섯에 나를 낳았어. 몸이 약했던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손수
달여 먹인 보약을 엄마 뱃속에서 쪽쪽 빨아먹은 나는 4kg이 넘을 정도로 튼튼하
게 태어났다고 해. 눈은 똥그랗고 살은 통통하니 우리 아버지, 서른 살에 얻은 딸
이 얼마나 예뻤을 거야?
귀향_ “범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어!”
“조센진” 소리에도 기죽지 않고 이카이노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나는 열 세 살에
야 제주에 들어왔어. 제주로 돌아오기 전,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이코마야마(生駒山) 산중에 있는 어떤 절로 향했어. 졸졸졸 시냇물 소리를 들으
며 걷다가 바람에 실려오는 향 냄새를 맡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아, 동생들 때리지
말아야지’ 마음이 순해지는 거야. 절에 도착했더니 일본 스님이 기도를 하고 있었
어. 제주로 돌아가게 됐다는 아버지에게 스님은 “범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어!
가면 안돼!” 무섭게 얘기 했어. 하지만 일본에 남겠다는 두 형들을 대신해 부모님
을 모셔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데리고 제주행 배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우리 아버진
무슨 생각이었을까?
불타버린 집_ 남겨진 어머니의 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도두리에 새로 집을 지었어. 1년도 채 못 살고 그 난
리에 다 타버렸지만. 1949년 1월 1일 새벽. 산으로 올라오라는 삐라가 마당에 뿌
려지더니, 결국 그놈들이 우리 집에 불을 붙여버렸어. 새벽 2시쯤 됐을까? 갑자기
창밖이 훤해지더니 찰칵찰칵 군화 소리. “팍!” 문이 부서지는 소리야. 순간 나는
손에 잡히는 전등 화로로 어머니 머리를 탁 쳤어. 목이 콱 막혀서 “폭도 왔다!” 소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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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안 나오더라고. 눈이 땡그래진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안고 뛰쳐나갔고, 5살
남동생은 집 뒤에 있던 통시 안으로 뛰어들었어. 아이가 돼지굴로 들어가니 돼지
들이 놀래서 꽥꽥 뛰쳐나올 거 아니? 돼지는 불에 타 죽었지만, 통시 안으로 숨어
든 동생은 그렇게 목숨을 건졌어. 집은 점점 불바다가 되어 가는데, 어머니가 갑
자기 “애기 안아시라” 두살 남동생을 나에게 건네주고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거
야. 잠시 뒤 어머니가 우뚝! 둘러매고 나온 건 옷과 이불을 넣어두던 궤였어. 당신
이 시집올 때 해왔다는 궤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어머니. 옷과 이불은 이미 폭
도 놈들이 다 털어가버린 뒤였지만, 궤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의 절실함이었
을까? 어머니는 불구덩이 속에서 궤 두개를 끄집어내 마당으로 던지는 엄청난 괴
력을 보여줬어. 벌건 불기둥과 검은 연기 속에 재로 변해버린 우리 집. 어머니의
궤만 덩그러니 마당에 남겨졌어.
젊은 시절 일본에서의 아버지 모습. 맨 오른쪽이 정봉영 할머니의 아버지 고(故)정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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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 연행, 또 연행
“독립운동 하면서 목숨도 바치는데, 동네일 좀 봐 달라”는 마을 어른들의 부탁을
아버지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어. 마을 이장, 도두국민학교 후원회장을 맡아 열심
히 봉사하고 있는데, 그 사태가 터져버린 거야.
하루는 주민들을 모두 도두국민학교로 집합시켰어. 어른들은 학교 운동장 마당
에, 어린 애들은 운동장 옆 밭에 앉혀놓더니, 눈에 흰 천을 감은 남자 어른 10여
명을 끌고 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조건 총살이야.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없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총살이 아니라 능지처참을 시키더라고. 그냥 두드려
패는 거야.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나중에 동네 할아버지 한 명이 아버지를 어깨
에 메고 지른지른 끌고 왔더라니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버린 아버지 몸
에 어머니는 소주 한 병을 들이붓기 시작했어. 맷독을 빼려는 거지. 살이 찢어지
고 터지고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아버지를 두어 달 동안 소주를 뿌려가며 겨우 살
려놨더니, 세상에 또 잡아가는 거야.
새벽 2시쯤.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집으로 들이닥쳐서는 “정만종” 이름을 부르더니
다짜고짜 아버지를 끌고 갔어. 아침이 되자 천만다행으로 아버지가 매도 안 맞고
멀쩡히 돌아온 거야. 순경 중 한 명이 우리 할아버지 정 훈장한테 천자문을 배웠
던 학생이었던 거지. “형님, 이 지에무시(트럭) 타면 저 연병장에 강 다 죽여붑니
다. 빨리 가붑서”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온 걸 기뻐할 새도 없었어. “아이고, 봉영
이 아버지는 살아오고 우리 남편은 안오는거 보니까 분명 죽여부렀구나!” 동네 아
주머니가 우리 집 마당에서 머리를 헤불쳐 놓고 울고불고 난리가 난 거야. 지나가
는 사람이고 뭐고 동네가 떠들썩하게 울어대니 순경이 다시 아버지를 잡아갈 거
아니?
목포형무소 모범수 석방
지금 관덕정이 옛날 경찰서 바로 그 자리야. 경찰서로 잡혀간 아버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목포형무소에서 면회를 오라는 엽서가 온 거
야. 무슨 용기였을까? 글도 모르는 어머니는 엽서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혼자서
목포까지 갔다 왔어.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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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니네 아방은 망치로 돌 깨멍 이서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모범수로 복역 중이라며
안심하는 듯 보였어. 집에 있으면 언제 다시 잡혀가 개죽음 당할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는 게 다행이다 싶었던 거겠지. 어머니의 지극정성 기도 덕
분이었을까? 징역살이를 하던 아버지는 6·25가 터지기 직전, 거짓말처럼 집으
로 돌아왔어.
수형인명부 상 정봉영의 아버지 정만종(鄭萬宗, 20세)은 군사재판(군법회의)에 회부
되어 1948년 12월 15일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목포형무소에 복역했다. 목포형무
소에서 복역 중이던 정만종은 1949년 10월 16일 ‘우량 수형자 석방령’에 의해 조기
에 석방된 것으로 보인다.(목포형무소 「종결신분장보존부」, 1949)
예비검속 그리고 행방불명
6·25가 터지자 아버지는 “한질 터져버렸다”는 말을 했어.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
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아무튼 한질 터지고 3일 만에 아버지는 또 잡혀갔어. 이번
에도 관덕정 마당에 갇혔어. 갈아입을 옷을 들고 면회를 갔던 어머니가 가져온 아
4·3당시 불타버린 집에서 어머니가 꺼내온 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일한 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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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 옷에서 나던 송장냄새. 땀에 찌들어 썩다 못해 송장냄새가 진동을 했어. 그
리곤 한 달이 채 되기도 전 “봉영이 아방 7월 초나흘 날 죽었수다” 아버지 친구가
전해준 그 한 마디 뿐이야. 언제 어디에서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아버지가 돌
아가셨는지, 정말 7월 4일 날 돌아가신 게 맞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 지금 제사
도 생일날 지내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 바다에서 죽은 것만은 확실해.
꿈에서도 붙잡지 못한 아버지
한번은 꿈을 꿨어. 내가 아버지랑 같이 택시를 타고 있었어. 택시는 동문로타리를
지나 여객선을 타는 부두 쪽으로 달리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뒷자석에 앉아있
던 아버지가 사라진거야. 순간 저 동촌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고 아버지는
벌써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내가 아버지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잡을 수가 있나? 어림도 없지. 깨어보니 꿈이더라고. 온 몸은 식은땀 범벅이
고 발탁하게 옷이 젖어있었어.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다고만 생각
이 돼.
여군 복무 당시 제주에서 같이 입대한 동기생들과 함께. 둘째 줄 맨 왼쪽이 정봉영 할머니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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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사람 죽여난 칼로 밥을 지어먹고
폭도 놈들이 버리고 간 칼을 주워다 무도 썰고 감자도 썰고. 사람 죽여난 그 칼로
밥을 지어먹을 정도로 막막하게 살았어. 제주에서 태어난 막내 동생이 굶어 죽자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내가 6남매 맏이였거든. 아버지도 없는 집에서 어머니
와 남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나는 8촌 삼촌네 집으로 식모살이를 갔어. 1년 남
짓 일을 했나? 삼촌이 서부두 장공장에 취직을 시켜주더라고. 콩을 불려서 큰 나
무통에 넣고 기계로 쪄서 된장, 고추장을 만드는 공장이었어. 보름에 한번은 고
추장도 주고, 보름에 한번은 된장도 주고, 또 작은 월급이라도 꼬빡 꼬박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매일매일 배가 고팠어. 삶은 콩을 훔쳐 먹으며 버티는데, 여군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들려. 군대에 가서 5년만 봉사를 하면 나중에 타자수로 취직
할 수 있다는 거야! 평생 장공장에서 고추장 된장 나르며 살 수는 없잖아. 타자수
가 어디야?
19살. 여군이 되다
나라 사랑이 뭔지 나는 그런 거 몰라. 일본에서도 조센진이라고 무시만 당했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진 않았거든. 사람을 총 쏘아 죽이고, 죽창으로 칼로 찔러 죽
이고, 돌로 쳐서 죽여버리는 데 나라 사랑이란 게 있을 수가 있어? 아버지 ‘빨간
줄’ 때문에 폭도 가족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고. ‘내가 군인으로 가서 빨갱이 누명
을 벗어야지!’ 그 생각으로 여군에 지원했어. 육군 11기생. 제주도에서만 60명
이 같이 갔어. 아버지가 잡혀가서 매 맞고 형무소로 보내지고, 바다에 내던져졌
던 그 관덕정 마당에서 나는 도지사와 주민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출정식을
한거야. 내 나이 열아홉. 논산훈련소와 광주 상무대에서 훈련을 거쳐 통신병으
로 복무했어. 아버지 ‘빨간 줄’ 때문에 간첩이라고 특무대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
면서도 8년을 복무하고 1960년에 제대했어. 군대에 왜 왔냐는 조사를 나한테만
하더라고. 칠판에 ‘애국(愛國)’이라고 써놓고. 그래도 군대라도 갔다 오니까 ‘빨간
줄’이 지워져 다행히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지. 서울대학교 나온 우리 아들 미
국 회사 들어갈 때 조사를 많이 받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건, 우리 아버지 ‘빨간
줄’을 내가 여군에 들어가서 지웠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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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중심에 있었던
오라마을
강봉수 제주작가회의 회원
기획 _ 4·3유적
오라동은 내가 태어나서 현재까지 반백년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터이며 나는 할아버지 선대로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 중에
토박이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일구시던 옹도왓 지경
에 있는 밭에서 콩검질을 메다가 손을 베었다. 깨진 사기그릇 파
편에 손을 밴 것이다. 깨진 사기그릇 파편들이 밭 이곳저곳에 흩
어져 있었다. 피 맛을 본지라 한마디 안하고 넘길 수 없었다. “아
버지 밭에 무슨 사금파리가 영 하꽈?”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이
러했다. “이 밧에 초가집이 이서 나신디 소삼에 불에 카불지 않해
시냐, 그 때 세간살이도 부시닥질 나멍 사금파리가 생긴거주”
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소삼이 뭔디 집에 불이 날
말이우꽈” 반문을 하자 아버지는 “옛날에 그런 것이 셔 났져” 말
을 줄였다. 같이 검질을 매던 어머니가 옆에서 “소삼은 니네 아방
열 살쯤 되던 해에 일어난 사건인디 산에서 폭도들이 내려왕 사람
덜을 막 죽여븐 일이 셔났져, 그 때 당시 웃드르 마을 초가집들이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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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주민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던 역사를 아는 이들은 많을까.
연미마을회관 앞 표석과 안내판이 당시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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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에 카불어신예, 사름도 하영 죽엇주. 그
때 이 밭디 싯던 집들도 불에 탕 으서진 거주
게. 폭도 때문에 집이 불에 타고 사람도 많이
죽고 을도 사라져신예” 덜컥 겁이 나 더 들
어보지 못했다. 부모님도 더 말하고 싶지 않
은 듯 했다.
그 후로 소삼은 내게 폭도, 방화, 죽음으로 각
인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 이전
에 이미 소삼이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
금은 사라진 민속이지만 40여년 전만 하더라
도 한 올래질에 붙은 어느 집이든지 제사가
있는 날이면 파제를 하기 전에 집집마다 제사
음식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제사음식을 나
눌 정도가 되면 모두가 삼촌 당이었다. 그
당시는 먹을 것이 귀하기도 했지만 쌀 밥 구
경은 제삿날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
절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당집 제삿날을 귀
신같이 기억했다가 잠도 안자고 기다렸던 때
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올래질 끝
한질에 붙어 있는 삼촌네 집에서 제사를 하는
것 같은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반 태우러 오는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에겐 말도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살펴봤지만
시께반은 꼴을 구경할 수 없었다. 어머니 반
응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시께 반이 왔으면
떡이라도 남겨두었을 텐데 아무런 말이 없었
다. 결국 배고픈 놈이 먼저 입을 연다고 “태
중이 하르방 ○○삼춘네 시께떡 안 가져와십
디강, 우리집 제사 때는 그 삼촌네 집에 반을
태우는데 그 삼촌에 어제 제사를 헌거 닮은디
반을 안 태왐수다 예”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
는데 어머니가 그 말을 알아듣고 “그 제사는
가메기 모른 시께여” 나는 대뜸 “가메기 모
른 시께가 뭐꽈”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어머
니는 귀찮은 듯 “아무도 모르게 이녁네만 허
는 제사가 싯져, 그걸 가메기 모른 시께렌 헌
다. 아는 채 허지말라” 그래도 제사는 제사인
데 반을 태우지 않는 것은 그 집광 사이가 안
좋아진 일이 있어서 반을 나누지 않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그 삼춘네광 구저진 일이 싯수
과” 반문을 했더니 “그 삼춘네 외가 쪽에 소
삼에 죽은 사름이 셩 까마귀 구신도 모르게
시께를 지내느녜, 경허난 제사허듯 촐리지 안
행 솔제기 지내는 제사라서 반을 태우지 안
허는 거난 경 알라” 소삼이 뭐길래 죽은 사람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할까.
3·1발포사건으로 시작된
오라리 비극
“그 때가 그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덕정에
서 죽을 뻔 헌 일이 셔 낫주. 3·1운동을 기념
헌덴 허영 관덕정에 사름이 하영 모인 때라.
그 때는 내가 오라 1동에 살아신디 마을 동네
성들과 또래 친구덜 대여섯 명이 디 구경을
가신디 와싸와싸 허명 많은 사름덜이 줄 지성
뛰는 걸 구경허는디 갑자기 망루에서 총소리
가 난게 마는 바로 조꼿디에 상 구경허던 동
네 형이 총에 맞아 죽어서, 겁이 나난 나는 앞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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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
뒤 돌아 볼 르도 읏이 도망을 청 영 살앗
주”(아버지 강상순의 증언)
오라동의 비극은 1947년 3·1 발포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날 관덕정 광장 발포로 모두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중에 2명의 사망자
(허두용 15세 학생 오라1동, 양무봉 49세 교
사 오라3동)가 오라리 주민이었다. 이 사건으
로 제주도는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경찰 발포
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
어지고 위기감을 느낀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
은 섬’이라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시위 군중도 아닌 이들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지자 마을 주민들은 격분하여
항의하던 허두문 등 마을 청년들이 경찰에 검
거되어 옥살이를 했다.
평화협상 깬 ‘오라리 방화사건’
4·3무장봉기 이후 평화회담이 있었던 하루
뒤였다. 4월 29일 연미마을에 또다시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청년들에 의해 마을 대청단장
이던 박두인과 부단장 고석종이 납치되었고,
다음날 30일에는 대청단원의 부인 강공부(23
세), 임갑생(23세)이 마을주민들에게 붙잡혀
4·3당시 미육군통신대가 촬영한 제주도 메이데이 필름 중 불타는 오라마을의 영상.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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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오름에 감금되었다가 임갑생은 탈출하여 산 밑에 수색 나온 기동경찰에 소식을 전
하여 목숨을 부지했으나 강공부 여인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져있었고 대청간부 박두
인과 고석종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강공부의 장례식은 다음날 5월 1일 마을에서 치러졌다. 시신은 경찰트럭에 실린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 9시께 ‘제기물 동산’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경찰
오라동 사평마을 경찰파출소 옛터
4.3 and Peace
63
4.3 and Peac
트럭 편으로 온 경찰 3∼5명과 서청·대청단원 30명이 함께 있었다. 장
례가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만을 태운 채 현장을 떠났다. 남아있던 30여
명의 서청· 대청단원들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마을에 진입하여 민가에
불을 질렀다. 연미마을 섯동네 허두경의 집을 시작으로 이웃해 있던 강
병일의 집에도 불을 질렀다. 이어 연미마을 중동네로 건너와 박태형, 강
윤희 집에 불을 놓은 후 마지막으로 동동네 박전형 집 등 5가구 12채의
민가주택에 불을 질렀다. 이 때 무장대도 화재 진압차 연미마을에 출동
하였는데 무장대 출동 연락을 받은 경찰대도 출동하여 총격을 가하자 화
재를 진화하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산쪽으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광경이 미군촬영반에 의해 지상과 공중에서 촬영되었다. 지상에
서는 오라리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모습, 공중에서는 불타는 연미마
을의 모습을 미군기가 촬영했다.
사건 보고를 접한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을 조사한 결과 대동청년단원
의 소행임을 확인하고 보고하였는데 미군정측과 경찰은 한사코 무장대
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경찰보고만 믿으면 되느
냐, 정 못 믿겠다면 미군·경비대·경찰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해보면 사
실이 드러날 것 아니냐”고 하였지만 미군장교는 이를 묵살하고 앞으로
해안선에서 5km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토벌을
강화하라고 명령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미군이 촬영한 ‘오라리 연미마을 방화사건’은 4·3의 평화적 해결에 찬
물을 끼얹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촬영된 이 기록 영화는 ‘제주도의 메이
데이(May Day on Jeju-do)란 제목으로 미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
다. 오라리 방화사건을 미군이 지상과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소상히 촬영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우연일까? 사전에 기획되지 않은 무장대의 소
행이었다면 오라리 방화현장을 미군이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촬영하
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명명돼 4·3을 공산주의
자들이 벌인 폭동으로 조작하기 위해 사전에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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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5·10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에 초점을 맞춘
미군정의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리 마을도 4·3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1948년 11월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 전역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오라
리도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11월 5일 오라1동(모오동) 공회당 아래쪽에
있는 밭에서 주민 7명이 토벌대에 의해 집단 총살을 당했다. 집단총살은
누군가에 의해 지목된 마을 주민들이었다. 이때 주민 일곱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을 했다. 5명이 먼저 쓰러지고 난 나머지 두명도 같은 방
법으로 총살하였다. 한 발의 총알로 몇사람까지 죽일 수 있는지 마치 시
험총살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오라리는 3·1발포사건부터 4·3이 끝날
때까지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끝임없이 인명 피해를 입었다.
소개령에 의해 오라리 연미마을, 정실마을, 고지래마을, 선달벵듸 등 주
민 1,000여 명이 해안지대 마을이나 제주읍내, 오라1동, 사평마을, 월구
마을 등으로 흩어져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살던 집은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이 때 사라진 마을은 정실마을(70호), 연미마을(150호), 고
지래마을(11호), 선달벵듸마을(7호), 해산이마을(10호), 옹도왓마을(5호),
어우눌마을(23호), 남새마을(7호), 귀아랑 등 10여 개 자연마을에 이른다.
이후 복구되지 못하고 사라진 마을도 고지래, 선달뱅듸, 어우눌, 해산이,
옹도왓, 남새마을 등 6개 마을이나 된다. 4·3과 관련해 오라리 마을에
서 희생된 주민은 총 24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제 오라동은 자동차들
이 지나다니기에도 버거운 마을이 되었다. 길은 예전 그대로인데 아파트
와 연립이 난립하면서 조용했던 마을이 소음에 찌들고 있다. 새로 이주
해 오는 주민들은 오라동이 품고 있는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좁은 길
만 탓하며 아우성이다. 토박이로 살아온 주민들의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
는다. 새로운 점령군처럼. 4·3으로 사라진 마을 위에 이미 높다란 건물
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켜내고 끌어 안아야 할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대신에 거대한 비석이 자리를 틀고 그날의 아픔을 다시 후벼 파고
있다. 제주도민들의 염원인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전부개정
4.3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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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국회 발의에 오라동 출신 송승문 제주4·3
희생자유족회장이 발 벗고 뛰고 있다. 송 회
장이 오랜 시간 어느 누구보다 이 일에 땀 흘
려 온 것은 할머니, 어머니가 겪은 고통이 다
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특히 미
군정에 의해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어진 사
실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지금 무엇보다 중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외세의 억
압에서 조국의 평화가 유린당하고 희생되어
선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4·3당시 잃어버린 마을 ‘어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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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령골의 기억전쟁
박만순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가 한국전쟁 70
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골령골의 기억전쟁>을
출간했다.
<골령골의 기억전쟁>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대전형무소 재소
자들에 대한 진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
시 대전형무소는 전국 주요 정치·사상범의 집
결지로 제주4·3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들 상
당수가 수감돼있었다. 저자는 유형별로 피해자
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50여 명의 유족 및 사건
목격자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인터뷰했다.
제1부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
맹원, 부역 혐의자를. 제2부에서는 4·3사건 관련
자를, 제3부에서는 여순사건 관련자를, 제4부에
서는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과 그 밖에 잊힐 뻔했
던 학살사건 사례를 다뤘다.
도서출판 고두미,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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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온 책
더 아일랜더
한림화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도민들의 희로애
락을 담아낸 소설이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제주출신 한림화 소설가가 최근 신작 <더 아일랜
더-바람섬이 전하는 이야기>를 펴냈다. 이번 소
설에는 제주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문화가 살
아 있던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 12편이 실
렸다. 제주4·3과 일제강점기, 목축과 방목의 풍
습, 전통 놀이와 민속 등 다양한 글감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한국의 아픈 현대사인 제주4·3을 둘
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소설 속에는 선무공
작에 걸려 토벌대 총에 죽은 막내딸과 그 죽음을
잊고 물구덕을 진 채 산으로 향하는 치매 걸린
노모, 무자년 난리에 죽어간 사람들이 빛으로 환
생해 내려오는 찰나의 순간을 사진에 담고자 한
빛사농바치,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된 중국인민군
과 모슬포 소녀 등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해 흥
미를 돋운다. 도서출판 한그루, 1만2000원.
4.3 and Peace
67
4.3 and Peac
우리에게 기억할 것이 있다
박래군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우리에게 기억할 것이 있
다>는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을 찾고,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한 답사기다.
제주4·3, 광주5·18, 세월호 참사의 절절한 현
장부터 서대문형무소, 남산과 남영동 고문실, 소
록도까지 여행 정보가 가득한 다른 일반적인 여
행기와는 달리 역사적인 사건이나 현장을 인권
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중점
을 뒀다. 답사는 제주도부터 시작된다.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해체된 지 한참 지난
21세기까지도 걸핏하면 ‘빨갱이’니 ‘좌익’이니
‘종북’이니 하는 이념의 틀 안에 갇힌 답답한 현
실은 여기서부터 형성되었고, 대한민국 인권의
역사도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도서출판 클, 1만8000원.
노근리는 살아있다
정구도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의 <노근리는
살아있다>는 노근리사건 진실규명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70년 역사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피난길에 오른 충북 주곡
리 및 임계리 주민들을 노근리 쌍굴 다리에서 학
살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해야 했
던 피해자들의 진실규명도 쉽지 않았다. 세계패권
국이자 한국전쟁과 경제발전 원조, 민주화 등에
영향을 끼친 미국의 책임을 묻기에 벽은 높았고
맹목적인 숭미(崇美)주의자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
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다윗
과 골리앗의 싸움 등 모두가 가망없다고 여기는
싸움에서 분투해왔고 한미 양국의 노근리사건조
사 등을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 책은 과거사 해
결과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도서출판 노근리국제평화재단, 비매품.
68
NEWS
4·3 FOUNDATION
“어르신들의 한 없는 그날을 위해”
4·3트라우마센터 5월 개소 이후 성황리 운영
이용객 ‘97.7%’ 만족 높아…강정마을 주민 치유도
4·3트라우마센터 치유 프로그램 ‘4·3이야기마당’ 진행 모습. 사진=김가민 사진작가
69
4·3 and Peace
Vol. 40
“4·3이야기를 어디에서도 속 시원하게 해보지 못했는데 나와 같은 경
험을 한 사람들과 한껏 울고 털어놓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습니다”
70
NEWS
4·3 FOUNDATION
김모 할머니(76·제주시 조천읍)는 4·3트라우마
센터 치유 프로그램인 ‘4·3이야기마당’에 참여
한 후 이같은 소감을 남겼다. 강모 할머니(89·
서귀포시 표선읍)도 치유프로그램이 있는 수요
일이 기다려진다는 내용의 편지를 4·3트라우마
센터에 전했다.
제주4·3 유족 등 과거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설립된 4·3트라
우마센터가 도민사회의 호응에 힘입어 운영되고
있다.
센터 개소 두달만에 4·3트라우마센터 이용객의
97.7%가 치유 프로그램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
4·3트라우마센터는 지난 5월 제주시 나라키움
제주복합관사(옛 세무서)에서 문을 연 이후 280
명이 등록하고, 누적인원 1,374명이 방문했다.
시설 이용 건수는 3,461건으로 집계됐다.
센터에서는 상담, 도수 및 물리치료, 운동 프로그
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지난
6월부터는 4·3이야기마당, 예술치유 집단프로
그램(원예, 음악, 명상, 문학 등) 등이 추가됐다.
이중 4·3이야기마당이 단연 인기가 높다. 매주
금요일 4·3유족 10명 내외로 모여 4·3당시 이
야기와 구성원 간의 경험을 공유하는 프로그램
이다. 4·3유족들의 한맺힌 사연속에는 아물지
않은 고통과 슬픔이 서려있다.
정영은 4·3트라우마센터장은 “4·3이야기마당
은 4·3유족들이 함께 아픔을 풀어놓음으로써 마
음의 평화를 가지게 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한 방
법”이라며 “크게 보면 집단 상담의 효과를 가진
다”고 밝혔다.
4·3평화재단은 4·3트라우마센터 수요자를 국가
폭력으로 인한 치유대상자 1만8500여명뿐만 아
니라 세월호 관련 트라우마 피해자까지 점차 확
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 원거리 이용자와 고령유족 등을 위한 방문 치
유서비스도 병행할 예정이다. 한편 4·3트라우마
센터는 민군복합형 제주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4·3이야기마당에서 4·3당시 군인에 의해 희생당한 아버
지, 총상을 입은 언니와 자신의 사연을 말하고 있는 강일
병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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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야기된 갈등으로 상처를 입은 주민들의 치유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26일에는 강정마을부녀회
를 대상으로 웃음치유, 4·3유적지기행, 상효원 숲
치유 등을 진행했다.
김정숙 강정마을 부녀회장은 “평소에 지나쳐도
몰랐을 영남마을의 동네 곳곳과 주둔소 등 4·3유
적지에 대해 알게 돼서 회원들과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며 “마을공동체 회복과 주민·이주민의 돈
독함은 말을 꺼내는 대화에서 비롯되는 것 같은
데 4·3트라우마센터의 치유 프로그램이 그런 점
에서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자주 함께하고 싶다”
고 소감을 전했다.
센터내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받고 있는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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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① 원예치유 프로그램에서 완성한 화분을 들고 기념촬영
② 영남마을 4·3유적지 기행 중 단체기념촬영
③ 강정마을 마음치유프로그램 중 상효원에서 진행된 숲치유
프로그램
④ 웃음치유프로그램 중 서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참가자들
①
③
②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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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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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불법적인 군사재판 무효,
피해자 보상 제시
7월 8일 제주4·3특별법 개정을 위한 제주지역 토론회
21대 국회에서 발의될 4·3특별법 개정안이 일부 공개
된 가운데 도내 각계각층에서 제시한 불법적인 군사재
판 무효화, 피해자 보상 등이 주목을 받았다.
오영훈(제주시을)·위성곤(서귀포시)·송재호(제주시갑)
국회의원과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송승문), 제주
4·3특별법 개정 쟁취 공동행동은 7월 8일 제주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을 위한 제주지역 토
론회’를 열었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6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 결과를
바탕으로 4·3특별법 개정안의 조항을 공개하고 제주지
역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다.
오영훈 의원은 인사말을 통해 “저번 국회 토론회에 이어
이번 토론회도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에 대
한 필요성과 당위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관심을 확대하
는 디딤돌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는 △추가진상조사를 진전시키기 위해 진상결
과를 포함한 위원회 활동 매년 정기국회 보고 의무화 △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배·보상 기준 제시 △군사재판
무효화 조치와 범죄기록 삭제 △일반재판에 대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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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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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기록 삭제 △행방불명자에 대한 사망신고의 간
소화·호적정리에 따른 민법 의제조항 삽입 △
희생자 및 유족의 체계적 관리를 위해 개인정보
자료의 이용 절차마련 등이 새롭게 담겼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4·3범국민
위원회 법개정특위위원장)는 ‘제주4·3특별법의
개정방향’ 주제발표를 통해 개정안 최대 쟁점인
4·3당시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에 대한 법률 명
시를 강조했다.
이재승 교수는 “제주4·3군사재판의 희생자는
2530명에 이른다(일반재판의 피해자는 1600명)"
며 "최근 재심과정에 의하면 제주4·3군사재판과
정에는 적법한 조사절차, 공소제기, 재판 판결문
등이 모두 결여돼 있고 해당 희생자에게 죄목과
형량을 표시한 수형인 명부만이 남아 있는데, 이
러한 군사적 처분은 초사법적 약식 또는 자의적
처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2차 세계대전 후 나치독일의 악명높은 정
치재판의 무효화 등을 언급하며 일반재판의 무
효화 가능성도 제시했다. 그러면서 “제주4·3군
사재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성립, 부존재
에 준하는 의미에서 무효 확인을 국회가 해줘야
하고 군사재판의 무효확인은 가장 품위있는 해
결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개정안에는 보상대상을 사망자, 행방
불명자, 후유장애인, 수형인으로 정했으며, 보상
금 지급 기준을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
인 집단희생 사건 판결에 따른 배상금 평균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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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명시했다.
이어 마련된 토론회에서는 이규배 제주국제대
교수를 좌장으로 △강성민 제주도의원 △김성도
제주4·3희생자유족회 법개정 특위위원장 △양
동윤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 △허영선 제주
4·3연구소장 △김종민 전 국무총리실 소속 4·3
위원회 전문위원 △송시우 제주고등학교 교사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이 나
서 의견을 제시했다.
강성민 제주도의원은 “4·3특별법 개정을 위
한 시기적 목표를 명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며 “개인적으로는 정기국회 기간에 법을 개정해
4·3수형인 학살 70주년인 올해 4·3수형인 희생
자와 유족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민 전 전문위원은 “지금이 4·3특별법 개정
의 적기”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말에 접어
들며 얘기가 달라질 수 있고 중요한 사안의 경우
차기 대선주자한테 역할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
이 도래할 수 있으며 제주4·3을 타지역 과거사
문제와 함께 묶어서 같이 진행하자는 의견도 나
올 수 있기 때문에 조속한 4·3특별법 개정이 필
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4·3특별
법은 일반 법령이 아닌 특별법이기 때문에 더욱
우선적인 바람을 담은 조항에 집중해 개정돼야
한다.”며 “불법 재판 무효화, 배·보상 관련을 비
롯해 4·3유족의 범위를 정하는 가족관계 기준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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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공간을 채워나간다. ‘순이삼촌’이 실제로 등장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묵직한 이야기속 감정의 높낮이를 달리하며 전개되는 오페라가 보는
이들의 몰입을 이끈다.
지난 6월 20일 제주4·3평화재단이 제주시와 공동으로 제작한 4·3창작오페라 ‘순이
삼촌’ 갈라콘서트다. 이날 제주아트센터에서 펼쳐진 공연은 코로나 19로 부득이 제
작진과 언론 등 소수에게만 공개됐으며 온라인 홍보를 위해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오페라 ‘순이삼촌’ 첫 선
6월 20일 4·3평화재단 · 제주아트센터 갈라콘서트
10월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오페라 공연 예정
창작오페라 ‘순이삼촌’ 갈라콘서트 제작·출연진 단체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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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은 현기영 소설가의 소설 ‘순이
삼촌’을 원작으로 하며, 4·3당시 ‘북촌리 사건’ 학살현장
에서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
는 순이삼촌의 삶을 다뤘다.
‘순이삼촌’을 오페라로 재탄생시키는데는 수많은 도내
예술가들이 공을 들였다.
전체 출연자가 240여 명에 이르는 대형 오페라로 주요
배역은 ‘순이삼촌’ 역에 소프라노 강혜명·강정아, ‘상수’
테너 이정원·이경호, ‘장교’ 베이스 박경준·정용택·
김승철, ‘할머니’ 메조소프라노 신성희·추희명, ‘고모부’
바리톤 장성일·김광정, ‘큰아버지’ 바리톤 이대범·양
석진·오준희 등이 무대에 오른다.
대본 김수열 시인, 연출 및 각본은 강혜명 소프라노가
맡았으며 극단 가람과 도립제주합창단 등이 중심으로
국내·외 성악가 및 무용단이 출연했다. 무대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던 북촌리를 재현하며 원작 ‘순이삼촌’의
무게감을 그대로 살렸다. 여기에 서곡 ‘레드 아일랜드’,
‘예나제나 죽은 마을’, ‘살아시난 다 살아진다’ 등의 오페
라와 아리아,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장면은
70여 년전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향후 10월 14일 저녁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이 펼쳐진다.
‘순이삼촌’을 열연하고 있는
강혜명 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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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4·3을 이겨낸 모든 어버이들께
4·3평화재단 수상자 30명 가정 직접 방문, 4·3어버이상 전달
수상자 가정에서 각각 진행된 4·3어버이상 전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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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제주4·3의 고난을 극복하고 도민사회 발전에 기
여한 어르신들에게 4·3어버이상이 전달됐다.
제주4·3평화재단은 올해 4·3어버이상 수상자로
선정된 어르신 30명(생존수형인 3명, 후유장애
인 3명, 4·3희생자의 배우자 5명, 고령유족 19
명)에게 4·3어버이상 표창패, 부상금 100만원,
꽃바구니, 기념품 등을 각각 전달했다. 당초 4·3
어버이상 상패와 상금은 6월 27일 개최될 시상
식에서 전달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행사
가 취소되면서 직접 수상자의 자택을 방문 전달
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이를 위해 4·3평화재단 임직원들과 송승문 4·3
희생자유족회장은 도내 수상자 29명의 자택을
직접 방문해 상패와 상금 등을 전달했고 도외 수
상자 1명에게는 우편발송했다.
매년 열리던 시상식 행사가 비록 취소됐지만 직
접 자택으로 상패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상자
어르신들과 가족들은 반갑게 맞이했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중 4·3당시 열아홉살로 남편이 희
생당한 이후 홀로 고생하며 아들을 키워왔던 이
기생 할머니(92세)는 연신 눈가를 훔쳤다.
이기생 할머니는 “비 날씨에 상패를 전달하느라
모두 고생많으셨다”며 “가족들과 잊지 못할 추
억을 만들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양조훈 이사장은 “코로나19로 행사를 열지 못해
어르신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며 “항상 건
강하시고 내년에도 4·3유족을 위한 행사에 꼭
모시겠다”고 위로했다.
한편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2009년부터 4·3
의 아픔을 극복하고 고통의 세월을 이겨낸 분들
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제주특
별자치도, 4·3희생자유족회, 4·3생존희생자후
유장애인협회 등에서 추천을 받아 4·3어버이상
을 시상하고 있다.
▲생존희생자(수형인) : △김두황(93세) △장병식(91세) △오희춘(88세)
▲생존희생자(후유장애인) : △박춘실(90세) △부순녀(87세) △오태순(87세)
▲희생자의 배우자 : △윤옥희(100세) △문신영(99세) △이기생(92세) △신정자(91세) △이은규(89세)
▲고령유족 : △고달윤(86세) △고영숙(86세) △김경생(87세) △김동희(88세) △김병희(86세)
△김양순(86세) △김정하(88세) △문정어(85세) △변춘화(93세) △안옥생(86세)
△양선옥(88세) △양유길(88세) △이상하(85세) △정봉영(87세) △정성용(85세)
△조수용(90세) △진찬훈(85세) △송태휘(87세) △양정윤(91세)
< 수상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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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
화되는 가운데 4·3평화재단의 ‘찾아가는 어린이
체험관’이 체험관을 방문하지 못하는 어린이들
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6월 2일부터 30일까지 도내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1~4학년) 30곳을
직접 방문하고 2,800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체험
교구재를 제공했다.
‘찾아가는 어린이 체험관’은 코로나19로 4·3어
린이체험관 예약이 취소된 도내 어린이집, 유치
원,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사전 신청을 받아 어린
이들이 소속 기관에서 자체적으로 4·3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이를 위해 4·3어린이체험관은 어린이들이 ▲동
고사리손으로 평화를 꽃 피우다
4·3평화재단 6~7월 <찾아가는 어린이체험관>
도내 30곳 대상 교구재 제공…후기 호평 잇따라
김녕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직접 만든 동백꽃 목걸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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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백꽃 목걸이 ▲스크래치 보드 엽서 ▲흔들리는 까마귀 ▲
스티커 방사탑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직접 신
청기관을 방문한 후 교구재를 제공했다.
교구재를 제공받은 담당교사들과 어린이들은 체험활동
사진과 체험 후기 등을 통해 찾아가는 어린이체험관에 대
한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강정초등학교 고혜림 교사는 “4·3어린이체험관에서 체험
교구재를 제공해 준 덕분에 체험관을 방문하지 못하는 아
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며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4·3
교육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후기를 전했으며, 아
라초등학교 양은영 교사는 “동백꽃 목걸이를 함께 만들면
서 평화의 소중함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의미있는 시
간이었다.”고 호평했다.
김녕초의 김정아 교사도 “85명의 1~2학년 학생들이 동
백꽃과 방사탑을 만드는 간단한 체험이었지만 4·3을 생
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코로
나에 지친 어린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다”고 고마
움을 전했다.
이같은 호응에 힘입어 4·3평화재단은 7월 한달간 ‘찾아
가는 어린이체험관’을 연장했다. 이번에는 전국 유아·초
등단체 등을 대상으로 개별 접수를 받았으며 도내 26곳,
도외 34곳 등 모두 60곳에 우편발송으로 체험 교구재를
제공했다. 이와 함께 7~8월에는 도내 초등학교를 직접
방문해서 어린이 4·3교육 프로그램을 시연하는 현장교육
을 진행했다. 모두 138명의 학생들에게 제주4·3을 통한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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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작가의 역사적 세계관이 미술로 발현되는 제주4·3미술제, 4·3을 주제로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실험적이며 새로운 예술이 4·3평화기념관에서 펼쳐
졌다. 탐라미술인협회(대표 양미경)는 지난 7월 5일부터 8월 2일까지 제
주4·3평화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제주4·3 72주년 제27회 4·3미술제
래일(來日·RAIL)을 진행했다.
전시주제 ‘래일’은 깊은 의미를 가졌다. 앞으로 도래할 날을 의미하는 단
어로서의 來日과 철제의 궤도를 뜻하는 Rail이 바로 그것이다. 상생의 삶
을 위해 길을 내기와 다리 놓기 등으로 미래를 향한 작가들의 희망을 엿
볼 수 있는 자리다. 지난 2월부터 4·3유적지를 탐사하는 워크워크토크
(Walk Work Talk)로 제주4·3에 대한 통찰과 작가 고유의 예술적 감각
4·3예술, 틀에서 벗어나자
탐라미술인협회 7월 5일~8월 2일 제27회 4·3미술제 ‘래일’
전시를 주최한 탐라미술인협회 작가들과의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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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을 맞물리는 과정에서 역량을 높인 작품들이 출
품했다. 이번 전시에는 도내작가 30명, 도외작
가 24명, 해외작가 3명 등 모두 57명의 작가들
이 참여했으며 전시장에는 조각·설치·판화·
사진·영상·회화작품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탐라미술인협회 관계자는 “작가는 언
제나 진부하지 않은 새로움이 무엇인지 그에 대
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정성과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인다”며 그것이 우리가 4·3미술제를 지속해
나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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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노근리의 비극, 평화의 섬 제주서 기억되다
4·3평화재단 8월 23일까지 노근리사건 70주년 기념 전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이하 노근리사건)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노근리사건을 알리는 전국
순회전시가 제주에서 열렸다.
제주4·3평화재단과 영동예총은 지난 8월 10일
~ 8월 23일까지 4·3평화기념관 2층 기획전시
실에서 ‘노근리 70’ 특별전시를 진행했다.
노근리사건은 19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
이 피난길에 오른 충북 주곡리 및 임계리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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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을 노근리 쌍굴 다리에 머물도록 명령하고 사격을 가해 300여 명을 희생시킨 사건이
다.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1990년대 노근리양
민학살대책위원회와 국내외 언론 등이 사건을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된 역사이기도 하
다. 이번 전시는 ‘기록과 재생’으로 기억되는 노근리사건을 주제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
기에 전쟁의 아픔과 이념 갈등으로 희생의 흔적을 알리는 것에 집중했다.
이와 함께 노근리 사건 70년 속에 희생자 중심으로 고증하고 밝혀가는 과정을 아카이
빙 자료 및 예술작품으로 승화했다.
한편 이번 순회전은 노근리사건 7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행정안전부에서 후원하는
사업이다.
지난 6월 19일 영동군 노근리국제평화재단에서 전시를 시작으로, 7월 17일에는 서울
에 있는 K·P갤러리에서 진행했고, 제주를 거쳐 오는 9월 25일부터 10월 8일까지 부
산민주공원에서, 10월16일부터 10월25일까지 광주 5·18기념재단에서 개최될 예정
이다.
정구도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이사장이 노근리진상규명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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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4·3 FOUNDATION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8월 20일 4·3
평화기념관에서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
4·3유족회장의 4·3자료 기증식을 가졌
다. 이날 양봉천 전 회장은 2003년 4·3
현의합장묘 유해발굴 및 하관식 등을 기
록한 비디오테이프 32점을 기증했다.
'현의합장묘'는 1949년 1월 10일과 12
일 남원읍 의귀초등학교에 주둔 중이던
토벌대에 의해 집단학살된 의귀·수망·
한남리 주민 80여명을 추모하기 위한 곳
으로 3개의 구덩이에 매장됐던 구묘역의
유해를 현재의 자리로 이묘해 2003년 위
령공원으로 조성됐다.
기증된 테이프에는 이묘할 당시의 유해
발굴작업과 이후 해마다 진행된 추도식
의 제례과정들이 담겼다. 양봉천 전 회장
은 “민간차원으로서 처음으로 현의합장
묘 발굴작업을 한데다 순간순간의 장면
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하려는 마
음으로 촬영을 시작했다”며 “기증된 자료
들이 4·3연구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
다”고 말했다.
제주4·3평화재단은 기증된 테이프들을
아카이브 자료로 보관하는 한편 내용을 파일로
변환해 4·3평화기념관 온·오프라인 이용자들
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필름에 담긴 현의합장묘의 기록을 건네다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4·3유족회장의 4·3자료 기증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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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
평화재단은 지난 7월 31일 4·3평화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 ‘4·3과 미디어’라는 주제로 학술세
미나를 열었다. 이번 세미나는 4·3 72주년을 전
후한 멀티미디어 시기속 과거사에 대한 미디어
의 역할과 기능을 탐구하고, 이를 지역에 반영하
는 방안 등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
다. 제1주제에서는 <제주지역 방송의 4·3프로그
램 현황 분석>이라는 주제로 이문교 전 제주4·3
평화재단 이사장(전 언론인)의 발표가, 제2주제
에서는 <유튜브는 어떻게 제주4·3의 기억을 불
러오는가?>라는 주제로 정용복 언론학 박사의
발표가 이어졌다.
제3주제에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
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불온삐라 인쇄
사건 기록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고영철 언론
개혁제주시민포럼 대표(제주대학교 명예교수)가
발표했으며 토론에는 김계춘 전 제주매일 주필,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허호준 한겨레 선임기자가 의견을 제시했다.
미디어 속 제주4·3을 들여다보다
4·3평화재단·(사)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
90
NEWS
4·3 FOUNDATION
제주4·3 희생자·유족 자녀들에게 장학금 2천
5백만원이 전달됐다.
제주4·3평화재단은 6월 20일 제주4·3평화기
념관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업에 전념
하고 있는 4·3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
했다. 이번 수여식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
해 장학생들과 가족을 비롯해 박창욱 4·3중앙
위원,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등 최소인원
만 참석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올해 4·3장학생
은 대학생 10명, 고등학생 10명 등 모두 20명
이며, 대학생에게는 200만원이, 고등학생에게
는 50만원이 각각 지급됐다. 이중 양보윤 학생
(서강대)은 지난 2016년 4·3장학기금 1억원을
쾌척한 박창욱 4·3중앙위원의 ‘덕산(德山) 박창
욱 장학금’을 받았다.(사진 아래)
4·3희생자 유족 자녀 장학금 2천5백만원 전달
4·3평화재단 6월 20일 대학생·고등학생 20명 장학증서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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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김원준 신임 제주지방경찰청장이 지난 8월 11
일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제주4·3 희생자들
을 추모했다. 제주경찰 수뇌부 참배로는 지난해
1월 이상철 경찰청장이 처음으로 공식 참배한
뒤, 김병구 경찰청장에 이어 세 번째다. 이날 김
청장은 제주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의 안
내로 위령제단을 참배하며 72주년을 맞은 제주
4·3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겼다. 특히 양 이사
장으로부터 2013년 제주경우회와 유족회의 화
해와 상생 선언에 대해 전해 듣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참배를 마친 김 청장은 방명록에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기억합니다. 희생되신 영령
들과 유가족 분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를 보
냅니다. 제주경찰은 언제나 도민들과 함께 하겠
습니다.”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또 “2013년 프
랑스 주재관으로 재직할 때 폴란드의 유태인
학살장 아우슈비츠를 방문, 충격을 받은 바 있
는데 오늘 그 현장이 연상된다”면서 “후세 교육
을 위해서 4·3평화공원이 그 역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주경찰은 4·3의 아픔을 기억합니다”
김원준 신임 경찰청장 8월 11일 4·3평화공원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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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 KBS제주총국장 2020. 05. 19
고정화 제주특별자치도 재향경우회장 2020. 05. 27
김정학 제주도개발공사 사장 2020. 06. 16
이세키 요시야스 주제주일본국총영사 2020. 05. 22
KF 연수사업 참여 외교관 2020. 05. 28
박성진 광주고검장 2020.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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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배객
“4·3 영령들이시여, 편히 눈감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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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Vol. 40
왕루신 주제주 중국총영사 2020. 06. 22
김태엽 신임 서귀포시장 2020. 07. 01
제11대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2020. 07. 14
안동우 신임 제주시장 2020. 07. 01
제11대 제주도의회 후반기 상임위원회 2020. 07. 05
이낙연·김부겸·박주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
2020. 07. 25
“4·3 영령들이시여, 편히 눈감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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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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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문학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보다
6월 5일~30일 4·3문학 아카이브 기획전 <지문>
‘한라산’ 이산하 시인 대담…문학의 역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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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제주4·3 문학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봄으로써 제주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가 도민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제주도, 제주민예총, 제주작가회의는 지난 6월
5일부터 30일까지 제주시 원도심 관덕정 인근에 위치한 ‘포지션 민 제주’에서 4·3
4·3문학아카이브 전시. 사진=이디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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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항쟁 72주년 4·3문화예술축전 '4·3문학 아카이
브 기획전 - 지문'을 열었다.
전시명 '지문'은 글자 그대로 문학으로 새겨온 '지
문(紙紋)'이면서 제주 섬 땅의 역사를 문학의 언
어로 기억하고자 한 '지문(誌文)'의 의미를 가졌
다. 또 제주 4·3문학의 정체성이 새겨진 '지문(指
紋)'인 동시에 제주 땅이 살아온 땅의 무늬 '지문
(地紋)'이라고 주최측은 설명했다.
전시는 제주4·3문학을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
했다.
이수형의 '산사람들'이 발표된 1948년부터 1978
년까지 시기,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필두로 한
1978∼1987년, 1987년 6월 항쟁 후 4·3 진
상규명 운동의 불씨를 당긴 문학, 1999년 제주
4·3특별법 국회 통과 이후 문학순으로 정리됐
다. 이번 전시회에는 제주4·3의 증언자 역할을
해왔던 제주 4·3문학의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
졌다.
특히 1987년 제주4·3을 항쟁적 시각에서 그린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한 뒤 체포됐던 이산
하 시인의 최후진술서, 항소이유서 등이 눈길을
끌었으며 1980년대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제
주 4·3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청년문학운동의
모습도 소개됐다. 전시회 개막일에는 이산하 시
인과 김수열 시인이 '천둥같은 그리움'이라는 이
름으로 대담을 가졌다.
‘한라산 필화사건’의 당사자인 이산하 시인은 ‘한
라산’을 쓰고 1987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1
년 6개월 형을 받으며 고초를 겪었던 과거를 증
언했다.
이산하 시인은 “시를 쓰고 책이 나온다는 것은
관련자 모두가 구속되고 회사가 공중분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당시 생각에는 4·3으로 미국
문제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
다”고 말했다.
이후 출판사 사장과 편집장이 구속된 후 안기부,
보안사 등으로부터 도피생활을 전전했지만 결국
붙잡혀 물고문을 당한 사연도 풀어놨다. 그러면
서 4·3의 진실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이산하 시인은 “나는 4·3에 있어서 라이터 하나
정도의 작은 불에 불과하고 그 불을 어떻게 활용
하는 지는 제주도민의 몫”이라며 “소설 ‘순이삼
촌’은 피해자의 관점이라면 ‘한라산’은 항쟁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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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이산하 시인(왼쪽)과 김수열 시인의 대담
다룬 시로 4·3문학은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
은 영역을 도전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제주4·3 당시 희생당한 영혼들이 편
하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는데 유태
인 추모비에서 무릎 꿇은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
처럼 미국 대통령이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앞에
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한다”며 “4·3에 결정
적인 영향을 끼친 미군 제임스 하우스만에 대해
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주문했
다. 대담이 끝난 후에는 제주 시인들이 1987년
결성한 제주청년문학회의 공동창작시 ‘용강 마
을, 그 피어린 세월’을 낭독하며 행사를 마무리지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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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3,973명의 억울한 영혼들을 기리며
7월 18일 제19회 제주4·3행방불명희생자 진혼제
제주4·3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 3,973명의 영
혼들을 기리는 진혼제가 열렸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유족협의회(회장
김광우)는 지난 7월 18일 제주4·3평화공원 행방
불명인 묘역에서 제19회 제주4·3행방불명희생
자 진혼제를 봉행했다.
올해 진혼제는 코로나19로 축소돼 진행됐으며
최승현 제주도 행정부지사,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 문영봉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안동우 제
주시장, 김태엽 서귀포시장, 위성곤 국회의원, 등
내·외빈과 유족 100여 명만 참석했다.
이날 진혼제는 진혼제례를 시작으로 헌화, 분향,
경과보고, 주제사, 진혼사, 추도사, 추모시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김광우 회장은 주제사를 통해 “전국 각지에 우리
부모·형제들 유골은 방치되고, 그 원한은 천지
를 진동하니 하루속히 그 원통함을 풀어달라”며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유족이 편히 눈
을 감을 수 있게 정부와 제주도가 최선을 다해달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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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and Peace
JDC, 4·3문화학술사업에 3억원 지정기탁
JDC와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6월
17일 JDC 대회의실에서 양 기관 임직
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4·3문화학술사
업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기탁금 전달식을 가졌다. 이날 JDC는
4·3문화학술사업에 3억원을 4·3평화
재단에 지정 기탁했다.
업무협약은 제주4·3 관련 문화학술사
업을 공동으로 기획·추진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
로 기탁금은 ▲제주4·3 관련 대중영화 제작을 위
한 시나리오 공모 1억 2천만 원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해설 영상 제작 8천만 원 ▲『제주4·3
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영문판 발간 1억원
등에 사용된다.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연구소는 9월까
지 도민들을 대상으로 4·3유해발굴사업을 위한
4·3희생자 유해찾기 제보를 받는다. 4·3유해발
굴사업은 정부가 4·3특별법에 근거해서 2006년
부터 201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등 제주도내 10
개소를 대상으로 추진돼왔다. 그 결과 유해 405
구가 발굴·수습되었고 이중 133구에 대해서는
유전자 감식이 이뤄져 신원확인됐다. 올해 제보
사례는 ▲4·3당시 전 가족이 몰살당해 관련 유
가족이 없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 ▲행방
불명인으로 신고돼 희생자가 되었으나 행방불
명 사유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1970~1980년대)시 복토 및 매립공사
과정에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 등을 비롯
해 기타 4·3관련 학살, 암매장을 다룬다.
문의=756-4325(제주4·3연구소)
4·3평화재단-4·3연구소 “희생자 유해 제보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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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 제주4·3희생
자유족회(회장 송승문), 제주4·3연구소(이사장
이규배, 소장 허영선)가 지난 6월 2일 ‘사랑의 헌
혈 나눔’ 행사에 동참했다.
이날 행사는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혈액
부족 사태가 지속되면서 이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각 기관·단체 30여 명이 자발적으로 나
섰다.
양조훈 이사장은 “앞으로도 4·3의 화해·상생
가치와 더불어 ‘사랑의 헌혈’ 봉사를 통해 생명
나눔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재단이 적
극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4·3평화재단-4·3유족회-4·3연구소 ‘사랑의 헌혈 나눔’ 동참
광주5·18, 4ㆍ3 모델 삼아 지방공휴일 지정
올해 제40주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이 제주4·3을 모델 삼아 광주 지방공휴일로 지
정됐다. 광주시의회는 지난 4월 22일 5·18정신
과 역사적 의미를 고양·전승·실천하고 민주·
인권·평화의 도시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광주
시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지방공휴일 지정 조
례안’을 가결했다. 이 조례안이 5월 13일 공포
되면서 제주4·3 추념일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
째의 지방공휴일이 탄생됐다. 5·18 지방공휴일
이 본격 거론된 것은 지난 3월 3일 제주4·3평
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이 이용섭 광주광역시장과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전국 상임위원장
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4·3 지방공휴일 지정 사
례를 예로 들면서 5·18 지방공휴일 지정 필요성
을 제안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이용섭 시장은 적극 동의, 지방공휴일 지정
조례안 등을 광주시의회와 논의하면서 본격적으
로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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