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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제주4·3과 교육 

- 기억을 통한 세대전승

최호근

특별 기고

차마 고통일지라도, 기억은 어떻게 사랑이 

아닌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김동현

특별 칼럼

제주4·3의 위상과 기록

고시홍 

4·3 세대전승, 잇다

국제학교 4·3동아리 

‘4·3 ASA’의 4·3알리기 활동과 포부

권연우

동백다담

제2회 제주4·3영화제 

‘틈새에서 솟아오른 빛’을 마치고

안혜경

기획 포커스

‘끝없는 제주4·3 흔들기’ 

시급한 역사 왜곡 처벌법

김정호

사월의 창

“비극에서 상생으로” 교과서에 실린 제주4·3 

김승은 

걸음과 거름

일본에서의 제주4·3운동, 그 여정

- 모든 차별과 폭력, 학살에 반대하는 

   평화를 꿈꾸며

인터뷰: 오광현

대담: 김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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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오늘도 오빠를 그리워합니다

증언자: 김경자

안현미구술채록·정리: 

세대전승4321

학생과 4·3을 이어주는 세 가지 키워드

(공감 – 자율적 판단 – 행동)

전진수 

재단뉴스

평화우체통

새로 나온 책 

주요 기증 기탁 

주요 참배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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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내 장편소설 『침묵의 비망록』(도화, 2024)은 의귀국민학교 주둔군, 현

의합장묘,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이 중심축이다. 소설로 쓴 ‘의귀리 4·3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1년 봄에는 남원리, 가을·겨울은 의귀

리에서 집중적으로 다리품 팔며 자료 정리에 몰입했다. 그런데 기존 자

료에서 많은 오류를 발견했다. ‘그 무엇’보다 강요된 침묵, 기록에 충실한 

작품을 쓰기로 작심한 이유였다. 

특별 칼럼

제주4·3의 위상과 기록 

제주 출생으로 1983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대통령
의 손수건』, 『계명의 도시』, 『물음표의 사슬』, 『그래도 그게 아니다』와 장편소설 
『침묵의 비망록』 외에 공동편저 『고려사 탐라록』을 발간했으며, 탐라문화상 등
을 수상했다. 제주4·3희생자추가진상조사 자문위원, 제주4·3 70년을 맞아 제
주4·3평화재단에서 발간한 『어둠에서 빛으로』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글 
고시홍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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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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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가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언급되었다(215쪽). 하지만 무장대 희생자 

서술은 현의합장묘와 혼재돼 있다. 『제주4·3 유적Ⅱ』(2004)도 앞 자료와 

엇비슷한 오류가 있다. 특히 잃어버린 마을 ‘장구못’은 의귀리가 아닌 수

망리다.

그리고 ‘의귀리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는 51명으로 전해진다. 주한

미군사령부의 ‘G2-일일보고’(1949. 1. 14.) 기록이다. 시신은 당일 학교 

울타리 동북쪽에 접한 1512-2번지 밭(현재 가정집)에 세 구덩이를 파서 

매장됐다. 그 뒤 송령이골로 옮겨 한 구덩이에 합장됐다. 고기정(1938년

생)의 기억을 빌리면, 1952년 겨울 1974-3번지 현 위치로 이장한 것으

로 추정된다. 아무튼 의귀리 4·3 기록물에는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다. 

다른 마을 내용은 어떤지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김종민(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그동안 수천 명의 구술을 채록했

다면서 ‘구술은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다. 구술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을 감추거나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때그때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

으로 변형하거나 일부러 거짓말을 꾸며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구술

은 최대한 검증해야 한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술은 문헌 자료

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알려준다.’고 했다. 앞에서 지적한 오류의 

재생산은 ‘최대한의 검증’을 소홀히 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의귀국민학교 주둔군의 토벌작전,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무장대 묘의 기록에 오류가 많다. 

의귀국민학교는 1948년 12월 15일 폐교되고, 12월 26일부터 제2연

대 1대대 2중대 70여 명이 주둔했다(1개 소대는 표선리에 파견). 본관 동

쪽에는 교장관사(북쪽) 겸 창고(남쪽)로 사용되던 별채가 있었다. 이 ‘창

고’가 붙잡힌 주민들을 가뒀던 공간이다. 토벌 현장에서 학교로 붙잡혀온 

도피자들은 대부분 노인, 젖먹이를 포함한 부녀자들이었다. 인근 중산간 

마을 사람뿐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 통비분자 혐의가 짙다고 판단된 이

들만 그날그날 남원지서로 넘기고, 나머지는 하룻밤 창고에 가뒀다가 다

음 날 일단 석방했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수용된 셈이다. 대부분 ‘창

고’를 유치장 개념으로 서술한 오류의 공통점이 있다. 

주둔군은 1949년 1월 10일, 12일 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을 1506번지 

‘학교 동녘 밭’에서 총살했고, 대충 세 구덩이에 매장된 채 방치됐다. 현

의합장묘 희생자들이다. 그해 봄, 소개돼 고향을 떠났던 인근 마을 주민 

일부까지 의귀국민학교 동녘에 성을 쌓고 움막 생활을 시작했다. 『衣貴』

지(2016년)의 ‘4·3 당시 주거배치도’에는 의귀리 166가호, 수망리 33가

호, 한남리 29가호, 신흥리와 기타 24가호였다. 이때 축성 구역에 있던 

현의합장묘 무덤도 ‘개턴물’ 765-7번지로 옮겼다. 이 과정에 일부 유족

은 유해를 빼내갔다. 양인필(1935년생)은 ‘우리 사돈하고 한 가족 셋’이 

포함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남원지서 순경을 동원해 감시했는데도 

그랬다. 

현의합장묘 희생자에 대한 최초의 공적 기록은 『제주4·3사건 진상조

사보고서』이다. 313쪽 “‘의귀리 전투’ 때에도 군 주둔지인 중산간을 헤매

다 잡혀온 주민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제2연대 군인들은 사건 직

후 이들을 학교 뒤 밭으로 옮겨 모두 사살하였다….”라는 대목이다. ‘80

여 구의 시신’은 그대로 현의합장묘 희생자가 됐다. 지금 의귀초등학교 

‘4·3 유적지’ 안내판에도 그대로 원용되고 있다. 2003년 유해 발굴에서는 

서른아홉 구가 확인됐다. 빼돌린 유해를 포함해도 50명이 안 될 듯싶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2019)에는 “희생자 신원에 대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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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귀초등학교(옛 의귀국민학교)

현의합장묘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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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칼럼

‘제주4·3사건’ 명칭은 한 단어로 붙여쓰는 고유명사이다.

‘제주4·3’, ‘4·3사건’, ‘4·3’은 약칭이다. 특별법, 진상조사보고서 이후 

법령 용어로 정착됐다. 영문도 ‘Jeju4·3’으로 붙여야 한다. 50년 동안 피

울음으로 쟁취한 ‘개똥이, 순덱이’ 같은 이름이다. 미국의 책임론을 해결

해야 가능한 정명 찾기는 그다음 문제다. 하지만 표기가 들쑥날쑥한 경우

가 비일비재하다. 국사 교과서에도 그런 현실이다. 이 또한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2024년 1월 ‘제주특별자치도 4·3역사왜곡 대응 법률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됐다. 제주4·3평화재단과 도교육청을 중심축으로 컨트롤 타

워가 필요하다. 기록물의 통합적 검증과 관리, 세대 전승을 위한 자료 개

발과 보급을 위함이다. 튼실한 4·3 기록이 국제화의 마중물이다. 제주

4·3을 ‘지금, 여기’까지 이끌어온 원동력은 기록의 힘이다. 기억의 투쟁이

었다. 

‘알드르’, ‘정드르’의 옛 이름을 되돌려놓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비행장이다. 제주 근현대사가 함축된 상징적인 곳이다. 발

음은 경음화 현상(된소리되기)에 따라 ‘알뜨르’, ‘정뜨르’이다. 그런데 1990

년대 들어 ‘알뜨르’, ‘정뜨르’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유적 발굴, 

제2의 4·3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화되면서이다. 언론도 그대로 받아쓰기하며 

‘알뜨르’, ‘정뜨르’로 고착됐다. 옛 지명의 상식과 자료를 도외시한 결과다. 또 

다른 역사 왜곡이다. 몇몇 지인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이었

다. 내가 편집위원장을 맡았던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 70년’ 어둠에서 

빛으로』(2017)에는 ‘알드르-정드르’로 통일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무관심한 

현실이다. 옛 지명도 선조의 생활사가 응축된 소중한 역사이다. ‘알뜨르’, ‘정

뜨르’로 왜곡하는 데 동조한 ‘당신들’에게 거듭 묻는다. ‘알·정드르’ 이름 되찾

기 운동에 앞장설 용의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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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르 비행장 

정드르 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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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제주4·3과 교육 
- 기억을 통한 세대전승

글 
최호근 교수 

최호근 교수는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이며, 독일 근현대사와 역사이론을 전공한 역사
학자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막스 베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을 비롯하여 오랫동안 기억 문제를 연구해 왔다.
기념문화,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주요 
저서로는 『기념의 미래』(2019), 『독일의 역사교육』(2009), 『제노사이드』(200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막스 베버와 역사주의』(2000), 『원치 않은 혁명 1848』(2006) 등이 있다. 2019년 
한국연구재단 우수논문과 세종도서 최우수도서에 선정되는 등 여러 차례 학문적 성과를 인
정받았다.

4·3 발발 8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중적 억압 속에서도 전승되

어 온 4·3기억이 앞으로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보수화 경향과 과거사에 대한 무관심이 그 이유다. 이보다 

더 심각한 도전은 세대교체에서 비롯된다. 인구학적 구성의 변동은 4·3

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손자와 증손자 세대에게, 그리고 점차 늘어가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좀 더 적합한 방식으로 4·3을 교육할 것을 요구한다. 

4·3의 세계화 역시 수신자의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이제까지와는 다

른 방식으로 기억의 세대 전승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력의 성패

는 교육에 달려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독일의 지성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1966년에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Erziehung nach Auschwitz)’의 필

요성을 역설했다. 네덜란드의 교육학자 이도 아브람(Ido Abram)은 이 교

육을 실천해가기 위해 1) 공감과 온정의 태도 육성, 2) 자율성의 제고, 3) 

야만의 재발에 대한 경계의식 강화, 4) 가해자·희생자·방조자 모두에 대

한 감정이입, 5) 집단범죄의 기제에 대한 통찰을 5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어서 그는 3세 이상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위한 조기교육의 원칙으

로 1), 2), 4)를 선별했다. 이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장면들이 초래

할 지도 모를 정서적 부담을 배제하면서 아우슈비츠를 교육하는 길을 모

색했다. 이것이 바로 ‘아우슈비츠 없는 아우슈비츠 교육’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개념과 원칙의 벤치마킹보다 ‘지금 여기’서 필요한 방

안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집요함이다. 증인이 사라진 시대를 대비할 때 가

장 우선적인 작업은 미래지향적인 평화교육의 자산창고로서 4·3이 보유

하고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4·3은 다양한 종류의 평화교육과 광범위한 접촉면을 보유하고 있다. 

학교폭력 예방교육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편견과 혐오, 절차의 미준수

와 폭력적 수단에 대한 의존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4·3이 

제노사이드로 비화된 이유였다. 제주4·3은 한 지방에서 발생한 비극이었

지만, 사건의 발발 원인과 영향 면에서 보면 남북한과 일본, 타이완, 일

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무대에서 전개된 초국가적 사건이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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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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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Enola Gay)와 원자폭탄을 통해 표출된 인종주의적 사고와 침

략적 심성은 제주를 ‘빨갱이의 섬’으로 바라보던 미 군정당국 및 워싱턴의 

시선과 분리될 수 없다. 한반도 분할과 분단이 아니었다면 4·3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4·3은 학교 평화·통일 교육의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냉전 초기에 한반도에서 발화된 반공주의라는 ‘유사 인종주의’가 

제노사이드를 촉발한 이데올로기였던 점에서, 4·3의 비극은 체제공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학교 평화·통일교육에 필수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4·3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 시대 평화교육의 보물창고다. 한

라산 중산간 일대에서 자행된 산림과 마을의 방화, 관음사 같은 사찰의 파

괴는 생태평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4·3 기

간 동안 무수하게 자행된 성폭력과 여성들에 대한 유희적 학살은 보스니

아-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젠더사이드(gendercide)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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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설

귀천

제주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 '의로운 바람'

4·3이 제주의 마을 공동체들을 심각하게 파괴했던 것은, 유대 공동체

의 전면적 파괴라는 관점에서 홀로코스트를 조명하는 종교적 유대인들

의 관점과 중첩된다. 4·3평화공원 내의 비설과 귀천 같은 기념물은 제주

를 찾은 사람들에게 4·3의 폭력적 과거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공감

의 문 역할을 한다. 어디 그뿐인가? 4·3평화기념관 내에서 있는 전시공

간 ‘의로운 바람’은 예루살렘의 야드바셈(Yad Vashem)에 있는 ‘열방 의

인들의 정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살의 광풍 속에서 주민들

을 살린 군 장교 김익렬과 경찰 지휘관 문형순은 홀로코스트 기간에 유대

인들을 구했던 오스카 쉰들러(Osc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4·3 당시에 이웃들을 살리기 위

해 위험을 감수했던 신례2리 주민들은 끈끈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많은 유

대인들을 구해냈던 프랑스 르 샹봉(Le Chambon-sur-Lignon) 마을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열방의 의인들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사례들은 제주4·3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얼굴 가운데 일부

에 지나지 않는다. 4·3은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과 직결된 

수많은 스토리들을 품고 있다. 평화교육의 관점에서 이 스토리들을 (재)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 평화교육

에 질서와 내용을 부여하는 작업의 첫 단계다. 이러한 미활용 자산들을 

(재)확인하고 목록화하는 작업이야말로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교육청 

같은 공공기관이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다. 이 점에서 독일의 수

많은 기념교육시설(Gedenk- und Lernstätte)은 역할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

하다. 이제는 추모에 있는 제주4·3평화재단 활동의 무게 중심을 교육청 

및 대학교들과의 연계 속에서 교육으로 옮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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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국가 사회주의 하에 희생된 신티와 로마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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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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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한 4·3 기억의 세대전승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은 무엇일까? 

첫째, 공교육과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미국에서 유대인 조직들이 

홀로코스트를 각 주의 공교육 과정에서 의무 사항으로 만들기 위해 애써

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서구의 홀로코스트 교육 사례를 볼 때, 역사와 

사회 교과에 4·3을 상세하게 다루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초-중-고로 이어지는 급별 연속성을 확보하고, 이와 함께 문학·윤리·미

술·음악 교과와의 연계 속에서 4·3을 다루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효율적

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대치 목표다. 학교 교육에서 당장 실행 가능한 것

은 <범교과 주제 학습>의 효율적 활용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4·3의 내

용 요소들을 민주시민교육, 인권교육, (평화)통일교육, 다문화교육, 환경

교육 목적에 부합하도록 분류하고 재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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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국내외대학생 4·3평화캠프 중 해설을 듣는 학생들

둘째, 학교 교사들과의 협력 방안을 다각화해야 한다. 급별 기초 교재 

제공과 단기 연수 프로그램 운영은 시작에 불과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양한 교육 자료를 개발하고, 온라인에서 활용될 수 있는 멀티미디어 프

로그램 제작 보급에 힘써야 한다. 단기 연수 프로그램도 기초-심화-창의

개발 과정으로 구분하여 이미 연수에 참여했던 전국 교사들에 대한 체계

적인 능력 계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미국 중등교사들의 

학습모임인 ‘역사·우리와의 대면(Facing History and Ourselves)’의 활

동을 참조하면 좋겠다. 

셋째, 4·3교육과 현재적 필요 사이의 연관성(Gegenwartsbezug)을 확

보해야 한다. 4·3의 내용 요소들 가운데 우리 시대 교육에서 강조되고 있는 

가치들, 즉 자율성, 비판, 용기, 참여, 저항, 연대, 법치, 정의, 인도, 양심, 

온정, 공감, 인권, 관용, 치유, 상생과 직결된 것들을 우선적으로 추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과거

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원자료와 증인들의 증언에는 시간의 거리와 

상황의 차이를 초월하게 만드는 특유의 힘이 담겨있다. 진정성에서 비롯

되는 이 과거의 힘에 의거할 때, 기이한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청소년들

을 위해 열어줄 수 있다. 이를 위해 4·3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원자료와 

증언들 가운데 교육적 효과가 높은 것을 선별·복제해서 전시에 배치하면 

좋겠다. 과거와의 조우와 대면은 오프라인에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나

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라이브러리 자료를 활용하여 청소년들

이 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과거를 진정성 있게 체험하는 프로그램들을 제

작했다. 소장 자료의 제약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4·3의 경우

도 아카이브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학생들이 폭력적 과거와 대면

을 통해 내적 동요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을 통해 과거 사

건의 목격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그들을 대신하여 이야기 할 사후 

증인들을 육성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앞으로 기억의 세대전승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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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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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글 
김동현 문학평론가 

  고

 

  어

  사

  아

-

  

  않

,

,

통점(痛點)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기억

상처 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상처 없이, 

고통은 멀리….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아니 그렇게 

살아지기를…. 하지만 우리는 안다. 삶은 그렇게 살

아질 수 없는 비극의 칼날을 품고 있는 잔혹한 여정

임을. 잔뜩 찌푸린 하늘이 간혹 허락하는 짧은 햇살

이 삶의 희망이라면, 우리는 그 찰나의 희망으로 살

아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끝없는 결핍의 사막의 

끝에서 만나는 차갑고 강렬한 물의 기억으로 우리는 

겨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토록 멀리 하고 

싶은 상처를, 외면하고픈 삶의 절망을 현재의 시간

에 새겨넣는다. 한림원 노벨위원회가 “역사적 트라

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문학상 수상 이유를 밝힌 것처럼, 

한강은 삶의 누추함에 눈을 돌린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의 현대사 2부작이 노벨

문학상 수상의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임은 노벨위원

회의 수상 경위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 강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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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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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을 다뤘던 한강이 제주4·3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광주와 제주가 현대사라는 분모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

는 부족하다. 그것은 데뷔작인 『붉은 닻』에서부터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피로한 삶’에 대한 관심인지도 모른다. 한강 문학

의 시작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87년 6월 항쟁으로 상징되는 ‘혁명/

운동’이라는 거대담론의 물살이 빠르게 사라지던 즈음이었다. 키치적 순

발력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가벼움이 역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을 

때 한강은 당대와 다른 상상력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김병익은 그의 첫 작품집인 『여수의 사랑』에서 “한강의 그 모습들은 

우리의 가난한, 예컨대, 빈곤과 거기서 빚어진 가정의 파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전시대적 세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바 있다. 가벼움

과 모던함으로 무장한 일군의 90년대 작가와는 다른 모습을 김병익은 한

강의 소설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인간의 지울 수 없는 운명적 슬픔”, “삶

의 비애적 서정”, “세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이라는 말로 젊은 소설가 한

강의 작품을 평가했던 김병익의 말처럼 한강의 현대사 2부작 또한 피하고 

싶었으나, 차라리 피할 수 없었던, 역사라는 이름으로 새겨진 상처의 몸

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한강이 광주와 제주를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연약

한 개인의 삶의 현재성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작별하지 않는다』의 시작이 눈과 상처에서 시작된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장악하는 눈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

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우리의 현재가 과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실존적 인식으로 이어지는 상징이다. 작가 자신의 분

신처럼 느껴지는 주인공 경하가 오랜 시간 광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유는 단지 학살과 죽음의 역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무 묘지로 묘사되는 수많은 죽음의 고통을 현실의 자리

에 기입하고자 하는 신체적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살과 죽음을 

과거에 벌어졌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되는 고통의 연속

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야 했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 완결되지만 살아 남은 자

에게 죽음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이었다. 그렇기에 한강은 고통에

서 시작하자고 말한다. 기억은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통점에서 

비로소 기억은 피어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소설 도입부에서 손가락이 잘

린 인선의 서술. 

손가락이 잘린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인선은 죽음을 떠올린다. “총에 맞고”, “칼

에 베여” 죽은 사람들. 손가락이 잘리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의 고통은 죽은 자들과 

함께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을 자각하는 순간, 타자의 고통이 자신에게

로 스며든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을 가리지 않는 고통의 연대. 

그렇게 통점으로부터 기억은 피어난다.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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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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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여다볼수록 고통뿐이라도

인선의 병실을 찾은 경하는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상

처를 응시하는 일이 더 큰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3분마다 봉합 부위를 

바늘로 찔러야만 묶어놓은 신경줄이 풀리지 않는다는 대목은 상처를 정면으

로 마주하는 일이 ‘상처를 기억하는’ 시작임을 말해준다. 들여다볼수록 고통스

럽더라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일. 한강의 소설이 제주4·3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소설은 제주4·3 당시 벌어졌던 사건의 서술만

으로 진행되지 않는다.(익숙한 제주4·3 서사를 기대하고 책을 펼쳤다면 꽤 끈

기있게 책을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오히려 경하와 인선의 이야기를 통해 우

리는 어떻게 기억을 마주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겠

다는 선언적이고 평면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기억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다. 이러한 기억의 현재성을 풍부한 질감으로 구성하는 것은 바로 눈이다. 소

설의 첫 시작 또한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고 시작하지만 작품 속에서 눈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동시에 기억의 시원과 마주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인선은 어린 시절 과거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견딜 수 없어 

가출을 감행한다.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던 어머니의 모습과 소리를 인선은 “지옥이었다”라고 말

한다. 어머니의 고통이 자신의 “인생을 더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두

지 않겠다”면서 인선은 서울로 무작정 가출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발을 헛디

뎌 축대 아래로 쓰러져 버린 인선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열흘 만에 인선

이 의식을 차렸을 때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자신의 딸이 다쳤을 거라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 오기 전
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
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81쪽)

꿈속 딸의 얼굴에서 녹지 않는 눈을 보고, 딸의 사고를 직감했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 그에게 눈은 70년 전 참혹했던 기억을 상기하는 기억의 시원이

다. 오랜 시간 혼자만 간직했던 기억을 딸에게 전하는 말의 공유이다. 그것

은 70년 전 죽임을 당한 “얼굴에 쌓인 눈을 한 사람씩 닦아가”며 가족의 시

신을 찾아야만 했던 어린 아이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상처이자, 인선이 “활

주로 아래 뼈들의 사진”을 마주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렇기에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었는데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어머

니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가 되고 만다. 날이 풀려 한나절이면 

녹고 마는 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내렸던 순간마저 의심하게 만

드는 찰나의 강설. 하지만 한강은 말한다. 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기

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눈도 끊임없이 흔들리며 나와 너를, 어제와 오

늘을 오고가며 기억을 환기시키고 있음을. 그것을 한강은 순환하는 눈의 상

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만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
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
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
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
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136쪽)

그렇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70년 

전의 기억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이 신체의 소멸일지라도 기억이 사라지

지 않는 한, 죽음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하

더라도 물의 흔적은, 물의 기억은 영원히 대기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들여

다볼수록 고통뿐일지라도, 사라진 눈의 기억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약

속이자, 다짐이다. 차마 고통일지라도, 기억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을, 눈송이의 무게로 말하는 또 다른 낙하다. 그 낙하를 기억하는 한, 그 무

게를 감당하는 한, 기억은 영원의 자리에서 흐를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는 그렇게 시간을, 기억을, 시대를 잊지 않겠다는 하나의 은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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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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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대전승, 잇다

글 
권연우 세인트 존스베리 아카데미 제주 11학년

국제학교 4·3동아리 

‘4·3 ASA’의 4·3알리기 활동과 포부

7,8살 무렵 추석을 앞둔 어느 주말, 저는 아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한참

을 달려 한 오름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빠는 그 전에도 몇 번 갔었다고 하지만 

제 기억은 그때가 처음으로 남아있습니다. 긴 억새와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

리던 수풀을 지나 도착한 곳은 다랑쉬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수 십 년 전, 제 

또래 어린아이와 엄마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억울하게 숨졌다는 이야

기, 여전히 굴 속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

다. 그때 저의 첫 질문은 “그런데 왜 커다란 돌이 막고 있어?”였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제주4·3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부

모님과 함께 제주 곳곳의 4·3유적지를 다니며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며 4·3유적지를 둘러

본 경험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험의 즐거움도 컸지만, 

넓은 자연과 고요 속에서 느낀 4·3의 무게감은 어린 제게도 큰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4·3을 깊이 이해하고

자 노력했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1년 반 동안 캐나다를 다녀왔고 

국제학교에 진학했지만 4·3은 여전히 제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제가 다니

는 국제학교 친구들이 4·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

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저는 친구들과 외국

인 선생님들에게 4·3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

다. 그러나 친구 대부분은 4·3에 대한 제대로 알

지 못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못했

내년 4월 4·3 유적지 투어, 

영어교육도시 4개 학교가 함께하는 

4·3WeeK를 통해 4·3을 

다른나라, 다른 지역에 알리고파…

2011년 다랑쉬굴 방문 (당시 만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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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대전승,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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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저는 이러한 반응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인지 고민 끝에 학교에 4·3 동아리인 4·3 ASA(After School Activity)를 만들

어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관심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동아리 활동의 첫걸음으로 우리는 4·3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함께 시청했습

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친구들은 사건의 배경과 당시의 참상을 이해하게 됐고 

4·3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이 생긴 듯 보였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제주4·3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영문판을 읽고 각자 소감을 작성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친

구들이 이 소설을 읽고 4·3의 참담함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점점 공감하게 된 것

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제주4·3평화기념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우리들은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을 보며 사건의 비

극성과 희생자들의 아픔에 대해 더욱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학기 저는 6개월 동안 미국 버몬트의 본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습니

다. 저는 미국에서도 4·3에 대한 활동을 이어가고자, 미국 친구들에게 4·3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4월에 보스턴에서 재미제주4·3

유족회에서 주최하는 추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혹시

나 하고 유족회에 연락을 드렸고, 유족회장님께서는 저에게 제주4·3희생자 미

주 추념회에서 연설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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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회에서 연설하는 권연우 학생

뉴잉글랜드한국학교 합창단

그 기회를 통해 저는 지금도 가자 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

정하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하기에 

4·3을 공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

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4·3이 어떤 해결 과정을 거쳐 왔는지 살펴봐

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추념식 참가자들이 대부분 한국인인 점을 보며 

저는 아직 4·3의 세계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 경험 속에서 느꼈던 아쉬움들은 풀기 위해 몇 가지 도전에 나서려고 

합니다.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4·3을 알리기 위해 제 주변에서부터 방법을 찾아

보려 합니다. 먼저 제가 지내고 있는 영어교육도시 안에 4개 학교, 600명의 외

국인 교사들을 대상으로 내년 4월을 맞아 투어 프로그램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물론 어른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국제학교에서 처음 동아리를 만들 때 4·3을 쉽게 알릴 수 있는 청소년을 위

한 콘텐츠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콘텐츠도 만들고 싶습니다. 다랑쉬굴이나 큰넓궤 같이 지금은 들

어갈 수 없는 공간을 요즘 제 또래들이 흥미 있어 하는 가상현실로 재현하고 여

기에 당시 굴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더하는 콘텐츠가 있다면 보다 많은 

친구들이 4·3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내년 4월에는 영어교육도시에 있는 4개 학교에서 함께 4·3WEEK 행사를 갖

는 꿈도 꾸고 있습니다. 1,400명이 넘는 외국인들과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온 4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4월을 맞아 다양한 강연회와 토론,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면 4·3을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

각하며 올해 ‘청소년정책제안대회’에 제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이뤄진다면 내년 4·3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 심사

에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어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주

4·3을 알리고 기리는 활동을 지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청소년이 4·3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통해 역사와 평화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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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세대전승,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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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과 거름

걸음과 거름

40  

일본에서의 제주4·3운동, 그 여정
- 모든 차별과 폭력, 학살에 반대하는 평화를 꿈꾸며

오광현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 회장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4·3운동을 오래도록 펼쳐 온 오광현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 회장. 1957년 오

사카시 이쿠노구에서 태어난 재일제주인 2세인 그의 부모님은 제주도 중문 하원 출신이다. 이제는 일본 내
에서 너무도 유명한 관광명소가 된 코리아타운이 조선시장이라 불리던 시절, 재일제주인이 많이 모여사는 
이카이노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계속 일본 학교를 다녔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며 재일동포 민족단체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

고, ‘오광현’이라는 민족명,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쿠노 지역활동 협의회’ 간사, ‘성공회 이쿠노센터’ 
총주사 등 오사카시 이쿠노구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1998년 오사카
에서 처음으로 열린 제주4·3희생자 위령제를 시작으로, 오사카 제주4·3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2009년,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그 역할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계속해서 제주4·3운동에 헌신하겠다는 그를 오사카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자리한 코리안북카페 ‘책자리’에서 만났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한동안 제주도에 다녀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제주도에 볼 일이 있어서 갔는데 마

침 일정이 잘 맞아서, <제주4·3평화포럼> 행사에도 

참가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과거청산 사

례들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제주4·3의 

과제들과 트라우마 치료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고민을 갖게 됐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제주4·3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주4·3 

특별법 개정안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 같던데 우리 

재일동포들의 특수한 상황과 요구가 잘 반영되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도 선물로 

받아왔습니다. 제주4·3이 문학작품을 통해 세상 사

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진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제

가 김석범 선생님의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통해 제주4·3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처

럼 말이죠.

 오랜만에 제주도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나요? 

대담·정리 

김현태 제주4·3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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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과 거름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던 1974년의 일이니 꼬

박 50년이 지났네요. 고교 시절에는 소설가가 꿈이어

서 학교 도서관을 애용했는데, 어느 날 사서 선생님

께서 『까마귀의 죽음』을 추천해주셨어요. 아마도 제

가 재일코리안인 걸 알고 그러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작가 김석범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

죠. 김석범이라고 민족명을 쓰는 걸 보니 한국 작가

인가 했는데 저와 같은 재일동포라는 사실에 놀랐어

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소설의 내용이 충격적이었죠. 

곧바로 아버지께 제주4·3이 대체 뭔지 여쭤봤어

요. 그러자 아버지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다짜고짜 

제 따귀를 때리시는 게 아니겠어요? 도대체 그런 이

야기는 어디서 들었냐며 두 번 다시 꺼내지 말라고 

하셨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격정어린 반응을 

보고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 이후로 한동안은 제주

4·3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대학교에 입학해 

역사수업에서 『4·3봉기』라는 책을 읽고 공부하기도 

했지만,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고, 아버지

께서도 197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제주4·3에 대해

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생각

하면 너무 아쉬워요.

1년 재수를 하고 1977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

다. 당시엔 재일코리안에 대한 취직차별도 심해서 

아무리 좋은 학교를 졸업해도 괜찮은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부모님들

이 다들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라고 권하셨죠. 저는 

워낙에 문학소년이었던 터라 이과를 선택하기 싫다

고 버텼는데, 막내 한 명 정도는 자기 원하는대로 살 

수 있게 해줘도 되지 않냐는 큰형님의 지지도 있고 

해서 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대학생이  되고  한문연(한국문화연구회)이라는 

써클에 가입했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레 한학동(재일

한국학생동맹)이라는 민족운동단체에도 참여했습니

다. 그러면서 우리말도 배우고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우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도 했

습니다. 지문날인 거부와 같은 재일동포 인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아예 이쿠

노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을 하게 됐고 지금

까지 이르렀네요. 

  일본에서 태어나 제주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을 텐데, 언제 제주4·3을 처음 알게 되었나요? 

01
고등학교 도서실에서 오광현 회장(당시 고2, 1974년)

1982년에 “이쿠노 지역활동 협의회” 간사로 시

민운동을 시작했는데 한국으로 연수를 가게 됐습니

다. 그렇게 처음으로 고향 제주도를 방문하게 됐죠. 

가로등이 없어서 동네가 무척 어두웠던 기억이며, 

작은 아버지댁 화장실을 사용하기 무서웠던 기억 등

이 생생한데요, 바로 이 때 만난 사촌 형님을 통해서 

그 형님의 아버지, 제게는 샛아버지가 제주4·3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처음 듣게 됐어요. 그러자 8년 

전 『까마귀의 죽음』을 읽고 아버지께 여쭤봤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죠. 아버지께서는 당신 동생이 제주

4·3으로 희생되었는데도 제주4·3에 대해 묻는 제게 

오히려 화를 내고 더 이상 알려들지 말라고 하셨죠. 

그러셨던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싶어요. 

우리 재일제주인들 중에는 이런 경우가 참 많습

니다. 1세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에게 한 말씀도 안 해주고 떠나신 분들이 참 

많아요. 한국 사회가 민주화가 되고 제주4·3특별법

이 제정되고 이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시작되었

는데도, 여기 일본에는 여전히 제주4·3에 대해서 말

하기를 꺼려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조국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식민지 종주국 일본이라는 곳

에서 살아가는 우리 재일동포들의 역사, 특수한 상

황을 고려해야만 하죠.  

 4·3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02

03

일본 최초의 제주4·3 증언 집회(2008년 3월)

(좌)강 실(초대 재일본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이덕구 조카)

(중)이복숙(증언자, 이덕구 조카)

(우)오광현

제62주년 재일본제주4·3희생자위령제(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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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과 거름

제주4·3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한다면 그 주인공은 

누가 되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역시 오랜 시

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가슴 속으로만 앓고 지낸 당

사자, 4·3유족 1세대인 우리 아방, 어멍들이었죠. 그

렇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드릴 수 

있을까 싶었고, 어려서부터 종종 접했던 심방이 떠올

랐어요. 

저는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우리 제주도의 문화와 

관습을 생각하면 심방을 모시고 굿을 한 번 해야 한다

고 강하게 주장했어요. 처음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

만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600명이 넘는 참석자가 이

쿠노구민센터에 모였고, 1세대 어르신들이 조금이나

마 한풀이를 하셨던 것 같아요. 문경수 교수는 이 날

을 계기로 오사카에서의 제주4·3운동이 대중적 기반

을 얻게 되었다고 종종 말씀하시죠. 이렇게 해서 매

해 4월이면 오사카에서 제주4·3희생자 위령제를 지

내게 됐습니다. 

2000년에는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도 만

들었습니다. 유족과 재일제주인 등 당사자성을 중시

하지만, 오사카 제주4·3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

한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재일제주인 뿐

만 아니라 여러 지역 출신의 재일동포들, 뉴커머라

고 불리는 신정주자들, 그리고 일본인들이 함께 하

는 운동으로 제주4·3이 가진 보편적 가치를 일본 사

회에 널리 알리고자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첫 위령제와 그 이후 오사카에서의 제주4·3운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네, 도쿄보다 10년 뒤에야 오사카에서 첫 위령제

가 열렸습니다. 이곳 오사카에는 재일제주인이 훨씬 

더 많이 모여 살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제

주4·3운동을 시작하기가 더 어려운 측면도 있었어

요. 한반도의 분단은 민단과 총련의 대립을 불러왔

고, 남에도 북에도 친척들이 있는 우리 재일동포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한국이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더

라도 제주4·3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이 너무 힘들었

죠.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렵

습니다. 

2000년에 김시종 선생님과 김석범 선생님의 역사

적인 대담을 오사카에서 개최했고 이 내용이 『왜 계

속 써 왔는가 · 왜 침묵해 왔는가 - 제주도 4·3 사

건의 기억과 문학』(2007)으로 출판되기도 했는데요, 

이 두 분이 바로 그러한 우리 재일제주인의 상황을 

아주 잘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여러모로 정말 뜻깊

은 대담이었습니다. 

   오사카에서 첫 위령제가 제주4·3 50주년이던 1998년에 열린 것도 무관하지 않겠군요?

제주도에 가 보면 여기저기 학살 현장이 참 많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위령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잖아요? 제 아버지 고향인 중문 하원만 해도 근처

에 위령비가 여럿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위령비

들을 볼 때면, 제주4·3 “또 하나의 현장”인 일본 땅에

도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어요. 오사

카 실행위원회 멤버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제

주4·3 위령제나 관련 활동은 누가, 어떻게 계속 이어

갈까 걱정도 됐구요. 그래서 오사카에도 위령비를 세

운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제주4·3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테고, 지금처럼 매해 많은 사람을 모

아서 행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후배들에게 전해주

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그런데 오사카 실행위원회 멤버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봐요. 2018년에는 70주년 관련 행사

가 많아서 이래저래 무척 바쁘던 때였는데, 후지나

가 타케시 교수가 우리도 위령비 건립을 추진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구요. 다들 대찬성이었고 계획 수

립에 들어갔습니다만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

습니다. 

위령비를 세운다면 재일제주인이 많이 사는 이쿠노

구 코리아타운 주변이 좋은데, 공공부지는 일본 행정

이나 마을 주민회로부터 협조와 허가를 구하기가 쉽

지 않아서 사유지에 세우는 방향으로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통국사 최무애 주지스님께서 흔쾌

히 대웅전 앞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위령비 건립 부지 문제는 해결이 되고, 위

령비 돌은 아무래도 제주도에서 가져와야겠다 싶었

  제주4·3운동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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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제주인 연극인들이 만든 제주4·3창작극 “뱀의 섬” 상연 모습 
/ 2011년 위령제

 제76주년 재일본제주4·3희생자위령제(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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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어디서 얼마나 큰 돌을 어떻게 반출해서 일본

까지 가져올 수 있을지도 문제였어요. 제주도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이지치 노리코 교수가 제주도

에서 돌을 가져올 생각이라면, 제주도의 끈끈한 마

을공동체 문화를 생각해서 제주4·3 당시에 존재했

던 마을별에서 하나씩 다 가져와야 한다고 하더군

요. 그래서 마을이 몇 개인지 찾아봤더니 1948년 당

시에 178개나 있었더라구요.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챙기나 싶었는데,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연구소 

등 현지에 계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178개 마을 모

두에서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돌을 하나씩 챙겨서 

일본으로 보내왔습니다. 

그 돌들을 제주도 지도와 최대한 비슷하게 배치

하고 마을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넣었습니다. 그리

고 어린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 마을의 돌

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최대한 낮은 높이로 배치

한 것도 오사카 위령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크고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위령비가 아닐지도 모르겠지

만, 건립 제안에서부터 178개 마을에서 돌을 수집

하고 가공해서 오사카까지 운반하고, 위령비를 세우

고 제막식을 끝낼 때까지 그 모든 순간순간에는, 제

주를 떠나 일본으로 온 선조들과 또 그 후손들을 헤

아리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

나 지자체 지원을 받지 않고 오로지 한국과 일본 시

민들의 힘으로만 위령비를 세운 것도 자랑스럽습니

다. 그렇게 통국사에 위령비가 세워진 이후로 오사

카에서의 제주4·3 관련 행사는 통국사에서 안정적

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이 좀 놓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됐어도 여전히 배

제된 존재들이 있어요. 호적 관계가 복잡하고 어려

워서 그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운 사람도 많구요. 당

사자인 1세대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긴 했지만 2세

대들 역시 그 트라우마가 만만치 않습니다. 재일제

주인 제주4·3 피해실태 추가조사를 진행해보니 아

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여전히 산적해있습니다. 그

렇게 보면, 우리에겐  변함없이 많은 과제가 남아있

는 것만 같아요. 일본 유족회를 다시 잘 정비해서 이

런 과제들에 최선을 다해서 대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차세대 육성과 운

동의 계승 문제입니다만, “제주4·3을 생각하는 모

임-오사카”라는 이름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젊은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이어가주고 있어서 정말 기쁠 

따름입니다. 우리 오사카에는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

이 제주4·3운동에 함께하고 있다고 제가 요즘에는 

어딜 가나 자랑을 많이 합니다. 해마다 5월이면 일

본에서 “차세대를 위한 제주4·3평화기행”을 떠나는

데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제주의 많은 분들께

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시는 것도 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오사카와 제주도가 긴밀히 협력

하고, 우리 윗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해 시너지효

과를 크게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제주4·3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화라고 생

각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

쟁과 학살이 이어지고 있잖아요. 모든 차별과 폭력, 

학살에 반대하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위

해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제주4·3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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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 덴노지구 
통국사  내  재일본
제주4·3희생자위
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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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포커스

‘끝없는 제주4·3 흔들기’ 
시급한 역사 왜곡 처벌법

글 
김정호 제주의소리 기자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뉴라이트로 불리는 극우세력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됐

다. 극단적인 역사 인식은 건국절과 역사 교과서 논란으로 이어졌다. 4·3 희생자를 폭도로 

규정하고 제주4·3평화공원을 폭도공원으로 매도하는 망언까지 나왔다. 2013년 박근혜 정부

가 출범한 이후에도 근현대사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역사 흔들기는 계속됐다.

참다못한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46개 단체는 2015년 6월 ‘화해와 상생 4·3 지키기 

범도민회’를 출범시켰다. 범도민회는 극우세력의 지속적인 4·3 왜곡과 정부의 안일한 대응

에 일침을 가했다. 범도민결의대회로 지역 여론을 결집하고 상경 투쟁을 통해 도민들의 성

난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정부에 전달했다. 정치권을 향해서도 책임 있는 조치와 대응을 촉

구했다.

도민들의 열망은 2017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

별법’(이하 4·3특별법) 개정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당시 오영훈 국회의원은 4·3의 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행위자를 처벌하는 내용의 4·3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

했다. 개정안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제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2020년 자

동 폐기됐다.

제21대 국회에 재입성한 오 의원은 2020년 7월 개정안을 다시 발의했다. 당시 이해찬 

대표를 포함해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137명이 서명에 동참하며 힘을 보탰다. 개정

안 제15조에는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

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거나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해 희생자나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했다. 제38조 벌칙조항도 신설해 희생자 또

는 유족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명예를 훼손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

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안건 심사과정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은 ‘형법’이나 ‘정보

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면 

된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정부도 선언적 의미는 있지만 벌칙을 규정한 입법 사례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결국 ‘진상조사 결과 부인 또는 왜곡’이라는 적용 문구와 처벌 규정

이 빠진 채 개정안은 2021년 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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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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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본회

의 문턱을 넘었다. 개정안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한 자는 5년 이

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벌칙 조항이 담겼다. 4·3특별법 개

정안과 달리 학문이나 연구 등을 목적으로 한 경우 처벌하지 않도록 ‘위법성 조각 사유’를 

추가하면서 전격적인 여야 합의가 이뤄졌다. 위법성 조각은 형법 제310조에 따라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범죄 불성립 요건이다. 

이후 역사 왜곡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지만 4·3 흔들기는 계속됐다.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을 앞두고 제주 곳곳에 4·3 왜곡 현수막이 내걸렸다. 일부 보수 정치인들

도 망언을 내뱉었다. 이에 2023년 3월 당시 송재호 국회의원이 처벌 규정을 담은 4·3특별

법 개정안을 재차 발의했다. 전부개정 과정에서 삭제된 ‘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는’ 문구를 되살렸다. 이를 어기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

금형에 처하도록 처벌 규정도 신설했다. 세 번째 입법 시도에도 불구하고 명확성과 위법성 

조각 누락은 논쟁거리가 됐다. 결국 개정안도 제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폐기되는 

운명을 맞았다.

제22대 국회에서는 정춘생, 위성곤 국회의원이 입법을 준비하고 있다. 전 의원은 5·18

특별법 사례를 참고해 신문과 방송, 출판물, 전시물, 공연물,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등 

허위사실 유포의 방식을 구체화했다. 대신 예술이나 학문, 연구, 학설 등의 목적으로 한 

경우 예외를 두도록 했다. 위성곤 의원은 ‘역사적 사실을 부인·왜곡·날조하는 행위’를 포함 

시켜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처벌 기준도 높였다.

개정안에 포함된 처벌 규정은 4·3의 본질을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방지하

기 위함이다. 화해와 상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색깔론과 악의적 지역주의를 앞세워 4·3 

희생자와 유족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세 차례 입법 과정을 거쳐 처

벌 조항에 대한 논의는 무르익었다. 법안심사 과정에서 범죄의 성립요건에 대한 조율이 이

뤄진다면 제22대 국회 처리도 가능할 전망이다. 역사 왜곡은 분열과 정체성의 혼란, 더 나

아가 미래 세대에 대한 오해와 무관심을 유발할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

다’는 말이 있다. 4·3 왜곡에 대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국가폭력으로 짓밟

힌 피해자들을 보호할 의무도 존재한다. 네 번째 입법화를 앞두고 도민 사회의 관심과 정

치권의 입법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4·3특별법 전부개정안(오영훈)

2017년 12월 발의(폐기)

4·3특별법 전부개정안(오영훈)

2020년 7월 발의(수정가결)

4·3특별법 전부개정안(위원장)

2021년 2월 국회 본회의 통과

제12조(명예회복 및 보상 등) 
③ 누구든지 위원회의 결정으로 인정
된 제주4·3사건의 진실을 부정·왜곡하
여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2조(벌칙) 
②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5.  제12조제3항을  위반하여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부정·왜곡하여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
한 사람

제15조(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
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
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거나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
포하여 희생자나 유족의 명예를 훼손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8조(벌칙) 제15조를 위반하여 희생
자 또는 유족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명
예를 훼손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3조(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
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
상조사 결과 및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
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8조(벌칙) 삭제

4·3특별법 일부개정안(송재호)

2023년 3월 발의(폐기)

4·3특별법 일부개정안(정춘생)

2024년 6월 발의(상정)

4·3특별법 일부개정안(위성곤)

2024년 9월 발의(상정)

제13조(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거
나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1조(벌칙)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
는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
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3.  제13조를 위반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

제13조(제주4·3사건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금지) 
①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
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및 제주4·3사건에 대한 
허위의 사실을 각 호의 방법으로 유포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신문, 잡지, 방송, 그 밖에 출판물 

또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제1호에 따른 정보통신망
의 이용

2.  전시물 또는 공연물의 전시ㆍ게

시 또는 상영

3.  그 밖에 공연히 진행한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집회, 가두연
설 등에서의 발언

②  제1항의  행위가  예술ㆍ학문,  연
구ㆍ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
과정에 관한 보도를 위한 것이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한 경우에
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제13조(희생자 및 유족의 권익 보호) 
①누구든지 공개된 집회 또는 출판물, 
신문, 방송, 인터넷, 사회연결망서비스 
등의 매체를 통하여 제주4·3사건의 진
상조사 결과 및 제주4·3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역사적 사실
을  부인ㆍ왜곡ㆍ날조하거나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
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제1항의  행위가  예술ㆍ학문,  연
구ㆍ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
과정에 관한 보도, 기타 이와 유사한 
목적에 기여하는 경우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제31조(벌칙)
④ 제13조를 위반하여 제주4·3사건에 
대하여 부인ㆍ비방ㆍ왜곡ㆍ날조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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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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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김경자(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 1938년생)

 ‘♬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오늘도 오빠를 그리워합니다

4·3 당시 이유도 모른 채 어디론가 잡혀가, 아직도 돌아

오지 않은 행방불명 희생자들이 많습니다. 그 숫자는 무려 
3,718명.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행방불
명자들, 그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유족들은 눈물로 하루하
루를 지새우고 있습니다. <4·3과 증언> 이번 겨울호에서는, 
4·3 당시 행방불명된 후 돌아오지 않은 오빠를 기다리며 살
아가고 있는 유족 김경자님의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주 -

구술채록·정리·사진

안현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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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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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제주시에서 머물렀던 때를 제외하고는 서

귀포시 성산읍 난산리에서 태어나 한평생 난산리에서 살아온 1938년생 

김경자입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4·3은 독한 시련이었듯 나에게

도 4·3은 살아오는 내내 모진 아픔이었습니다. 4·3 그 난리로 한 명뿐인 

형제인 오빠를 잃었고, 그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열 살에 맞닥뜨린 그 엄청난 사건으로 인한 아픔은 아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 재주 많았던 오빠, 열일곱에 잡혀가

♬ 오빠 생각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아직도 동요 ‘♬ 오빠 생각’만 들으면 눈물이 흐릅니다. 마치 나를 위

해 만든 곡 같다는 생각에 오빠 생각날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어느덧 7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빠를 잃은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가시지 않습니다. 평생 오빠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나는 아버지 김남학, 

어머니 오당생의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

지가 돌아가신 까닭에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전기 관련 일을 하셨습니다. 4·3

이 발생하기 전, 그곳에서 일하다가 감전 사고를 당하면서 몸이 좋지 않

게 되었고, 결국 일본에서 난산리로 귀향했습니다. 난산리에서 병을 구

완해보려고 했지만, 병원도 약도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끝내 돌아가

셨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원래 우리 형제는 4남매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의 언니와 작

은오빠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오빠와 저만 남았고, 아버지가 없었던 나

는 아버지 대신 큰오빠(이하 오빠)를 무척이나 따르며 의지했습니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던 오빠는 1931년생(호적상 1932년생)으로 

이름은 김영주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오빠는 참 다정하고 살가운 분이었

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태어난 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살뜰하게 보

살폈을 뿐 아니라, 피리 부는 것이며 바느질하는 것 등 못 하는 것이 없다

고 할 정도로 재주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초등학교 학예회 때 멋들어지게 피리를 연주했던 오빠의 모습입니다. 

4·3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오빠는 난산리에서 걸어서 중학교가 있

었던 읍내인 동남을 오고 갔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방과 후에는 동남에 

있는 양복점에서 보조일을 했었는데, 워낙 눈썰미도 좋고 야무져서 어깨

너머로 익힌 바느질 솜씨로 난산 초등학교 학생들 옷을 만들어줬던 기억

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재주 많고 다정했던 오빠가 4·3으로 행방불명이 된 것은, 

1949년 4월, 봄 무렵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난산리에서 동남으

로 (신작로가 아닌 중산간 길을 이용해) 통학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경

찰은 난산리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장대 중책을 맡았던 이

가 난산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던 오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학교를 마치고 중산간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고, 그

런 오빠를 발견한 경찰은 오빠를 산쪽 사람으로 생각하고 성산지서로 잡

아갔습니다.

오빠가 잡혀가 버리자 집안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오로지 오빠만을 의지해 살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할머니는 성산지서에 갇힌 오빠를 수발하러 아예 

경찰서 앞에 집을 빌려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해서 나르며 옥바라지를 했

고, 어머니는 정신을 놓아 버렸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경찰서에 구금된 오빠는 그 후 광주형무소로 옮겨졌

고, 또다시 개성소년형무소(확실한 기억이 아님)로 옮겨졌습니다. 특이

하게도 오빠는 그 형무소에서 양복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군복 만드

는 일을 했는데, 워낙 솜씨가 좋아 신임을 얻었던 터라 형무소장의 이름

으로 집에 편지가 온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를 구금시

켰다며 곧 석방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던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

습니다. 편지가 도착한 5일 후에 6·25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6·25가 터져 버린 후 오빠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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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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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행방불명자가 된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이

란 없다고 하지만 6·25 한국 전쟁이 10일 후에만이라도 터졌다면, 아니

면 그 전에 오빠가 석방되었다면 이렇게 한 맺힌 세월을 살지 않았을런지

도 모릅니다.

 

■ 외롭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나의 어린 시절은 늘 외로웠습니다. 재주 많았던 오빠가 행방불명되

자 어머니는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삶의 의지를 놔버렸습니다. 오빠 없이 

할머니와 어머니와 살아야 했기에 어린 나이에도 낫을 갈고 촐(띠)을 잘

랐습니다. 남들은 외동으로 자라 귀하게 자랐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남

자가 하는 일을 모두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아들 잃은 상심에 모

든 것을 놔버린 어머니는 어린 나를 거의 방치했고 그런 까닭에 먹은 것

이 없어 몸은 비쩍 마르고 회충에도 시달렸습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다행인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입니

다. 그때 당시 시대적 환경이 남자들은 학교에 보내면서도 여자들은 학교

에 보내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것은 있는 집이건 없는 집이건 마찬가지였

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으로 나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문패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세금이 얼마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우여곡절

이 많았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5학년 학습이 제일 중요하다

고 강조해서 어머니가 5학년 과정을 두 번이나 받게 한 까닭에 초등학교

를 7년동안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은 엄두조차 낼 수 없

었습니다. 다행히 인근 마을인 삼달리 하동에 있는 서당에 가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익혀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늘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도 남들처럼 오빠나 언니가 있었

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행방불명된 오빠가 돌아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말입니다. 만약에 오빠가 있었다면 공부도 더 했을터이고, 성장하

는 시기마다 값진 조언은 물론 다정한 보살핌을 받아 외롭지 않게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마치 파스를 바른 

것처럼 아릿하게 저려옵니다. 

 

■ ‘외방울’이라고 매운 시집살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와 보리, 고구마 

농사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동네는 밭농사를 주로 했고 그것 외

에 딱히 벌이가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업이 있었다면 초석 짜는 

일 정도였습니다. 초석이란 고운 짚으로 짠, 곡식을 널거나 방안 깔개로 

사용했던 멍석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난산리에서는 초석 짜는 일이 짭

짤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6·25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울 쪽의 가옥들이 

파괴되면서 임시방편으로 초석 천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옛날부

터 난산리 초석이 유명한 까닭에 많이 팔려나갔는데, 주문이 밀리면 자정

이 넘도록 초석 짜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4·3과  6·25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60년대 무렵, 당시 제주 여성들에겐 밭

일과 바다일 외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

니다. 나 또한 어머니 곁에서 밭일과 초석 

짜는 일을 하다 스물한 살 무렵 두 살 위

의 동네 총각 오치옥과 결혼했습니다. 하

지만 시집살이조차 만만치 않았습니다. 

혼자 외롭게 자란 티를 내지 않기 위

해 뭐든 열심히 했습니다. 남편은 4남 3녀

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위로 형님 두 분이 

일찍 먼저 가는 바람에 (큰형님 아홉 살에 

병사, 둘째 형님은 6·25 한국 전쟁에서 전

사) 큰아들 아닌 큰아들이 되어버렸습니

다. 남편은 자신은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

았지만, 동생은 어떻게든 고등교육을 받게 

하려고 고군분투했습니다. 당시 남편은 벌

통 장사를 했는데, 5월 초가 되면 벌통을 

싣고 육지로 나가서 일하다가 음력 8월 추

석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장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 빚이었

습니다. 벌통 장사로만은 5남매를 키울 수 

없어 초등학교 앞에서 가게를 해야만 했습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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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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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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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지금 같으면 슈퍼마켓 같은 가게인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연필

과 지우개도 팔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금과 쌀 등을 파는 만물상을 운영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내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제주시로 잠시 이사를 

했습니다. 제주시로 이사한 까닭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 

시름시름 앓은 아들이 너무나 걱정되어 사주를 봤더니 ‘아들은 엄마 밥을 

먹으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제주시에서 학교 다니게 했던 것

입니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이 서로 의지하며 연고가 있는 집에서 자취하

며 학교 다녔고, 나중에 3명의 아이들 또한 시내 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

스럽게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제주시에서는 여관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웠고, 난산리에서는 감귤

을 재배하고 있었기에 제주시에서 난산리로 매일 출퇴근하며 농사를 지

었습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양봉하면서 지었던 빚을 간신히 갚을 수가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시집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시부모님 봉양하며 살았지만, 

시집살이는 슬펐습니다. 시집오자마자 저를 두고 “외방울로 큰 거, 외방

울로 큰 거”라고 하셨고, 그 얘기는 시집살이 내내 계속되었습

니다. 외동으로 자라 일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릴적부터 낫을 갈고 

띠를 벨 정도로 험한 일을 했기에 웬만한 집안일이며 농사일은 

다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

씀하셨던 ‘외방울로 큰 거’라는 얘기는 지금도 트라우마가 될 

정도입니다. 혼자가 되고 싶어 혼자로 자란 것이 아니라 4·3이

라는 독한 시국을 만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가정사인

데, 외방울로 큰 거라고 하셨던 시부모님의 말씀은 참으로 맵고 

또 매웠습니다.

 

■ 딸 잃은 아픔 달래려 서예 시작

혼자 외롭게 자란 까닭에 형제가 많은 집이 무엇보다도 부

러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습니다. 위로 4

남매를 낳은 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이를 더 갖고 싶

어, 자궁에 좋다는 침을 맞으면서 딸을 더 낳았습니다. 

03

아들 둘, 딸 셋 5남매를 낳으니, 세상 부러운 게 없었습니다. 거기다 

5남매 모두 공부 머리까지 좋아서 큰 뒷바라지 없이도 명문대학으로 진

학했고, 교수로 또 치과의사로, 대기업 직원으로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늦게 얻은 막내딸이 세상을 떠

난 것입니다. 어려서 잘 먹지 못해 골골했던 나를 닮아서인지 늘 허약했

던 막내딸이었습니다. 몸은 비쩍 말랐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뒤 항

공사에 취직한 후 직장에서 인정받았던 딸이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

상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손톱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고 어디 한 군데 예

쁘지 않은 데가 없었던 막내딸의 죽음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이었습니다.

막내딸을 잃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5년간 집 밖을 나

가지 않고, 오로지 두문불출, 집에서만 살았습니다. 골목길에 나가서 마

을 사람들과 얘기 한번 나누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시들시들하고, 한

마디로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힘겹게 말을 해도 나오는 

소리는 ‘아이고… 아이고…’ 이런 곡소리뿐이었습니다. 하물며 동남에 일 

보러 나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나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보며 “정

신 차리라,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냅다 등을 세

게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진 정말 몰랐습니다. 이렇게 내가 우울증이 심했는지 말입니

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운명처럼 서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인대학에 갔다가 어떤 남자 어르신이 글을 쓰고 계

셨는데, 그 서예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때부터 복지회관 서예 교실을 다니며 붓글씨 쓰기에 매진했습니다. 

글씨를 쓰다 보니 눈물 흘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우울증 

약은 붓글씨 쓰는 것이었습니다. 붓글씨를 쓰면 딸을 잃은 슬픔을 달랠 

수가 있었고 오빠 잃은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글을 알아야 한다며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던 탓인지 내 의식 깊은 곳에는 항상 “글을 안 배우면 깜깜한 밤에 

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人生不學이면 如冥冥夜行이다).”라는 생

각이 있었습니다. 아픔을 달래려 붓을 들었지만 이제 서예는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먹을 갈고 화선지에 조심스럽게 글을 써나가는 

그 순간이 지금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03

04

04

딸 잃은 아픔 달래려 시작한 서예

김경자님의 서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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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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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그립고 그리운 오빠                                 

4·3이라는 모진 굴레는 70여 년 넘게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4·3 당

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든 오빠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결

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던 탓에 양자를 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양자 

또한 연락이 끊겨버렸습니다. 호적상에 양자가 자식으로 되어 있다 보니 

나 같은 경우에는 오빠의 유일한 형제임에도 유족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유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오빠의 유족으로 인정받은 것

이 아니라 4·3 당시 무장대 습격에 창 맞고 돌아가신 외조부의 유족으로 

지난 8월 인정되었고, 9월에 <제주4·3사건희생자유족증>을 발급받았습

니다. 

외조부인 오흥봉 할아버지는 난산리 옆 마을인 신풍리에서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그 자세한 사정은 4·3 당시 내가 어렸던 탓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더라면 내가 어느 정도 

커서 돌아가신 정황을 살펴봤겠지만, 옆 마을에 사셨던 까닭에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외할아버지뿐 아니라, 이모의 가족들도 성산 터진목(서북청년단 특별

중대에 끌려온 당시 성산읍과 구좌읍 관내 주민들이 감자공장 창고에 수

감돼 고문당하다 총살됐던 학살터, 주민 468명 희생)에서 희생되었습니

다. 오빠와 이모네는 경찰과 토벌대에 외할아버지는 무장대에, 양쪽에서 

희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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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오흥봉의 가족으로 발급받은 유족증

젊은 시절의 김경자님

앞서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만 들어도 오빠 생각이 난다고 할 정도로 

여전히 오빠가 늘 그립기만 합니다. 지난 8월 외조부의 유족으로 희생자 

유족증을 받은 이후 행여 오빠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을까 싶어 유전

자 검사에 참여했습니다. 최근에도 어떤 유족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부모

님이나 형제의 시신을 찾았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런 뉴스가 들려오

면 마치 내가 오빠의 시신을 찾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런 기쁨이 나에

게도 찾아와주길 아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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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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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창

사월의 창

“비극에서 상생으로” 

교과서에 실린 제주4·3

 

글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모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제주4·3’ 

지난 8월 30일에 내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할 새로운 한국사 교과서 검정 결

과가 공개되었다. 제주4·3 관련 서술은 중학교 교과서 7종, 고등학교 교과서 9종 

모두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 중인 한국사 교과서 보다 진일보한 서술도 

눈에 띄었다. 출판사마다 약간 편차는 있지만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제주4·3

에 대해 중요한 다섯 가지 관점을 골고루 짚었다. 

첫째, 제주4·3의 시작이 1947년 3·1절 기념행사 때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광복 직후부터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정을 향한 주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배경이라고 언급한 교과서도 있다. 

둘째, 1948년 4월 3일 봉기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위

한 것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제주4·3 봉기는 “통일 정부 수립을 위

한 노력”이라는 소단원에서 기술되고 있다. 

셋째, 미군정이 경찰과 서북청년단,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군대를 동원해 좌익 세

력과 사건 참여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는 사실을 적시

하였다. 

넷째, 1948년 11월부터 제주도 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에 초토

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민간인 피해자가 대규모로 발생하였다고 밝혔다. 희생자 추정

치가 전체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약 2만 5천~3만 명이라고 적시한 교과서도 

여럿 된다. “많은”, 주민“들”과 같이 막연한 표현이 아닌 구체적인 숫자로 표기한 것

은 제주4·3 사건의 진상규명이 도달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비설’, ‘행방불명인 표석’, ‘백비’ 등 제주4·3 사건을 둘러싼 추모 기념물

과 진상규명 노력을 소개하였다. 특히 동아출판과 씨마스, 비상교육 교과서는 4·3

특별법과 배보상, 특별법 전면 개정을 통한 군법회의 무죄 판결도 다루었다. 2023

년 3월을 기준으로 정부가 인정한 제주4·3 사건 희생자가 14,738명(도외 78명, 미

상 67명)이라는 사실까지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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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창

이번 2022 교육과정 개정에 따른 한국사 교과서의 제주4·3 사건 서술은 사건의 

정의와 배경, 진압 주체와 시기, 주요 사건의 전개, 봉기 세력과 희생자 규모, 추모

와 기억 활동에 이르기까지 제주4·3 사건을 둘러싼 역사서술의 ‘교과서’ 다운 정석

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속솜허라’에서 ‘이제사 말햄수다’에 이르기까지 

제주4·3이 교과서에서 이렇게 서

술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식 역

사로 다루어진다는 증거이다. 오랜 기

간 ‘속솜허라’ 했던 침묵의 역사가 ‘이

제사 말햄수다’의 대항기억으로 재구

성되기 시작한 때로부터도 30여 년

이 흘렀다. 진실을 드러내며 아픈 역

사를 치유하려는 노력은 국가의 진상

조사 움직임을 이끌었다. 지금과 같이 

교과서에 필수 학습 요소로 자리매김

하기까지는 2000년 1월 12일에 공포

된 「제주4·3산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

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결정적인 계

기가 되었다. 지난했던 진상규명의 노

력은 사실 복원과 피해 회복에 그치면 

안 되고 과거의 잘못을 사회적 기억으

로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완성되는 것

이다. 그래서 교과서를 올바로 서술하

기 위한 끊임없는 토론과 사회적 합의

가 더욱 중요하다. 

오랜 기간 ‘속솜허라’는 사회적 금

기를  형성한  부당한  억압에  교과서

도 한몫을 해왔다. 교과서에 제주4·3

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56년으로 거

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등학교 검정 교과서 10종 가운데 하나였던 탐구당 교과서는 

4·3을 “(북한)괴뢰정권은 남한의 독립을 방해하기 위하여…공산분자를 남한에 침투시

켜…제주도(1948.4.3.)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건으로 썼다. 이후 다른 검정교과서도 

북한의 괴뢰정권이 대한민국 파괴에 전력을 기울인 사건을 제주도 ‘폭동’과 여순 ‘반

란’으로 연결지었다. 이렇듯 ‘6·25전쟁’의 전사로서 북한의 사주와 공산세력의 침투로 

일어난 제주도 폭동과 여순반란이라는 서술은 놀랍게도 1990년대 초반까지 ‘국사’ 교

과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반공주의적 서사는 지금도 4·3을 왜곡하는 

기본 서사를 이루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제는 말햄

수다’로 발화한 제주4·3에 대한 본격

적인 연구와 진상규명이 시작되자 교

과서의 서술은 조금씩 변화했다. 한

때 ‘제주4·3항쟁’이라는 표현도 있었

지만 대체로 ‘제주도 4·3 사건’이라는 

중립적  표현이  보편화했다.  북한의 

사주와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가  아

닌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무장 

폭동으로 서술했던 것도 2002년부터

는 ‘좌우익 대립의 결과’로 일어난 사

건으로 바뀌었다. 제주4·3에 대한 역

사적 평가와 교육에서 또 한 번의 진

전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셈이다. 제7차 교육과정으로 발간된 

한국근·현대사 검정 교과서는 드디어 

제주4·3을 ‘단독 선거 반대 투쟁’으로 

정의했다.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

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과 함

께 가해자로 군인과 경찰, 우익청년

단체를 지목한 것은 ‘폭동’과 ‘반란’의 

서술에서 돌이켜보면 놀라운 진전이

라고 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은 냉전과 분단에 대한 저항이며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한 비극이었다.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제주 4·3사건이 어떻게 기억되는지 살펴보자. 

제주 4·3 사건, 비극에서 상생으로 

3. 1. 

삼일절 발포 사건

3. 10. 

삼일절 발포 사건에 대한 항의로 

 

관·민 총파업 돌입

3월 중  • 조천·모슬포 지서    

고문치사 사건 발생 

 

• 금릉리에서 경찰과 서북  

청년회가 민간인 즉결 처형

4. 3. 

무장봉기 발발

4. 28.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평화 협상

5. 1. 

 오라리 방화 사건  

 

 평화 협상 파기

5. 10. 

5·10 총선거, 

 

제주도 

2곳 선거구 투표 무효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 17.  통행금지 구역 설정 명령

10. 19.  여수·순천 10·19 사건

11. 17.  • 계엄 발표
 

• 초토화 작전 개시

5. 10. 

제주도 

2곳 선거구 

 

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6. 25.  •6· 25 전쟁 발발 
 

• 예비 검속 명분으로 집단 학살 

(정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등)

7. 27. 

정전 협정 체결

9. 21. 

한라산 통행금지 해제 

1947

1949

1950

1953

1954

1948

진압군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한라산 중산간 지역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중산간 지역 주민을 강제로 해안 마을로 이주시켰다.

삼일절 기념식이 끝나고 일어난 통일 정부 수립 요구 시위에서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일부 군중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

통행금지 구역 설정과 계엄령 선포

삼일절 발포 사건

제주 4·3 사건의 전개

5km

통행금지 구역

통행금지 포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문형순│성산포 경찰서장  

독립군 출신이다. 학살 독촉 

명령서에  ‘부당하므로  불이

행’이라는 글을 써 보내며 거

부하였다.

김익렬│제주도 국방 경비대 9연대장 

제주 

4·3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무장대와 직접 담판을 

벌였다. 강경 진압을 

거부하다가 해임되었다.

금기시된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일어난 뒤에도 

한동안 언급·논의가 금기시되었으며, 
왜곡되어 알려졌다. 

『제민일보』,

1991. 4. 3. ▶

삼일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관덕정(제주) ▶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는 노력

80

 

Ⅱ. 대한민국의 발전

현기영, 『순이삼촌』 발표

1978. 9.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국회 통과

•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확정 

• 노무현 대통령 사과

1999. 12.

2003. 10.

4·3 희생자 
추념일 국가 
기념일 제정

2014. 3.

제주 

4·3 사건 특별법 개정안 

국회 통과 → 

6·25 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 대한 
첫 입법적 보상

2021. 12.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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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4·3평화기념관 내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를 둔  
 

 까닭을 생각해 보자. 

Q2   제주 4·3 사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을 조사해 보고,  
 

 모둠별로 답사 계획서를 만들어 보자.

 

 ➊ 모둠별로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유적지 3곳을 선정한다.

 

 ➋ 각 모둠별로 선정한 장소를 조사한다.

 

 ➌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답사 계획서를 작성하고 모둠별로 발표한다.

제주 

4·3 사건을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

기 위해 세웠다. 

4·3 평화 공원 내의 4·3 

평화기념관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있다.

제주 

4·3 평화 공원│제주

옛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곳이다. 서제주 
지역의 예비 검속자 

252명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섯알오름 학살터│서귀포 대정

.

백비

백 가 있다.

있다

있다

너븐숭이 

4·3기념관│제주 조천

최소 

300명 이상의 북촌 주민들이 군에 의해 희생된 ‘북촌 

사건’ 등을 기리기 위해 

2009년에 세웠다.

제1조 (목적) 
  이 법은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
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
써 인권 신장과 민주 발전 및 
국민 화합에 이바지함을 목
적으로 한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 「대통령 사과문」 -

  아매도 사격 직전에 기절
해면 쓰러진 모양입니다. 깨
난 보니 자기 우에 죽은 살마
이 여럿이 포개져 덮여 있었
댄 허는 걸 보민. …… 그때 
발세 그 아지망은 정신이 어
긋나 버린 것라 마씸. 

 

- 현기영, 『순이삼촌』 -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로  

북촌 사건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 4·3 사건의 현장

사건의 현장

마을 내 군·경 희생자와 민간인 희생자를 함께 추모하는 공간이다. 마을 
공동체의 화해와 상생의 노력을 보여 준다.

영모원│제주 애월

제주

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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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집에서 제주 

4·3 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려는 

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자.

1.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81

동아출판 한국사 교과서 80,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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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창

역사를 후퇴시키는 교과서 논쟁    

2000년대에 교과서 서술이 물론 진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3

년 뉴라이트가 주도한 교학사 교과서는 ‘제주도 폭동’이라는 시각을 되살

렸다.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한 만큼 경찰과 우익 피살자도 많이 살해당했

다는 식의 양비론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냉

전과 반공주의, 대한민국 승리사관에 입각하여 제주4·3은 대구 10·1 사

건, 여수·순천 10·19 사건과 함께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 선동에 의한 

‘폭동’이라는 인식을 교과서에 다시 심었다. 이번에 처음 검정을 통과했

으나 절차와 내용에 많은 논란이 일었던 학력평가원 교과서도 제주4·3과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진압 대상을 ‘반란군’으로 표기해 강한 비판을 

받았다. 

다수의 교과서가 제주4·3을 올바로 기술했다고 해서 반길 일만은 아

니다. 4·3 서술과 바로 이어진 여수·순천 10·19 사건에 대해 다수의 교

과서가 문제적 표현을 쓴 것이 지적되었다. 이제야 진상규명 단계에 들어

선 여수·순천 사건은 쉽게 ‘폭동’과 ‘반란’의 서사에 기울고 있음을 반증한

다. 2022 교육과정 개편에서 다시 ‘자유민주주의’ 논란이 불거진 것도 문

제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개입에 의한 교육과

정 개편에서 드러났듯이 냉전사관과 반공자유주의로 무장한 채 북한 체

제와 대결에서 승리한 대한민국 사관으로만 내달리고 있는 위험성을 지

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역사교육과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으로 파고

드는 주제들은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힘겹게 쌓아 올린 진실규명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그래서 아주 적은 지면에도 깨알같이 정보를 새겨넣은 집필진의 노력

이 돋보이는 교과서에 더 눈길이 머문다. 조천읍 북촌마을, 사라진 마을 

곤을동, 섯알오름 학살터에 대한 소개이다. 이곳들은 4·3의 역사와 나를 

연결하는 공간이자, 현실에서 비극적인 역사와 마주하는 실천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기억의 실천은 내일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제주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도 그 실천은 이어지고 있다. 상설 전시 마

지막에 희생자 수를 게시하고 있었는데, 희생자 판명이 늘어날 때마다 그 

숫자가 갱신된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아로새기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함을 잘 각인시키고 있다.

한 교과서는 제주 ‘영모원’을 소개하였다. 제70주년 국가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해 주목받은 곳이다. 하귀리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조성한 영모원은 4·3 희생자와 군·경 희생자를 함께 모신 ‘화해와 상생’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교과서를 둘러싼 때늦은 ’소란’을 거치면서 영모원 

위령비 뒷면 글귀가 새삼 더욱 마음에 와 박힌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이 빗돌을 세우

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

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지난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

인가를 사회구성원 모두가 다시 한번 가다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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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다담

글 
안혜경 제2회 제주4·3영화제 집행위원장  

제2회 제주4·3영화제 

‘틈새에서 솟아오른 빛’을 마치고

전시 공간 아트스페이스·씨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각예술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24년 제2회 제주4·3영화제가 11월 21일 부터 24일까지 롯데시네마 

연동점에서 나흘간 개최되었다. 개막작 <목소리들>을 시작으로 폐막작 <이

븐 더 레인>까지 관람객들로 영화관이 매일 북적였다. 4편 이상 관람한 관객

들 선물 120개 상품이 모두 소진되었다. 2박3일간 영화관 근처에 숙소를 잡

고 매일 영화제를 찾는 관람객도 있었다. 마음이 들떠 피곤한 줄 모르고 관

람객을 맞았다.

올해 영화제 집행위원은 제주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고의경, 아트스페이

스·씨 대표 안혜경,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 양동규, 영상 기반 설치작가 정

유진, 제주의 소리 기자 한형진,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장 강봉효로 

구성되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고 제주4·3을 내세운 영화제이기에 

마음을 다잡고 집행위원들과 힘껏 내달렸다. 1회 ‘4·3영화제’에 제주를 덧붙

여 제2회 ‘제주4·3영화제’로 정했다. 제주도민들의 자존의 저항이자 역사의 

상흔이며 개최지 도시 이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제 취지도 갑론을

박 끝에 정했다.

01

지난 11월 21일에 개막한 <제2회 제주4·3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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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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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을 지향한 제주도민의 자존의 저항과 역사의 상흔을 기억하며, 폭

력의 고리를 끊고 서로 의지·격려하며 연민의 정으로 연대한 공감의 

공동체에 기여하는 영화제

-  상영작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해 토론과 연구로 연계 가능한 영화제

-  제주4·3영화제에서 소개하려는 의미를 담은 영화들을 창작하고 발표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영화제

영화제 주제를 ‘부조리한 폭력에 저항한 자존의 빛이자 역사의 상흔을 위

로하고 연대하는 따스한 연민의 빛’이라는 의미로 “틈새에서 솟아오른 빛”으

로 정했다. 고길천 작가의 그림을  포스터, 소책자, 리더필름에 사용했다. 제

주4·3의 의미를 현재 국내외 현실과 연계하며 폭넓게 해석하고 관련해 생각

해볼 수 있는 키워드로 ▲제주4·3 ▲저항 ▲식민 ▲제국 ▲자본 ▲탐욕 ▲독

재 ▲분쟁 ▲학살 ▲분단 ▲난민 ▲이주 ▲재일 ▲재난 ▲해체 ▲노동 ▲차

별 ▲트라우마 ▲치유로 정했다. 

키워드를 염두에 둔 100편 이상의 영화를 놓고 본선작 선정을 위한 평

가 기준을 정했다. 집행위원들과 영화평을 작성하며 치열한 토론 끝에 상영

작과 영화 구성 섹션을 확정지었다. 올해 신설된 단편경쟁 섹션을 ‘반딧불’의 

제주어 ‘불란지’로 정했다. 295편의 단편들이 응모했고 4명의 집행위원들이 

예심위원이 되어 10편의 경쟁 진출작을 선정했다. 집행위원회 회의는 물론 

단톡방에서 수시로 영화제 상황 전반을 함께 논의해 진행해나갔다. 예산이

나 영화 배급 문제로 포기하는 영화들이 생길 때 마다 아쉬움에 가슴이 쓰라

렸다. 

29편의 상영작들을 네 개의 섹션 ▲올해의 특별 시선:구조적 폭력, ▲묵

직한 공명, ▲4·3과 저널리즘, ▲단편경쟁 ‘불란지’로 나누고 각 섹션의 의미

를 모색해 맥락을 만들었다. 

참혹함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폭력의 반복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제국과 

자본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구조가 보였고 이를 ‘올해의 특별시선’으

로 정했다. 영화 상영 중간 중간 탄식이 들렸고 관람객들도 곳곳의 통점들과 

만나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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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할 수 없는 또 다른 국내외 사례들에서 드러난 현실을 직시하고 성찰

해 공명하게 되는 영화들을 ‘묵직한 공명’ 섹션에 배치했다. 상처를 보듬고 위

로하며 연대를 이뤄가는 따뜻한 인간애도 곳곳에 있었다. 

제주4·3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어 ‘4·3과 저널

리즘’으로 묶었다. 70여 년 만에 열리는 재심 재판 과정, 4·3으로 인해 씌워

진 이념의 낙인과 연좌제 등 유족들이 겪었던 상처와 피해를 생생하게 전하

고 있어 마음이 아려왔다. 무작정 끌려간 ‘재판 없는 죄인’ 제주4·3 희생자들

이 재심으로 억울함을 일부나마 풀었다. 

‘불란지’ 단편 경쟁작 심사 결과 최우수 작품상에 이이다 감독의 <디-데이 프라

이데이>, 작품상 극 부문에 공선정 감독의 <작별>, 작품상 다큐멘터리 부문에 정진

아 감독의 <없는 산>, 관객상에 김승환 감독의 <중섭>이 선정되었다. 심사위원 강

은미 시인,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임흥순 감독은 “서사적 얼개의 안정성과 4·3

의 현재적 의의를 영화적 언어로 어떻게 공감력을 이끌어내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4·3이 갖는 역사적 인식과 과제에 대한 더욱 확장성 있는 문제제기에도 귀를 

기울였음을 밝힌다.”며 ‘영화적 상상력과 신선한 발상에 의한 도전, 실험을 시도하

고 장르의 고유성을 유지하되 형식적 파괴를 시도한 작품’이라는 평을 했다. 단편 

경쟁작은 ‘제주4·3에 한정되지 않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와 그 의미를 되새기고 확장

해 지금 우리 현실과 연결한 영화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03

04

05

02
단편경쟁 ‘불란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디-데이, 프라이데이> 스틸컷

03
단편경쟁 ‘불란지’ 극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작별> 스틸컷

04
단편경쟁 ‘불란지’ 다큐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없는 산> 정진아 감독

05
단편경쟁 ‘불란지’ 관객상을 수상한
 <중섭> 김승환 감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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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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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이나 전쟁과 같은 가시적 폭력뿐만 아니라 

일상의 안정과 평온을 위협하며 시민들을 옥죄고 있

는 억압과 그에 따른 세계적 현실을 예리하게 드러

내는 탁월한 영화들, 그리고 거기에 맞서 서로 격려

하고 위로하는 따스한 영화들로 상영작을 구성할 수 

있었다.

영화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스페셜 토크”도 진

행했다. 알제리 독립 투쟁의 문제를 다룬 <알제리 

전투>, <친밀한 적>, <히든>의 장면들은 제주4·3이

나 세계 곳곳의 분쟁과 치환해도 낯설지 않았다. 세 

편의 영화를 묶고 “제국의 폭력, 국가의 폭력, 그리

고 일상의 폭력-우리는 얼마나 다른가?”라는 제목

으로 제주대학교 서영표 교수가 강연을 했다. ‘제국

과 국가의 폭력뿐만 아니라 늘 지나친 확신을 경계

하고 우리들 내면에 있는 폭력을 예민하게 성찰해 

경계해야 한다’고 되새겼다. 

개막작 <목소리들>은 제주 4·3에서 그동안 잘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수난을 담았다. 언어로 다 

전하지 못하는 아픔을 눈빛, 몸짓 등 오감으로 섬세

하게 담을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느낄 수 있

었다. 고통스런 기억의 빗장을 풀고 꺼내놓은 피해

자들, 이를 조사·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해온 연구자

들! 그분들의 오랜 노력과 다양한 예술 장르로 담아

온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막작 

상영 후 김은실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진행한 관객과

의 대화에서, ‘제주4·3평화재단의 지원과 협력 덕에 

피해자분들의 신뢰를 얻고 4·3의 여성 수난을 마주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다’고 지혜원 감독

과 김옥영 프로듀서가 말했다. 전국 개봉과 해외 배

급에 대한 제주4·3평화재단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

해 보인다.

06

07

06
영화 <친밀한 적>, <알제리 전투>, <히든> 상영 후 
스페셜 토크 진행 중인 제주대 서영표 교수

07
<목소리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중. 
오른쪽부터 김은실 이화여대 명예교수, 지혜원 감독, 김옥영 프로듀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인 재미교포 이철수의 구명운동에 관한 다

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 상영 후, 당시 구명

운동에 참여했던 브렌다 백 선우, 젠 선우가 

배급사 남기웅 대표의 진행으로 관객과의 대

화에 참여했다. 이철수와 그의 어머니의 삶

은 우리나라 현대사와 미국 이민사 여러 측

면에서 나눌 이야기가 많았기에 한정된 시간

이 아쉬웠다. 인종차별, 폭력, 억압과 분노

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 힘으로 이철수의 살

인 누명을 벗기며 한인공동체를 새롭게 형성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석방 후 겪

은 자기 파괴와 극복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

와 인간을 좀 더 섬세하게 바라봐야 할 여지

를 느꼈다. 특히 이 영화는 미국에서 2024년 

‘놀라운 역사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에이미상

을 수상했는데, 영화제 참여가 개봉으로 이

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수열 시인이 진행한 ‘4·3과 저널리즘’의 

감독과의 대화에서, 울산 MBC의 <눈카마스 

코리아-누가 그들을 죽였나>에서 과테말라 

사례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법정에서 6천

~7천 년 형의 가해자 처벌로 정의 실현도 가

능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의를 실현하고 

백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자극과 실현의 

어려움을 고려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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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 철수 리>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중. 오른쪽부터 남기웅 커넥트픽쳐스 대표, 
제주대 한진이 교수, 선우 브렌다 백(Sunwoo Brenda Paik), 선우 정민(Sunwoo Jan J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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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저널리즘> 섹션 후 관객과의 대화중. 오른쪽부터 김수열 시인, 설태주 기자(울
산MBC), 문수희 기자(KCTV제주), 박재현 PD(KBS제주), 김찬년 기자(MBC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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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산개척단>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이조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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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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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개척단>에서 본 박정희 군사정권시절 개척 사업은 납치와 강금

에 의한 노예노동이었다. 정유진 집행위원 진행으로 이조훈 감독과의 대

화가 이어졌다. 개척 사업에 희생된 분들의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전

국적으로 140곳이나 된다니, 보고도 믿기 힘든 인권유린이었다. 국민을 갈

취한 국가가 아직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커녕 사과도 않았다니 분노가 치

미는 현실이다. 

단편 경쟁 ‘불란지 ’섹션 상영관 좌석이 모두 매진되었다. 양동규, 한

형진, 고의경 집행위원이 진행한 감독과의 대화에 질문을 쏟아내는 관객

들, 부지런히 평가를 적는 관객심사위원들의 진지한 모습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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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경선 ‘불란지’(1)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중. 오른쪽부터 양동규 집행위원, 
<사자의 시> 이상진 감독, <작별> 공
선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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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경선 ‘불란지’(2)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중. 오른쪽부터 한형진 집행위원, 
<중섭>의 김승환 감독, <디-데이 프라
이데이>의 이이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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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경선 ‘불란지’(3)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중. 오른쪽부터 고의경 집행위원, 
<옥순의 조각>의 박주희 감독, <없는 
산>의 정진아 감독, <돌아오지 않는 배
> 이지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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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지 섹션이 끝난 후 관객들과 함께 기념 촬영

올해 영화제 여건이 전반적으로 아쉬웠으나 기본 요건과 현실을 살피

며 내달렸다. 앞으로 제주4·3영화제를 어떻게 조직해 준비해 나아가야 

할지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이에 걸맞는 여건을 갖춰 지속할 방안을 논의

하는 장이 필요하다. 매년 영화제를 기약한다면 시급하게 해결할 문제이

다. 진행한 영화제들도 치밀하게 구성해 홈페이지에 정리해 올려 검색 가

능해야 지속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올해 영화제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관계한 모든 분들의 헌신 덕분이다. 한

정된 지면이라 일일이 거명하지 못하지만 참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

다. ‘영화가 다루는 내용이 무거워 힘들다’면서도 다시 찾아 격려해준 관

람객들이 고마웠다. 영화제의 성패는 무엇보다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

는 것과 관람객에 달려있다. 영화 제작과 배급에 관련된 영화인들과 찾아

준 관람객들의 고마움을 다시 상기해본다. 

2024년 제주4·3영화제 

상영작 리스트 소개

제2회 제주4.3영화제 폐막식(11월 24일) 참가자들과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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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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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전승 4321

학생과 4·3을 이어주는 세 가지 키워드

공감 – 자율적 판단 – 행동

‘4·3을 초등학교에서 배운다.’ 10여 년 전만 해도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4·3교육이 초등학교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4·3교육은 어떤 원칙에 근거해야 할까요? 

그리고 초등학교에서의 4·3교육은 어떤 모습일까요?

글 
전진수 성읍초 교사 

2020년부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인권교육 교사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
으며, 2021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인권교육 전문가과정을 수료하
였다. 현재는 성읍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1. 4·3교육의 원칙과 방향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서 제시하는 4·3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화와 인권입니다1). 

이런 궁극적인 목표 이외에, 어떤 원칙과 방향을 통해 4·3교육의 목표를 뒷받침할 수 있을까

요? 평화·인권 교육에 대한 원칙은 국내외를 망라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홀로코스트 교육

의 원칙은 평화·인권 교육의 원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만합니다. 제주교육청 4·3교

육 5원칙과 7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원칙을 바탕으로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기준으로 4·3교육을 실시하고 있

습니다.

1) 공감을 통해 4·3 이해하기

2) 자율적으로 판단하기

3) 나의 삶과 행동으로 연결짓기

1)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 평화·인권교육 교사용 지도서(5-6학년), 도서출판 각, 2017년, 7쪽
 2)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초등 5-6학년을 위한 4·3 이야기 증보판, 2020년, 62-71쪽
 3)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초등 5-6학년을 위한 4·3 이야기 증보판, 2020년, 62-71쪽
 4) 최호근, 독일의 역사교육, 대교출판, 2009년, 69-72쪽

구분

내용

제주교육청 

4·3교육 5원칙2)

1) 인권의 원칙             2) 평화의 원칙          3) 역사 토대의 원칙      
4) 현재성의 원칙          5) 보편성의 원칙

제주교육청 

4·3교육 

7지침 중 3가지3)

1)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율적 인간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2) 정서적 공감 능력과 정의감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3)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교육이라야 한다.

홀로코스트 교육

3대 원칙4)

1)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온정을 베푸는 공감의 능력을 배양한다.
2)  자율성을 육성해서 깊이 생각하고, 양심에 입각한 주관에 따라 행동

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3)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집단 악의 희생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와 방조자

까지도 자신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감정이입의 능력 배양)

<평화 · 인권 교육의 다양한 원칙과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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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전승 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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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3교육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학생 교육 활동 내용

‘할머니는 정말 멋진 분이세요!’ - 인물, 그림책으로 공감하기

4·3을 혐오하고 폄훼하는 사람과 4·3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

는 무엇일까요?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그 차이는 공감 여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3

평화교육의 첫 번째 단계는 4·3에 공감하는 단계이며, 아랫글은 4·3 유족 할머님 영상을 보

고 활동한 결과물입니다.

 5)  “할머니도 손녀도 울었다...71주년 제주4·3 추념식” 유튜브 비디오, 2분 40초 캡쳐, 비디오머그, 2019.4·3., https://

youtu.be/g7SbVI_jhI4?si=8Oo29uMIWEt4zl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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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주년 추념식 유족 영상 중 일부5)

초등학생이 많이 읽는 4·3 그림책

<공감과 관련된 4·3 관련 교육 자료>

<관련 인물에 대해 공감하는 글>

자율적 판단

1)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면 될까요?’, ‘나라면 어떤 행동을 선택할까요?’

그림책 『제무시』는 김해지역 보도연맹 사건을 모티브로 한국전 당시 주인공 군용 트럭의 

주민 학살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학살 상황이 섯알오름 예비검속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

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트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25호는 학살을 거부한 주인공 트럭

입니다.)

 6) 임경섭, 제무시, 평화를 품은 책, 2017년

후속 단계로 좀 더 깊게 공감하고 4·3 이해를 확장하기 위해 그림책 감상 후 ‘질문 만들기’ 활

동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질문 만들기’와 ‘생각 나누기’ 입니다. 초등학

생이 4·3을 배우며 많이 접하는 그림책 ‘나무도장’을 읽고 학생들이 만든 질문입니다.

(엄마와 외삼촌은) 시리를 왜 데리고 왔나요?

시리는 왜 나무도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내가 만약 군인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요?

만약에 노인이 되어 토벌대가 위치를 말하라고 하

면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그림책 나무도장 감상 후 질문>

“우리는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면 돼.”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겨.”

“625호 때문에 결국 우리가 다 위험해질 거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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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무시 625호 행동(학살 거부)에 대한 학생의 자율적 판단>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거기 때문에 

625호가 한 행동(학살 거부)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유없이 사람들이 죽는 것을 생각해서 그런 행동

(학살 거부)을 벌인 일이라 옳다고 생각한다.

‘열심히만 하면 옳은 것인가요?’ 학생 대부분은 ‘그 일이 옳은가를 기준으로 행동을 판단

하겠다’라고 정리했습니다. 현실적인 면의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며 625호의 선택이 쉽지 않

은 행동임을 알고 생각을 정교화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학살 거부, 숨겨주기, 몰래 풀어주

기, 맞서 싸우기) 

<몰라구장을 통한 의로움 탐구>

살리기 위해 모른다고 주장. 

토벌대가 와서 긴장감과 무서움이 있었을 것 같다.

불안한 마음, 떨림.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너무 불안하다. 불안한 마음. 

큰소리를 쳐서 무섭지만,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지 않게 하고 싶어! 자신감. 

계속 모른다고 하면 괜찮을까? 떨린 마음

2) ‘모르쿠다, 몰라!’ - 다양한 의인과 나 연결 짓기

‘통일’, ‘저항’, ‘의로움’, ‘용기’ 등 4·3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다양합니다. 다음 사례는 

의인을 통해 의로움과 용기를 탐구하는 활동입니다. 문형순 경찰서장, 몰라구장, 의인 송정

봉 등의 사례를 탐구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의로운 행동을 하기 위해 어

떤 어려움을 겪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몰라구장의 행동을 ‘의로움’과 연결하

여 4·3을 의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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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행동으로’ - 일상에서 행동으로 표현하기

학생들은 교육과정을 통해 4·3을 다양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생 주도, 자유로운 

표현 등이 바탕이 됩니다. 4·3 슬로건 만들기 활동은 학생들이 4·3에 대해 탐구한 후, 자신의 

생각을 슬로건 형태로 표현하고 게시하는 활동입니다. 학교 내에서 4·3을 어떻게 알릴까 고

민하던 학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4·3 포토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학생들

의 생각과 작은 정성이 4·3을 알리는 매개가 되고 있습니다.

4·3에 대한 생각은 학교와 마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4·3 당시 성읍리와 학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탐구하고 직접 마을 답사를 다니며 꼬마 해설사 활동을 하기도 했습

니다. 설명할 대상을 직접 선정하고 답사 장소에서 동료 학습자에게 설명하는 활동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매일 보던 익숙한 마을의 모습이 4·3을 매개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

습니다.

<현수막 게시와 4·3 포토존>

<마을 답사와 4·3 해설 장면>

10월 수학여행에서는 4·3평화공원과 관덕정을 답사했습니다. 4·3평화공원에서는 각명비 

희생자 이름 새기기 활동을 통해 성읍초 학생 희생자 등의 이름을 새기고 예술 활동을 통해 

4·3에 대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관덕정, 북초등학교 답사를 통해서는 4·3과 관련

된 역사적 장소의 현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답사 마무리 즈음에 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4·3이 시작되었던 곳에 4·3의 흔적이 없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4·3 

비석을 세우고 널리 알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역사로서의 4·3이 현

재를 비추는 4·3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지요. 

3. 공감-자율-행동으로 전승되는 4·3

4·3을 통해 학생과 함께 배우며, 어떤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4·3을 배우며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생각을 능동적으로 표현하길 기대합니다. 이 능동성이 공감-자율-행동의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삶의 영역에서 드러난다면, 4·3은 세대를 이어주며 모두의 삶에서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각명비 이름 새기기 활동 및 관덕정 답사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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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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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일,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정례 참배가 진행됐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참배

에는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김창범 제주

4·3희생자유족회장을 비롯하여 장정언 재단 전 이사

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창후 제주4·3연구소

장, 양성홍 4·3행불인협회장, 변온화 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 교육연구관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참배 의례는 참가자들의 경례, 분향, 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참배를  마친  기관장들은  차담회를  통해 

4·3 관련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지속적인 소통

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한편 제주4·3평화공원에서는 매년 1월 1일 신년참

배를 시작으로, 3월, 6월, 9월, 12월 첫째 주 월요일

에 정례참배가 진행된다. 이 참배는 기관 관계자뿐만 

아니라 도민도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행사이다. 

제주4·3평화공원 9월 정례 참배

4·3희생자·유족 자녀들에게 장학금 2천 6백만 원이 

전달됐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김종민)은 11월 2일 제주

4·3평화기념관에서 4·3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

여했다.

올해 선정된 4·3장학생은 대학생 10명, 고등학생 

12명 등 총 22명이며, 대학생에게는 200만 원, 고등

학생에게는 50만 원이 각각 지급됐다.

이 중 김도연 학생(서울대)은 지난 2016년 4·3장학

기금 1억원을 쾌척한 박창욱 전 4·3중앙위원의 ‘덕산

(德山) 박창욱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생들은 수여식이 끝난 후 위령제단과 위패봉안

실을 찾아 자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위패에 참배

하고 이어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해설을 들으며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한편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2015년부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4·3희생자·유족 

자녀들을 격려하기 위해 4·3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장학생들은 제주4·3평화재단 4·3장학사업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발되며, 현재까지 4·3장학생은 고등학

생 89명, 대학생 116명으로 총 205명이다.

김종민  이사장은  “앞으로도  4·3장학사업을  통해 

4·3희생자·유족 후손들을 지원하며, 4·3이 미래에 세

대전승될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4·3평화재단, 4·3희생자 · 유족 자녀 

장학금 2천600만 원 전달

위령제단에서 분향하고 있는 장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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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민주 평화·인권네트워크 제주도워크숍 개최

평화와 인권을 향한 연대의 발걸음

‘2024 동아시아 민주·평화·인권네트워크 워크숍’이 

지난 9월 2일부터 3일까지 제주4·3평화공원에서 개

최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과거사 관련 기관 임직원 약 

1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2022년 광주, 2023년 부산을 거쳐 올해 제주에서 

열린 워크숍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김종민), 부마

민주항쟁기념재단(이사장 박상도), 부산민주항쟁기념

사업회(이사장 이행봉), 5·18기념재단(이사장 원순석), 

노근리국제평화재단(이사장 정구도), 동학농민혁명기

념재단(이사장 신순철) 등 6개 기관이 공동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주관했다.

워크숍의 첫째 날, 각 기관은 현안 사항을 공유하고 

공동사업 추진을 위한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이어 각 

기관 사업별 분과 회의를 통해 다음 해의 교류 협력 

사업과 청년 세대의 인권 교육 강화, 평화 구축 및 인

권 문제 등 다양한 과제들에 대해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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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참가자들은 제주4·3평화기념관 2층 기

획전시실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과의 

교류 협력 전시인 

‘부마, 민주주의의 새벽을 열

’의 개막식에 참석하고 전시를 관람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부마민주항쟁을 기

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

제 

‘사월포차’ 공연을 이 자리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이튿날에는 제주4·3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

아 있는 함덕 서우봉과 북촌리 4·3유적지를 

방문하며 일정을 마쳤다. 

‘동아시아 민주·평화·인권 네트워크’는 지난 

2012년 협약을 체결하고 자원 교류, 정보 및 

출판물 교환, 인적자원 육성기회 제공, 민주·평

화·인권의 진전을 위한 사업들을 위해 노력해

왔다. 

참가단체는 이번 워크숍에 참가한 6개 기

관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만 

2·28사건기념기금회, 대만 국가인권박물관준

비처, 일본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 히로시

마평화기념자료관 총 11개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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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제단에서 분향하고 있는 각 기관 대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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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전용진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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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주의의 새벽을 열다’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 최갑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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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포차’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동아시아 네트워크 임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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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렵의 중심에서 제주4·3의 진실과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행사가 개최됐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

단이 주최·주관한 ‘제주4·3 국제 특별

전’은 ‘제주4·3 기록물: 진실과 화해

에 관한 기록’이라는 주제로 베를린

의 팔레 포퓰레어(PalaisPopulaire)에

서 10월 14일부터 20일까지, 런던의 

브런즈윅 아트 갤러리(Brunswick Art 

Gallery)에서 10월 16일부터 22일까

지 진행됐다.

이 행사는 제주4·3기록물의 유네스

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적 

공감대 형성을 목적으로 기획됐다.

특별전에서는 제주4·3의 연대기와 

과거사  해결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사진, 영상, 기록물 복제본 등을 

통해 소개됐다. 

제주4·3 국제 특별전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홍보를 위한 국제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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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댄 스미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장(제4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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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기록물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독일의 관람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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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에는 국제 전문가와 현지 

학자들이  참석했다.  독일  심포지엄

에서는 제4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

인 댄 스미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

소장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독일과 

한국의 학자들이 4·3의 의미와 기록

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의의에 대해 

논의했다.

영국  심포지엄에서는  오웬  밀러

(Owen Miller) SOAS 런던대학교 교

수, 니콜라이 온셴(Nikolai Johnsen) 

SOAS 런던대학교 연구원, 권헌익 캠

브리지 대학교 교수, 임소진 센트럴 

랭커셔 대학교 교수 등 영국과 한국

의 전문가들이 모여 4·3의 가치와 트

라우마 해결 노력, 영국의 갈등해결 

사례 등을 공유했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행사 나흘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

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덕분에 독일 

베를린과 영국 런던 행사가 기대 이

상의 성과를 냈는데, 이는 제주4·3의 

세계화에 큰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

했다. 또한 “제주4·3 문제의 해결과

정을 글로벌 스탠다드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국제적 공감대를 마련해 나가

겠다”고 의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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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한국의 전문가들의 열띤 토론이 이루어진 영국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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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는 권헌익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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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진혼극 ‘이카이노 삼춘의 깃발’ 

10월 제주·서귀포에서 다시 만나다

‘이카이노 삼춘의 깃발’(원제: 유민애가(流民哀歌))

은 지난 7월 제주4·3의 아픔과 재일제주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제주에서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지난 10월 도민들의 재공연 요청에 

힘입어 10월 22일 서귀포(김정문화회관)와 23일 제주

시(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 연극의 주인공인 ‘이카이노 삼춘’은 제주4·3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후, 새로운 삶을 살지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억울함과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

이다.

김기강 대표는 제주4·3의 진상규명에 대한 열망을 

담아 이 작품을 준비했다. 그는 “‘슬픈 역사를 슬프게

만 만들지 말자’는 마음으로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자 

했으며, ‘살암시민 살아지주’(살아가다 보면 살아진다)

라는 대사를 통해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고 말했다.

극단 돌은 재일동포 3세인 김기강, 권기자, 황유자

로 구성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인생을 다

룬 ‛캐러멜’, 부락 차별의 역사를 다룬 ‛사람의 가치 - 

다마짱과 하루짱’ 등의 작품으로 한일 양국에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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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전국 

초·중·고 교원 및 교육전문직원을 대상으로 4·3평화인

권교육 직무연수 1기 ~ 6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올해 4·3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에는 ▲1기 세종특

별자치시교육청 11명(8월 30~31일) ▲2기 인천광역

시교육청 22명(9월 6~7일) ▲3기 대전광역시교육청 

17명(10월 11~12일) ▲4기 충청남도교육청 31명

(10월 30~31일) ▲5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10명

(11월 15~16일) ▲6기 광주광역시교육청 40명(11

월 21~22일)이 참여해, 총 131명이 수료했다.

학교 현장에서의 4·3 인식 제고와 4·3의 전국화를 

위해 운영되고 있는 직무연수에는 양조훈 전 제주4·3

평화재단 이사장,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한

상희 서귀포여자중학교 교감이 이론 강의를 맡아 제

주4·3의 현재와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양성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상임부회장, 강호

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신은정 4·3문

화해설사가 제주4·3평화기념관과 공원 해설을 진행

했다. 그리고 오승국 제주4·3평화재단 전 부센터장과 

강덕환 전 제주작가회의 회장은 서부지역 4·3유적지 

기행을 통해 제주4·3의 현장과 진실을 알렸다.

전국 교원 대상 4·3평화인권교육 직무연수

4·3역사 인식 제고와 4·3의 전국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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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주4·3평화재단은 교원직무연수의 지평을 넓

히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유치원교사 100명을 대상으

로 한 4·3평화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유치원에

서 아이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4·3평화공원을 소

개하고(해설 부영심), 그림책을 통해 배우는 4·3이야기

(작가 김란), 어린이체험관 및 4·3교구재 체험 프로그램

(연구원 강지연)으로 구성된 이번 교육은 오는 12월 6

일(금)과 13일(금)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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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 ‛비설’ 해설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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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강의를 듣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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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봉안실 방명록에 글을 적고 있는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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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10월 24일부터 25일까지 

제주 썬호텔에서 ‘제14회 제주4·3평화포럼’을 개최했

다. 이번 제주4·3평화포럼은 ‘제주4·3 정의·화해모델

의 세계화’를 주제로 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

구센터가 기획에 함께 참여해 진행됐다.

제주4·3평화재단과 연세대학교 인간평화와 치유연

구센터는 ‘4·3 트라우마 회복지표’ 개발을 위한 국제 

공동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공론화하는 자리로 

이번 포럼은 마련됐다. 이 연구는 과거사 해결의 세계

적 모범 모델로서 ‘제주4·3 모델’의 객관성을 학술적으

로 담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남아프

리카공화국, 르완다, 아르헨티나, 캄보디아, 북아일랜

드 등 국외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4·3과 세계의 다른 

과거사 회복 경로를 비교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포럼 첫째 날인 24일(목)에는 ‘제주의 정신과 평화 

미래’를 주제로 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기조 강연

과 개회식이 진행됐다. 강금실 장관은 민주사회를위

한변호사모임(민변)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법조인이자, 2003년 법무

부 장관 재임 중 4·3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제주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확정에도 기여한 바 있다.

25일(금)에는 ▲정의·화해·회복-제주4·3: 과거사 회복 

경로의 새 모델 ▲세계의 과거사 회복 경로Ⅰ▲세계

제14회 제주4·3평화포럼 

제주4·3의 정의·화해의 세계화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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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강연을 하고 있는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트라우마 회복지표' 국제공동연구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박명림 교수

의 과거사 회복 경로Ⅱ 등 3개 세션별로 발표가 진행

되고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제1세션에서는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장), 신보경·손인배·강효인 연구원(인간평

화와 치유연구센터)이 ‘트라우마 회복지표’ 국제공동연

구 결과와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제2세션은 ‘세계의 과거사 회복 경로’를 주제로 헬

렌 스캔런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교 교수·

바스코 하비야리마나 스웨덴 옌셰핑대학교 국제학부 

겸임교수·다니엘 페어스타인 아르헨티나 트레스 드 

페브레로국립대학교 제노사이드센터 소장이 각각 남

아프리카공화국·르완다·아르헨티나의 과거사 해결 사

례에 대하여 발표했다.

제3세션에서는 이성용 일본 소카대학교 교수의 캄

보디아 사례에 대한 발표와 주드 랄 페르난도 아일랜

드 트리니티칼리지 교수의 아일랜드 사례에 대한 발

표가 마련됐다. 뒤이어 종합 토론 좌장 전우택 연세대

학교 교수에서는 주요 연구자들의 토론을 통해 제주

4·3 트라우마 회복지표와 국제 트라우마 회복척도 개

발 연구의 성과를 확인하고, 제주4·3과 세계의 트라

우마 치유 사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포럼을 통해 제주4·3과 세계 각 나라의 과거

사 트라우마 회복 경로를 비교하여 4·3 트라우마 회

복지표를 개발하고, 나아가 4·3이 과거사 회복의 국

제적 표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이번 

포럼이 제주4·3의 정의·화해모델이 나아갈 방향을 논

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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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의 과거사 해결 사례를 설명하고 있는 바스코 하비야리마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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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주드 랄 페르난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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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헬렌 스캔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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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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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  11월  4일부터  5일

까지  제주학생문화원  및  제주4·3평화공원에서 

2024 국제 4·3인권 심포지엄 ‘유럽의 과거청산에

서 기념과 교육의 역할’을 개최했다.

제주특별자치도(도지사 오영훈)와 제주특별자

치도교육청(교육감 김광수)이 주최하고 제주4·3평

화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 끝난 후 독일의 과거사 교육과 기념 문화에 대

하여 독일을 대표하는 과거사 연구 및 교육기관인 

에터스베르크재단과 라이프니치, 함부르크, 베를

린자유대 등 주요 대학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11월 4일(월) 오후 1시부터 제주학생문화원 소

극장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유럽 과거청산에

서 기념과 교육의 역할’을 주제로 홀로코스트 등 

유럽대륙에서 벌어졌던 과거사 문제의 극복 과정

과 이를 위한 교육과 기념문화를 살폈다.

첫 번째 세션에서 알폰스 켄크만 라이프치히대 

교수가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유대인-이스라엘 

화해의 원동력과 문제점’ 주제로 발표했고 다비드 

베크 함부르크대학교 교수와 정용숙 춘천교육대

학교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2024 국제 4·3인권 심포지엄 

유럽 과거사 교육과 기념문화에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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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을 하고 있는 외르크 간췐밀러 이사장

독일-유대인-이스라엘 화해 사례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알폰스 켄크만 교수

두 번째 세션에서는 외르크 간첸뮐러 에터스베르

크재단 이사장이 ‘독일사회에서 슈타지 과거의 극

복’ 주제로 발표, 앙케 존 예나대학교 교수와 이소

영 제주대학교 교수가 토론에 참여했다.

세 번째 세션에서는 귀도 하우스만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교수가 ‘탈중앙화와 민족화 사이에 서있는 

유럽의 기념문화’ 주제로 발표, 전진성 부산교육대

학교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

네 번째 세션에서는 만프레드 헤틀링 할레대학교 

교수가 ‘희생자 보편주의 글로벌 추세로서 희생의 

강조’ 주제로 발표, 송충기 공주대학교 교수가 토론

자로 나섰다.

다섯 번째 세션에서는 티노 쉴츠 베를린자유대학 

교수가 ‘독일인의 관점에서 본 일본의 전쟁기억’ 주

제로 발표, 신명훈 튀빙겐대학교 교수가 토론에 참

여했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최호근  고려대학교  교수가 

‘기억의 세대전승에서 교육의 역할: 독일의 경험과 

제주4·3평화교육 구상’ 주제로 발표했다.

주제 발표가 끝난 뒤 서영표 제주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둘째날인 11월 5일(화)은 오전 4·3유적지 기행에 

이어 오후 3시부터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도 교사들과 워크숍을 개최, 독일 과거사 교육 

및 전시 사례를 공유하고 올바른 세대 전승의 방법

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올바른 과거

사 교육에 대한 논의를 위해 마련된 이번 학술행사

가 세대전승을 위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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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토론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만프레드 헤틀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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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토론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호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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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과거사 교육 사례를 설명하고 있는 앙케 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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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6주년 기념 전시 개최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다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가 제주4·3 76주년 기념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전국시사만화협회와 함께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

다’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제주4·3평화재단과 

재경제주4·3피해자및희생자유족회가 공동으로 주최

했다.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다’ 전시는 ‘시사만화가 22

인이 본 25개의 4·3’이란 주제를 통해 4·3을 대중적

으로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다수 작가들이 참여, ‘만

화를 통해 보는 4·3’이란 작품들을 통해 향후 관련 전

시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공동으로 전시를 준비한 전

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는 올해로 창립 24주년을 

맞았으며, 지난 6월 시사만화 탄생 제115주년 및 시

사만화의 날 제18주년 행사를 개최하는 등 한국 저널

리즘을 대표하는 시사만화 작가들의 단체로서, 전국 

일간지, 주간지, 인터넷 언론,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활

동해 온 대한민국 대표 시사만화 작가들의 단체다. 

협회 소속 권범철(한겨레신문), 김상민(경향신문), 

김용민(경향신문),  서민호(국민일보),  서상균(국제신

문), 성덕환(경향신문), 유동수(경기일보), 이동수(마인

드포스트), 이용호(더경기), 전진이(국민일보), 조영남

(프레시안), 최민(민중의소리) 등 현직 매체 기고 작가

들을 비롯해 김휘승(장수군), 안종만(상지대학교), 이

성열(부산민주공원), 최승춘(영산대학교), 최인수(영산

대학교), 최해솔(인제대학교) 학계 및 관, 단체에 소속

된 작가들 외 국태이, 김호룡, 천명기, 하재욱 등 총 

22명의 시사만화가들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가나

다 순). 

이번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다’ 전시를 준비한 백

경진 제주4·3범국민위원회 이사장은 “제주4·3을 주제

로 한 시사만화 기획전 자체가 전국 최초라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며 “전시 기간이 제76주년 기

념일을 맞는 여순항쟁과 맞물리는 만큼 봄에 이어 가

을까지 4·3을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화, 4·3과 시대를 그리다展 중 

유동수(경기일보) 작가의 무명천 할머니(진아영 할머니) 

ⓒ전국시사만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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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제주4·3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故 진아영 할머니

(1914∼2004년)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월령리 마을회와 무명천진아영할머니삶

터보존회는 지난 7일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일대에서 

‘고맙습니다. 진아영’이란 주제로 무명천 진아영 할머

니 20주기 추모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4·3 당시 토벌대가 쏜 총탄에 

턱을 잃은 뒤 50년 넘게 얼굴에 무명천을 감고 고통

의 세월을 살다가 2004년 9월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월령리 해변공연장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는 노래

모임 모다정, 소금인형과 아이들, 국악연희단 하나아

트, 윤정애, 채승희, 연영석 등이 출연하여 노래와 춤, 

국악 공연을 펼쳤다. 이날 제1회 무명천 진아영 할머

니 영상공모전 시상식과 진아영 할머니의 삶의 흔적

을 따라 걷는 ‘할머니 기행길’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

됐다.

양창용 이사장은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기억 속에서 지워버

린다”며 “4·3의 상처를 안고 통한의 삶을 사셨던 진

아영 할머니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추모했으면 한

다”고 말했다. 

제주4·3의 아픔을 겪은 

故 진아영 할머니 20주기 추모문화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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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후, 제주 4·3 사건과 예비검속 희생자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의 시신이 일본 대마도 해안에 떠

밀려 왔다. 그 수는 수백 구에 달하며, 일부는 손목과 

발목이 철사와 끈으로 묶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와 제주4·3한라산회 등은 

9월 22일, 대마도 사고(佐護)만에서 수장학살 희생자

를 기리는 ‛제주 4·3 쓰시마 사건 위령제’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제주를 비롯한 오사카, 후쿠오카, 대

마도 등지에서 온 1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대마

도 해안에 떠밀려온 고인들의 넋을 기렸다.

참석자들은 먼저 대마도 주민인 에토 유키하루(67) 

씨가 세운 공양탑을 찾아 희생자들을 위로한 후, 위령

제가 열릴 장소로 이동했다.

사고만 인근 공원에서 열린 위령제에서는 제주소리 

명창 안복자 씨의 살풀이춤과 제주어 노래, 그리고 서

순실 제주큰굿보존회 심방의 위령굿이 이어졌다.

이날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은 인사말

을 통해 “우리 자손들은 희생된 분들을 영원히 기억

하고 추도할 것”이라고 전했다. 

제5회 제주4·3사건 쓰시마사건 위령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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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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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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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는 지난 9월 28일 ‘2024 제주4·3연

구소 시민과 함께 하는 4·3길걷기 - 항쟁의 길, 노로

오름을 걷다’를 진행했다. 연구소 회원과 시민 3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4·3길걷기는 한라대 승

마장을 출발해 노로오름 ‘장태코’까지 왕복하는 왕복 

12km 코스다.

노로오름 일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 시설이 다수 분포해 있는 곳이다. 4·3 당시에는 

무장대가 토벌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른바 ‘산물

내 전투(1949.3.)’가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노로오름의 큰 분화구인 ‘장태코’ 경사면을 따라 일

본군 진지 동굴 흔적과 4·3 시기 피신했던 주민들이 

머물렀던 흔적, 토벌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장태코’ 주변에는 지금도 탄환 같은 군사유물이 

발굴되어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4·3길걷기 안내를 맡았던 배기철 ‘4·3 통일의 길, 

마중물’ 조사단장은 해설 말미에 “보초터, 집터, 전투 

흔적 등 체계를 이룬 다양한 4·3의 흔적들이 발견되

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집중적인 조사와 그에 따

른 보전과 관리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라며 유

물 수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24 시민과 함께하는 4·3길걷기

“항쟁의 길. 노로오름을 걷다” 

금속탐지기로 매장유물을 찾고 있는 마중물의 배기철 조사단장

장태코 안팎 세밀한 조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발굴 4·3유물(탄환과 놋숟
가락)

서귀포시  김정문화회관은  2024년도 

제주문화예술지원사업 후원을 받아 (사)

제주빌레앙상블의 ‘재일제주인을 노래하

다’를 개최했다. 공연은 9월 28일 오후 2

시와 5시 총 2회에 걸쳐 진행됐다.

이번 공연은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이

후까지 이어지는 재일제주인의 삶을 <사

의 찬미>, <해녀의 노래>, <검은 바다>, <봄

날은 간다> 등의 곡을 통해 (사)제주빌레

앙상블의 독창적인 연주로 선보였고 제주 

4·3, 6·25전쟁, 북송 사업 등 우리나라 현

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재일제주인 

1세대의 헌신과 희생을 그려냈다.

(사)제주빌레앙상블은 서양음악과 국악 

전공자들이 뜻을 모아 창단한 예술단체

로 ‘제주적·한국적·세계적’이라는 목표 아

래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소재로 다양한 

창작 작품을 개발하고 연주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공연은 관람 후 감동받은 만큼 후원금

을 내는 방식인 ‘감동 후불제’로 운영됐

으며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동제주종합사회복지관에 전액 기부됐다. 

공연 ‘재일제주인을 노래하다’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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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4·3영령을 

추모하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지난 9월 29일 제주4·3평

화공원에서 제주4·3 유족 한마음대회를 개최했다. 유

족 간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고, 화해와 상생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2011년 처음 개최된 이 행사는 올해

로 12회를 맞았다. 이번 행사에는 국회의원, 도의원, 

유족 등 2,000여 명이 참석했다.

4·3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을 시작으로 대회 선언, 

격려사와 축사 등이 이어졌으며, 공감예술단의 난타 

공연과 색소폰 앙상블 등 다채로운 문화공연도 펼쳐

졌다. 또한 보상금 신청, 수형인 유족 재심 홍보, 희생

자증 및 유족증 발급 신청 안내 등 다양한 정보가 제

공됐다.

김창범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이번 행사를 통

해 4·3 희생자들의 명예가 더욱 회복되고 유족들의 

아픔을 나누며 제주 사회가 화해와 상생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제12회 제주4·3 유족 한마음대회

화해와 상생의 장

여수시가 지난 10월 7일부터 20일까지 

여수세계박람회장 국제관에서 여순10·19–

제주4·3 미술 교류전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 展’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제주4·3

과 여순10·19사건을 기념하며, 한국 현대

사의 비극을 미술 작품 전시를 통해 조명

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마련

됐다.

이번 전시회는 제주4·3과 여순사건 76

주기를 기념하여 탐라미술인협회와 (사)민

족미술인협회 여수지부가 그 동안의 성과

를 선보이는 세 번째 만남의 장이다. 30명

의 작가가 참여하였고 두 사건을 미술 작

품으로 재구성한 40여 점의 대형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들은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

하며, 두 도시의 연대와 상생의 정신을 담

았다.

정기명 여수시장은 “이번 전시가 76년

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유족들과 그 역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

란다”며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두 지역이 

협력하여 평화와 인권의 도시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 展

제주4·3과 여순10·19, 예술로 되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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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우체통

지난 10월 15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제주4·3

평화합창단의 창단 7주년 기념 발표회가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평화와  희망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

하기 위해 마련됐다. 제주도지사, 제주특별자치도의

회 의장,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제주4·3희생자유

족회장이 축사를 전했다.

제주4·3평화합창단은 ‘너븐숭이’. ‘기억 저편’, ‘무명

천 할머니’와 같이 4·3을 주제로 한 창작곡뿐 아니라 

외국 가곡, 한국 가요,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13곡

을 선보였다. 리본제주아카데미 어린이 합창단도 특

별 출연하여 ‘봐라 꽃이다’,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불러 

공연에 활기를 더했다.

제주4·3평화합창단은  제주4·3희생자유족회  산하 

단체로 4·3의 역사를 바르게 알리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됐다. 2017년 공모와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모집하였다. 이후 매년 정기공연을 펼치

며 활발히 활동중이다. 

제주4·3평화합창단 창단 7주년 기념 

정기연주회 성황리에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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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는 ‘4·3유적 조사·연구 30년, 그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제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지난 10월 17일 4·3, 과거사, 건축학, 도시계획 등 

4·3유적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제주4·3평

화기념관 대강당에 모여 지난 30년 동안의 4·3유적 

조사와 연구를 되돌아보고, 4·3유적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1부에서는 정호기 우석대학교 교수와 이동현 제주

4·3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각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의 진상규명과 기억의 장소 구성’과 ‘4·3유적 현

황과 정비·관리 및 활용 방안’을 발표했다.

2부에서는 김태일 제주대학교 교수와 최용수 주

식회사 제이피엠 과장이 각각 ‘4·3유적의 유산적 가

치와 수악 주둔소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의 의미’와 

‘4·3유적지 정비의 방향성’을 발표했다.

3부에서는 ‘4·3유적 현장의 목소리’를 주제로 도청, 

도의회, 교육청 등 각 분야의 실무자들과 4·3문화해

설사가 4·3유적의 정비·활용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번 학술대회는 4·3유적의 올바른 보존·정비·관리

의 방향성과 4·3의 세대 전승 전국화·세계화를 위한 

활용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제주4·3연구소, 제76주년 기념 학술대회

 “4·3유적 조사·연구 30년, 그 성과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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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6일, 부산시청 대강당에서 ‘제45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과 10월 19일, 여수시 이순신광

장에서 ‘제76주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추념식’이 각

각 개최되었다.

행정안전부와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

명위원회는 이날 부산시청 대강당에서 제45주년 부

마민주항쟁 기념식을 개최했다.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제45주년 기념식에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최수용 부마민주항쟁진상 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위원장, 박형준 부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 홍남표 창원시장 등 주요 인사와 

부마항쟁 관련자 및 가족, 시민단체,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 주제는 ‘부마의 불꽃, 시대를 넘어’이

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1980년 5·18민주

화운동과 1987년 6·10민주항쟁까지 시대를 넘어 계

승돼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를 이뤄낸 불꽃이었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상민 장관은 기념사에서 “부마항쟁 45주년을 맞

아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부마민주항쟁의 가

치를 미래 세대에게 온전히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

겠다”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 45주년 기념식, 

여순사건 76주년 합동추념식 개최

 제45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주제공연 모습

한편 전남 여수시는 지난 10월 19일 ‘상생으로 피

운 동백, 미래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제76주년 여순

사건 희생자 합동 추념식’을 개최했다.

이번 추념식은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고, 피해자들과 유가족의 고통을 기억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식전행사로는 4대 종교 단체의 추모행사와 시립합

창단의 공연이 진행됐으며, 오후 3시 정각에는 1분간 

여수시 전역에 묵념 사이렌이 울리며 희생자의 넋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추모 영상이 상영되며 한의 역사로 기록된 여

순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에 대한 공감대를 형

성했다. △주요 인사의 추모사 △시립국악단의 추모 

공연 △여순사건 창작 오페라 ‘1948년 침묵’ 중 주인

공의 아리아 공연 △헌화와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정기명 여수시장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미래 세대

에게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밝혀져 희망과 감동의 

이야기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평화와 인권

의 도시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여수시가 늘 앞장서겠

다”고 전했다. 

제76주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추념식에서 공연중인 시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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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

위)는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 생존

자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일랜드 보이

즈 – 선감학원의 비밀’을 공개했다. 이 다큐멘터

리는 1기 및 2기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틀어 진실

규명 결정 사건을 다룬 첫 번째 작품이다.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은 1946년 2월

부터 1982년 9월까지 ‘부랑아 일소 및 갱생’을 

명분으로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8~19살의 아동·청소년들을 강제 연행한 뒤 경

기도가 운영하는 외딴섬 선감도의 선감학원에 

수용한 인권 침해 사건이다.

‘아일랜드 보이즈’는 총 50분 분량으로 강제 

수용, 감금, 학대, 탈출과 죽음의 이야기를 기록

과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다큐멘터리에

서는 선감학원에서 겪은 학대와 인권 유린, 탈출

과 죽음,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트라우마를 증언

하는 인터뷰와 관련 장면들이 담겼다.

김광동 진화위 위원장은 “선감학원 사건은 현

대사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사건으로, 폐원 42년 만에 제작된 이번 다큐멘

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선감학원 다큐멘터리 ‘아일랜드 보이즈’ 공개

제작기간 1년 피해생존자들 증언 담은 육성 다큐

제주4·3유족회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오임종)는 

지난 12월 2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 강당에서 선거

직 임원 선출을 위한 임시총회를 열었다.

임원 선거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에 김창범 현 

회장, 상임부회장에 양성주 현 외무부회장이 당선됐다. 

김창범 회장은 연임이며 당선자의 임기는 2025년 2월 

1일부터 2027년 1월 31일까지 2년이다.

김창범·양성주  당선자는  ▲4·3특별법  개정  추진

(4·3왜곡 및 명예훼손 처벌 조항 신설, 희생자 범위 

확대, 유가족 위자료 지급 조항 신설 등) ▲국립트라

우마제주센터 국비지원 근거 마련 ▲4·3기록물 유네

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족 복지 지원 확대 적극 

추진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김창범 회장은 “제주4·3의 남은 과제를 위해 4·3특

별법 개정 운동에 적극 나서겠다”며 “희생자와 유족

의 복지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4·3유족회 감사에는 박영수·정순호 후보가 당

선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김창범 회장 - 양성주 상임부회장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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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삼과 예술

새로나온 책

진행중인 전시

고딕 X 호러 X 제주

딸 – 어멍 – 할망 그리고 기막힌 신들

빗물 외 6명 ┃ 빚은책들

2024. 11. 25. ┃ 17,000원  

선흘체육관  

2024. 12. 1. ~ 12. 30.  

성인 2만 원, 청소년 1만4천 원, 

어린이 1만 원, 65세 이상 무료

‘똘, 어멍, 할망 그리고 기막힌 신’ 전

시는  제주  할머니  11명의  삶과  기억

을 담은 200여 점의 회화 작품을 선보

인다. 일제강점기, 4·3, 한국전쟁, 산업

화 등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할머니들

이 각자의 경험을 화폭 위에 펼쳐놓았

다.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들은 할머니

들과 함께하는 드로잉 워크숍이나 예

술 창고를 순회하며 작품과 관련된 이

야기를 들을 수 있는 예술 투어에 참여

할 수 있다.

‘장르 소설이 사회와 역사를 다룰 수 

있을까?’ 호러 작가 7명이 의기투합한 

앤솔러지 『고딕×호러×제주』는 이 의

문에  대한  답이다.  세상의  이면을  보

는 데 탁월한 호러 작가들과 함께 제주 

더 깊은 곳으로 여행해 보자. 이들은 설

문대 할망과 그슨새, 애기업개 등 제주

의 신화와 민담부터 이재수의 난, 결7

호 작전, 4·3 사건 등 많은 역사적 자료

를 찾아 새롭게 해석했다. 제주 반 바퀴

를 도는 이 여정은 아름다운 현실의 섬

과 서늘한 공포의 경계로 우리를 천천

히 빠져들게 할 것이다.

주요 기증 기탁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샌프란시스코협의회는 9월 5일 오전 4·3평화공원에서 참배하고 기탁금을 전달했다. 최

점균 회장은 “샌프란시스코협의회는 4·3 알리기와 세계화를 위해 작은 정성을 보태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국내 228개, 해외 45개 지역협의회를 운영하며, 평화통일에 관한 여론 수렴과 공

감대 확산을 담당하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샌프란시스코 협의회, 1백만 원 기탁

제주4·3평화재단 조미영 이사, 1백만 원 기탁

제주4·3평화재단의 조미영 이사는 10월 21일 재단에 1백만 원을 기탁했다. 조 이사는 “이번 기탁이 4·3유족들

의 장학금으로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조미영 이사는 제주 출생으로 1998년 4·3연구소 간사로 활동을 시

작하며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참여했다. 2006년에는 4·3희생자 유해발굴 사업팀장으로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

을 주도했다. 2017년에는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전문위원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역임했

으며, 올해 4월부터 4·3평화재단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일본 거주 4·3유족 김영순, 500만 원 기탁

재외도민 오상희, 1천만 원 기탁

일본 도쿄에 거주중인 김영순 4·3유족은 11월 7일 

4·3평화재단에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사연을 전하고  

5백만 원을 기탁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재외도민인 오상희님은 11월 15

일  “4·3 고령유족과 4·3 예술 사업 지원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1천만 원을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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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기증 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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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배객 

광주 고등검찰청 신봉수 고검장 참배

(2024. 09. 04)

서귀포시청 부진근 자치행정과장 및 직원 참배

(2024. 10. 30)

서울 마포구의회 의원, 백남환 의장 참배

(2024. 10. 31)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샌프란시스코협의회 참배

(2024. 09. 05)

심우정 검찰총장 참배

(2024. 10. 30)

독일 에터스베르크 재단 참배

(2024. 11. 04)

주요 참배객 

2024년 12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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