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강
김 종 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제주4・3과 진상규명
(제주4・3 이후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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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이후 70년
김 종 민
(전 국무총리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목 차
1. 머리말
2. 제주4·3 진상규명과 그 성과
1) 금기시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몸부림
2) 시민사회단체, 4·3진상규명운동 선도
3) 유족회의 변화와 발전
① ‘반공유족회’ 출범
② 회장단 교체로 유족회 성격 변화
③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출범…강력한 유족회의 모태
④ 유족회의 발전적 해체와 통합
4) 극우세력의 도전과 극복
3. 맺음말
<‘진실찾기 70년’ 주요 내용>
74▪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요약문>
미군정기인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비롯된 ‘제주4·3’은
1954년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 동안 지속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인구의 10%
가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제주4·3은 오랫동안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로 된서리를 맞
았다. 4·3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3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 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 정권은 4·3을 은폐·왜곡했고 아울러 철저히 금기시했다.
그럼에도 4·3진상규명의 역사는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그 맥을 같이하며 조금씩 진전돼 왔다. 제주
의 민주화운동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큰 폭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는 4·3진상규명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87년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 뿐만 아니라 4·3진상규명운동사에 큰 획을 긋
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월항쟁으로 촉발된 한국의 민주화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이에 힘입어 4·3진상규명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8년부터 본격화된 진상규명운동은 언론사와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했다. 유족들은 극단적인 반
공이데올로기에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느라 선뜻 앞에 나서지 못했다. 1998년 김대중 대
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정부 수립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자 4·3진상규
명운동이 더욱 활발히 벌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4·3특별법’을 공포함에 따라 정부 차
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해 보수정권이 출범하고 뒤이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에 의
해 보수정권이 재창출되자 정부·여당과 극우세력들은 그간의 4·3진상규명의 성과를 모두 무력화시키
려 시도했다.
하지만 2017년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해 민주정부가 탄생하자 제주4·3
문제 해결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유족과 제주도민들은 4·3진상규명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과
거의 상처를 교훈 삼아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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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5년간 계속된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벗어났으나, 곧 미군이 제주
도를 비롯한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직접 통치하는 ‘미군정’이 3년간 실시됐다.
‘제주4·3’은 바로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 즉 제28주년 3·1절 기념식과 곧이어 미군정의 실정(失
政)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날, 다른 지방에서 온 응원경찰의 무분별한 발포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
상을 당하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를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지자 미군정 경찰은 느닷없이 ‘제주도는 붉은 섬’이라 규정하며 검
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경찰과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4·3무장봉기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무려 2,500명가량의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 무렵 미군 감찰반이
“제주유치장은 최악이다. 작은 유치장 안에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 10×12피트의 한 감방 안에 35명
이 갇혀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무장봉기 한 달 전인 1948년 3월에는 마침내 사달이
나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던 청년 3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탄압의 국면’이었다.
이처럼 가혹한 탄압이 1년 넘게 지속되자 이에 저항하는 ‘항쟁의 국면’이 펼쳐졌다. 1948년 4월 3일 새
벽 2시경, 한라산 중턱에 산재해 있는 오름 정상에 일제히 봉홧불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신호로 하여 약
350명의 청년들로 구성된 무장대가 경찰지서 12곳을 동시에 공격했다. 또한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
단 등 극우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 습격해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극우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
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 무렵은 이승만과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때였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등 3개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른바 ‘모
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돼 분단
상태에 놓여있던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시키기 위해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논의 구조로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는 데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서
로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힘겨루기와 갈등 끝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남한만
의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여 앞둔 때에 4·3무장봉기가 발발한 것이다.
아무튼 무장대는 5·10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간 지역으로 올려 보냈다. 결국 제주도는 3
개의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등 2곳의 선거가 무산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무효화된 것이다. 그런데 항쟁 못지않게 탄압도 중첩돼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제주도에서 선거가 무산되자 곧이어 참혹한 ‘수난의 국면’이 전개됐다. 특히 1948년 8월 15일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남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에는 38도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제주4·3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군정 시절 제주4·3 무장봉
기가 발발하게 된 원인과 전개과정 등 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남과 북에 각각 적대적인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제주4·3은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되고 제주도민들은 더욱 더 가혹한 탄압에 직면하
게 된 것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법적 근거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1948년 11월부터 약 4개월간 벌
어진 ‘초토화작전’ 때 군·경 토벌대는 엄청난 ‘대학살’을 자행했다. 중산간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다짜고짜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집에서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
했다. 급히 피신해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점점 조여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
76▪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다. 부녀자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듯이 추운 한라산으로 향했다. 숨었던 굴이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굴 밖으로 잠시 나와 있다가 요행히 목숨을 구한 사람은 굴속에서 끌려나온 가
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숨죽여 흐느꼈다.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소개(疎開·강제 이주)한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두려움에 떨던 청년이 도망치
면 토벌대는 남아있는 가족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며 도망친 청년의 늙은 부모와 처자식을 수시로 학살했
다. 본래 해변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희생을 피해갈 수 없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장대 지원 혐의’가 있다며 청년들에게 총질을 했다.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
해 자행된 여성들의 수난은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 제주4·3 관련 주요 일지
날 짜
제 주 도
국 내
미국‧소련‧북한
47. 3. 1
경찰의 발포로 6명 사망
47. 3. 12
트루먼 독트린을 계기로 미‧소 간 냉
전 본격화
48. 3.
경찰 고문치사사건 3건 발생
48. 4. 2
미국, 주한미군을 48. 12.말까지 철수
하기로 결정
48. 4. 3
제주도에서 무장봉기 발발
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48. 8. 24
한미군사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 귀속
48. 8. 26
임시군사고문단(PMAG) 설치
48. 9.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48. 9. 15
주한미군 일부 철수 시작
48. 9. 19
소련, UN결의에 따라 북한주둔군의
연말 철수방침 밝힘
48. 9. 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48. 10. 8
제주해안 소련잠수함 출현설
이승만, 미군철수 연기 요구
48. 10. 11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48. 10. 17
해안에서 5㎞ 이상 지역에선 무조건
총살한다는 포고령
48. 10. 19
여수·순천 사건 발발
48.11.중순
강경진압작전 개시. 중산간마을 방화
와 무차별 학살 시작
48. 11. 17 불법적인 계엄령 선포
48. 12. 1
국가보안법 공포
48. 12. 12
유엔, 한국정부 승인하며 미소 양군
조속 철수 요구
48. 12. 17
미 국무부, 12월말로 예정된 주한미군
철수를 연기 요청
48. 12. 25
소련군, 북한에서 철수 완료
48. 12. 29 제주의 9연대와 대전의 2연대가 맞교대
49. 3. 2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49. 3. 22
미국, 주한미군 철수를 1949년 6월
말로 연기 결정
49. 5. 10
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49. 5. 15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해산
49. 6. 6
반민특위 습격사건
49. 6. 21
국회프락치사건
49. 6. 26
김구, 안두희에게 암살
49. 6. 30
주한미군 철수 완료(군사고문단 5백명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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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무자비한 불법 행위의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에게 있다. 이승만은 당초
1948년 12월 말로 예정된 미군 철수를 앞두고 불안정한 권력을 강화하고자 초토화작전을 자행했다. 미군
철수는 국무부의 반대로 인해 1949년 6월 말로 연기됐는데, 미군 철수 직전인 1949년 6월에는 반민족행
위처벌법에 근거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친일파 경찰의 습격을 받아 와해됐고,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 앞장
서거나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는 등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국회의원들이 남조선노동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검거되는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국민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
김구가 서북청년회 출신인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친일파반민족행
위자들을 보호했고, 국회를 겁박했으며, 또한 최대의 정적인 김구가 사라짐에 따라 미군 철수 직전에 비로
소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 역시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에 관한 책임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미군은 미군정이 끝
난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 사
이에 맺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반도에서 철수할 때까지 대한민국 군과 경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군사협정을 맺은 지 한 달여 만인 9월 29일 국무총리 겸 국
방장관인 이범석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
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츠 고
문단장은 심지어 제주 주둔 제9연대의 송요찬 연대장이 잔인한 초토화작전을 한창 벌이던 1948년 12월
18일 이범석에게 공한을 보내 “송요찬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를 신문과 대통령의 성명을 통
해 일반에 크게 알리라.”며 초토화작전을 조장했다.
무장대 지휘자가 1949년 6월 사살됨으로써 무장대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자 학살극이 잠시 멈추는 듯
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총살극이 벌어졌다. 제주도내에서는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1,000명가량의 목숨이 희생됐고, 또한 불법적이고 허구의 군사재판의 결과 전국 각지의 형
무소에 분산 수감돼 있던 약 2,500명의 제주도민이 북한 인민군에게 쫓기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1절 발포사건에서 비롯된 ‘제주4·3’은 1948년 4월 3
일의 무장봉기,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의 대학살과 1950년 6·25전쟁 때 재발한 집단학살을 거친
후에야 겨우 진정될 수 있었고, 1954년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됨에 따라 7년 7개월 만에 종결되었다. 이
와 관련,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10월 최종 확정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
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전개과정 속에
서 4·3무장봉기 당시 무장대 숫자는 350명에 불과했으나, 희생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10 가량인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는 등 재산피해도 컸고, 육체적·정신적인 후유증은 지
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한국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4·19’, ‘5·16’, ‘광주5·18’과 같은 사건들은 열흘 이내의 비교적 짧
은 기간에 벌어졌기 때문에 각자 가치관과 역사관에 따라 사건을 정의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가령 어떤
이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5·16군사쿠데타’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5·16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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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아라비아 숫자로만 표기되고 있다. ‘탄압의 국
면’, ‘항쟁의 국면’, 그리고 탄압이나 항쟁이라는 용어를 무색케 하는 엄청난 ‘수난의 국면’이 조금씩 중첩되
면서 7년 여 동안 지속된 제주4·3에 대해 어느 하나의 국면만을 특정하여 명칭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전체 희생자 중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10%가량 되는데, 이중에는 군·경과 극우청년단 뿐만 아니라 무
고한 민간인도 일부 포함돼 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보다 그 비율이 훨씬 낮지만, 무장대의 과오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는 점도 정명(正名) 붙이기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 개인사·가족사적인 체험과 기억을 넘어 보다 넓고 객관적인 시각과 깊고 길게 호흡
을 하는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4·3사건에 대해 정명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제주4·3 진상규명운동과 그 성과
1) 금기시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몸부림
제주도 인구의 1/10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오랫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
다. 4․19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로 된서리를 맞았다. 4․3진
상규명을 요구하다 옥고를 치렀고, 4․3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 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
정권은 4․3을 은폐․왜곡했고 아울러 철저히 금기시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자식’
이란 소리를 들으며 멸시를 당했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을 맨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척박한 땅위에서 몸부림쳤던 것도 결코 작
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언론이 차단된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
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제주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혔고, 중․고교 교과서에는 왜곡된 내용
이 실렸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비로소 진상규명 운동이 다시 시작됐고, 이로써 일부
나마 겨우 국민의 관심을 얻게 됐으니, 광주항쟁 때 10일간 외롭게 고립됐던 상황을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열흘’이라며 섭섭함을 표현한 한 소설가의 글을 빌린다면, 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아무도 달려
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제주도민들은 4·3진상규명과 관련해 한때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 과거 군
부정권 시절에는 정권 자체가 4․3학살의 가해자여서 이를 금기시 해 왔지만 문민정부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
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3당 합당’이라는, 군부세력과의 야합의 결과로 탄생한 문민정부는
4·3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았다. 과거 정권과 그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은 여권의 권력승계라는 한계로 변
죽만을 울리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그럼에도 4․3 진상규명의 역사는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그 맥을 같이하며 조금씩 진전돼 왔다. 아울러 제
주의 민주화운동은 4․3진상규명운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국 어느 지역보다 큰 폭으로 발전해 왔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 뿐만 아니라 4·3진상규명운동의 큰 획을 긋는 결정적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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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다. 김대중·김영삼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그해 12월 열린 대선에서 군인 출신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권 교체는 실패했으나 6월 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보
수정부냐 민주정부냐에 따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제주도민들은 6월 항쟁 직후부터 줄기차게 진상규명운동
을 벌였고 많은 성취를 이뤄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12일 마침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
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이 시작됐고, 2003년 10월 15일 정부의 공식보
고서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가 채택된 지 보름만인 2003
년 10월 31일 제주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유족과 제
주도민들에게 머리 숙여 공식 사과했다. 과거사에 대해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을 한 것은 제주4·3사건이 처
음이며, 대통령이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도 제주4·3사건이 처음이다.
이처럼 제주4·3사건은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의식과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제주 역사의 상징'
이며, 제주도민이 주체가 되어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까지 이끌어 낸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의 효시’이자, 과거
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상처를 교훈 삼아 평화와 인권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평화·인권의 상징'이
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부가 들어서자 ‘4·3진상규명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당
의원들은 4·3특별법과 4·3위원회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고, 극우세력들은 진상조사보고서 폐기와
희생자 결정을 무효로 해야 한다며 각종 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같이 제주도민들은 극우세력들의 도전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는데,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의 결과로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2017년 5월 새 정부가 탄생함에 따라 4·3진상규명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4․3발발 이후 70년간 벌어졌던 진상규명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진실찾기
70년’의 상세한 내용은 이 글 맨 뒤에 실었다).
△ 1960년: 4․19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사건 종결 6년 만에 진상규명운동 시작됨. 그러나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로 인해 탄압이 가해지면서 4․3논의는 장기간 금기시됨
△ 1978년: 초헌법적인 유신정권 시절, 작가 현기영은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해 4․3학살극을 정면으로
폭로하면서 4월혁명 이후 18년 만에 4․3논의의 물꼬를 틈. 그러나 이 소설은 곧 판금되고 현기영은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음. 또다시 4․3논의 금기시됨
△ 1987년: 제주대학교에서 약식 ‘위령제’가 열리고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가 부착된 사건으로
관련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됨.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 그러나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 실
패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돼 군부정권이 계승됨
△ 1988년: 1년 전 벌어졌던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열기와 4·3무장봉기 40주년이라는 시의성이
맞물려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됨. 제주신문사, 3월 12일 4·3특별취재반을 구성해 1년 여 간 4·3취재
함.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4·3관련 석사학위 논문 발표됨. 노태우가 2월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군부
정권 지속됐으나 4월에 열린 제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됨
△ 1989년: 4월 3일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의 「4․3의 증언」 연재 시작과 5월 10일 제주4․3연구소 설립
으로 구체적 실상에 대한 조사·연구가 시작됨. 4월 1일 제주지역 시민운동단체들이 처음으로 공개적
인 ‘4·3추모제’ 개최. 여소야대 정국과 1년 전 열린 광주청문회에 고무 받아 국회 차원의 4·3논의가
80▪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시작됨. 언론민주화 운동으로 야기된 ‘제주신문 사태’로 4·3취재반 기자들이 해고됨으로써 「4․3의 증
언」 연재 중단
△ 1990년: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던 4·3진상규명 움직임은 1990년 벽두
에 전격 단행된 ‘3당 합당’ 후 흐지부지 됨. 제민일보 창간과 더불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연
재 시작. 4·3추모제가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자 가두시위 벌어짐
△ 1992년: ‘다랑쉬 굴’에서 4·3 희생자 유해 발굴, 강요배의 4·3역사그림전 개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4·3을 다뤄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킴
△ 1993년: 제주도의회 4․3특위가 결성됨. 제주도의회와 제주대총학생회협의회가 각각 국회에 4·3특위
구성을 촉구하는 청원서 제출
△ 1994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현재는 ‘제주민예총’으로 개칭)가 결성돼 4·3관련 문화·예
술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짐
△ 1995년: 제주도의회 4․3특위, 4․3피해조사 1차보고서 발간
△ 1997년: ‘4·3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발족.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건 김대중 후보가
12월 열린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진상규명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함
△ 1998년: 4․3 50주년을 맞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짐. 각종 기념행사
개최됨. 여당인 국민회의, 당내에 4․3특위를 구성해 제주와 서울에서 공청회 개최
△ 1999년: 10월 시민사회단체 24개가 참여한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발족해 4·3특별법 제정운동에
나섬. 12월 16일 여당인 국민회의와 야당인 한나라당이 발의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
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됨
△ 2000년: 김대중 대통령, 1월 12일 ‘4·3특별법’ 공포. 8월 28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
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발족
△ 2001년: 1월 17일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 발족
△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노무현 대통령,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10월 31일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
△ 2006년: 노무현 대통령,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4·3위령제 참석하며 다시 한번 사과
△ 2007년: 제주공항에서 4·3사건 당시 총살돼 암매장된 희생자 유해 발굴
△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 3월 28일 4·3평화공원 내에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 그런데 이
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뉴라이트 출신을 중심으로 한 여당 의원들이 제주4·3특별법과 제주4·3위원회
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 발의함. 국무총리가 제주4·3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아 희생자 심사 업무 등이
중단됨
△ 2009년: 3월부터 5월까지 수구세력들이 헌법소원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 2건 등 6건의 소
송을 제기해 진상조사보고서 파기와 희생자 결정 무효화를 시도. 이 소송들은 2012년 3월까지 3년간
지속됐는데, 모두 원고 패소함으로써 수구세력들은 목적 달성에 실패함
△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보수정권이 재창출되자 수구세력들의 준동이 다시 시작됨
△ 2014년: 이승만의 양자 등 수구세력들이 ‘희생자결정 무효확인’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2009년에 이어
또다시 제기(2016년 11월 10일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됨).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4·3희생자추념일
을 국가기념일에 포함시키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의결됨으로써 4월 3일이 법정기
념일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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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3월 수구세력들이 ‘4·3평화기념관’의 전시 패널 내용에 불만을 품고 전시금지 청구소송을 제
기(2017년 1월 17일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됨)
△ 2017년: 촛불혁명으로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5월 열린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4·3진상규명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됨. 여당인 민주당, 희생자에 대한 피해보상과 불법적인 군법회
의의 무효화를 골자로 한 4·3특별법 개정안 발의
△ 2018년: 문재인 대통령, 4·3추모제에 참석해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도민에게 사과. 경
찰청, 6·25전쟁 때 예비검속자를 풀어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고, 제주지방
경찰청은 11월 1일 문형순 경찰서장의 흉상을 제작해 청사 마당에 세움
2) 시민사회단체, 4·3진상규명운동 선도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9월 6일 서울에 살고 있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이 ‘제주사회문제협의회’(이하 ‘제
사협’으로 약칭)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회장은 정윤형(홍익대 교수), 공동 부회장으로는 현기영(소설가)와
김명식(시인), 총무는 고희범(기자)이 각각 선임됐다. 제사협은 「제사협 회보」 창간호(1987. 10. 24)에서부
터 제주4·3문제를 중요 의제로 삼았다. 정윤형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제주도민들이 사회적 문제의 실천에
있어서 비교적 소극성을 띠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제주도민 모두의 가슴 속에 응
어리로 남아있는 4·3사건의 기억이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주
장하는데도 주저하게 만드는 공포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제사협 회보」에는
잡지 신천지 1948년 8월호에 실린 ‘4·3자료’로 소개하기도 했다.
창간호 발간 이후에도 「제사협 회보」는 제주4·3문제에 관해 지속적으로 의제를 제시하며 대안을 모색했
다. 특히 제사협은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제주에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끝에 1989년 5월 10일
‘제주4·3연구소’를 설립했다. 제사협 회장인 정윤형과 부회장 현기영은 제주4·3연구소의 이사장과 소장을
각각 맡음으로써 연구소 출범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재경 제주인들이 1987년 9월 6일 서울에서 제사협 창립총회를 열던 날, 제주에서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제주본부’(약칭 ‘제주국본’) 결성대회가 열렸다. 6월항쟁 이후 제주민주화운동의 핵심 역할을 한
제주국본과 서울의 제사협이 같은 날 출범했다는 것은 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1989년 1월에는 서울의 제사협이 제주국본 등 제주의 민주화운동 진영과 제주지역 대학교 총학생회 등
에 문서를 발송해 ‘4·3민중항쟁 기념행사’를 공동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결실을 맺어 1989년 4월
1일 제주시민회관에서 ‘41주기 4·3추모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대내외에 공개적으로 처음 열린 추모제이
자 위령행사였다.
1990년 4월이 다가오자 제주4·3연구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지부,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 등 10개
단체는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약칭 ‘4월제공준위’)를 구성해 ‘42주기 4월제’ 행사를 주최했다. ‘4월제공준
위’가 처음으로 구성되고 행사 명칭을 ‘4월제’로 정한 배경은 “행사는 도민대중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대중과 유리되지 않는 사업을 전개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4월제 공동개최 제안서」는 “4
월을 그냥 작년같이 추모제라는 골 좁은 형식으로 가둬놓기보다는 오늘의 정세와 맞물리면서 대중을 결집
시켜낼 수 있는 무기로써 능동적으로 끌어내야 하겠습니다”면서 “단순히 행사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향후
제주지역 민족민주운동의 단결된 힘으로 현 시기 반민주 야합의 음모를 분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82▪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90년 1월 전격 발표된 ‘3당 합당’ 때문이었다. 즉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대통
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야권의 분열로 인해 그해 12월 열린 대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군부정권이 계승되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 만인 1988년 4월에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자 야당이 정
국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민정당은 제주도민의 여론을 의식해 4·3문제 해결에 전향적 자세를 취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전격 발표된 ‘3당 합당’ 선언으로 정국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야당인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텔레비전에 나타나 합당을 선
언한 것이다. 이들 여·야 3당은 1990년 2월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으로 통합됐다. 3당합당
이후 정부의 4·3관련 약속도 모두 파기되었다. 4월제공준위가 비판한 ‘반민주 야합’이란 바로 3당합당을 지
칭한 것이다. 4월제공준위 출범을 계기로 4·3진상규명운동과 제주민주화운동은 완전히 한 몸이 되었다.
한편 1991년 43주기부터는 주최측 명칭과 행사 이름에 ‘4·3제주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이 추가돼 4월 1일
부터 7일까지 ‘4·3제주민중항쟁 43주기 사월제’가 열렸다(1993년 열린 45주기 사월제에서는 ‘4·3제주민중
항쟁’이라는 표현을 ‘제주4·3항쟁’이라고 바꿨다).
이처럼 1987년 6월항쟁 이후 4·3진상규명운동은 전적으로 시민운동단체가 선도하고 주도했다. 이때까지
만 해도 유족들은 앞에 나서지 못했다. 연좌제로 인한 피해의식과 레드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유족들은
1960년 4·19혁명 직후의 진상규명운동이 이듬해 5·16쿠데타로 좌절되면서 탄압을 받았고, 유신정권 시절
조작간첩사건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기 때문에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억눌려 있었다. 3당 합당 이후 정치권
의 진상규명 움직임이 무산되는 걸 보면서도 무덤덤하게 여겼다. 그동안의 경험이 유족들을 무기력하게 만
든 것이다.
3). 4·3유족회의 변화와 발전
① ‘반공유족회’ 출범
4·3유족회의 첫 출발은 4·3사건 때 무장대에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유족, 소위 ‘반공유족’에 의해 비
롯되었다. 1988년 10월 30일 탐라자유회관에서 150여 명의 유족이 모인 가운데 ‘제주도4·3사건 민간인반
공희생자유족회’(이하 ‘반공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반공유족회는 창립총회에 앞서 1988년 5월에 3명
이 모여 발기인 모임을 열고 반공유족회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8월 8일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
해 반공유족들의 참여를 촉구했는데, 가입 대상은 ‘4·3사건 당시 공비들에게 납치 또는 습격으로 인해 피살
된 민간인 가족’으로 제한했다. 반공유족회의 창립 배경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부터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시민사회단체의 4·3진상규명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반공유족회는 1990년 6월 5일 임원회의를 열어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이하 ‘4·3민
간인유족회’)로 조직의 명칭을 바꿨다. 반공유족회로 출범한 지 1년 7개월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개명한
까닭은 ‘반공유족’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4·3사건 희생자 중 무장대에게 희생
된 이른바 ‘반공희생자’ 숫자는 전체 희생자 중 10% 미만으로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수적 열세인 반공유족이 유족의 대표성을 갖고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선 조직 명
83
칭에서 ‘반공’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공유족회가 4·3민간인유족회로 개칭됐으나 ‘반공’이라는 조직의 성격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는 회장
단이 ‘반공유족’ 만으로 승계되었기 때문이다. 유족회의 반공 색채는 유족회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유족
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좌경세력 대처’를 조직의 목적으로 정관에 명시했다. 이를 나중에 ‘행방
불명인유족회’와 통합해 출범하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정관(목적)과 비교하면 <표>와 같다.
유족회 구분
정관(목적)
반공유족회
(1988. 10. 30.)
본회는 1945년 8·15광복 이후 4·3사건과 관련하여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을 위로하며 나아가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좌경세력에 대처함은 물론 전후세대에 대한 국민정신 함양과 회원 상
호간의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4·3을 치유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4·3희생자유족회
(2001. 3. 3.)
본회는 4·3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었거나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한 제반 사
업을 통하여 진정한 해결을 이루어내고, 그 기반 위에서 도민화합과 인권신장, 그리고 평화의 이념에
기여함은 물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유족회의 정관은 4·3사건에 대한 유족회 주도세력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4·3사건을 ‘공
산주의자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반공유족’이 유족회
를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독재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유족회는 1991년 4월 3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제1회 4·3희생자 합동위령제’를 개
최했다. 1988년 10월 창립한 이래 한 번도 위령제를 열지 않았던 유족회가 1991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
로 위령제를 한 까닭은 시민단체가 1989년부터 개최해 온 시민사회단체의 ‘추모제’에 자극을 받아 이에 대
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위령제 명칭을 ‘합동위령제’라 했는데, ‘합동’이란 단어를 넣은 것은 반공희생
자 뿐만 아니라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도 함께 위령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위령제 때마다 유족회장
은 추도사를 통해 ‘공산폭동’을 강조했다.
② 회장단 교체로 유족회 성격 변화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분들의 유족들은 오랜 세월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느라 반공유족들이 주장하
는 ‘공산폭동론’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단지 유족회라는 조직에 포함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
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1996년 반공유족으로만 구성된 회장단이 내부 분열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이 회장으로 선임됨으로써 유족회의 성격이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1996년 4월에는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합동위령제 개최를 합의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진일보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합동위령제는 1994년부터 세 번째 열리는 것이어서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지만, 유
족회가 그간의 입장과 달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4․3은 공산폭동’이라는 단순논
리만 내세우며 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유족회가 이렇게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
이 유족회 회장단이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84▪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③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출범…강력한 유족회의 모태
2000년 3월 13일에는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이하 ‘행불인유족회’)가 창립돼 향후 ‘강력한 유족회’의
모태가 되었다. 행불인유족회의 결성은 1999년 9월 15일 당시 집권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수형인명부을 발굴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수형인명부에는 4·3사
건 당시 ‘4·3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대부분 6·25전쟁 직후 학살된 제주
도민 2,530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었다.
‘4·3군법회의’라 함은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서 마치 열렸던 것처럼
허위로 자료에 기재된 군법회의를 가리킨다. 1948년 12월 군법회의의 근거가 된 ‘4·3계엄령’은 헌법의 규정
을 위반한 채 계엄법이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선포된 불법적인 것이다. 또한 1949년 6~7월의 군법회의
때 적용한 ‘국방경비법’은 제정 주체도 모호하고 법률 호수도 없는 유령법이다. 계엄령의 불법성과 국방경비
법의 유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4·3군법회의는 정상적 재판의 근거가 전혀 없는 허구의 재판이었다.
수형인명부가 발굴되기 전에도 일부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소문을 듣거나 또는 희생자들이 6·25전쟁으로 총살되기 전에 형무소에서 보내온 엽서를 통해 수감 사
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생사조차 알
수 없어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수십 년이 지나면서부터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런
데 수형인명부가 발굴됨으로써 희생자들의 수감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었고,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어느 형
무소에 수감됐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수형인 유족들은 일반적인 4·3희생자 유족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연좌제에 대한 피해의식과 레드 콤플렉
스에 시달려왔다. 어느 날 갑자기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단총살한
‘북촌리 사건’과 같은 경우는 보수인사들조차 무모한 학살극임을 인정하는 터이므로 유족들은 ‘억울함’을 토
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형인 유족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언론 취재에도 잘 응하지 않았다. ‘뭔가
죄를 졌으니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 아니냐?’는 눈총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형인명부가 공개됨으로써 희생자들이 재판 아닌 ‘엉터리 재판’으로 불범 감금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 비밀문서를 통해 수감자들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음이 확인되자 수형인
유족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1999년 12월 16일 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되는 등 진상규
명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자 조직 결성에 박차를 가해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유족들은 4·3행불인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제주공항에 암매장된 희생자의 시신 발굴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대한 순례 및 자료조사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행불인유족회는 정관에 “4·3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어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한
제반 사업을 통하여 진정한 도민화합과 새천년 제주도 공동체 건설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는
등 조직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천명한 것은 기존 4·3민간인유족회의 태도와 큰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공유족회에서 출발한 4·3민간인유족회는 8년 만에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들
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좌경세력에 대처”한다는 정관(목적)
을 바꾸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행방불명인 유족들은 오랫동안 피해의식과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일반 유족들보다 더욱 움츠러들었지
만, 스스로 멍에를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서자 가장 강력한 유족 집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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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유족회의 발전적 해체와 통합
행불인유족회가 창립되자 4·3유족들은 기존의 ‘4·3민간인유족회’와 ‘행불인유족회’로 양분되었다. 이는
두 유족회 모두에게 곧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치 두 유족회 간에 서로 갈등과 알력이 있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4·3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하나로 똘똘 뭉쳐
야할 유족들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에 두 유족회는 4·3특별법에 따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던 날인
2000년 8월 28일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어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가칭)제주도4·3사건희생자
유족회 창립위원회는 2001년 2월 28일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두 유족회의 통합을 공
식 선언했다. 두 유족회가 발전적 해체를 한 후 하나의 유족회로 새 출발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어 3월
3일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이하 ‘통합유족회’) 창립대회가 개최됨으로써 새로운 유족회가 출범했다.
한편 통합유족회는 2007년 3월 3일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라는 명칭을 ‘제주4·3희생자유족회’로
바꾸었다. 향후 4·3의 정명(正名)을 위해 ‘사건’이라는 무색무취한 단어를 뺀 것이다.
4) 극우세력의 도전과 극복
2008년 2월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여당 의원들과 극우세력들은 그동안의 4·3진상규명의 성
과를 무력화시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여당 의원들은 4·3특별법과 4·3위원회를 폐지하기 위
한 법안을 제출했고, 극우세력들은 각종 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극우세력들은 ‘제주4·3평화공원’에 대해 ‘폭
도공원’ 또는 ‘좌파양성소’라며 망언을 일삼았고, 일부 희생자에 대해 그 결정을 무효로 하라는 주장을 펴며
평화공원 앞에서 소위 ‘불량 위패 화형식’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같은 움직임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
속되었다.
극우세력들은 여당이 추진한 4·3특별법과 4·3위원회 폐지가 여론에 밀려 무산되자 2009년 3월부터 4·3
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헌법소원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2건 등 모두 6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진상조사보고서 파기와 함께 4·3특별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이미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 중 일부 사람들에 대해 그 결정을 무효로 하라는 취지였다. 이에 대해
4·3위원회의 김종민 전문위원은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과 그 법률의 ‘시행령’에 의거해
‘소송수행자’로 지정을 받아 법원에 답변서를 제출하고 법정에서 원고 측 변호사와 논쟁을 벌이는 등 만 3
년 동안 소송을 수행해 모두 승소했다.
극우세력들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해 보수정권이 재창출되자 또다시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소
송을 제기하거나, 4·3평화기념관 전시패널 내용에 불만을 품고 전시금지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끊임없이
유족들을 모욕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극우세력들의 시도는 모두 무산되었고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준동이 잦아들었다.
86▪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3. 맺음말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가을부터 시작돼 2017년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시
킨 촛불혁명은 한국현대사는 물론 4·3진상규명운동사에도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4·19혁명 직후의 진상규명운동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이듬해 벌어진 5·16쿠데타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독재가 18년 동안 지속될 때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유신 말기인 1978년 현기영이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함으로써 4·3논의의 물꼬를 트긴 했으나,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전두환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며 정권을 찬탈하고 유신 시대 때부터 시작된
간접선거,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자 4·3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87년 초 발생한 ‘대학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오랜 군부독재에 지쳐있던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그해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거대한 항쟁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 결과 12월 열린
대선은 국민 직접 투표로 실시됐다. 그러나 야권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전두환 정
권에 이어 군사정권이 지속됐다.
그런데 비록 정권교체에 실패해 민주정부가 탄생하지는 못했으나, 6월 항쟁을 통해 조성된 민주화의 진
전은 우리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4·3진상규명운동에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에 힘입어
1988년부터 학술논문이 발표됐고 각종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제주도민 스스로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해 10여 년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정부 수립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며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대로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벌어졌고,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인 2003년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다. 노 대통령은 보고서가
나온 지 보름 여 만인 10월 31일 제주도로 와서 유족과 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4‧3사건의 전개 과정은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전쟁 등 당시 한국사의 질곡을 그대로 반영하
고 있다. 마찬가지로 ‘4‧3진실찾기 70년’의 역사 또한 한국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6
월항쟁을 계기로 본격화 된 4·3진상규명운동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정부 때 큰 성과를 냈으나, 이
명박·박근혜의 보수정부 때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2017년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돼 다시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4·3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수구세력의 준동이
잦아들었다. 앞으로도 4·3진상규명운동과 그 성과는 정치·사회의 민주화 수준과 정비례할 것이다.
한편 4·3사건 때 벌어졌던 야만적 폭력의 근원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남북 분단
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4·3사건은 평화·통일·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살육이 벌어지고 있고, 강대국간 힘겨루기도 결코 끝
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은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후유증을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극복해 왔다. 이젠 남북의 평
화는 물론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평화·인권의 성지로 가꿔가야 할 것이다. 아시
아 평화교육 센터, UN평화대학, 또는 세계적인 인권센터 등 국제적 규모의 평화 관련 기구를 유치하는 등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평화지대 선포와 평화교육 의무화 등 프로그램 개발부터 관련 정
책이나 법령의 제정까지 다양한 일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제주도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해주는 완충지 또는 균형자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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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 때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몽골의 군
사기지 역할을 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는 모슬포에 비행장이 건설돼 일본군의 중국 폭격을
위한 기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은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의 본토 공격을 막기 위한 방편으
로 미국의 공격 길목으로 예상되는 제주도에 대해 “최후의 1인까지 싸워 섬을 사수하라”는 이른바 ‘결(決)
7호 작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일본군 7만명(조선인 출신 병사와 노무자 1만명 포함)을 배치했고, 제주
도 전역을 요새화했다. 실제 미군 전투기가 제주도의 일부 지역을 폭격하기도 하였는데, 일본의 항복이 조
금만 늦었더라면 제주도는 오키나와처럼 불바다로 변할 뻔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제주도가 동북아시아의 화
약고가 되느냐, 아니면 완충지가 되고 평화의 성지로 기능하느냐 하는 것은 제주도민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부는 이미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한 바 있다. 이는 4·3의 경험과 교훈이 평화의 토대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전쟁이나 물리적인 폭력이 없다는 것만으로 평화라고 말하기에는 충분치 않
다. 화해, 상생, 인권이 4·3의 상징이므로 이젠 간접적·구조적 폭력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즉 소년·소녀 가장, 독거 노인, 어린이, 장애인, 여성, 가난한 사람,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
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세계 평화의 섬’이 될 것이다.
<‘진실찾기 70년’ 주요 내용>
▶ 1960년: 4․19혁명에 힘입어 진상규명운동 시발
첫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1954년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됨으로써 사건이 종
결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열기가 무르익던 1960년 5
월 23일, 국회는 한국전쟁 당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조사단 구성을 결의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도 진상규명해야 할 것 아니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제주대
학생 7인은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고순화․고시홍․박경구․양기섭․이문교․채만화․황대정)를 결성해 자체 조사
활동에 나섰고, 모슬포에서는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결국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위는 조사 대상 지역에 제주를 포함시킬 것을 승인, 6월 6일 조사반이 내도했다.
이처럼 갑자기 국회조사단의 제주 방문이 결정되자 제주신보는 촉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희생 상황 접수를 받았고, 제주도의회나 제주시의회, 그리고 진상규명동지회도 나름대로 자체 조사 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경상남도 조사반에 곁다리로 끼어 마지못해 실시된 단 몇 시간의 국회 조사는 부실할 수밖에 없
었고, 공교롭게도 조사반장 최천 의원은 4․3 당시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재직한 토벌대 주역인데다 태도마
저 강압적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조사 과정을 보도한 제주신보는 “질문하는 방법이 마치 죄인 다루는 식”이
라고 꼬집었다. 최천 반장이 “10여 년이 경과됐으니 처벌 시효가 지났다”고 말하자 현장에 있던 제주신보
의 신두방 전무는 “그러면 뭣하러 왔느냐. 사람 죽인 놈들에게 시효가 문제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험악
해지자 조사반의 다른 두 의원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철저히 처리하겠다”고 다짐해 겨우 일단락 됐다.
또 1960년 6월 21일 재경 제주학우회는 국회 앞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제
주도의 대학생을 망라하는 ‘제주도민 학살사건 진상규명 대책위’를 조직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88▪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 1961년: 군사쿠데타 발생 진상규명 물거품
5․16 군사쿠데타는 진상규명 운동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진상규명동지회원들이 검거돼 고초를 겪었고,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옥고를 겪었다. 또 대정지역에
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몇몇 사람들은 군 입대 중 체포돼 곤욕을 치렀다. 경찰은 또한 유족들이 세운 위령
비를 부숴 파묻기도 했다. 이로써 진상규명 운동은 제대로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원점으로 돌아갔다.
1961년 제주출신 의원 김성숙은 국회에서 ‘제주도 양민학살 보고서’를 내고 위령탑 건립 등을 제안했으
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누구도 4․3을 입에 담지 못했고, 연좌제(정부는 84년 12월 이를 폐지한다고
발표함)의 억압 속에서 도민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더욱 곪아 갔다.
얄궂게도 1962년에는 4․3 당시 제9연대장으로서 초토화작전의 주역이었던 송요찬이 군사정권의 내각수반
이 돼 제주를 방문, ‘4․3상처 치유’ 운운하며 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을 실시했다.
▶ 1978년: 4․3논의 물꼬 튼 순이삼촌
5․16쿠데타 이후 무려 17년간 계속돼 온 강요된 침묵은 한 소설가에 의해 깨어졌다. 엄혹했던 유신 시절
인 1978년 문예잡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4․3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정
면으로 다뤄 충격을 주었고 긴 세월 금기시 됐던 4․3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소설은
이후 4․3연구를 촉발시켰고 문학은 물론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작가 자
신은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 출판된 소설집은 한동안 판금조치를 당해야 했다. 그
러나 현기영은 지금까지 계속 ‘4․3 연작’을 발표해 오고 있다.
▶ 1979~86년: 은밀히 읽었던 ‘4․3책’
순이삼촌 이후 누구도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1984년에 강용삼․이경수가 쓴 대하실록 제주백
년에 4․3이 많은 부분 할애됐지만, 양민학살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한 채 토벌작전의 무용담만 실렸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 이후 제주지역의 학생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학내에서 4․3이 관심사로 등장하기 시
작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그 무렵 전해진 미국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
이나 일본에서 출판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은밀히 복사해 읽었고 또한
전파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한 인사는 “4․3을 제주지역 운동의 ‘역사적 지주’로 삼았었다”고 회고했다.
▶ 1987년: ‘6월 항쟁’ 영향 정치권 이슈화
장기 군부독재를 청산하기 위해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섰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4․3진상규명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초석을 깔았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
지 9년만에야 다시 말문이 트인 것이다.
특히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는 정치권에서 4․3을 이슈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7년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당시 평민당)가 처음으로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김 후보
가 낙선함에 따라 비록 공약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제주지역에서는 총선과 대선 때마다 4․3진상규명
이 늘 핫 이슈로 등장하는 등 정치권의 논의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 해 제주대학교 총학생회 등에서는 일제히 ‘4․3 대자보’를 부착하며 1960년 4․19혁명 직후 제주대학교
의 일부 학생들이 벌였던 진상규명 운동의 맥을 27년만에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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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민주화 열기 속 4․3논의 분출
4․3 발발 40주년이었던 1988년은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년 전 벌어졌던 ‘6월
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저변에 깔려있던 4․3진상규명 운동의 열기가 한꺼번에 폭
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1988년 3월 28일~4월 8일까지를 4․3추모기간으로 정해
‘4․3위령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를 가졌고, 서울에서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4․3 학술세미나가 개최
됐다. 또 일본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특히 1988년에는 4․3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선 전문연구로서 처음으로 두 편의 석사학
위 논문이 발표됐다. 박명림은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양한권은 「제주
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서울대 정치학과)를 썼는데, 이 두 편의 논문은 4·3연구 수준을 처음부터
껑충 끌어올렸다. 또한 각종 자료모음집과 증언채록집이 출판돼 진상규명 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에 앞서
1986년에 발간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현대사 연구의 붐을 일으키면서 4․3 연구
의 깊이를 더하게 했다.
문학작품으로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집 화산도와 까마귀의 죽음이 번역 출판됐고, 1986년
발표됐던 이산하의 4․3서사시 「한라산」이 뒤늦게 필화사건을 일으킴으로써 4․3은 전국적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6월 문공부가 ‘공안차원에서 좌익서적을 뿌리뽑는다’는 구실로 제주민중항쟁 등을 지목해 경찰
에 고발함으로써 4․3논의가 한때 위축되는 듯 했다.
1988년 7월 22일 제주국본과 제사협 등이 후원하고 서울 소재 6개 대학교의 제주학우회 및 제주동문회
가 주최한 ‘4·3강연회’가 열렸다. 이 강연회는 제주에서 열린 첫 공개 강연회로서 그 동안 억눌려 침묵해
온 도민 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은 13대 총선의 단골 이슈가 됐다.
한편, 미국인 존 메릴은 1975년 하버드대학에서 4·3관련 첫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을 쓴 바 있는 사람인데, 1988년 11월 서울에 와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하면서 제주4·3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때 존 메릴은 학계를 떠나 미국 국무성 정보조사국에 재직하
고 있던 관리였다. 강연 내용이 한겨레신문에 소개된 후 제주4·3에 관한 ‘미국의 책임’을 두고 논쟁이 벌
어졌다. 한겨레신문은 강연 내용 뿐만 아니라 강연에 관한 반론과 재반론 등 미국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을 잇따라 네 차례나 지면에 실음으로써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아울러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진행된 국회농수산위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강보성 의원(민주당)은 4․3진상
규명을 촉구했고, 이어 국방위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도 황명수 의원(민주당)이 4․3의 역사적 재조명을 촉구
했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열린 ‘광주청문회’는 도민들의 4․3진상규명 의지를 크게 고
무시켰다.
1988년 말에는 미국의 ‘4․3학자’ 존 메릴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각각 제주를 방문해 미
군정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하는 등 1년 내내 4․3논의의 열기가 이어졌다. 또한 이 해 말에는 오성
찬의 4․3증언채록집 한라의 통곡소리가 출판됐다. 이처럼 4․3진상규명에 있어서 1988년의 움직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1989년: 제주도민, 직접 진상규명 위한 조사에 나서다
1989년에 접어들며 4․3진상규명운동은 또 다른 중요한 계기를 맞는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이던 것에 반해 1989년에는 도민들이 직접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
90▪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닌다.
4월 3일을 맞아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반장 양조훈)이 1년간의 준비 끝에 기획물 「4․3의 증언」을 신문
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5월 10일에는 ‘제주4․3연구소’(소장 현기영)가 발족됐다. 또 강보성 의원은 ‘제주도
문제연구소’를 설립해 4․3진상규명을 위한 자료조사에 나섰다.
제주신문은 「4․3의 증언」 연재 외에도 4․3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 연대장으로서 평화적인 사태 수습을
위해 미군정의 초토화작전 명령을 거부한 채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전개하다 미군정에 의해 해
임됐던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을 연재해 미군정 개입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했다.
1989년 처음으로 열린 ‘4․3추모제’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서울의 제사협이 제안해 제주민주화운동 진영
과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 등이 ‘41주기 4·3추모제 준비위원회’(이듬해부터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로 개
칭)를 구성해 주최한 이 행사는 대내외에 공개적으로 처음 열린 추모제이자 위령행사였다.
4월 3일을 전후해 제주․서울․일본의 추모 모임이 열렸고 마당극, 노래극, 문학제, 강연회 등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이후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이중에서도 놀이패 ‘한라산’은 매년 마당극을 열어 4·3의 대중
화에 앞장섰는데, 1989년 첫 공연 때는 담당자들이 경찰에 연행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예술
계의 활동에도 결코 적지 않은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1989년 국정감사 때 강보성 의원과 최기선 의원(이상 당시 민주당)이 4․3진상규명을 촉구했고, 국정감사
사상 처음으로 ‘4․3증인’을 채택해 증언을 듣기도 했다. 이에 이군보 제주도지사는 “4․3의 올바른 조명을 위
해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 이를 재정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답변, 정부차원의 진상
규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 1990년: 3당합당 찬물…제민일보 탄생 불씨 살려
1990년 벽두에 전격 단행된 3당합당으로 정부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무르
익던 4․3진상규명 움직임은 3당합당 이후 정부의 태도 변화로 또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4월 제주를 방문한 안응모 내무부장관은 “4․3은 이미 법률적으로 다 끝난 사건이며 정부 주도의 재조명
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밝혀 1989년에 발표된 제주도의 정사 편찬 계획을 백지화했다.
한편 1989년 말부터 언론민주화운동을 벌이던 기자들이 1990년 1월 집단 해고를 당한 ‘제주신문 사태’
로 인해 4․3취재반의 기획물 「4․3의 증언」 연재도 중단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제주신문 해직기자들이 중심
이 되어 새로 창간한 제민일보는 특별취재반을 재가동, 1990년 6월부터 기획물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은 진상규명 운동을 선도했고 그 공로로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4월 3일에 열린 4․3 제42주년 추모식은 경찰의 원천 봉쇄 속에 강행돼 대량 구속 사태를 빚었고, 7월에
는 제주민중항쟁을 출판했던 김명식이 뒤늦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이적표현물 제작)로 구속돼 그해 11월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9월에는 토벌대의 무차별 총살극에 의해 주민이 집단학살되고 마을이 폐촌된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의
희생자 유족들이 옛 마을 터에서 사흘간 무혼굿을 열었다.
▶ 1991년: 최루탄 난무한 4․3추모제
1991년은 지난해 ‘3당합당’으로 인해 위축됐던 4․3진상규명 운동이 다소 활기를 되찾은 해였다.
3월에는 제주4․3연구소가 당시 신문인 제주신보(1947. 1. 1~1948. 4. 20)를 발굴 공개해 4․3의 배경
91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4월 3일을 맞아 제민일보는 “1949년 4월 현재 인명피해는 15,000명이며 이중 80%이상이 진압군에 의
해 희생됐다”는 내용의 미군 비밀문서를 대대적으로 보도, 그 동안 풍설로만 전해져 오던 희생규모와 사건
성격의 일단을 밝혔다. 제민일보는 또한 왜곡된 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 집필자들과의 인터뷰 결과를 실어
여론을 환기시켰다. 제민일보는 인터뷰 기사와 함께 왜곡된 국사교과서의 실태를 폭로하며 교과서 개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4월 3일 제주지역 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4․3추모제’ 때는 추모제 장소인 관덕정 앞 광장이 경찰
에 의해 원천 봉쇄됐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학생 등 무려 4백여 명이 연행되는 사태를 빚었다.
특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산하 전국의 대학들이 ‘4․3 시위’를 벌여 4․3을 이슈화시켰다. 놀이패 한라산
의 공연은 제주시민회관 측이 ‘4월 내내 보수공사를 한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을 편법으로 기피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한편 1988년 10월에 결성된 ‘반공유족회’는 이후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까지 포함해 1990년 6월 ‘제주
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회장 송원화)로 개편, 1991년 4월 뒤늦게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
3위령제를 봉행했다. 그런데 추모제를 개최한 사월제 공준위와 위령제를 연 4·3유족회는 각각 다른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갈등을 빚었다.
한편 1월에 제주도경찰국이 발간한 제주경찰사는 희생자 숫자를 9,345명으로 축소하는 등 기존의 왜
곡되고 잘못된 자료를 답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92년: ‘다랑쉬굴 발견’…4․3논의 다시 활성화
1992년 1월에는 인기리에 방영되던 MBC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4․3을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 드라마는 공산폭동이라는 관변의 시각을 극복, 탄압에 의한 생존권 수호 차원의 민중봉기라는 새로
운 관점에서 4․3을 재조명해 주목을 끌었다. 이 드라마는 또한 4·3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많은 국민들
에게 ‘4․3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4월에는 4․3 당시 토벌대에게 무차별로 학살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유해 11구가 다랑쉬 굴에서 발
견돼 큰 충격을 주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화가 강요배의 ‘4․3역사 그림전’이 열려 4․3진상규명의 논의
를 다시 활성화하는데 기여를 했다.
4․3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던 제주대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이에 최루탄과 돌멩
이가 오고갔다. 그해 말 제14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민주당)는 제주지역에서 열린 유세에서 “4․3진상규명
과 도민 명예회복을 위해 4․3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 1993년: ‘문민정부 시대’ 맞아 도의회 4․3특위 구성
19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다소 열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3
월 20일 제주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영훈)가 1년간의 준비 끝에 정식 출범했다. 진상조사․역사정립․명예회
복 및 위령사업 등 3단계 사업을 구상, 추진하고 있는 도의회 4․3특위는 공공기관에서 4․3을 공론화 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도의회 4․3특위는 이후 희생자를 조사․발표하는 등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담
당했다.
4월에 들어서자 인명피해와 역사왜곡의 측면에서 제주4․3과 그 내용이 흡사한 ‘대만 2․28사건’에 대해 대
만 정부가 명예회복 조치와 피해 보상을 할 것이라는 외신 내용이 제민일보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4·3진
92▪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상규명에 대한 도민의식을 높였다.
한편 거창사건 특별법 추진으로 인해 현대사 재조명 분위기가 일고 있던 가운데 5월 3일 이영권 의원(민
주당)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을 통해 “4․3규명을 위해 ‘반민족․반민주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사특위를
구성하라”고 촉구했고, 5월 8일 대정부질문에서 김종하 의원(민자당)은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 문민정부
시대에서 4․3 등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평가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 제주도지의 개정 출판도 빠뜨릴 수 없는 큰 변화이다. 그 동안 좌우 대립적 측면만을 강조하며 4․
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해 온 것과는 달리 행정기관의 자료에서 4․3을 본격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
었다.
이런 재조명 작업이 기폭제가 되어 1993년 10월에는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의장 오영훈)가 변정일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제주도의회
(의장 장정언)가 양정규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해 각각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청원은
운영위에 회부된 이후 방치됐다가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사장됐다.
반면에 11월 12일 민자당은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법’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도민들은 지역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역사 바로세우기가 좌우되는 현실을 보며 씁쓸함을 맛봐야 했다.
11월에는 조천읍 북촌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희생자 조사를 벌인 끝에 이를 발표했다. 북촌원로회의 1
차조사 결과, 전체 희생자 412명 중 409명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음을 밝혀 충격을 더했다. 이 조
사활동은 4․3의 엄청난 충격과 피해의식에 시달려 오랜 침묵을 고집해 오던 경험세대들이 직접 조사에 앞장
섰다는 점에서 향후 진상규명 운동의 큰 전환점이 됐다.
한편 한국기자협회는 「4․3은 말한다」를 연재해 오고 있는 제민일보 4․3취재반에게 1993년 제25회 ‘한국
기자상’을 수여했다.
▶ 1994년: 여․야 국회의원 75명, 4․3특위 구성안 발의
2월 2일 제주출신 변정일 의원은 지난해인 1993년에 제출된 도민 청원과는 별도로 여․야 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로써 4․3특위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정식 의안으로 발의됐다.
같은 날인 2월 2일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은 1994년을 ‘기초조사의 해’로 정하고 4․3피해 조사활동에
착수하겠다고 발표, 도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2월 7일 도의회 내에 ‘4․3피해 신고실’이 개설돼 주민들의
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3월 10일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이 그간 신문지면을 통해 연재했던 「4․3은 말한다」를 다듬고 보완해
4․3은 말한다(전예원 간)라는 제목으로 두권의 책을 펴냈다. 4․3은 말한다는 연재가 계속됨에 따라 현재
제5권까지 출판됐고, 비록 출판되지는 못했으나 제6권에 해당하는 내용이 연재됐다. 4․3은 말한다는 또한
일본어로 번역됐다.
한편 1994년은 첫 합동위령제가 열린 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 동안은 제주지역 12개 운동단체들
이 모여 결성한 ‘사월제 공준위’가 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 왔고,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3
년째 위령제를 봉행하는 등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두 단체가 갈등을 빚으며 각각 다른 장소에서 행사를 벌
여 왔다. 이에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를 개최케 된 것이다.
한편 도민화합의 움직임 속에서도 반공단체 등의 일부 인사들은 제주지역의 일부 일간지에 ‘4․3 공산폭동
론’을 주장하는 기고를 연일 발표하며 진상규명 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또한 경찰은 4
93
월 14일 새벽 ‘국가안전기획부 산하 애국동맹’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 명의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서가 발
견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3월 18일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가 발표한 교과서 개편 시안이 전국적으로 일파만파를 일으
켰다. 4․3을 ‘항쟁’으로 규정한 개편 시안에 대해 사학계의 보수적인 학자들과 보수 언론들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크게 반발한 것이다. 시안을 마련한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에게 집중타가 가해졌고 결국
교육부가 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겨우 파문이 일단락됐다.
6월에는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제주도지부(지부장 김인선)가 주최하고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지회장
강창수)가 후원한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제주비극(4․3)’이라는 주제의 우익단체 모임이 열려 예의 ‘공산폭동
론’을 강조했다.
▶ 1995년: 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 발간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1995년이 갖는 의미는 그 동안의 노력들이 서서히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5월 제주도의회 4․3특위는 그 동안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발간했다.
14,125명의 희생자 명단을 일일이 기록한 이 책자는 향후 4․3연구의 귀중한 1차 사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
는 성과였다. 희생자 명단 속에는 10살 미만의 어린이 610명, 61세 이상 노인 638명의 이름도 수록돼 충
격을 더했다. 도의회 4․3특위는 1차 보고서 발간 즉시 국회를 방문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3년에
청원한 ‘국회특위 구성’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9월에는 한국전쟁 중 소위 ‘좌익부역자 숙청’에 나선 우익세력에게 희생된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유골이
발굴돼 눈길을 끌었다. 도민들은 1992년 제주도에서 발굴된 ‘다랑쉬굴 유골’을 떠올리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유골의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싸늘한 태도는 도민들에게 ‘아직도 때가 아니구나’를 느끼게 했
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제주지역 지방지인 제주일보와 한라일보의 지면에는 일부 반공단체 인사들의
‘공산폭동론’이 연일 투고 형식으로 게재됐다. 이들의 주장인 즉, ‘공산폭동으로 이미 판명 난 사건을 두고
무슨 진상규명을 한다는 말이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제주도 당국의 4․3위령탑 건립에 대해서도 반대
하는 성명을 일부 지방지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12월 18일에는 국회본회의에서 ‘거창사건 관련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자 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 1996년: 제주도, 4․3진상규명에 참여
1996년 새해 벽두부터 국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도민 청원에 대해 조속 처리를 촉구하는 여론이 드높았
다. 이는 다가오는 4월 총선으로 제14대 국회가 마감됨에 따라 그간 국회 운영위에 계류 중인 두 건의 청
원과 의원 75명이 서명한 특위구성안이 ‘물 건너가는 것이냐’는 회의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주도의
회는 1월 19일 국회를 방문해 청원이 조속히 해결되도록 촉구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국회 운영위
는 제14대 마지막 임시국회가 끝나는 1월 27일에 가서야 청원심사 소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잇따라 연 끝
에 ‘시일 촉박’을 이유로 국회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도민들이 진상규명을 강력 촉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3월에는 신구범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
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4․11총선 때는 거의 전 후보들이 4․3문제 해결을 공약, 선거의 최대 쟁점으
94▪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로 부상했다.
4월에는 유족회와 공준위가 합동위령제 개최를 합의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도민 의지를 진일보시
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합동위령제는 1994년부터 세 번째 열리는 것이어서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유족
회가 그간의 입장과 달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4․3은 공산폭동’이라는 단순논리
만 내세우며 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유족회가 이렇게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은 유족회 회장단이 개편됐
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과거 반공유족회 소속 인사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족회를 주도했으나, 2
월 25일 회장단 개편 때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으로 회장 및 회장단이 대거 바뀐 것이다.
한편 ‘4․3 때 학살을 주도했던 군 정보과장은 아편중독자였다’는 제민일보 기사가 4월 2일자로 보도돼 큰
충격을 주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을 더욱 높였다.
12월 17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의 찬성 서명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이 발의됐다. 이는 도민들의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 1997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 발족
4․3발발 50주년을 1년 남겼다는 시의성 때문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 높게 일었
다.
특히 4월 1일 서울의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
회’는 4․3해법찾기를 향한 국민연대였다. 상임대표인 김찬국(상지대 총장) 김중배(참여연대 공동대표) 강만길
(고려대 교수) 정윤형(홍익대 법경대학장) 등 우리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각계의 명망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범국민위는 △정부의 양민학살 사실 인정과 자료 공개 △국회 4․3특위 구성 △4․3특별법 제정
과 명예회복 조치 등을 촉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범국민위는 이후 ‘4․3역사신문’ 과 소식지 ‘4․3반세
기’를 발간해 오고 있으며 1998년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4월 제민일보는 “대량 학살극을 초래한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보도해 진상규명 운동을
더욱 고조시켰다. 보도가 나가자 4․3범국민위원회의 성명과 함께 제주범도민회와 서울의 참여연대를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 시민운동단체에서도 성명을 내어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7월 8일에는 국회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불법 계엄령’을 추궁하며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2월 ‘대만 2․28사건’ 제5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 테러리즘’이
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이 대만에서 열려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키로 했던 제주도의회
4․3특위 의원들이 돌연 불참하게 돼 외압설이 나돌았다.
2월 27일에는 도의회 4․3특위의 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이 출판됐다. 이는 1995년 제4대 도의
회가 발간한 1차 보고서를 토대로 제5대 도의회가 수정 보완한 것으로 14,504명의 희생자명단이 발표됐
다. 도의회는 3월 11일 국회의장실과 여야 총무실 등을 방문, 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6년 말 국
회의원 154명에 의해 발의된 국회4․3특위 구성안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10월에는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4․3을 다룬 소설 화산도 전7권을 집필 21년만에 완간해 화제를
모았다. 이미 이 책으로 1984년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郞賞)’을 수상한 바 있는 저자는 1998년 1월 ‘마이
니치(每日) 예술상’ 마저 수상해 제주4․3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7년은 영상으로 표현된 4․3다큐멘터리가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켜 ‘영상시대’임을 실감케 한 한해였
다. 4․3영상물은 이미 ‘다랑쉬의 슬픈 노래’(1993년)와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1996년)이 대학가 등지
에 널리 유포돼 4․3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1997년 10월 경찰은 뒤늦게 제작자(김동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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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 조사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는 각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4․3영상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한편 부산 하늬영상(대표 조성봉)의 4․3다큐멘터리 ‘레드헌트’는 1년 내내 화제로 떠오르며 4․3논의를 전
국은 물론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1997년 초 발표된 레드헌트는 그해 4월 열린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
출품됐으나 주최측이 돌연 상영취소 결정을 내려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인권영화제와 10월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11월 공안당국에서는 뒤늦게 이 영화를 국가보
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 인권영화제 때 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을 연
행 구속했다. 이에 국제사면위원회가 즉각 항의성명을 냄으로써 오히려 4․3논의를 확산시켰다.
6월 6일에는 현충일을 맞아 ‘자유민주호국동지회’라는 유령단체 명의의 괴유인물이 시내 일원에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서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유인물은 위령사업을 추진해 온 신구범 지사와 도의회4․3특위위
원장인 김영훈 의원을 직접 거명해 비난하면서 “제주도 4․3운동 기념행사․위령제 등을 중지하고 북한의 공
작선상에서 놀아나지 말고 깨어나라”고 주장했다.
9월 26일에는 제50주년 위령사업을 추진할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위원장 조승옥)
가 결성됐다. 그런데 제주도가 중재해 구성한 이 단체는 위원 선정작업에서부터 밀실행정이라는 비난을 받
았다. 또한 당초 위령사업을 반대하던 일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이념논쟁을 시도함으로써 이에 반발한 시
민단체가 탈퇴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이로써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가 4년간 열어 온 화합의 위령제가 따
로따로 행사를 치르던 지난날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막판에 겨우 봉합됐다.
한편 9월 20일 국회의원 회관에서는 ‘제주4․3 문제, 해법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여․야 4당 정책토론회
가 열려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3문제가 서서히 정치권에서 이슈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 1998년: ‘4․3’ 발발 50주년 맞아 새 대통령에게 기대
4․3발발 50주년을 맞아 그날을 되새기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각종 행사가 제주와 서울, 그리고 일본에
서 일제히 열렸다.
제주에서는 2월 3일 4․3 유관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4․3 50주년 학술․문화사업회’ 주최로 학술심포지엄,
현장조사 보고서 발간, 문학의 밤, 미술전 등 다양한 행사가 치러졌다.
서울에서 열린 행사는 지난해 발족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에서 주관했다. 1월
‘4․3역사기행’으로 새해 행사의 문을 연 범국민위는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를 ‘4․3 기념주간’으로 정해
학술심포지엄, 명예회복 촉구대회, 그림전, 진혼굿, 4․3문화학교 개설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였다. 범국민위
는 이에 앞서 3월 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제주4․3 명예회복의 해’ 선포식을 가졌다. 특히 3월 28
일 성균관대에서 범국민위 주최로 열린 ‘제주4․3 제5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엄’은 역사․정치학 뿐아니라 사
회학, 법학, 인류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심포지엄에
서 발표된 논문들은 제주4·3연구(1999, 역사비평사)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일본에서는 4․3 5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기 위해 도쿄와 오사카에 각각 구성된 기념사업실행위원회 주최
로 강연회, 추도콘서트, 학술토론회, 전시회 등이 열렸다. 특히 도쿄에서는 미국의 학자 브루스 커밍스를 초
청, 4․3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매년 제주지역 일부 지방지에 투고하며 ‘공산폭동론’을 주장해 온 한국자유총연맹 등 반
공단체들이 3월 17일에는 제주일보 광고를 통해 “공산화 통일운동의 하나로 남로당이 일으킨 제주도 4․3폭
동을 ‘민족의 자주와 통일정부의 건설’이라고 왜곡 주장하는 자들을 정부는 단호히 대응하라”는 내용의 성
96▪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명을 발표하면서 위령제 실시를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4월 3일 처음으로 정부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50주년 범도민위령제가 엄수됐다. 이날엔 또한
여야 각당 대표의 추도사도 처음으로 발표됐는데, 한목소리로 4․3진상규명을 다짐해 도민들의 마음을 부풀
게 했다.
이에 앞서 4월 2일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대표 임문철 신부)은 신제주성당에서 ‘4․3 위령 및
화해를 위한 미사’를 가졌다. 4월 3일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주교구 본사 관음사(주지 중원 스님)에서 ‘4․3
위령 천도재’가, 모슬포교회에서 서남지구 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김한병 목사) 주최 ‘4․3 50주년 기념 강연
및 기도회’가 각각 열렸다. 이밖에 원불교 제주교구(교구장 서위진)도 2월 28일부터 일주일간 특별천도재를
여는 등 종교계의 위령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6월 22일에는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경
기․충청 지역 목회자 및 평신도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
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 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면서 4․3진상규명과 상처 치유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4․3 5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연대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제주출신 강요배 화가의 ‘4․3역사화전 - 동백꽃지
다’ 순회전이 그 계기가 됐는데, 이 그림전이 서울 광주 대구 부산 등지에서 잇따라 열리는 동안 해당 지역
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백만 서명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부산에서는 6월 20일 그림전 개막식에 맞
춰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의 공동주최로 ‘4․3토
론회’를 가졌고, 이어 ‘제주4․3항쟁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부산본부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한편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집권 여당 국민회의는 그 공약 이행의 첫 신호
탄으로 3월 30일 당내에 ‘제주도 4․3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위원장 김진배)를 구성했고, 특위는 5월 7
일 제주에서 사상 첫 ‘4․3공청회’를 개최했다.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한국위원회(대표 강만길)는 8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 동안 제주에서 4․3을 집
중조명하는 대규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지난해 2․28사건 50주년을 맞아 열린 대만심포지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제주심포지엄은 한국과 대만, 일본 본토, 그리고 오키나와의 학자․법조인․예술인 2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로 치러져 4․3을 국제적인 문제로 크게 부각시켰다.
▶ 1999년: 제주도민 총결집해 ‘4·3특별법’ 쟁취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되도록 특별한 성과가 없자 정부·여당에 4·3진상규명을 강력히 요구하
기 시작했다. 3월 8일 상설 운동조직체인 ‘4·3도민연대’가 결성돼 “국회 4·3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을 위
해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을 촉구했다. 특히 정부·여당 내의 4·3특위로는 제대로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도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정치권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동안 4·3문제를 외면해 오던
제주 출신 한나라당 국회의원(변정일·양정규·현경대)이 10월 11일 4·3특별법안을 공개하고 국회에 상정한
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4월 열릴 제16대 총선을 염두에 둔 제스처로 보이긴 했지만, 보수 야당이 먼저 4·3
특별법안을 발의한 것은 법 제정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집권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국회 4·3특위’를 우선 구성하자며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이었
다. 이에 10월 24일 제주지역 24개 시민사회단체가 총결집해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결성해
상경투쟁에 나서며 여당을 압박했다. 그 결과 1999년 12월 16일 마침내 4·3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97
▶ 2000년: 4·3특별법 공포, 4·3위원회 발족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은 김대중 대통령이 1월 11일 서명함에 따라 1월 12일자로 공포되었다. 3월 위
원회의 사무처 기능을 할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이 행정자치부 산하에 설치됐고, 제주도에는 제주4·3사건
지원사업소가 설치됐다. 8월 28일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4·3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런데 위원회가 발족하기도 전인 6월 10일 군 장성 출신들의 모임인 성우회의 정승화 회장 등 333명이
4·3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 2001년: 4·3진상규명 시작
1월 17일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단장 박원순)이 발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섰다. 보고서작성기획
단에서는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경찰청,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국내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물론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러시아연방기록관리청을 방문해 해외자료도 수집했
다.
12월 28일에는 수집한 자료들을 묶어 제주4·3사건자료집 1·2권을 펴냈다. 이 자료집 출판은 계속 이
어져 전 11권까지 나왔다.
▶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의 사과
진상조사보고서는 1월 24일 초안이 완성됐으나, 보고서작성기획단 단원들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진통
을 겪었다. 2월 25일 초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보고서 채택이 어렵게 진행됐다. 당시 고건 총리는 진상조사
보고서 심의소위원회를 세 차례나 직접 주재하며 보고서 수정안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3월 29일 열린
전체 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 의결’했다. 즉 진상조사보고서를 군·경측은 물론 보수단체에까지
배포해 6개월간 수정의견을 받을 것이며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오면 재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다는 단
서조항을 달아 보고서를 채택한 것이다.
이후 고건 총리는 4월 3일 위령제에 참석했는데, 진상조사보고서 확정을 유보시킨데 대해 분노한 시민사
회단체 회원들이 위령제단 앞으로 가는 고건 총리의 길목을 막고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보수단체들이 많은 수정의견을 제출했으나 4·3위원회의 김종민 전문위원이 일일이 반박자료를 제시
함에 따라 진상조사보고서는 별다른 수정 없이 10월 15일 열린 전체 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 채택 보름 만인 10월 31일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에 이어 대통령이 보고서를 근거로 사과하자 제주
도민들은 수십 년간 맺힌 한을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었다.
▶ 2004년: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에 대한 극우세력의 반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자 극우세력들은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극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자유시민연대 등은 7월 20일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하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한편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음에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6·25전쟁사라는 책을 펴내며 4·3을
왜곡시키자 4·3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크게 반발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이에 4·3위원회 전문위원실에서
는 6·25전쟁사에 나타난 왜곡 부분에 대해 근거를 들어 일일이 반박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논란이 커지
98▪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자 청와대가 직접 중재에 나서서 35건에 달하는 왜곡 내용을 수정했다.
▶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4·3위원회 위축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된 후 희생자 결정이 순조롭게 진행돼 희생자의 위패가 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안
치돼 왔다. 그러나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희생자 심사가 난항을 겪었다. 이명박 정부
는 오랫동안 4·3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아 이미 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사람들에 대한 최종적인 희생자 결정
이 미뤄졌다. 이 때문에 희생자 신고를 한 유족들은 위패봉안소에 희생된 가족의 위패가 오르지 않아 속을
썩였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뉴라이트 출신을 중심으로 한 여당 의원들이 4·3특별법과 4·3위원회
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제주도민들의 극심한 반발로 법안이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보수정부 출
범 후 4·3위원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 2009년: 수구세력, 각종 소송 제기해 4·3진상규명의 성과 무력화 시도
수구세력들은 2009년 3월부터 5월까지 헌법소원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민사소송) 2건 등 모
두 6건의 소송을 제기하며 진상조사보고서 파기와 희생자 결정 무효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4·3위원회 김종
민 전문위원의 소송 수행으로 이들의 소송은 2012년 3월까지 모두 패소했다. 그 내용은 아래 도표와 같다.
사건번호
청구인·원고·채권자
청 구 취 지
진행상황
헌법
소원
심판
▪2009헌마146
제주4·3특별법제2조제2호
위헌확인 등(’09.03.06)
-청구인:국가정체성회복국
민협의회 외 146명
-피청구인:4·3위원회
-수형자 등에 대한 희생자
결정은 청구인들의 인격권
침해 및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됨
-4·3특별법 제2조 헌법 위
반
-’09.03.24 심판회부
-’09.04.29 답변서제출
-’09.12.15 준비서면제출
▪’10. 11. 25. 각하
▪2009헌마147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일
부희생자결정 위헌확인
(’09.03.09)
-청구인:
이선교 외 11명
-피청구인:
제주4·3위원회
(국무총리)
-제주4·3위원회가
결정한
희생자
13,564명
중
1,540명에 대한 결정은 헌
법에 위반됨
-’09.03.31 심판회부
-’09.05.06 답변서제출
-’09.12.15 준비서면제출
▪’10. 11. 25. 각하
행정
소송
1
심
▪2009구합
8922
희생자결정
무효확인
(’09.03.09)
서울행정법원
-원고:
이인수 외 11명
-피고:
제주4·3위원회
(국무총리)
-제주4·3위원회가
결정한
희생자 13,564명 중 18명
에 대한 희생자 결정 무효
확인
-’09.05.08 답변서제출, -’09.06.12 1차변론
-’09.07.15 2차변론, -’09.08.26 3차변론
-’09.10.14 4차변론, -’09.11.11 5차변론
-’09.12.16 6차변론, -’11.01.19 7차변론
-’11. 4. 1 각하 판결
※원고 측, 국가기록원 상대로 행정소송
2
심
▪2011누
13370
(’11.04.18)
서울고등법원
-원고:
이인수 외 8명
-피고:
제주4·3위원회
(국무총리)
-’11.04.26 원고 항소
-’11.05.17 원고 준비서면 제출
-’11.06.21 피고 준비서면 제출
-’11.08.24 1차 변론, -’11.09.21 2차 변론
-’11.11.16 항소 기각
-’11.11.28 원고 상고장 제출
3
심
▪2011두
31260
(’11.12.13)
대법원
-원고:
이인수 외 8명
-피고:
제주4·3위원회
(국무총리)
-’11.12.13 대법원 사건 접수
-’11.12.27 상고이유서 제출
-’12.01.09 답변서 제출
▪’12. 03. 15 기각
99
▶ 2013년: 보수정권 재창출…수구세력 또다시 준동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보수정권이 재창출되자 수구세력들은 또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4·3진상규명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으나 하나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수구세력들
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그동안의 4·3진상규명운동의 성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등에
집단적으로 민원을 넣었다. 특히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하고, 극우세력의 각종
소송에 대한 대응과 함께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패널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4·3위원회 김종민 전문위
원을 해임시키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결국 김종민 전문위원은 2013년 6월 말 해임됐다.
▶ 2014년: 수구세력, 4·3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소송 제기
수구세력들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 희생자 결정 무효를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만 3년
만인 2012년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또다시 ‘희생자 결정
무효확인’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2014년 12월 12일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2016년 11월 10일 대법
원에서 최종 기각됐다. 도민 여론에 밀린 박근혜 정부는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4·3희생자추념일을 국가기
사건번호
청구인·원고·채권자
청 구 취 지
진행상황
1
심
▪2009구합
14668
희생자결정
무효확인
(’09.04.15)
서울행정법원
-원고:
이철승 외 199명
-피고:
제주4·3위원회
(국무총리)
-제주4·3위원회가
결정한
희생자 13,564명 중 20명
에 대한 희생자 결정 무효
확인
-’09.06.12 답변서제출
-’09.07.22 변론준비기일
-’09.08.21 1차변론
-’09.09.25 각하 판결
-’09.10.19 항소
2
심
▪2009누
34572
(’09.11.12)
서울고등법원
-원고:
이철승 외 164명
-피고:
제주 4·3위원회
(국무총리)
-’09.11.25 항소 접수
-’10.02.17 항소이유서 접수
-’10.03.04 준비서면 제출
-’10.05.20 1차변론,
-’10.06.03 2차변론
-’10.07.08. 항소 기각
3
심
▪2010두
16332
(’10.08.03)
대법원
-원고:
이철승 외 6명
-피고:
제주 4·3위원회
(국무총리)
-’10.08.03 상고 접수
-’10.09.15 상고이유서 제출
-’10.10.08 답변서 제출
▪’10. 11. 11 기각
국가
소송
▪2009카합1719
보고서배포금지
가처분
(’09.05.01)
서울중앙지법
-채권자:
이철승 외 48명
-채무자:
대한민국
-제주4·3위원회가
발간한
진상조사보고서의 출판·판
매·배포 금지
-’09.05.13 답변서제출
-’09.05.15 1차 심문,
-’09.06.05 2차 심문
▪’09. 10. 29 기각
▪2009가단
171562
손해배상(기)등
(’09.05.11)
서울중앙지법
-원고:
이철승 외 48명
-피고:
대한민국
- 제주4·3위원회의 진상조
사보고서 작성 및 희생자
결정으로 인한 손해배상청
구
*원고에 각 1백만원 지급
-’09.06.22 답변서제출
-’10.01.19 1차 변론
-’10.02.02 2차 변론
-’10.03.04 3차 변론
-’10.04.08 4차 변론
-’10.12.09 5차 변론
▪’11. 01. 13 기각
100▪2019 전국 4・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제6기)
념일에 포함시키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의결함으로써 4월 3일이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 2015년: 수구세력, 4·3평화기념관에 대해 시비
수구세력들은 3월 4·3평화기념관 전시 패널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2015년 3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와
4·3평화재단을 상대로 전시금지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도 2017년 1월 17일 대법원에서 최
종 기각됐다.
▶ 2017년: 촛불혁명으로 민주정부 탄생…4·3의 새로운 전기
2016년 가을부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매주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그 결과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2017년 5월 열린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4·3진상규명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4·3유족회(회장 양윤경)는 4·3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4·3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변호사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4·3전문가들로 ‘법률지원단’(단장 이석태 변호사, 단원 고호성, 김성주, 김종민, 문성
윤, 송승문, 양성주, 양윤경, 이상희, 이재승, 장완익, 조영선)을 구성했다. 법률지원단은 피해보상과 4·3군
법회의 무효화에 초점을 맞춘 4·3특별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4·3유족회는 개정안을 민주당에 제시했고, 민
주당은 제주 출신 오영훈 의원을 중심으로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 2018년: 문재인 대통령, 4·3추모제 참석해 유족들에게 사과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4·3추모제에 참석해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또한 민주당에서 발의한 4·3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와 논의해 잘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4·3
당시 입은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기 위해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설립할 뜻을 밝혔다.
한편 경찰청은 6·25전쟁 때 예비검속자를 처형하라는 군대의 명령서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쓰며
예비검속자를 풀어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고, 제주지방경찰청은 11월 1일 문형
순 경찰서장의 흉상을 제작해 청사 마당에 세움으로써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삼았다.
11월 22일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4·3 때 총살된 후 암매장된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유
해 29구에 대한 봉안식을 열었다. 이 유해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쪽과
동북쪽에서 발굴된 404구 중 일부인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10년 가까이 예산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유해발굴과 신원확인을 위한 국
비 12억원이 지원됨에 따라 최첨단 방법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비로소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