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주요사건

광복 직후 제주도의 정세

1945년 8월 한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분단 상황이 이루어졌다. 광복 이후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으나 정치 지도자들은 좌우로 이념이 갈라져 대립하였고,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대립으로 치달아갔다. 결국 광복 3년 만에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곧이어 북한에도 또 다른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분단은 굳어져 버렸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제주도에 주둔했던 7만여 명의 일본군은 철수하고 군사시설은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일본에 건너갔던 6만여 명의 제주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했다.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됨에 따라 제주도 건준 또한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사회단체가 속속 조직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우선 치안 활동에 주력했다. 치안 업무는 주로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일과 토지·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각 면별로 국민학교·중학원 등을 설립하여 자치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했다. 미군정에 의해 행정이 실시되었지만 여러 마을에서 인민위원장이 이장이 되었고, 인민위원회는 마을 향사를 사무실로 사용했다.

인민위원회의 자율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실질적인 군정 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제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 결과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나갔다.

○ 미군정 당국 : 제주도인민위원회는“도내의 유일한 정당으로서, 모든 면에서 정부나 다를 바 없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평가하였다. (「자유신문」, 1946. 12. 19)

○ 「동아일보」, 寶庫 제주도 시찰기 (1946. 12. 21)
“세간에서 제주는 좌익 일색이며 인위(人委)의 천하라는 말이 있으나, 제주의 인위는 건준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 승격을 줄곧 주장하여 왔던 우익세력의 손을 미군정이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이후 도(道)수준에 맞게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 되었다.

미군정의 강경정책 강행은 도민의 반대에 부딪쳤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미군정은 경제정책에서 현상 유지를 위해 원활한 생필품 수급과 물가 안정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식량 생산이 감소하여 양곡이 부족한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가격도 폭등하였다. 식량난은 광복 직후 6만여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가 불어나 더욱 심해졌는데, 해결책으로 제시된 미곡수집 정책의 실패로 도민들의 원성은 높아갔다.

3·1사건과 민·관 총파업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은 주민 여러 명이 피범벅이 된 채 나뒹굴었고 결국 6명이 사망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이듬해 4·3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기점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은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로서 제주도 좌익진영은 이 날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다. 이보다 앞서 2월 17일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교육계·유교계·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 제주민전)이 결성되자 3·1절 기념행사 준비는 민전이 주도하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2월 23일 충남·북 응원경찰 100명을 제주에 급히 파견하여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방침과 집회 사전 허가 원칙을 정했다. 민전 의장단과 미군정 당국은 몇 차례 만나 협의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3·1절 행사는 당초 계획대로 강행되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다.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이 발포사건으로 제주도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 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좌익진영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폭로하며 희생자 구호금 모금에 나섰다. 이어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6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청은 3월 8일 합동조사반을 제주에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공식적인 진상 발표는 하지 않고 3월 13일 돌아갔다. 3월 14일에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내도하여 총파업을 와해시켜 나갔다.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해 총파업에 강경 대응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19일 담화문을 발표하여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갔다.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500명을 검속했다. 검속된 자들 가운데 5월말까지 328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52명이 실형을 언도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3·1사건 이후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미군정은 전 도민의 공동체적인 3·1절 기념식 참여와 3·10총파업 참여를 오히려 ‘빨갱이 섬’으로 인식했다. 이후 제주는 일방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4·3으로 가는 길목에서 제주 사람들은 고립된 작은 섬에서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4·3으로 가는 길목

미군정은 3·1사건 처리 과정에서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했다. 1947년 3월 31일 제주경찰감찰청장에 김영배를 임명하고, 4월 2일에는 군정장관을 스타우트 소령의 후임으로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으로 교체했다. 4월 10일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으로 극우 인물 유해진을 임명했다.

미군정은 관공서와 교육계에 대한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파직시켰다.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도 파면되었다. 이때 철도경찰 245명을 모집하여 제주도에 배치시킴으로써 4월말 제주도의 경찰 병력은 500명에 이르렀다. 서북청년회(약칭 : 서청) 회원이 대거 제주도에 들어와 만행을 저지른 것도 이후의 일이었다.

8월에 접어들자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도지사 사임 후 제주민전 의장으로 추대된 박경훈을 비롯한 민전 간부 30여명을 구속했다. 많은 청년들이 검거를 피해 도외로 혹은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한라산의 동굴 등에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주민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그 과정에서 1947년 8월 안덕면 동광리에서 하곡수집 담당 공무원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됨을 막고자 했다.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사건’이었다.

1948년 초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 상태에 빠졌다. ‘2·7사건’을 거치면서 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조천에서는 3월 6일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혹독한 고문으로 숨졌고,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 끌려간 대정면 영락리 출신 양은하가 경찰의 구타로 숨졌다. 3월 말 한림면 금릉리에서는 청년 박행구가 서청 단원에 붙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좌익진영은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여러 번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경찰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함께 다가오는 5·10 단독선거 저지를 봉기 결행의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1948년 4월 3일 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무장대는 4월 3일 행동을 개시하면서 2개의 ‘호소문’을 뿌렸다.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매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다른 하나는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4·3’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산된다. 4·3사건 전 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내외였다. 무기는 4·3 당시 소총 30정에서 경찰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미군정의 대응과 평화협상

미군정청은 4·3사건이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라남도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또한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파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4·28 평화협상은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깨졌다. 하지 사령관은 4월 27일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M. W. Schewe) 중령을 제주에 보내어 사태 진압을 위해 귀순 공작과 무력 진압의 두 가지 방법을 함께 고려했다.

그러나 제주에서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자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군정중대장이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현재의 주둔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 등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강경 진압을 주장한 조병옥 경무부장과 선무귀순공작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김익렬은 문책을 받아 해임되고, 다음날 9연대장은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강경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사였다.

5·10 선거 거부

무장대는 5·10단독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했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제주도 선거구는 3개 중 남제주군 선거구만 선거를 치러 무소속의 오용국이 당선되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이 모자라 무효로 처리된 것이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2개 지역의 선거 무효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를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결국 재선거는 무기 연기되었다.

5·10선거의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탄압이 예견되었다. 미군정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경비대 병력은 기존 9연대 1개 대대와 부산 5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새로이 11연대 1개 대대와 6연대 1개 대대가 파견되어 모두 4개 대대로 강화되었다.

브라운 대령의 지휘 아래 박진경은 11연대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조병옥 경무부장도 담화를 발표하여 ‘강경 진압 방침’을 선포했다. 전국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450명을 추가로 파견하는 한편 서청 단원을 계속 증파했다. 경비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달했고, 6월 중순에는 무려 6,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서서히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고 일부는 입산했다. 경비대에서는 병사들이 10여명 씩, 혹은 몇 명씩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6월 18일에는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배경용·신상우 등이 체포되고, 군법회의를 거쳐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선거 결과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낸 무소속 중 우익 성향의 의원들을 끌어들여 국회에서 다수의 세력을 확보했다. 국회에서는 3권분립과 대통령중심제,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을 요지로 하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한편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다. 이는 북한의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었다. 4·3의 와중에 있던 제주도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장대의 강요에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백지날인’한 게 죄가 되어 총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북한 정권의 수립을 위해 남한의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 참석자 1,002명 중에는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대표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달삼은 이 자리에서 토론자로 나서 4·3봉기의 정당성과 성과를 정리한 연설을 했다.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정부의 강경 진압 대상이 되었다.

무장대 총책이던 김달삼이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무장대 조직은 제2대 무장대 사령관이 된 이덕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초토화작전 실시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추천으로 제주에 온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19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였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송요찬 제9연대장의 포고령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조선일보」, 1948. 10. 2.

정부의 계엄령

제주도지구 계엄선포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단기 4281년 11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官報」 제14호, 1948. 11. 17.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문

1949년 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諭示文)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국무회의록」, 1949. 1. 21.

집단 희생과 ‘죽음의 섬’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代殺). 이러한 소개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수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 등은 ‘토벌대 진영’이라 하여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했다. 군 수뇌부는 2연대의 강경작전을 위해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우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을 군·경에 파견했다. 2연대의 3개 대대 중 3대대는 많은 서청 단원들로 편성되었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였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사건(1949년 1월 17일 육군 제2연대 3대대 병력이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350여 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도 2연대 3대대에 의해 집행되었다.

한라산 피난자의 복귀와 무장대 소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피신해 있던 은신처를 나와 삼삼오오 귀순하여 왔다. 귀순자들은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어린이·노인들도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다. 선무작전이 4월까지 수행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계속 속출 했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자를 합쳐 거의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 당국은 원래의 회유 방침을 무시하고 강경한 처리로 일관했다.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사형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세력이 이미 와해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주는 영향은 컸다. 이에 고무된 국방부는 제2연대의 활약으로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덕구는 경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루 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모슬포 양곡창고에 갇혀있던 250여 명의 검속자들은 8월 20일 밤중에 끌려나와 모슬포 섯알오름 기슭 탄약고 터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 뒤 1956년 3월 한림지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61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읍 금악리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대정지역 유가족들이 132구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해 묘역을 조성했다. 이 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산지항 앞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가 총살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서귀포경찰서에도 솔동산 근처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약 250명의 검속자들이 두 차례에 걸쳐 계엄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사선을 뚫고 살아나 일반재판 및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의 제주출신 형무소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7,335명이었고, 이 중에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0,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6·25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 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주사람 300여 명은 7월 초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 희생 되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는 그때 시신이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땅 속에 묻혀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제주출신 수형인 142명도 군·경에 인계되어 대구 달성군 가창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 총살은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형수가 아닌 재소자들을 총살한 것은 또 하나의 불법 학살이었다.

1947년 3·1사건과 뒤이은 총파업으로 상당수 제주도민은 피검되거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물 막은 섬에서 쫓기는 자의 도피처로 떠오른 곳이 일본이었다. 또 1948년 4·3 발발 이후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조그만 밀항선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4·3 사건 발발 후 제주도 도령(道令)에 의해 전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그 결과 해상교통이 단절되고 해군에 의한 공중정찰과 해안마을의 경비, 야간 통행금지, 여행증명제, 계엄령 선포, 경찰·경비대·우익청년단의 증강 등이 이뤄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제주도에서 출항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증언을 통해 이 시기에도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사람들이 다수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제주인들은 광복 이후 부푼 꿈을 안고 귀향했으나 4·3사건으로 생활이 불안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 등지를 중심으로 모여 한을 품은 채 살아왔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북송(北送)’ 때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고향 제주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이념과 분단의 장벽 때문에 눈앞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4·3으로 인한 운명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제주도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제주 출신 해병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나섰고, 9월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1951년 3월 21일 기존의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및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하여 육군 제1훈련소를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했다. 이와 함께 미군 제5공군 군고문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도위수지구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지역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 육군 소속 건축물 및 시설의 보호에 관한 임무를 수행했다. 위수사령부는 제주도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군사시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재산 무장대 토벌작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50만 명에 이른다. 제1훈련소에도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입대했다. 6·25전쟁 당시 육군과 해병대에 입대해 참전한 제주 청년들은 1만여 명에 달한다. 정부에서 ‘빨갱이섬’으로 낙인찍은 제주도가 거꾸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패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때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했다. 지역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