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제주표선 가시마을

제주표선 가시마을

가시리(加時里)는 한라산 남동쪽 해발 90~570m 고도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 전체 면적의 41.4%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하다.
1948년 4·3당시에는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새가름’, ‘종서물’ 마을은 재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가시리사무소 앞에는 마을이 재건될 때 도움을 준 안흥규, 안재호 선생의 동상과 공헌비가 세워져 있다.
가시마을 4·3길은 4·3의 아픈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가시리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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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표선 가시마을 [지도]
  • 고야동산 [사진]
    고야동산

    고야동산은 4·3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빗개)를 서던 장소이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이 불태워졌고 3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고야동산 부근에서 희생된 사람도 있다.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동산의 형태는 남아있다.

  • 한씨방묘 [사진]
    한씨방묘

    600년 전 가시마을을 설촌한 청주한씨 한천과 그 아들의 묘이다. 1392년, 한천이 제주에 들어오고 가시리에 정착하는데 대제학을 지낸 학자라는 것이 알려져 이웃마을 등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가시리를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됐다. 한씨방묘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었다.

  • 구석물당 [사진]
    구석물당

    구석물당은 북쪽에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제단이 있고, 제단 앞쪽으로는 50여 평 정도의 마당을 동백나무, 팽나무, 보리수 등의 나무와 돌담이 둘러싸고 있어 오소록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구석물당은 신목, 신석형 당으로서 주위의 나무나 암석은 물론, 이 주위의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것으로 여겨 무엇이든지 건드리지 못하도록 절대 금기한다. 구석물당의 제일은 음력 정월 그뭄날이며, 이 날은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정성들여 차린 제물을 지고 가는데 제일 3일 전부터는 육식을 금기하는 등 일체의 부정한 것을 가려 당제에 임하게 된다. 당의 제일은 정월 그믐, 6월 7일과 8일, 11월 7일과 8일이고, 당에 갈 때는 제물과 지전물색을 가지고 가며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 면암 최익현선생유적비 [사진]
    면암 최익현선생유적비

    제주도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은 고려 말 공양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 공양왕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한천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2년 제주에 들어온 한천은 가시마을을 설촌했다. 1879년 제주로 유배를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었다. 당시 비문과 비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마두릿동산 [사진]
    마두릿동산

    ‘마두릿 동산’은 4·3당시 마을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고야동산에서 세워진 깃대를 내리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곳에서 그 신호를 보고 마을주민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다. 4·3당시에는 마두릿동산에서 고야동산이 보였지만 지금은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시 경찰을 ‘검은개’라 부르고 군인을 ‘노란개’라고 부르던 것을 보면 마을주민이 외부인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종서물 [사진]
    종서물

    ‘종서물’은 4·3사건으로 소실된 마을이다. 가시천 서쪽 일대에 10여호가 살던 마을이었으나 소개령에 의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후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현재 종서물은 과수원이나 농경지로 변해버려서 그때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 새가름 [사진]
    새가름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마을이다. 한때 20여 가호에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기도 했던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인근 마을 등 주변으로 흩어졌다. 1949년 마을이 재건되면서 2가호가 다시 새가름으로 돌아왔으나 또 다시 마을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갑선이오름 [사진]
    갑선이오름

    산 모양이 미처 껍질을 벗지 못한 매미 굼뱅이처럼 생겼다하여 ‘갑선악’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적이 드문 까닭에 오름을 오르기도 쉽지 않거니와 햇볕이 잘 들지 않을 만큼의 빽빽한 밀림이 자리 잡고 있다. 금우, 제비꽃, 금창초, 주름잎 등 다양한 야생초가 오름을 덮고 있다.

  • 가시천 [사진]
    가시천

    가시리에서 발원하여 세화리로 빠져가는 총 7.4km의 길이를 갖고 있는 하천이다. 가시천의 일부는 원시림에 둘러싸여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고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깔려있어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장소이다.

  • 달래이모루 [사진]
    달래이모루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하며,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주민 12명이 희생된 곳이다. 이후 마을주민들은 소개하라는 명령에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거나 주변 산으로 피신 하거나 선택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