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문서장편소설 심사평(12회, 202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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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심사평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과정은 어떤 심사보다도 커다란 책임감과 함께 소중한 기대를 지니게 만든 시간이었다. 올해 제12회 제주4·3평화문학상 본심은 예심을 통과한 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숙독하는 과정을 거쳐 2024년 4월 1일 오후에 진행됐다.

심사는 제주4·3이 상징하는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이라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더불어 소설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완성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곧 제주4·3이라는 참담한 역사적 비극의 문학적 승화를 가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울러 10년 넘게 축적돼 온 기수상작이 도달한 문학적 성취도 수상작 선정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로 언급됐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올해의 수상작 후보로 논의됐다.

그날이 오면은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심훈(본명: 심대섭, 1901~1936)의 삼남 심재호의 시점으로 심훈 사후 한국전쟁 시기에 헤어진 심훈 가족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주된 스토리로 등장한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귀한 내용이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수기나 논픽션에 해당하는 글이다. 다른 기회나 형식을 통해 이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글이 소개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싸락눈은 제주4·3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흥미로운 소재를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만드는 응모자의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한라산의 자연과 풍광, 식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며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소설의 형식과 구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간과하지 못할 한계가 존재한다. 여러 가지 얘기가 미적 절제 없이 서술되다 보니, 한 편의 소설이 갖추어야 할 형식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크게 보였다.

쥬시는 제주4·3 때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생명력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가족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후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할머니와 엄마의 힘겨운 스토리를 주인공이 알게 된다는 게 이 작품의 주된 스토리다. 제주4·3의 깊은 상처가 2세대, 3세대에게도 이어지는 과정이 생생하게 서술돼 있다. 하지만 스토리의 절박함에 비해 서사의 구성이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점, 문장과 언어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제목 역시 이 작품에서 형상화된 가슴 시린 슬픔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됐다.

끝남의 세계는 일제 말 일본인 부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이색적인 스토리의 작품이다. 당시의 문화적 풍속과 정보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과 공부를 역력히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소재의 흥미진진함에 비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힘과 서술의 밀도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소설의 완성도라는 면에서는 아쉬운 작품이다. 이번 심사과정에서 스토리의 흥미와 문제적 성격에 비해, 그 스토리를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드는 소설 구성의 치밀함과 서술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응모작들이 많다는 사실이 지적됐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을 놓고 고심 끝에 올해 제주4·3평화문학상 소설 부문의 수상작을 내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결정은 모든 인생을 걸고 제주4·3이라는 미증유의 역사적 상처를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하고 일구어 온 제주문학의 전통에 대한 경외심이자 그동안 여러 문제작을 낳은 제주4·3평화문학상에 대한 각별한 존중에서 비롯되었음을 이곳에 밝혀둔다.

- 심사위원: 황석영, 한창훈, 권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