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라동
제주 오라동
오라동은 제주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천의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계곡, 드넓게 펼쳐진 대지에 열안지 오름과 민오름을 껴안아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오라리는 4·3 초기부터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 피해가 많았다. 1947년 관덕정 일대에서 발생한 ‘3·1발포사건’의 희생자 6명 중 2명이 오라리 출신이었으며 1948년 4월 한달 동안에 무장대와 경찰에 의한 주민 희생과 납치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후 4월 28일 국방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회담을 갖고 ‘72시간내 전투 중지’ 등 평화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연미마을) 방화사건’으로 인해 미군정은 강경모드로 전환하였다. 미군 촬영반은 이 사건을 비행기와 지상에서 촬영했다. 이 영상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제목으로 제주4·3사건의 초기 상황을 다룬 유일한 영상기록으로 남아 있다. 오라동은 4·3의 전개 과정에서 주민 24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어우늘, 해산이, 고지레, 선달뱅디 마을 등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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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설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乙巳條約)의 체결 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한일합방하자 12인의 유림들이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이곳에 모여 항일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조설대(朝雪臺)'를 음각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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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눌
어우눌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4ㆍ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일부 주민들은 오라리 등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눈 덮인 벌판을 헤매야 했다. 이 마을에서 당시 주민 100여 명(호수 23호) 중 약 13명이 희생되었다. 연미마을은 뒤늦게 재건이 됐지만 '어우눌'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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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월정사는 제주 최초의 선원이다. 4ㆍ3이 일어난 해인 1948년 12월 토벌대에 의해 월정사 건물 5동이 불태워졌고, 김석윤 스님의 아들 김덕수 스님이 토벌대에 끌려가 '박성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집단 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1949년 2월에는 관음사를 방화하고 내려오던 토벌대에 의해 법당마저 불태워져 월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다. 4ㆍ3이 끝나고 몇몇 스님이 월정사 터에 건물을 짓고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현재 월정사의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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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이동네
해산이는 연미마을회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4ㆍ3사건 이전에는 모두 10여 가구 5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살았으나 4ㆍ3사건으로 마을이 폐허가 된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버렸다. 곳곳에 깨어진 그릇조각이 널려졌고 집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뤄 집터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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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오라지석묘 1호)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돌멘, 고인돌이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돌배라는 전설도 깃들여져 있다. 외부의 모양은 시신을 안치하도록 판자 모양의 돌을 사용하여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올려 완성했다. 지석묘는 한반도 본토에서 제주를 거쳐 일본 큐슈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선사시대의 문화교류 또는 이동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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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달뱅듸
선달뱅듸에는 4ㆍ3 당시 7호의 주민이 거주했다. 1948년 11월, 토벌대의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를 해야만 했고, 불타버린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는 아직 그네를 매달아 타고 놀던 큰 나무와 마을 주민들이 드나들던 올레와 하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