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작성자 : 메이아이 작성일 : 2022-06-16 조회수 : 822
‘한라산’이라는 시가 탄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재일동포 김봉현 씨가 일본에서 제주4‧3에 대해 쓴 <피의 역사>의 번역본을 어느 출판사에서 내기로 했다가 사장이 겁을 먹어 출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4‧3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본 <창작과 비평>에 실린 ‘순이삼촌’이에요. 작은 마을에서 수백 명이 학살당했다는 건데,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가?’라고 여길 정도로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고, 그래서 피부에 와닿지 않았죠. 고등학교 때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봤고 대학 때는 지하서클에 들어가 여러 책을 봤지만, 어디에도 4‧3에 대한 얘기는 없었어요. 그런데 <피의 역사> 번역본을 보고 밤새 부들부들 떨었어요. 그리고 아! 우리 현대사에 이런 혁명사가 있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외국의 혁명사만 공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먼저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시 가장 진보적인 거름출판사도 출판을 망설였어요. 내가 그때 수배 중이면서도 녹두출판사 기획도 하고 있어서 그 원고를 갖고 녹두출판사에 가서 설득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녹두출판사 사장이 ‘차라리 이 내용을 시로 써 보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제안 자체가 충격이었어요. ‘그걸 왜 내게 쓰라고 하는가!’ 나는 그걸 다 폭탄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처음엔 폭탄 운반자(번역본 전달자)였지만, 사장의 제안을 따르면 폭탄 제조자가 되는 거예요.”
번역본을 전해주는 건 ‘폭탄 전달자’지만, 시를 쓰는 건 ‘폭탄 제조자’가 되는 거네요?
“그렇지요.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요. 그래서 밤새도록 고민을 했어요. 이 폭탄을 받아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그런데 그때 스스로에 대해서 모멸감을 느꼈어요. 이 폭탄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될까? 이거 쓰면 자칫하면 폭탄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고 살아남으면 수십 년 감방에서 살다가 머리가 허옇게 돼서 나오지 않을까, 부모 생각도 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나니까 아주 소심해지고.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드러난 나라는 게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렇게 많이 고민했으면서, 어떤 생각에서 시를 쓰겠다고 결심했나요?
“이걸 내가 쓰지 않으면 평생 글을 못 쓸 것 같았어요. 그때 동기 부여가 두 가지가 있는데, 김지하의 시 ‘오적’을 보고 욕이 나오더군요. ‘아 ××, 이게 진짜 시다. 언젠간 나도 이런 시 쓰고 말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말이 씨가 된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는 절에서 겪었던 일 때문이에요. 외할머니가 남편을 둔 스님이어서 고등학교 방학 때마다 그 절에 가서 시도 쓰고 책도 읽고 했어요.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와서는 하루종일 면벽수행만을 하는데, 한여름에 더우니까 웃통을 벗고 벽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보니 스님의 등 뒤에 모기가 새카맣게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스님은 모기장도 싫다 하고. 모기향도 화생방 살생이라며 그것도 치워버리더라고요.”
그 스님과의 만남이 ‘한라산’ 시를 쓰게 된 계기인가요?
“방학 때라서 그 스님을 따라 전국 여행을 했어요. 제일 먼저 간 곳이 경상북도 청도에 있는 ‘운문사’라는 비구니 절이에요. 새벽 예불 때 법당에 들어가니까 내 또래 여고생 만한 나이의 비구니 스님 수백 명이 앉아 독경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장엄한 거예요. 저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또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렇게 한 곳에 몰입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러니까 나와는 차원과 세계가 다른 거예요. 그동안 나는 시에서 추구하는 어떤 세계가 없었거든요. 나는 어떤 시적 기교랄지 메시지랄지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간의 궁극이 뭔지 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다가 어린 비구니스님들의 독경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고 눈물까지 흘렸어요.
방학이 끝나가자 젊은 스님과 헤어지게 됐는데, 마지막 여행은 오대산 상원사 위에 있는 적멸보궁이에요. 그런데 나를 태워 준 다른 스님이 ‘저 스님 굉장히 위험하다. 자칫하면 크게 다친다.’고 걱정하는 거예요. 뭔 얘기냐면, 스님들의 수행 중 가장 위험한 게 하나가 있는 게 바로 혈사경(血寫經) 수행, 즉 자기 피로써 경전을 베껴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감성이 가장 예민할 때 ‘오적’시를 만났고, 혈사경을 하는 스님과 어린 비구니 스님들을 만난 거예요.
그들을 통해 어느 한 세계에 이루고자 그렇게 몰입하고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그 모습들이 나중에 ‘한라산’ 시를 써야 할지 망설일 때 딱 떠오르는 거예요. 내가 안 쓰고 다른 시인한테 맡겨서 쓰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 나는 뭐가 되나? 그게 참 그때 내 운명인데, 차라리 내게 오지나 말지.”
고등학교 때의 경험이 가치관이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줬다는 건데, 만약 2부를 썼다면 어떤 내용이 됐을까요?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의 처형 이후의) 전개 과정이 좀 더 가겠지요. 그런데 의귀리 전투, 또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망한 1949년 6월 이후에는 전투다운 전투를 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전력이 대등해야 싸움이 되는데 이제 사실상 어떤 정신적 싸움으로 들아 선 거지요. 1980년도 5월 26일 광주 전남도청에 500명이 남았어요. 그 500명의 시민군 대변인이 윤상원인데, 그는 외신기자들과 인터뷰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패배할 것이 분명한데 왜 우리는 여기를 떠나지 않는가? 우리가 백기를 들고 공수부대를 맞이할 수는 없지않느냐? 오늘 밤 우리는 패배하겠지만 역사는 승리자로 기록할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 정신의 근간이 4‧3의 정신으로 봐요. 그러니까 패배할 걸 알면서, 죽을 줄 알면서 왜 자꾸 산으로 올라갔느냐는 거예요. 죽을 줄 알면서 왜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떠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한라산’ 시 때문에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됐는데, 어떻게 체포됐나요?
“내가 수배 중일 때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소위 ‘6‧29선언’을 했어요. 그래서 연말에 대통령선거를 치러야 했는데, 안기부에서는 YS(김영삼)와 DJ(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려고 두 가지 계획을 세웠어요. 하나는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관여했던 인천의 노동운동팀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나를 그 수괴로 삼으려던 것이에요. 아무튼 경찰은 인천의 노동운동팀의 한 노동자를 고문해 내게 연락하도록 해서 나를 체포했어요. 그 노동자는 고문을 못 이겨 경찰의 작전에 따른 것뿐인데,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죄책감 때문에 자살했어요.”
체포돼선 어떤 일이?
“경찰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에 활용하기 위해 물고문을 하며 취조했어요. 그들은 큰 조직사건을 만들기 위해 ‘스물여덟 살짜리가 ’한라산‘을 혼자 썼을 리 없다.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배후를 대라?’고 추궁했어요. 배후가 없는데 어찌 배후를 말할 수 있겠어요. ‘김봉현 씨가 시켰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 분을 만난 적도 없는데. 내가 물고문이나 잠 안재우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지켜야할 게 몇 가지가 있었어요. 민청련 선전국, 유○○조직, 한○○, 이○○. 그때 내가 불지 않았으니 그들을 지금도 떳떳하게 만나요.
그런데 대선이 가까우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경찰들은 괜히 시인 하나 건드렸다가 혹시 후보단일화가 이뤄져 정권교체가 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걱정한 거지요. 그런데 오히려 민주화에 앞장서고 있다고 자부하는 변호사들조차 내 변호인이 되는 걸 거부했고, 고○, 백○○, 신○○ 등 문학계 인사들도 증언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분들이 ‘한라산 시는 문학작품이지 그걸 통해 이적행위를 한 것이 아니니 문학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해주길 바랐는데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어요. 그때는 내 정체를 잘 몰랐으니, 어쩌면 진짜 빨갱이거나 고정간첩이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마 그 분들도 민주화운동 관련자 변호하는 것과 진짜 간첩일지도 모를 사람을 변호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렇지요. 당시 사회에서 간첩사건에 엮이는 것은 민주화운동과 차원이 다른 혹독한 대가가 따르니까요. 그러다가 처음엔 변호인이 되는 걸 거부했던 홍성우 변호사가 마음을 바꿔 변호인이 됐어요. 주변 얘기 들어본 후, 이 사건 안 맡았다가는 민주화에 관한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판결문을 살펴보니 1심 재판장은 박영무 판사네요. 판사는 결국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징역형을 선고한 거 아니에요. 그때 검찰의 핵심 주장이 뭐예요?
“처음엔 나를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구성’으로 엮으려 했는데, 여의치 않자 ‘고무찬양’ 정도로 처리했어요. 황교안 검사는 내게 ‘영원히 콩밥을 먹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는 특히 내가 쓴 ‘항소이유서’를 보고 더욱 흥분했지요. 내가 항소이유서에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썼거든요. 변호사도 ‘당신 죽으려고 환장했어?’라고 말했고요.”
항소이유서에 굳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쓴 이유가 뭔가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예요. 난 ‘김일성 만세’ 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말할 수 있는 게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종착역이라고 봐요. 아무튼 항소이유서 때문에 검찰은 물론이고 법원도 발칵 뒤집혔어요. 그래서 황교안이 내게 더욱 강력한 처벌을 하기 위해 다시 조사했어요. 그때 나를 살린 게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이에요.”
항소심 판결을 전후해서 우리나라의 두 가지 큰 행사가 있었는데, 하나가 88올림픽이고 또 하나가 국제펜클럽대회지요. 미국의 뉴욕펜클럽회장인 수전 손택이 펜클럽대회를 활용해 한국정부를 압박한 것이군요.
“그렇지요. 미국에서 ‘이산하 구명위원회’가 조직됐고, 그다음에 유럽과 일본에서도 구명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수전 손택은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자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뉴욕펜클럽 명예회원으로 추대했어요. 그리고는 서울에 와서는 ‘이산하를 석방시키지 않으면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펜클럽대회를 무산시키겠다. 88올림픽도 힘들 거다.’며 압박했어요.
당시 수전 손택은 미국 <타임지> 선정 영향력 1위의 인물이었어요. 그러니 국제펜클럽대회를 주최하려던 보수 문인들까지 나서서 내 석방을 촉구할 정도가 됐어요. 그리고 황교안도 내게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못했지요.”
한라산 필화사건에 대해 작년 말에 재심청구를 했는데, 일반적으로 ‘재심’을 청구하는 사람들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했을 뿐 죄를 짓지 않았다.’ 또는 ‘부실 수사나 증거조작으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건데, 이산하 시인은 어떤 취지로 재심청구를 한 겁니까?
“간첩조작 사건은 증거물이 없는데 증거물을 조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경우는 ‘한라산’이라는 증거물이 있어요. 다만 그 증거물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건데, 이제 그 해석을 바로 잡으려고 그러는 거지요. 내가 시를 통해 주장한 것은, 4‧3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만들자며 선거를 거부한 거잖아요. 그래서 나를 계속 유죄로 남겨놓는 것은 4‧3정신의 순결성에 위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그 점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과거 군사정권 때엔 4‧3을 폭동 또는 공산폭동이라고 규정했고,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쓴 사람들은 이산하 시인처럼 처벌을 받거나 탄압을 당했습니다. 그 후 4‧3 제60주년인 2008년과 제70주년인 2018년에 정명(正名), 즉 올바른 이름을 붙이자는 논의가 크게 일어서 이제는 ’제주4‧3항쟁‘이라 부르자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이산하 시인은 4‧3의 정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광주5‧18은 ‘광주항쟁’, 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그런데 제주4‧3은 ‘4‧3 통일운동’ 또는 ‘4‧3통일항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은 어떤 내용입니까?
“인혁당 사건에 대해 쓰려고 해요. 제목은 ‘동백꽃’으로 정했어요.”
저녁 식사로 함께 쇠고기 먹으러 가지요. 그런데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했다고 하던데, 대장암 환자가 쇠고기 먹어도 되나요?
“지금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먹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