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작성자 : 제주4·3평화재단 작성일 : 2023-01-30 조회수 : 649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지난 8월 25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서는 제주대학교 4·3학 석·박사 과정 개설의 의미와 추진방안’ 특별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토론회에서 허상수 박사는 “4·3학 협동과정을 석·박사과정으로 개설·운영할 만한 세계적·시대적·교육적 의미와 가치는 충분히 성숙했다”고 말하면서 “제주대 총장과 교수들이 학문적 의지와 정성을 한데 모아나간다면 4·3학 협동과정을 바탕으로 한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인권·평화·생태 연구 교육의 거점대학으로 부상할 수 있는 무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자리의 토론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4·3 관련 조사연구, 아카이빙 센터뿐만 아니라 학부생이나 대학원생 대상의 강좌를 개설하여 4·3 문제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킨 다음, 이들 중 일부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자로서 자라날 수 있는 교육-학문 생태계의 조성은 매우 시급하다.
이미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4·3 70주년이던 2018년 제주대학교에 ‘4·3학과 개설’을 건의하기도 했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주대학교에 4·3을 연구하는 전임연구원 채용 필요성을 제기해왔기 때문에 이번의 논의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 너무 늦은 감도 있다. 광주의 전남대학교가 5·18 연구소를 설립하고 관련 자료를 구축하고 오래전부터 학술지를 발간한 것처럼, 이러한 밑바닥 작업이라도 추진했더라면, 지금쯤은 제주에서의 4·3 협동과정 설치가 훨씬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제주도나 유족회 측에서도 유적지 정비를 하고, 기념관을 건립하고, 위령제를 지내는 데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4·3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관련 연구소 설립이나 연구자 육성, 학생 교육에는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제주4·3 사건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나, 국가 차원에서 역사적 기억으로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지는 못하다. 더구나 4·3 사건 관련 모든 행사는 거의 제주에서만 개최되고 좋은 영상물들도 주로 제주 사람들만을 대상으로만 유포되어 온 점이 크다. 결국 제주4·3의 세계화는커녕 아직 전국화도 별로 진척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4·3 사건의 역사성과 보편성, 세계성이 학술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고 관련 전문가의 풀도 제한적이며, 학생·시민 대상의 교육도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대학 정원 감축의 압박을 받는 지금, 특히 석·박사 이수자 이후 일자리 마련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대학 측이 이러한 대학원 과정 개설도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UN 평화대학을 비롯하여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에서는 대학에 설치된 평화연구소가 관련된 연구와 교육을 오래전부터 수행해 왔고, 이런 기관에서 배출된 석·박사 연구자들이 국제기구나 국제 NGO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연구 교육 기관이 거의 없고, 역사적 경험이나 국제적 위상, 경제력 등의 조건을 고려해 보더라도 오직 한국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소속된 성공회대학에서도 국내외 시민사회 활동가 대상의 인권 평화 관련 대학원 과정을 오랫동안 운영해왔고, 많은 청년들이 아시아 여러나라의 정부와 민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에 국제 제노사이드(Genocide) 학술회의에 2번 참가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아일랜드에서 열린 회의에는 그냥 청중으로 참가했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두 번째 회의에는 발표자로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국제적으로 저명한 제노사이드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주장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두 번 모두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아시아권 참가자가 거의 없었고, 한국이나 아시아에서 발생한 학살을 거론하면 자신들은 처음으로 원주민들의 항변을 들어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이 학술행사의 거의 반 이상의 주제는 주로 홀로코스트(Holocaust) 관련 주제였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행사 지원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마도 수천편의 논문과 적어도 수백권의 홀로코스트 학살 관련 논문이 나왔고, 미국의 백악관 앞 최고 중요한 위치에 설립한 박물관을 비롯하여 전 세계 곳곳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니 온 세계, 특히 서방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이나 구 유고지역 학살을 포함한 유럽지역의 학살만이 가장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로 알고 있는 것도 탓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2009년 말 필자가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임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진실규명 결정에 의거해서 보상금을 받은 어떤 유족이 내게 자신이 보상금으로 국제 제노사이드 대회 행사 유치를 후원할 의사가 있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유족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곧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국에 그것을 준비할 팀, 동원할 동료 연구자나 제자들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행사 경비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학술 연구 인프라, 즉 연구자가 없으면 그런 행사를 유치할 의미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제안을 한 유족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몇 년 후 사망했다.
제주4·3은 8·15 이후 국가건설 시기 발생한 항쟁과 폭력이자 한국전쟁을 예비한 사건으로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좌우한 가장 큰 사건이지만, 지구적으로 보면 탈식민, 동서 냉전의 격화, 그리고 국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ㆍ갈등ㆍ대량학살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있으며, 오늘 제주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상황을 초래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4·3 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과 동아시아 그리고 온 세계 사람들에게 인권과 평화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자료의 보고다.
1990년대 이후 제주에서 4·3 관련 수많은 국제, 국내 학술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논문이 쏟아져 나왔고, 생산적인 논의도 많았으며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들도 여러 번 초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를 위해 지출된 천문학적인 예산에도 불구하고 과연 제주4·3 사건에 책임 규명, 그리고 국내 국제적 인식, 특히 4·3의 이론화, 보편화 과정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술지 사이트에서 4·3 관련 논문을 찾아보면 한국학자가 쓴 몇 편의 논문 밖에 없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저명한 출판사에서 출간된 제주4·3 사건 관련 저작은 찾을 수 없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악수하는 브라운 대령>
그 동안 오랜 세월 4·3 이후 고통을 당해온 유족들이나 4·3 진상규명에 신명을 바쳐온 사람들은 여전히 미국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가 전 세계 사람들의 상식이 된 것이 반드시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까지 지칭된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지원과 투자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중요 대학에 거점 연구소를 만들고,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왔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결코 하루아침에 변하는 법이 없다.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도 중요 전문가들과 세계 시민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그리고 충실한 사실 재구성, 그리고 효과적인 선전 홍보 전략이 결합해야 한다.
즉 제주4·3 사건이 제주사람들의 역사, 희생자들의 기억만이 아니나 한반도의 역사, 한국인들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 사람들의 공통의 기억, 세계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어, 인권 평화의 미래를 개척하는 역사적 교훈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 권의 뛰어난 연구서나 수백편의 논문이 나와야 하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수 많은 다큐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고, 교과서도 제대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4·3 사건은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한국의 현대사의 중요한 일부이며,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 냉전초기에 발생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법학 등 개별 분과학문의 틀 내에서는 그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 종합적인 주제다. 더구나 4·3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문학, 심리학, 의학, 여성학, 사회복지학, 정신분석학, 지리학도 동원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원 협동과정은 반드시 관련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 여러 학과의 교수나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운영해야 한다. 4·3이 단순한 일회적 역사적 사건이 아니므로 인권, 평화, 화해, 치유와 같은 보편적인 학문의 틀 속에 위치해야 하고 4·3학은 한국학, 제주학, 동아시학의 연관 영역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여기서 훈련된 국내외의 석·박사들은 반드시 4·3 관련 연구기관에만 취업하기보다는 한국학이나 제주학 일반,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기관, 그리고 인권 평화 관련 국내외 정부나 민간에서 근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당장 석·박사 과정 개설이 어렵다면, 우선 연구소라도 먼저 설립해서 몇 사람의 전임 연구원이라도 채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것은, 만약 제주대학교가 대학 측의 행정적인 어려움이나 학과들 간의 이견으로 이번에도 연구소나 대학원 설립을 하지 못할 경우, 아예제주도의 민관이 함께 도립 아시아평화대학원 대학을 추진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
가 있다. 이 경우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교수나 연구원으로 초빙하고, 제주 지자체와 사회운동 단체가 함께 운영진에 결합하여 대학보다 훨씬 유연하게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제주4·3 연구와 교육을 축으로 하되, 지역학으로서의 4·3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분쟁과 갈증, 학살과 인권침해 등을 연구·교육할 수 있는 센터가 될 수 있다.
어쨌든 대학이나 대학 외곽에 별도의 연구·교육 기관을 설립하면 대만, 오키나와,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의 유사한 사건을 겪은 국내외의 청년들을 석·박사 학위과정은 물론 단기 연수과정을 통해 훈련 교류하게 할 수 있고, 미래의 학자, 정치가, 기자, 예술가들이 제주4·3에 대한 학습을 거쳐서 인권 평화 감수성을 가진 전문가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4·3 연구 교육기관 설립을 더 미룰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결정이 곧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비판적 사회학자로 학계와 시민운동 진영에서 활동하면서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0회 단재상과 제10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반공자유주의>, <대한민국은 왜?>,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 <사회학자 시대에 응답하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전쟁과 사회>,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 <분단과 한국사회>,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등이 있다.

