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제주애월 소길마을

제주애월 소길마을

애월면 소길리는 중산간 마을 중에서도 오지로 4·3 시기에는 100여가호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소길리에서는 1948년 5월 초, 몸이 아파 집에 누워있던 고순흠이 다른 경찰 가족 2명과 함께 무장대에 납치된 뒤 장전리 포제동산에서 피살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에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소길리에는 1948년 11월 중순께 소개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은 각자의 연고지에 따라 해안마을로 소개했고, 일부 청년들은 토벌대가 무서워 소개하지 않고 마을 주변을 떠돌다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됐다. 1949년 봄, 소길리 주민들은 장전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그해 가을 당시 구장이었던 고치호의 노력으로 마을 복구를 허가받았다. 소길리 4·3성을 쌓는 데에는 주변 고내리와 신엄리 등지의 주민들이 협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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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애월 소길마을 [지도]
  • 소길리사무소 [사진]
    소길리사무소

    옛 이름은 쉐질이다. 소가 다니던 길이라는 뜻으로 제주어로 소를 나타내는 ‘쉐’와 길을 나타내는 ‘질’이 합쳐지며 생긴 이름이다. 19세기 초반에 소길(召吉)로 표기하였다. 소길리는 500여 년 전에 설촌되어 현재 430여 가호에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4·3당시는 100여 가호가 되었는데 1948년 11월 중순에 소개됐다가 1949년 가을경 재건됐다. 마을의 중심인 리사무소는 2010년 6월에 건축되었다.

  • 할망당 4·3성 [사진]
    할망당 4·3성

    할망당은 수령 400년이 넘는 팽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가족과 마을의 무사안녕을 비는 토속신앙처이다.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밑둥에 붙여 평평한 자연석으로 조그만 제단을 만들었는데 마치 물팡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다. 할망당 앞으로 마을을 재건하며 쌓았던 4·3성담의 일부가 남아 있다. 4·3성은 돌을 이용하여 높이 3미터, 두께 1.5미터 내외로 쌓고 3~4개의 출입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고, 둘레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민들이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보초(경계근무)를 섰다.

  • 소길리 경찰파견소터 [사진]
    소길리 경찰파견소터

    1948년 11월 중순경 소개되었다가 1949년 가을, 마을이 재건되며 설치된 경찰파견소가 있던 곳으로 1956년 경까지 유지 되었다. 파견소에는 경찰뿐만 아니라 보조요원으로 마을 청년 5~6명이 함께 근무하였다. 자체 경비를 위해 파견소 주위로 높은 성담을 쌓고 망루도 설치했다. 1952년 8월 10일 밤에는 식량확보를 위해 마을을 기습한 무장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북쪽 울타리는 파견소를 에워싸던 성담의 일부이다.

  • 멍덕동산 4·3성 [사진]
    멍덕동산 4·3성

    멍덕동산은 꽃동산으로도 불린다. 1948년 11월 중순 소개됐던 소길리는 1949년 가을 장전리, 고내리, 신엄리 등 주민들의 도움으로 마을에 4·3성을 쌓고 마을을 재건할 수 있었다. 성 안에 함바집을 짓고 생활했던 주민들은 성담에서 경비를 서는 등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멍덕동산 제일 높은 곳에는 보초를 서는 망루도 있었다. 당시 쌓은 4·3성의 일부가 남아있다.

  • 베나모를굴 [사진]
    베나모를굴

    베나모를굴은 고양이를 넣으면 고내 봉으로 나온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긴굴로, 4·3 당시 소길리가 소개되자 마을 청년 3명이 숨어 지내던 곳이다. 1949년 4월 18일에 이곳을 찾아낸 토벌대는 청년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자 굴 입구에 불을 질렀다. 청년들은 굴안에서 모두 질식사했다. 현재 입구는 막혀있다.

  • 윤남비 경찰주둔소 [사진]
    윤남비 경찰주둔소

    1951년 봄, 잃어버린 마을 ‘윤남비’ 알녘동산에 경찰주둔소가 설치됐다. 마을 주민들은 반강제로 동원돼 주둔소 성담을 쌓았는가 하면 경찰과 협조원들의 부식을 제공해야 하는 등 고역을 치렀다. 현재는 얕은 돌담만이 이곳에 주둔소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 윤남비못 [사진]
    윤남비못

    윤남비는 마소가 물을 먹는 윤남비못과 식수로 사용하는 윤남비물이 있어 한때 번창하기도 했으나 4·3 당시에는 3~4가호가 있었다. 아름드리 팽나무 아래에 제법 큰 윤남비못에는 마소에게 물을 먹이려는 테우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4·3으로 1948년 11월 중순 소개되었고, 1951년 윤남비 알녘동산에 경찰주둔소가 설치되어 이곳의 물을 이용했다.

  • 원동 주막번데기 [사진]
    원동 주막번데기

    원동은 예부터 제주와 대정을 오가던 웃한질 중간에 있던 원(院)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로 4·3당시에도 주막이 있어 오가던 사람들이 머무르곤 했다. 1948년 11월 13일 새벽, 군토벌대는 원동을 급습하여 ‘주막번데기(주막펀데기)’에 마을 주민과 행인 등을 집결시키고 60여 명을 학살했다. 이에 앞서서는 원동으로 이동하던 중 하가리 육시우영에서 하가리 주민 25명을 학살했다. 원동은 이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 원동 경찰주둔소 [사진]
    원동 경찰주둔소

    1949년 8월, 원동에 주둔했던 국군 2연대 11중대가 철수하자 경찰이 설치한 주둔소이다. 주민들을 동원해 사각형 모양으로 성담을 쌓고, 성 안에 숙소를 지어 경찰과 협조원 등 10명이 근무하는 등 규모가 컸다. 한라산 금족령 해제 후인 1957년까지 주둔하여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주둔소 중 하나이다.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 원동지 [사진]
    원동지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웃한질의 중간지점으로 4·3 시기에도 나그네가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던 마을이다. 원동은 지리적 여건 상 항상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대는 원동에서 1948년 11월 13일, 원동 주민들과 마침 원동을 지나가던 행인들을 무차별 체포했다. 원동의 상가리 지경에 가면, 재일동포 김화숙이 어머니 고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院址 표석과 제주특별자치도에서 4·3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4·3유적지 원동 표지판이 서있다.

  • 원동 군주둔지 [사진]
    원동 군주둔지

    원동 마을이 가까운 이곳에는 국군토벌대 2연대 11중대가 1949년 8월까지 주둔했다. 11중대는 1949년 3월 9일 노꼬메 오름에서 무장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군인들은 천막만 치고 주둔했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않다. 2연대가 철수한 후에는 주둔지 서쪽에 경찰이 원동주둔소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