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책자 표지(인쇄용).pdf 1 2021. 9. 29. 오후 5:11
4・3 대하소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은 일찍이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습니다.역사가 없는 곳에는 인간의 존재가 없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
억을 말살당한 제주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
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 주민들이 스
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4・3평화기념관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소〉로 ‘기억의 자살’을 막는 방주
와 같은 곳입니다. 4・3의 온전한 기억을 전승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동굴로 가다
마주하는 백비・5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해방, 벼락처럼 왔지만・6
미군정 시작되다・6
자치의 섬, 제주도・8
4·3의 도화선, 3·1절 발포・10
민·관 총파업으로 맞서다・11
미군정 탄압의 시작・13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1948년 4월 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15
4·28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17
유일하게 거부된 5·10 선거・18
브라운 대령 총사령관으로 파견・22
6·23 재선거도 무산・23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광란의 바람, 제주도를 불태우다・25
초토화의 배후, 미군 수뇌부・30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사람들・34
전쟁이 몰고 온 또 다른 학살 ・35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끝나지 않은 멍에, 금기된 역사・37
험난했던 진실 찾기・38
4·3을 역사의 무대로! 특별법 제정・39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다
대통령 사과와 국가기념일 지정・41
화해운동, 과거사청산 모범이 되다・42
전진하는 정의! 특별법 개정・43
남겨진 이야기・45
CONTENTS
한눈에
보는
4·3평화기념관 핸드북
4
역사의 동굴로 가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에
서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보기 드문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찬란한 풍광 이면에 한과 눈물로 점철된 역사가 있다. 제주인들은
70여 년 전, 해방공간에서 남북 분단을 막으려고 온몸으로 나섰다가 참혹한 희
생을 치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반세기 동안 ‘없었던 역사’처럼 그 진실이 은
폐됐다.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 제주도는 한때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
지만, 그 후 오랫동안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금단의 섬이기도 했다.
그러나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제주사람들의 기억투쟁은 계속
됐다.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잡은 제주4·3평화공원은 그 투쟁의 결정체이다.
공원의 핵심시설인 제주4·3평화기념관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4·3을
담은 진실의 그릇이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은 4·3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꾸며졌다.
역사의 동굴 이 동굴로 들어가면 4·3의 역사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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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는 백비
첫 만남은 역사의 동굴에서 시작된다. 1층 진입부의 경사진 긴 터널은 제
주섬에 지천으로 널린 용암동굴을 옮겨놓았다. 화산섬인 제주도에는 동굴이
많다. 4·3 당시 수많은 제주인들이 살기 위해 산으로 오르거나 동굴로 숨어
들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70여 년
전 4·3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만나는 ‘백비’.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누워 있다. 백
비는 흰 비석이 아니라 빈 비석을 뜻한다.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
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백비 이름없는 비석으로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고 있다.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해방, 벼락처럼 왔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
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서 벗어나자 한반도에 자주적
인 독립국가 건설, 더 나은 사회
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차올랐
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과 새로
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벼락처
럼 왔다가 한순간의 꿈처럼 사
라져갔다. 해방의 날은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준
38선 분단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해방은 연합국의 2차 세계대
전 승리에 힘입었기에 우리 민족 스스로의 결정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주둔함으로써 원하지 않았던
분단 상황이 시작됐다.
미군정 시작되다
미군은 1945년 9월 7일 “본
관 휘하의 전승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oc-
cupy)한다”는 맥아더 포고문 1
호를 발표하며 한반도에 들어왔
다. 9월 9일 서울 조선총독부 건
물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열
6
해방의 감격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과 함
께 풀려나면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38도 분할선 미국과 소련이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다.
7
렸고,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
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해방 당시 제주도에는 7만 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이 있었다. 1945년 6월,
민간인 12만 명을 포함해 20여 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속에 오키나와
“천신만고로 수년 동안 공들여 참전을 준
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
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
교체되는 점령군의 국기 서울 조선총독부에서 패망한 일제의 일장기와 진주한 미군의 성조기가 교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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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미군에 함락당하자, 일본군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
한 최후의 보루로 제주도에 대군을
배치하고 온 섬을 요새화했다. 일
본군은 미군이 상륙하면 한라산 밀
림지대로 숨어들어 마지막까지 유
격전을 펼친다는 작전까지 세웠지
만 종전이 앞당겨지면서 제주도에
서의 ‘제2의 오키나와전’은 겨우 면
할 수 있었다.
미군은 9월 28일 제주도에서 일
본군 항복조인식을 따로 가졌다. 이
섬의 군사전략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군정업무를 담당한 59군
정중대(중대장 스타우트 소령)가 제주섬에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미군정은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가 하면 일제 관리와 경찰
을 적극 등용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면서 민심을 자
극시켰다.
자치의 섬, 제주도
해방이 되자 일본 공장과 전쟁터에 끌려갔던 제주도 청년들이 줄이어 고
향으로 돌아왔다. 한 해 동안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6만 여 명이 귀
향한 것이다. 민족적 차별을 몸소 체험했던 이들은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우
자는 열망이 강했다.
그들이 고향에 돌아와 먼저 한 일은 자치활동과 교육활동이었다. 자치활
동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곧 이어진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표출됐다. ‘인민위
원회’ 하면 좌파 조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
미군의 대일 공격 예상루트 제주도를 점령하는 계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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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주민자치위원회 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
었고, 특히 제주도인민위원
회는 제주에 주둔했던 미군
정 중대와도 사이가 좋았다.
교육활동은 ‘배워야 한다’
는 슬로건 아래 마을마다 앞
다투어 학교를 세우는, 주
민들의 자발적인 학교세우
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1947년 미군정이 남한 각 지역의 교육수
준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지금의 제주시인 북제주군이 전국에서 1위를 차
지한 놀라운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1920년대 오사카를 중심으로 중공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노동자가 필요했다. 일제는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를 오
고 가는 정기 여객선을 띄워 제주 청·장년 5만 명을 일본 노동시장에 끌어
들였다.
일본에서 일하며 온갖 민족적 차별과 설움을 맛본 제주 청년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동생, 아들 등을 일본에 불러들여 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독립의지가 강했고, 실제 항일운동에 뛰어든 제주의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해방 후 제주도인민위원회는 항일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하면서, 친일행적
이 현저했던 인사를 제외하고는 좌·우파 모두 다 참여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좌익 주도의 중앙, 또는 타
지방과 달리 독자적인 노선으로 온
건한 정책을 추진한 까닭에 존속기
간 역시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 그
러나 미군정과의 긴밀한 관계도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나
민주주의 민족전선 건국 5칙
10
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4·3의 도화선, 3·1절 발포
제주4·3특별법은 4·3의 시작을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사건
으로 규정하고 있다. 1948년 4월 3
일이 아니라 1947년 3월 1일을
4·3의 기점으로 보는 것은 3·1절 경
찰 발포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
된 미군정의 탄압이 4·3 봉기의 주
요한 원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아 감격의
만세를 불렀지만, 1947년이 되어도
되찾은 ‘우리나라’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8선 이남에는 미군
이 통치하는 미군정만이 존재할 뿐
이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 조
짐이 나타나면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점차 멀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이에
1947년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다. 온 겨레가 “통일독
립 전취하자!”는 슬로건 아래 뭉친 것이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
절 기념식에는 3만 명에 이르는 인
파가 물결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탐
라 개벽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
였다.”며 들떠 있었다.
기념대회가 끝난 후 일부 청년들
발포 강요배 作, 군중을 향해 조준 사격하는 경찰.
피살 강요배 作,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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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행렬이 제주경찰서가 있던 관덕정 광장을 벗어
난 오후 2시 45분께, 총성이 울렸다.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는
데도 기마경관이 그대로 가려 하자 주변 구경꾼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순간 총탄이 날아온 것이다.
경찰의 발포로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 초등학교 학생, 40대 농부 등 6명의
민간인이 숨졌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검안 결과,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 총탄이 박힌 사실도 확인되었다.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가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하기는 커녕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시
위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잡혀간 사람들이 고문당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주도민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민·관 총파업으로 맞서다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도민의 분노는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은 제
주도청부터 시작해 법원, 검찰 등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
교로 퍼져나갔다. 상점도 문을 닫았다. 16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파업
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제주신보사는 희생자 유족을 돕기 위한 조위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했다. 발포는 제주경찰이 아
“피탄자는 관중” 도지사 박경훈 씨 담(談)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
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 《독립신보》, 1947. 4. 5.
12
니라, 일주일 전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역
실정을 잘 모르는 응원경찰의 이런 과잉반응은 당시 응원경찰대의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비롯되었는데, 미군정도 이를 알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6년 가을(대구 10월 항쟁) 좌익 폭도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란 표
현을 쓰고 있다. 이런 심리상태의 응원경찰대를 제주에 파견했다가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강요배 作.
제주도청 공무원 파업 요구조건
1) 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2) 발포 책임자 및 발포 경관을 즉시 처벌할 것
3) 경찰 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4)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5)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6)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지양할 것
- 《제주신보》, 194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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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보고서는 또한 “총파업
에는 좌·우익 모두 참가하고 있
다”고 기록하면서 파업의 원인
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
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
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색안경을 쓰고
제주사람들을 의심했다. 제주
섬을 ‘레드 아일랜드’, 즉 ‘붉은
섬’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군정 탄압의 시작
제주도 발포 현장에 왔던 미군 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이 빠지고, 3월
14일부터 미군정의 한국인 경찰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이 전면에 나섰다. 그
는 응원경찰 421명을 거느리고 제주에 온 후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경무부 차장 이경진은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고
공표하는 등 제주도 상황을 이념적 시각으로 몰고 갔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됐고,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
의 제주도민이 검속됐다. 미군 감찰 보고서를 보더라도, 검거선풍으로 3.3
평의 작은 유치장에 35명을 가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감자들은 앉지도 못
한 채 서서 견뎌야 했다.
미군정은 3·1 발포사건 처리 과정에서 제주도 군정장관, 도지사, 경찰 수
뇌부 등 고위 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했다. 관공서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작업에 착수해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물갈이했다. 파업에 동
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됐다.
그리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3·1사건 희생자유가족 조위금 모금 社告 《제주신보》, 1947.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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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심지어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
하기 시작했다. 서청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
을 자극했다.
미군정이 임명한 신임 도지사 유해진은 미군 보고서에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라고 기록될 정도로 편향된 사람이었다. 그는 제주에 부
임하면서 호위병으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1947년 8월에 접어들면서 미군정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부터 많
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떠났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피신하기 시작했다.
1948년 3월 제주에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대정면 영락리 청년 양은하가 경찰의 고
문으로 희생됐다. 3월 말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폭행당
한 뒤 총살당했다.
1948년 2월, UN이 ‘한반도 가능지역 내의 선거 실시’를 결정하자 전국이 요
동쳤다. 그것은 결국 남
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
했기 때문이다. 남한사
회는 38선 이남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
군정의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
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 백 년이고 아
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 고문치사 당한 양은하의 어머니 윤희춘(작고)의 증언
넘치는 유치장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에 설치된 당시 유치장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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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
자들도 “반쪽 조국은 안된다.”
고 소리쳤다. 2월 26일 전라
북도에서 26개 경찰지서가,
3월 1일 전라남도에서 10개
경찰지서가 피습을 당했다.
이런 소요는 경상도로 번졌
다. 당시 제주사회 역시 분
단을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
했다.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1948년 4월 3일, “탄압이면 항쟁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은 “탄
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슬
로건을 내걸었다.
서북청년회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4·3 발발의 한 요인이 됐다.
무장투쟁 12대 7로 결정
“탄압이 계속되자 1948년 2월 말, 조천면 신촌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
임자 등 19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도당 조직부장 김달삼이 무
장투쟁을 제기했다. 시기상조라는 신중파와 강행하자는 강경파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
어졌다. 끝내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
으로 삼았지, 경비대나 미군을 맞대응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한 것이나 장기전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잘
못했다.”
-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 출신 이삼룡(도쿄 거주. 작고)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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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앞서 본토에서의 빈번한 무장투쟁을 경험한 미군정은 제주사태
초기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응원경찰을 다시 제주에 보내서
경찰력으로 막으려 했다. 서청 단원 5백 명도 파견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
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됐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4월 17일 제주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경비대 군인들을 진압작전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제주주둔 9연대 이
외에도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다. 미군 연락기 2대도
제주에 보냈다.
딘 장군은 맨스필드 중령
에게 모든 진압작전을 통제
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게릴
라 지도자와 접촉해서 협상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맨스필드 중령은 9연대장 김
익렬 중령에게 게릴라 지도
자와 접촉할 것을 시달했다.
미군정장관 딘 소장(왼쪽)과 제주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봉화 강요배 作, 무장봉기의 새벽을 형상화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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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
김익렬 중령은 4월 22일 미군
연락기를 타고 한라산 곳곳에 평
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을 뿌렸
다. 4월 28일 드디어 대정면 중산
간지대에서 김익렬 연대장과 유
격대 총책임자 김달삼이 서로 만
나 협상을 벌였다. 협상은 유격대
의 무장해제까지 약속하는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4월 말에 이르면서 미군정의 진압정책이 강공으로 전환하는 조짐
이 나타났다. 4월 27일 광주 주둔 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미 24군단 작전
참모부 슈 중령 등이 제주에 내려와 상황을 점검했다. 이어서 4월 29일 군정
장관 딘 소장과 제6사단장 워드 소장이 동시에 제주를 시찰했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평화협상을 깨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졌다. 5월 1일
대낮에 제주읍내와 가까운 오라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들이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문은 불을 지른 청년들의 정체가 누구냐 하는 것과 방화현장을 미군 촬
영반이 마치 사전에 준비한 듯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서
<제주도
오라리 방화사건 추적기
우리 4·3취재반은 이 방화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라리를 누볐다. 주민 30여 명
을 만나 취재하는 가운데 마을 주민들이 지목한 방화범을 만나게 됐다. 그는 대동청년
단 단원 출신이었다. 방화사실을 처음엔 부인하다가 나중에 시인했다. 서청, 대청 단
원들이 경찰 트럭을 타고 오라리에 들어가서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틀 후 9
연대 조사반에 연행되어 모슬포 연대본부 영창에 갇혔다.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9연
대장이 된 박진경 중령이 자신을 풀어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경찰관으로 변신
했다. 오라리 방화사건 방화범이 경찰관으로 신분을 바꾸고 맹렬하게 토벌작전에 참
여했다는 것이다.
- 양조훈, 《4·3 그 진실을 찾아서》 중에서
평화회담의 주역 (왼쪽부터) 김달삼, 김익렬.
18
의 메 이 데 이 (May Day in
Cheju-do)
>란 선전용 기록영
화를 만드는 데 활용했다는 점
이다.
그 당시에 방화범의 정체를
놓고, 김익렬 연대장과 유격대
측의 “평화협상을 방해하기 위
한 경찰과 서청 등의 공작”이라
는 주장과 미군과 경찰 측의 “폭
도들의 소행”이란 주장이 서로 맞섰다. 진실은 역사 속에 파묻혔다.
그러나 사건 발생 40여 년이 지난 후,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심층 추적 결
과 방화사건의 방화범은 경찰의 지원을 받은 우익청년단 단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미군은 어째서 이런 행위를 ‘폭도 소행’으로 몰고 가면
서 영화까지 제작한 것일까?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를 총공격하라”고 경
비대에 명령했다. 평화적 해결 대신 무력에 의한 진압작전을 택한 것이다.
유일하게 거부된 5·10 선거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
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
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
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제주주둔 제59군
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제주
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
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
불타는 오라리 우익청년단이 방화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딘 군정장관과 미군정 수뇌부의 제주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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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딘 장관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사태는 계획된 국제적인 공산폭동’으
로 단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
어난 것은 경찰의 실책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
행하는 온건적인 작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딘 군정장관은 다음날 평화
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
령을 임명했다. 강경 진압작전을 위한 인사조치였다.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선거일을 앞두고 전국의 상황
산으로 간 주민들 1948년 5월 15일 미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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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의 5 ·10 강요배 作. 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에 설치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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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제주도 상황은 주민들이 선거에 반대해 대거 산에
오르는가 하면 선거 관리위원들이 사퇴하는 등 더욱 심각했다. 미군정은 서
울본부에서 미군 장교들을 제주에 파견해 선거함을 나르는 등 직접 선거 업
무를 독려했다.
당시 선거는 유권자 50%이상이 투표해야만 인정되는 제도였다. 그러나
제주도의 경우 북제주군 갑구 43%, 북제주군 을구 46.5% 등 투표율이 과반
수에 미달됐다. 즉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제주도 2개 선거구만 선거 무
효 처리된 것이다. 결국 제주도는 미군정이 실시한 5·10선거를 거부한 남한
의 유일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브라운 대령 총사령관으로 파견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미군정은 전면적인 대응에 나섰다. 미군 구축함 ‘크
레이그’를 제주 해안에 급파하는가 하면 경비대와 경찰 병력도 대폭 늘렸다. 수
하지 중장과 제주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브라운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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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서 창설한 제11연대 병
력을 5월 15일 제주에 파병
했다. 대구 제6연대 1개 대
대도 다시 제주에 보냈다. 5
월 18일 응원경찰 450명도
파견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
장은 5월 20일께 광주 주
둔 전투사령관 브라운 대
령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군 통치 지역에서 소요사태를 막
기 위해서 미군 고위장교를 전투사령관으로 파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이었다. 브라운 대령은 미군 고문관뿐만 아니라 제주에 증파된 경비대, 해
안경비대, 경찰 병력을 모두 지휘·통솔하는 지휘권을 가졌다.
그 무렵 서울 등지에서는 제주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억
압 때문에 민심이 폭발한 것이므로 그 원인을 치유해야 한다.”는 각계의 성
명이 이어졌지만 브라운 대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자회견
을 열어 “나의 계획대로 나간다면 약 2주일이면 평정되리라고 믿는다.”고 장
담하면서 “나는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고 강경 입장
을 보였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제헌국회의원 재선거를 1948년 6월 23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통위부(국방부) 고문관 로버츠 준장도 제주도에 내려와 진압작전을
독려했다. 브라운 대령은 재선거를 시행하기 위해 공언했던 ‘제주도의 서쪽으
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실제로 감행했다.
6·23 재선거도 무산
브라운 대령의 무차별 검거작전은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죄가 있
건 없건 관계없이 선거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들였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 준장과 경비대 간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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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주민들은 마을마다 보초를 세웠다. 군인이나 경찰
이 마을에 나타나면 보초들이 신호를 보냈고, 청년들은 무조건 달아났다.
잡힌 사람들은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연행됐다. 통위부는 1948년 5월
27일까지의 검거작전을 통해 3,126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노획한
총기는 일제 99식 소총 3정뿐이었다.
이어 발표된 미군 자료에는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검거된 사람이 5
천여 명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6월 12일 자의 한 신문은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는 약 6천 명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 검속자가 크게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연행된 사람들을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임시로 설치된 천막수용
소에 가두었다. 이 검거작전이 얼마나 무모했는가는 아래 석방증명서가 잘
말해주고 있다.
박진경 연대장은 브라운 대령의 무모한 검거작전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 덕에 부임한 지 한 달여 만에 대령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1948년 6월 18
일 새벽,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을 자던 박진경 연대장은 부하의
총에 피살되어 충격을 주었다.
이런 미군정의 강공작전에도 6·23 재선거는 실패했다. 단독선거를 추진
해온 미군정에게는 한반도 정책을 끝내 거부한 제주도가 눈엣가시 같은 불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석방증명서
“하기 서명인은 미국인과 조선인 합동취조
를 마쳐 1948년 6월 23일 석방함”(Un-
dersigned has been screened by US
and Korean personnel on June 23,
1948 and released)이라고 쓰여 있다. 6
월 23일 재선거가 실패하자 894번째로 석
방했다는 글자도 있다. 그런데 석방 당사자
인 ‘현용준’의 당시 신분은 어처구니없게도
오현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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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남한에서 실시된 5·10 선거가 제주에서 유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
던 미군 사령관들은 분개해했다. 그 이후 섬 주민들을 대상으로 ‘청소하는
작전’을 착수했다는 미국 《뉴욕타임스》의 보도기사가 이런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유혈 사태의 결정적 요인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고, 그 핵심에는
‘초토화작전’이 있었다.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광란의 바람, 제주도를 불태우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이어서 9월 9일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의 북한 정권도 공포됐다.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수용된 제주도민들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제주4·3
《뉴욕타임스》는 4·3특별법 제정 이후 4·3
에 대한 한국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본격
적으로 착수된 직후인 2001년 10월 24일
자에 ‘남한 국민들, 1948년 학살의 진실 찾
아 나서다’(South Koreans Seek Truth
About '48 Massacre)란 제목으로 대서
특필했다. 뉴욕타임스는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실시된 선거가 제주도에서만 유
일하게 보이콧되자 “남한에 있던 미국 사령
관들이 분개 했고, 일련의 사건 이후 남한의
미국 협력자들은 공산주의자 선동가로 여
겨지는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
했다”(American commanders in Korea
were furious, and after a series of
incidents their South Korean counter-
parts embarked on a campaign to
cleanse the island of supposed Com-
munist agitators.)고 보도했다.
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이
루지 못한 채, 남과 북이
저마다 따로 정부를 수립
함으로써 한반도 분단 상
황은 더욱 굳어져 갔다.
신생 이승만 정부는 자
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제주도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8월 24일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진 주한 미군도 제
주도 소요사태를 조속히 끝내기를 독촉했다.
4·3의 대량 학살극은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정부의 최고 지
령’을 받들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
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예고됐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중산간 지대에는 1백여 마을이
있었고, 수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제주도 전체면적의 80%에 이르는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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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한 지역에서 국제법에서 금지된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총살이
자행됐다. 소, 말, 돼지 등 가축들도 ‘폭도들의 양식’이 될 우려가 있다는 이
유로 몰살됐다. 중산간마을 가옥 4만 여 채도 토벌대의 방화로 불탔다. 그야
말로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10월 19일 제주도에 파병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동포
를 죽일 수 없다.”며 총부리를 돌려 일어난 여순사건, 11월 17일 제주도지역
에 내려진 계엄령은 이런 학살극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 계엄령은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선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이에 대해 “제9연대가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송요찬 연대장 포고문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
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종료기간 중 전
도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
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배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 《조선일보》,1948. 10. 20.
이승만 대통령의 제주도지구 계엄령 선포 문서 (1948.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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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강요배 作, 4·3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린 마을에서 쫓겨나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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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초토화의 배후, 미군 수뇌부
제주에서의 초토화작전은
한국군이 집행했지만, 그 배
후에는 미군 수뇌부가 있었
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48
년 8월 한미협정이 체결되면
서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취임한 로버츠 준
장이었다. 그에게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경찰에 대한 작
전 통제권도 주어졌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0월 9일 광주 주둔 제5여단 고문관 트리드웰
대위에게 제주도 작전의 즉각적인 수정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시했다. 이 지
시 이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됐고, 10월 17일 송요찬 연대
장의 포고문이 발표된 것이다.
그 해 6월, 송요찬 소령을 제주주둔 제11연대 부연대장으로 추천한 사람도
로버츠였다. 그는 송요찬을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9연대 군수주임의 증언
“통위부 군수국장실에 군수국장 커널 액튼 김 중령과 고문관 마쉬 소
령과 같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김 중령의 권한은 없었고 고문관의 사
인이 나와야 무기와 장비가 출고되었지요. 그런 장비를 인천에서 배
로, 때로는 기차로 목포까지 옮겨 제주도로 날랐지요. 우리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9연대 군수주임 출신 김정무(준장 예편)의 증언
미군 고문관 작전 지휘 러치 대위가 경비대 간부와 협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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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장교”라고 치켜세웠다.
주한미군은 제주도에서 진
행된 진압작전에 필요한 무기
와 장비 등을 지원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군
고문관의 결재를 받아야 비로
소 무기와 장비가 나왔다.
미군이 제주도 토벌작전에
얼마만큼 큰 관심을 갖고 있었
는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월 21
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 등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전제
로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하기 위해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제주도에서 참혹한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8년 12월 18일, 한국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에게 공한을 보내 “송요찬 연
대장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 성명을 통해 알리라”고
로버츠 고문단장, 한국 국방장관 등에 보낸 공한
“송요찬 중령은 섬 주민들의 당초의 적대적인 태도를 우호적·협조적
인 태도로 바꾸는데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런 사실이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크게 일반에 알려져야 한다.”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RG 554: 미군 작전명령서(1948. 12. 18.)
채병덕 참모총장의 답신
“송요찬 중령과 미 고문관은 제주도에서 훌륭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귀하의 제안에 근거하여 대통령 성명을 발표하도
록 추천할 것이다. 송 중령에게 적절한 훈장 수여할 것을 약속한다.”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RG554: 미군 작전명령서(1948. 12. 21.)
채병덕 참모총장 일행 제주시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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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유형 고길천 作, 4·3 당시 다양한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 조각 작품(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내).
요구했다. 이에 대해 채병덕
참모총장은 3일 만에 “송요
찬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답했다.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사람들
1948년 12월 말, 제주도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
대로 교체됐다. 초토화의 공
적으로 진급한 제9연대장 송요찬 중령과 마찬가지로 제2연대장 함병선 중
령도 일본군 지원병 준위 출신이었다. 제2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경험이
있었고, 특히 제3대대는 ‘빨갱이’라면 이를 갈던 서북청년회 출신으로만 이
루어진 부대였다. 함병선 연대장도 가혹한 진압작전을 폈다. 이때 4백 명에
가까운 마을 주민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북촌리 학살사건’도 일어났다. 그래
도 제주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으로 유재흥 대
령이 부임했다. 이때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던 1만
여 명의 피난민들이 있었다.
유재흥 대령은 “산에서 내
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사면계획을 발표했다. 나뭇
가지에 흰옷을 매어 만든 백
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온 하
산민은 8천 여 명에 이르렀
다.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이었는데, 여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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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하게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 지시가 기록된 국무회의록
하산민 강요배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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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에 달했다.
하지만 유 대령의 약속은 지켜
지지 않았다. 토벌대는 농업학교
운동장에 하산민을 집결시키고
유격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색출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1,66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았고, 판결문도 없
는 상태에서 사형, 무기형, 징역
15년형 등 중형을 내렸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제
주비행장에서 총살됐고, 나머지 형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
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런 불법적인 군법회의 수형
자는 1948년 12월 선고된 자를 포함해서 모두 2,530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몰고 온 또 다른 학살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밀려 속수무책으로 남하하던 이
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
인 학살극을 벌였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수형자들은 정치범이란 이유로 불법 처형
됐다. 그 대상은 군법회의 관련 수형자와 일반재판 수형자까지 포함하면 3
천 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됐다.
‘예비검속’이란 범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예비검속법’은 해방 직후 폐지됐
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불법적으로 대대적인 예비검속
을 실시한 것이다.
색출 농업학교 운동장에서 하산 주민들을 문초하고 유격대 협력자
를 색출하는 우익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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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 수형자들이 집단으로 처형된 ‘골령골의 학살’
제주경찰서·서귀포경찰서·모슬포경찰서·성산포경찰서 등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몇 백 명씩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은 계엄사령부의 지휘 아래 학살
됐다. 바다에서 수장 학살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 암매장됨으로써 유족
들은 그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모슬포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도 대표적인 예비검속 사망자들의
집단 매장지이다. 모슬포경찰서는 1950년 7월과 8월 예비검속자들을 ‘섯알
오름’ 옛 탄약고에서 총살했다. 희생자 중 몇 명은 유족들이 몰래 수습했지
만, 132구는 1956년까지 그대로 암매장돼 있었다.
뒤늦게 당국의 허가를 받은 유족들이 유해 수습에 나섰으나 유해들이 서
예비검속자 살린 문형순 경찰서장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1950년 8월 예비검속자들을 처형하라
는 해병대 정보참모의 명령서에 당당하게 ‘부당(不當)함으로 불이
행(不履行)’이란 글자를 쓰고 대량 학살을 거부했다. 말년에 가족
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문 서장은 ‘2018년 올해의 경찰영웅’
으로 선정됐고 제주경찰청 청사 앞에 추모흉상이 세워졌다.
‘不當함으로 不履行’ 처형명령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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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엉켜 그 신원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
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도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산포경찰서의 상황은 달랐다. 독립군 출신의 문형순 서장이 계
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거부해서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렸기 때문이다.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끝나지 않은 멍에, 금기된 역사
제주4·3특별법에 따라 2003년 확정된 정부 보고서인 《제주4·3사건 진상
제주공항 4‧3유해 발굴 현장 2007년부터 활주로 옆에서 유해 387구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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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보고서》는 4·3사건 인명피해를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다. 국무총
리가 위원장인 4·3위원회에서 희생자 심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2021년 현
재 위원회에서 결정된 희생자 숫자는 14,533명이다. 이 숫자는 심사 진행에
따라 계속 늘어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여성이 21.3%, 61세 이상 노인이 6.1%, 10세 이하
어린이가 5.8%에 달하는 등 전체 희생의 33%을 넘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
대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여기
에는 무장대 습격에 의한 피해도 포함돼 있다.
경찰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했다. 이로써 1947년 3·1
절 발포사건 이후 7년 7개월 만에 4·3사건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그러나
4·3으로 인한 피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4·3의 상처와 고통은 남겨진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었다. 희생자 유
가족들은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여 시련을 당했다. 고문피해 등
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후유장애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해체돼
버린 가족의 고통을 혼자서 감내해
야 했다.
험난했던 진실 찾기
4·3은 반세기 가까이 이념적 누
명을 쓰고 지하에 갇혀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고등학교 교과서
에 4·3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일어난 폭동사건’으로 기록되
어 있었다. 왜곡된 진상이 밝혀지
기까지는 험난한 여정이 이어졌다.
국사교과서 4·3 왜곡 보도한 기사 《제민일보》, 1991. 4. 3.
40
사회단체 활동가 선언’이 발표됐다.
이런 열기에 힘입어 정치권에서도 4·3특별법 제정에 발 벗고 나섰다.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
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드디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
하에 갇혔던 4·3이 역사의 무대로 나오는 토대가 마련됐다.
4·3특별법은 21세기 벽두인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됐다. 특별법 공
포 하루 전날 청와대에서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 온 유족·시민단체 대표 8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4·3특별법 제정 서명식
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
령은 “4·3특별법은 인권
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
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
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
자탑이 될 것”이라고 소
회를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의 4·3특별법 서명식
특별법 제정 촉구 시위 (서울)
41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다
대통령 사과와 국가기념일 지정
2003년 10월 15일 4·3을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제주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다. 이 보고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과거사를
재조명한 최초의 ‘법정보고서’였다. 여기서 법정보고서라고 강조하는 이유
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이 특별법 절차에 의해 진행됐기 때
문이다.
보고서 확정 후 <7대 대정부 건의안>이 채택됐다. 정부의 사과, 추모기념
일 지정, 교육자료 활용, 평화공원 조성, 생계비 지원, 유해 발굴, 추가 진상
조사와 기념사업 지원 등 후속 조치였다.
그 중 맨 먼저 실현된 것이 정부의 사과였다. 그
해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 반
세기 동안 고통의 굴레에서 살아온 제주도민과
4·3유족들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
과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
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
니다.”
2005년 1월 17일 제주도는 노무현 정부에 의해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됐다. 이제 제주도는 4·3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화해
와 상생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2014년에는 드디어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공식
선포됐다. 특히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한 4·3의 국가기념
일 지정이 진보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보수정권에서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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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화해운동, 과거사 청산 모범이 되다
대통령 사과, 평화의 섬 선포 등이 이어지면서 제주도민사회는 4·3 문제
를 풀기 위한 새로운 해법을 모색했다.
2003년 애월읍 하귀리 주민들은 위령제단 ‘영모원(英募園)’을 만들었다.
애국열사, 호국영령, 4·3희생자를 위령하는 추모비를 각각 세우고, 서로 대
립관계에 있던 군인과 경찰, 4·3희생자를 함께 위령하며 죽은 이의 통합을
통해 화해와 상생을 모색한 것이다.
돌짝밭이나 황무지에 뿌려진 것과 다름없었던 이 화해의 씨앗이 기적처럼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런 합동 위령제단 만들기 운동은 그 후
상가리, 장전리, 광령리 등 이웃 마을로 번져나갔다.
2013년 8월 2일, 그동안 갈등이 가장 심했던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경
찰 출신 모임인 제주경우회가 화해와 상생을 위한 ‘화해선언’을 발표했다.
두 단체 임원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이념적인 생각을 버리고 조건 없
는 화해와 상생으로 도민화합에 앞장서며 지난 세월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
해 노력한다.”고 선언했다.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이 화해선언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매해 화해선
여기 와 고개 숙이라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아라
- 하귀 영모원 비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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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을 한 8월 2
일 두 단체의
합동 참배로
이어졌다. 합
동 참배란 호
국영령이 모셔
진 충혼묘지와
4·3희생자 위
패가 진설된
4·3평 화 공 원
을 함께 참배하는 행사다.
이 행사에는 두 단체의 임원뿐만 아니라, 제주도내 기관장, 여·야 정치인, 시
민사회단체 관계자들도 동참하면서 그 의미를 더했다. 특히 2021년에는 제주
지역 군과 경찰의 총수가 함께 참배해 눈길을 끌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4·3 치
유를 위해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민과 관이 하나로 뭉쳤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전진하는 정의! 특별법 개정
2021년 2월 26일,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후, 21년 만의 일이었다. 이 개정안이 주목받
은 이유는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보상과 불법 군사재판 수형자 명예회복
을 위한 직권 재심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
적인 해결책 촉구가 주효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을 시작으로 2020년과 2021년 등 모두 3차례 4·3희
생자추념식에 참석함으로써 현직 대통령 추념식 참석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
다. 문 대통령은 4·3희생자추념식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너무 오래 지연
된 정의는 거부된 정의’라는 표현을 인용하며 여야 정치권에 4·3특별법 개
2021년 군경 총수까지 참석한 가운데 합동참배하는 유족회-경우회 회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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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개정된 특별법에는 이밖에도 정부 위원회의 추가 진상조사 재개, 행방불
명 희생자의 실종선고 특례, 가족관계등록부 정리, 4·3트라우마 치유 지원
등이 포함됐다. 이로써 4·3은 진상조사부터 피해자 배·보상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온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자리잡게 됐다.
2021년 2월 26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특별법 개정안 통과 기념행사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
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
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
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
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
들지 않을 것입니다.
- 2018년 4·3 70주년 4·3희생자추념식 추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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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야기
4·3은 완전히 해결되었을까? 아직, 여전히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한반
도 분단과 동서 냉전에서 비롯된 비극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
람들이 희생되었는가에 대해 아직도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비
무장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노인, 여성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는 점에서 더
욱 그렇다.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1949년 4월 당시 제주주둔 토벌대는 한국군 2,622
명, 경찰 1,700명, 민보단 5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무렵 유격대는 1백
명 미만으로 추산됐는데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미군사고문단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고도 조기 해결을 못하고 이 상황을 1954년까지 끌었다.
결국 4·3은 특정 지역의 역사와 전통, 주민의 정서 등을 무시한 채, 오로지
물리력을 앞세워 좌·우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만 몰고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엄청난 물리력을 동원해도 쉽게 제압되지 않음은 비단 4·3뿐만 아니라 세
2019년 6월 20일 열린 UN 4·3 인권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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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여러 분쟁지역에서도 뼈아픈 교훈이 되고
있다.
4·3 피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노무현 대통
령 2차례, 문재인 대통령 2차례 모두 4차례에 걸
쳐 대통령 사과가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 명예회복 절차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가해의 한 축인 미국의 입장은 무
엇인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2019년 6월 20일 뉴욕 UN본부에서 4·3 인권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노정치인 찰스 랭글
전 연방 하원의원의 인사말이 주는 울림은 컸다. 당시 아흔 한 살의 그는 한국
전 참전용사이면서 뉴욕주에서 모두 23차례 연방 하원의원(46년간 재임)에
당선됐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미동맹은 오랜 세월 속에서 든든해졌다. 그러나 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는 제주4·3 같은 과거사 문제도 진솔하게 풀어야 한다.”
4·3이 미국에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자는 뜻이 아
니다. 불행했던 과거사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찰스 랭글 전 미연방 하원의원.
동백(冬柏)은 추운 겨울에 피는 꽃
입니다. 오죽하면 꽃 이름에 겨울
동(冬)자가 들어 있겠습니까? 특
히 강렬한 붉은 꽃잎은 추운 겨울,
만물이 잠들어도 저 홀로 깨어 꿋
꿋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려 강
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하지
만 한겨울 하얀 눈밭에 만개한 상
태에서 어느 날 툭! 통꽃으로 지는
꽃이기도 합니다.
이런 동백이 4·3의 상징꽃으로 이
미지를 얻기 시작한 것은 강요배
화백의 4·3연작시리즈인 “동백꽃
지다_제주민중항쟁전”의 표지화
및 작품으로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작품은 전면에 동백이 통꽃으로 떨어지는 순간
을 포착한 작품인데, 작품의 좌측 상단부 원경에 하얀 눈밭에서 토벌대들이 몰려 있고
한 사내가 나대를 들고 내리치는 모습과 하얀 눈밭에 흘린 붉은 피가 보입니다. 작가는
동백을 당시에 희생당한 제주도민으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 후 동백은 4·3 상징꽃으
로 자리 잡았습니다.
왜? 동백이 4·3 상징꽃이 되었을까요?
발행일 초판 1쇄 2021년 10월
발행처 제주4·3평화재단
주소 63313 제주시 명림로 430 제주4·3평화기념관 전화 064.723.4350 팩스 064.723.4303
이메일 peace@jeju43peace.or.kr 국문홈페이지 jeju43peace.or.kr 영문홈페이지 jeju43peace.org
편집디자인·제작 도서출판 각(064.725.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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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표지(인쇄용).pdf 1 2021. 9. 29. 오후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