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아라동
제주 아라동
아라동은 4·3시기 1구와 2구와 나뉘어져 있었다. 1구에는 웃인다, 알인다, 구산, 대원, 장구, 산천단마을이 있었고, 2구에는 간드락, 월두, 걸머리가 있엇다. 1948년 11월 14일, 아라1구의 인다마을과 아란마을이 전소되자 대부분의 주민들은 2구의 여러 마을로 피나헀다. 당시 간드락과 월두, 걸머리에 약 7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있던 아라2구는 1구보다 보름 후에 초토화됐다. 그 후 아라동 주민들은 마을 주변에 숨어살거나 연고지를 찾아 제주읍내 여러 곳으로 흩어져갔다. 이런 와중에서 마을 주변에 머물러 살던 노약자들이 많이 희생됐다. 당시 아라동에는 간이학교가 있었으나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불태워졌다. 1구와 2구 자연마을 중 본동네와 멀리 떨어져 있던 웃인다와 10가호 미만의 작은 마을 재공동과 탯굴은 그 후 재건되지 않아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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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단 총맞은 비석
한라산신고비와 이약동 목사의 기적비 3기에는 곳곳에 4·3시기 총 맞은 자국이 선명하고, 오른쪽 2기는 가운뎃부분이 뭉텅 잘린 채 서있다. 이 비석들은 1977년 홍정표가 발굴하여 단경내에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 제단 입구에는 이약동 목사의 사적비가 새로이 건립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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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순 서장묘
문형순 서장님은 1949년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좌익 혐의를 받던 주민 백여 명을 자수시켜 훈방하였고, 1950년 성산포 경찰서장 재임 중에는 군 당국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며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이백여 주민의 목숨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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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새미 군주둔소
제주4·3사건 당시 11연대 1대대 군인들이 천막을 설치하여 주둔했던 군 주둔소 옛터다. 군인들이 설새미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오등리와 아라동 등 주변마을의 희생은 컸다. 죽성에 살던 한 주민은 이미 잡혀간 사위를 빼내려고 황소를 이끌고 찾아갔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군인의 밀고로 무참히 매맞고, 사위와 함께 1948년 11월 14일 총살되기도 했다. 죽성부대는 1948년 겨울 내내 중산간 일대 초토화 작전에 동원 되었으나, 9연대 숙청에 걸려든 제주 출신 군인들은 아군에 의해 집단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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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마을
오등리 죽성마을은 4·3당시 76여 가구 400명 내외의 주민들이 농·축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오등리의 가장 큰 마을이다.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이 죽성을 포함한 오등리 망르 전체를 초토화시킴에 따라 주민들은 산에서의 피신이나 소개 생활 중 희생당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1951년 아랫마을 오드싱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어려운 재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죽성은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끝내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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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인다라
아라1구의 웃인다는 전씨의 집성촌으로 전좌수 등 20여 호의 주민들이 살았다. 1948년 11월 14일,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전소됐다. 아라1구는 소개 몇 달 후인 1949년 봄, 살아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을 재건에 나섰다. 주민들은 인다마을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웃인다마을 주민들도 인다마을에 정착하게 되면서 웃인다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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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다 4·3성
1948년 11월 14일 소개령에 따라 피난 갔던 아라 1,2구 주민들은 다음해 5월게 고향마을을 재건한다. 당시 읍내에 피난 내려가 살던 주민들이 모두 동원돼 알인다의 공터 둘레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주민들은 다닥다닥 붙은 함바집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그 후 아라2구의 주민들은 1949년 12월 원두왓을 중심으로 당시 축성해 돌아갔고, 성 밖에 살았던 알인다 주민들도 같은 시기에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현재 아라동 주민들이 총동원돼 인다에 쌓았던 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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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막깨밧
1949년 아라1구 구산마을 주민들이 집단학살당한 곳이다. 구름과 개동에 4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던 구산마을은 1948년 11월께 초토화됐다. 주민들은 불타버린 집을 의지해 힘겨운 피난생활을 했다. 그러던 1949년 1월 14일, 경찰과 대한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구산마을을 덮쳤다. 마을 인근에 숨어살던 주민들은 너도나도 황급히 소나무가 우거진 이곳 양막깨밧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토벌대는 이곳까지 쫓아와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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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두경찰파견소
4·3당시, 마을 소개령에 따라 피난 갔던 아라동 주민들은 1949년 5월 인다마을에 성을 쌓아 집단생활을 했다. 그 후 1949년 12월, 간드락, 월두, 금천마을 등 아라동 2구 주민들은 월두마을에서 간드락으로 이어지는 성을 쌓았다. 경찰파견소도 이때 설치됐다. 파견소에는 경찰5~7명이 주둔했다. 주민들은 낮에 밭일을 하고, 밤에는 경비를 서면서도, 경찰들의 식사까지 마련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경찰파견소 옛터에는 현재 월두마을 복지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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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내
1948년 12월, 함덕에 주둔하던 군부대는 조천면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무장대에 협조했던 사람이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선전했다. 군인들은 자수한 청년들에게 3일만 토벌에 참여하면 양민으로 살게 해준다며 트럭에 태운 뒤 제주읍 농업학교로 끌고 가 감금했다. 그리고 일주일정도 지난 12월 21일 이곳, 박성내로 끌고 와 학살했다. 학살에 앞서 군인들은 값나가는 소지품은 모두 빼앗았다. 학살한 뒤에는 사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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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관음사는 제주4·3사건 당시 무장대 도당 사령부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949년 1월 4일 토벌대는 한라산 공습을 실시하였고 이때부터 관음사 일대는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격전지가 되었다. 관음사를 접수한 토벌대는 1949년 2월 12일 관음사 대웅전을 비롯한 7채의 모든 전각에 불을 질러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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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칸낭
4·3 당시, 마을 초토화 작전으로 집이 전소될 때 함께 불에 탄 나무이다. 마을 소개령에 따라 광양, 화북, 문또왓, 거림도 등으로 피난 갔던 월평리 주민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때 이 나무는 검게 불에 타 고사된 줄 알았으나 이후 푸른 잎을 틔우며 다시 살아났다. 수종은 동백나무이며 수령은 120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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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4·3성터
제주4·3사건 당시 사방에 흩어져 피신 생활을 하던 월평리 주민들이 1954년 10월, 마을 재건을 위해 돌아온 후 산담과 밭담을 등짐으로 날라 성을 쌓은 눈물 아득한 고난의 현장이다. 주민들은 마을 중심부에 둘레 700m, 높이 3m, 폭 1m의 성을 쌓아 집단 거주했는데, 축성작업에는 화북 주민들까지 동원되었다. 남문과 북문 2곳의 출입문을 만들었으며 성담 주변은 실거리 나무를 쌓아 외부에서 접근이 힘들도록 방어망을 설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